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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Chapter 4.
베임하리엘의 흑마법사, 제뮤엘



흑마법사들을 예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피와 시체를 마법에 사용하며 산 제물을 바쳐 마족을 소환한다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소문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도 없지만 일부는 와전된 것도 있었다.
애초에 지금 ‘흑마법사’라고 부르는 자들은 타락한 마법사가 아니라 베임하리엘의 암흑 신관이었다.
600년 전만 해도 베임하리엘의 교세는 굉장해서 전 대륙을 장악할 정도였다. 그러나 옛 제국의 멸망과 함께 그들의 세력도 약해졌다.
약 200년간 혼란기를 거쳐 테넨로베프란 이름의 새 제국이 탄생했다. 그리고 아체로베프라는 교단이 새로운 국교로 공표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몸에 배인 습관대로 베임하리엘 교단의 신전에서 기도하고 제단에 예물을 바쳤다.
국교로 공인된 것은 아체로베프 교단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체로베프 교단은 아직까지 대륙 곳곳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베임하리엘 교단을 처단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들은 제일 먼저 베임하리엘 교단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퍼뜨렸다. 사실 베임하리엘의 신관들은 사람들의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많이 해 왔다.
그들은 신성력과 마법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고 둘 다 신에게서 선물 받은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들은 특별한 마법을 쓰기 위해 피를 매개체로 사용했다.
이를 블러드 스펠(Blood Spell)이라고 했는데 피에 담긴 마나를 직접 사용하는 것이다. 그들이 마법에 사용하는 피는 몬스터나 동물의 피였지만, 사람의 피를 이용해 흑마법을 쓴다고 소문내기 좋았다.
또한 산 제물을 바쳐 신과 교감하거나 예언을 했는데 여기에도 동물을 사용했다. 이것 역시 사람을 산 제물로 바친다는 소문이 뒤따랐다.
결국 베임하리엘 교단은 사악하고 요사스런 종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고 베임하리엘이란 이름대신 ‘암흑 교단’이란 명칭으로 더 자주 불리게 되었다.
때마침 대륙에 대기근이 찾아와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이에 아체로베프 교단의 고위 성직자들은 그 책임을 베임하리엘 교단에 돌렸다. 사악한 저주로 대륙에 대기근을 불러왔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베임하리엘 교단을 원망하게 되었다.
꼼짝없이 사악한 흑마법사로 몰리게 된 베임하리엘의 신관들!
그들은 아체로베프의 성기사들과 제국의 병사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베임하리엘의 신관들은 광장에서 화형에 처하게 되었고 그들의 신전은 모조리 파괴되었다. 살아남은 극소수의 신관들은 험악한 오지에 숨어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아체로베프 교단의 추적이 계속 될수록 그들은 더욱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활동했고,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그럴수록 흑마법사에 대한 악명은 더욱 높아져 갔다.
제뮤엘은 베임하리엘의 암흑 신관, 즉 흑마법사였다.
그는 수년 전부터 헤인바이츠 산맥 깊은 곳에 은신하고 있었다.
헤인바이츠 산맥은 광룡 히젠하를로데의 영역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강력한 몬스터들이 여행자의 발길을 막아 주고 있어서 제뮤엘 같은 흑마법사가 숨어 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러나 제뮤엘은 스스로 원해서 이곳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교단에 죄를 짓고 이곳에 유폐되는 벌을 받게 된 것이다.
특별히 그를 감시하는 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을 벗어나면 곧 교단의 사도(Apostle)들에게 붙잡혀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사도들은 인간을 초월했다고 느껴질 만큼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인간이 아니라는 소문까지 있었다.
제뮤엘은 그들이 두려워 꼼짝없이 은신처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었다.
그가 은신처에서 주로 하는 일은 두 가지!
하나는 키메라(Chimera, 합성 마물)에 대한 연구였고, 다른 하나는 박해받는 동안 훼손된 교단의 마법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제뮤엘은 자신에게 맡겨진 연구에 혼신을 다해 몰두했는데, 그 이유는 만족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 내면 유폐를 철회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공을 세워 죄를 씻으라는 것!
그날도 평소 때처럼 연구에 몰두해 있던 그는 별안간 미칠 듯한 허기를 느끼게 되었다.
“이런! 벌써 날이 어두워졌구나. 오늘도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셈인가?”
이런저런 연구에 집중하다 보면 끼니를 거르는 것 정도는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순히 배가 고픈 것을 떠나 머릿속이 핑 도는 듯 현기증이 도는 것이 급히 영양을 보충해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제뮤엘은 황급히 주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미리 만들어 두었던 음식에는 곰팡이가 잔뜩 피어 있었다.
음식을 만드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는 건 번거롭고 더없이 귀찮은 일이었기에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이제는 거의 습관이 되어 버린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젠장! 또 뭔가를 만들어 먹어야 하는 건가?”
식재료를 찾아 창고로 향하던 제뮤엘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뭔가 신선한 걸 먹는 것이 좋겠어.”
그는 며칠 전에 계곡에 그물을 쳐 두었던 것을 떠올렸다.
까맣게 잊고 있긴 했지만 지금쯤 물고기 몇 마리 정도는 걸려 있을 것이다. 가끔은 신선한 특식을 먹어 주어야 몸이 쇠약해지지 않는다.
원래 건강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으나 요즘 나이를 부쩍 타는지 찬바람만 불어도 뼈가 시리기 시작했다.
생선 요리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편이라는 점도 그의 맘에 들었다.
고급 요리를 만들려는 것도 아니니 내장만 제거해서 구우면 그걸로 끝!
소금으로 살짝 간을 한 뒤 겉이 바싹바싹 해질 정도로 굽고 나면 그게 바로 세상에 둘도 없을 진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생선 요리를 먹는 것이야말로 현명하기 짝이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다른 걸 먹는다는 건 그에게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되었다.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린 제뮤엘은 즉시 계곡으로 향했다.
‘큼직한 놈이 걸려 있으면 좋겠는데…… 어디 볼까?’
물가에 도착한 그는 힘 주어 그물을 당겼다. 그런데 생각보다 묵직한 것이 뭔가 대어를 낚은 모양이었다.
제뮤엘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힘껏 그물을 끌어 올렸다.
“어? 뭐야…….”
당황스럽게도 그물에 걸린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15세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물속의 바위에 부딪혔는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실험에 쓸 인간이 필요했는데 잘됐군!’
대어가 아니라서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석 달에 한 번씩 실험에 쓸 노예를 보내 주긴 하지만 항상 턱없이 부족함을 느껴 왔기 때문이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물에 걸린 소년이 갑자기 눈을 뜨며 그에게 물었다.
“으음…… 어떻게 된 거죠?”
“그물을 확인하러 나와 보니 물고기 대신 네가 그물에 걸려 있더구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떠내려 와서 그물에 걸린 거냐?”
소년은 뭔가 곤란한 듯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물에 걸리는 바람에 멀리까지 떠내려가지 않았군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혹시 그물이 찢어졌으면 제가 변상할게요.”
그러자 제뮤엘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변상은 몸으로 때우면 되니까.”
“네? 그게 무슨…….”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그저 내 고상한 연구에 몸소 동참해 주면 되는 일이니까! 실험에 참여한다는 건 아주 단순하면서도 흥미로운 일이란다.”
소년은 그의 말을 듣고도 수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한 듯 순진하게 웃으며 더없이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거들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도울게요!”
제뮤엘은 음흉하게 웃으며 본색을 드러냈다.
“거들 수 있는 일? 물론, 네가 할 수 있는 일이지. 그저 척추를 뽑아낸 뒤 와이번의 등뼈를 이식하거나, 전신의 피를 트롤의 피로 바꿔 보는 등의 흥미롭고 유쾌한 실험에 동참하면 돼. 운이 나쁘면 죽게 될지 모르지만 아무렴 어때? 어차피 누구나 반드시 한 번은 죽기 마련이니 대범하게 생각하라고!”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소년, 아니 모용명은 사실 처음부터 제뮤엘을 경계하고 있었다.
순진한 척하며 그와 대화를 나눈 것은 사실 바닥난 내공을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일부러 말을 건 뒤 제뮤엘이 말하는 짧은 시간 동안 운기를 했던 것이다.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거냐? 아니면 정말 바보라서 못 알아듣는 거냐?”
“갑자기 왜 무섭게 구시는 거예요? 장난치지 말고 좀 풀어 주세요. 그물 때문에 꼼짝을 못하겠네요.”
“후후후! 못 알아듣는 척해도 소용없다.”
“그렇군요. 그럼 장난은 여기까지 하지!”
갑자기 표정을 바꾼 모용명은 그를 향해 기습적으로 쇄심장을 날렸다.
슈아아아앙―!
제뮤엘을 향해 무시무시한 장력이 뻗어 나갔지만 그는 다급히 마법을 펼쳐 공격을 막아 냈다.
“매직 실드!”
콰아앙!
장력이 실드를 박살내며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일어났다.
실드를 부수고도 기세가 죽지 않은 쇄심장(碎心掌)이 곧바로 상대의 심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제뮤엘은 실드가 깨지기 전에 마법 팔찌에 새겨진 마법을 사용했다.
“블링크(Blink)!”
파앗―
제뮤엘은 멀지 않은 곳으로 순간이동을 하여 쇄심장을 피해 냈다.
모용명은 그물에 엉켜 오직 두 팔만 자유로웠기 때문에 그를 쫓아가며 공격할 수 없었다.
“이놈! 마나 코어(Mana Core)를 익혔구나!”
“그러는 네놈도 요상한 기술을 쓰는군. 그걸 마법이라고 하는 거냐?”
모용명은 제논의 기억 중 극히 일부만 흡수했기 때문에 마법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제뮤엘은 모용명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흥! 마나 코어를 익혔다고 해도 이건 막지 못할 거다!”
제뮤엘의 장기는 전격 마법!
그중에서도 가장 자신 있는 마법 스펠을 한참 동안 캐스팅한 뒤 손을 뻗으며 외쳤다.
“기가 라이트닝!”
우르릉― 번쩍!
그러자 마른하늘에 굵직한 번개 다발이 내리치며 모용명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모용명은 즉시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며 즉시 쇄심장을 펼쳤다.
슈아아아아앙― 파아앙!
장력과 뇌전이 서로 부딪히는 순간, 그는 두전성이의 신묘한 수법을 발휘해 번개를 조정했다. 번개의 각도가 꺾이며 곧바로 제뮤엘을 향해 직격했다.
“헛!”
깜짝 놀란 제뮤엘은 이번에도 마법 팔찌에 저장된 블링크 마법을 사용해 위기에서 벗어났다.
파앗―!
그런데 그의 팔찌에 박힌 마나석이 회색으로 변하며 빛을 잃었다.
마나석에 저장된 마나가 전부 소모되며 더 이상 블링크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순간 모용명은 손가락을 걸어 그물을 찢어 버렸다.
쫘악―
내공을 끌어 올리자 질긴 그물이 거미줄처럼 간단히 찢겨 나갔다.
그와 동시에 손바닥으로 수면을 내려 친 뒤, 그 반발력을 이용해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단 한 수에 제압한다!’
모용명은 정신을 집중에 벼락같이 장력을 펼쳐 냈다.
슈아아아아아앙―!
장력에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시무시한 기세가 일어나며 제뮤엘을 덮쳤다.
블링크를 쓸 수 없게 된 제뮤엘은 어쩔 수 없이 최대한 빨리 마나 스펠을 사용했다.
“매직 실드!”
콰아앙!
강맹한 장력과 부딪힌 실드는 얇은 유리벽처럼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그때 제뮤엘의 반지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법 반지에 저장된 아이언 스킨(Iron Skin) 마법이 자동으로 발동되며 그의 피부가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그 순간, 실드를 깨고 들어온 장력이 가슴에 명중했다.
파아앙!
“크아아악!”
마법으로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으로 갈비뼈가 부서지며 부러진 뼛조각이 폐를 질렀다.
만약 아이언 스킨이 발동되지 않았다면, 부서진 것은 갈비뼈가 아니라 그의 심장이었을 것이다.
“쿨럭!”
제뮤엘은 피를 토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나 모용명의 안색도 별로 좋지 않았다.
억지로 공력을 끌어 올리는 바람에 단전이 흔들리며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공이 부족한 상황에서 거듭 공력을 소모한 후유증이 갑자기 그를 덮친 것이다.
“으윽…….”
내상이 깊어지며 단전이 부서질 것 같은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였다.
단전이 부서진다는 건은 무림에게 사형선고와 같은 일이었기 때문에, 모용명은 즉시 운기행공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제뮤엘은 즉시 포션을 꺼내 반은 마시고 나머지 반은 상처에 뿌렸다.
치이익!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며 순식간에 부러진 뼈가 붙고 상처가 아물어 버렸다.
제뮤엘은 단전을 안정시키기 위해 운기행공을 하는 모용명을 향해 마법 스펠을 캐스팅했다.
“체인 라이트닝!”
우르릉― 번쩍!
모용명은 단전을 회복하는 중요한 고비를 넘고 있어서 그의 마법을 피하지 못했다.
파직― 파지지직!
장기와 골수를 파고드는 쩌릿한 고통에 그의 평정심이 깨지며 결국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악!”
모용명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모용명을 생포한 제뮤엘은 그를 지하의 은신처로 옮겨 왔다.
그는 수제에 모용명을 눕힌 뒤 쇠사슬로 바닥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특수하게 제조한 약물을 욕조 안에 적당히 채운 후, 붉은 병을 열어 트루 블러드를 몸 위에 뿌렸다.
트루 블러드(True Blood)란 혈액 속의 마력을 농축시킨 것으로, 블러드 스펠 마법을 펼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다.
수백의 꽃을 농축시켜 한 방울의 에센스를 만드는 것처럼 한 방울의 트루 블러드를 얻기 위해 엄청난 양의 피가 필요하다.
제뮤엘은 트루 블러드를 사용해 모용명에게 두 가지의 블러드 스펠(정신계 계열) 마법을 실험해 볼 계획이었다.
우선은 오빌리언(Oblivion) 마법으로 그의 기억을 삭제한 후, 인벤트(Invent) 마법으로 새로운 기억을 주입해 인격을 만드는 실험이었다.
원래 오빌리언과 인벤트 마법은 베임하리엘 교단의 마법이었는데, 박해를 받는 과정에서 블러드 스펠의 일부가 소실되었다.
제뮤엘은 비슷한 계열의 마법 스펠을 끼워 맞춰 옛 마법을 복원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만약 이 실험에 성공하게 된다면, 중요한 인물을 베임하리엘 교단에서 원하는 새로운 인격으로 바꿔치기 할 수 있으리라.
‘마법 스펠을 복원하게 된다면 유폐에서 풀려날 수 있겠지! 그리고 우리 교단도 손쉽게 간악한 아체로베프 교단을 쓰러뜨리고 옛 교세를 회복하게 되리라.’
그러나 이 실험은 아직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실험체가 미쳐 버리거나 죽어 버릴 뿐이다.
애초에 스펠의 일부분만으로 마법을 복원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기억을 삭제하는 오빌리언 마법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나, 새로운 기억과 인격을 창조하는 인벤트 마법은 조금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번엔 반드시 성공하고 말리라! 반드시!’
제뮤엘이 이처럼 인벤트 마법에 집착하는 것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
예전에 그는 부유한 상단을 운영하는 대상인이었다.
상단은 날로 번창했으나 그는 자식 복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전쟁터에서 첫째 아들을 잃고 둘째는 병으로 죽었으며 셋째는 도박에 빠져 지내다가 강도에게 칼을 맞고 비명횡사했다.
그래서 그는 시온이란 이름의 손자를 끔찍이 아꼈다. 둘째 아들이 낳은 시온이 이제 그의 유일한 혈손이었는데 이 녀석마저 병약한 아버지를 닮아 희귀병에 걸려 죽어 가게 되었다.
제뮤엘은 시온을 살기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게 되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손자를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급기야 흑마법사들의 괴기하고 비밀스런 마법에 의지하게 되었다.
시온은 흑마법사의 비방으로 3년을 더 살게 되었지만 결국 죽어 버렸다.
그 일을 계기로 베임하리엘 교단의 흑마법사가 되었지만 그 후로도 그는 손자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결코 버릴 수 없었다.
‘교단의 실전된 마법을 복원할 수 있다면 시온을 다시 살릴 방법도 분명 있을 거야!’
제뮤엘은 줄곧 원하는 마법을 찾지 못하다가, 기억과 인격을 새롭게 만드는 인벤트 마법 스펠의 일부를 발견하게 되었다.
급기야 집착과 광기에 사로잡힌 그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손자를 되살릴 수 없다면 만들어 내겠다! 완전히 똑같은 기억과 인격을 만들어 내고야 말겠다!’
그러나 같은 기억을 가졌다고 해서 똑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제뮤엘의 집착은 그저 헛된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으음…….”
응축된 피의 차가운 감촉에 모용명은 눈을 떴다.
창자가 갈가리 찢긴 듯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으나 다행히 단전(丹田)은 깨어지지 않고 무사했다. 중요한 고비에 충격을 받고도 단전이 부서지지 않은 건 천운이 따른 일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되찾고 보니 비릿한 피 냄새와 정체 모를 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
“지금 뭘 하려는 거냐?”
제뮤엘은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해 블러드 스펠을 완성시켰다.
“오빌리언(Oblivion)!”
파아앗―!
주문이 완성되는 순간 트루 블러드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모용명은 머릿속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헤집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크아아아악!”
오빌리언 마법이 그의 기억을 파괴하려 했지만, 모용명은 반사적으로 단전의 진기를 끌어 올려 뇌혈(腦血)을 보호했다.
그러나 오빌리언 마법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지속되었다.
블러드 스펠을 발동한 것은 트루 블러드이지만, 수조에 설치한 마나석에서 끊임없이 마나가 뻗어 나와 주문을 유지했다.
원래 정신계 계열의 마법은 다른 계열 마법과는 달리 마법 주문이 완성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에 따라 몇 시간 만에 걸리기도 하고 한 달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
언제 마법이 완성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제뮤엘은 자리를 떴다.
“으으으…….”
모용명은 사력을 다해 머릿속을 파고드는 마법에 저항하느라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내공이 곧 바닥나며 정신력만으로 싸워야 했기에 더욱 힘들어졌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려고 여기까지 버텨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죽음의 순간을 떠올리며 기력을 짜내려고 애를 썼다.
아내에게 독살당한 뒤 새로운 몸을 얻어 회생했지만 곧바로 추격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몇 번이나 위기를 넘겼다.
게다가 그에겐 반드시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었다.
대연국이 다시 서는 그날까지 절대로 쓰러질 수도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 아직 하늘이 그를 버리지 않았음인지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블러드 스펠은 그의 기억을 공격해 파괴시키려 했지만, 모용명의 정신 방어가 견고해 쉽사리 함락시키기 어려워지자 곧 손쉬운 다른 대상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몸의 원래 주인이었던 제논의 기억이었다.
모용명은 원래 제논의 기억 중에 극히 일부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가차 없이 버렸다. 그러나 버려진 기억은 소멸되지 않고 무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아 버렸다.
블러드 스펠은 제논의 기억을 공격해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임무를 마친 블러드 스펠이 흩어지고 오빌리언 마법은 곧 멈춰 버렸다.
요행으로 위기를 벗어나게 된 것이다.
모용명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끔찍한 고통에서 해방되자 곧바로 운기행공에 돌입했다.
내공을 회복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제뮤엘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연구에 몰입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타입인데다, 오빌리언 마법이 완성되는데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한 시진(2시간)쯤 지난 후 모용명은 내공을 모두 회복하고 눈을 떴다.
그는 진기를 끌어 올려 쇠사슬을 끊어 버리며 했지만 생각과는 달리 꼼작도 하지 않았다.
‘평범한 쇠붙이로 만든 게 아닌 모양이군! 사슬을 끊을 수 없다니 큰일이다.’
모용명은 운기를 하기 위해 다시 눈을 감았다.
제뮤엘이 돌아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내공을 늘려 두는 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끼에에에에―
거대하고 추악한 생물이 핏물에 잠겨 몸부림치고 있었다.
처절하게 발악하고 있는 그것은 다름 아닌 공포의 대명사인 트롤(Troll)이었다.
발작하듯 한참 동안 경련을 일으키며 발버둥 치던 녀석은 갑자기 사지를 추욱 늘어뜨리며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때 차갑고 메마른 목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또 실패군.”
심장을 이식해 오우거의 힘을 옮겨 오려던 실험은 이번에도 실패했다.
탁월한 재생력을 지닌 트롤이라면 혹시 오우거의 심장을 버텨 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결국 트롤 녀석은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항상 겪어오던 일이기에 제뮤엘은 그리 상심하지 않았다.
키메라 실험은 이처럼 특정한 신체의 일부로 이식해 대상의 능력을 일부 가져오는 원리를 기반으로 한다.
다만 성공률이 형편없이 낮은 편이라, 새로운 타입의 키메라를 완성하는 것은 까마득히 먼 훗날에나 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또 한 차례 실험의 실패와 함께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낀 제뮤엘은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는 문득 모용명에게 생각이 미쳤다.
“흐음…… 지금쯤 오빌리언 마법이 완성되었겠지. 한 번 들러 볼까?”
지난 수년 동안 은신처에서 홀로 지내던 제뮤엘에겐 혼잣말을 하는 습관이 생겼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대답하는 모습은 얼핏 보기에 미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지켜보는 사람도 없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식어 버린 찻잔을 단숨에 비워 버린 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곧바로 일어났다.
저벅― 저벅―
통로를 울리는 발소리에 모용명은 흠칫하며 운기를 멈췄다.
‘흑마법사 놈이 오고 있군.’
그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단전의 진기를 끌어 올려 전신의 혈도와 경맥을 보호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의식을 잃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고, 깊이 잠든 것처럼 느리고 부드럽게 호흡했다.
철컥―!
잠겨 있던 실험실 문이 열렸다.
모용명을 자세히 살핀 제뮤엘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빌리언 마법은 별문제 없이 완료된 것 같군. 이제 인벤트(Invent) 마법으로 머릿속에 새로운 기억과 인격을 심어 주자. 이번에는 부디 성공했으면 좋을 텐데…….”
제뮤엘은 마나석을 새것으로 교체한 뒤, 간절한 염원을 담아 신중하게 인벤트 마법을 캐스팅했다.
그는 인벤트 마법으로 손자인 시온을 부활시킬 수 있기를 열망했다.
광기에 가까운 손자에 대한 집착이 불러일으킨 일종의 망상이었다. 실제로 베임하리엘의 고위 신관들은 그가 반쯤 미쳐 버렸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를 이곳에 유폐시킨 건 교단에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지만, 수십 년 동안 유폐를 철회하지 않은 것은 그가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인벤트(Invent)!”
파아앗―!
트루 블러드와 함께 마나석이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생소한 기억이 모용명의 머릿속으로 파고들며 또다시 극심한 고통을 불러 일으켰다.
‘으으윽…….’
그러나 그는 제뮤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음속으로만 비명을 질렀다.
제뮤엘은 더 이상 지켜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하지만 혹시 그가 근처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용명은 계속 이를 악물며 통증을 참아 냈다.
‘이것은 누구의 기억이지?’
제뮤엘의 손자인 시온의 기억이 서서히 그의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그러나 모용명은 진기를 끌어 올려 뇌를 보호하며 철통같이, 굳건히 정신을 보호했다.
견고한 정신 방벽에 막힌 블러드 스펠은 주위를 배회하다가 곧 적당한 곳을 발견했다.
심해처럼 깊고 넓은 무의식의 세계!
그의 무의식 속에 시온의 기억이 전이되었다.
파앗!
인벤트 마법이 완료되며 마나석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꺼지자 주위가 어둠에 잠겼다.
‘휴우…… 무사히 인벤트 마법을 막아 냈군.’
그는 정신을 집중해 무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은 시온의 기억을 한 가닥씩 끌어냈다.
기억과 함께 생소한 감정이 몰려온다.
그러나 모용명은 고요한 호수처럼 차갑게 마음을 가라앉혀 정신 오염을 막아 냈다.
다행히 제뮤엘이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시간은 많았다. 그는 시간을 들여 조심스럽게 시온의 기억을 흡수했다.
‘제뮤엘과 시온도 상당히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군.’
희귀한 유전병 때문에 단 한 순간도 건강하게 살아 보지 못하고 여덟 살이란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둔 시온!
유일한 혈손인 손자를 잃었지만 현실을 인정하지 못해 광기에 휩싸이게 된 제뮤엘!
하지만 모용명은 조금도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실은 바로 그 두 사람 때문에 기억을 모두 잃고 평생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위기에 직면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실험에 실패해 백치가 되거나 죽던가 했겠지.
그가 만약 무공을 익힌 몸이 아니고 천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부터 시온의 기억을 완벽하게 파악해 제뮤엘을 속인다. 그것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