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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지하 실험실이라 주위가 온통 깜깜해 밤낮을 구별할 수 없었다.
예상과는 달리 제뮤엘은 상당한 시간이 흘러도 모용명을 살피러 오지 않았다.
원래 인벤트 마법은 무려 새로운 기억과 인격을 창조하는 마법이다.
짧은 시일에 완성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제뮤엘은 실험에 한 번 몰두하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당분간은 그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 모용명은 상승(上乘)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어서 내공이 눈밭에 눈덩이를 굴리 듯 착실하게 불어났다.
무림인에게는 가장 축복받는 시기!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평생 상승의 경지에 들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는 과거 화경(化境)의 경지에 이르렀던 인물이었다.
아는 길을 다시 가는 것은 그 길을 처음 가는 사람보다 빠를 수밖에 없다.
‘내공도 중요하지만 무공을 다시 익히는 것이 좋겠다!’
몸이 바뀌었으니 새로운 몸에 맞는 무공을 익혀야 한다.
모용명은 지금까지 쇄심장과 두전성이를 주로 사용했다.
두전성이는 무엇에도 비할 바 없이 신묘한 절예였으나 내공 소모가 큰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쇄심장은 명중당하기만 하면 적의 숨통을 끊어 놓은 필살의 절기였으나 역시 내공 소모가 심하며 공격이 단조롭다.
내공이 빠르게 불어난다고는 하지만 그래 봤자 고작 며칠 연성한 내공일 뿐이다.
진정 뛰어난 자와 맞붙게 되면 내공 부족으로 패배할 수도 있었다. 흑마법사에게 사로잡히게 된 것도 바로 내공 부족 때문이 아닌가?
지금 그에게는 공력의 소모가 적고 변화가 많은 새로운 무공이 절실히 필요했다.
‘무기가 없으니 검법이나 창술 같은 것은 아직 익힐 수 없겠군.’
모용명은 모용세가에서 수집한 무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강호의 수많은 절기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워지길 반복했다.
그러다가 모용명은 마음에 드는 무공을 한 가지 발견했다.
‘지금은 해남파(海南派)의 거파련교권을 익히는 것이 좋겠다.’
해남파는 중원의 최남단인 해남도(海南島)에 위치한 문파다.
그들은 바다의 거친 해적들과 싸우며 실전적인 무예를 발전시켜 왔다.
해남파의 무예 중 하나인 거파련교권(鉅波連攪拳)은 바다에 출렁이는 파도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 낸 특이한 권법이다.
이 무공의 특징은 마치 작은 파도가 끊임없이 물결치듯 주먹을 통해 진기를 조금씩 계속해서 쏟아 내는 것이다.
인체의 7할(70%)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
거파련교권에 적중 당하게 되면 체액이 끊임없이 흔들려 균형을 잡을 수 없고 극심한 현기증과 구토를 동반하게 된다.
죽거나 내상을 입는 것은 아니지만 한동안 무력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내공 소모가 크지 않으니 다수의 약한 적을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모용명은 거파련교권의 구결에 따라 진기를 움직여 보았으나 내력을 발출하거나 주먹을 휘두르진 않았다. 혹시라도 은밀하게 감시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게 조용히 진기의 운행만 연습하고 있던 그는 문뜩 인기척을 듣고 숨을 죽였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온 제뮤엘은 긴장한 듯 초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발! 성공해야 할 텐데…….”
그는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킨 후 조심스럽게 모용명의 어깨를 흔들었다.
“시온! 정신 차려 보거라! 할아버지가 왔다.”
순간 모용명은 그의 손목을 잡고 부러뜨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뼈가 부러지고 적이 비명을 지르는 통쾌한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간신히 난폭한 충동을 억눌렀다.
‘지금은 안 돼! 해치운다고 해도 이 쇠사슬을 풀 수 없다면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으음…….”
모용명은 잠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제뮤엘은 간절한 소망을 담아 그를 불렀다.
“시온! 날 알아보겠느냐?”
동그랗게 눈을 뜬 모용명은 어린아이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했다.
“어? 할아버지! 저……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거예요? 상당히 오래 잠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아아…… 드디어!”
감격을 주체하지 못한 듯 제뮤엘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할아버지! 어디 편찮으세요?”
걱정이 듬뿍 묻어난 목소리에 감격한 제뮤엘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황급히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네가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것 같아서…….”
묘용명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할아버지. 이렇게 기운찼던 적이 한 번도 없는 걸요?”
“그래, 보기에도 한결 좋아 보이는구나.”
제뮤엘은 더없이 부드럽고 조심스런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건강을 되찾기 위해 지금부터 한 가지 치료를 더 받아야 한단다. 아프거나 하진 않을 거야? 씩씩한 우리 손자, 잘 참을 수 있겠지?”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혹시 거짓 연기라는 게 들킨 건가?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모용명은 마음에 경각심이 일어났다.
이 흑마법사 녀석은 성격이 매우 괴팍한 편이니 속아 넘어간 척 장단을 맞춰 주며 희롱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할아버지 저 하나도 안 아파요. 답답해서 바람 좀 쐬고 싶은데……. 안 될까요?”
모용명은 조심스럽게 말을 돌려 보았으나 상대는 이미 무언가 마음을 단단히 굳힌 듯 통하지 않았다.
“조금만 참아라. 아가야! 곧 마음껏 뛰놀 수 있게 해 주마.”
제뮤엘은 선반에서 약을 찾아 분무기에 옮겨 담았다.
치익―!
노즐을 통해 약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모용명은 약을 들이키지 않기 위해 숨을 참았지만 언제까지 숨을 쉬지 않고 버틸 수는 없었다.
제뮤엘은 지극히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몸에 해로운 것이 아니니 깊게 들이켜 보거라.”
“…….”
마음이 다급해진 모용명은 진기를 끌어 올려 쇠사슬을 잡아당겨 보았으나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겁먹지 마라! 시온. 설마 이 할아버지가 널 해롭게 하겠느냐?”
“…….”
억지로 숨을 참자 모용명의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했다. 보다 못한 제뮤엘이 다급하게 외쳤다.
“숨을 쉬어! 숨을 쉬라니까! 시온!”
‘젠장! 더 이상은 버틸 수 없…….’
결국 모용명은 버티지 못하고 숨을 들이켰다.
약을 흡입하자 정신이 혼미해지며 졸음이 쏟아졌다. 제뮤엘은 시온의 얼굴을 향해 다시 약을 뿌렸다.
치익― 치익―
눈꺼풀이 한없이 무거워지며 굳게 닫혔다. 모용명은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졌다.

제뮤엘이 그의 얼굴에 뿌린 것은 강력한 마취 성분과 수면 유도제를 포함한 약이었다.
‘시온이 거울을 보고 놀라지 않게 얼굴을 조금 고쳐야겠어.’
예전부터 제뮤엘은 그 부분이 걱정이었다.
그는 만약 인벤트(Invent) 마법에이 성공한다고 해도, 기억 속의 자신의 얼굴과 다르다면 시온이 극심한 혼란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방향으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수술로 얼굴을 고치는 것이다.
베임하리엘 교단은 원래부터 시신을 해부해 인체의 비밀을 모두 밝히고자 했었다.
박해를 받으며 더욱 음험해진 그들은 시체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도 거침없이 해부해 갖은 실험을 반복했다.
그런 과정에서 그들은 인체에 대한 적지 않은 지식을 축척했다. 축척된 지식은 마법과 키메라 양성 등 넓은 분야에서 활용되었다.
베임하리엘의 흑마법사들은 대륙에서 은밀히 활동하기 위해 변장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갖가지 기술을 이용해 분장했지만 곧 한계를 느꼈다.
얼굴 자체를 바꾸자!
그들은 축척된 지식을 활용해 뼈를 깎거나 보형물을 넣어 얼굴을 변형시켰다.
처음에는 얼굴 조직이 괴사하거나 안면이 마비되는 등의 심각한 부작용이 뒤따랐다.
그러나 시행착오를 거치며 점차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제뮤엘 역시 그동안 수많은 노예들을 대상으로 기술을 연마했다. 원래 손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성형에 재능을 보였다.
‘한 치도 실수가 있어선 안 돼! 최소 부위만 절개한 뒤 신속히 끝낸다!’
제뮤엘은 모용명의 얼굴을 시온과 완전히 같아지게 바꿀 생각은 없었다.
시온은 8살에 죽었지만 모용명의 나이는 열다섯이다.
7년이나 자란 셈이니 어렸을 때 얼굴이 그대로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비슷한 느낌만 어렴풋이 남아 있어도 충분했다.
서걱―
살을 자르고 뼈를 깎는 제뮤엘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눈매는 최대한 비슷하게 성형했지만 다른 부분은 약간만 건드려 인상을 바꾸었다.
작업(?)을 모두 마친 제뮤엘은 절개한 부위에 포션을 뿌렸다.
치이익―!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며 상처가 아물었다.
흉터가 전혀 남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부터 그런 얼굴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마찬가지로 이마에 찍힌 노예의 인장도 깔끔히 지워 버렸다.
“휴우!”
길게 한숨을 내쉰 제뮤엘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모용명의 얼굴은 어렸을 때 시온의 모습을 닮게 되었지만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도 사라지지 않았다.
기억속의 손자는 이렇게 잘생기지 않았지만 어차피 추억이란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미화되기 마련!
“거참! 날 닮아 훤칠하게 잘생겼구먼!”
제뮤엘은 수술의 결과에 흡족해했다.





Chapter 5.
카로스 해의 해적들



그 후로 열흘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모용명은 제뮤엘의 손자 노릇을 철저히 해냈다. 제뮤엘 역시 그를 진짜 손자처럼 대하며 극진히 보살폈다.
모용명은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며 침실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운기행공(運氣行功)에 투자했다.
진기요상술로 상처를 치료하고 내공을 높이느라 조금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제논의 몸을 빌려 소생한 이후 줄곧 쫓겨 다니느라 조금도 여유가 없었다. 지금 이렇듯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수련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몹시 즐거운 일이다.
운기행공을 하지 않을 때는 주로 해남파의 거파련교권(鉅波連攪拳)을 집중적으로 수련하며 시간을 보냈다.
슈아아아아― 파앙!
모용명은 베개 속을 채운 거위 깃털을 뽑아내 공중에 띄운 뒤 거파련교권을 시험했다.
권력(拳力)에 휘말린 깃털은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며 한참 동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거파련교권의 공력이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모용명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아직 멀었군. 이제 겨우 3성에 도달한 건가?”
무림인들은 보통 무공의 숙련도를 1성에서 10성까지 나눈다.
즉, 3성이라는 것은 3할(30%)을 달성했다는 뜻이다.
만약 해남파의 제자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좌절감과 분노를 느낄 만큼 광오(狂傲)한 말투였다.
거파련교권을 익힌 지 이제 고작 열흘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3성에 달하다니!
무학의 기재들도 그와 같은 나이에 그만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용명은 겉모습만 열다섯의 소년일 뿐 과거 화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 이 정도의 성취는 그에게 별로 빠른 편도 아니었다.
‘우선은 거파련교권을 5성까지 연마한 뒤 다른 무공을 익혀야겠군.’
모용세가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무림문파의 무공을 수집했기 때문에 모용명이 알고 있는 무림의 무공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러나 그는 이것저것 손을 대는 것보다 하나라도 완벽하게 익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뚜벅― 뚜벅―
그때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침실로 찾아올 사람은 제뮤엘밖에 없었기에 모용명은 공력을 거두고 재빨리 침대에 누웠다.
덜컥―!
“시온! 몸은 좀 어떠냐?”
그의 질문을 받은 모용명은 그제야 깨어난 듯 천연덕스럽게 눈을 비비며 말했다.
“이제 한결 나아진 것 같아요, 할아버지!”
“너무 누워 있는 것도 몸에 좋지 않단다.”
“네. 사실은 이제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씩씩한 손자의 말에 제뮤엘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래? 그럼 이참에 할아버지와 함께 서재로 가자꾸나.”
‘귀찮게, 또 뭘 하려는 거지?’
모용명은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그를 따라 서재로 나섰다.
제뮤엘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우선은 읽고 쓰는 법이나 셈을 하는 법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시온은 어려서부터 몹시 병약해서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더 많았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내가 직접 시온을 가르쳐야겠다.’
사실 제뮤엘이 이처럼 모용명을 가르치려는 것은 그저 자기만족일 뿐이었다.
그가 반쯤 미쳐 있다고는 하지만, 모용명이 진짜 자신의 손자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를 속여 모용명이 진짜 자신의 손자 시온이라고 믿고 싶었다.
손자를 직접 가르치는 기쁨을 맛보고 싶었다.
모용명은 아직 채 국어를 읽고 쓰는 법을 알지 못했기에 그의 가르침을 달게 받아들였다.
“시온, 이건 새벽이라는 단어란다.”
“네! 할아버지. 그런데 이건 무슨 뜻인가요?”
모용명은 빠른 속도로 테넨로베프 제국의 문자를 익혀 나갔다.
배우는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제뮤엘은 대륙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가르쳤다.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어지자 그는 급기야 마법의 기초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니까 마법이란 건 자연 속에 존재하는 마나를 재배치하여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성질을 이용하는 거죠? 제가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맞나요?”
“그래, 그렇단다. 시온, 정말 영리하구나.”
“그럼, 마나 서클이라는 건 왜 필요한 거죠?”
“서클에 쌓인 마나는 화약심지에 불을 붙이기 위한 부싯돌의 역할을 한단다. 실제로 폭발을 일으키는 것은 화약이지만 심지에 불을 붙이지 않으면 화약이 폭발하지 않겠지?”
모용명은 마법이란 학문에 흥미를 느꼈다.
강호의 무공과는 그 개념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마법의 개념을 무공에 접목할 수 있다면 꽤 특이한 무공을 만들어 낼 수도 있겠어.’
모용명은 무공과 마법을 결합해 새로운 수법을 고안해 내려고 고심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머리로도 하루아침에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모용명은 포기하지 않고 차근차근 마법의 원리를 분석해 나갔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되는 법이니 그는 이러한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굳게 믿었다.

제뮤엘은 요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손자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온이 정식으로 마법을 배우려 한다면 수십 년은 가르칠 수 있었을 것인데……. 아쉽군!’
모용명은 마법의 개념에 흥미를 보였으나 마법사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가 익히지 못한 강호의 무공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거기에 공연히 마법까지 보탤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제뮤엘은 이대로 손자를 가르치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었다.
“으음……. 시온에게 흑마법을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니 약학을 가르쳐야겠구나.”
흑마법과 키메라 연구에는 많은 약물이 필요했기에 그는 약과 독에 박식한 편이었다.
그때부터 제뮤엘은 시온에게 약으로 쓸 수 있는 약초와 동물, 광물 등을 가르쳐 주었다.
특히 해독약을 만드는 법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는데, 혹시라도 독에 당할 경우 스스로 해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모용명은 제뮤엘에게 약학을 배우며 한 가지에 생각이 미쳤다.
‘약학을 이용해 인피면구를 제작할 수 있겠군.’
인피면구(人皮面具)는 자신의 정체를 숨길 때 사용하는 일종의 가면이다.
인피면구를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동물 가죽을 가공해 사람의 얼굴 가죽처럼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실제로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겨 가면처럼 만드는 것이다.
무림인들은 보통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해 인피면구를 만든다.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 가죽을 도려내는 것은 아니었고,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신에서 가죽을 벗겨 내 제작한다.
인피면구를 제작하려면 얼굴 가죽이 썩거나 변색되는 것을 막기 위해 특수한 약물이 필요한데 이곳에서는 구할 수 없었다.
모용명은 제뮤엘에게 배운 약학으로 그것을 대신할 약물을 만들 생각이었다.
‘약물을 제조해 동물 가죽에다가 실험해 봐야겠군.’
그날부터 모용명은 몹시 바빠졌다.
새벽잠을 줄여 운기를 하고, 오전에는 쇄심장과 거파련교권을 연마하는가 하면, 점심을 먹은 후에는 마법의 개념을 접목해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려 힘썼고, 저녁에는 약물을 제조해 실험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다시 스무 날쯤 시간이 흐른 뒤에 베임하리엘 교단에서 갑자기 사람이 찾아왔다.
이처럼 갑작스런 방문은 드문 일이었기에 제뮤엘은 다소 당황했다.
“시온! 답답하겠지만 절대 방에서 나오지 말고 소리도 내지 말거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염려 마세요. 할아버지.”
원래 제뮤엘은 죄를 짓고 이곳에 홀로 유폐된 상태였다. 즉, 다른 사람과 접촉하거나 함께 지내서는 안 되는 몸이었다.
게다가 대륙에서 금지된 흑마법과 키메라 실험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접근한 자는 모두 죽여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모용명은 쓸데없는 충돌을 피하고 싶었기에 순순히 제뮤엘의 지시에 따랐다.
공연히 베임하리엘 교단을 건드려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딸깍―
한 시진(2시간)쯤 흐른 뒤 침소의 문이 다시 열렸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제뮤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할아버지.”
“…….”
무슨 이유에서 인지 한참 동안이나 멍하게 서 있던 그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휴우……. 갑자기 교단에 복귀하라고 하는구나.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갑자기 유폐가 풀린 것은 보면 교단에 중대한 변화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원래대로라면 제뮤엘에게 교단에 복귀하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었으나, 손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그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복귀 명령이었다.
“사흘 후에 다시 사람을 보낸다고 하더군. 그때까지 이곳을 정리하며 기다리라고 하는구나.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제뮤엘은 모용명을 교단에 입문시킬 생각이 없었다.
수백 년간 박해를 받아 온 베임하리엘 교단은 침몰하는 배와 같아서 다시 예전의 성세를 회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제뮤엘과는 달리 모용명의 표정은 밝아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대부분 배운 셈이니 참으로 적절한 시기에 복귀하는군.’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제뮤엘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휴우……. 어쩔 수 없구나! 어쩔 수 없어.”
“할아버지…….”
모용명은 헤어짐이 아쉬운 듯 말꼬리를 흐리며 길게 끌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제뮤엘은 좀 전보다 비교적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당분간 떨어져 지내야겠지만……. 훗날 반드시 널 찾겠다. 시온! 이걸 받아라.”
그는 모용명에게 큼직한 수정 구슬을 건넸다.
“이것은 뭔가요? 할아버지.”
“그건 메시지(Message) 마법이 저장되어 있는 수정 구슬이다. 수정 구슬을 잡고 말하면 상대와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단다.”
“이런 걸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참! 신기하네요.”
“메시지 마법은 감시를 당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단다. 교단의 눈을 피해 연락하는 게 아마 쉽지 않을 것 같다. 긴급할 때만 가끔 연락할 테니, 할아비가 먼저 연락하기 전까진 연락하지 말고 기다리는 게 좋겠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할아버지 말씀대로 할게요.”
그 후로 사흘 동안 제뮤엘은 그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가르치려 했다. 모용명 역시 그에게서 최대한 많은 것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쏘아진 화살처럼 빠르게 3일의 시간이 지났다.
암흑 교단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기 전에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항상 몸조심해야 한다! 시온.”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도 무리하지 말고 건강하게 지내세요.”
제뮤엘과 작별 인사를 한 모용명은 몇 가지 선물을 받았다.
하나는 마법 주머니이었는데, 그 안에 넣는 물건은 무게와 크기가 10분의 1로 줄어들어 보기보다 꽤 많은 물건을 넣을 수 있었다.
제뮤엘은 그 안에 식량과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몬스터의 가죽 등을 넉넉히 넣어 주었다.
다른 것은 마법 반지였는데, 치유 마법이 저장되어 있어서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서 가라! 시온. 그들이 오기 전에 어서!”
“할아버지…….”
모용명은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헤어짐이 아쉬운 듯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흑마법사의 은신처로부터 멀리 벗어난 모용명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모용명의 꿈은 물론 대연국(大燕國)을 재건하는 것이다.
뛰어난 무예를 익히고 있지만 그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혈혈단신의 몸이었다. 노예의 인장은 제거되었지만 그렇다고 귀족 신분도 아니다.
다행히 지금의 테넨로베프 제국은 마치 중국의 5호 16국 시대가 떠오를 만큼 몹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황실은 힘을 잃고, 귀족들이 득세하여 각지에서 공공연연하게 영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역사상 유례없는 대기근을 겪은 것이 바로 몇 해 전이었다.
이러한 상황이라 모용명이 대연국을 다시 세우는 것도 아주 가망성이 없는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
‘우선은 무예로 명성을 얻고 기사가 되는 것이 먼저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우선은 기사가 되어 명성을 얻고, 자신의 힘이 되어 줄 세력을 모아야 했다.
이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는 지난 한 달 동안 제뮤엘을 통해 대륙의 정세나 각 지역을 지배하는 영주들에 대해 파악해 두었다.
고심한 끝에 그가 후보로 선택한 군주들은 모두 셋이었다.
첫 번째 인물은 남쪽의 평야 지대를 장악하고 있는 버몬트 후작이다.
네르시아의 정혼자인 후작은 모용명과는 깊은 악연을 맺게 되었다.
비록 흑마법사 제뮤엘이 모용명의 얼굴을 조금 바꾸긴 했지만 오래 두고 지켜보게 된다면 정체가 발각될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는 비옥한 평야 지대에서 나온 소출로 부를 축척했고, 사병을 많이 양성하고 있었다. 또한 무리하게 세금을 거두지 않는 편인데다 명문 가문의 후손이라 남부 지역에서 인망이 꽤 높았다.
하지만 사실 은밀히 블러드 문의 어쌔씬을 양성하는 등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었으나 사람들의 평가는 그러했다.
둘째 후보는 북쪽 국경을 지키고 있는 대장군 살바도르 후작이었다.
그자는 제국에 3명밖에 없는 소드 마스터 중 하나였고, 뛰어난 무력과 통솔력을 바탕으로 야만족을 물리쳐 북쪽의 수호자라는 별명의 얻었다. 또한 그에게는 전쟁으로 단련된 충성스런 수하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마지막 군주는 카로스 해라 불리는 서쪽 바다를 장악한 제라드 백작이다.
그는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척했으며 바다의 해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뛰어난 해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해상무역을 통해 여러 나라들의 문물을 접해 생각이 깨어 있는 인물이었으며 귀족이라기보다는 상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남쪽은 버몬트 후작과는 악연이 깊어 꺼림칙한데다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나를 중용할 리가 없다. 대장군 살바도르는 뛰어난 무예를 갖춘 실력자지만 의심이 많은 인물이라 나처럼 출신이 불분명한 인물을 싫어할 것이다. 또한 그의 밑에는 이미 능력 있는 수하들이 많으니 배척당하기 쉽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제라드 백작뿐인데…….’
고민 끝에 모용명은 제라드 백작이 있는 서쪽의 카로스 해를 향해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제라드 백작!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한 가지 문제는 카로스 해까지 육로로 가려면 사막에 막혀 한참 돌아가야 한다는 것.
육로로 난 길을 가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 두 달 이상 걸리게 된다.
마침 그가 있는 곳에서 3일 정도 거리만 이동하면, 카로스 해로 흘러가는 이르니슈란 이름의 거대한 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하루쯤 후.
관도를 따라 걸어가던 모용명은 화전민 마을을 발견했다.
비록 조그만 마을에 불과했지만, 이 부근에서 서식하는 신경통에 좋은 약초가 있어서 상단의 마차가 정기적으로 마을을 오갔다.
마침 그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짐마차는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다.
모용명은 상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마차를 얻어 탈 수 있을까요? 아! 물론 비용은 지불하겠습니다.”
짐마차에 손님을 받고 부수입을 얻는 것은 이곳의 상인들에게 흔한 일이었다.
“어디까지 가려고 하시는 거요?”
“이르니슈 강에서 배를 타려고 합니다.”
“운이 좋은 편이군! 우리도 나루터에서 배를 타려던 참이니 70쿠퍼만 내쇼!”
대륙의 화폐 단위는 골드, 실버, 쿠퍼 순.
70쿠퍼면 결코 저렴한 편은 아니었으나 모용명은 별로 흥정할 생각이 없었다. 흑마법사 제뮤엘에게 넉넉한 여비를 받았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비록 짐들 사이에 불편하게 끼어 가야 하지만 그는 만족했다.
경공을 펼쳐 강까지 가기엔 너무 먼 거리였기 때문이다. 불편하나마 앉아서 갈 수 있으니 가는 동안 운기행공을 할 수 있어서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런데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마차의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남루한 옷을 입은 사내 하나가 짐마차로 접근했다.
“혹시 마차를 얻어 타고 가는 데 얼마입니까?”
모용명은 무심코 사내의 행색을 살폈다.
비록 지저분한 옷을 입고 있었으나 건장한 체격에 눈빛이 맑고 정기가 가득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