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9화
‘검을 차고 있는데다가 상당히 단련된 몸이구나. 용병이나 견습 기사 둘 중 한 부류일 것 같은데 어느 쪽이지?’
상인들과 흥정을 마친 사내는 50쿠퍼만 지불하고 짐마차에 올랐다.
그러다 그를 발견한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웃는 낯에 침 뱉을 수는 없는 법이라 모용명은 무심코 응수했다.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얼떨결에 그의 인사를 받아 준 것이 화근이었을까?
마치 저수지의 제방이 터진 것처럼 사내는 줄기차게 말하기 시작했다.
“혼자 여행하기 적적하던 참이었는데, 마침 선객이 계셨군요! 전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아요. 가는 곳마다 이렇게 좋은 분을 만나게 되다니! 하하하! 정말 반갑습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죠?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런데 어디까지 가시는 겁니까?”
“이르니슈 강에서 배를 타려고…….”
“오! 이런 우연이! 저도 배를 탈 생각이었어요!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나 봅니다! 이르니슈 강에서 배를 타고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바다가 있는 이그로스 항구까지 갈 생각이었거든요. 여기서 잠깐! 흥을 돋우기 위해 제가 깜짝 질문 하나 내볼게요! 괜찮죠? 쉬운 문제니까 긴장하지 마세요. 이그로스 항구의 특산물을 뭘까요? 맞추시면 상품도 드려요! 상품은 바로…….”
‘건장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수다스런 녀석이군.’
조용히 운기에 집중하려던 모용명에게는 참으로 당황스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를 마차에서 쫓아낼 수도 없는 일이라 잠시만 참기로 했다.
한참을 떠들어 대던 사내는 갑자기 모용명에게 물었다.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시온입니다.”
모용명은 제뮤엘의 손자인 시온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너무 눈에 띄는 일인데다 가명을 새로 짓는 건 귀찮았고 헷갈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엇? 이럴 수가?! 이런 공교로운 일이! 정말 성함이 시온인가요? 본명인 거 확실한 겁니까?”
“그렇습니다만?”
“제 이름도 시온입니다! 사실 시온이란 이름이 흔한 편이긴 하지만 같은 이름을 가진 분을 마차에서 딱 마주치게 되다니! 이거 정말 우리 뭔가 통하는 것이 있나 봐요!”
그의 말대로 공교롭게도 이름이 같았다.
그러나 특별히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시온은 제국에서 가장 흔한 이름 다섯 가지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모용명은 사내의 정체에 대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신상에 대해 죄다 떠벌렸기 때문이다.
시온이란 사내는 젠토른 영지 출신의 용병이었다.
그의 고향인 젠토른 영지는 몬스터들의 잦은 침임으로 지금은 버려진 땅이 되었다.
사실 척박한 땅이 버려지는 것은 흔하지는 않지만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특히 주변 지역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이 갑자기 늘어나거나 야만족의 침략이 잦을 경우 소출이 적은 작은 땅은 버려지기도 했다.
소출은 적은데 영지를 운영하거나 방어하는 비용이 터무니없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향은 없어져 버렸지만 제겐 하늘 아래 모든 곳이 고향이고 집인 셈입니다. 조금 거창한 감은 있지만, 대륙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사귀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그만! 제발 좀 입을 다물어 줬으면 좋겠군. 이젠 머릿속이 다 울리는 것 같아!’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모용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혈도를 짚어 잠재웠다. 수혈과 마혈 등을 동시에 점해 버리자 그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도 깊이 잠들어 버렸다.
“휴우! 이제 좀 조용해졌군.”
모용명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운기에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덜컹―!
마차 바퀴에 뭔가 걸리기라도 한 듯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며 정지해 버렸다.
그 바람에 몰입에서 깨어난 그는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으앗! 오크다! 오크가 나타났다!”
“젠장! 수십 마리의 오크야!”
원래 이 부근의 지역에는 몬스터가 별로 서식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고블린이나 코볼트 등의 소형 몬스터가 서식할 뿐이었고, 그것들도 조그만 짐마차 따위는 습격하지 않았다.
몬스터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식량뿐! 위험을 무릅쓰고 짐마차를 덮쳐 봐야 별로 얻어 낼 수 있는 것도 없다는 걸 그것들도 잘 알고 있다.
이처럼 조그만 규모의 짐마차가 습격을 받는 것은 굉장히 운이 없는 경우였다.
좀 더 정확이 말하면 습격이 아니라 근처를 정찰하듯 어슬렁거리던 오크들과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상단의 마차를 호위하던 용병들이 나서서 오크들을 막아 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조그만 규모의 화물 운송이라 고용한 용병들이 고작 다섯 명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병들을 모조리 해치운 오크들은 그대로 상인들을 덮쳤다.
“으아악! 살려 줘!”
“아악! 크아아악!”
오크들은 아직 살아 있는 상인들을 탐욕스럽게 우적우적 뜯어 먹었다.
한발 늦은 오크들은 한 점의 살점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황급히 손을 뻗어 닥치는 대로 잡아당겼다.
우드득―!
“크아아아아악!”
관절이 부서지며 팔과 다리가 그대로 뜯겨져 나갔다.
상인들은 생으로 해체되는 고통을 생생하게 겪으며 숨이 끊어졌다. 급소를 공격당해 단번에 숨이 끊어진 자들은 차라리 행복한 최후를 맞이한 편이었다.
한편, 모용명은 그제야 짐마차의 창을 통해 밖의 상황을 확인했다. 별로 그들을 구해 줄 마음은 없었으나 곤란해지는 것은 싫었다.
‘마부나 말까지 잡아먹혀 버리면 마차는 누가 몰지?’
이르니슈 강에 도착하려면 아직 하룻밤을 더 보내야 했다.
마차가 부서지면 숲에서 노숙해야 할 것이다. 잠자리가 불편한 것은 물론인데다 몬스터들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에 깊이 잠들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군!”
타앗―!
모용명은 마차의 뒷문을 열고 오크들을 향해 뛰어나갔다.
그의 오른손에 붉은 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하더니 강맹한 장력이 세차게 쏟아져 나왔다.
슈아아아아아앙― 콰아앙!
퀘엑!
장력에 적중당하는 순간, 강력한 경력이 혈관 속을 파고들며 심장으로 직행했다.
파아악!
심장이 산산조각 나며 다섯 마리의 오크가 동시에 숨을 거뒀다!
취익!
오크들이 동시에 양손 도끼를 휘두르며 그를 공격해 왔다.
모용명은 보법을 펼쳐 가볍게 공격을 피해 내는 동시에, 공력을 아낌없이 끌어내 쉴 새 없이 장력을 뻗어 냈다.
슈아아아앙― 파앙! 파앙! 파앙!
쿠엑!
퀘에엑!
연속되는 장력에 오크들이 쓰러지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
후퇴할 줄 모른다는 무식한 오크들도 장력의 위력에 흠칫 놀라며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모용명은 유일한 생존자인 마부에게 다가가 물었다.
“괜찮습니까?”
“괘…… 괜찮습니다! 기사님.”
그의 위력적인 공격에 흠칫 놀란 마부는 기사라고 착각해 버렸다.
기사의 마나 코어(내공심법)를 익히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런 위용을 떨쳐 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놀라긴 했지만 별로 다친 곳은 없는 것 같군.’
모용명은 노숙하거나 산길을 홀로 걸어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다시 짐마차로 돌아가던 그는 흠칫 발걸음을 멈췄다. 뜻밖에도 수다쟁이 사내가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체는 맹수에게 물어뜯긴 듯 뼈만 앙상했기에 금방 상황을 추측할 수 있었다.
‘오크들 중 몇 마리가 그를 공격한 모양이구나. 혈도를 짚어 놓았기 때문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잡아먹힌 건가?’
조금 찜찜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설령 혈도를 짚어 놓지 않았더라도, 수다쟁이의 실력으로는 이 정도 숫자의 오크들과 싸워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란 생각에 모용명은 찝찝한 기분을 가볍게 털어 버렸다.
그러다가 그는 사내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신분패에 눈길이 미쳤다.
“신분패라…….”
신분패는 비록 출신 지역과 출생 년도, 이름 정도만 간단히 새겨진 쇠붙이에 불과했지만 이것만 있으면 도망친 노예 신분이란 과거를 훌륭히 감출 수 있었다.
비록 흑마법사 제뮤엘이 그의 얼굴을 고쳐 주며 노예의 낙인도 없애 버렸지만, 훗날 불분명한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고향이 젠토른 영지라고 했었나? 지금은 버려진 땅이라고 하니 나중에 조사를 받게 되어도 문제가 될 일이 없겠지. 영지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대륙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을 테니 얼굴을 마주칠 일도 없고…….’
모용명은 그의 신분패를 품에 챙겨 넣은 뒤 시신을 마차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이것으로 그의 출신 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신경 쓰이던 부분이 저절로 해결되자 그는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마부를 향해 외쳤다.
“어서 출발하세요! 피 냄새를 맡고 몬스터들이 또 몰려올지도 모릅니다!”
“네! 기사님.”
구름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그 아래에는 드넓은 강줄기가 끝없이 뻗어 나가고 있었으며 강물 위로 한 척의 배가 항해하고 있었다.
고래처럼 통통한 몸체 위로 복잡한 구조의 갑판이 있었고 그 위에 여러 개의 돛대가 솟아 있었다. 이처럼 선체가 큰 이유는 이 선박이 화물 운송을 주로 하는 상선이기 때문이었다.
샤아아―
그때 시원한 강바람이 한차례 갑판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갑판에 오른 한 사내는 바람을 맨얼굴로 맞으며 한없이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음……. 무척 졸리는군.’
무사히 이르니슈 강의 상선에 오른 모용명은 강바람을 맞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조금 전 간단히 끼니를 때운 후 따스한 봄볕에 몸을 쬐고 시원한 미풍까지 귓가를 살랑 스치자 도저히 잠이 들지 않고는 배겨 내지 못할 판이었다.
추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애써 누굴 속여야 할 필요도 없이 그야말로 모처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짧은 여유마저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 듯 누군가가 느닷없이 처절한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까아악!”
“도적들이다!”
모용명은 살짝 이마를 찌푸리며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바람에 휘날리는 검은색의 깃발!
수상하게 검은색을 칠한 선박들이 상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선박 위에 서 있는 자들은 각양각색의 무기를 들고 흉흉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수적들이군!’
모용명은 강호의 장강수로채 등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어딜 가나 사람 사는 모양새는 비슷한 모양이다.
간격이 서로 좁혀지며 사정거리에 도달하자마자 도적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슈아아악―!
수백 발의 화살이 새까맣게 날아오는 모습이 마치 벌 떼 같았다.
화살이 갑판 위로 쏟아지기 직전!
모용명은 옷소매에 손을 감춘 채 은밀히 두전성이를 펼쳤다.
그러자 돌풍에 휘말린 낙엽처럼 화살들이 원을 그리며 소용돌이쳤다. 소매를 가볍게 휘두르자 화살들이 전부 도적들을 향해 되돌아갔다.
쉐에에에에엑―! 파앗!
“으헛!”
“으아악!”
갑자기 화살들이 되돌아오자 도적들은 엄폐물을 찾아 급히 몸을 숙였으나 운 나쁜 녀석들은 화살에 맞고 비명을 내질렀다.
승객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이한 현상에 놀라 서로 수군거렸다.
“어? 방금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어디에서 돌풍이…….”
갑판 위가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모용명은 아직 정체를 드러낼 때가 아니라 생각하고 잠자코 있었다.
잠시 후 선박이 서로 맞닿으며 상선에 고용된 용병들과 도적들 사이에 백병전이 일어났다. 모용명은 승객들과 함께 뒤로 물러서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용병들과 상단의 무사들이 조금 밀리는군. 하긴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으니 수적들이 습격해 왔겠지?’
도적들에게 배를 빼앗기게 된다면 그로서는 그야말로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아직 함부로 나서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곤란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는 용병들을 도와 수적들을 물리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모용명은 난전 중에 누군가 떨어뜨린 검을 주워 들고 수적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슈아아아― 파앗!
“크억!”
내공이 실린 그의 검은 신속하고 날카로웠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반드시 치명적인 급소에 적중했으니 난전 속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모용명은 수세에 몰린 용병들을 구하기 위해 보법을 펼쳐 위급한 곳에 바람처럼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파아앗!
“크아아악!”
붉은 피가 솟구치며 죽어 가는 자의 처절한 비명이 갑판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하나의 목숨을 빼앗아 여럿을 구하는 형세였으니, 잔인하다고만 생각할 것은 아니었다.
전투는 기세가 반이다.
그가 활약할수록 도적들의 기세가 죽고, 용병들이 활개를 쳤다.
‘음……. 이 정도면 용병들이 수적들을 물리칠 수 있겠지.’
모용명은 따로 할 일이 있었기에 그쯤해서 치열한 전장에서 발을 뺐다.
그는 은밀히 숨이 끊어진 수적들의 시체를 찾아 날카로운 칼로 얼굴 가죽을 도려냈다.
서걱!
도려낸 얼굴 가죽을 얼른 특수한 약물이 든 병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것은 가죽이 썩거나 변형되지 않게 해 주는 약물이었다.
모용명은 얼굴 가죽을 모아 인피면구를 제작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대연국을 다시 세우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계획해 둔 여러 가지 일들을 하려면 그것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눈에 발각되면 흑마법사로 오해받을 수 있기에 그의 작업은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은밀히 움직인 탓인지 얼굴 가죽을 몇 개밖에 손에 넣지 못했는데, 갑자기 갑판에서 우렁찬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수세에 몰린 도적들이 황급히 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벌써? 도적들을 조금 덜 죽일 것을 그랬나?’
모용명은 아쉬워하며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다.
선원들이 분주의 움직이며 갑판을 정리했다.
정리라고 해 봐야 해적들의 시체를 바다에 던지고 무기들을 따로 정리해 둔 뒤 갑판 위에 쏟아진 붉은 피를 닦아 내는 정도였지만 어수선한 분위기가 수습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러 버렸다.
어느덧 해가 지며 수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소금기가 섞여 들었다. 상선이 지금 강 어귀를 통과하며 카로스 해에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가 지고 나면 순식간에 어두운 밤이 찾아오겠지만 모용명은 선실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저 석양에 매료된 듯 바다에 반쯤 몸을 담근 태양이 넘실대는 파도를 붉게 물들이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갑판 위에서 밤을 보낼 생각이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선실을 빌리지 않은 모용명은 비슷한 처지의 승객들 사이에 섞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무림인들은 대부분 노숙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갑판에서 자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실 여비가 그리 부족하진 않았으나 몸을 너무 편하게 하는 습관은 정신까지 나태하고 느슨하게 만들기 때문에 무림인으로서 항상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왁자지껄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와 갑판이 떠나갈 듯 경박하게 웃는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
그건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친 선원들이 갑판에 모여 럼주를 마시고 떠드는 소리였다.
원래 뱃사람들의 일상은 늘 고달프고 힘든 것이었다.
항해 중에 종종 돛줄에서 떨어지거나 하는 등의 부상을 입는 일이 빈번했고 거친 파도에 휩쓸리거나 바다 괴수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빈약하고 질 낮은 음식물에 기대어 연명해야 했으며 뱃일로 인해서 생기는 괴혈병 등의 각종 질병들과도 싸워야 했다. 비좁은 선실 안에서의 생활은 항해가 길어질수록 선박 자체가 떠다니는 감옥처럼 갑갑하게 느껴지게 된다.
또한 엄격한 선상 규율과 선장의 학대에 가까운 횡포 등도 배에서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이처럼 하루를 끝내고 술 한 잔 걸치는 게 그들의 유일한 낙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수적들과의 격렬한 전투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죽어 가는 동료가 남긴 마지막 순간의 몸서리쳐지도록 처절한 눈빛을 잊기 위해서라도 조금쯤은 취할 필요가 있었다.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인 노을의 그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던 모용명은 뱃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에 흥취가 깨지는 걸 느끼고 뱃전에서 물러났다.
그는 갑판 위에 저마다 자리를 잡은 여행객들 사이를 지나가며 밤을 보내기 적당한 빈자리를 찾아다니고 있을 때, 갑자기 뱃사람들이 서로 떠드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그런데 참! 자네도 그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지?”
“갑자기 그자라니? 이 사람 실없기는…….”
“거 왜 있잖아! 엄청난 검술을 쓰던 사내 말일세!”
모용명은 순간 그들이 말하는 사내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무의식중에 선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 누굴 말하는지 알겠군! 그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이렇듯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
“정체가 뭘까? 용병?”
“글쎄……. 지난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자임에는 틀림없네! 자네도 내가 눈썰미 하나만큼은 정확한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잖은가?”
‘이거 곤란한 걸……. 너무 눈에 띄었나?’
해적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던 뱃사람들이 알아차릴 정도라면 누군가는 자신이 그 사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볼지도 모른다.
목적지인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는 조용히 수련에만 힘을 기울일 계획이었던 모용명에겐 꽤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뱃사람들 중 하나가 그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갑자기 외쳤다.
“앗! 기억났어. 바로 저 얼굴이다!”
“정말 저 사람이 확실한가? 럼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헷갈리는 건 아니겠지?”
“자네 그걸 말이라고 하나? 내가 이래 봬도 시력 하나만큼은 독수리 못지않네!”
“저기……. 이리 오셔서 같이 한잔 하시오!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비록 가진 건 없지만 술로 대접하겠소!”
모용명은 거절하려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어차피 별로 넓지도 않은 갑판에서 끝까지 정체를 숨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저들이 죽던 말건 내버려 둬야 했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지나간 일을 두고 오래 후회하는 건 미련한 짓이다.
탁!
뱃사람들은 테이블 위에 잔을 올려놓고 럼주를 시원스럽게 따랐다.
럼(Rum)은 뱃사람의 술이라 불릴 만큼 선원들이 애음하는 술이다. 특히 이들이 마시고 있는 것은 보기만 해도 독해 보이는 짙고 걸쭉한 빛깔을 띠고 있는 다크 럼(Dark Rum)이었다. 킬 데블(악마 죽이기)란 깜찍한 애칭이 붙은 이 술은 60도 이상의 도수를 자랑해 활화산처럼 뜨겁고 악마 같고 끔직한 술로 유명했다.
“구해줘서 고맙소! 검사 양반!”
“어디 주량도 검술만큼 엄청난지 봅시다!”
“사내답게 시원하게 한 번 마셔 보라고!”
뱃사람들은 장난기가 잔뜩 어린 표정으로 그에게 술을 권했다.
원래 럼주는 물속에 불을 섞은 것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지독해서 보통은 그로그 텁(Grog Tub)이라 불리는 커다란 통에 담은 뒤 물로 적당히 희석해서 마신다. 짓궂은 선원들이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 사실을 알려 주지 않은 것이다.
‘이대로 마시는 술이 아닌가 보군!’
모용명은 그들이 눈동자를 굴리는 것을 보고 뭔가 수작을 부리려 한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러나 짐짓 모른 척하며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 버렸다.
꿀꺽!
목울대가 힘차게 움직이는 걸 확인한 선원들은 저들끼리 키득거리며 술에 취해 비틀거릴 그의 모습을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술잔을 비운 그의 눈빛은 맑았고 얼굴이 조금도 붉어지지 않았다.
타악!
빈 잔을 탁자 위에 소리 나도록 내려놓은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뱃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생각보다 술이 좀 싱거운 게 아쉽군. 다들 한 잔 하시오!”
사실 모용명은 럼주를 식도로 넘기는 동시에 단전의 내공을 끌어내 술기운이 온몸에 퍼지는 걸 막아 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내공으로 독을 해독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혈액에 스며든 독을 분리한 뒤 왼쪽 새끼손가락에 있는 소택혈(小澤穴)로 응축된 술을 천천히 쏟아낸 것이다.
응축된 럼주에서 강력한 주향이 퍼지긴 했지만 사방에 럼주가 널려 있으니 뱃사람들은 그의 수작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정당한 대작이 아니라 속임수였지만 먼저 속이려 했던 건 선원들이니 술수를 술수로 받아 친 셈이다.
이는 상대의 수법을 상대에게 펼치는 것을 좋아하는 모용세가의 가풍과 맞아떨어지는 행동이었다.
단순한 뱃사람들은 오기가 치밀어 그에게 외쳤다.
“흥! 제법 센 척하시지만 술고래라 불리는 나한테는 어림없을 거요!”
“나와 대작하여 이기면 전 재산을 주지!”
“길게 끌 것 없이 딱 석 잔으로 승부를 보자고! 대신 술잔은 저 나무통일세! 하하하!”
선원들은 이미 취한 상태인데다 그들 대부분이 흥분하면 앞뒤가릴 줄 모르는 단순무식한 성격이었다.
무지막지한 주량을 자랑하던 그들이었지만 결국 모용명을 이기지 못하고 죄다 나가떨어졌다.
이상한 것은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오히려 최고의 남자라고 칭찬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그들의 태도였다. 목숨을 구해 줬는데도 은근히 경계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다가 주량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자 곧바로 대단한 사내라며 감탄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삶에서 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의미였다. 하긴 그들이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럼주뿐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그때 이 몸이 말이야…….”
“하하하하! 내가 바로 바다 사나이다.”
잔뜩 취해 버린 뱃사람들은 횡설수설하며 갖가지 이야기를 꺼냈다.
대부분 신세 한탄이나 근거 없는 허풍, 혹은 뱃사람의 미신에 대한 쓸모없는 말들 뿐이었으나 개중에는 간간이 제법 쓸 만한 정보를 말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에 모용명의 관심을 끄는 이야기는 해적단의 두목 루커스에 관한 소문이었다.
“해적들 중에 가장 큰 규모의 해적단은 바로 루커스 해적단이란 말이지!”
“젠장! 루커스 그놈 때문에 세뮤엘도 죽고 아돌프도 죽고…….”
“죽은 자들 이름은 말하지 마! 운수가 나빠진다고! 자꾸 그러면 죽여 버린다!”
모용명은 은근슬쩍 그들에게 루커스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너무 취해 버린 상태라 횡설수설할 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들에게 더 이상 알아낼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군.’
모용명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런데 그를 향해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런 옷을 걸친 중년의 사내가 걸어오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모용명은 어리둥절한 듯 능청을 떨었지만, 사내는 다 알고 있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겸손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시에티알 상단의 호위를 책임지고 있는 라혼이라고 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제 이름은 시온입니다.”
모용명은 제뮤엘의 손자인 시온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우연찮게 적당한 신분패도 손에 넣었으니 앞으로 그 이름을 계속 사용할 생각이었다.
시온(Cion)이란 이름의 원래 뜻은 고귀한 혈통의 후손이란 의미였으니 대연 황실의 후손인 그의 입장을 은근히 대변해 주는 것 같아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다.
이제부터 시온이 그의 이름이다.
그는 속으로 조금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조금 전 수적들을 해치우는 모습을 본 모양이군. 그런데 어디까지 본 거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야 얼마든지 들켜도 상관없다. 그러나 얼굴 가죽을 벗기는 광경까지 들켰다면 곤란한 일이다.
자칫 흑마법사로 오해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엉뚱한 소문이 퍼지는 걸 막기 위해 모두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사내의 표정은 호의적이었다.
모용명을 흑마법사로 오해했다면 이렇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리가 없었다.
“상단의 주인인 카엘 님께서 시온 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합니다.”
모용명은 이렇듯 자신이 주도하지 않는 상황에 휘말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턱대고 초대를 거절하면 오히려 그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어떤 자인지 알아 둘 겸 일단 한 번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마음을 결정한 모용명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라혼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되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라혼을 따라 넓은 선실로 들어서자 이미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금빛 수실로 장식된 식탁보 위에는 각종 해산물과 값비싼 부위로 정성스럽게 요리한 스테이크 등이 놓여 있었지만 실은 그 곁에 놓여 있는 채소와 과일 등이 정말로 진귀한 음식이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열대 과일들뿐이었으나 그것들을 신선한 상태로 식탁 위에 올리려면 보통 정성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운송하는 동안 내내 마법을 걸어 신선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바다 위에서 싱싱한 과일과 채소를 맛볼 수 있다니! 이 어찌 호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상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입구로 들어오는 모용명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서 들어와서 앉으십시오! 제가 시에티알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카엘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온이라 합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모용명은 상대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그는 머리가 희끗희끗했으나 눈매가 날카롭고 젊은 사람처럼 눈동자에 힘이 있었다. 다소 날카로운 인상이었으나 미소를 지으면 금세 온화한 얼굴이 되었다.
추측컨대 상황에 따라 표정을 바꾸는 데 능숙한 타입인 것 같았다.
‘나약해 보이진 않지만 그리 신뢰가 가는 인상은 아니군. 상인으로 대성할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큰 상선의 주인이라니……. 수하들 중에 유능한 조언자가 있는 건가?’
모용명은 자리에 앉는 즉시 망설이지 않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는 격식을 갖춘 식사 예법에 대해 조금도 몰랐지만 망설임 없이 스테이크를 썰어 포크로 찍었다.
그러자 상단의 우두머리인 카엘이 웃으며 말했다.
“식사하시는 모습도 마치 갑판에서 검을 휘두르시던 것처럼 호탕하시네요.”
“배움이 짧아서 그렇습니다.”
“하하! 위트 있으시네요.”
모용명은 카엘에게 잘 보일 생각이 없었고, 또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떠보기 위해 일부러 무례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카엘은 인상을 찡그리거나 불편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아 마치 진심에서 우러난 행동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용명은 모용세가의 가주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겪어 왔기에 그것이 정말 진심 어린 태도가 아니라는 것쯤은 간단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