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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마음을 숨기는 데 능숙한 성격이군. 하긴! 상인으로 대성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긴 하지.’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재빠르게 식사를 마친 모용명은 무뚝뚝한 어조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카엘이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시온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본론을 꺼내려는 건가?’
모용명은 자신을 붙잡으리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서로의 속셈을 어느 정도 간파하고 있으면서도 상대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밀고 당기는 것이 바로 협상이다.
일부러 상대를 자극하는 건 이쯤 해 둬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제게 무슨 볼일입니까?”
“시온 님의 힘을 잠시 빌리고 싶습니다. 저와 계약하시지 않겠습니까?”
카엘은 계약이란 단어를 던져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려 했다. 다소 뻔한 수작이었으나 일단 들어 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모용명은 담담하게 물었다.
“계약이라니, 갑자기 무슨 말인지…….”
“찬찬히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모용명은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카엘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본론을 꺼냈다.
“사실 우리 상단은 파산 직전에 있습니다. 시에티알 상단은 화물 운송을 주업으로 하는데, 최근 카로스 해의 해적들이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번번이 화물을 빼앗기거나 정해진 날짜까지 운송을 마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강호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서 모용명은 곧바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그것참, 큰일이네요.”
“좀 전에 시온 님의 활약을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갑자기 시온 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이번에는 기한 안에 충분히 운송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조금 전 하신 것처럼 계속해서 도와주신다면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
모용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목적지가 같으니 그리 나쁘지 않은 조건이군. 거절한다고 해도 어차피 배가 침몰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한 손 거들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감히 나를 용병처럼 고용해 부려 먹으려 한다면 곤란해지겠지.’
마음을 정한 그는 카엘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가능하다면 제가 힘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시에티알 상단을 돕는 것은 이번 한 번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시온 님.”
카엘은 몹시 기뻐하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모용명은 불쾌한 마음에 금나수(擒拿手)를 펼쳐 슬쩍 손을 빼냈다.
무림인들은 원래 서로 손을 맞잡는 법이 없었다.
대신 손바닥으로 주먹을 감싸 포권(抱拳)을 했다. 맨손이고 무기나 암기가 없다는 걸 서로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갑자기 상대의 손을 잡는 것은 공격이나 기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다.
모용명은 흑마법사 제뮤엘에게 제국의 풍습이나 예절에 대해 배워 두긴 했지만, 본능적으로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전 이만 나가 봐도 되겠습니까?”
“아! 제가 시온 님의 귀한 시간을 너무 빼앗았군요. 붙잡지 않겠으니 가서 편히 쉬십시오.”
모용명이 선실 밖으로 나가자 카엘은 인상을 와락 구기며 중얼거렸다.
“검술 실력 하나만 믿고 더럽게 건방진 놈이군! 고개가 너무 뻣뻣해. 라혼!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식사하는 동안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서 있던 라혼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뭔가 감추는 인상을 받았지만 그의 검술은 명문가의 것이 분명합니다.”
“확실한가?”
“확실히 상급의 마나 코어(내공심법)를 익힌 움직임이었습니다. 추측컨대 몰락한 귀족 출신이거나 유명한 기사의 제자인 것이 분명합니다.”
“음……. 그렇단 말이지.”
“어쨌거나 우리는 지금 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무례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지금은 참고 정중히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의 검법과 마나 코어를 알아낼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흐흐……. 그야 물론이지.”
그들은 지금까지 몰락한 가문의 기사나 연고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기사를 속여 왔다. 그들의 검법과 마나 코어를 훔쳐 낸 뒤에 살해하여 바다에 던져 버렸다.
그렇게 훔쳐 낸 기술로 라혼은 지금의 실력을 쌓았다.
두 사람은 음흉하고 치밀한 성격이라 지독한 악행을 반복하고도 한 번도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두 사람의 말을 엿듣고 있는 자가 있다는 걸 꿈에도 몰랐다.
‘뭔가 의심쩍다 했더니, 역시 그랬군!’
모용명은 선실에서 나오는 즉시 불영암행보(不影暗行步)를 펼쳐 은밀히 선실 근처에 숨어 있었다.
불영암행보는 살수문파 중에 하나인 흑사련(黑死連)의 무공으로, 특히 어둠 속에서 펼치면 그 형체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지금은 너희들의 술수에 장단 맞춰 주지. 그러나 너희들이 마각을 드러내는 그 순간, 차라리 어서 죽여 달라고 애걸할 정도로 생지옥을 생생히 맛보게 될 것이다! 그날을 기대하라고.’
강호의 무림인들은 결코 은원을 쉽게 잊지 않는다.

시에티알 상단과 계약한 후 모용명은 실로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고급스런 가구와 장식으로 꾸며진 선실을 배정받게 되었고 매 끼니마다, 상단의 주인인 카엘의 선실에 초대되어 온갖 산해진미를 먹게 되었다.
카엘은 그를 귀빈처럼 대우했고 황제처럼 떠받들어 주었으며 마치 잃었던 형제를 다시 찾은 것처럼 살갑게 대했다.
아무리 마음이 삭막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도 그들의 융숭한 대접에 조금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용명은 그들의 시커먼 속셈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그저 속으로 혀를 찰 뿐이었다.
‘정말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녀석들이군. 결코 곱게 죽여선 안 될 놈들이야.’
철컥―
오늘도 호화로운 식사를 마친 모용명은 자신의 선실로 돌아온 후 문을 굳게 잠갔다.
그는 병에 넣어 둔 얼굴 가죽을 꺼내 햇볕이 들지 않은 선실에서 말렸다.
이렇게 그늘에서 잘 말려야 가죽이 뒤틀리지 않는다.
탄력 있고 말랑말랑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고운 붓으로 얼굴 가죽 위에 특수한 약물을 덧칠해야 한다. 약물을 발라 말리기를 서른 번 이상 반복해야 드디어 살아 있는 피부처럼 말랑한 가죽이 완성되는 것이다.
‘가죽이 마를 동안 무공을 연마해야겠군.’
시간을 보내기 위해 운기 하는 것은 위험했다. 자칫 몰입에 빠져 시간 가는 것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물이 마르는 그 순간, 즉시 약물을 덧발라야 좀 더 살아 있는 피부에 가까운 탄력을 지닌 가죽을 완성할 수 있었다.
슈아아아앙― 파앙!
기다리는 동안 모용명은 쇄심장과 거파련교권을 연마했다.
5성에 도달하자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경력이 닿는 곳마다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련으로 시간을 보낸 그는 고운 붓으로 약물을 찍은 뒤 얼굴 가죽에 정성껏 덧칠했다. 그런데 붓을 내려놓는 순간, 누군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똑! 똑!
“시온 님! 해적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해적들이라. 빨리도 왔구나!’
모용명은 재빨리 얼굴 가죽을 병에 챙겨 넣고 문을 열었다. 시에티알 상단의 직원으로 보이는 사내가 다급하게 말했다.
“카엘 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알겠다! 상단주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
카엘은 상단의 임원들과 함께 선장실에 모여 있다가 모용명을 보고 매우 반가워하며 말했다.
“오셨습니까? 시온 님. 저기를 좀 보십시오.”
모용명은 카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여섯 개의 까만 점이 몰려오고 있었다.
카엘은 초초한 목소리로 외쳤다.
“카로스 해의 해적들입니다! 도와주세요, 시온 님!”
‘벌써부터 착실히 부려먹으려 하는 건가?’
내심 썩 내키지 않았지만 계약은 계약!
모용명은 안절부절 못하는 상단주의 태도에 동조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계약한 대로 가능한 힘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선장이 선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뱃머리를 돌려라!”
갑자기 선체가 크게 출렁이며 나무통이 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어엇?”
미처 중심을 잡지 못한 사람들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었다. 선장의 명령을 전달받은 조타수가 키를 돌린 것이다.
선원들은 해적선들을 따돌리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화물들 때문에 충분한 속도를 낼 수 없는 상선과는 달리 해적선들의 선체는 작고 날렵해 기동성이 뛰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간격을 벌려 둔 덕분에 고용된 용병들이 충분히 응전 준비를 마칠 수 있었느니, 전혀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
그사이 모용명은 선장실을 나가서 갑판 위로 올라갔다.
“으윽! 루커스 해적단이다!”
“젠장! 하필 제일 악질인 놈들에게 걸렸군.”
해적선들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검은 깃발에 그려진 하얀 해골이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의 거리였다.
용병들이 모두 숨을 죽이며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침묵과 함께 무거운 긴장감이 갑판 위를 감돌았다.
사거리에 진입하는 순간 상단의 호위대장인 라혼이 모두에게 외쳤다.
“쏴라!”
쉐에에에에엑―!
용병들은 해적선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해적선들에서도 화살을 마주 쏘아 냈다.
해적선들의 숫자는 무려 여섯!
여섯 배에 달하는 화살이 일제히 날아와 마치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것 같았다.
갑판 위에 모여 있던 용병들은 미리 준비한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아 냈다. 방패가 서로 얽히며 하나의 거대한 벽을 만들어 냈다.
파박! 파박!
“크아아악!”
“아악!”
화살이 방패를 관통했다.
운이 나쁜 용병들 몇몇은 방패를 관통한 화살이 두개골을 꿰뚫는 바람에 절명했지만, 대부분은 약간의 부상을 입었을 뿐 무사했다.
그러나 그 순간 해적선의 선미가 상선의 옆구리를 찔렀다.
콰앙!
충격으로 선체가 뒤흔들렸다.
용병들이 한차례 갑판 위를 나뒹굴었으나 모용명은 재빨리 보법을 펼쳐 균형을 잡았다.
“와아아아!”
해적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나무판자나 밧줄을 이용해 상선으로 건너오고 있었다.
그들은 용병들을 향해 거침없이 도끼를 휘둘렀다.
슈아아악― 파악!
“크아아아악!”
도끼에 머리통이 반쯤 쪼개진 용병이 피와 뇌수를 쏟으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쿠웅!
그때 또 다른 해적선이 상선에 부딪쳐 왔다.
해적들은 머릿수의 우위를 앞세워 능숙하게 용병들의 대열을 갈라 버렸다. 대열이 무너진 용병들은 그저 먹기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용병들은 그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러 대응할 뿐이다.
무려 여섯 배의 병력 차이!
난폭하고 잔인한 해적들의 공격에 동료의 머리뼈가 부서지고, 갈라진 배에서 내장과 피가 한꺼번에 쏟아진다.
“으아아악!”
“살려 줘!”
용병들은 순식간에 사기를 잃고 공포에 질렸다.
이 아비규환 속에서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서걱!
‘음!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모용명은 혼란을 틈 다 은밀히 시체의 얼굴 가죽을 도려내고 있었다.
이제 인피면구 제작에 쓸 가죽은 충분히 챙겼으니 계약대로 해적들을 물리쳐야 할 시간이다.
타앗―
보법을 펼쳐 해적들 사이로 파고든 모용명은 그들을 향해 거파련교권을 펼쳤다.
슈아아아아― 파앙!
주먹을 통해 공력이 넓게 쏟아져 나가자 거파련교권의 경력이 해적들의 몸을 뒤흔들었다.
꾸준한 단련의 결과로 5성에 이르렀기에 경력이 주위에 넓게 퍼졌다.
피와 체액이 끊임없이 흔들리자 그들은 바닥에 쓰러지며 뱃멀미라도 하듯 구역질을 해 댔다.
“우웩!”
쫘악―!
해적들이 단체로 뱃멀미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갑자기 왜들 그래?”
“뭘 잘못 먹었나?”
모용명은 어리둥절해하는 해적들을 향해 성큼 다가서며 검을 휘둘렀다.
슈아아아악― 파악!
“크아악!”
손목이 잘려 나간 해적 놈은 피를 쏟아 내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주위의 해적들이 그를 노려보며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흐흐……. 어린 녀석이 제법 귀엽게 날뛰는데?”
“꼬마야! 이리로 와. 찐하게 귀여워해 줄게!”
“예쁜이! 우유 줄까?”
겉보기에 그는 열다섯의 잘생긴 소년에 불과했기에 해적들은 그를 얕보며 포위해 왔다.
모용명은 무표정한 얼굴로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파앗! 파앗!
“으아아악!”
“크아아악!”
검을 가볍게 한 번 휘두른 것 같았는데 아홉 명이 동시에 쓰러졌다. 모용명의 검이 너무 빨라 해적들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이 XX 자식이! 어디 겁도 없이!”
“꼬마야! XX를 잘라 네 XX에 처박아 주랴?”
‘실력도 없는 주제에 입이 거칠군!’
모용명은 싸늘한 냉소를 지으며 입에 담기 더러운 욕설을 퍼부은 자들의 목을 참수하듯 잘라 버렸다.
파악!
잘려 나간 머리통이 바닥을 나뒹굴고 잘려 나간 동맥에서 붉은 피가 왈칵 솟구치자, 순간 주위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
덜컥 겁에 질린 해적들이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제야 그들은 그의 검술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타앗―
모용명은 바닥을 박차며 그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마치 양의 무리에 뛰어든 늑대처럼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고, 한 번도 공격이 빗나가는 법 없이 적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파악!
“크아아악!”
순식간에 해적들이 쏟아 낸 피로 갑판 위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해적들은 필사적으로 발악하며 죽는 순간까지 도끼를 휘둘렀으나 보법을 펼쳐 가볍게 피해 냈기에 헛되이 허공을 갈랐을 뿐이다.
“와아아!”
모용명의 눈부신 활약에 용병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시 용병들과 선원들의 기세가 되살아나며 조금씩 전세가 뒤집혔다. 그가 보법을 펼쳐 빠르게 갑판 위를 누비며 눈에 띄는 해적들의 목을 사정없이 잘라 버렸기 때문이다.
풍덩!
그때 불리함을 느낀 해적들 몇몇이 차가운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강호에서 활약할 때 수적들을 상대한 경험이 있는 모용명은 그들이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고 달아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렇게는 안 되지!’
그는 바다에 뛰어든 해적들을 향해 은밀하게 쇄심장을 날렸다.
슈아아아아― 파앙!
장력이 수면을 때리자 무시무시한 경력이 해적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심장이 산산이 부서지며 절명한 녀석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 한 달 동안의 수련으로 반드시 심장을 파괴한다는 쇄심장의 위력이 완성된 것이다.
결국 해적들은 자신들의 배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올 때는 제멋대로 왔어도, 갈 때는 주인의 허락 없인 못 가지!’
모용명은 달아나는 해적들을 쫓아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슈아아아악― 파악!
“크아악!”

시에티알 상단은 모용명의 도움으로 해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수많은 선원들과 용병들이 죽었고 돛대가 부러지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해적선을 두 척 빼앗고 그들이 약탈한 재물까지 챙겼으니 결과적으로 이득이었다.
상단의 총수인 카엘은 승전을 축하하는 성대한 연회를 열고 승리의 주역인 모용명을 초대했다.
“오오! 저기 우리의 영웅이 오시는군요!”
“압도적인 무력에 외모까지 탁월하니, 장차 대륙의 모든 여인들이 시온 님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하하하! 과연 그렇군요.”
갈채와 온갖 찬사가 그에게 쏟아졌다.
이렇듯 환호와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것은 대부분의 젊은 사내들이 꿈꾸는 것이건만 정작 모용명의 표정은 그저 담담했다.
그는 겉보기와는 달리 환대와 찬사에 가슴이 두근거릴 순진한 소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거 모용세가의 가주로서 이보다 더한 찬사나 아부를 받은 적이 많았다.
그때 카엘이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본인의 입으로 무용담을 들려주신다면 연회가 더욱 빛날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기대하듯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오! 시온 님이 직접 말씀하신데!”
“이거 기대되는데?”
그러나 모용명은 어릿광대처럼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생각이 없었다.
“모두들 다 지켜보지 않았습니까? 그것보다 부탁한 것은 어찌 되었습니까?”
“해적들 말이오? 부탁하신 대로 몇 명 붙잡아 가두어 두었습니다.”
“심문은 해 보셨습니까?”
모용명의 질문에 카엘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호위들을 시켜 심문해 보긴 했습니다만 별다를 건 없었습니다. 해적이 해적질을 하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네……. 그렇군요. 잠시만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빨리 돌아오셔야 합니다! 파티의 주인공이 빠져서는 안 되니까요.”
연회장에서 빠져나온 모용명은 곧바로 지나가는 선원을 붙잡아 물었다.
“해적들을 붙잡아 둔 곳이 어딘가?”
“앗! 시온 님이시군요.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그 선원 역시 모용명의 활약을 두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선원의 뒤를 따르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단순한 해적들이라고 보기에 그들의 움직임이 너무 체계적이었다. 훈련된 병사들에게나 기대할 수 있는 움직임이지. 상선 한 척을 공격하기 위해 여섯 척의 해적선이 동시에 움직인 것도 조금 이상해. 세 척이면 충분했을 텐데…….’
모용명은 원래 모용세가의 가주로서 각지의 세력을 규합해 활동해 왔다.
그의 경험과 직감으로 비추어 볼 때 해적들에게는 숨겨진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덜컥―
선원은 공손히 문을 열어 주며 그에게 말했다.
“이곳입니다.”
“수고했다.”
모용명은 마치 부하를 대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선원은 전혀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의 뛰어난 무력에 진심으로 감탄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안내해 드린 것뿐인데 수고랄 것까지 있나요. 그럼, 전 다른 일이 있어서 가 보겠습니다.”
선실로 들어서자 밧줄에 묶여 있는 해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으으으…….”
모진 고문을 받은 듯 그들의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모용명은 그들 중 한 명에게 다가가 입을 틀어막은 헝겊을 꺼냈다. 그리고 수상한 약병을 꺼내 해적의 입에 쑤셔 박았다.
“우웁!”
해적은 약물을 삼키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그러나 모용명이 목과 가슴의 혈도를 자극하자 저도 모르게 식도가 열리며 꿀꺽 삼켜 버리고 말았다.
약물을 삼킨 녀석은 순식간에 눈빛이 흐리멍덩하게 풀리며 축 늘어졌다.
그가 마신 약물은 일종의 자백제로, 흑마법사 제뮤엘이 정신계 마법을 쓸 때 사용하던 것이었다.
‘정신계 마법인 컨페션(Confession)과 귀령제혼술을 동시에 쓰자!’
모용명은 단전의 진기를 끌어 올려 수라마교의 귀령제혼술을 사용했다.
파아앗―!
적양신공으로 온통 붉어진 그의 두 눈과 마주친 해적은 놀란 듯 탄성을 흘렸다.
“어? 어…….”
귀령제혼술을 펼치자 놈의 눈빛은 더욱 혼탁해졌다.
모용명은 마법 주머니를 뒤져 트루 블러드가 들어 있는 조그만 유리병을 꺼냈다. 뚜껑을 연 뒤 곧바로 녀석의 몸에 뿌렸다.
준비를 마친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캐스팅을 끝냈다.
“컨페션(Confession)!”
파아앗―
“으으으…….”
귀령제혼술과 정신계 마법의 공격을 동시에 받았으니 평범한 해적 놈이 버텨 낼 리 없다.
이대로라면 곧 녀석의 정신이 망가져 폐인이 될 것이다.
심문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다.
정신 방벽이 허물어지고 이지를 완전히 상실하기 전의 짧은 순간!
그것만이 모용명이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상선을 왜 공격했지?”
“으으……. 두목이 이즈라엘과 계약했다. 명령대로…….”
“이즈라엘이 누구지?”
“으으으……. 이즈라엘……. 그로노스 상단의 주인…….”
해적의 대답을 듣고 모용명은 정황을 눈치챘다.
‘그로노스 상단이라……. 시에티알 상단과는 경쟁 관계인 모양이군. 해적들과 결탁해 경쟁자를 물리치려 하다니! 누군지 모르지만 대담하고 음흉한 자로군.’
“너희 두목의 정체는 뭐지? 그는 단순히 해적인가?”
“으으……. 루커스 두목은……. 비밀이 많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잘 몰……. 크아아악!”
해적은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정신이 완전히 망가져 못쓰게 되어 버린 것이다.
‘다른 놈들도 신문해 봐야겠군!’
모용명의 차가운 눈빛이 자신들에게 향하자 해적들은 두려운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생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해적들은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깨어났을 때는 그들 모두 폐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다른 자들도 조무래기들이라 그런지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문뜩 모용명은 루커스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의 정체가 뭐든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해적단의 두목인 루커스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카로스 해를 장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장차 대륙에 대연국(大燕國)을 다시 세울 야심을 품고 있는 모용명에게 그는 아주 탐나는 사냥감이었다.
‘그가 적당한 야심을 가진 사내라면 회유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만약 단순한 해적에 불과하거나 야심이 지나치게 크다면 철저히 부숴 버리는 수밖에!’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연회 분위기는 한창 무르익어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연회의 주인공이니 오늘의 영웅이니 하며 떠받들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짝을 지어 춤을 추고 왁자지껄 떠들며 즐기느라 그가 돌아와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르니슈 강에서 카로스 바다에 이르는 긴 여정과 해적들이 주는 긴장감에 다들 지쳐 있었다가 연회를 빌미로 갑자기 해방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아니면 유흥을 돋우기 위해 내놓은 포도주나 럼주를 너무 마셔서 이미 취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환심을 사려고 안달이 난 상단의 총수인 카엘은 어김없이 찾아와 말을 걸었다.
“시온 님, 어디를 다녀오시는 겁니까? 파티의 주인공이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제가 없어도 다들 충분히 즐거워 보이는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고 한 가지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융숭한 대접을 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모용명의 입에서 부탁이란 단어가 나오자 상단주 카엘이 반색하며 말했다.
“뭐든 부담 가지시지 마시고 말씀하세요.”
“몇 가지 물건이 필요합니다. 의뢰금을 미리 지불하는 셈치고 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의뢰금을 미리 지불하다니요? 무슨 섭섭한 말씀을……. 선물 드리는 셈치고 구해 드리겠습니다.”
“흔쾌히 승낙하시니 감사합니다. 부탁드릴 물건은 가면 하나와 통신 마법을 할 수 있는 수정 구슬입니다.”
“수정 구슬이야 얼마든지 구해다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가면이라면……. 여기에도 많이 있습니다만?”
카엘은 탁자 위에 놓인 연회용 가면을 가리켰다. 모용명은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이며 말했다.
“제가 원하는 건 축제나 연회에 쓰는 화려한 장식이 달린 가면이 아니라, 강인한 전사의 느낌을 물씬 풍길 수 있는 강철 가면입니다. 해적을 물리칠 때 쓰고 나가면 적들이 위압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가면을 원하는 겁니다.”
“아! 그렇군요. 전사의 가면이라……. 그것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제가 사람을 시켜 찾아오라고 이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용명이 이처럼 얼굴을 가리길 원하는 것은 장차 해적들을 회유하기 위해서였다.
즉, 훗날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해적들과 결탁했느니 하는 추문에 휩싸일 것을 미리 방지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카엘이 느닷없이 그에게 말했다.
“어쨌거나 시온 님도 이제 마음껏 연회를 즐기도록 하시죠. 제가 파트너를 추전해도 되겠습니까?”
마치 사전에 짜기라고 한 듯 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호위대장 라혼이 한 여인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하며 나타났다.
“오! 저기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은 누구죠? 저 정도 미모라면 시온 님의 파트너로 격이 맞을 것 같군요.”
모용명은 속으로 그를 비웃으며 생각했다.
‘이제는 미인계로 날 흔들어 보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단단히 잘못 생각한 거다.’
그는 아내에게 독살당했고, 제논의 몸으로 소생한 후 네르시아 때문에 다시 죽을 뻔했다. 그런 그에게 미인계가 통할 리가 없었다.
심지어 눈앞에 선보이는 여성은 자신을 위기에 몰아넣었던 두 여자들에 비해 미모와 기품이 뒤떨어졌다.
그럭저럭 예쁘다는 소리를 들을 얼굴이긴 했지만, 미모를 한껏 뽐내기 위해 꾸민 차림새가 오히려 너무 과하여 원래의 매력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보이며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멜리사라고 해요.”
“시온입니다.”
카엘은 과장된 감탄사를 연발하며 그에게 말했다.
“두 분 나란히 서 있으니 정말 잘 어울리네요. 마치 한 폭을 그림 같군요! 하하하! 사실 멜리사는 제 여식입니다.”
상단의 직원들은 상단주 카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각자 한마디씩만 했을 뿐이지만 직원들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한동안 장내에 젊은 두 사람에 대한 축복에 가까운 이야기로 가득 찼다.
주위에게 너도 나도 부추겼기 때문인지 멜리사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온통 붉어져 버렸다.
평소에 소심한 성격이었던 그녀는 사실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마음에도 없는 치장을 하는 동안에도 온통 그에 대한 칭찬을 몇 차례나 반복해서 들어야 했기 때문에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가까운 곳에서 그와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다른 부분은 잘 몰라도 몹시 영준하고 잘생긴 것만은 틀림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젠 딸자식까지 동원하는군. 그렇게 원한다면 잠시 놀아 주지.’
모용명은 부드럽게 웃으며 멜리사를 향해 가볍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아름다운 아가씨!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멜리사는 말없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그의 손을 잡았다.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춤에 서투르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멜리사는 그의 당당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비록 귀족 가문의 여식은 아니었지만 부유한 상단주의 딸이었기에 그동안 아버지의 소개로 보아 왔던 사내들은 다들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다들 아버지의 재산만 노리고 허망한 말만 늘어놓을 뿐이라. 그런 가식적인 태도에는 신물이 난다고 생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