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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가식적인 태도보다는 솔직한 것이 더 맘에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그렇게 어려운 곡은 아니니 약간씩 템포를 늦춰서 따라하시면 돼요.”
“친절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또다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내성적인 아가씨군.’
멜리사가 소심한 성격인 것은 사실이었으나 평소에 이 정도까지 말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가까이에서 그의 준수한 얼굴과 부드러운 울림을 가진 목소리를 듣게 되자 문득 수줍을 마음이 들어 움츠러들었을 뿐이다.
‘가까이서 보니까 정말로 준수하고 멋지게 생긴 사내구나! 잘생긴데다가 해적들을 손쉽게 해치울 실력이 있으니 인기가 정말 많을 것 같아. 나 같은 여자는 눈에 차지도 않겠지?’
멜리사는 지금까지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해 주는 남성을 만나 보지 못했기에 약간의 열등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관심을 보이는 자들마다 다들 그녀를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고 상단주 카엘의 딸로만 바라보는 사내들뿐이었으니 점차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편 모용명은 그녀의 심정은 전혀 눈치 못한 채 엉뚱한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곳의 춤은 어떻게 추는 건지 모르겠군. 발등을 밟진 않아야 할 텐데…….’
음유시인의 연주가 시작되자 멜리사의 움직임에 맞춰 발을 옮겼다.
처음엔 그저 발등을 밟지 않는 것에만 급급했지만, 점차 흐름을 파악하며 춤동작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무림인들의 감각은 원래 일반인들보다 뛰어난데다, 무림의 보법에 비교하면 동작이 그리 복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점 동작에 능숙해지게 된 모용명은 자신 있게 그녀를 리드했다.
그때 뒤늦게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엇! 저기 좀 봐, 시온 님이다!”
“함께 있는 여자는 누구지?”
“상단주의 딸이라는데?”
“두 사람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여자 쪽이 좀 처지지.”
“하긴 그래! 아아! 시온 님. 너무 멋져!”
웅성거리는 소리는 들은 멜리사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특히 여자 쪽이 좀 처지니 어쩌니 하는 소리는 몹시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모용명은 그런 그녀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저들의 말에 신경 쓰지 마요, 멜리사. 여기 모인 모든 여성들 중에 당신이 가장 아름다우니까!”
달콤한 그의 목소리에 멜리사는 갑자기 공중에 붕 뜨는 듯한 황홀감에 빠졌다. 준수한 사내가 하는 말이라서 그런지 그의 말이 진실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착각일 뿐, 눈에 띄게 잘생긴 사내의 말이 정말이라고 믿고 싶어진 그녀의 마음이 불러온 착각이었다.
그렇게 믿어야 무너진 자존심이 조금이나마 회복되는 기분이 들 테니까!
그러나 목소리와는 달리 모용명의 가슴속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시에티알 상단에 대한 정보를 틈틈이 얻기 위해 이 여성과 적당히 친분을 맺어 둘 필요가 있다.’
음악과 함께 두 사람의 춤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갈채가 쏟아졌다.
“와아!”
짝짝― 짝짝―!
그 후 모용명의 주위에는 함께 춤추길 원하는 여인들로 북적거리게 되었다.
연회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Chapter 6.
크라켄 슬레이어라는 칭호를 얻다
그 시각, 훈훈한 연회장의 분위기와는 정반대인 곳이 있었다.
해적단의 두목인 루커스는 카로스 해에 위치한 자신의 섬에서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여섯 척이나 가서 박살 나고 오다니! 이 XX 같은 자식들!”
대머리 해적 하나가 고개를 조아리며 그에게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루커스 두목님. 굉장한 실력자가 배에 타고 있어서…….”
“어디서 감히 약한 소리를 해!”
수하의 모습에 더욱 화가 난 루커스는 도끼로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슈아아아악― 파악!
“크아악!”
단단한 두개골이 단번에 박살 나며 허연 뇌수와 붉은 피가 동시에 쏟아졌다. 그러나 루커스는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씩씩거리며 말했다.
“해적이란 놈들이 배를 두 척이나 잃고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해? 오늘 네놈들은 내 손에 다 죽는다!”
“사…… 살려 주세요. 두목!”
“제발! 자비를…….”
사색이 된 수하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빌었다.
“듣기 싫다! 이 비겁한 겁쟁이 놈들! 힘으로 안 되면 사생결단이라도 해야지! 어딜 살아남겠다고 도망쳐 기어 들어와!”
루커스는 기어이 수하들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슈아아앙― 파악!
“크아아악!”
해적들은 꼭지가 돌아 버린 두목을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루커스의 도끼에 맞은 수하들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때 미친 듯이 날뛰는 그를 향해 후드를 깊게 눌러쓴 여인이 다가오며 말했다.
“진정하세요, 루커스 님.”
“아밀리에! 날더러 진정하라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러자 아밀리에라고 불린 여성이 루커스를 향해 에그레고르(Egregor)라고 불리는 정신감응 마법을 사용했다.
―수하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으니 그 정도만 해 두세요, 루커스 님. 그리고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따라오세요.
에그레고르는 두 사람의 정신을 잠시 동안 서로 연결해 생각하는 것만으로 대화할 수 있게 해 주는 마법이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까마득한 고대의 마법 중 하나인데, 어떻게 그녀가 이 마법을 알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다.
“알았어.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루커스는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아밀리에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그래, 무슨 일로 불렀지?”
“상선 습격에 실패했으니 이제 어쩌실 거예요?”
해적 두목인 루커스는 그로노스 상단의 이즈라엘과 은밀히 손을 잡고 있었다.
계약의 내용은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는 대가로 경쟁 상단의 상선을 습격하는 것!
이즈라엘이 미리 상선의 이동 경로와 규모를 알려 주었으니, 그에 맞게 해적들을 보내 화물을 탈취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해적들은 이 은밀한 계약에 대해 알지 못했다.
겉보기에는 단순히 상선을 습격해 화물을 빼앗는 것뿐이니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다만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는 몇몇 수하들은 어째서 특정한 상단만 노리는지 의심쩍어 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머리가 좋은 놈들이 애초에 해적이 될 리가 없으니까.
“어쩌긴 뭘 어째? 이번에도 아밀리에가 수고 좀 해 줘야겠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약속한 기한이 지난 건 알고 있겠죠?”
뭔가 초초해 하는 듯한 그녀의 말에 루커스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음? 벌써 그렇게 됐나? 기한을 조금 늦춰 줄 수는 없을까?”
“늦출 수 없는 문제인 거 잘 알잖아요, 루커스 님.”
아밀리에의 목소리 톤이 뾰족하게 올라가자 그는 한 발 물러서는 듯한 태도로 변명하듯 말했다.
“그건 알지만……. 갑자기 사람들이 없어지면 머리 나쁜 해적들이라도 눈치채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번에 상선의 화물을 탈취하고 선원들을 끌고 왔다면 사람이 부족할 일은 없을 텐데 말이야.”
그녀가 사람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기에 이렇듯 조급해하는 걸까?
사실 아밀리에의 정체는 뱀파이어였다.
뱀파이어 혈족은 마나와의 우수한 친화력을 타고나 뛰어난 마법사가 될 수 있었고, 신체 능력도 인간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햇볕에 약한 피부를 가져 낮에는 거의 활동할 수 없었고,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에게 끊임없는 공격을 받아 온 뱀파이어 혈족은 멸종의 위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뱀파이어들은 은밀히 인간과 공생을 도모했다.
뱀파이어는 살해당하지 않는 한 영원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들에겐 사라진 고대 마법에 대한 비밀스런 지식이 있었다.
그들은 비밀스런 마법을 필요로 하는 인간을 찾아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뱀파이어들은 고대 마법으로 인간을 돕고, 인간은 뱀파이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계약!
아밀리에와 루커스도 바로 그 계약을 맺은 것이다.
뱀파이어는 살아가기 위해 한 달에 30리터 정도의 피가 필요했다. 즉, 매달 6명 정도의 인간을 공급받아야 살아갈 수 있었다.
‘여섯 명 정도 빼돌리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흥! 괜히 나를 압박해 마음대로 부려 먹으려는 수작이야! 나쁜 놈 같으니라고!’
아밀리에는 화가 났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만약 루커스가 자신이 뱀파이어란 사실을 떠벌리고 다닌다면 다시 다른 계약자를 찾아 대륙을 떠돌아야 했다.
새로운 계약자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밀리에. 내가 어떻게든 해 보지, 뭐. 대신 시에티알의 상선 문제는 확실히 마무리해 줘.”
“알았어요. 대신 기한 내에 반드시 여섯을 구해요.”
“그건 염려하지 마! 일처리만 확실하게 해 주라고.”
연회가 끝나고 다음 날 오후.
‘드디어 완성했군.’
모용명은 먼젓번에 모은 얼굴 가죽의 약물 처리를 끝냈다.
몇몇은 상태가 좋지 않아 폐기했지만 상태가 좋은 것이 다섯 장이나 있었다. 그러나 질 좋은 가죽을 만들었을 뿐, 아직 인피면구를 완성하려면 갈 길이 멀었다.
사람의 얼굴은 저마다 크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
다행히 모용명은 얼굴 크기가 작은 편이라 가죽이 남는 인피는 있어도 모자란 것은 없었다. 그는 얼굴 크기에 맞춰 여분의 가죽을 잘라 냈다.
눈과 입의 크기를 맞춰 본 뒤 모자란 부분은 잘라 낸 가죽으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미리 제작한 특수한 약물을 발라 덧붙인 흔적이 보이지 않게 해야 했다.
이때 약물을 조금이라도 많이 바르면 윤기가 반질거리며 티가 나기 때문에 극도로 주의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이것으로 작업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아직 가장 중요한 작업이 남아 있었다.
얼굴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가죽이 아니라 뼈다.
완벽한 인피면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가죽 안쪽에 뼈를 대신할 보형물을 섬세하게 붙여야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실수하게 되면 인피면구로 쓰지 못하게 된다.
사람의 얼굴은 몸의 모든 신체 부위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부위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눈썰미가 예리한 사람에게 곧 들키게 되기 때문이다.
단 한 순간의 실수로 지금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그는 무공의 동작까지 응용해 가며 그야말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선체 전체가 흔들렸다.
콰앙!
작업에 열중하고 있던 모용명은 거의 완성 직전인 얼굴 가죽 하나를 자칫 망칠 뻔했다.
그는 금나수를 펼쳐 얼굴 가죽을 수습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뭐야? 갑자기?”
콰앙!
그때 또다시 엄청난 굉음이 울려 펴지며 선체가 뒤흔들렸다.
‘무언가 상선을 공격하는 모양이군!’
모용명은 그대로 경공을 펼쳐 선실 밖으로 나갔다.
“으헉! 무슨 일이야?”
“글쎄. 저도 잘……. 으악!”
바닥이 계속 흔들리는 바람에 승객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모용명은 보법을 펼쳐 복도를 지나 갑판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콰콰콰콰!
갑자기 잔잔하던 해수면이 뒤집혔다.
바다의 표면을 꿰뚫고 그 안에서 거대한 촉수가 파악 쏘아져 나왔다.
콰아아!
시커먼 촉수가 동시에 수면을 뚫고 올라오는 충격의 여파로 거대한 여덟 개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헛? 저건 도대체 뭐야?’
문어의 다리를 수백 배 확대하면 저런 모습이 될까?
바닷물 속에 어렴풋이 비친 모습도 여덟 개의 꿈틀거리는 촉수와 매끈거리는 머리통 등 흔히 볼 수 있는 문어와 상당히 흡사했다. 다만 크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
하지만 느긋하게 구경만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빨판과 돌기가 달린 거대한 다리들이 올라와 선체를 후려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아앙!
거센 충격에 선체 전체가 부서질 듯 흔들렸다.
그만큼 괴수의 크기는 거대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빨리 해치워야 해!’
그때 정체불명의 바다 괴수가 모용명이 서 있는 갑판을 향해 다리를 휘둘렀다.
쉐에에에엑―!
그는 물러서는 대신 괴물의 다리를 향해 전력을 다해 장력을 쏟아 냈다.
콰아앙!
강력한 힘이 그의 손바닥으로부터 일어나 괴수의 촉수를 강타했다.
충격으로 거대한 촉수가 일부분 터져 나가며 세차게 튕겨 나갔다. 상처에서 쏟아진 초록색 체액이 갑판 위로 쫘아악 쏟아졌다.
치이익!
괴수의 피에 치명적인 산성 독이 포함되어 있었는지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동시에 갑판 위에 구멍이 뻥 뚫렸다.
상처를 입은 괴물이 화가 났는지 그를 향해 여러 개의 다리를 동시에 뻗었다.
쉐에에에엑―!
모용명은 괴물의 다리들을 향해 두전성이의 절기를 펼쳤다.
파아앗―
두전성이의 신묘한 위력이 거대한 바다 괴수에게도 적용되었다.
세차게 날아오던 괴물의 다리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서로 엉켜 버렸다. 그 틈을 타 모용명은 재빨리 검을 휘둘러 괴물의 다리를 잘라 냈다.
슈아아아아악― 파악!
눈 깜짝할 사이 괴물의 거대한 다리를 향해 수십 번의 공격이 펼쳐졌다.
터엉― 텅! 텅!
꿈틀거리던 바다 괴수의 촉수 여덟 개 가운데 셋이 잘렸다. 커다란 촉수 덩어리가 갑판 위로 떨어지며 육중한 굉음과 진동이 울렸다.
꿈틀꿈틀!
잘린 촉수는 금방 죽지 않고 갑판 위를 휘저었다.
거기에 빨판 같은 것이 달려 있어 뒤늦게 갑판으로 몰려온 용병들이나 선원들에게 꽉 들러붙으며 몸을 조여 버렸다.
우드득!
“크아아악!”
“으아악!”
괴물의 촉수에 휘감긴 자들은 온몸의 뼈와 내장이 으스러져 절명해 버렸다.
다들 이 참혹한 광경에 흠칫 놀라고 압도되어 동료들을 도우려하기는커녕 우왕좌왕 물러서며 그저 이 잔혹한 촉수들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애썼다.
“으아악! 크라켄이다!”
“크라켄이 나타났다! 젠장맞을!”
크라켄(Kraken)!
바다의 공포 혹은 심해의 악몽 등 부정적인 갖가지 별명으로 불리는 이 거대한 바다 괴수는 적어도 바다에서 만큼은 드래곤도 이길 수 없다는 강력한 위용을 자랑하는 심해의 몬스터였다.
갑작스레 심해의 악몽과 마주치게 되었으니 그들이 저항할 의지마저 상실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바다 괴수인 크라켄은 지금 잔뜩 약이 올라있었다.
쉐에에에엑―!
촉수가 잘리는 바람에 화가 난 이 괴수는 나머지 촉수들을 휘둘려 그를 잡아채려고 애썼다.
모용명은 물러서는 대신 또다시 검을 움켜쥔 오른팔을 괴수를 향해 휘둘렀다.
슈아아아아아― 파아악!
터엉― 텅!
또다시 촉수들이 잘려 나가며 바다 괴수가 귀에 거슬리는 비명을 내질렀다.
케에에에에―
마치 최하층 지옥의 구멍에서 솟구쳐 나오는 듯 끔찍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
조각난 괴수의 촉수들!
갑판에 떨어진 촉수들은 또다시 주변 사람들을 휘감아 죽였다.
“크아아악!”
용병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다가 뭔가 걸려 넘어지기 일쑤! 뿐만 아니라 동료들에게 떠밀어 바다에 떨어지기도 했다.
바닷물 속으로 처박힌 자들은 어김없이 크라켄의 촉수에 휘감겨 그대로 섬뜩한 이빨이 난 입안으로 직행!
우두둑하고 잘게 씹혀서 바다 괴수의 간식이 되어 버렸다.
한편 상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마법으로 일으킨 바다 안개(Sea Mist)에 몸을 숨기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그자의 정체는 바로 뱀파이어인 아밀리에!
그녀는 갑판 위에서 바다 괴수를 상대하는 사내의 모습에 흠칫 놀라며 생각에 잠겼다.
‘이럴 수가?! 저 인간이 혼자서 크라켄(Kraken)을 상대하고 있어! 정말 인간이 맞기는 한 거야?’
아밀리에는 고대 마법 중 하나인 콤무니오(Communio)로 바다 괴수 크라켄을 길들였다.
드래곤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크라켄을 바다에서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저 사내는 순수한 무력만으로 크라켄을 해치우고 있었다.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때 그 사내의 공격에 또다시 크라켄의 촉수들이 잘려 나갔다.
슈아아아아악― 파아악!
이제 남은 촉수의 수는 고작 3개!
크라켄이 잘린 촉수를 재생하는데 적어도 반나절의 시간은 필요했다. 촉수가 모두 잘려 나가면 무엇으로 저런 괴물 같은 사내를 상대할 것인가?
조금만 더 늦으면 오히려 바다의 악몽인 크라켄이 목숨을 잃게 될 상황이었다.
자신의 바다 괴수를 애완동물처럼 몹시 아끼던 아밀리에는 크라켄에게 황급히 에그레고르 마법을 펼쳐 정신을 연결한 뒤 메시지를 보냈다.
―어서 도망쳐! 크라켄.
바다 괴수는 여주인의 명령대로 바다 깊숙이 잠수해 버렸다. 그러나 모용명은 크라켄이 그대로 도망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도망치려 하다니! 어림없다!’
그는 크라켄을 쫓아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바닷물 속에서는 당연히 심해에서 태어나 자라온 크라켄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러나 천근추(千斤墜)는 몸의 무게를 수백 배로 늘여 주는 무공이라 쏜살같이 떨어져 내릴 수 있었다.
크라켄에게 접근한 모용명은 바다 괴수를 향해 거파련교권을 펼쳤다.
슈아아아앙― 파앗!
경력에 적중당한 크라켄은 몸의 체액이 모조리 흔들리며 어지러움을 느꼈다.
바다 괴수의 움직임이 잠시 멈춘 순간, 그는 단전의 진기를 모조리 끌어 올려 쇄심장을 펼쳤다.
장력이 바닷물을 관통하며 맹렬하게 소용돌이쳤다. 그 흉흉한 기세는 마치 해룡(Sea Dragon)이 크라켄을 집어삼키려 달려드는 것 같았다.
슈아아아아앙―!
‘앗! 안 돼!’
깜짝 놀란 아밀리에가 모용명을 향해 마법을 펼쳤다.
“프로즌 스톰(Frozen Storm)!”
슈아아아아― 쩌적쩌저적!
바닷물 속에 맹렬한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그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소용돌이가 스치는 곳은 모두 얼어붙어 얼음 기둥이 생겨났다.
기습을 받은 모용명은 프로즌 스톰을 향해 두전성이를 펼쳤다.
샤아아아―
두 손으로 가볍게 원을 그리자 두전성이의 신묘한 조화가 그 안에서 일어났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막에 부딪힌 것처럼, 튕겨 나간 마법이 아밀리에를 향해 곧장 직격했다.
슈아아아아―!
“앗! 앱솔루트 베리어(Absolute Barrier)!”
그녀는 황급히 6서클 방어 마법인 앱솔루트 베리어를 펼쳤다. 6서클 이하의 모든 마법은 이것으로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모용명은 마법을 튕겨 내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녀를 향해 쇄심장을 펼쳤다.
슈아아아아앙― 파아앙!
“끼앗!”
쇄심장의 강력한 파괴력에 베리어가 유리처럼 부서져 버렸다.
충격의 여파에 휘말린 그녀는 의식을 잃고 해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순간!
짧은 틈을 노려, 크라켄이 전력을 다해 다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쉐에에에엑―!
그러나 모용명은 그 정도 공격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신법을 펼쳐 가볍게 공격을 흘려 낸 그는 괴물을 향해 쏘아져 나가며 쇄심장을 펼쳤다.
슈아아아아아앙― 쿠아앙!
강맹한 경력이 바다 괴수의 몸속을 파고들어 기어이 심장을 부숴 버리고 말았다.
크라켄은 바다의 재앙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흐윽! 크라켄!’
크라켄의 몸통이 산산조각으로 박살 나는 광경을 바라본 아밀리에의 가슴속에는 뭔가 뜨거운 것이 확 치밀어 올랐다.
분노가 그녀의 정신과 몸을 일깨웠다.
아밀리에는 충격으로 온몸이 아픈 것도 잠시 잊고 마법 스펠에 집중했다. 바닷물 속에 빠져 시동어를 외칠 수 없었기 때문에 수인(손동작)으로 시동어를 대신했다.
수인에 반응해 바닷물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작은 소용돌이들이 일어나 마치 새끼줄을 꼬듯 하나로 뭉쳤다. 하나로 엮인 소용돌이가 맹렬히 회전하며 모용명을 향해 쏘아진 화살처럼 곧장 날아갔다.
쉐에에에에엑―!
아밀리에의 반격을 눈치챈 모용명은 공격을 피하는 대신 소용돌이를 향해 곧장 장력을 격발했다.
슈아아아아아아앙― 파아앗
날카롭게 쏘아져 나간 장력이 소용돌이 한복판을 거대한 송곳처럼 꿰뚫어 버렸다!
깜짝 놀란 에밀리에는 다급히 얼음 방패 주문을 외우려 했지만 아쉽게도 방패가 형성되는 속도가 약간 느렸다.
무시무시한 장력이 완성되지 않은 마법 방패를 후려쳤다.
콰아아앙!
방패를 부숴 버리고도 기세가 별로 죽지 않은 쇄심장이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우두둑!
갈비뼈가 왕창 부서지고 심장이 멎는 충격에 아밀리에는 혼절해 버렸다.
기절한 그녀의 입이 벌어졌고 바닷물을 잔득 마시며 심해 밑바닥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꼬르륵!
모용명은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추유영신법이라는 수공(水功)을 펼쳐 그녀를 향해 접근했다.
그날 밤, 전날 밤에 이어 다시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이렇듯 연이어 연회가 개최된 이유는 모용명이 바다 괴수 크라켄을 해치웠기 때문이었다.
원래 바다에서 크라켄을 만나면 그걸로 끝이었다.
선박이 부서지고 사람들은 모조리 바다 괴수의 먹잇감이 되고 마는 것이다. 크라켄을 물리친다는 것은 원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용명은 그 거짓말 같은 일을 해냈다.
당연히 그를 향해 숱한 찬사와 경외심이 담긴 눈빛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크라켄 슬레이어(Kraken Slayer)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썩 맘에 들진 않지만 별호(別號)가 생긴 것은 좋은 일이지. 명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니까.’
모용명은 나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한편, 상단주 카엘도 기분이 무척 좋았다.
바다 괴수 크라켄의 가치는 무궁무진했기 때문이다.
크라켄이 바다의 재앙 혹은 공포라고 불리게 된 것은 아무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잡기는커녕 침몰당하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원래 공포와 경외심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바다 괴수인 크라켄은 거의 신격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크라켄의 피를 마시면 늙지 않는다거나, 바다 괴수의 간을 먹으면 정력이 세진다거나 하는 허무맹랑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물론, 카엘이 그런 소문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매우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크라켄을 잡은 것은 시온이다. 그가 소유권을 주장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인데…….’
카엘은 모용명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폈다.
그러나 모용명은 이미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굳이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겠지? 그가 가진 모든 능력과 수단을 동원해 크라켄을 비싸게 판매한 뒤 그때 소유권을 주장하는 게 좋겠군. 그래야 훨씬 더 큰 금액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
여하튼 그건 그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어서 이 따분한 파티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멈추고 선실로 돌아가 개인적인 일에 집중하는 것이 그가 바라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단의 중요 인물들과 안면을 익혀 둬서 나쁠 것은 없기에 내키지는 않지만 연회장에 나와 있는 것이다.
되도록 간단히 인사를 나눈 모용명은 카엘을 향해 말했다.
“카엘 님! 저는 선실로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조금 피곤하군요.”
그의 눈치를 살피느라 신경이 쓰였던 카엘이 반색하며 말했다.
“저희가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군요. 피곤하실 텐데 어서 가서 푹 주무십시오.”
모용명은 선실로 내려가자마자 문부터 잠갔다.
덜컥―
그의 침대에는 의식을 잃은 아밀리에가 누워 있었다.
크라켄을 쓰러뜨린 후, 모용명은 그녀를 들쳐 업고 와서 자신의 침대에 던져두었던 것이다.
‘이제 이 여성을 고문해 정체를 알아내야겠군.’
섣불리 정신계 마법이나 귀령제혼술을 쓸 수는 없었다.
거대한 바다 괴수를 부릴 정도면 상당히 수준이 높은 마법사로 보였기 때문에 그녀의 정신을 파괴하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구슬려 수하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마법이나 귀령제혼술을 쓰지 않아도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는 건 간단했다.
뼈와 살이 모조리 뒤틀리는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되는 분근착골! 그 끔찍한 수법을 펼치면 묻지 않는 것까지 낱낱이 토설하게 되리라.
모용명은 아밀리에의 혈도를 눌러 분근착골을 펼치기 위해 침대로 다가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아밀리에가 갑자기 입을 벌리며 숨결을 토해 냈다.
“하아―!”
끔찍한 갈증에 시달리기라도 하듯 더운 숨결을 토해 내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지 야릇한 느낌을 풍겨 냈다.
실제로 그녀는 식도가 타는 듯 극심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물이나 포도주같이 밍밍한 것들이 아니었다.
뜨겁고 끈적끈적한 피!
날카로운 송곳니로 동맥을 물어뜯고 생명수처럼 콸콸 용솟음치는 신선한 피를 마시는 자신의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으음…….”
그녀는 나지막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였다.
그러는 바람에 눌러쓴 후드가 벗겨지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희미한 등잔불에 비친 그녀의 피부는 눈부시도록 희어서 차라리 창백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흑단같이 검은 머리카락에는 은은히 푸른빛이 감돌았고, 오뚝한 콧날 아래 붉은 입술의 윤곽은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