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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엠페러 2

1화

Chapter 1.
해적단의 두목, 루커스



“좋군요!”
모용명은 강철 가면을 쓴 자신의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사신을 연상시키는 강철 가면(Iron Mask)은 그를 북해의 빙하보다 더 차갑고 냉혹한 모습으로 만들어 주었다.
바로 이 모습으로 해적단의 본거지를 치고 두목인 루커스를 틀어쥘 것이다.
해적 두목인 루커스만 손에 넣게 된다면 손쉽게 해적 토벌에 혈안이 되어 있는 카로스 해의 군주 제라드 백작의 신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가면도 구했으니 이제 아밀리에가 몸을 숨기고 있는 선실로 돌아가야 했다.
그녀를 통해 루커스 해적단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아내야 했다.
“전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럼 천천히 말씀들 나누시길 바랍니다.”
“벌써 가려는 겁니까? 선실에 무슨 보물 항아리라도 숨겨 두었나요?”
상단주 카엘이 농담처럼 하는 말에 식탁에 둘러앉아 있던 상단의 사람들은 몹시 즐거운 듯 웃었다.
“하하하!”
딱히 우스울 것 없는 이야기는 없지만 상단주의 비위를 맞추려 그러는 것이다.
호위대장인 라혼도 상단주의 말을 거들어 한마디 했다.
“너무 방 안에만 계시는 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시온 님.”
“충고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만.”
모용명은 그저 간단히 대답한 뒤 밖으로 나갔다.
멜리사가 아쉬운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좇으며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침소로 돌아오자 아밀리에가 그를 반기며 말했다.
“돌아왔군요! 음식은 좀 챙겨왔어요?”
부끄러운 마음에 진작 말하진 못했지만 그녀는 사실 아까부터 배가 몹시 고팠다.
모용명은 주방에서 가져온 빵과 포도주를 건네며 말했다.
“계속 숨어 있기 불편하지? 그래서 네 얼굴을 조금 바꿔야겠다.”
“네? 얼굴을 바꾸다니? 무슨 말이에요?”
그녀가 반문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본론을 이어 갔다.
“그리고 루커스 해적단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말해 줘. 물론 루커스에 대한 것도! 그리고 네 마법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털어놔 줬으면 좋겠어. 내가 알아야 될 사항은 뭐든 미리 말해 두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지만 우선 식사부터 마쳐야겠어요. 그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겠죠?”
“물론이지.”
잠시 후 아밀리에는 그가 시키는 대로 침대에 얌전히 누웠다. 모용명은 완성된 인피면구 중 하나를 그녀의 얼굴에 붙였다.
“잠깐! 이건 뭔가요?”
“얼굴을 위장할 때 쓰는 일종의 가면이야. 조금 따가울 수도 있지만 피부에 해로운 건 전혀 아니니까 염려하지 마.”
“으……. 감촉이 마치 진짜 사람의 얼굴 가죽 같군요! 이거 뭐로 만든 건가요?”
모용명은 대답하는 대신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가죽이 얼굴에 완전히 달라붙는 데는 차를 한 잔 느긋이 마실 정도의 시간이 걸릴 거다.”
“후후! 한 잔 마실 시간이라니. 표현이 참 재미있군요.”
아밀리에는 생소한 강호식 표현에 재미있어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용명은 설명에만 충실하며 재빨리 말했다.
“가죽이 마를 때까지는 될 수 있는 한 말을 아끼고 크게 웃거나 찡그리지 마. 가죽이 들뜨거나 이상한 주름이 잡힐 수도 있으니까.”
“쳇! 요구 사항이 참 많네요. 아! 알았어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요.”
모용명은 가죽의 가장자리. 즉, 가죽이 끝나는 부분에 경계선이 생기지 않도록 특수한 약품을 덧발랐다.
혹시라도 가죽이 들뜨거나 부자연스러운 부분은 없는지 세심하게 체크했다.
‘인피면구 제작에 쓰이는 재료를 대부분 바꿔 버려서 과연 잘될지 걱정했는데, 이 정도면 훌륭하게 완성됐군.’
잠시 후, 모용명은 그녀에게 말했다.
“다 됐어. 거울을 보고 확인해 봐.”
“휴우. 겨우 끝났군요!”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본 아밀리에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정말 감쪽같군요! 변장한 얼굴이란 걸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겠어요. 그런데 왜 하필 남자 얼굴인가요?”
인피면구의 재료로 쓰인 얼굴 가죽은 쓰러진 해적들과 용병들의 것을 벗겨 낸 것이다. 여성들은 주로 안전한 선실에 대피해 있었으므로 얼굴 가죽을 얻을 수 없었다.
남자의 얼굴 가죽으로 여성의 얼굴을 만들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좀 더 섬세한 기술이 요구되므로 아직 그 단계까진 무리였다.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것으로 만족하라고. 사람들과 마주쳐도 될 수 있는 한 말을 하지 마. 남자 목소리를 흉내 내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아예 벙어리인 척하는 것도 좋겠군!”
그의 지시에 아밀리에는 보기 흉하지 않을 정도로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말했다.
“흥! 이제 보니 시온 님은 제가 그저 조용하길 바라는 거로군요. 그러니 어제부터 병을 치료한다거나 또는 가면이 굳을 때까지 말을 하면 안 된다는 등의 이유로 내 입을 틀어막은 거죠?”
“그걸 안다면 이제부터 말수를 줄이도록 해. 나는 차분하고 조용하게 할 일을 하는 수하가 좋으니까.”
“네. 물론 그러시겠죠!”
아밀리에는 불만인 듯 투덜거렸지만, 사실은 그와 조금이라도 더 자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일부러 투정을 부리는 것이었다.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을 좋아한다니. 이제부터는 너무 촐싹대지 말고 얌전하게 굴어야겠어.’
그런 생각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그때 모용명이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이제 루커스 해적단에 대해서 아는 대로 설명해 줘.”
“네. 루커스 해적단은…….”
루커스 해적단은 카로스 해에 활동하는 해적들 중에서 가장 세력이 컸다.
그들이 그렇게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뱀파이어이자 고대 마법을 알고 있는 마법사인 아밀리에 덕분이었다.
그녀는 고대 마법 중 하나인 콤무니오로 바다 괴수 크라켄을 길들여 은밀히 루커스 해적단을 도와 왔다.
또한 루커스는 그로노스 상단 등과 은밀한 계약을 맺어 경쟁 상단을 공격하는 등, 돈이 될 만한 일은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막대한 자금을 긁어모으는 이유는 해적단의 규모를 키워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몰락 귀족으로 예전에는 자작의 신분으로 자신의 영지를 다스렸어요. 그런데 카로스 해 주변 지역을 장악한 제라드 백작의 흉계에 휘말려, 영지와 가족을 잃고 죄인의 몸이 되었죠.”
“그래서 해적들을 규합해 제라드 백작에게 복수하려는 건가?”
“네! 바로 그래요.”
모용명은 원래 제라드 백작의 휘하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에 그자의 밑에서 명성과 인맥을 쌓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제라드 백작에게 원한을 가진 해적 두목이라……. 그거 나쁘지 않은데?’
그의 머릿속에는 루커스의 원한을 이용할 계획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잘 만하면 계획보다 훨씬 빨리 명성을 쌓고 세력을 규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들의 본거지와 병력 규모에 대해서 설명해 줘. 선박의 숫자와 식량 창고의 위치 등 필요한 정보는 모두 다!”
아밀리에는 숨김없이 모두 말해 주었다.
“좋아! 해적단에 대한 정보는 그 정도면 되었으니 이제 너에 대해서 이야기해 봐!”
“제 개인사보다는 마법사로서의 능력이 궁금한 거겠죠?”
“알면 입 아프게 묻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
“네. 저는…….”
그녀는 자신에 대해 설명하려다 잠시 멈칫했다.
‘이야기하다 보니 시온 님은 아무래도 내가 뱀파이어 혈족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아. 이제 난 더 이상 뱀파이어가 아니니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
아밀리에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흠이 될 수 있을 만한 과거의 비밀을 연인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여성의 심리 때문이었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면 혹시 싫어하지 않을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뱀파이어 혈족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자신을 치료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그 질문 역시 뱀파이어란 사실을 밝히기 싫어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자신이 뱀파이어란 사실은 쏘옥 빼 버리고 다른 것들은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아밀리에는 뱀파이어 특유의 마나 친화력을 바탕으로 현재 7서클에 올랐다.
페겔비에난 대륙에 알려진 8서클 대마법사는 모두 다섯 명밖에 없으니, 숨겨진 자들을 감안해도 그녀가 보기 드문 고위 마법사임엔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은 인간들에게 전해지지 않는 고대 마법의 일부를 알고 있다는 점이다.
정신감응 마법인 에그레고르(Egregor)나 괴수를 길들이는 콤무니오(Communio) 마법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쓸 수 있는 고대 마법은 그 두 가지밖에 없어?”
“네! 나머지는 아직 수련 중이라……. 실전에서 쓸 정도가 되려면 수십 년은 더 필요해요.”
“그 문제는 시간을 두고 같이 연구해 보기로 하고.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다른 뱀파이어 혈족은 없어?”
“예전에는 연락하고 지내는 혈족들이 꽤 있었는데, 지금은 연락이 끊어져 버려서……. 아마도 인간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어딘가 꼭꼭 숨어 있겠죠.”
“그렇군.”
모용명은 그녀에게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루커스를 포섭할 계획을 짜기 위해 고심했다.
‘좋은 말로 설득한다고 순순히 내 밑에 들어올 리는 없겠지? 그렇다면 일단 녀석의 기세를 꺾기 위해 해적단의 본거지를 쳐야겠군!’
그는 루커스를 죽음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을 계획이었다.
간절히 그의 자비를 간구하게 되었을 때, 그때야 비로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울 생각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원래 어리석고 간사한 것이라서.
절박한 위기에 직면해야 간절함이 생기고, 절망의 끝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보면 필사적으로 움켜쥐게 되는 것이다.
“아밀리에! 할 수 있는 마법을 모두 말해 봐.”
“네? 전부요?”
“그래. 시간과 인내심은 충분하니까. 찬찬히 설명해 줘.”

그로부터 이틀 후.
선장실에 수석 항해사인 에밀이 찾아왔다.
“선장님! 며칠째 바다 안개가 걷히지 않아 큰일입니다. 지금은 안개가 끼는 시기도 아닌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짙은 안개가 끼다니.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수석 항해사는 원래 바다 측량과 별자리 관측을 주업으로 한다. 자욱한 안개 때문에 하늘을 볼 수 없으니 그가 답답해할 만도 했다.
“다행히 이그로스 항구까진 일직선의 항로이니 별일이야 있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선장을 수석 항해사를 달래듯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이제 3시간 정도면 항구에 도착할 테니 너무 조바심 말게. 안개가 걷힐 때까지 이그로스 항에 정박하다가 출발하면 되지 않겠는가?”
“알겠습니다! 선장님.”
그런데 그때 갑판장이 선장실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오며 소리쳤다.
“선장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로 그리 호들갑을 떠는 건가? 브루노.”
“저길 보십시오!”
갑판장 브루노가 손가락으로 갑판 너머를 가리키는 순간, 갑자기 자욱한 바다 안개가 걷히며 주변의 시야가 확 트였다.
그러자 선장과 수석 항해사가 무언가에 놀라며 동시에 중얼거렸다.
“어엇?”
“뭐…… 뭐야? 이건!”
그들이 이처럼 놀란 이유는 상선의 바로 앞에 거대한 섬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항로를 따라 운행했다면 도중에 섬 같은 것이 나타날 리가 없었다.
“젠장! 해적선이다!”
“해적단의 본거지로 왔다!”
“아아! 망했다!”
선원들은 그때라도 배를 돌려 달아나려 했지만, 이미 상선을 발견한 해적들이 수십 척의 해적선을 띄워 추격하고 있었다.
이제 충돌을 피할 방법은 없다!
되는 대로 맞서 싸우는 게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뿐.
사실 바다 안개가 생긴 것은 아밀리에의 마법 때문이었다.
그녀는 모용명의 지시대로 상선을 둘러싼 넓은 범위에 바다 안개 마법을 펼친 것이다. 또한 조타수가 멋대로 키를 틀어 방향을 바꾸게 된 것도 그녀가 수작을 부린 것이다.
모용명은 조금도 지체 없이 해적단의 본거지를 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단의 총수인 카엘이 사지로 쳐들어가는 그의 작전에 동의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약간의 편법을 사용해 상선을 해적단의 본거지로 끌어들인 것이다.
선원과 용병들은 그로 인해 혼란에 휩싸였지만, 모용명은 지극히 태연한 얼굴로 마치 유람이라도 나온 듯 갑판 위에 서 있었다.
“아밀리에, 이 기회에 실력 발휘 좀 하지?”
“좋아요! 두 눈 똑똑히 뜨고 잘 봐 두라고요.”
아밀리에는 사랑하는 이 앞에서 자랑하듯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뽐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다가오는 해적선을 향해 소리를 죽여 속삭이듯 캐스팅을 마쳤다.
완성된 마법에 그녀가 가진 마나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거스트 오브 윈드!”
슈아아―
강력한 마나의 파동에 주위의 공기에 서서히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소용돌이의 파괴력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해적선들을 향해 사나운 폭풍을 쏘아 냈다.
슈아아아아앙! 쫘아악―
폭풍에 바닷물이 휘말려 올라가며 거대한 물기둥이 솟구쳐 장관을 연출했다.
바닷물과 바람이 격렬히 회오리치며 칼날같이 예리해졌다.
쫘아악―!
칼바람이 해적선의 돛을 스치며 찢어 버렸다.
폭풍 때문에 수 미터에 달하는 거친 파도가 일어나 해적선의 선체를 후려쳤다.
콰아앙!
폭발음과 함께 돛대가 부러지고 선체의 측면이 부서져 나갔다. 해적선 몇 척은 거친 파도에 휘말려 그대로 뒤집혀 버리기도 했다.
순식간에 수십 척의 해적선이 무력화된 것이다.
‘마법이라는 것도 생각보다 대단하군! 고위 마법일수록 주문을 완성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파괴력 하나만큼은 무시하지 못하겠군.’
아밀리에는 모용명의 얼굴에 희미하게 감탄의 표정이 어리자 만족한 듯 환하게 웃어 보였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이번 마법에 보유한 마나의 절반 이상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아밀리에는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의기양양한 어조로 말했다.
“어때요? 제 실력이.”
“마무리가 허술하군! 저길 좀 봐.”
“네? 그게 무슨…….”
아밀리에는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적들이 새로운 해적선들을 동원해 바다로 몰려오고 있었다.
‘시온 님에게 자랑 좀 하려 했더니, 저것들이 초를 치네!’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바다를 향해 마법을 펼쳤다.
“프로즌 웨이브(Frozen Wave)!”
쩌적― 쩌저적!
그녀의 마법에 상선 주위의 바다가 그대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원래 바닷물은 염분 때문에 민물보다 빙점이 약 2도 정도 낮다. 하지만 끊임없이 대류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바닷물 전체의 온도가 내려가지 않는 한 얼어붙지 않는다.
게다가 바다는 너무나 넓고 깊기 때문에 바닷물 전체를 ―1.91℃로 내려가게 하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아밀리에는 압도적인 마력을 바탕으로 주위의 바닷물을 동시에 얼려 버린 것이다.
갑판 위의 선원들은 당황한 듯 소리쳤다.
“엇? 뭐야?”
“갑자기 왜 얼음이?”
결과적으로 해적선과 상선을 가릴 것 없이, 전부 얼음 속에 갇혀 버렸다.
아밀리에는 마나 고갈로 거칠어진 숨결을 가다듬으며 후회에 잠겼다.
‘뽐내고 싶은 마음에 마나를 너무 많이 써 버렸어……. 마법 수련생들도 하지 않을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바보같이! 정신 차려. 아밀리에!’
그런데 그때 모용명이 미풍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수고했어, 아밀리에.”
아밀리에는 그의 한마디에 하늘에 붕 뜨는 듯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달콤한 여운을 즐기기도 전에 그는 갑판을 박차고 얼어붙은 바다를 향해 뛰어내렸다.
타앗―!
‘앗! 뭐라고 말대꾸할 틈은 주라고요. 흥! 야속한 사람 같으니!’
그녀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조금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한편 그녀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모용명은 경공을 펼쳐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 나갔다.

모용명은 카엘에게 선물 받은 강철 가면을 얼굴에 썼다.
철컥―
매끄러운 표면이 햇빛을 반사하며 금속 특유의 차가운 빛을 발산했다. 그것은 그의 냉혹하고 강인한 면모를 적들에게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와아아아!”
이에 맞서듯 해적선에서 내린 해적들이 기세를 올리기 위해 함성을 지르며 모용명을 향해 달려왔다.
큼직한 양손 도끼와 날카로운 금속이 박힌 철퇴!
부우우웅―!
슈아아아아아앙―!
해적들은 그를 향해 보통 사람이라면 보기만 해도 기가 죽을 살벌한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나 모용명은 대담하게도 종이 한 장 정도의 간격만 두고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는 여유를 보여 줬다.
겉보기에는 위험천만한 곡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가 적의 모든 공격 궤도를 예측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와아아― 죽여라!”
“이쪽이다!”
마치 약 올리듯 해적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자 해적들은 그의 뒤를 쫓아 한곳으로 몰려들었다. 마치 사냥감을 몰이하듯 적을 한곳에 모은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모였군!’
모용명은 단전의 진기를 끌어 올려 오른손에 모았다.
그의 주먹에 붉은 빛이 어른거렸다. 해적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자 경력이 휘몰아치며 세차게 뻗어 나갔다.
슈아아아아아아― 파아앙!
“크아아앗!”
통쾌한 타격음과 함께 거파련교권의 경력이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충격으로 혈관 속의 피가 모조리 뒤흔들린 해적들은 모조리 빙판 위에 우당탕 쓰러져 버렸다.
모용명은 눈빛을 써늘히 빛내며 애써 몸을 일으키는 녀석들을 향해 쇄심장을 내뻗었다.
슈아아아아앙― 콰아앙!
“크아아아악!”
무시무시한 장력이 그들의 가슴을 파고들며 심장을 산산이 부숴 버렸다.
그는 다가오는 적들을 쇄심장으로 후려쳤다.
콰아앙! 콰아앙!
“크아아아악!”
“아아악!”
사방이 비명 소리로 가득 차고 그들이 쏟아 낸 피가 빙판 위를 온통 붉게 물들였다.
장력에 맞은 적들은 반드시 피를 토해 내며 죽어 버렸다. 마치 저항할 수 없는 대자연의 재앙이 해적들을 덮친 것 같았다.
그때 해적들 중 누군가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으아악! 죽음의 사신이다!”
“사신(Demon of Death)이다! 사신이 찾아왔다!”
해적들은 원래 미신에 약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대자연의 재앙을 겪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바다는 평소에 잔잔하지만 갑자기 거센 파도가 치고 태풍이 불며 수많은 바다 괴수들! 그리고 빙하 충돌이나 암초 등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그들은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개인적인 경험과 각지의 소문을 토대로 만들어 낸 미신들로 극복하려 했다.
바다 괴수들이 신격화된 것도 해적들이 두려움을 미신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지금도 그들은 모용명이란 두려운 상대와 마주치게 되자 대륙에 퍼져 있는 사신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신은 죽음이 임박한 자들의 눈앞에 강철 마스크를 쓰고 나타난다! 삶에 미련이 많은 영혼들은 사신들에게 살려 달라고 눈물로 호소한다. 그들의 절실한 감정에 흔들려 임무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강철 가면을 쓴다. 사신들의 강철 가면(Iron Mask)은 착용자의 정신을 사막처럼 삭막하게 하고 북해의 빙하보다 더 차갑고 냉혹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하여 사신들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사람들의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 때문에 강철 가면은 무시무시한 위용을 내뿜게 되었다.
“강철 가면을 쓴 죽음의 사신이다!”
“으아아악! 살려 줘!”
공포에 질린 해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했다.
모용명은 굳이 도망치는 적들을 쫓지 않았다. 그가 노리는 목표는 이런 조무래기들이 아니라 해적대장 루커스였기 때문이다.
타앗―!
해적들이 흩어지자 모용명은 즉시 경공을 펼쳐 섬을 향해 달려갔다.

루커스 해적단의 본거지인 에페론 섬.
그들의 본거지는 섬의 북동쪽에 위치한 동굴 계곡이다.
동굴 계곡이라 불리는 이유는 계곡을 둘러싼 절벽에 마치 구멍 난 치즈처럼 수백 개의 동굴 입구가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해적들에게 언제나 일거리가 넘쳐나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언제나 그렇듯 루커스는 자신의 거처에서 늦은 오전까지 미모의 노예들과 뒹굴며 더운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하앗! 하아!”
그들 중에는 노예 상인에게 사들인 미녀들도 있고 상선을 덮칠 때 데려온 여인들도 있었다.
루커스는 특히 귀족 출신의 여인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했다.
비록 해적들에게 붙잡혀 비참한 처지가 되었지만 그녀들에겐 아직도 은은한 기품이 풍겼다. 어쩔 수 없이 몸을 허락하지만 징그러워하거나 역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달까?
그는 고귀한 여인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겼다. 그러면서 한순간에 귀족의 신분에서 해적으로 추락하며 망가진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여인들을 마음껏 농락하며 마약 같은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처지를 모두 잊을 수 있었다.
“하앗! 그래, 좀 더!”
상상 속에서 그는 예전의 자작 신분으로 돌아갔다. 그때는 마음먹기만 하면 영지의 모든 여자들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었다. 모두들 자신의 눈에 들어 비밀스런 정부라도 되길 바라며 기꺼이 몸을 던졌다.
그녀들은 그를 위해 기꺼이 교태를 부리며 아름답게 꾸민 얼굴로 열에 들뜬 신음을 토해 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를 흥분시키고 아이를 갖기를 원했다.
오직 폭발할 것 같은 욕망에 휩싸여 행위가 절정에 도달할 때쯤.
그의 욕망이 세차게 분출하기 바로 직전 갑자기 해안가 쪽에서 신호탄이 터졌다.
피우웅― 콰앙!
폭발음과 함께 푸른 연기가 솟구쳤다.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에 흠칫 놀라는 바람에 절정의 순간을 제대로 음미할 사이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
흥이 식어 버린 그는 짜증스런 얼굴로 달라붙은 여자를 거칠게 밀쳐 내며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젠장! 무슨 일이야?”
“이, 일급 신호입니다! 두목님!”
일급 신호는 스무 척 이상의 군선(軍船)들이 몰려왔을 때나 터뜨리는 것이었다.
‘뭐야? 제라드 백작이 군선들을 보내 기습하기라도 한 건가?’
위기감에 번쩍 정신이 든 루커스는 즉시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며 벌거벗는 근육질의 몸과 묵직한 아랫도리가 그대로 드러났으나 그는 물론 주위의 해적들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사내들뿐인데다 상황이 너무 급박해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루커스는 주위로 몰려온 덩치들을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어떻게 된 거지? 보고해 봐!”
“누군가 배를 몰고 해안가를 기습해 왔습니다! 근처에 있던 수하들이 즉각 응수했습니다만 신호탄으로 보아 모두 당한 듯합니다!”
“적이 누군지도, 적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도 모른단 말이야? 지금 그걸 보고라고 해!”
루커스는 버럭 소리를 치며 수하를 향해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파악!
“커억!”
완력과 마나가 실린 주먹에 얻어맞은 녀석이 바닥에 쓰러졌다.
루커스는 가문의 마나 코어(내공심법)를 익혔기 때문에 상대의 코와 광대뼈가 부서지며 왈칵 피가 쏟아졌다.
그러나 해적들은 두목이 도끼로 내려찍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테니까.
수하들은 불똥이 튈까 두려워 얼른 고개를 숙이며 한 목소리로 외쳤다.
“죄송합니다! 두목님!”
“이 한심한 것들을! 그냥 확!”
루커스는 원래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상선을 침몰시키라고 보냈던 아밀리에가 깜깜무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망할 뱀파이어 년이 튄 건가?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 진하게 깔아뭉갤 걸 그랬군!’
아밀리에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자 입맛이 더욱 썼다. 천천히 즐기려고 공을 들여 왔는데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았다.
“멍청이 서 있지만 말고! 다들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 이 쓸모없는 녀석들!”
“네! 두목.”
루커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하들은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불통이 자신에게 튀기 전에 잽싸게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북풍처럼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애쓸 필요 없다. 너희들의 적은 바로 여기 있으니까!”
그 소리를 쫓아 루커스가 눈길을 돌리자 계곡 한복판에 강철 마스크를 쓴 사내가 태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대범한 거야? 멍청한 거야?’
루커스는 그가 진정한 실력자인지 아닌지 눈대중만으로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는 아직 상대의 기세를 읽어 낼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