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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확신이 들지 않을 때는 무조건 조심하는 것이 상책!
루커스는 은밀히 수하들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근처에 다른 적들이 숨어 있지 않은지 주변을 살피라는 신호였다.
그와 동시에 강철 마스크를 향해 소리쳐 말을 걸었다.
수하들이 그를 포위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 두려는 속셈이었다.
“네 녀석은 누구냐?!”
모용명은 지극히 차가운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너희들의 영혼을 거두러 온 죽음의 사신이다!”
그의 광오한 말에 루커스가 코웃음 치며 빈정거렸다.
“흥! 웃기는군! 설마 혼자서 쳐들어온 건 아니겠지?”
모용명은 그를 항해 손바닥을 쫘악 펼쳐 보이며 외쳤다.
“너희 같은 하찮은 해적들을 상대하는 건 이 한 손으로도 충분하다!”
그때 루커스는 포위가 끝났다는 수하들의 손짓을 확인한 후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혼자 오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미친놈이군. 그렇다면 소원대로 해 줘야겠지?’
그는 수하들을 향해 힘차게 외쳤다.
“모두 공격해라!”
두목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던 해적들은 모용명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쉐에에에에엑―!
수백 개의 화살이 시커먼 구름이 되어 하늘을 가렸다.
모용명은 어둠 속에 눈빛을 번뜩이며 먼지를 털 듯 소매를 휘둘러 작은 원을 그렸다.
샤아아아―
두전성이의 신묘한 절예가 발휘되자 화살들이 모조리 작은 원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와 거의 동시에 빨려 들어왔던 화살들이 튕겨 나갔다. 화살을 쏘아 낸 힘에 모용명의 공력이 더해졌다!
놀랍게도 수백 개의 화살은 정확히 화살을 쏜 주인에게 되돌아갔다. 그리고 날아올 때보다 두 배는 빨라진 화살이 해적들의 몸을 꿰뚫었다.
쉐에에에에에― 파악!
“크아아아아악!”
적들은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루커스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뭐, 뭐야? 이건? 저 녀석이 지금 뭘 한 거야?”
모용명은 예전보다 증가된 내공을 바탕으로 두전성이의 오묘한 위력을 마음껏 떨쳐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 불만인지 그의 얼굴은 어두워져 있었다.
‘아밀리에에게 금침대법을 펼친 후유증 때문인지 소모된 공력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군! 게다가 내력 조절이 잘되지 않는다.’
마치 땜의 제방이 터진 것처럼 공격을 펼칠 때마자 한꺼번에 내공이 쏟아져 나왔다. 내공에 대한 정밀한 통제력이 흐트러져 한 번에 폭사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내력을 마구잡이로 소모하는 한 앞으로 겨우 3번 정도밖에 공격을 펼칠 수 없을 것 같았다.
상황이 그랬기 때문에 모용명은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는 즉시 경공을 펼쳐 루커스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타앗―!
쏜살같이 쏘아져 오는 그를 보고 기겁한 루커스가 해적들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마, 막아! 막지 않고 뭐해? 이 느려 터진 자식들아!”
“네! 두목님!”
곳곳의 동굴에서 해적들이 쏟아져 나오며 두목의 앞을 가로막았다.
수백 명으로 구성된 인(人)의 장벽!
그들을 뚫고 들어가지 않는 한 루커스를 공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용명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을 향해 장력을 펼쳤다.
슈아아아아아앙― 파앙!
공기를 찢는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공력이 실린 장력이 인의 장벽을 후려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장력을 맞은 그들의 모습은 멀쩡했다.
오히려 그들 뒤쪽에 숨어 있던 루커스가 피를 왈칵 토하며 쓰러졌다.
“크아아아악!”
이것이 바로 내가중수법의 절정인 격산타우(隔山打牛)의 수법!
격산타우는 산(山)을 사이에 두고[隔] 소를 친다[打牛]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대상에 힘을 가해 그 뒤에 떨어져 있는 목표물에 타격을 가하는 무공 수법이다. 이때 타격은 오직 뒤에 떨어져 있는 대상에만 집중된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해적들은 혼란에 빠지며 웅성거렸다.
“엇? 두목이 쓰러졌다!”
“뒤에 계셨는데…… 어떻게 된 거지?”
“혹시…… 저자가 정말 죽음의 사신인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아냐! 저 가면을 봐! 사신이 쓴다는 강철 마스크다!”
그를 죽음의 사신과 혼동하기 시작한 해적들의 사기가 꺾이며, 하나둘씩 엉덩이를 뒤로 빼기 시작했다.
해적단의 두목인 루커스가 쓰러졌기 때문에 그들을 통솔해 혼란을 수습할 자가 없었다. 그래서 해적들 사이에 공포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모용명은 더욱 싸늘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외쳤다.
“죽고 싶은 자는 당장 앞으로 나서라!”
겁을 집어먹은 해적들은 그가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올 때마다 그에 맞춰 뒷걸음질 쳤다.
모용명은 그들을 향해 손바닥을 높이 든 뒤, 단전의 내공을 모조리 끌어 올렸다. 그리고 적양신공의 진기가 손바닥에 집중되자 붉은 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저, 저것 봐!”
“손바닥에서 빛이 나다니! 역시 죽음의 사신인가 봐!”
붉은 빛이 선명해지자 모용명은 해적들을 향해 벼락같이 장력을 쏟아 냈다.
슈아아아아아아앙!
장력이 휘몰아치며 공기를 찢어발기자 무시무시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앗!”
해적들은 장력이 도달하기도 전에 비명을 내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그를 포위하기 위해 밀집해서 서 있던 바람에 생각처럼 신속히 흩어져 설 수가 없었다.
콰아앙!
“크아아아악!”
피하지 못하고 쇄심장의 경력에 휘말린 녀석들은 심장이 산산이 부서져 피를 토하며 죽었다.
“으아악! 살려 줘!”
“사신(Demon of Death)! 사신이 온다!”
장력에 얻어맞지 않은 해적들도 소리를 지르며 도주해 버렸다.
바닥에 쓰러진 루커스를 향해 성큼 다가간 모용명은 그의 마혈(痲穴)을 짚어 마비시키고 어깨에 둘러멨다.
‘드디어 잡았군. 이제 조용한 곳에 가서 건전한 대화(?)를 나눠 볼까?’
찌이잉―
그때 갑자기 머릿속이 울리며 아밀리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정신감응 마법인 에그레고르(Egregor)를 펼쳐 그와 정신의 연결고리를 만든 것이다.
생각을 서로 교신할 수 있지만 서로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시온 님! 지금 빨리 상선으로 되돌아오셔야겠어요. 해적들이 잔뜩 몰려와서 저 혼자서는 역부족이에요!
―좀 더 시간을 끌어라.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다.
―힝! 그럼, 되도록 빨리 오셔야 해요!
모용명은 곧바로 비어 버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겁에 질린 해적들이 도망치며 계곡의 동굴은 모두 텅 비게 된 것이다.
그는 의식을 잃은 루커스를 향해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해 주지! 나를 번거롭게 만든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하라고!”
모용명은 그의 혈도를 짚어 분근착골의 수법을 펼쳤다.
“크아아아악!”

그 시각, 갑판 위에 선 아밀리에는 난감한 얼굴로 몰려오는 해적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7서클 마스터인 그녀는 평범한 해적들을 쓰러뜨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압도적인 마법 앞에서는 머릿수의 우위 따위는 무의미해지는 법이니까!
그러나 실력을 뽐내기 위해 초반부터 너무 많은 마나를 낭비한 게 화근이 되었다.
부족한 마력으로 찔끔찔끔 자잘한 마법을 펼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마저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써야 하는 제약이 있어 불편했다.
상선에 오른 자들 중에 마법사가 없었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마법을 쓰면 수상한 자라고 스스로 광고하는 꼴이 된다.
마나 고갈에 사람들의 이목까지 신경 쓰는 등 아밀리에는 이래저래 힘들었다.
“와아아아!”
해적들이 함성을 지르며 몰려온다.
상단에 고용된 용병들과 호위무사들이 저항하고 있지만 머릿수가 심각하게 부족해 열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어디서 한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거야?’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아밀리에는 또다시 은밀히 마법을 완성해 아군을 도왔다.
“그리스(Grease)!”
와당탕!
“크억!”
바닥과의 마찰 계수가 ‘0’이 되며 해적들이 요란하게 엉덩방아를 찍었다.
쓰러진 적들을 향해 용병들이 가차 없이 칼을 휘둘렀다.
슈아아― 푸욱!
“크아악!”
상처에서 쏟아진 피로 갑판은 금세 붉게 물들었다.
“읍!”
아밀리에는 장갑을 낀 손으로 자신의 코를 틀어막으며 물러섰다.
비록 모용명의 도움으로 흡혈의 저주를 몰아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피 냄새를 맡으면 묘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흡혈 본능은 제거했지만 아직 본능의 잔상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일 거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녀의 추측과 달랐다.
성수의가의 금침대법은 원래 귀음절맥(鬼陰絶脈)을 고치기 위한 수법이어서 그녀의 흡혈 본능을 약하게 만들고 인간과 가까운 상태로 줄 수는 있어도 완전히 없애 버리진 못했다.
이 사실에 대해선 두 사람 다 알지 못해서 약간만 충격을 주면 터질 폭약을 안고 있는 것처럼 위험한 상태였다.
‘히잉! 이래저래 힘들어 죽겠는데 시온 님은 도대체 언제 오시는 거야?’
그녀는 속으로 잔뜩 투덜거리면서도 부지런히 스펠(Spell)을 외워 다음 마법을 펼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강철 가면을 쓴 사내가 빙판을 박차며 단숨에 갑판 위로 뛰어올랐다.
타앗!
아밀리에는 반색하며 그를 향해 외쳤다.
“앗! 시온 님! 얼마나 기…….”
모용명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곧바로 해적들을 향해 장력을 격발했다.
슈아아아아앙― 콰아앙!
“크아아악!”
장력에 정면으로 맞은 자들은 그대로 절명해 버렸다.
“으아앗! 죽음의 사신(Demon of Death)이다!”
“도, 도망쳐!”
살아남은 해적들도 공포에 질려 걸쳐 둔 로프를 잡고 갑판에서 뛰어내어 버렸다.
서로 살겠다고 설치는 통에 줄이 엉켜 매달리거나 운이 없는 놈들은 로프가 목에 감겨 죽어 버렸다.
맨몸으로 떨어져 빙판에 머리가 깨진 자들도 다수 있었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으니 용병들에게 맡겨 둬도 될 것 같군.’
그제야 여유가 생긴 그는 찬찬히 아밀리에를 돌아보며 말했다.
“상선이 입은 피해가 어느 정도 되지?”
그녀는 대답 대신 불만을 터뜨렸다.
“흥! 제가 말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시더니. 제가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마나는 바닥이 나…….”
아밀리에는 문득 자신의 마음을 몰라 주는 그에게 서러운 마음이 들어 울컥하며 말을 멈췄다.
모용명은 그녀가 미혼술에 걸려 저런 상태라는 걸을 알고 있기에 약간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수고가 많았다! 아밀리에.”
“시온 님…….”
아밀리에는 그의 따스한 말에 온갖 서러움이 봄눈 녹듯 흔적도 없이 사그라지는 걸 느꼈다. 그제야 마음이 진정된 그녀는 다시 물었다.
“좀 전에 뭐라고 물으셨어요?”
“피해 상황에 대해 물었다.”
기분이 한결 좋아진 그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설명했다.
“시온 님이 해적단의 본거지를 치러 떠난 후, 해적들이 몰려와서 힘겨운 전투를 치러야 했어요. 상단에 고용된 용병들과 호위무사들이 대부분 전사했어요. 인원은 20퍼센트 정도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리고 상단의 총수인 카엘도 사경을 헤맬 만큼 심각한 부상을 입었어요.”
그럭저럭 그가 예상했던 오차 범위 안에 드는 정도의 피해였지만 상단주가 다친 것은 조금 뜻밖이었다.
“카엘이 다쳤다고?”
그가 입은 부상이 걱정되어서 반문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 카엘은 계속해서 모용명을 회유해 그의 무공을 모조리 빼내고 죽이려는 흉심을 품고 있었다.
카엘의 본심을 간파하고 있었던 모용명은 항구에 도착할 때쯤 직접 손봐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미처 손봐 주기도 전에 해적들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된 것이다.
처단하려 했던 상대가 엉뚱한 제3자에게 다치자 모용명은 왠지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꺼림칙하다고나 할까?
아밀리에는 그의 반문에 답했다.
“네, 그를 회위하려다가 상단의 호위무사들도 대부분 죽고 말았어요. 호위대장인 라혼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선원들은 꽤 살아남은 것 같군.”
“네, 승객과 선원들은 선실로 먼저 대피시켰기 때문에 피해가 적은 편이죠. 하지만 돛대가 부서지고 선체가 꽤 파손되었어요. 며칠 정도는 해안가에 정박하고 수리해야 할 것 같아요.”
“그건 잘됐군.”
배가 파손되었다는 말에 모용명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예상 밖의 반응에 아밀리에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 잘되었다고요?”
“그런 것이 있다.”
원래 그는 며칠 정도 이 섬에서 머물 계획이었다. 해적단의 두목 루커스를 손아귀에 넣으려면 최소한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상선은 물론 해적선도 대부분 손상당한 상태였기에 한동안은 그들 중 아무도 바다로 나갈 수 없는 상태였다.
확실히 대답해 주지 않는 그의 태도에 잠시 투덜거리던 아밀리에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가신 일은 어떻게 되었어요.”
“해적단의 본거지를 박살 내고 루커스는 생포해 근처에 숨겨 두었다. 아무래도 난 다시 그 녀석을 손보러 가 봐야 할 것 같아. 아밀리에는 잠시 여기 남아서 분위기를 살피고 있다가 내게 보고해 줘.”
“알았어요. 그럼 나중에 다시 봐요.”
짧은 대화를 통해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한 그는 다시 섬으로 돌아가 갈라진 바위 틈 사이에 숨겨 둔 루커스를 찾았다.
겉보기에는 조용히 잠들어 있는 것 같았지만 그에게 분근착골을 펼쳐 둔 상태였다. 아혈과 마혈을 모두 짚어 두었기에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비명을 지르지 못했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일각(一刻, 약 15분) 정도 지났나?’
그는 루커스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루커스, 고통에서 잠시 해방시켜 주겠다. 소리를 지르거나 허튼짓을 하면 다시 생지옥을 맛보게 될 테니 바보짓은 하지 말길 바란다.”
모용명은 그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루커스는 경고를 무시하고 고함을 지르려 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이미 예상한 행동이었기에 비명이 목에서 새어 나오기도 전에 재빨리 다시 혈도를 짚어 분근착골을 펼쳤다.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군. 이번에는 한 식경(약 30분)이다! 고집 피워 봤자 너만 손해야. 계속 2배씩 시간이 늘어날 테니까.”
루커스가 꽤 버티는 바람에 모용명은 잠시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운기에 들어갔지만 너무 깊이 몰입하지는 않았다. 자칫 시간이 너무 흐르면 분근착골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돌연 죽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확히 여섯 회를 반복하자 루커스는 더 이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굴복했다.
이번에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혹시라도 신음이 새어 나올까 입을 힘주어 다무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만큼 분근착골의 고통이 끔찍했다는 증거였다.
모용명은 감정을 거의 배제한 듯 차가운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너는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한다. 허튼소리를 지껄이거나 대답을 회피한다면 다시 끔찍한 고통을 당하게 될 테니 조심하는 게 좋겠지? 자! 시작해 보자.”
모용명은 그에 과거와 해적단에 대해서 캐물었다.
예상대로 루커스는 그리 솔직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용명은 이미 아밀리에를 통해 알아낸 정보가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틀리게 말하면 가차 없이 분근착골을 펼쳤다.
한 번 거짓말을 할 때마다 시간은 두 배로 늘어났다. 굳이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그의 기를 꺾고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기 위해서였다.
지극히 단순한 방법이지만 매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있듯이 반복되는 고통은 인간의 정신력을 착실하게 갉아먹는다. 모든 것을 숨김없이 토설할 때까지 같은 과정을 반복하자 어느덧 해가 지고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반복되는 심문과 고통에 지쳤는지 루커스의 눈빛은 처음과는 달리 흐리멍덩하게 풀려 있었다.
‘좋아! 이제 수라마교의 섭혼술을 써야겠군.’
섭혼술은 최면술과 매우 흡사한 무공 수법이었다. 당사자의 의지나 정신력이 약해질수록 섭혼술이 통할 확률이 높아진다. 흑마법사의 정신 마법과는 달리 대상의 정신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는다.
다만 정신 마법에 비해 효과가 미미한 것이 흠인데, 부족한 부분은 일월신교의 천강환마대법으로 보충할 생각이었다.
이 천강환마대법에 대해 이해하려면 먼저 심마(心魔)의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무림인이 수련 중에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주화입마다.
주화(走火)란 내공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현상을 뜻하며 입마(入魔)는 수련 중에 잡념, 즉 심마가 들어섰다는 의미다.
따라서 무공 수련 중에 심마에 빠지면 공력이 폭주해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 있으며, 심하면 정신착란이나 광증에 휘말려 살인을 참지 못하거나 미치광이가 되기도 한다.
심마(心魔)라는 것은 가벼운 잡념에서 시작되지만 점차 환각을 보거나 비정상적인 감정에 빠지게 만들어 정신을 파괴시키는 것!
무림인은 항상 수련 중에 심마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발상의 전환이라고 해야 할까? 일월신교에서는 경계해야 할 대상인 심마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어 오히려 무공의 성취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란 엉뚱한 발상을 했다.
천강환마대법은 그런 발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실험적으로 만들어 본 대법은 큰 효과를 보였다. 놀랍게도 천강환마대법을 시술받은 무림인은 심마와 싸우느라 내공의 증진이 몇 배로 빨라졌고 무공의 성취도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그러나 천강환마대법은 곧 폐지되었다.
발작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수련자가 심마를 이기지 못하고 주화입마에 들어 미치광이 살인마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천강환마대법으로 그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공포를 심는다. 결국은 미쳐 버리겠지만 강도를 세밀히 잘 조절한다면 향후 3년 정도는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모용명은 그를 중용하고 싶은 귀한 인재로 여기지 않았다. 그에게 루커스는 그저 해적단 세력을 암중에 조종하기 위해 필요한 인물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훗날 폐인이이나 미치광이가 될 수도 있는 대법을 그에게 펼치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3년이면 충분하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천강환마대법에 실패할 경우였다.
이 대법은 준비를 철저히 한다고 해서 항상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상의 정신력이나 내공이 강할수록 실패 확률도 늘어난다.
‘지금 대법이 성공할 확률은 약 8할(80%)! 상당히 높은 확률이긴 하지만…….’
만약 천강환마대법에 실패할 경우 오히려 심마가 그의 정신에 파고들게 될 것이다.
마음속에 심마가 일단 생겨나면 그것을 없애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
성공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해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루커스를 세뇌해 카로스 해의 해적들을 손에 넣지 못하면 앞으로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게 된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계획이 달라지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게 된다.
대연(大燕)을 다시 세울 대업을 향한 길은 멀고도 험하니!
막힐 때마다 돌아가는 방법을 선택하면 대업을 이루기도 전에 수명이 다하게 될 것이다.
다소 위험을 감수하기로 마음먹은 모용명은 루커스의 혼혈과 마혈을 동시에 짚어 깊이 잠들게 했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에 완성된 인피면구들 중 하나 씌웠다.
그를 데리고 상단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천강환마대법을 펼치려면 3일 밤낮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계속 이 불편한 곳에서 지낼 수는 없었다.
세심하게 인피면구를 살피는 동안 아밀리에가 에그레고르 마법을 사용해 연락을 해왔다.
―시온 님! 여기 사람들이 섬으로 이동하고 있어요. 상선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해적들에게 위치가 노출된다고 하네요.
―그래, 장소를 자세히 말해 주면 그쪽으로 이동하겠다.
그는 인피면구가 마르길 기다린 뒤 루커스를 둘러메고 그녀를 찾아갔다.

사람들은 해안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숲에 모여 있었는데 다들 초초하고 겁에 질린 듯 보였다.
“엇? 거기 누구요?”
“시온입니다!”
모용명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그를 몹시 반겼다.
“앗! 시온 님이다!”
“시온 님! 이쪽이에요! 빨리 오세요.”
용병들과 호위무사들이 대부분 죽은 이상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존재는 그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던 아밀리에가 그를 향해 다가오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사람이 바로…… 그자군요.”
사람들에게 들릴 수도 있었기에 그녀는 루커스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래, 바로 그자다. 별다른 일은 없지?”
“네, 시온 님에게 겁을 먹어서 그런 건지 해적들은 다시 오지 않았어요. 상선에서 옮겨 온 식량도 넉넉한 편이에요. 다만 해적들의 눈에 띌까 봐 다들 불을 피우지 못하고 있어요. 아직 밤에는 꽤 추운 날씨인데…….”
모용명은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좀 녹이셔도 됩니다. 해적들이 나타나면 제가 물리치겠습니다!”
“와아! 그럼 시온 님만 믿을게요!”
사람들은 그제야 불을 피우고 물을 끓였다.
언뜻 보기에 무질서해 보여도 다들 불을 피우고 음식을 하거나 부상자를 치료 하는 등, 자기 할 일을 찾아서 하고 있었다.
모용명은 아밀리에를 향해 물었다.
“상단주 카엘과 라혼은 좀 어때?”
“둘 다 상태가 계속 나빠지고 있어요. 아마도 카엘은 오늘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요.”
“마법으로 치료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네가 그들을 좀 치료해 주지 그래?”
모용명은 자신에게 흉계를 품었던 두 사람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직접 처단하기도 전에 부상으로 죽어 버리는 것은 왠지 찜찜한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무림인으로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아주 사소한 변수 때문에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의 말에 아밀리에는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마법사란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지금 나서면 모두에게 의심을 살 뿐이에요. 설령 몰래 치료할 수 있다고 해도 제가 굳이 그들을 치료해야 할 의무라도 있나요?”
“틀린 말은 아니군. 그런데 보기보다 의외로 냉정한데?”
“냉정하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잖아요. 어차피 같은 종족도 아닌데.”
뱀파이어 혈족과 인류는 생김새가 비슷해도 본질적으로 같은 종족이 아니었다. 새삼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았다.
“마음 내키지 않으면 그냥 내버려 둬도 상관없다. 그보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겠어?”
그의 질문에 아밀리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시온 님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부탁이라는 단어에 그녀는 괜스레 마음이 설레었다.
‘개인적인 부탁을 하는 것은 전보다 조금 더 친밀해졌다는 뜻이겠지?’
그저 명령이란 단어를 부탁이란 단어로 바꾸었을 뿐인데 그녀는 제멋대로 달콤한 상상의 나래를 폈다. 이래서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는 말이 있나 보다.
“전에 들은 바로는 네가 익힌 마법 중에 주위의 지형지물을 탐색하는 마법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터파그러피 스캔(Topography Scan, 지형 탐색) 마법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 그걸로 섬 전체의 지형을 탐색해 줘. 며칠 동안은 섬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숲에서 계속 지낼 수는 없지. 이곳은 기습에도 취약한 지형이고.”
“알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좀 걸리니까 식사를 하시든지 좀 쉬고 계세요.”
아밀리에가 마법을 펼치는 사이 그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주위가 너무 번잡해 조용히 운기에 집중하긴 어려웠으니 다만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법의 원리를 무공에 접목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진득하게 연구할 시간적 여유가 없군. 게다가 귀령제혼술과 정신계 흑마법, 그리고 아밀리에의 고대 마법을 하나로 엮을 수 있다면 완벽한 정신 마법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누가 무학의 천재가 아니랄까 봐 바쁜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연구에 몰두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제 겨우 두 명의 수하를 거두었을 뿐, 갈 길이 아직 너무나 멀었다.
‘앞으로 1년! 1년 안에 카로스 해를 지배하는 제라드 백작의 세력을 모두 집어삼키리라! 그리고…….’
잠시 후 아밀리에가 다가와 간략한 보고를 해 왔다.
“탐색 마법 결과, 섬 안에서 안전한 지역은 모두 세 곳이에요.”
“잠깐! 일일이 보고 할 필요는 없다. 상선을 정박해 둔 해안가에서 제일 가까운 곳은 어디지?”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거대한 암벽이 나와요. 암벽 아래쪽에 움푹하게 들어간 공간이 있는데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일단 거기로 가 보는 게 좋겠군.”
결정을 내린 모용명은 사람들을 통솔해 절벽으로 이동했다.
과연 사람들이 들어가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나무가 잘 자라지 않아서 시야가 확 트여 있는데다 전방만 경계하면 되어서 방어하기 좋은 지형이었다.
“음…… 꽤 괜찮군!”
“제가 말한 대로죠? 참! 보여 줄 게 있으니 저쪽으로 가요.”
그녀를 따라 몇 걸음 옮기자 자그만 동굴 입구가 보였다.
절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데다 안쪽의 공간이 작지만 아늑했다.
“시온 님은 이곳에 머무르면 될 거예요.”
“여기라면 크게 방해받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지켜볼 수 있겠군. 수고했어!”
모용명은 무심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밀리에는 부끄러운 듯 살짝 얼굴을 붉혔지만 오히려 은근히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여기서 같이 지내자고 하면…… 너무 속보이는 말이겠지?’
그녀는 그가 먼저 동굴에 같이 머물자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모용명은 그녀에게 별다른 사심이 없었기에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난 좀 쉬어야겠으니, 가 봐.”
“네…… 잘 자요. 시온 님.”
그녀는 내심 실망하며 돌아갔다.
‘이제 루커스에게 일월신교의 천강환마대법을 펼쳐야겠군!’
천강환마대법은 성수의가의 금침대법을 펼칠 때처럼 막대한 내공을 필요로 하진 않았다.
그러나 대법이 완성되려면 꼬박 3일 밤낮의 시간이 걸린다. 그 기간 동안 대상은 깊은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며 가벼운 충격에도 사망할 수 있으니 극도로 주의를 기울어야 했다.
모용명은 루커스를 동굴 안쪽 깊숙한 곳에 눕혔다. 그리고 수혈을 짚어 깊이 잠들게 한 뒤 바늘로 침(鍼)을 대신해 혈도를 찾아 하나씩 꽂았다. 혈(穴) 자리가 조금만 어긋나도 대법에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그는 확신이 들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 혈(穴) 자리를 확인한 다음 신중하게 바늘을 꽂았다.
서른여섯 개의 바늘을 모두 꽃아 넣고 나자 그는 땀으로 목욕이라도 한 듯 흠뻑 젖어 버렸다.
잠시 호흡을 고른 뒤 모용명은 루커스의 뇌호혈을 지그시 눌러 뇌맥(腦脈)을 자극했다. 그러자 그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지만 흰자위만 보일 뿐,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뇌맥을 자극해 두었을 뿐 의식이 되돌아 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혼(魂)은 잠들어 있으나 백(魄)은 깨어난 상태다. 혼백이 어우러지지 않아 깨어 있지만 정신이 명확하진 않았다.
천강환마대법은 이렇게 백(魄)만 불러낸 상태에서 심마(心魔)를 심는 것이다.
모용명은 그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 목소리를 기억하라, 두려워하라. 이 목소리를 기억하라, 경외하라. 이 목소리를 기억하라, 복종하라. 이 목소리를…….”
그는 무려 두 시진(4시간) 동안 아홉 개의 구결을 반복하며 루커스의 머릿속에 심마를 심었다. 이런 식으로 3일 동안 총 열여덟 번을 반복해야 비로소 천강환마대법이 완성된다.
‘이제 앞으로 17번 남은 셈인가?’
첫 번째로 구결암송을 마친 그는 두 시진 정도 운기행공을 하며 휴식을 취했다. 대법이 완성될 때까지 두 시진 간격으로 휴식과 대법을 반복해야 했다.
운기를 마치고 눈을 뜨자 어느새 동쪽 하늘이 밝아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