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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Chapter 2.
천강환마대법
천강환마대법에 힘을 쏟는 동안 어느덧 삼 일 낮, 삼 일 밤이 지나갔다.
그동안 시에티알 상단의 사람들과 선원들은 힘을 모아 상선을 수리하려고 애썼다.
해적선에서 마음대로 돛대와 돛을 가져와 보수하는데 썼지만, 해적들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호랑이 없는 산에 늑대가 왕 노릇을 한다더니, 두목인 루커스가 없어지자 저들끼리 두목 자리를 노리고 다투느라 바빠서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론 죽음의 사신 혹은 강철 가면 사신이란 새로운 별호를 얻게 된 모용명이 두려워 감히 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목소리를 기억하라, 복종하라. 이 목소리를 기억하라, 이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네 영혼의 주인이다.”
“으으으…… 주인님!”
루커스는 3일 만에 의식을 되찾고 눈을 떴다. 그러나 무엇에 홀린 듯 그의 눈빛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모용명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루커스! 네 눈앞에 있는 나는 누구지? 이 목소리를 기억하겠느냐?”
“오오! 주인님.”
루커스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엎드렸다. 몹시 두려운 듯 그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주인님! 비천한 종이 주인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천강환마대법이 무사히 완성되었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모용명은 싸늘한 목소리로 그에게 지시했다.
“너는 즉시 해적들에게 돌아가 수하들을 수습하라! 정리가 끝난 뒤 수하들을 보내 이들을 돕도록 지시하라.”
“알겠습니다! 주인님.”
모용명은 주머니에서 통신용 수정 구슬을 꺼냈다.
“이걸 받아라. 앞으로 이것을 통해 지시를 내릴 것이니 잃어버리거나 깨뜨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
“알겠습니다!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루커스를 보내고 나자 그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지 졸음이 쏟아졌다. 그동안 그는 대법을 펼치느라 충분히 잠을 잘 수 없었다. 모용명은 바닥에 몸을 눕히고 잠을 청했다.
막 잠이 들려는 찰라, 누군가 다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온 님! 해안가에 해적선이 몰려오고 있어요.”
“해적선? 해적선은 모조리 박살 내 버렸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루커스 해적단이 아니라 다른 해적단의 배들인 모양이에요!”
가장 큰 적은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경쟁자들이다. 밑바닥에 종사하는 부류일수록 경쟁이 더 치열한데 해적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루커스 해적단이 적들의 공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두목 역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이곳을 접수하러 배를 끌고 온 모양이다.
아밀리에는 급히 그를 재촉했다.
“어서 일어나세요! 시온 님. 태평하게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그러나 모용명은 귀찮은 듯 소매를 휘저으며 말했다.
“지금은 좀 자야겠다. 네가 해치우도록 해!”
“네? 지금 뭐라고요?”
그녀는 기가 막힌 듯 소리쳤지만 그는 눈을 뜨지 않고 말했다.
“7서클 마법사를 수하로 두고 있는데 이깟 일에 내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지. 지난번처럼 마력 조절에 실패하지 말고 이번엔 잘 좀 해 봐.”
“쳇! 알았어요.”
아밀리에는 짐짓 화가 난 듯 소리치며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관심을 끌어내려고 여러 가지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뿐이었다.
‘이번에는 7서클 마법사의 위용을 마음껏 펼쳐 보이겠어. 보여 주겠어!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시온 님에게 알려 주고 말 거야. 그제야 비로소 그는 알게 되겠지? 내가 꼭 필요한, 그리고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존재라는 걸. 그렇게 된다면 시온 님은 그의 곁에 영원히…… 머물러 달고 간절히 애원하게 되겠지? 후후!’
이번에는 자신이 있었다.
사실 그녀가 너무 경솔하게 굴지만 않는다면 해적들 따위 얼마든지 몰려와도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녀는 무려 7서클 대마법사이니까!
각오를 단단히 굳힌 그녀는 윈드 워크(Wind Walk) 마법을 펼쳐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빠르게 해안가로 달려갔다.
해안가에는 서로 다른 깃발을 건 해적선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해적단 중에 가장 악명이 높은 루커스 해적단을 치기 위해 몇 개의 해적단이 임시로 연합한 모양이었다.
선두의 해적선들은 해안가와 지척 거리여서 곧 닻을 내리고 해변에 상륙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야 없지!’
그녀는 신중하게 마력을 조율하며 바다를 향해 마법을 펼쳐 냈다.
“거스트 오브 윈드(Gust Of Wind)!”
휘이이이잉―!
마법 스펠에 반응해 주위의 공기들이 맹렬히 휘몰아치며 바다를 향해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쳤다.
돛이 찢어질 듯 펄럭이며 해적선들은 난데없는 풍랑에 휘말렸다. 거친 파도에 휘말린 해적선들은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당황한 해적들이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뭐야?”
“어서 돛을 내려! 돛대가 부러지겠어!”
자신이 만들어 낸 광경을 지켜보던 아밀리에는 즐거운 듯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입에 넣고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그러자 휘파람 소리에 호응하듯 사방에서 갈매기 떼들이 몰려왔다.
그것은 그녀가 지난 삼 일 동안 고대 마법인 콤무니오(Communio)로 길들여 둔 갈매기들이었다.
끼룩―! 끼룩―!
아밀리에는 에그레고르 마법으로 그들과 심령을 교감하며 마음속으로 명령을 내렸다.
―애들아! 지금이야! 공격해.
그녀의 지시를 받은 갈매기들은 해적선을 향해 곧바로 수직 낙하했다.
파아악!
“으악!”
갈매기 부리에 세차게 조인 해적들은 피를 쏟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고작 갈매기라고 무시해선 큰일 난다!
수백에 달하는 부리에 한꺼번에 쪼이니 해적들은 도저히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갈매기들의 공격을 피해 다급히 선실 안으로 대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세찬 바람에 돛이 찢어지고 돛대가 우지끈 부러져 버렸다.
“으아앗! 돛대가 부러졌다!”
“조심해! 깔린다!”
콰아앙!
부러진 돛대가 바닥을 후려쳤다. 미처 피하지 못한 해적들 몇몇은 아래에 깔려 뼈와 내장이 모조리 으깨져 버렸다.
돛대가 부러지자 해적선들은 거친 파도에 힘없이 밀려나 해안가와 멀어졌다.
돛이 모조리 망가졌으니 노를 저을 수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파도가 너무 거세어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후훗! 생각보다 쉽잖아?”
몹시 기쁜 듯 그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사실 아밀리에는 7서클 마법사였으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숨어 다니느라 실전 경험은 별로 없었다.
루커스와 계약해 해적들을 도왔을 때도 그저 고대 마법인 에그레고르(Egregor)로 바다 괴수를 길들여 싸웠다. 그래서 이처럼 통쾌하게 이긴 경험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한껏 들뜰 수밖에 없었다.
‘후후! 어서 시온 님에게 가서 자랑해야지!’
그녀는 모용명이 잠들어 있는 동굴을 향해 신나게 달려갔다.
사람들은 영문을 몰랐지만 해적선들이 곤욕을 당해 물러나자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우와와아!”
한편, 해적선들이 갑작스런 풍랑에 휩싸이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이도 있었다.
“아아! 배가…… 배들이 멀어진다!”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카엘 님.”
놀랍게도 시에티알 상단의 총수인 카엘은 아직 죽지 않았다.
진작 죽었어야 할 끔찍한 상처를 입었지만 그는 생에 대한 집착 하나로 하루하루 끈질기게 버텨 가고 있었다.
“흑흑…… 아버지.”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던 멜리사는 통곡하듯 눈물을 흘렸다.
“라혼!”
“말씀하세요. 카엘 님!”
호위대장인 라혼은 극심한 부상을 입었으나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카엘보다 나이가 젊고 마나 코어(내공심법)를 익히고 있어서 회복이 빨랐던 것이다.
“어떻게든…… 저 배를 타야 해! 항구로 가면…… 신관들의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저건 해적선입니다! 카엘 님.”
그러나 카엘은 광기 어린 눈빛으로 소리쳤다.
“나도 알고 있어! 어떻게든 접근해서 설득하란 말이야! 상단의 화물과 가진 재물을 다 넘겨주겠다고 해! 그들이 원하는 건 뭐든 넘겨줘! 넘겨주라고!”
사실 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배를 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건강한 사람도 항해를 오래하면 몸이 축나기 마련이다. 목적지인 이그로스 항에 도착하려면 날씨가 좋아도 닷새(5일) 정도는 잡아야 했다.
카엘은 오늘 내일 하는 상태라 해적들이 친절히 항구까지 바래다 준다 하더라도 살아날 가망성은 없었다.
다만 생에 대한 절박한 집착이 점점 광기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카엘 님…….”
“이건 명령이네! 라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게!”
광기도 전염되는 것일까?
주인의 절박함에 마음이 흔들렸는지 라혼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 갔다.
‘어떻게든 카엘 님을 살려내야 한다! 그래! 일단 시온 님을 찾아가 보자. 그에겐 무슨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카엘 님! 시온 님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 보겠습니다. 그의 무력이면 해적들을 잡아 해적선을 탈취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허억! 그, 그래! 시온 님이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다, 당장 가 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멜리사가 끼어들며 말했다.
“저도 같이 가서 부탁해 보겠어요!”
그리하여 라혼과 멜리사는 황급히 발걸음을 옮겨 모용명이 거처하는 동굴로 찾아갔다.
한편, 모용명은 아밀리에가 다시 찾아와 떠드는 통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한참을 조잘거렸다.
그는 아밀리에는 간신히 진정시켜 보내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다. 그런데 겨우 일각(15분) 정도 잤을까?
또다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와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고개를 들어 보니 라혼과 멜리사의 얼굴이 보였다.
모용명은 짜증스런 마음을 눌러 참으며 그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시온 님! 한 가지 청이 있어서 왔습니다.”
“도와주세요! 시온 님.”
이야기를 들은 모용명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날더러 카엘을 구하기 위해 해적들과 싸워 달라고? 내가 왜 그런 귀찮고 번거로운 짓을 해야 하지? 잠이 와서 죽겠는데 다들 찾아와서 귀찮게 구는군.’
원래 카엘과 라혼은 그의 무공을 훔쳐 내고 죽일 궁리까지 하던 사람들이었다. 하찮은 녀석들이라 생각해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았지만, 따지고 보면 그에게는 적이나 마찬가지인 관계였다.
모용명은 퉁명스런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도와주고 싶지만 나로서도 해적들을 상대로 배를 뺏는 건 불가능할 것 같군요. 지금은 몹시 피곤하니 나중에 다시 의논합시다.”
요청을 거절당한 두 사람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모용명이 일부러 부탁을 거절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요청해 보았을 뿐, 그의 무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혼자서 해적선을 힘들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엘에게 돌아온 라혼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엘 님! 시온 님도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크윽…… 젠장! 배은망덕한 녀석이 감히 거절을 해!”
카엘은 불같이 화를 내다가 울컥 피를 토했다.
그동안 모용명을 속이기 위해 극진히 대해 오던 것을 그는 은혜를 베풀었다고 멋대로 생각해 버렸다. 원래 그릇이 작은 자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만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진정하십시오! 카엘 님.”
라혼은 카엘의 상세가 더욱 심해질까 걱정했다.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라 저렇게 화를 내다 심장이 덜컥 멎어 버릴까 걱정된 것이다.
“으으…… 멜리사!”
카엘은 갑자기 멜리사를 찾았다.
“저 여기 있어요! 아버지.”
“목이 몹시 마르구나. 미안하지만 가서 포도주를 좀 가져와 주겠니?”
“네! 아버지.”
멜리사가 자리를 뜨자 카엘은 음침한 어조로 라혼에게 말했다.
“라혼! 조각배를 타고 해적들을 찾아가라! 그들이 원하는 건 뭐든 넘겨줘!”
“카엘 님…… 그런다고 과연 그들이 도와줄지 걱정입니다.”
“으음…… 그렇다면 아군의 정보를 모조리 넘겨주겠다고 말해! 어디에 모여 있고 인원은 어느 정도 되는지! 그들이 관심 가질 만한 건 모두 알려 주란 말이야.”
카엘의 말에 라혼은 몹시 당황했다.
“네? 하지만 그건…… 상단의 수하들까지 배신…….”
“그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제발 내 말대로 해 주게. 이건 명령일세!”
한참을 고민하던 라혼은 상단의 주인인 카엘에게 입었던 은혜를 떠올렸다.
그의 눈에 들어 뒷골목에서 도둑질이나 하던 그가 호위대장의 자리까지 오르지 않았던가? 사실 두 사람은 서로 음침한 기질이 비슷해, 음모를 꾸미거나 사람을 속여 이득을 취하는데 죽이 잘 맞았다.
“으음…… 알겠습니다.”
“쿨럭! 고, 고맙네.”
라혼은 그길로 은밀히 조각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자가 있었다.
‘아버지! 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생각을!’
멜리사는 아버지가 부탁한 대로 포도주를 구하러 달려갔다가, 운 좋게도 도중에 포도주를 가진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사정을 말하고 그에게 포도주를 받아 곧바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흉악한 음모를 꾸미는 것을 대부분 엿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해! 당장 시온 님에게 알려야겠어!’
모용명은 결국 멜리사 때문에 잠에서 깨었다. 오늘은 그가 마음껏 쉴 수 없는 운명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카엘 님이 배신했다는 말이군요.”
“너무 늦기 전에 라혼을 막아야 해요!”
멜리사가 다급히 소리쳤으나 그의 생각은 그녀와 조금 달랐다.
‘이렇게 된 이상 두 사람이 모두를 배신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겠군. 그러는 편이 두 사람을 죽여도 모양새가 좋을 테니까.’
애초부터 그는 감히 자신을 두고 흉악한 모략을 꾸민 두 사람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한 번 나서 보죠. 하지만 불행히 너무 늦더라도 저를 원망하진 마십시오.”
“어떻게 제가 시온 님을 원망하겠어요? 시온 님은 몇 번이나 저희를 위기에서 구해 주신 영웅이신 걸요!”
순진한 멜리사는 그의 아름다운 모습과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위용에 완전히 반해 버렸다. 그녀는 조금도 그를 의심하지 못했다.
“시급한 일이니 먼저 가 보겠습니다!”
타앗―!
모용명은 곧바로 경공을 펼쳐 밖으로 나갔다.
어렵지 않게 아밀리에를 찾아낸 그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문제가 생겼으니 날 따라와.”
“앗! 잠깐만요. 이것 좀 마저 끝내고요.”
그러나 모용명은 그녀를 가다려 주지 않고 해안가로 달려갔다.
아밀리에는 결국 투덜거리며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쫓아갔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카엘이 우리를 배신했다. 곧 해적선들이 다시 몰려올 거다. 이번에는 해적들이 모두 내리길 기다린 다음 한꺼번에 해치워 버리는 게 좋겠다.”
“네! 이번에도 실력 발휘를 좀 해 볼게요!”
잠시 후, 수십 대의 해적선이 해안에 정박해 왔다.
해적들은 모두 내리자 해변이 새까만 해적들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어림잡아 그들의 숫자는 이천 명은 될 것 같았다.
아밀리에는 감탄한 듯 외쳤다.
“와아! 해적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좀 많군. 저들의 시야를 가릴 만한 마법이 없을까?”
모용명은 문뜩 저 많은 해적들이 동시에 화살을 쏜다면 두전성이로 되돌리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모두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막대한 공력이 소모될 것이다. 아밀리에에게 대법을 펼친 후유증은 아직 남아 있었다.
내공의 회복속도가 전보다 3배는 느려졌으니 되도록 공력의 소모는 막아야 했다.
“후훗! 왜 없겠어요? 이 아밀리에의 마법 실력을 얕잡아 보지 말라고요!”
그녀는 쾌활하게 말한 뒤 곧바로 캐스팅에 들어갔다. 마법이 완성되자 그녀는 해적들이 서 있는 방향을 향해 손을 뻗으며 힘차게 외쳤다.
“아이스 미스트(Ice Mist)!”
샤아아아아―
우윳빛의 짙은 안개가 해안가에 넓게 퍼져 나갔다.
단순한 안개가 아니라 북극의 바람처럼 얼음장의 차가운 기운을 품고 있어서 안개에 휩쓸린 사람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엇? 갑자기 안개가?”
“으읏! 추워!”
해적들은 흠칫 놀라며 발걸음을 멈췄지만 아밀리에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곧바로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라이트닝 스피어(Lightning Spear)!”
우르릉― 번쩍!
마른하늘에 갑자기 번개가 치며 거대한 뇌전의 창이 안개 속을 관통했다.
번개는 안개 속을 넓게 번져 나가며 해적들의 몸에 직격했다!
파직― 파지지직!
“크아아아악!”
번개를 맞은 해적들을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쓰러졌다.
비록 넓은 범위에 퍼지며 라이트닝 스피어의 위력은 반감되었지만, 반감된 위력만으로도 3분의 1에 달하는 해적들이 심장마비로 즉사했다.
이는 안개 속의 물방울들이 번개의 위력을 극대화시켰기 때문이었다.
“짠! 내 실력 어때요?”
“수고했어, 쉬면서 마나를 회복해 두도록 해.”
타앗―
모용명은 그녀의 대답을 듣지 않고 곧바로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단전의 진기를 끌어 올리자 짙은 안개 속에서도 해적들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또한 적양신공의 뜨거운 공력이 전신을 보호해 몸이 얼어붙지도 않았다.
반면 적들은 얼어붙은 데다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모용명은 그들 사이에 가만히 서서 공력을 최대한 끌어낸 후 쇄심장을 펼쳐 냈다.
슈아아아아아앙― 콰아앙!
“크아아아악!”
무시무시한 장력에 휘말린 해적들은 심장이 산산이 부서져 절명해 버렸다.
“뭐, 뭐야?”
“거기 무슨 일이야?”
해적들은 짙은 안개에 시야가 가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모용명은 가만히 서서 다시 천천히 공력을 회복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장력을 펼쳐 그들을 공격했다.
슈아아아아아― 콰앙!
“크아아악!”
강맹한 장력들이 해적들의 심장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젠장! 또 뭐야?”
“빨리 이 불길한 안개 속을 벗어나야 해!”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모용명은 안개의 경계선을 돌아다니며 장력을 펼쳤다.
놀란 해적들은 자꾸만 안개 안쪽으로 물러났고 우왕좌왕하다가 방향 감각을 상실해 버렸다.
허둥댈수록 더 깊은 혼란에 빠질 뿐이다.
그러다가 해적들 중 하나가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나, 난 봤어! 강철 가면이야!”
“젠장! 주, 죽음의 사신이다!”
‘얼핏 가면을 쓴 내 모습을 본 모양이군. 잘됐어. 이걸 이용해야겠군.’
사실 모용명은 내공을 많이 소모해 곤란하던 참이었다. 대법의 후유증 때문에 소모된 내공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공을 사용해 음산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나는 죽음의 사신……. 오늘 너희의 영혼을 모조리 거두리라!”
내공이 실린 그의 목소리는 사방에서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목소리의 방향을 알 수 없자 해적들은 더욱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으아악! 죽음이 사신이다!”
“사, 살려 줘!”
혼란에 빠진 해적들은 허둥지둥 뒷걸음치다 서로 부딪혔다. 흠칫한 해적들은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슈아아― 파악!
“크아아악!”
부상을 입은 해적들이 곳곳에서 비명을 내질렀다. 짙은 안개 때문에 서로를 볼 수 없어 일어난 일이다.
“젠장! 도대체 죽음의 사신은 어디 있는 거야?”
“쉿! 그 이름을 부르지 마!”
사방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오자 해적들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모용명은 더욱 음산한 어조로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바람처럼…… 어디에나 존재한다! 저항해도 소용없다. 순순히 영혼을 내게 바쳐라!”
말을 끝맺는 것과 동시에 그는 몇 차례 장력을 더 날렸다.
슈아아아아아― 콰앙!
“크아아악!”
내공을 모조리 소모한 모용명은 조용히 안개 속을 빠져나왔다.
해적들은 안개 속에서 대부분 죽었지만 아직 3할(30%)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것만 해도 600명이나 되기에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수고했어요! 시온 님.”
아밀리에는 돌아온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마나는 어느 정도 회복했지?”
“별로 많지 않아요. 안개를 유지하는데 소모되는 마나를 제외하면 큼직한 마법을 두 번 정도 쓸 수 있을 거예요.”
“좋아! 그럼 당장 공격해.”
그의 지시를 받은 아밀리에는 재빨리 마법을 캐스팅했다.
‘아이스 미스트 마법을 펼치고 있으니 화염 계열 마법은 안개를 말려 버려서 안 되고……. 뇌전 마법은 마나 소모가 극심해 자잘한 것밖에 펼칠 수 없을 거야. 참! 그게 좋겠구나!’
“클라우드 킬(Cloud Kill)!”
녹색의 독 구름이 아이스 미스트 위로 번져 나갔다.
맹독을 포함한 구름은 피부를 녹이며 한 모금이라도 들이마시면 폐를 망가뜨렸다.
범위가 워낙 넓은데다 마나가 부족해 단번에 적들을 죽일 수는 없었으나, 심각한 손상을 입힐 수 있었다.
“끄아아악!”
“으아아악!”
독을 들이마시고 폐가 망가진 적들은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으니 얼마 버티지 못하고 숨이 끊어질 것이다.
“후유, 이제 끝났군요!”
“아직 한 명이 남았어.”
모용명은 경공을 펼쳐 해안가로 달려갔다.
살기 위해 일행을 배신한 상단의 총수 카엘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도착해 보니 카엘은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의 작전이 성공했어도 어차피 살 수 없었겠군. 내 손으로 직접 마무리하지 못한 것이 찝찝하지만 오히려 잘된 걸지도 모르겠군.’
상단의 주인인 카엘을 직접 죽였다면 시에티알 상단과의 관계가 크게 틀어졌을 것이다.
아무리 배신자라 해도 그는 상단의 총수였으니 외부의 사람에게 죽었다면 복수하려 들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이곳에서 세운 목적은 대부분 이룬 것 같군!’
해적단의 두목 루커스를 손에 넣었고 그와 경쟁하는 해적단을 대부분 해치웠다.
루커스가 어렵지 않게 카로스 해를 장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 실전 경험이 부족하긴 하지만 7서클의 대마법사인 아밀리에도 수하로 만들었다.
그녀의 능력과 고대 마법 그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제라드 백작. 내가 곧 갈 테니!”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상단의 총수 카엘이 죽고 난 후, 멜리사를 비롯한 상단의 직원들은 며칠 동안 검은 옷을 입었다.
특히 아버지의 죽음에 멜리사의 상심은 무척 컸다. 아버지의 죽음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상단의 사람들을 대부분 잃게 되었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겠는가?
“기운 내서 뭐라도 좀 먹어요. 멜리사. 시에티알 상단은 앞으로 당신이 이끌어 가야 하니까.”
“고마워요. 시온 님! 아…… 당신이 없었더라면 이 어둡고 힘든 시간을 도저히 버텨 낼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 말 말아요. 멜리사.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한 일이 없다니요? 시온 님 덕분에 그나마 저희가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혼란을 수습하고 사람들을 독려해 상선을 수리한 것도 시온 님이었어요. 게다가…….”
멜리사는 말을 하다 말고 얼굴을 살짝 붉혔다.
내성적인 그녀는 뒷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당신이 내 곁에 있다는 것만 해도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당신은 아마 알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그때 갑자기 아밀리에가 모용명에게 에그레고르(Egregor) 마법을 펼쳤다.
―너무하세요! 시온 님. 연약한 여자인 제겐 온갖 힘든 일을 시켜 놓고 다른 여자와 노닥거리고 있다니!
―노닥거리는 게 아니다, 아밀리에. 그녀는 앞으로 시에티알 상단의 주인이 될 여자야. 즉, 내 강력한 후원자가 될 거란 말이다.
―그럼, 여성으로서 그녀를 좋아하는 건 아니란 말이죠?
―여성으로? 하하! 나를 너무 얕잡아 보는군. 이런 천박한 여자에게 마음을 줄 여유 같은 건 없어. 이용 가치가 있으니 가까이 할 뿐이다.
―그래요? 그럼 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신에게는 저도 그냥 쓸모가 많은 사람일 뿐인가요?
―너는 내가 처음으로 거두어들인 수하다. 앞으로 많은 부하들이 생기겠지만 네가 처음이라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거다. 물론, 멜리사같이 천박한 여자와 비교할 수는 없지! 너는 무려 7서클 마법사인데다가 아름다운 여성이니까.
아밀리에는 ‘처음’이라는 단어에 왠지 마음이 설레었다.
멜리사와 비교할 수 없다는 것과 아름다운 여성이란 말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그의 사소한 모든 말에 숨겨진 의미가 있다고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