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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녀가 이처럼 그의 말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미혼술에 걸려 그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가 사랑하는 사내는 심장이 시리도록 차가운 사람이었다.
모용명은 원래 그렇게까지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철두철미하고 분석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으나 여성에게만큼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아내에게 독살당한 이후 그는 변했다.
여성을 쉽게 믿지 않았고 육체적인 매력에도 쉽사리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무림인으로서 빈틈이 없어졌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인간적인 면모는 줄어들게 되었다.
그런 남자를 사랑하게 된 아밀리에의 앞날의 가시밭길이 펼쳐진 것과 같았다.
그래도 그나마 희망이 있는 건 모용명이 그녀를 그런대로 좋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제논의 몸으로 소생한 후 만난 여자들 중에는 아밀리에의 성품이 제일 괜찮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때 상단의 직원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멜리사에게 말했다.
“멜리사 님, 이제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질문을 받는 그녀는 무심코 모용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만큼 그를 마음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제 출발하는 게 좋겠군요. 멜리사 님.”
모용명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에게 지시했다.
“출발하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시에티알 상단의 상선은 다시 바다로 나아갔다.
멜리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갑판에 올라간 모용명은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어 수정 구슬을 움켜쥐었다.
해적단의 두목 루커스와 연락할 수 있는 통신 마법이 걸려 있는 수정구다.
그는 강철 가면을 착용한 후 수정구를 통해 루커스에게 연락했다.
“루커스!”
―말씀하십시오. 주인님!
“해적단은 다시 수습했겠지?”
―몇 놈이 반항했지만 간단히 목을 자르고 제압했습니다. 주인님!
“가르쳐 준 것은 게으름피우지 않고 수련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주인님. 제가 감히 어찌 게으름을 피우겠습니까?!
모용명은 루커스에게 모용세가가 수집한 무공 중 하나를 전수해 주었다.
그에게 가르친 무공은 적운부(赤雲斧)라는 것으로 도끼를 사용하는 무공 중에서는 제법 쓸 만한 것이었다.
장차 루커스가 카로스 해 주변은 모두 장악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나중에 확인해 볼 테니 열심히 수련하도록!”
―알겠습니다! 주인님.
치열하게 보냈던 지난 며칠 동안의 일이 거짓말인 것처럼, 이그로스 항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은 순조로웠다.
이르니슈 강에서 상선에 오른 뒤 모용명은 실로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가졌다.
그는 여유가 생겼다 하여 방탕하게 지내지 않고 그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우선은 운기행공에 힘써 무공의 뿌리인 내공을 굳건히 하였고, 튼튼하게 뿌리내린 내공을 바탕으로 정성들여 무공 수련에 힘을 쏟았다.
특히 그는 검술과 창술을 새롭게 익히기 시작했는데, 이는 장차 기사가 되기 위해 기본 소양을 쌓는 것이다.
기사의 자격은 리터슈피겔(Ritterspiegel, 원래 뜻은 거울)이라 불리는 지침서에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었다.
첫째, 기사는 황제와 군주에게 복종하며 그들에게 헌신한다.
둘째, 기사는 규율을 준수하며 정당한 사유 없이 약자와 여성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셋째, 기사는 유연하고 민첩해야 하며 검과 방패를 잘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넷째, 기사는 창을 잘 다룰 줄 알아야 하며 마상에서 정확한 찌르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기사는 승마를 능숙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 기사는 모든 예절을 익혀야 하며 자신을 가꿀 줄 알아야 한다.
일곱째, 기사는 모든 분야에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어 타의 모범이 되어야한다.
여기서 일곱 번째 조항을 제외한 모든 조항을 충족시켜야 기사 서임을 받을 수 있다.
일곱 번째 조항을 제외시키는 이유는 궁술, 시, 춤, 게임, 사냥, 그림, 신학, 정치학, 음악 등 너무 광범위하여 현실적으로 모두 충족시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검술과 창술은 세가에 전해지는 무술 중에 골라 익히면 되지만 방패까지 익혀야 한다니……. 그건 조금 난감하군.’
중원의 무학은 전쟁터를 염두에 두고 발전한 것이 아니기에 방패에 관한 무공은 없었다.
상단의 호위무사에게 지도를 부탁하여 배우고는 있지만 방패를 사용하는 건 여간해서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원래 강호의 무공은 무기 하나로 공격과 방어를 모두 해결할 수 있게 발달되어 왔고, 모용명은 어릴 때부터 무공을 수련해 그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투 대회(Tournier)에 출전하려면 반드시 방패 사용법에 능숙해져야 해!’
평민이 기사가 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무투 대회에 출전해 최종우승자가 되는 것이다.
테넨로베프 제국에서 무투 대회에 대한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시합에서의 뛰어난 성적을 얻으면 서로 신하로 삼으려고 군주들이 경쟁할 정도였다.
강호의 뛰어난 무예를 익힌 모용명은 무투 대회에서 우승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세 종류의 경기 방식 중 하나인 검술 결투였는데, 반드시 검과 방패를 같이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휴우, 차라리 몰락 귀족의 귀족서임장과 혈통증명서를 사들이는 것이 빠를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귀족 신분을 위장하는 것은 추후에 발각될 위험이 너무 크다. 조금만 심계가 깊은 군주라면 과거를 조사해 보고 수하로 들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와 마주선 호위무사가 소리쳐 주의를 줬다.
“시온 님, 방패를 좀 더 내리셔야 시야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검과 방패가 너무 따로 놀고 있습니다. 동작은 항상 유기적으로 연동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손목의 각도를 안쪽으로 약간 틀어 보십시오. 지금 좋습니다! 이제 제가 공격할 테니 방패로 자연스럽게 공격을 흘려내면서 검으로 반격해 보십시오. 시작하겠습니다!”
호위무사를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슈아악― 차앙!
모용명은 그의 공격을 완벽히 파악하고 방패로 정확히 흘려냈다. 그와 동시에 상대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검을 목에 들이댔다.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검과 방패의 연계가 부자연스럽습니다. 방패로 검을 막는 순간 발동작도 흐트러졌습니다.”
“흐음, 쉽게 잘 안 되는군!”
“사실 모든 것이 완벽하신 편인데…… 신기하게도 방패를 움직이면 자세의 균형이 깨지는군요.”
원래 평생 익힌 습관을 한순간에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아! 아무래도 방패를 다루는 것엔 재능이 없나 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고작 하루 만에 이 정도 따라오시는 것만 해도 대단한 재능입니다! 저도 평생 동안 검과 방패를 익혀서 이제 겨우 이 정도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평생 강호의 무공을 수련한 나와 네 처지를 어찌 동일한 잣대로 비교할 수 있겠나?’
방패 수련을 끝낸 모용명은 곧바로 아밀리에에게 식사나 춤, 연회에 대한 예법을 배웠다.
뱀파이어인 그녀는 한때 황실의 마법사와 계약을 맺고 황궁에 거주한 적이 있어 각종 예법에 능숙했다.
예법 교육이 끝나고 나면 그는 아밀리에에게 간단히 경공을 가르쳤다.
그녀가 익힌 마법 중에도 경공술과 비슷한 원드 워크라는 마법이 있었으나 강호의 경공에 비하면 마나 효율이 나쁘고 움직임이 너무 단순했기 때문에 따로 가르쳐 준 것이다. 그녀에겐 강력한 마법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무공은 알려 주지 않았다.
“아밀리에! 이제 너의 고대 마법에 대해 내게 설명해 줘.”
“마법도 익히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무슨 고대 마법이에요?”
“개념만 파악해 두려는 것이다.”
모용명은 강호의 귀령제혼술이나 섭혼술 등과 그녀의 고대 마법 그리고 흑마법사의 정신계 마법을 한데 묶어 새로운 개념의 마법을 만들어 볼 욕심이 있었다.
연구에 실패한다 해도 대륙의 마법에 대해 익숙해져서 나쁠 것은 없었다. 훗날 마법사를 적으로 만나면 마법의 개념을 알고 있는 쪽이 상대하기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을 쪼개어 다양한 종류의 수련과 연구를 거듭하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통신용 마법 수정구가 뜨거워지며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파아앗―!
‘이건 흑마법사 제뮤엘에게서 받은 수정구인데? 그가 갑자기 무슨 일로 연락한 것일까?’
수정구 표면에 제뮤엘의 모습이 떠오르자 모용명은 재빨리 표정을 바꾸어 몹시 반가운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온! 거기 있냐?”
“오랜만이네요! 할아버지.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난 몸 건강히 잘 자내고 있단다. 넌 어떠냐? 아픈 곳은 없지?”
“네!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반가운 마음이 앞선 탓인지 제뮤엘의 이야기는 두서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모용명은 별 의미 없이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에게 용건을 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무슨 일로 연락하신 건가요?”
“참! 내 정신 좀 봐! 이 할아비가 횡설수설 사설이 길었지? 사실은 한 가지 걱정되는 일이 있어서 당부해 두려고 연락했단다.”
“걱정되는 일이라니? 그게 뭔데요?”
제뮤엘은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사실 베임하리엘 교단에서 그를 불러들인 것은 교단의 사활을 건 중대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숨어 지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키람알로케 교단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탈바꿈하여 포교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키람알로케 교단의 포교 활동에 절대로 현혹되어선 안 될 것이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지?”
“네! 염려 마세요. 할아버지!”
파아앗―!
제뮤엘은 교단에게 추적당할까 두려워 간단히 용건만 전한 뒤 통신 마법을 해제했다.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모용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암흑 교단이 이름을 바꿔 포교 활동을 하게 되면, 분명 그들로 인해 제국이 혼란스러워지겠군! 내 계획에 지장을 주지만 않는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나쁘지 않지. 제국의 황실이 흔들려야 새로운 황실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Chapter 3.
무투 대회
닷새가 지난 후.
시에티알 상단의 상선은 드디어 이그로스 항구에 도착했다.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갑판에 나란히 서서 항구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은 바로 상단의 새로운 주인이 될 멜리사와 모용명이었다.
“아! 드디어 육지에 도착했군요.”
“바다라면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그의 말에 미소를 짓던 멜리사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무투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에펠 영지로 가신다고 하셨죠? 항구에 내리면 이제…… 영영 헤어지게 되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주 연락드리고 찾아뵙겠습니다! 그때 가서 귀찮다 하지 말고 가끔을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가볍게 던지는 모용명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귀찮다니,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자주 연락하겠다는 그 말…… 빈말이 아니길 빌겠어요.”
“물론이죠. 꼭 연락하겠습니다.”
‘너와의 친분은 내게 이득이 될 텐데 되도록 자주 연락해야지.’
차가운 속마음과는 달리 모용명은 헤어짐이 아쉬운 듯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갑자기 멜리사 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었죠.”
나직이 탄식하는 듯한 묘한 울림이 있는 그의 말에 살짝 얼굴을 붉히던 멜리사는 수줍은 듯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역시 잊지 못해요. 시온 님을 처음 뵈었던 그 순간을…….”
보일 듯 말 듯한 달콤한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맴돌았다. 이처럼 고백 비슷한 말을 한 것은 소심한 멜리사에겐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때 거친 파도에 뱃전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 탓에 그녀는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자칫하면 바닷물 속으로 떨어질 판이라 모용명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앉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멜리사 님.”
“…….”
멜리사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허리를 두른 그의 강인한 팔이 느껴져 온몸의 뼈가 녹아내리는 듯 황홀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하고 바랐고 또한 그가 자신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맞춤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멜리사 님?”
재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멜리사는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저절로 허리를 감싼 그의 팔이 빠져나가자 그녀는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기분이 들어 더욱 당황했다.
“전 괜찮아요.”
“파도 때문에 놀라신 모양이군요.”
그녀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상단의 직원들 중 하나가 멜리사를 찾아와 물었다.
“멜리사 님! 화물을 먼저 내릴까요?”
기초적인 질문이었지만 경험 많은 직원들은 대부분 사망해 버려서 직원들은 사소한 것까지 그녀에게 물어보곤 했다.
직원이 불쑥 끼어드는 바람에 미묘한 분위기가 깨어지자 그녀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승객들부터 먼저 내리게 한 뒤 화물을 다시 점검하고 내리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눈치 없이 직원이 끼어드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분위기는 깨어졌고 결국 그들은 간단히 작별 인사를 끝맺게 되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연락하시는 거 잊지 마세요! 시온 님.”
원래 이그로스 항구는 몹시 혼잡했다. 대륙 서부에서 제일 큰 무역항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선박들이 정박 허가가 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이 탄 상선의 경우는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시에티알 상단의 상선은 전용 부두가 있어서 그곳에 우선적으로 정박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상선은 곧바로 부두를 향해 접근해 들어갔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뱃머리가 부두에 가볍게 부딪혔다. 대기하고 있던 일꾼들이 재빨리 선원들이 던진 밧줄을 잡아 말뚝에 감았다.
저벅저벅.
모용명와 남장을 한 아밀리에는 멜리사의 도움으로 제일 먼저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
드디어 제라드 백작이 통치하는 서쪽 지역에 도착한 것이다.
부지런히 그의 뒤를 쫓아오던 아밀리에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시온 님! 이제 가면을 벗으면 안 될까요? 어울리지도 않는 남자 흉내는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그녀는 더 이상 답답한 인피면구를 쓰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남자 얼굴로 분장하는 것은 더 이상 싫었다. 여자 목소리를 들킬까 봐 매순간 소리를 죽여 말해야 하는 피곤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처에 여관을 잡은 뒤 가죽 가면을 벗도록 하자.”
모용명은 그녀에게 인피면구가 사람의 얼굴 가죽으로 만든 거란 사실을 말하지 않았기에 그저 가죽 가면이라고 바꾸어 말했다.
“네! 저기 저쪽 여관은 어때요?”
아밀리에는 그저 빨리 본래의 얼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기 때문에 눈에 띄는 여관의 간판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나쁘지 않아 보이는군.”
모용명 역시 여관의 질은 아무래야 상관없다고 생각하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어차피 잠시 머무른 뒤 곧바로 출발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요금을 선불로 지불하고 숙소로 올라갔다.
짐은 모두 무게와 부피를 줄여 주는 마법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으므로 따로 정리할 필요는 없었다.
“침대에 누워. 바로 시작하지!”
모용명은 아밀리에의 얼굴에서 조심스럽게 인피면구를 떼어 냈다.
본래의 어여쁜 얼굴로 돌아간 그녀는 거울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즐거워했다.
두 사람은 여관에 잠시 머무르며 통행증을 발급받았다.
통행증을 발급받는 철차는 간단한데 다만 돈을 많이 지불할수록 빨리 발급받을 수 있었다.
“충분히 쉬었으면 이제 무투 대회가 열리는 에펠 영지로 가자.”
“네? 아직 충분히 쉬지 못했는데요? 굳이 새벽 일찍 나설 필요는 없잖아요?”
아밀리에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반항했으나 결국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모용명의 세운 계획은 아주 간단했다.
매년 겨울이 끝나고 파종할 시기가 되면 제국의 건국제가 열린다. 그 축제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행사가 바로 무투 대회다.
무투 대회가 열리는 곳은 제국 황실을 비롯해 총 다섯 곳! 대륙 서쪽의 카로스 해 지역은 에펠 영지에서 무투 대회가 열리게 된다.
각지에서 능력 있는 용병들이나 견습기사들이 많이 참여하는 대회인데 그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는 자는 신분만 확실하면 바로 기사 서임을 받게 된다.
중요한 건 카로스 해 주변 지역을 장악한 제라드 백작이 이 무투 대회 마지막 날 시상식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눈도장을 콱 찍어서 가능하면 그의 휘하에 들어간다.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제라드 백작의 신임을 얻어 요직에 오른다.
그러한 과정에서 세력을 규합하고 명성을 높인 뒤 백작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필요한 세력을 손에 넣은 뒤 백작에게서 독립해 새로운 세력을 세우는 것이 그의 1차적 목표였다.
그렇게 우선 자신만의 기반을 만든다.
한시 바삐 대업을 이룰 기반을 만들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그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아밀리에에게 외쳤다.
“에펠로 가자!”
그가 느닷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기에 아밀리에는 다급히 짐을 챙겨 모용명을 뒤쫓았다.
“시온 님, 혼자 빨리 가시면 어떻게 해요?”
그녀가 투덜거리듯 말했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할 말만 했다.
“지금부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경공 연습을 겸한다.”
“앗! 너무해요. 시온 님!”
시온!
이제 그가 시온이란 이름으로 제국 서부 카로스 해 전체에 알려질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앞으로 3일! 장차 그에게 명성을 안겨 줄 무투 대회까지 남은 기간이다.
에펠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토옥!
지붕 위를 타고 빗방울들이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간밤에 사납게 퍼붓던 빗줄기도 눈에 띄게 약해지더니 새벽에는 완전히 멈췄고 지금은 태양이 동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환하게 떠올랐다.
에펠 영지에서 가장 높은 첨탑으로 올라간 병사들은 밝은 표정으로 입에 나팔을 물고 세차게 불어 대었다.
뿌우우우우우―
듣기만 해도 경쾌한 나팔 소리가 영지 전체에 울려 퍼지고 성문은 각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활짝 개방되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는 것처럼 맑게 개여 있었고 잔뜩 들든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그 소리가 시끄러울 법도 하건만 단 한 사람도 조용히 하라며 항의하는 자가 없다.
그렇다! 지금 에펠 영지의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다.
내일이 바로 제국의 건국 기념일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축제에서 가장 큰 행사는 뭐니 뭐니 해도 무투 대회였다. 서부 각지를 떠돌며 수련하던 견습기사들과 상금을 노린 용병들이 모두 에펠 영지로 모여들며 기웃거리는 온통 사람들로 북적거리게 되었다.
무투 대회는 최초에 기사들의 무예 수련을 장려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지만 훈련보다는 명성과 부의 축척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게 되었다.
우선 대회에서 패배한 자는 이긴 자의 포로가 되어 몸값을 주어야만 풀려날 수 있었다. 기거에 더해 승리자는 패배자의 말과 무기를 몰수해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관객들이 출전자에게 돈을 미리 거는데 승리자는 그들이 건 돈의 3할(30%)을 가질 수 있었고 자기 자신에게 돈을 걸 수도 있었다.
관객들은 출전자들에게 일정 금액 이상의 돈을 걸 수 없다. 반면 출전자는 자신에게 액수에 제한 없이 돈을 걸 수 있어서 승리할 경우 크게 한몫 챙길 수 있었다.
이에 귀족이 아닌 자들도 무투 대회에 출전하고 싶어서 다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사람들은 대륙 서부에서 제각기 각자의 꿈을 안고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참가자들뿐 아니라 무투 대회를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자들이 더 많았다. 그들이 펼치는 재주와 기량을 보기 위해 어제 저녁 무렵부터 기나긴 줄을 만들었다.
신청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선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들을 선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에펠 영지의 기사들의 몫이었다. 영주 휘하의 모든 기사들이 총 동원했지만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어디서 왔다고?”
“겐룬힐튼에서 온 모리스입니다!”
“겐룬힐튼이라…… 저쪽으로 가서 테스트를 받게!”
1차 과정은 선발이 아니라 접수다.
접수를 맡은 기사들은 원래 그들의 신상이나 경력에 대해 자세하게 조사해야 했지만 신청자들이 너무 많아 대충 이름과 출신 지역만 기록했다.
어차피 우승자가 된 자들은 다시 신상 조사를 받게 되기 때문에 바쁜 와중에 너무 힘쓸 필요는 없다. 아니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렇듯 신속히 일처리를 했지만 기다랗게 늘어선 신청자들의 줄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길어지는 것 같았다.
뚜벅. 뚜벅.
그때 흙먼지를 뒤집어 쓴 두 명의 여행자들이 지금 막 에펠 영지의 성문을 통과했다.
조금이라도 흙먼지와 따가운 햇살을 막을 속셈이었는지 두터운 여행자의 로브에 달린 두건을 머리에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여행자들 중 하나가 갑갑한 듯 두건을 벗으며 얼굴을 드러냈다.
먼지투성이의 남루한 겉옷과는 대조적으로 그자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아!”
주위를 지나가던 사내들이 무심코 탄성을 지르고는 저절로 나온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흠칫 얼굴을 붉혔다.
저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얼굴!
태양이 뜨면 달과 별들이 그 빛을 잃게 되듯, 눈부시게 빛나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좀 전까지 저마다 잔뜩 차려입고 뽐내듯 거리를 활보하던 여성들의 모습이 갑자기 초라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녀의 피부는 눈부시도록 희었는데 안색이 다소 창백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 창백한 느낌이 오히려 청초한 분위기가 강해 사내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모에 독특한 개성까지 더해졌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 곱디고운 피부 위에 오뚝한 콧날과 붉은 입술의 선명한 윤곽이 자리 잡고 있었다. 흑단같이 검은 머리카락에는 은은히 푸른빛이 감돌아 어딘지 신비한 느낌을 더했다.
근처를 지나던 여성들은 본능적으로 그녀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애썼다. 막 봉우리를 피운 듯 절정에 달한 그녀의 미모와 정면으로 비교당하게 된다면, 꾸미면 나름대로 괜찮은 자신들의 미모가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되고 제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내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얼빠진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애인에게 발등을 콱 찍히는 등 호된 수모를 당했다.
그때 그녀와 같이 온 여행자가 무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아밀리에, 멍청한 녀석들 때문에 곤란한 일이 생기기 전에 두건을 다시 눌러쓰도록 해.”
“제겐 시온 님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그까짓 시시한 사내놈들. 제 분수를 모르고 수작을 부린다면 뼈를 콰직 부러뜨려 주면 되잖아요?”
아밀리에는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 대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은 아밀리에와 모용명이었다.
그녀의 말에 모용명은 담담한 어투로 다시 말했다.
“너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깟 일 때문에 너에게 봉변을 당할 사내들의 처지가 한심하고 딱해서 그러는 거다.”
“앗! 너무해요. 저같이 가냘픈 여자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 심한 말을…….”
모용명은 그녀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겉옷에 달린 두건을 벗었다.
“앗!”
이번에는 주위를 지나가던 여성들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밀리에의 미모 때문에 이미 사람들의 주목받고 있었기 때문인지 많은 여성들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집중되었다.
모용명은 눈에 띄게 잘생긴 외모를 가진 사내다.
오웬 백작의 딸인 네르시아도 고작 천박한 노예 신분에 불과한 그에게 반했고 시에티알 상단의 멜리사는 고작 며칠 만에 그의 매력에 푹 빠졌다.
거기다 아밀리에 역시 미혼술 때문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고는 했지만 본래의 뛰어난 외모와 매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산파의 미혼술은 서로 서먹하고 적대적인 남녀가 마음의 벽을 허물고 첫 관문을 여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 기본적으로 대상이 시전자의 외적인 매력에 호감을 느끼지 않으면 미혼술에 걸려들지 않는다.
미혼술이라는 게 원래 선천적으로 타고난 매력을 강화하는 것이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매력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름다운 세 여성이 그에게 빠져든 것을 보면 모용명의 외모와 매력이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으리라.
여하튼 그는 자신의 외모에 별 감흥이 없었다.
새로운 몸으로 소생한 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은데다 평소에 거울을 들여다 볼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쾌활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아밀리에게 표정을 바꾸며 옷자락에 붙은 흙먼지를 툭툭 털었다. 먼지가 잘 털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투덜거렸다.
“마차를 타고 왔다면 빠른데다 먼지도 묻지 않고 좋을 텐데! 지금 이 꼴이 뭐예요?”
“오는 길에 경공 연습도 하고 경비도 아꼈으니 겸사겸사 좋은 선택이었다. 불편하면 접수를 마친 뒤 여관에서 몸을 씻도록 해.”
“그 말 정말이죠? 취소하기 없기예요.”
아밀리에는 그의 말에 반색했다.
여관에 숙박하며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면 몸을 씻을 수 있다. 그러나 모용명은 되도록 경비를 아끼느라 마을 근처에서도 노숙을 고집해 왔다.
경비는 부족하지 않았지만 쓸데없는 곳에 공연히 돈 쓸 필요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니 씻는다는 말에 그녀가 이토록 기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때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함성이 일어났다.
“와아―아아아! 저기 우리 영지 출신의 기사도 있다!”
이때까지 심사로 뽑힌 참가자들은 모두 763명!
심사가 모두 끝나지도 않았는데 참가가 확정된 자들을 먼저 공고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가자들의 이름과 신분, 그리고 출신 지역이 큼직한 천에 쓰여서 성벽에 내걸리자 거리에 들어차 있는 군중들은 바삐 명단을 확인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