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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자신이 뽑혔는지 마음 졸이며 확인하는 자들도 있었고 각자 아는 이름이나 같은 지역 출신이 없나 눈을 부릅뜨고 살피는 자들도 있다.
그뿐 아니라 벌써부터 돈이 오가며 합격자를 걸고 내기가 시작되었다.
정식으로 출전자들에게 거는 내기가 아니어서 이렇게 벌어들일 수 있는 금액은 소소하지만 대회가 개최되길 기다리는 동안 지루함을 덜기 위한 가벼운 여흥이었다.
“난 저기 브레드란 사내에게 걸겠어!”
“그렇다면 난 같은 영지 출신의 요한에게 걸겠다!”
“누구 안토니의 승리에 걸 사람을 없어?”
모두들 즐겁게 떠들며 내기를 즐겼다.
하지만 첫째 날 경기가 시작되면 공고된 이름들 가운데 대략 삼십분의 일 정도는 떨어져 나갈 것이다. 탈락자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어차피 우승자는 각 경기마다 한 명씩 단 세 명뿐!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자들은 극소수일 뿐, 나머지는 대회 관람을 즐기며 내기로 짭짤한 부수입을 노리게 될 것이다.
‘최종 승리자가 되어 영광을 누리는 것은 내 몫이 될 것이다!’
모용명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길게 늘어선 줄 뒤에 섰다.
에펠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무척 서둘렀으나 줄에 서고 난 뒤에는 오히려 느긋해졌다.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 서두른다고 줄이 빨리 줄어드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느긋한 모용명의 태도와는 달리 아밀리에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암! 피곤해…….”
지금 그녀는 그저 빨리 욕조에서 몸을 씻은 뒤 푹신한 침대에 누워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밀리에는 무투 대회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를 따라 이곳에 온 것뿐이었다. 심심해진 그녀는 조금이나마 지루함을 덜기 위해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사람이 참 많네요?”
“…….”
당연한 걸 묻는다는 생각에 모용명은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자 아밀리에는 불쑥 오기가 치밀어 다시 말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몰려온 걸까요? 저기 저 사람은 붉은 띠를 머리에 두룬 것을 보니, 엔트레논 산맥에 사는 야말란토 부족 사람인 모양이에요. 그리고 저기 저 사람들은…… 엇? 저건! 시에티알 상단의 깃발 아니에요?”
그녀가 가리킨 깃발은 푸른 바탕에 해오라기가 검은 색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저건 분명 시에티알 상단의 깃발이 분명했다.
“무슨 볼일로 온 걸까요? 설마 축제를 즐기러 올 만큼 한가한 건 아닐 텐데…….”
아밀리에의 말대로 해적들에게 상단주 카엘을 잃은 그들은 혼란을 수습하고 멜리사를 상단의 새로운 주인으로 삼으며 지휘 체계를 다시 세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터였다.
결코 이번 건국제를 즐길 여유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저들이 여긴 어쩐 일이지? 영지에 뭔가 물건을 대러 온 건가? 그게 아니라면…… 혹시 멜리사가 나를 위해 보낸 사람들인가?’
짐작이 맞았는지 그들은 모용명과 눈이 마주치자 반가운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시온 님!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그들은 상인 특유의 입속의 혀처럼 착 감기는 부드러운 화법을 동원하며 반가움을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었다.
모용명은 대화가 쓸데없이 길어지는 걸 막기 위해 곧바로 물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멜리사 님께서 시온 님을 응원하라고 저희들을 보냈습니다.”
시에티알 상단의 새로운 주인이 된 멜리사는 그동안 잠시도 모용명을 잊지 못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그를 따라 에펠 영지로 가고 싶었으나 새롭게 상단의 총수 자리에 오르며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많아 도저히 몸을 빼낼 수 없었다.
그녀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상단의 상인들 몇 명을 대신 보낸 것이다.
상인들은 그를 향해 씩씩한 어조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희가 모두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들은 멜리사에게 지시받은 대로 그의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기사들에게 뇌물을 바쳐 모용명이 곧바로 선발 테스트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준 것이다.
“굳이 이럴 필요까진 없는데…….”
“저희가 좋아서 한 일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시온 님이 머무르실 숙소도 잡아 놓겠습니다.”
편한 것을 싫어하는 인간은 없다.
모용명도 알아서 궂은일을 처리해 주는 것이 정말로 싫지는 않았기에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
‘그나저나 너무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좋겠지?’
무림에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실력을 3할(30%) 정도는 항상 감춰 두라는 격언이 있다. 적들에게 모든 실력이 노출되면 그에 맞춰서 대응해 올 것이고 또한 경쟁자들의 질투와 경계심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력을 펼쳐 제라드 백작의 눈에 드는 것이 목표지만 지나치게 뛰어난 무력은 오히려 부담스럽게 비춰질 수도 있다. 자신이 품을 수 없는 비범한 인물이라 판단되면 다른 자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제거해 버리려 하는 것이 군주들의 습성이니까.’
그는 적당한 수준까지 내공을 드러내되 강호의 무공 초식은 되도록 펼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너무 튀는 것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루 속에 넣어 둔 송곳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니 굳이 위용을 떨치기 위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급하게 움직이다 보면 어딘가 파탄이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그는 특별히 복잡한 초식을 사용하지 않아도 최종우승자가 될 자신이 있었다.
모용명이 머릿속으로 그런 계산을 하고 있을 때 안쪽에서 누군가 외쳤다.
“다음! 들어오시오.”
아밀리에는 가볍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밖에서 응원할게요! 시온 님, 설마 선발에서 탈락하진 않겠죠?”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연무장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공터에 심사관으로 보이는 기사가 자리에 앉아 있고 그 뒤로 종자로 보이는 사내들이 도열하듯 서 있었다.
심사관은 무거운 판금갑옷 대신 가벼운 체인메일을 입고 있었다.
특별히 전시 상황이 아니라면 아무리 기사라 해도 항상 전신갑옷을 차려입고 다니지는 않았다. 무게도 제법 무겁지만 활동하기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긴 심사에 지친 듯 탁자 가운데 앉아 있던 심사관은 길게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좌우로 우두둑 소리 나도록 꺾었다. 아직 그의 명단에는 300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기록되어 있고 이제 그들 중 100명 정도를 심사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심사관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약간 비웃음 섞인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그래, 듣기로는 바다 괴수인 크라켄을 잡았다지?”
에펠 영지의 기사이자 심사를 보게 된 헤르멘은 시에티알 상단의 상인들에게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 신경 써서 심사해 달라며 금화가 들어 있는 묵직한 주머니를 슬쩍 찔러 준 것까지는 좋았다.
에펠 영주가 대회에 관련된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지만 소용없는 짓! 심사관으로 뽑히고도 뇌물을 받지 못하면 오히려 동료들에게 바보 멍청이란 소리를 듣게 된다.
심사관인 헤르멘의 기분이 살짝 상하게 된 것은 상인들에게 ‘시온이라는 자가 혼자서 크라켄을 잡았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듣고부터였다.
크라켄이 어떤 존재인가? 바다의 재앙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바다 괴수가 아닌가?
그 누구도 바다에서 크라켄을 이길 수 없다!
제국에 고작 일곱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기사들도 크라켄을 물리치는 건 불가능하리라. 혹여 크라켄을 물리친다고 가정해도 바다를 통해 달아나 버린다면 어찌 죽일 수 있겠는가?
헤르멘은 이자가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거짓말쟁이를 아주 싫어했다. 예전에 사기꾼에게 크게 시기당한 쓰라린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모양이군!’
모용명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분위기로 보아하니 솔직하게 말한다고 한들 믿어 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하하! 그렇단 말이지? 그럼 어디 크라켄 슬레이어의 실력을 마음껏 보여 주게나!”
헤르멘의 비웃음에 심기가 불편해진 그는 안색을 굳히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난 테스트를 받으러 왔소.”
“나와 겨루는 것이 선별 테스트다!”
심사관 헤르멘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슈아아악―!
테스트라고 해도 진검을 사용했기 때문에 미처 대응하지 못하면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 있었다.
‘다짜고짜 살수를 펼치다니! 버릇을 좀 고쳐 줄 필요가 있겠군.’
모용명은 물러나는 대신 정면으로 그의 검을 맞받아쳤다.
슈아아아아― 콰아앙!
단전의 공력을 3할(30%) 정도 끌어내자 헤르멘의 검이 마치 유리로 만들어진 것처럼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부서진 파편이 그의 얼굴과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파앗―!
찢어진 상처를 타고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헤르멘은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는지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에, 엑스퍼트(Expert) 상급!”
대륙의 기사들은 크게 비기너(Beginner), 엑스퍼트(Expert), 마스터(Master) 이 세 단계로 나뉘어졌다.
특별히 단계를 나누는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마나를 사용해 통상적인 물리 법칙을 파괴하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면 엑스퍼트, 무기를 통해 선명한 오러를 발산할 수 있으면 마스터라고 불렀다.
사실 이런 식으로 기사의 경지를 나누는 건 무식하고 터무니없는 일이었지만 음유시인 등의 호사가들은 편의대로 기사들의 단계를 나누어 서로 비교하는 것을 즐겼다. 뭐라도 기준이 있어야 기사들의 수준을 손쉽게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엑스퍼트 상급 수준의 기사가 왜 무투 대회에 참석하려는 거지?’
심사관인 헤르멘은 언뜻 이해할 수 없었다.
제국의 기사들은 바다의 모래알처럼 숫자가 많지만 그들 중에 엑스퍼트의 경지에 이른 기사들은 고작 300명 정도에 불과했다. 제법 규모가 큰 영지에도 엑스퍼트급 기사는 2∼5명 정도밖에 없었다.
즉 엑스퍼트급이라면 그의 신분이나 출신에 상관없이 각지의 군주들이 서로 모셔가려고 다투는 고급 인재인 것이다.
엑스퍼트급이라면 견습기사들처럼 굳이 이런 대회에 나올 이유가 없다!
거기에다 비록 자신의 막연한 짐작뿐이긴 했지만 상대는 엑스퍼트급 중에서도 상급 수준에 속하는 강력하게 응축된 마나를 지니고 있는 자였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헤르멘의 침묵이 길어지자 모용명은 불쾌한 기분을 감추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정도면 합격인가?”
상대의 뛰어난 실력에 놀란 헤르멘은 엉겁결에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심사관인 헤르멘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왔다.
엑스퍼트급이라면 곧 말단에 불과한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높은 직위에 오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정신을 수습한 심사관은 기다리고 있던 종자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합격이다!”
그의 평가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던 종자는 들고 있던 나팔을 힘껏 불었다.
뿌우우우우우―
이처럼 나팔소리가 길게 울리는 것 합격을 알리는 것이다.
“와아아아아!”
근처에 있던 군중들은 마치 자기 일이기라도 한 듯 기뻐하며 소리를 내질러 축하를 해 주었다.

둥둥― 두두두두두둥둥!
웅장한 북소리와 함께 드디어 첫째 날 대회가 개최되었다.
온갖 악기를 동원한 소리와 사방에 가득한 열기! 거대한 경기장과 그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
수많은 관중들이 지르는 함성과 빠른 북소리는 마치 원시의 주술처럼 절로 사람의 심장 박동을 빠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더없이 아찔한 열기 속에서 휘날리는 깃발 아래 눈부신 갑옷을 입은 견습기사가 말에 올랐다.
히이이잉!
흥분한 말을 토닥이던 견습기사는 종자가 건네준 거대한 랜스(Lance)를 받아 들었다.
마상 전용 창인 랜스는 전체 길이가 3.6∼4.2m가량 되지만 크기에 비해 무게가 그리 무거운 편은 아니었다. 창날 부위를 제외한 창대 전체가 가벼운 나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랜스를 높이 들어 올린 두 명의 출전자들이 서로를 향해 돌진하자 관객들이 일제히 환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던 기사들은 기세를 살려 서로를 향해 힘껏 랜스를 내질렀다.
슈아아아앙― 콰아앙!
맹렬한 폭발음과 함께 한쪽의 창대가 요란하게 부서져 나갔다. 창대의 파편이 떨어진 곳에는 수많은 창들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우와아아아!”
흥분한 관객들이 목이 터져라 함성을 내지른다.
이처럼 출전자들은 가능한 멋지게 상대의 창대를 산산조각 내려고 노력했다. 가능한 화려하게 상대를 무찌를수록 자신의 명성과 인기를 손쉽게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무투 대회의 3가지 종목 중 하나인 마상 개인 창시합인 주스트(Joust)다.
지상에서 검을 겨루는 것을 부엔루트라고 하며 실제 전투처럼 단체전을 펼치는 것을 투루나이(Trunei)라고 불렀다.
주스트, 부엔루트, 투루나이 이 3가지 종목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아야 무투 대회의 최종우승자가 될 수 있다.
무투 대회는 한 종목씩 삼 일에 걸쳐서 진행된다.
출전자들은 평소에 갈고 닦은 기량을 마음껏 펼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들에게 돈을 건 관객들은 열렬한 함성으로 출전자들을 응원했다.
그런데 대회 관람에 정신이 팔린 대부분의 관객들과는 달리 엉뚱한 것에 한눈이 팔린 관객이 하나 있었다.
아밀리에는 군침을 꿀꺽 삼키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그에게 간청하듯 말했다.
“시온 님! 저기 먹음직스런 꼬치를 파네요? 뭘 파는지 한 번 가 볼까요?”
모용명은 귀찮다는 듯 소매를 휘저으며 말했다.
“그래, 마음대로 해!”
“와아! 정말이죠? 어디 가시지 말고 여기 가다리셔야 해요!”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음식을 파는 가판대를 향해 신나게 달려갔다. 그녀는 가격에 상관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음식을 마음껏 사먹었다.
그들이 영지에 오는 동안 여비를 아낀 것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용명은 출전자들의 창술과 검술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제국의 무예는 무림의 것에 비해 상당히 단순하군. 이들이 견습기사나 용병에 불과하다는 걸 감안한다고 해도 강호의 3류 무사들보다도 거칠고 투박하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무예가 무림의 것보다 못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페겔비에난 대륙의 무예는 개인의 기량을 중시하는 강호의 무공과는 달리 전쟁 등의 단체전 특화되어 발전되었다.
특히 전신갑옷과 방패 등이 발달했기 때문에 막강한 방어력을 꿰뚫기 위해 파괴력 위주로 무예가 발달되었다. 즉 적의 예측을 불허하는 신묘한 초식의 변화나 빠름보다는 일격에 적을 참살할 수 있는 강력한 파괴력이 더 중요했다.
따라서 순간적으로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수법만 집중적으로 발달했다.
개인전보다 단체전에 특화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대부분 용병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거나 견습기사 정도의 수준일 뿐, 대륙 전체의 무예를 대표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처럼 그들의 대결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은 제국의 무예를 훔쳐 익히기 위해서였다.
‘강호의 무공은 이들의 눈에 기이하고 괴상망측하게 보일 수도 있다. 구태여 이들의 반감을 살 필요는 없지! 이자들의 무예를 눈여겨보고 익혀서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감추어야 하겠다. 아직 내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강호에는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는 없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아직은 자신을 드러내 주변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보다 세력을 모으고 명성을 얻을 때까지 신중하게 행동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최소한의 기반을 얻었을 때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쳐 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우와아아아!”
또 한 차례 누군가 승리자가 되고 관객들의 함성이 장내가 터져나갈 듯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때 대회를 주체하고 있던 진행자가 다음 참가자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오오! 다음 도전자는 크라켄 슬레이어라는 거창한 별명을 가지고 있군요! 단신으로 크라켄을 죽인 자의 이름은 시온입니다! 다들 우렁찬 함성으로 맞이해 주십시오!”
모용명은 음식에 정신이 팔린 아밀리에를 불러 대회장으로 나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관객들은 일제히 야유했다.
“우우우우!”
바다의 재앙이라 불리는 크라켄을 죽였다고 하기엔 그의 모습이 별로 강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에 비친 모용명은 아직 소년의 모습이 남아 있는 얼굴에 근육이 별로 크지 않아 별로 힘을 쓸 것 같이 보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눈에 띄게 준수한 용모를 하고 있으니 여인들에게는 인기가 있을지 모르나 사내로서 용맹을 떨치기엔 여러모로 부족해 보인다고 다들 생각했다.
이런 대회에 처음 나오는 초심자라면 경기장이 아찔하도록 일그러져 보일 정도로 긴장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야유가 빗발치는 상황이라면 더욱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모용명은 겉보기와는 달리 초심자가 아니었다.
강호의 무시무한 고수들과 목숨을 걸고 싸운 경험이 있었고 어렸을 때 무림 대회에도 여러 번 출전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들의 야유는 그저 유치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일 뿐이다.
모용명은 덤덤한 얼굴로 말에 오른 뒤 아밀리에가 건네주는 랜스를 받아 들었다.
“저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시온 님.”
그녀는 걱정과 애정을 담뿍 담아 격려했지만 그는 대답 대신 다소 엉뚱한 소리를 했다.
“곧, 야유가 함성으로 바뀔 테니 내게 돈을 걸어 두는 거나 잊지 말도록 해.”
대회 출전자는 액수에 상관없이 돈을 걸 수 있다.
특히 자기 자신에겐 아무리 큰돈을 걸어도 상관없다. 오히려 관객들로부터 배짱 좋다는 찬사를 받게 된다.
이기게 될 경우 승리의 명예와 거금을 동시에 거머쥐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게 될 경우 자신에게 건 돈의 몇 배를 물어 줘야 한다.
거기다 승리자가 원하는 만큼 몸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은 물론 부상에 대한 치료비까지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확실하게 파산하게 될 수도 있다. 위험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출전자들 중에서 실제로 자신에게 돈을 거는 자는 드문 편이었다.
“정말 가진 돈 전부를 걸어도 괜찮겠어요? 아! 물론 시온 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요!”
모용명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곧바로 말의 엉덩이를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쫘악―!
히히히힝!
그의 눈에 마주 달려오는 상대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춰졌다.
마상 창시합 주스트(Joust)의 핵심은 단순하다.
돌진하여 찌른다!
그러나 지극히 단순해 보여도 승마에 능숙하고 평소에 창을 찌르는 연습을 충분히 해 두지 않으면 결코 승리할 수 없었다.
모용명은 랜스라는 무기를 처음 다루어 보았으나 단전에서 내공을 뽑아 올리자 단검처럼 가볍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와아압!”
그때 상대가 기합을 내지르며 그의 심장을 노리고 랜스를 힘껏 내질렀다.
슈아아아아앙―!
창날이 공기를 가르며 맹렬한 굉음이 터진다.
모용명은 그의 움직임을 지켜본 뒤 말고삐를 가볍게 잡아당겨 곡예라도 부리듯 아슬아슬하게 창을 피해 냈다.
상대의 창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그는 벽력같이 창을 내질렀다.
슈아아아아아― 파아악!
공력이 잔뜩 실린 창끝이 그대로 상대의 가슴에 명중했다.
콰아앙!
맹렬한 파공음과 함께 두터운 금속 갑옷이 꿰뚫렸다.
근육과 갈비뼈를 부수고 들어간 창날이 기어코 상대의 심장을 관통했다!
등 뒤로 빠져나온 창날과 수실이 온통 붉게 물들었고 상처에서 왈칵 피가 뿜어져 나왔다.
절명한 견습기사는 말 위에서 굴러떨어져 진창에 처박혔다.
쿠웅!
“…….”
장내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구경꾼들은 모용명이 승리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잠시 어리둥절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누군가 고함을 내지르자 요란한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와아아아!”
“우왓! 정말 화끈한데?”
“크라켄 슬레이어! 최고!”
그들이 이처럼 환호하는 이유는 랜스로 단숨에 상대를 죽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합용 랜스는 창대가 나무로 되어 있었고 창날로 무디게 제작되어 있었다.
그것으로 상대의 갑옷을 우그러뜨리는 등의 부상을 입힐 수는 있어도 이처럼 단번에 갑옷과 심장을 꿰뚫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주스트(Joust) 경기는 상대를 꿰뚫는 것이 아니라 랜스로 상대를 찔러 말에서 떨어뜨리는 개념의 경기였다. 때문에 경기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부상은 말에서 떨어지면서 생기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관객들 입장에서 이처럼 화끈한 경기를 보는 건 그야말로 혈관 속의 피가 끓어오를 만큼 흥분되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크라켄 슬레이어에게 걸겠어!”
“나도! 나도 걸겠어!”
“아앗! 도전자에게도 좀 걸라고. 이 자식들아!”
주스트는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모용명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다음 도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곁에 달려온 아밀리에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와앗! 역시 멋져요. 시온 님. 제 예상대로 멋지게 승리했군요.”
“호들갑떨지 말고 가서 다시 돈을 걸고 와.”
“후훗! 좋아요. 이번 기회에 단단히 한몫 벌어 보죠!”
아밀리에는 이번 승리로 벌어들인 돈을 다시 죄다 그에게 걸었다. 기대한 대로 모용명이 계속 우승한다면 경기가 모두 끝난 후에는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돈이 많아지면 시온 님도 더 이상 궁상을 떨지 않겠지? 근처에 여관을 두고 노숙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 딱딱한 빵을 먹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될 거야!’
그녀는 모용명이 즐거움이나 안락함을 위해 돈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곳에는 재물을 아낌없이 쓸 수 있지만 의식주에 필요 이상의 돈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런 그의 생각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된다면 아마도 아밀리에는 심각하게 좌절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직 훗날에 생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