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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보는 것만으로 그렇게 쉽게 훔쳐 배울 수 있다면 절기라고 불릴 수 없겠지? 그리고 만약 내게서 뭔가 훔쳐 배운다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반드시 죽여주마!’
그는 속마음과는 달리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조건은 네가 훗날 나를 떠나기 전에는 항상 나를 도와야 한다는 거다.”
“날더러 당신 수하가 되란 말이오?”
마스터의 체면이 있는데 어찌 황제 이외에 사람에게 머리를 숙일 수 있단 말인가?
모용명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그런 건 아니야. 다만 가장 친한 벗처럼 내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달라는 말이지. 선택은 어디까지나 너에게 달렸으니 마음대로 해!”
‘젠장! 그게 그거지…….’
윈프레겐은 심각하게 고민에 빠졌다.
그는 바디―체인지를 겪으며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필립이란 가명까지 쓰지 않았던가?
누군가의 뒤치다꺼리나 하기 위해 고향에서 뛰쳐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륙이 넓다하지만 이 녀석이 아니면 누가 나와 대적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단서는 어쩌고? 그리고 이자가 알고 있는 신기한 재간을 모조리 알아내고 싶단 말이다!’
윈프레겐은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휴우, 좋소! 약속…… 아니 맹세하겠소!”
그의 맹세에 모용명은 환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뭘 하자는 거요?”
“나는 맹세를 할 때 손바닥을 세 번 부딪히는 걸 좋아해.”
“으음…… 뭐, 그러지.”
두 사람은 손바닥을 세 번 부딪혀 맹세를 했다. 간단히 맹세를 마친 후 윈프레겐이 그에게 불쑥 물었다.
“그런데 뭐…… 한 가지 물어봐도 되오?”
“궁금한 게 뭐지?”
“아까부터 왜 자꾸…… 반말인지. 얼핏 보기에도 내가 더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나?”
모용명은 피식 실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보다 나이가 많아, 자세하게 설명하긴 그렇지만……. 몸이 바뀌었거든.”
윈프레겐은 그의 말에 흠칫 놀라며 생각에 빠졌다.
‘그럼 이 녀석도 바디―체인지를 경험한 것일까? 하긴 그러니 나보다 훨씬 강하겠지. 하지만 둘 중에 누가 더 나이가 많은지는 아직 모르는 일인데……. 하아! 괜히 내 정체를 숨긴 이상 그건 말을 꺼낼 수는 없잖아?’
그는 잠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기로 한 결정을 후회했다.
실제로 모용명이 겉보기보다 나이가 많기는 해도 칠십 세를 훌쩍 넘긴 그보다는 훨씬 어리기 때문에 나이 문제에 상당한 손해(?)를 보게 된 셈이다.
억울한 느낌이 든 윈프레겐은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다급히 소리쳤다.
“잠깐! 나도 동안이라 그렇지 겉보기보다 나이가 많단 말일세.”
모용명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말투로 대꾸했다.
“좋습니다. 그럼 서로 적당히 존대하기로 하죠.”
윈프레겐은 뭔가 크게 양보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순간 울컥했지만 화를 억눌러 참았다.
‘속는 듯한 기분이지만 아쉬운 건 내 쪽이니……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가자.’

대회 둘째 날.
오웬 영주의 기사였던 크라이슨은 끔찍한 시련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크라이슨은 영지의 성벽 앞에서 도망치는 모용명을 막으려다 한차례 망신을 당했고 그 후로 추격단과 함께 그를 뒤를 쫓았지만 결국 놓쳐 버리게 되었다.
기사단장 맥베스는 간악하게도 영주의 문책을 피하기 위해 노예 놈을 잡아들이지 못한 모든 책임을 그에게 뒤집어 씌웠다. 기사단 전체가 맥베스와 말을 맞춰 두었으니 별달리 말재간도 없는 그의 항변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 결과, 크라이슨은 기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영지 밖으로 내쫓기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그는 카로스 해 근처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에펠 영지에서 무투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한 가닥 희망을 품게 되었다.
“무투 대회에서 우승하면 다시 기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원래 자격을 박탈당하고 주인에게 내쫓긴 기사를 다시 받아 주는 군주는 없었다. 뭔가 중대한 사유가 있어서 쫓겨났을 거란 선입견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라이슨은 서쪽의 카로스 해까지 자신에 대한 소문이 퍼지지 않았으리라 믿었다. 오웬 영지는 대륙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거리가 상당히 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지런히 에펠 영지로 이동하던 크라이슨은 도중에 산적들을 만나 예상보다 여정이 늦어지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첫째 날 경기에 참석하지 못했고 둘째 날 새벽쯤에야 겨우 에펠 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첫째 날은 이미 지났지만 뇌물을 적당히 쓰면 지금부터라도 대회에 참여할 수 있을 거야. 최종우승자가 되는 길은 물 건너갔지만 아직 희망은 있다. 부엔루트(검술 경기), 투루나이(단체전)에서 두각을 드러내면 각지의 군주들에게 주목받을 수 있을 거야!’
무투 대회는 1년에 고작 두 번, 특별한 날에만 열리기 때문에 크라이슨은 이번 기회를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한시라도 빨리 떠돌이 신세에서 벗어나 기사의 신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그는 간신히 참가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이제 됐다! 승리는 나의 것!’
크라이슨은 자신의 실력에 대해 자신감이 충만했기에 기대감으로 마음이 들떴다.
그러나 흥분으로 달아오른 그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자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크라켄 슬레이어라 불리는 시온이란 자였다!
첫째 날 마상 창시합의 우승자인 그는 둘째 날의 검술 경기에서도 연전연승하며 두각을 드러내 보였다.
‘젠장! 왜 이렇게 빠른 거야?’
그의 검은 실로 놀랄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뭔가 휙휙 지나가는 것만 볼 수 있을 뿐 눈으로 좇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신기에 가까운 발재간으로 적을 농락하듯 공격을 피해 내다가 느닷없이 파고들며 날린 일격에 모조리 피를 쏟으며 쓰러져 버렸다.
“우와아아아아! 크라켄 슬레이어가 또 이겼다!”
“우왓! 공격 한 번에 그냥 끝이야! 결코 두 번 공격하는 법이 없어!”
“젠장! 저런 녀석하고 어떻게 싸우지? 나 그냥 기권할까?”
“그래! 그냥 기권해, 친구를 잃긴 싫다고! 하하하!”
자신의 순번이 다가올수록 크라이슨의 무릎이 후들거리며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을 박력이었기 때문이다!
‘젠장! 저 괴물 같은 자식! 열다섯 번 싸우는 동안 조그만 상처 하나 입지 않았어!’
처음엔 상대의 약점을 분석하려고 지켜보기 시작했으나 구경하면 할수록 저건 인간의 탈을 쓴 드래곤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크라이슨은 결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이번 무투 대회가 끝나면 다음번 대회까지 5개월은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출전자 목록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그는 여태까지 모아 두었던 돈을 죄다 써 버렸다.
‘제, 젠장! 설마 죽기야 하겠어? 두려워서 출전도 못한다면 그건 사내도 아니지!’
그런데 그때 크라켄 슬레이어의 검에 또 한 명의 도전자의 목이 잘려 나갔다.
슈아아아아악― 파아앗!
잘린 단면에서 핏물이 쫙 솟구치며 하필이면 잘려 나간 머리통이 그의 발 앞에 투욱 떨어졌다.
“으앗! 까, 깜짝이야!”
잔뜩 긴장하고 있던 크라이슨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무심코 소리치고 보니 어린 계집애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를 낸 것 같아 기분이 더욱 우울해졌다.
그때 대회의 주최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다음 도전자는 앞으로 나오시오! 137번! 없습니까?”
그 자의 말에 크라이슨은 무심코 순번이 적힌 나무판을 확인했다.
137번!
공교롭게도 137번은 자신의 번호였다.
사내와 맞붙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크라이슨은 등줄기에 쫙 소름이 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애써 눌러 참고 있던 공포감이 혈관 속을 떠돌자 아랫도리가 쩌릿쩌릿해지며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졌다.
‘XX! 죽어도 싸운다! 나는 할 수 있다!’
크라이슨은 억지로 용기를 짜내며 대회장 복판으로 성큼 나아갔다.
나름대로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스스로를 독려하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시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상대는 크라켄 슬레이어!
피로 목욕한 듯 전신에 피칠갑을 한 그가 크라이슨을 보고 갑자기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젠장! 갑자기 왜 웃고 XX이야! 살 떨리게!’

한편 모용명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누군지 기억났기 때문에 조금 놀랐다.
‘이 사람은 오웬 영지의 기사…… 크라이슨이라고 했던가? 왜 이런 곳까지 온 거지? 설마 날 쫓아서 온 것은 아닐 테고.’
엉뚱하게도 약간은 반가운 마음이 들어 모용명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크라이슨은 기세에 이미 눌린 듯 사색이 된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생각해 보면 크라이슨은 모용명에게 크게 잘못한 일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며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지도 못했다.
블러드 문의 암살자가 더 위협적이었고 네르시아가 제일 짜증나는 존재였다. 그들에 비해 크라이슨은 그에게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역시 날 알아보지 못한 건가?’
모용명은 흑마법사 제뮤엘에게 시술을 받아 얼굴이 조금 바뀌었다. 손자인 시온을 잊지 못하던 흑마법사가 그의 눈매가 얼굴 몇 군데를 바꾸어 손자와 비슷한 얼굴로 바꿔 버린 것이다.
사람의 얼굴은 눈매나 골격이 조금만 바뀌어도 전혀 다른 인상이 된다.
게다가 지금은 피로 칠갑한 모습에 예전에는 잘 쓰지 않았던 검과 방패를 들고 있으니 크라이슨이 그를 보고 모용명을 떠올리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옷깃이 스치는 것도 인연이라 했으니…… 목숨만은 살려 주지. 하지만 난 귀찮게 한 만큼은 단단히 혼을 내 줘야지!’
모용명은 그로서는 드물게 자비를 베풀게 되었다.
그건 크라이슨의 성품이 비록 단순 무식하지만 다소 순박한 편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대회의 주최자가 그들을 향해 외쳤다.
“두 사람 마주보고 서시오!”
크라이슨은 뱀을 만난 쥐처럼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못했기에 모용명이 그를 향해 성큼 다가가 마주 섰다.
“각자 다섯 걸음씩 뒤로 물러나 검을 뽑으시오!”
‘젠장! 제발 움직여!’
크라이슨을 얼어붙은 몸을 간신히 움직여 검집에서 검을 빼냈다. 모용명은 검집을 바닥에 버리고 검만 뽑아 들고 있었기에 따로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그의 검은 온통 검붉은 피로 엉겨 붙어 있었다. 칼날을 타고 아직 엉겨 붙지 않은 피가 흘러내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투욱!
크라이슨은 자신도 모르게 그 핏방울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나의 혈관 속에 흐르는 피도 곧 저 칼날을 타고 흐르게 되겠지…… 젠장! 내가 지금 무슨 빌어먹을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재수 없게!’
그때 주최자가 깃발을 아래로 내리며 그들을 향해 외쳤다.
“시작하시오!”
쓸데없는 잡념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기 때문일까? 공격 신호에 대한 크라이슨의 반응이 조금 느려져 버렸다.
‘젠장! 늦어 버렸다!’
슈아아아악―! 샤악―!
순간 그의 눈앞에 뭔가 흰빛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크라이슨은 꼼짝없이 죽었다고 체념했다. 크라켄 슬레이어의 공격은 결과 빗나가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으악! 아아악! 아…….”
‘어? 아프지 않네? 어떻게 된 거지?’
자지러질 듯 비명을 내지르던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게도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샤라락―!
어리둥절해 있는 동안 한 가닥 부드러운 미풍이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 좋다! 시원하네? 응?’
한차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후, 가죽 갑옷에서부터 속옷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조각 조각나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모용명이 눈 깜짝할 사이 수십 차례 검을 휘둘러 그의 옷을 모두 베어 버린 것이다.
가죽과 천은 모조리 베었지만 피부는 조금도 상하지 않았으니 이 역시 거의 신기에 달하는 기예였다.
팔랑―!
“까악! 저 흉물스런 것 좀 봐!”
“끼악! 난 몰라! 눈 버렸어!”
알몸이 된 그의 몸을 본 여성 관객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에 비해 깔깔대며 폭소를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하! 엄마! 저 아저씨 좀 봐! 여기가 목욕탕인 줄 아나 봐!”
“고개 돌려! 엄마가 저런 거 보면 안 된다고 했지!”
“크하하하! 그것도 물건이라 달고 다니냐! 인마! 덩치가 아깝다!”
공포로 반쯤 얼이 빠져 있던 크라이슨은 뒤늦게 알몸이 된 걸 자각하고 몸을 움츠리며 황급히 손바닥으로 민망한 곳을 가렸다.
건장한 근육질의 사내가 몸을 움츠리며 얼굴이 잔뜩 붉어지는 모습은 나름대로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에 관중석에서 또 한차례 폭소가 쏟아졌다.
“하하하! 어딜 손바닥으로 몸을 가리려고 해!”
“크하하! 그러게 그 산만한 덩치가 손바닥에 가려지겠어?”
“가서 옷이나 입어! 이 멍청아!”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지자 크라이슨은 대회고 뭐고 다 젖혀 두고 도망치듯 대회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허둥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모용명은 가벼운 실소를 머금었다.
‘날 귀찮게 한 대가는 이걸로 치른 셈 치지. 운이 좋은 줄이나 알라고! 하하하!’
한편, 크라이슨의 수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까아아아악! 더러워!”
“헛? 저, 저런! 미친놈인가?”
허둥지둥 대회장 밖으로 도망친 크라이슨은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비명 소리를 견디며 간신히 숙소에 도착했다.
“까아아아악!”
여관에 도착하는 순간 직원들이 어김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심지어 바닥을 쓸던 아주머니는 엉겁결에 그를 향해 빗자루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어서 썩 꺼지지 못해! 이 변태 놈아!”
“젠장! 나는 여관에 숙박한 손님이라고!”
“손님이고 뭐고 꺼지지 못해? 가득이나 장사도 잘 안 되는데 재수 없게 시리!”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나서야 그는 간신히 방으로 들어가 허겁지겁 옷을 걸쳤다. 무언가 걸치고 나니 안도감과 함께 뒤늦게 수치심에 치를 떨게 되었다.
크라이슨은 이를 부드득 갈며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두고 보자! 감히 날 웃음거리로 만들다니! 반드시 복수하고야 만다!”
그러나 막상 복수하려고 마음먹으니 별로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살벌한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니 디시 오금이 쩌릿하게 저려 오며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젠장! 어떻게든 복수하고야 만다! 이대로 물러서면 사내놈도 아니지!”
크라이슨은 중얼거리며 자신을 독려했지만 이미 목소리에서 독기가 빠져나가 버렸다.
그는 씩씩거리며 다시 대회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람들이 혹시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고 놀릴까 봐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은 반쯤 가리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런 것에까지 세심하게 신경 쓸 여유가 생긴 것을 보면 이미 수치심 때문에 생긴 그의 분노는 흔적도 없이 사그라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의 오기로 대회장 앞까지 돌아갔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비참한 기분이 들것 같았기 때문이다.
‘욕설이라도 한바탕 쏟아내야지! 사내 체면에 이대로 찍 소리도 하지 못하고 찌그러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가 대회장으로 막 발을 들이는 순간, 관중석에서 또 한 차례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우와아아아아!”
크라켄 슬레이어가 또다시 상대의 목을 참수하듯 잘라 버렸기 때문이다.
파아앗―!
잘려 나간 목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고 바닥은 이미 패배자들이 흘린 피로 흥건해져 있었다.
크라이슨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며 생각에 잠겼다.
‘으으…… 저 괴물 같은 놈과 마주하고도 아직까지 목이 붙어 있는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군!’
두고 보자는 놈 무서울 것 없다더니, 살벌한 광경에 그의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욕설이 도로 쑥 내려가 버렸다.
‘저 녀석도 인간이 이상 뭔가 약점이 있을 거야! 그걸 알아내야 해!’
크라이슨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의 경기를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 사내는 도무지 약점이라고는 없다는 듯 계속해서 도전자들을 물리쳐 버렸다.
그가 가볍게 검을 휘두르면 반드시 상대의 목이 잘려 나간다.
“우와아아아! 크라켄 슬레이어! 만세!”
“멈추지 말고 우승까지 가라고!”
관중들의 함성은 갈수록 더 거세어졌고 관중석은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그런데 크라이슨은 원래부터 단순무식한 놈으로 피가 쉽게 뜨거워지는 성격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연전연승하는 모용명의 모습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젠장! 정말 대단한 놈이군!’
대회장 바닥에 붉은 피가 쏟아질 때마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거듭되는 크라켄 슬레이어의 승리에 무의식중에 관중들 사이에서 함성을 내질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용명은 둘째 날 경기의 우승자로 선포되자, 오히려 그의 추종자가 되어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함성을 내지르게 되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경기가 모두 끝난 후에야 그는 문뜩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에라! 이 멍청한 놈아! 망신을 준 놈을 응원하디니. 미친놈!”
그러다가 크라이슨은 갑자기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냐!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닐지도 몰라. 어차피 이번 경기에서 우승하기는 글러먹었고…… 어차피 난 주인도 없이 떠도는 몸! 다음 대회가 열릴 때까지 어중간하게 용병 일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저 자식 밑에서 수련하는 건 어떨까?’
그가 이런 엉뚱한 생각에 빠져든 것은 단순무식한 탓도 있지만, 모용명의 앞도적인 강함에 사내 대 사내로서 반해 버렸기 때문이다.
“젠장! 내게 저 정도 무력만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겠는데 말이야!”
그의 제자가 되어 무예를 전수받을 수 있다면 아무에게나 고개를 숙이거나 윗사람에게 굽실거리며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마치 대륙의 마스터들이 명예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마스터들은 저 괴물 녀석보다 센 건가? 설마 그렇지는 않은 것도 같고……. 그럼, 저놈이 마스터들보다 더 강한 건가? 그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에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갑자기 찾아가 제자로 받아 달라고 하면 받아 주기나 하겠어?’
크라이슨은 머리를 휘저으며 돌아섰지만 머릿속에 각인된 그의 강력한 위용을 가볍게 잊어버릴 수 없었다. 그는 결국 미련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대회장을 벗어나고 있는 모용명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에잇! 일단 한 번 저질러 보자! 감히 제자가 될 자격도 없으니 종자(Squire)로라도 부려 달라고 해 봐야지. 겉에서 알짱거리다보면 뭔가 얻어 배우는 것이 있겠지!’
그는 원래 생각보다 행동이 빠른 인물이라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가 무섭게 황급히 모용명의 뒤를 쫓아갔다.

거듭되는 우승에 잔뜩 신이 난 것은 모용명 본인이 아니라 아밀리에였다. 그녀는 활짝 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때요? 이게 전부 오늘 벌어들인 돈이에요!”
“촐랑거리다 잃어버리지 않게 간수나 잘하라고.”
무뚝뚝한 그의 대꾸에 아밀리에는 귀엽게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쌀쌀맞기는! 항상 이런 식으로 날 천대하다니. 흥! 어디 늙고 병들게 되고 난 후에도 이런 식으로 재수 없게 굴지 꼭 지켜보고 말 거야!”
그녀의 혼잣말에 새로운 동료가 된 윈프레겐이 웃으며 불쑥 끼어들었다.
“허허! 아가씨는 혼잣말도 참 재미있게 하는군.”
아밀리에는 그를 경계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러는 아저씨는 뭐예요? 뭔데 아까부터 졸졸 따라다니면서 친한 척하고 그래요? 혹시 나한테 관심 있어서 그런 거면 정중히 사양하겠어요!”
“흐음! 그런 거 아닐세. 정 내 정체가 궁금하면 저 친구에게 물어보게.”
윈프레겐은 짐짓 점잖을 떨어 보았지만 그녀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계속 늙은 사람처럼 말하고 그래요? 지금 그 말투 상당히 거슬리거든요? 같이 다니기 몹시 창피하니 웬만하면 고치도록 해요!”
아밀리에는 갑자기 동료가 된 윈프레겐이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자기 그를 받아들인 모용명에게도 야속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내겐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럴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어째서 이런 수상쩍은 사람을 동료로 덜컥 받아들인 거야?’
그녀가 살짝 기분이 상하려는 순간,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거기 멈추고 내 말 좀 들어 주시오!”
등 뒤로 고개를 돌려 보니 체격이 건장한 사내가 진지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밀리에는 별안간 그의 정체를 기억해 내며 소리쳤다.
“앗! 당신은! 흉물스런 몸을 드러낸 그 변태 맞죠?”
변태라는 말에 사내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며 소리쳐 항변했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벗고 싶어서 벗었다고 생각해? 옷을 자른 건 네 옆에 서 있는 크라켄 슬레이어라고!”
그때 모용명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지금 그걸 따지러 온 건가?”
그의 차가운 말투에 크라이슨은 저도 모르게 몸가짐을 바로 하며 황급히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제가 찾아온 이유는…….”
긴장해서 그런지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말이 그렇지 종자로라도 부려 달라는 식의 체면구기는 말은 맨 정신으로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해.”
모용명의 싸늘한 태도에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큰 소리로 외쳐 버렸다.
“연전연승하시는 압도적인 무위에 저도 무예를 수련하는 한 사람으로서 반하고 말았습니다! 부디 저를 종자라라도 받아 주시어 마음껏 부려먹어 주십시오!”
“…….”
거의 찬양조에 가까운 낯간지러운 그의 말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다가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밀리에였다.
“에엣? 방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듣기 민망할 정도의 말투인데다, 느닷없이 종자로 부려 달라니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그녀가 따지듯 말했지만 크라이슨은 다시 모용명에게 외쳤다.
“저를 받아 주십시오!”
쿠웅!
크라이슨은 어차피 내친걸음이란 생각에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윈프레겐이 농담 섞인 말투로 모용명에게 말했다.
“이제 보니 자네는 참 인기가 많구먼! 어제는 나를 동료로 받아들이더니 오늘은 이 녀석인가?”
모용명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녀석은 보면 볼수록 단순무식한 것이……. 마치 혁련위(赫蓮衛) 그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군.’
혁련위는 모용세가에 의탁한 인물로 무예가 뛰어났지만, 다소 단순한데다 모용세가의 혈통이 아니라 그리 중용받지 못했다.
그러나 모용명은 어릴 때부터 그를 보아 왔고 또한 나이도 비슷한 편이어서 개인적으로 상당한 친분을 나누었다. 머리가 썩 좋진 않았으나 적어도 모략을 꾸미거나 남의 뒤통수를 후려칠 성격은 아니어서, 그가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그가 잠시 옛 추억에 잠겨 있는데 아밀리에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시온 님! 저렇게 계속 무릎을 꿇려 놓으실 건가요? 어차피 허드렛일 할 사람 하나 정도는 필요하잖아요! 안 그래요?”
사실 그동안의 자질구레한 일은 모두 그녀가 도맡아 하고 있었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내가 시키는 일을 하는 건 마냥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개중에는 여자의 몸으로는 하기 힘든 거친 일도 꽤 있었다.
그녀의 간청에 모용명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좋아! 궂은일을 자청해서 하겠다는데 구태여 말릴 필요는 없지. 하지만 명심해! 종자가 되겠다고 말했으니 이제 넌 일행 중에 가장 낮은 신분이다. 모두에게 공손히 대하고 절대로 말썽이나 시비가 붙어선 안 돼!”
“네! 알겠습니다.”
크라이슨은 씩씩한 목소리로 시원스럽게 대답했으나 속으로 생각 없이 행동한 것을 약간 후회하기 시작했다.
‘괜히 종자가 되겠다고 말한 건가? 그냥 제자로 받아 달라고 할 걸 그랬나?’
그러나 항상 그렇듯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아 왔다.
윈프레겐은 그에게 약속대로 마스터의 추천장을 받아 왔다. 사실은 그가 직접 작성한 것이지만 정체를 숨기기로 한 이상 마스터를 만나고 돌아온 듯 능청을 떨어야 했다.
“휴우! 멀리까지 다녀오느라 온몸이 뻐근하구먼. 자아! 여기 자네가 기다리던 추천장이네.”
모용명은 그 자리에서 추천장을 펼쳐 찬찬히 읽어 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뭐가 불만인 듯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천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천재라는 말은 넣지 않았군요?”
“그건 너무 식상한 표현이 아닌가? 과장이 너무 심하면 오히려 허풍으로 들리기 마련이네. 뭐든 적당한 것이 좋아!”
“마스터 윈프레겐이 그렇게 말했다는 거죠?”
“으음…… 물론, 그렇지!”
솔직히 말하자면 모용명은 진작부터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건 그가 언변이 너무 서투르고 연기도 어색했기 때문이다.
‘역시 이자는 마스터 윈프레겐이었군. 그나저나 마스터 치고는 꽤 약한 편 아닌가?’
마스터의 상징은 오러 블레이드(검기)!
검기를 자유자재로 발출하려면 무벽(武壁)의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했기에 모용명은 대륙의 마스터도 그와 비슷한 경지에 도달한 자들이라 추측했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런 추측은 수정되어야 마땅할 것 같았다.
‘아마도 대륙의 마스터들은 검기를 발출하는 과정만 전문적으로 수련한 것 같구나. 그런 방식으로는 진정한 경지에 이르는 게 더욱 힘들어질 텐데……. 참으로 무식한 방법을 써 버렸군!’
어쨌거나 본인이 애써 감추려 하는 것을 일부러 들추어낼 필요는 없었다.
모용명은 앞으로도 그의 연극에 장단맞춰 주기로 마음먹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이것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추천장을 주머니에 챙겨 넣은 뒤 가죽 끈으로 단단히 묶어 두었다.
“크음! 약속대로 추천장을 받아 왔으니. 한판 붙어 주게나.”
윈프레겐은 그와 대결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바로 나가죠.”
두 사람이 한적한 공터를 찾아 나서자, 열심히 갑옷에 광을 내고 있던 크라이슨이 은근슬쩍 그들의 뒤를 따라나섰다.
모용명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에게 물었다.
“시킨 일을 다해 두고 따라오는 거겠지?”
“네! 대장간에 가서 검의 날을 세우고 갑옷에는 충분히 기름칠을 해 두었습니다! 말은 아무 문제 없…….”
모용명은 계속되는 그의 보고를 자르며 말했다.
“알았으니 그냥 따라와. 구경하는 건 허락해 주지.”
“감사합니다!”
허락을 받게 되자 크라이슨은 몹시 감격한 듯 소리치며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이 순간만을 기다리며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해 왔다! 당신의 기술을 모조리 훔쳐 배워 주지! 보는 즉시 체득하는 나의 천재적인 자질에 깜짝 놀랄 준비라 해 두라고!’
모용명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그의 생각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어차피 단순무식한 녀석이 이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할지는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슬쩍 입술을 비틀며 실소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