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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어디 할 수 있으면 마음껏 훔쳐보도록 해. 물론, 아무것도 훔쳐 배울 수 없겠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그들은 어렵지 않게 한적한 공터를 찾을 수 있었다.
축제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벽까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고 즐겼기 때문에 아직 극심한 숙취에 시달리느라 잠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모용명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며 윈프레겐을 향해 말했다.
“여기가 좋겠군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던 윈프레겐은 뭔가 불만인 듯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흐흠, 여긴 나무가 너무 많은 것 같지 않나? 거치적거릴 것 같은데?”
그의 눈에는 공터의 나무들이 전부 장애물로 보였다. 검술을 마음껏 펼치려면 생각보다 꽤 넓은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용명은 한심하다는 듯 실소를 머금으며 그에게 말했다.
“적을 만나도 숲 속에선 싸우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하긴 그렇군…… 여기로 하지.”
모용명은 검을 뽑으며 크라이슨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똑똑히 잘 지켜보도록 해. 네 녀석의 수준으로는 훔쳐 배우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다 보면 뭔가 조금은 깨닫는 것이 있을 거다.”
훔쳐 배운다는 말에 가슴이 뜨끔해진 크라이슨은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소리쳤다.
“명심하겠습니다! 시온 님.”
그때 윈프레겐이 눈빛을 빛내며 모용명에게 외쳤다.
“먼저 공격하겠네!”
슈아아아아악―!
공기를 찢는 파공성과 함께 윈프레겐의 검이 그의 가슴을 향해 들이닥쳤다. 모용명은 재빨리 분광소영신법을 펼쳐 나무 뒤로 숨어 버렸다.
그러자 윈프레겐의 검이 그를 바짝 추격하며 날카로운 기세로 공간 전체를 갈라 버렸다.
파아악!
한아름은 될 것 같은 나무 기둥이 대번이 잘려져 나갔지만 모용명은 그곳에 없었다. 민첩하게 경공을 펼쳐 이미 다른 나무 뒤로 몸을 피했던 것이다.
윈프레겐은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으나 뜻하지 않게 나무만 베어 넘겼을 뿐이다.
“자네! 계속 피해 다니기만 할 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친 그는 또다시 모용명이 몸을 숨긴 나무 기둥을 베어 버렸다.
파아악― 쿠웅!
나무가 쓰러지며 흙먼지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그 순간! 모용명은 흙먼지에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재빨리 윈프레겐의 등 뒤로 돌아가 있었다.
단전의 진기를 끌어 올리자 그의 손바닥에 마치 환상처럼 붉은 빛이 어른거렸다.
그리고 모용명은 상대의 옆구리를 공력이 실린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파아앙!
“크윽!”
장력에 적중당한 윈프레겐은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튕겨나 버렸다.
그러나 요란한 파공성에 비해 별로 부상을 입지 않았는데, 그건 모용명이 부상을 입지 않을 정도로 공력을 조절했기 때문이다.
마나를 끌어 올려 충격의 여파를 해소시킨 윈프레겐은 억울한 듯 소리쳤다.
“제대로 한 번 붙어 보자니까! 이게 무슨 짓인가?!”
모용명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리며 크라이슨을 향해 말했다.
“잘 보았겠지?”
“네! 시온 님.”
“뭘 느꼈냐?”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크라이슨은 당황하며 두서없이 입을 열었다.
“으음…… 그러니까. 주변의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라……. 뭐 이런 거 아닙니까?”
“네 녀석치고는 제법 머리를 굴렸군.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그…… 그럼. 정답은 뭡니까?”
“상대가 어이없이 패배한 이유는 반복해서 나무 뒤에 숨는 내 모습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익숙함은 방심을 불러오고, 다음에도 계속 나무 뒤에 숨을 거란 안일한 예측을 하게 만들지. 즉, 어떤 순간에도 적을 눈앞에 두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아! 이제 알겠습니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온 님!”
그때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울컥한 윈프레겐이 버럭 소리쳤다.
“자네! 지금 나를 활용해 저 녀석을 가르치는 건가?”
“그래서는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물론! 안 되고말고! 자네와 겨룰 때마다 거금 1,000골드를 지불하기로 한 것을 벌써 잊었나?! 게다가 마스트 윈프레겐 님의 추천장을 받아 온 것도 나란사실을 잊지 말도록 하게!”
윈프레겐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열을 냈지만 모용명은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방금 것은 돈을 받지 않은 것으로 하죠. 지금부터 제대로 한 번 붙어 볼까요?”
“바라던 바네!”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난 윈프레겐은 이번에도 먼저 공격했다.
슈아아아악!
모용명은 공격을 피하지 않고 검을 마주 휘둘렀다.
채앵!
그러나 정면으로 부딪히는 대신 교묘하게 부딪혀 적은 힘으로 적의 공격을 흘려 내 버렸다.
이것이 바로 넉 냥으로 천근의 힘을 받아 내는 사량발천근(四兩發千斤)의 묘리다!
적은 힘으로 큰 힘을 받아 낼 수 있는 이유는 힘의 방향을 살짝 바꾸는 것은 약간의 힘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가볍게 적의 공격을 모조리 흘려냈지만 모용명이 표정은 오히려 어두워졌다.
‘휴우, 아직 내공이 턱없이 부족하군! 어느 세월에 내공을 쌓아 예전처럼 화경(化境)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내공은 하루아침에 쌓아 올릴 수 있는 게 아니니 그저 성실하게 운기에 힘을 쏟는 것이 지금으로서 최선이었다.
한편, 윈프레겐은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아 약이 잔뜩 올랐다.
‘마치 솜덩이를 후려치는 것 같군. 타격에 제대로 들어가는 것 같지가 않구나! 또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그는 코어(단전)에 응축된 마나를 한꺼번에 끌어내어 더욱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슈아아아아앙―!
세찬 파공성과 함께 공격에 살린 기세가 더욱 강력해졌다.
응축된 마나가 검으로 모였지만 오러 블레이드(검기)는 생성되지 않았다. 윈프레겐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었기에 오러 블레이드를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다.
‘윽! 공격에 실린 공력이 증가했군!’
모용명은 적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질수록 공격을 받아 내기 힘들어졌다.
사량발천근의 묘리로 대부분의 파괴력을 흘려 버렸지만, 남은 여파만으로도 그의 내부를 뒤흔드는 충격을 줬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순간, 모용명은 대결을 시작한 지 처음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슈아아아아악―!
공기를 시원스럽게 가른 검날이 윈프레겐의 미간을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윈프레겐은 황급히 검을 휘둘러 그의 공격을 막아 내려 했다.
그러나 모용명의 이번 공격은 허초(속임수)!
공격하는 시늉만 했을 뿐, 곧바로 비어 버린 상대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갔다.
슈아아아아악―!
윈프레겐은 허리를 틀며 가까스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이번 것도 허초(속임수)!
모용명의 검은 곧바로 그의 허벅지를 찔렀다.
슈아아아악― 푸욱!
칼날이 근육과 신경을 절단하며 깊숙이 파고들었다.
다음 순간 모용명이 사정없이 검을 뽑아내자 상처에서 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제야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된 윈프레겐을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악!”
그는 황급히 품속을 더듬어 포션을 꺼내 상처에 들이부었다.
치이익―!
그러자 상처에서 녹색의 연기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끊어진 신경이 도로 붙고 순식간에 상처가 치유되었다.
그때 모용명이 크라이슨을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것이 바로 허허실실(虛虛實實)의 묘리다. 허한지 실한지를 상대방이 헷갈리도록 하며, 허한 것처럼 보이면서 실하고, 실한 것처럼 보이면서 허하게 보여야 하는 것이지. 대결에서 뿐만 아니라 병사를 운용하는데도 널리 쓰는 전법이다.”
“저…… 속임수를 쓰는 건 정정당당하지 못한 일이 아닙니까?”
크라이슨의 순진한 말에 모용명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적이 너보다 강하다면 정정당당하게 죽어 줄 테냐? 죽고 난 후에는 비겁하니 뭐니 따질 기회도 없다. 당한 놈이 멍청한 거지.”
그의 신랄한 말투에 윈프레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자네 지금 멍청하다 했는가?! 오냐! 다시 한 번 붙어 보자고!”
“한 번에 1,000골드라는 걸 잊으신 건 아니겠죠?”
“우아― 아아악!”
울화가 치민 윈프레겐은 마치 단발마 비명 같은 기합을 와락 내지르며 모용명을 향해 성난 멧돼지처럼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그의 공격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고 헛되이 돈을 낭비했을 뿐이다.





Chapter 5.
기사 서임을 받고 백작의 가신이 되다



정오가 되자 에펠 영지의 성문이 활짝 열렸다.
누군가 대단한 사람을 맞이하려는 듯 성문 앞에는 영주를 비롯한 귀족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 기사들까지 잔뜩 깔려서 겉보기에 대단히 웅장한 행렬이 되었다.
이렇듯 그들이 환영하려는 인물을 바로 대륙 서쪽의 카로스 해 주변 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제라드 백작이었다.
따각― 따각―
잠시 후, 길이 5미터가 넘는 대형의 사륜마차가 관도를 따라 등장했다.
마차의 지붕은 화려한 벨벳으로 뒤덮어 마차의 무게가 가벼웠고 마차 겉면은 황금으로 도배해 햇빛을 반사하며 화려하게 번쩍거렸다.
드디어 마차가 성문에 도착하자 하인들이 공손히 마차의 문을 열었다.
덜컥!
제라드 백작은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의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귀족보다는 상인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카로스 해 주변을 장악해 해상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외모는 일반적인 상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상인이라면 사람들은 흔히 푸짐한 덩치에 사람 좋아 보이는 사교적인 미소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의 몸매는 군살 하나 없는데다 근육이 고르게 균형 잡혀 있었다. 눈빛이 차갑고 강인한 인상을 풍겨 마치 날을 잘 세운 자루의 검과 같은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때 에펠 영주가 공손하게 허리를 접으며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환영합니다! 제라드 백작님.”
이에 따라 모든 귀족들과 기사들도 동시에 허리를 접었다.
제라드 백작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뒤 곧바로 에펠 영주에게 말했다.
“무투 대회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올해에는 눈에 띄는 인물이 있는 건가?”
“네! 크라켄 슬레이어라 불리는 자가 연전연승하고 있습니다. 그자는 주스트(마상 창시합)와 부엔루트(검술 시합)에서 모두 우승했기 때문에 최종우승자가 될 가능성이 제일 높은 자입니다.”
“흐음…… 그래? 마치 자네 일처럼 흥분하는 걸 보니 대단한 실력을 가진 놈인가 보군. 출신 지역이나 가문은 어디인가?”
백작의 지적에 경거망동했음을 느낀 에펠 영주는 잠시 헛기침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힌 뒤 말했다.
“그게…… 그는 평민 출신입니다. 출신 지역은 대륙 남쪽의 젠토른이란 작은 영지인데 지금은 몬스터의 침입이 잦아서 버려진 지역입니다.”
“평민 출신이라……. 실력만 확실하다면 상관없지!”
제라드 백작은 해상무역을 통해 여러 나라들의 문물을 접하며 생각이 깨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인재를 등용할 때 무엇보다 능력을 중요시했다. 또한 상과 벌을 분명히 하는 성격이라 개인적 감정과는 상관없이 공을 세운 자를 반드시 중용했다.
바로 그러한 점이 모용명이 그를 선택한 이유였다.
대륙 각지에는 평야 지대를 장악한 버몬트 백작이나 국경을 지키고 있는 살바도르 후작 등과 같이 유능한 군주들이 많았지만 제라드 백작처럼 오직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는 군주는 매우 드물었다.
그때 에펠 영주가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저희가 대회장으로 편히 모시겠습니다.”
“내 호위들만으로 충분하니 번거롭게 수고할 필요 없네.”
제라드 백작은 호위기사들과 함께 대회장을 향해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그는 무능한 주제에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는 에펠 영주가 마땅찮게 느껴졌다. 비단 에펠 영주뿐만 아니라 그는 무능한 사람은 몹시 경멸했다.
쓸데없이 밥만 축내는 무능한 놈들은 필요 없다! 중용되고 싶으면 먼저 자신의 능력을 보여라! 그것이 제라드 백작의 지론이었다.
‘크라켄 슬레이어라……. 이번에는 좀 쓸모 있는 놈이었으면 좋겠군!’

‘드디어 제라드 백작을 만나게 되겠군.’
모용명은 한 무리의 참가자들과 함께 경기장에 서 있었다. 다들 백작이 오길 기다리느라 아직 마지막 날 경기는 개최되지 않았다.
마지막 경기인 투루나이(Trunei)는 단체전 즉 일종의 모의 전투와 같은 것이었다.
투루나이가 처음 개최되었을 당시에는 대회장을 실제 전장을 축소해 놓은 듯 꾸몄고 참가자들도 대량으로 투입되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투루나이는 개량되었다. 편의를 위해 대회장의 규모가 줄어들었고 한 번에 투입되는 인원도 줄어들었다.
참가자가 너무 많거나 대회장이 너무 넓으면 경기를 관람하는 입장에서 그다지 재미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는 첫째 날과 둘째 날 경기에 모두 우수한 성적을 거둔 15명의 출전자들만 뽑아 다섯씩 총 3조로 나눈 뒤 경기장에서 한꺼번에 겨루게 된다.
“우리 한 번 힘을 합쳐 잘해 보자고!”
“그래! 우리끼리 뭉치면 이길 수 있어!”
백작을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 같은 조의 참가자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서로를 이용하기 위한 가식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비록 조를 짜긴 했어도 결국은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계속해서 싸워야 하기 때문에 같은 팀이라도 잠정적인 적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경기 초반에는 같은 조원끼리 단합하여 적들을 물리치는 것이 최종우승자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다들 마치 사이좋은 것처럼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훈훈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바로 참가자들을 응원하는 관객들이다.
“우아아아아아!”
경기장을 힘차게 뒤흔드는 함성들! 열정과 환호가 가득 담긴 그 격한 몸짓들!
흥을 돋우려는 온갖 악기 소리들로 가득한 그곳에서 아밀리에와 크라이슨은 악을 쓰듯 열렬히 응원하고 있었다.
“힘내세요! 시온 님!”
“시온 님! 반드시 최종우승자가 되실 겁니다!”
반면 윈프레겐은 뭐가 불만인지 불퉁한 얼굴로 투덜거리듯 말했다.
“저 괴물 같은 녀석은 반드시 우승할 텐데…… 응원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어?”
그는 모용명과 대결에서 거듭 연패를 당했고 그 결과 별다른 소득도 없이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결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기분과는 별개로 관중석에 들어찬 관객들은 대부분 그를 응원했다.
“크라켄 슬레이어! 이번에도 이기라고!”
“네게 돈을 전부 걸었으니 실망시키지 말라고! 하하하!”
그 소리를 들은 윈프레겐이 무어라도 다시 중얼거리려 할 때 제라드 백작이 대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아아아! 백작님이 행차하셨다!”
“와아아아아! 제라드 백작님, 만세!”
관중들은 미리 연습한 대로 제라드 백작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낸 뒤 에펠 영주의 손짓에 맞춰 일제히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일사불란한 그 광경이 일견 엄숙하기조차 했다.
호위기사들과 함께 느릿한 걸음으로 관중석 제일 높은 곳에 가서 앉은 제라드 백작은 모두를 향해 외쳤다.
“다들 일어나라! 경기를 개최하고 축제를 즐겨라!”
“와아아아아아아아!”
장내가 떠나갈 듯한 함성과 함께 마지막 경기인 투루나이의 개최를 알리는 웅장한 뿔나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우우웅―!
바로 그 순간.
모용명은 재빨리 바닥을 박차며 대회장 한복판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참가자들이 쓸 무기가 죄다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회의 여흥을 돋우기 위한 룰이었다. 무기를 먼저 손에 넣는 자가 유리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행히 그는 경공을 펼쳐 다른 자들보다 훨씬 빨리 무기 진열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용명이 선택한 무기는 바로 글레이브(베기에 적합한 장창)!
굳이 손에 익지 않은 무기를 선택한 이유는 진열되어 있는 다른 무기를 곧바로 부숴 버리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렇게!
슈아아악― 콰앙!
모용명은 글레이브를 힘차게 휘둘러 다른 무기들을 부숴 버렸다.
대부분 단단한 금속으로 된 무기들이었지만 내공을 실어 내려치자 대부분 부서지거나 일그러졌다.
“아앗! 저 자식이!”
“내가 쓸 무기를! 멈춰!”
“멈추지 못해! 망할!”
분노한 출전자들이 그를 향해 소리치며 달려왔지만 모용명은 마치 당연한 일을 하듯 계속해서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우지끈! 콰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기가 부서지자 다른 참가자들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지금 그들의 생각은 한결 같았다.
‘저 망할 녀석이 무기를 모두 부숴 버리기 전에 손에 넣어야 해!’
숨이 턱에 닿도록 달린 끝에 드디어 그들 중 몇 명이 대회장 한복판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무기를 집어 들 수 없었다.
모용명이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향해 글레이브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슈아아아아악―!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란 이런 것일까? 뭔가 흰빛이 번뜩이는 것을 겨우 보았을 뿐!
그들은 공격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 물론 피할 틈도 없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사이에 그들의 팔이 동시에 잘려 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절단된 동맥에서 피가 왈칵 솟구치고 나서야 그들은 그제야 자지러질 듯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아악!”
그의 공격이 너무 빨라 뒤늦게 고통을 자각한 것이다.
‘제라드 백작이 나를 보고 있다! 그의 시선을 끌려면 되도록 화려하게!’
모용명은 단전의 내공을 아낌없이 끌어내며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슈아아아아악― 파악!
“크아아아악!”
날카로운 날이 스치는 곳마다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의 공력이 잔뜩 실린 글레이브는 뇌성벽력보다 빠르게 바람을 가르며 살과 뼈를 절단해 버렸다.
그야말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화려한 공격!
게다가 모용명은 일부러 단번에 죽이지 않고 참가자들의 팔다리를 잘라 냈다. 그들이 충분히 비명을 질러 내고, 온몸의 피를 모조리 쏟아 낼 수 있도록!
처절한 비명 소리와 붉은 피의 양이 늘어날수록 관중석의 열기와 함성이 더욱더 커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주목하라! 제라드 백작!’
모용명은 제라드 백작을 확인하기 위해 관중석으로 눈을 돌렸다.
우연인지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아니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제라드 백작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줄곧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아직 살아 있던 참가자 하나가 그 틈을 타 에스터크(Estoc, 찌르기 전용 검)를 집어 들고 그를 향해 돌진했다.
“이야아아압!”
쉐에에에에엑―!
송곳처럼 뾰족한 검끝이 그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모용명은 상대의 공격에 조금도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방심을 노린 것까진 나쁘지 않은데 기습하면서 기합을 내지르다니! 공격하겠다고 미리 알려 주는 거나 마찬가지군.’
그는 보법을 펼쳐 간단히 간격을 벌린 뒤 상대를 향해 글레이브를 힘차게 휘둘렀다.
슈아아아아악― 파악!
“크아아아악!”
잘려 나간 머리가 하늘 높이 치솟으며 절단면에서 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 또 이겼다!”
“우왓! 최종우승자다!”
“크라켄 슬레이어! 만세!”
관중석에서 고막이 터져 버릴 듯한 우렁찬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 사이에 앉아 있던 제라드 백작도 혈관속의 피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크라켄 슬레이어라……. 압도적인 무력에 가차 없이 적을 처단하는 냉정함! 이거 꽤 물건인 걸!’

3일간에 걸쳐 진행된 무투 대회는 드디어 모두 끝이 났다.
대회의 최종우승자는 단 한 사람!
주최자는 큰 목소리로 그 사내의 이름이 불렀다.
“최종우승자인 시온은 단상에 오르시오!”
“우와아아아! 크라켄 슬레이어다!”
모용명은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평범한 젊은이라면 뜨거운 환호와 함성에 흥분될 만도 하련만! 그의 얼굴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없이 담담하고 차분했다.
정갈히 몸을 씻고 미리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의 모습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원래부터 잘생긴 얼굴에 고급 옷감으로 만든 옷을 걸치자 그야말로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평온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의 마음속에는 활화산 같은 짜릿한 쾌감이 분출되고 있었다.
‘계획대로 대회의 최종우승자가 되어 제라드 백작과 대면하게 되는군! 드디어 대연국(大燕國)을 세우기 위한 원대한 계획에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원래 최종우승자를 치하하며 상금 등을 수여하는 것은 에펠 영주의 몫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제라드 백작이 그를 직접 치하하겠다고 나섰다.
그건 모용명에게 매우 좋은 징조였다. 그만큼 제라드 백작이 그를 마음에 들어 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물론 소모품이고 쓰이고 말지 아니면 중용될지는 이제부터 모용명의 처신에 달려 있었다.
“거기서 멈춰서시오!”
그러나 제라드 백작이 직접 치하하겠다고 해서 곧바로 그와 대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호위기사들이 백작의 앞을 철통같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 기사들로부터 열 걸음이나 떨어진 곳에 멈춰서야 했다.
기습적인 암습에 대비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였다.
‘하지만 이것을 보면 아마 그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모용명은 품속에서 마스터 윈프레겐이 써 준 추천장을 꺼냈다. 그리고 근처에 서 있는 기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것을 제라드 백작님에게 전해 주시오!”
“이게 뭔가?”
“마스터 윈프레겐 님이 직접 작성하신 추천장입니다.”
그의 말에 기사는 흠칫 놀라며 저도 모르게 외쳤다.
“뭐? 방금 뭐라고?!”
기사의 목소리가 너무 컸던 것일까?
호기심을 느낀 제라드 백작이 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거기, 무슨 일로 그리 소란스러운가?”
백작에 지적을 받게 된 기사는 더욱 당황하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네, 넵! 백작님. 마스터 윈프레겐 님의 친필 추천장이라고 하기에…….”
마스터 윈프레겐!
마스터의 위용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거론된 것만으로도 장내는 소란스러워졌다.
“뭐? 자네 방금 마스터 윈프레겐 님이라고 한 건가?”
“마스터의 친필 추천장이라고?!”
“설마 그럴 리가?!”
흐트러진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제라드 백작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소리쳤다.
“조용!”
그의 목소리가 뇌성벽력처럼 장내를 가득 채웠다.
귀가 먹먹해지는 듯한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강맹한 기세에 모용명은 흠칫 놀랐다.
‘이건……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보냈군! 생각보다 그의 내공이 심후하구나. 무역상이라더니 오히려 무인에 가까운 놈이었구나.’
경각심을 느낀 그는 자신의 무공을 적당히 숨겨 오길 잘했다는 판단이 들었다.
제라드 백작을 대면하기 전에는 그가 이렇게 강력한 내공을 소유하고 있을 줄 어찌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까지 나는 제국의 무예가 단순하다는 것만 믿고 너무 얕잡아 보고 있었구나! 대륙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내가 미처 예측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방심은 스스로를 죽이는 최악의 독이다!
모용명은 그 사실을 새삼 가슴속에 세기며 각오를 새롭게 했다.
그때 제라드 백작이 기사를 향해 명령했다.
“추천장을 내게 가져오게!”
“네! 백작님.”
추천장을 찬찬이 읽어 본 제라드 백작의 표정은 점차 밝아졌다.
‘온통 칭찬일색이군! 마스터 윈프레겐 경이 이토록 칭찬하고 보증하는 인물이라면 더 생각해 볼 필요도 없겠군. 하지만 추천장이 위조된 것은 아닌지 당연히 확인해 봐야겠지.’
제라드 백작은 잠시 시상식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 방면의 전문가들을 불러 추천장의 진위를 확인했다. 당사자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모용명은 마음속으로 그의 인물됨을 평가했다.
‘행동력과 결단이 빠르고 목적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위인이군! 결코 만만하게 넘어올 상대는 아니다. 앞으로 모든 일을 각별히 주의해서 진행해야겠군.’
잠시 후, 추천장의 진위를 확인한 전문가들이 백작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윈프레겐 님의 친필이 분명합니다.”
“인장에서도 위조의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추천장은 의심할 여지없이 진짜입니다!”
“틀림없으렷다?”
“네! 그렇습니다!”
재차 확인을 마친 후에야 제라드 백작의 얼굴이 펴졌다.
그는 언제 언성을 높였냐는 듯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며 모용명을 바라보았다.
“이리 가까이 오라!”
모용명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백작의 앞으로 다가갔다.
“무릎을 꿇어라!”
그가 무릎을 꿇자 백작은 갑자기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잘 벼려진 칼날이 햇빛을 반사하며 섬뜩한 빛을 뿌려 댔다.
그 시퍼런 서슬에 흠칫 놀랄 만도 하련만 모용명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제라드 백작은 그의 어깨 위에 검을 얹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그대는 나의 기사다!”
원래 기사 서임에는 정해진 법도와 엄숙한 절차가 있었지만, 백작은 일반적인 관례를 무시하고 약식으로 선포해 버렸다.
관례나 법도보다는 실리나 실익을 중시하는 백작의 성격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