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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이에 모용명도 미리 외워 둔 답변을 생략하고 약식으로 대답했다.
“백작님께 충성과 신의를 다하겠습니다.”
이처럼 간단하게 대답하는 것은 다소 무례하게 비춰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제라드 백작은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시원스러운 성격이라 마음에 드는군. 그래! 앞으로 내게 충성과 신의를 다하라.”
“감사합니다! 백작님.”
그렇게 모용명은 드디어 제라드 백작의 기사가 될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평민이 아니라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와아아아! 크라켄 슬레이어 만세!”
“기사님 만세!”
분위기에 휩쓸린 군중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열광하며 환호해 주었다.
‘드디어 제라드 백작의 기사가 되었군.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기사 서임을 마친 제라드 백작은 그에게 갑옷과 검을 하사하며 수하들을 시켜 작위 증서를 신속히 작성하게 했다.
백작은 일단 결정을 내린 일이 더디게 진행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이에 따라 수하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고 곧바로 그의 기사 서임을 축하하는 성대한 연회가 펼쳐졌다.
“기사 서임을 받게 된 걸 축하하네. 시온 경!”
“축하하네! 대회장에서 자네의 실력을 잘 보았네.”
“어디서 그런 무예를 익혔나? 실력이 대단해!”
백작의 수하들과 기사들이 그를 에워싸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마치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그건 제라드 백작이 그를 몹시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인데다, 모용명의 무예가 뛰어나 출세의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관직에 오른 자는 무릇 줄을 잘 타야 하는 법!
훗날 그가 높은 자리에 오르고 난 후에야 잘 보이려고 한다면 이미 때는 늦다.
관심 어린 말 한마디 건네는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기에, 모두들 미리 그에게 환심을 베풀어 두는 것이다.
만약 그가 출세할 경우에 대비해 일종의 보험을 걸어 두는 것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그 때문에 모용명은 해가 지고 자정이 지난 후에야 연회장을 빠져나와 일행과 따로 만날 수 있었다.
“축하해요, 시온 님. 축배가 같이 한잔 할까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서임을 받은 기념으로 나와 한판 붙은 건 어떤가?”
일행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그를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모용명은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겨우 기사 서임을 받은 것 가지고 축배를 들기는 너무 이르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더 많으니까.’
게다가 그는 다른 문제에 마음을 쓰고 있었기에 잠시 후 아밀리에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아밀리에.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
“갑자기 부탁이라니 무슨 일인데요?”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하지.”
모용명은 곧바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침실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본 크라이슨은 의아한 듯 윈프레겐에게 물었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서두르는 걸까요?”
이에 윈프레겐은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자네도 참…… 눈치 없구먼! 젊은 남녀가 이 시간에 침실로 올라가서 뭘 할 수 있겠나?”
그 말을 들은 크라이슨은 무슨 상상을 했는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침실로 올라간 두 사람에게 그들이 짐작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침실에 도착한 모용명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아밀리에! 지금부터 제라드 백작의 일거수일투족을 은밀히 조사해 줬으면 좋겠어.”
“네? 갑자기 왜 그런 부탁을…….”
그가 그런 부탁을 하게 된 이유는 제라드 백작의 정체에 대해 뭔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 오후.
백작이 단상에서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말했을 때, 그는 그저 예상한 것보다 그의 내공이 뛰어나다는 점에 놀랐을 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목소리에 공력을 불어넣는 것은 무림에서는 흔한 수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니 대륙의 마나 코어(내공심법)에는 마나로 목소리를 확대하는 기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무림에만 존재하는 수법이야! 제라드 백작이 어째서 그 방법을 알고 있는 거지? 혹시 그도 나처럼 전생에 무림인이었나?’
모용명은 지금까지 자신이 전생의 기억을 각성하게 된 것을 기적에 가까운 일이 일어난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에게나 일어날 수 없는 특별한 일!
그러나 백작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자, 이 넓은 대륙에 자신과 같은 경험을 겪은 자가 몇 명쯤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그렇다면 큰일이군. 지금 내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은 무림 각 문파의 무공을 알고 있다는 것뿐! 정말 그가 환생한 무림인이라면 한시바삐 회유하거나 제거해야 해!’
우선은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원래의 계획에 없었던 일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의 정체를 파악해야 했다.
그러나 그가 조사하기 위해 직접 움직이는 건 위험했다.
백작의 눈에 띄게 된 이상 지금부터 모용명의 모든 행동은 그에게 보고되고 있다고 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게 되면 지금까지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다.
“아직 막연한 짐작뿐이라서 이유를 말하기가 좀 그래. 좀 더 확실해지면 그때 말해 줄게. 여하튼 나를 도와줄 수 있겠지?”
모용명의 부드러운 말투와 미소에 아밀리에는 황홀한 눈빛이 되어 순순히 고개를 끄떡였다.
“네!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도울게요!”
“마법으로 그를 감시할 방법이 없을까? 잘 생각해 봐. 아밀리에.”
“사실 손쉬운 방법이 있긴 한데…… 그게 별로 내키지 않아서…….”
“뭔데 그래?”
아밀리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고대 마법인 콤무니오로 생쥐에게 마법을 걸어 그를 감시하게 한 후, 나중에 정신감응 마법인 에그레고르로 물어보면 돼요. 생쥐 같이 작은 생물을 세뇌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거든요.”
“그래? 좋은 방법이군. 그런데 뭐가 문제야?”
그녀는 갑자기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생쥐는 너무 지저분하고 끔찍하잖아요! 잠시도 보기 싫은데 어떻게 그것에게 마법을 걸겠어요?”
아밀리에는 뱀파이어로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나 성격은 평범한 여성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마음이 여리고 섬세해 쥐를 끔찍이 싫어했던 것이다.
잠시 실소를 머금었던 모용명은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를 달랬다.
“싫어도 조금만 참을 수 없겠어? 아밀리에, 나를 위해 그래 줄 순 없을까?”
아밀리에는 그의 꿈결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홍조 띤 얼굴로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았어요, 시온 님. 징그럽지만 참아 볼게요!”
“부탁해. 아밀리에만 믿고 있을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모용명은 그녀에게 부탁한 것만으로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윈프레겐을 찾았다.
“음? 자네 벌써 끝내고 내려오는 건가? 커험! 빠르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닐세!”
“무슨 소릴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보다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그래, 무슨 부탁인가?”
모용명은 크라이슨에게 간단한 심부름을 시켜 그를 멀리 보낸 후 윈프레겐에게 다시 말했다.
“필립 님은 마스터 윈프레겐 님의 수제자이시니 발이 넓으시겠죠?”
제자를 사칭한 윈프레겐은 거짓말을 하는 게 찔리는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물론 그러하네만 무슨 부탁을 하려고 그러는 겐가?”
“그럼, 아는 분에게 은밀히 부탁해서 정보 길드에 사람을 보낼 수는 없겠습니까? 제가 원하는 건 제라드 백작과 그의 수하들에 대한 모든 정보입니다.”
“흐음, 뒷조사를 하려는 겐가? 그런 일은 별로 내키지 않는군. 뭣하면 자네가 직접 가지 그러나?”
윈프레겐은 그다지 내키지 않은지 몸을 사렸다.
그러나 모용명은 포기하지 않고 침착한 어조로 그를 설득했다.
“백작의 기사가 된 이상 지금부터 제 모든 행동은 백작에게 보고될 겁니다. 그러니 되도록 백작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를 조사하고 싶습니다. 은밀히 조사하려면 윈프레겐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계약대로 제 부탁을 좀 들어주십시오.”
그가 계약을 언급하자 윈프레겐이 순간 움찔했다.
‘가장 친한 벗처럼 자신의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달라고 했던가? 흥! 그렇게 해 줄 수는 없지! 제대로 붙어 주지도 않는 놈을 내가 왜 도와줘야 하지?’
사실 윈프레겐은 모용명에게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원래 그가 모용명과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을 하게 된 이유는, 그와 대결을 통해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할 단서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막상 계약을 맺고 보니 그는 요상하고 신기한 재주로 괴롭힐 뿐, 한 번도 진지하게 상대해 주지 않았고 진짜 실력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러니 윈프레겐이 이처럼 삐딱하게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글쎄? 무조건 자네의 지시대로 한다는 계약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가장 친한 친구의 부탁이라도 때론 매우 귀찮을 때가 있다네!”
모용명은 그를 설득하기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다음번엔 정말 제대로 겨루어 주겠습니다. 필립님이 싫어하는 잔재주는 절대 쓰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의 제안에 윈프레겐은 반색하며 눈을 크게 떴다.
“자네! 그게 정말인가?!”
“물론입니다! 단, 제가 부탁한 일에 성의를 보여 줄수록 저도 그만큼 성의를 다하겠습니다. 그래야 서로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알았네. 자네의 부탁대로 할 테니 나중에 말을 바꾸지 말게나.”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역추적에 주의하는 것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참견 말게!”
윈프레겐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마스터인 그의 수하만 해도 수백 명! 그들 중 몇 명에게 편지를 보내면 기꺼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여러 명에게 부탁해 두면 역추적하기 더 힘들어지겠지? 편지를 주고받는 장소만 조심한다면 결코 꼬리를 잡힐 일은 없을 것이다.’
모용명은 이렇듯 그들을 통해 백작의 뒷조사를 해 보았지만 별달리 수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의심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두 사람에게 더욱 철저히 백작의 뒤를 캐 보도록 지시했다.
반면 백작의 수하들에 대한 조사는 착실히 진행되었는데, 그들의 성격이나 취미, 알려지지 않는 비밀 등의 정보를 조금씩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훗날 그자들을 포섭하거나 회유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부지런히 무예를 수련했으며, 동시에 시에티알 상단의 주인이 된 멜리사에게 편지를 보내 다른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란 시간이 흐르는 강물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Chapter 6.
카로스 해, 해적 토벌



그로부터 며칠 후, 제라드 백작은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의 주요 안건은 카로스 해의 해적 토벌!
백작이 인근 지역의 지배자가 된 원동력은 바로 해상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재물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카로스 해를 마음껏 누비며 수시로 상선을 공격하는 해적들의 존재는 백작에게 그야말로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제라드 백작은 오랫동안 해적 토벌에 힘을 기울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해적들이 기동력이 빠른 다수의 해적선을 보유하고 있는데다 해류나 기상의 변화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힘들여 해적들의 본거지를 박살 내어도 곧바로 새로운 해적들이 등장해 그 자리를 메워 버렸다. 그것은 그만큼 대륙의 치안이 불안정하고 백성들이 살기 고달프다는 증거였다. 오죽 먹고 살기 힘들면 견디다 못해 해적이나 산적이 되려고 하겠는가?
여하튼 제라드 백작은 별다른 성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해적 토벌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처럼 끊임없이 몰아붙이고 있기 때문에 해적들이 자신의 상선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카로스 해의 해적들은 제라드 백작의 지독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의 상선을 공격하지 않았다.
제라드 백작은 회의장에 모인 수하들을 바라보며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시에티알 상단이 해적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네! 다들 이에 대한 의견을 말해 보게!”
그의 말에 수하들은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으나 평소와 별다를 것이 없는 말들이었다.
바로 적의 본거지를 파악하고 군선들을 보내 총공격을 펼치는 것!
나무랄 데 없는 정론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이 방법은 지금까지 별 소용이 없었다.
해적들은 해적선의 기동력을 살려 그들을 유인했고 암초에 걸리거나 이상 해류에 붙잡혔을 때 백병전을 펼쳐 군선을 박살 냈다.
드넓은 바다에서는 치고 빠질 곳이 많기에 다수로 밀어붙이는 전략이 잘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해적 토벌은 오래전부터 해 왔던 일인데 그들에게 뭔가 좋은 수가 있었다면 지금까지 아껴 뒀을 리가 없다.
한편 모용명은 회의실 구석 자리에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그들의 고리타분한 정론을 비웃으며 생각에 잠겼다.
‘부탁한 대로 멜리사가 잘해 주었군.’
며칠 전 그는 시에티알 상단의 멜리사에게 편지를 보내 한 가지 부탁을 해 두었다.
그것은 제라드 백작에게 사람을 보내 상단이 입은 피해를 되도록 부풀려서 말하고 억울함을 하소연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실제로 그들 상선이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 일은 조금 부풀리는 건 멜리사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과연 멜리사는 그의 부탁을 충실이 들어주었고 이에 백작이 긴급회의를 열게 된 것이다.
제라드 백작이 원래 호전적인 성격인데다 평소에도 갖가지 이유로 해적 토벌에 열을 올렸기 때문에 모용명이 그에게 이런 책략을 거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수하들의 탁상공론에 질린 것일까? 제라드 백작은 갑자기 몹시 화가 난 듯 수하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만! 경들이 하는 말은 항상 똑같군! 이래서야 다들 모여서 회의를 하는 의미가 전혀 없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백작님.”
“작전참모만 남고 다들 밖으로 나가 주게! 꼴도 보기 싫으니!”
제라드 백작은 무능함을 몹시 혐오했기 때문에 가끔 이렇듯 극단적으로 화를 내게 되었다.
사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해적선보다 더 빠른 군선을 만들고 해적들보다 바다에 더 익숙해지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백작의 신하들이 이렇듯 꾸중을 당하고 쫓겨나게 된 것은 다소 과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모용명에겐 카로스 해의 해적들을 물리칠 묘책이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회의실을 빠져나왔다가, 잠시 후 되돌아가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밖에 누구냐?!”
회의실 안에서 백작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백작님, 시온입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곧 회의실 안쪽에서 백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회의실로 들어선 모용명은 백작과 참모에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제라드 백작은 화가 난 듯 딱딱하게 굳은 안색이었으나 한 가닥 기대의 눈빛을 보내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 긴히 할 말이란 게 뭔가?”
모용명은 정중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제가 드릴 정보는 오직 저와 백작님만 아셔야 하는 일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자리를 물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돌할 정도로 당당한 그의 태도에 작전참모인 마틴 후작이 발끈 화를 내며 소리쳤다.
“갓 기사 서임을 받은 햇병아리 주제에 감히! 지금 나에게 물러가라고 말하는 건가?”
마틴 후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그의 목을 칠 기세였다.
그러나 모용명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차갑고 당당한 눈빛으로 작전참모를 바라보았다.
그 당당함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제라드 백작이 손을 들어 마틴 후작을 저지하며 말했다.
“잠깐! 그의 말을 한 번 들어 봐야겠으니 자네는 물러가게.”
백작의 말에 마틴 후작은 억울한 듯 언성을 높였다.
“백작님! 지금 이 애송이 녀석의 말을 믿는 겁니까? 분명 백작님의 환심을 사고 싶어서, 별달리 정보랄 것도 없는 것으로 심기를 어지럽히려는 겁니다!”
“그건 내가 직접 판단하겠네! 만약 자네 말대로라면 내 이자의 목을 직접 잘라서 성문에 높이 매달도록 하지.”
백작의 단호한 태도에 마틴 후작은 어쩔 수 없이 회의실 밖으로 물러갔고 제라드 백작은 곧바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자네도 방금 들었다시피 날 만족시키지 못하면 당장 목이 잘리게 될 걸세.”
백작의 이 같은 차가운 엄포에도 모용명는 그저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분명 만족하게 되실 겁니다.”
제라드 백작은 그의 당당한 태도에 속으로 흡족해했다.
‘사내라면 이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갈수록 더 마음에 드는 녀석이군! 어디 큰소리칠 만큼 좋은 정보를 가지고 왔는지 확인해 볼까?’
“무슨 일인지 말해 보게.”
“백작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이 부근에서 살던 자가 아닙니다. 얼마 전 시에티알 상단의 상선을 타고 이곳에 왔습니다.”
모용명은 이 부분에서 일부러 말을 끊고 숨을 가다듬었다.
답답한 걸 싫어하는 제라드 백작은 잠시의 틈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를 재촉했다.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으니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나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군.’
모용명은 속으로 경각심을 높이며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시에티알 상단의 상선이 루커스 해적단의 공격받은 사실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상선이 이상 해류에 휘말려 그들의 본거지까지 흘러들어갔다는 소식은 모르고 계실 겁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나?”
그제야 제라드 백작은 그의 말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멜리사가 그 일에 대해 제라드 백작에게 자세히 알리지 않은 것은 사실 모용명이 그렇게 부탁해 두었기 때문이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믿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그때 해적선들에게 포위 공격을 받아 거의 전멸할 위기에 내몰렸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 와중에 자네와 상단의 총수인 멜리사가 살아남을 수 있었나?”
“그건 바로 그때 죽음의 사신(Demon of Death)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사신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모용명은 제라드 백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자신의 또 다른 신분인 죽음의 사신의 존재를 그에게 알렸다.
“그가 진짜 죽음의 사신인지는 저도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워낙 바다 안개가 자욱해 그의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강철 마스크를 쓴 그 사신이 신묘한 기술로 해적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리는 광경은 제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신묘한 기술이라니? 자세히 말해 보게!”
“그저 가볍게 손바닥을 휘둘렀을 뿐인데 번개가 내려치기라도 한 듯 폭음이 울렸습니다. 그의 손바닥에서 불길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수십 명의 해적들이 한꺼번에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분명 마법은 아닌 것 같은데 마법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위력이었습니다.”
모용명이 이렇듯 자신의 무공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한 것은 백작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였다. 만약 제라드 백작이 전생을 기억하는 무림인이라면 뭔가 반응이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작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조금 놀라는 듯 보이긴 했으나 죽음의 사신 때문에 놀란 건지 강호의 무공을 떠올리며 놀란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으음…… 그런 기술이 있다니 정말 알 수 없는 일이군. 혹시 자네가 잘못 본 것은 아닌가?”
“그때 전 술을 마시지 않았고 피로하거나 아픈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그자는 순식간에 해적들을 해치우고 달리는 말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죽음의 사신이라…… 흥미롭군!”
모용명은 계속해서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별달리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표정 관리가 워낙 철저해서 반응을 떠 보긴 글렀군. 무인 기질을 역력히 보이지만 본바탕이 상인이라 표정을 감추는데 능숙한 건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그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하며 본론을 꺼냈다.
“어쨌든 그의 도움으로 저희는 섬에 잠시 정박하며 배를 수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의 정체가 궁금한데다 해적들의 본거지를 정탐하기 위해 섬 깊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해적단의 본거지는 이미 괴멸되어 있더군요.”
“죽음의 사신이라는 자가 손을 쓴 모양이군. 그의 정체가 뭐든 간에 루커스 해적단을 괴멸시키다니 기특한 놈이군!”
모용명은 일부러 루커스 해적단이 완전히 괴멸된 것처럼 말을 꾸몄다.
“그렇습니다! 루커스 해적단의 본거지는 회복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파괴되어 있더군요. 저는 혹시나 건질 것이 있을까 해서 잔해를 뒤지다가 우연히 해적단의 두목 루커스가 작성한 일지를 발견했습니다.”
“그게 사실인가? 일지에 뭔가 중요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던가?”
“네! 바로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루커스의 일지에는 다른 해적단의 본거지와 그들의 이동 경로, 병력 등의 정보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모용명은 품속에서 표지가 낡아 오래되어 보이는 일지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 일지입니다!”
일지를 건네받은 제라드 백작은 그 자리에서 상세히 읽어 보았다.
과연 루커스의 일지에는 그가 말한 대로 해적단에 대한 모든 정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꼼꼼히 살펴보라고 그 일지는 루커스가 직접 작성한데다 기록된 내용도 대부분 사실이니 조금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모용명은 루커스에게 지시를 내려 일지를 작성하게 했다.
카로스 해의 다른 해적단들이 제라드 백작의 공격을 받는다면 루커스 해적단의 입장에서 경쟁자들이 사라지게 되니 오히려 좋은 일이다.
다른 해적단이 기를 못 펴는 사이 루커스는 은밀히 자신의 세력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무거운 세금을 피해 해적이 되길 자청하는 자들은 얼마든지 널려 있으니까!
결과적으로 제라드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루커스 해적단을 돕게 되는 것이다.
즉 모용명은 루커스를 통해 비밀 병력을 키워 나가면서 동시에 공을 세워 백작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일지를 본 것은 자네뿐인가?”
“네! 기밀을 지키기 위해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잘했군! 자네는 이 일로 큰 공을 세우게 된 셈이다. 난 무능한 자를 싫어하지만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아끼지 않는다! 이번 해적 토벌이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면 내 반드시 자네를 중임하고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게 포상하겠다.”
“감사드립니다! 백작님. 하지만 제가 일지를 손에 넣은 것은 어디까지나 운이 따라서 생긴 일일 뿐, 이것으로 어찌 공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라드 백작은 큰 공을 세우고도 오히려 겸손한 그의 태도에 흡족해하며 물었다.
“허허! 자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백작님, 제게도 공을 세울 기회를 주십시오!”
모용명의 요청에 백작은 곤란한 듯 애매하게 말했다.
“나도 그리하고 싶네만 자네는 기사 서임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높은 자리를 내어 주기 좀 곤란하다네. 해적 토벌에 성공할 때까지 전략적으로 일지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 두어야 하기 때문에, 지금 자네에게는 대외적으로 내세울 공이 없네.”
백작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상과 벌에 엄격한 성격이라 지금까지 내세울 공이 없는 자를 높은 자리에 올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백작님. 제가 원하는 건 별동대를 지휘하는 겁니다.”
“별동대라?”
“저에게 은밀히 조그만 군선 한 척과 병사들과 선원들 몇 명만 내어 주십시오. 백작님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 내부에도 해적들의 첩자가 있습니다! 일지에 기록된 정보대로 그들의 본거지를 친다고 해도 아마 그들은 미리 알고 대피할 것입니다. 기습의 묘를 살리지 못한다면 이번에도 해적 토벌은 불가능하게 될 겁니다!”
모용명은 잠시 호흡을 고르기 위해 말을 끊었다.
백작은 그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는지 그를 재촉했다.
“계속 말해 보게.”
“별동대를 따로 운용하면 해적단의 본거지를 기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군의 숫자가 별로 많지 않기 때문에 해적들도 달아나기 보다는 오히려 저희를 해치우려 모여들 겁니다. 그렇게 저희가 해적들을 붙잡아 두는 동안 본대의 군선이 해안에 정박한 해적선을 파괴하면 그들은 도망갈 수 없게 될 겁니다!”
그의 말이 모두 끝나자 백작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입을 얼었다.
“네 작전은 그럴 듯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와 병사들은 그곳에서 죽게 될지도 모른다.”
백작은 다소 냉정하고 계산적인 인물이었으나 뛰어난 인재만은 몹시 아끼는 성격이었다.
그가 보기에 모용명은 기지와 재능이 뛰어나고 뭔가 범상치 않은 매력을 풍기고 있어서 쉽게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점점 자라나기 시작했다.
모용명은 다만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무릇 큰 뜻을 이루기 위해 희생은 불가피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어떤 상황에도 저의 한 몸 지킬 실력은 되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하하! 자신만만하군!”
“무례하게 들렸다면 용서하십시오.”
어떻게 보면 자칫 오만해 보일수도 있는 자신감이었으나 제라드 백작은 그의 배짱과 재능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아닐세! 자네가 그리 자신한다면 한 번 이 일을 맡겨 보지. 그러나 이것만은 명심하게!”
“말씀하십시오! 백작님.”
“결코 실패하거나 일을 망치지는 말게! 나는 패배자에겐 더없이 냉혹한 인물이네. 그리고 절대 내 허락 없이 죽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백작님.”
모용명은 그의 말에 속으로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