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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허락 없이 죽지 말라니……. 평범한 수하들이라면 이 말에 감격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게 되겠군! 이 말이 진심이라면 인재를 아낄 줄 아니 비범한 인물이고 진심이 아니더라도 그만큼 심계가 깊은 인물이란 뜻이니 역시 범상치 않은 인물이군. 하긴 이 정도 인물은 되어야 한 지역의 패자가 될 수 있겠지!’
다음 날 새벽.
제라드 백작은 약속한 대로 그에게 선원들과 병사들을 보냈다.
이 많은 인원을 빼내면서 조금도 소문이 퍼지지 않은 것은 백작의 뛰어난 기량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듯했다.
모두들 백작에게 명받은 대로 신속이 군선에 오르고 군량 등의 물자를 조용히 실어 날랐다.
항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도 미리 백작이 신임하는 수하들도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별동대가 승선한 배는 더없이 은밀하게 바다로 출항했다.
하지만 모용명은 백작의 조치만으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누군가 단 한 사람의 목격자라도 있다면 소문이 순식간에 퍼질 테고 해적들의 본거지까지 그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그는 아밀리에를 불러 은밀히 지시했다.
“아밀리에, 마법으로 주위의 모든 지역을 감시해 줄 수 있겠지?”
“네! 그 정도는 제가 맡겨 주세요.”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백작의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콤무니오(Communio) 마법으로 영지 주변의 쥐들을 거의 세뇌해 버렸다.
쮜익― 쮜익!
수천의 쥐들이 항구 주위에 넓게 퍼지며 주변을 감시했다.
또한 아밀리에는 항구에 서식하는 갈매기들에게도 고대 마법을 펼쳤다. 갈매기들은 공중에서 주변 지역을 철저히 감시했다.
“수상한 자는 없다고 하네요. 너무 이른 새벽이라 모두들 잠들어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럼 이제 연설에 앞서 본보기를 보일 차례인가?”
“너무 심하겐 다루지 말아 주세요! 시온 님.”
모용명은 크라이슨을 희생양으로 삼아 병사들의 군기를 잡을 계획이었다.
아밀리에도 이에 대해 그에게 미리 들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그동안 크라이슨과 소소한 정이 쌓였기 때문에 너무 심하게 하진 말기를 바랐다.
모용명은 다짜고짜 크라이슨을 지목해 갑판 한가운데로 불러냈다.
“크라이슨 앞으로 나와라!”
“네? 넵! 대장님.”
이때 병사들은 새롭게 그들을 통솔하게 된 모용명의 연설을 듣기 위해 갑판 위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모용명은 화려한 언변을 앞세운 연설보다는 직접 본보기를 보여 주는 게 더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들도 크라켄 슬레이어(Kraken Slayer)라는 별호와 나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들었겠지만 직접 본 것은 아니니 소문이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닐까 의심할 것이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느니 못하다는 말이 있다.
그런 이유로 모용명은 크라이슨을 희생양으로 삼아 병사들에게 생생한 본보기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검을 뽑아라!”
“네! 대장님.”
두 사람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마주 서 검을 뽑았다.
스르릉―!
달빛을 받은 칼날이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것이 제법 운치가 있었다.
“먼저 공격하라!”
“알겠습니다! 대장님.”
크라이슨은 그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히 실력 차가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서슴지 않고 선공을 펼쳤다.
코어(단전)에 응축된 마나를 올올이 뽑아내어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슈아아아아앙―!
응축된 마나에 탄력이 붙은 그의 검은 새벽 공기를 단번에 갈랐다.
그가 휘두른 칼날에 달빛이 산산이 부셔졌다.
모용명은 사량발천근의 묘리를 살려 교묘하게 그의 검을 막아 내는 동시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자연스럽게 충격을 흘려 냈다.
채앵!
충격으로 칼날이 부르르 떨리자 모용명은 그 진동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환검(幻劍)을 펼쳤다.
우우웅―!
칼날에 공력을 불어넣자 진동이 더욱 강해지며 검명(劍鳴)이 울렸다.
다음 순간 그가 벼락같이 검을 휘두르자 크라이슨은 마치 환상처럼 검이 3개로 불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림에서는 이것을 환초 혹은 환검이라 부른다.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의 잔상이 눈에 남는 착시 효과를 이용한 수법이다.
“엇?”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에 헛바람 소리를 낸 크라이슨은 3개 중 어느 것이 진짜 검인지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황급히 물러나며 방패와 검을 동시에 사용해 공격을 막아 냈다.
파아앙!
방패와 부딪히며 엄청난 폭발음이 일어났으나 요란한 소리에 비해 충격이 적은지 크라이슨은 그저 반걸음 정도 밀려났을 뿐이다.
충돌의 순간 방패의 각도를 비틀며 흘려 낸 것이다.
‘확실히 제국의 기사들은 방패를 활용한 방어 기술에 능하단 말이야!’
모용명은 방패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그의 모습에 제법이라 생각했으나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곧바로 검을 거두어들이며 새로운 공격으로 전환했다.
슈아아아아악!
공력을 검에 집중해 공격을 펼치자 검 끝이 끊임없이 떨리며 마치 허공에 한 송이 매화꽃을 그려 내는 것 같았다.
이것은 화산파의 매화십사검 중에 하나인 선매청고(신선의 매화는 홀로 푸르다는 뜻)의 초식이다.
검 끝으로 그려내는 매화의 모습은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지만 검 끝이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적은 어느 곳을 공격당할지 가늠할 수 없게 된다!
크라이슨 역시 그의 공격을 파악할 수 없어 뻔히 눈을 뜨고도 당하게 되었다.
파앗!
“크아아악!”
느닷없이 허벅지를 가격당한 그는 비명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어 다녔다.
비록 칼등으로 회초리처럼 후려쳤으나 내공이 실리자 통증이 뼛속까지 쩌릿쩌릿하게 파고들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하하하하!”
그가 펄쩍 뛰는 것이 웃긴지 병사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크라이슨은 몹시 창피한 듯 얼굴이 온통 붉어졌다.
“크하하하하!”
병사들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지자 모용명은 아차 하는 심정이 되었다.
‘눈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더니! 이들의 눈에는 화산파의 정종무예가 일종의 묘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이들의 수준에 맞춰 줄 수밖에!’
모용명은 단전의 공력을 끌어내어 신속하게 검을 휘둘렀다.
슈아아아아악!
그는 오직 검을 빠르게 펼치는 것에만 집중했으며 조금도 변화를 주지 않았다.
직선으로 뻗어 나간 그의 검이 쉴 새 없이 크라이슨의 몸에 적중했다.
파악! 파악! 파악! 파악! 파악! 파악!
“크아아아악! 아아악!”
그야말로 눈부신 쾌검이 펼쳐졌다.
공격이 너무 빨라 크라이슨은 그의 공격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저 수십 개의 희뿌연 빛무리가 자신을 향해 덮쳐 오는 것 같았다.
슈아아악― 파악! 파악! 파악! 파악!
“크아악―! 사, 살려 주세요!”
크라이슨이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굴욕적으로 빌었지만 모용명은 다소 화가 난 기색을 거두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나마 칼등으로 때리지 않았다면 상대는 이미 다져진 고기 조각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크라이슨은 그런 배려가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 공력이 잔뜩 실린 수십 번의 공격을 얻어맞자 전신에 몰려오는 끔찍한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크아아아악!”
크라이슨은 결국 바닥에 쓰러져 거품을 물고 뒹굴게 되었다.
이쯤하면 조금쯤은 불쌍해 보이기도 하련만 모용명은 잠시도 검을 멈추지 않고 그의 온몸을 두들겨 댔다.
‘안됐지만 병사들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네가 희생해 줘야겠다! 끝까지 분발해 주길 바라네!’
이렇듯 무력으로 위협하는 것은 이 시대에 일반적인 통치 방식이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방법이지만 효과적이었다.
그 증거로 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병사들의 얼굴이 두려운 듯 딱딱하게 굳었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들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잠시 만에 수백 대의 매를 맞은 크라이슨의 피부는 온통 푸른색으로 멍들어 버렸고 상처에서 핏물이 줄줄 흘려내려 인간의 몰골을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파악! 파악! 파악! 파악! 파악!
“허억…….”
고통을 견디지 못한 크라이슨은 결국 전신을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축 늘어져 버렸다.
“서, 설마? 죽은 건가?”
“쉿! 들리겠어. 조용히 해!”
병사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몸을 흠칫 떨었지만 그저 혼절하여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죽일 듯한 기세로 마구잡이로 때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모용명은 그의 급소와 사혈을 교묘하게 피해서 후려쳤다.
비록 피부색은 푸르게 변했으나 뼈와 근육에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다만 전신 혈도를 때려 자극했기 때문에 무지무지하게 아플 뿐이다.
그때 아밀리에가 그를 향해 달려 나오며 외쳤다.
“시온 님! 이제 그만하세요! 이러다 정말 죽겠어요.”
그녀가 오른팔에 매달리며 간청하자 모용명은 마지못한 듯 검을 멈췄다. 그리고 아밀리에의 귓가에 속삭이듯 일러두었다.
“곧 선실로 내려 보낼 테니 알아서 조용히 치료해라.”
“네! 알았어요.”
아밀리에가 물러간 후 그는 곧바로 선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못난 녀석! 꼴도 보기 싫으니 치워라!”
“네!”
덩달아 바짝 얼어 버린 선원들이 힘차게 대답하며 크라이슨을 부축했다.
모용명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갑판 위에 서 있는 병사들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흠칫 놀라며 더욱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그는 성큼 단상으로 올라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내 이름은 시온이다.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을 통솔한다. 항명하는 자는 군법에 따라 즉각 처형하겠다! 게으르거나 제 몫을 못 해내는 자들도 발견 즉시 목을 치겠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겁에 질린 병사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십 명이 낸 목소리이지만 마치 한 사람이 외친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앞으로 내가 너희들을 훈련시키겠다! 해적단의 본거지에 도착할 때까지 매일 새벽에 일어나 훈련에 임한다. 불만이 있는 자는 지금 앞으로 나서라!”
“불만 없습니다!”
병사들은 마치 악을 쓰듯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혹여 불만이 있더라도 지금 나서면 단박에 목이 잘릴 분위기라 감히 앞으로 나설 수 없었던 것이다.
모용명은 그들을 향해 차가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들 현명하군! 혹시나 해서 일러두지만 불만이 있는 자도 즉각 처형한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고 우리는 군인이다. 항명하는 자에겐 오직 죽음뿐이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쯤하면 알아들었겠지? 혹여 알아듣지 못한 자들은 그때그때 잡아 처형해 버리면 된다!’
간략히 연설을 마친 모용명은 병사들을 해산시키고 선실로 향했다.
아밀리에가 치유 마법을 펼쳐 준 것인지 크라이슨은 벌써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리고 있었다.
“시온 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그가 항의하듯 소리쳤지만 모용명은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이것도 수련의 일환이다.”
“…….”
‘수련이라니……. 말도 안 돼! 이게 수련이라고?’
크라이슨은 기가 막혔지만 말문도 함께 막혔다.
현재 그는 모용명의 종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억울해도 감히 하소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개잡듯이 맞아 결국 기절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울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젠장! 말이면 다인 줄…….”
제 분에 못이긴 크라이슨은 저도 모르게 거친 말을 토해 내려 하다가 모용명과 눈을 마주치자 흠칫 몸을 떨었다. 개처럼 비참하게 얻어맞던 때의 고통이 새삼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공력을 실어 혈도를 때렸기 때문에 거의 분근착골의 지독함에 견줄 만한 끔찍한 고통이었다.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던 크라이슨은 모용명의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깔았다. 마치 싸움에서 패한 개가 고개를 떨어뜨리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모용명은 그제야 차분한 어조로 타이르듯 말했다.
“침대에 앉아서 코어(단전)의 마나를 천천히 움직여 봐라. 아마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네…….”
크라이슨은 자신도 모르게 모용명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침상에 앉았다. 마치 공포가 뼛속까지 각인된 몸이 그의 말에 반응해 저절로 움직이는 듯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냐?’
그는 속으로 불평을 터뜨리며 코어에 응축된 마나를 천천히 돌려 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마나의 성질이 평소와는 뭔가 달라져 있었다.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마나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보다 빠르게 공격하고 적의 공격에 기만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놀라운 변화였다.
“이, 이게 어찌 된 겁니까?”
모용명이 그에게 펼친 것은 일종의 추궁과혈(推宮過穴)이었다.
세맥이 뚫리고 혈도의 노폐물이 모조리 빠져나가 전보다 진기의 수발이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아직도 억울하고 분하냐?”
“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시온 님.”
모용명이 이처럼 크라이슨에게 추궁과혈을 펼친 것은 얻어터지게 된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무릇 상과 벌을 명확히 해야 수하들이 진심으로 따르게 된다. 만약 피치 못할 사정으로 부하를 억울함에 처하게 했을 경우, 그보다 몇 배 더 좋은 것으로 보상해 주어야 했다.
모용명은 훗날 크라이슨을 자신의 수하로 거두어들일 계획이었기에 이렇듯 추궁과혈을 펼쳐 준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를 가까이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심성과 됨됨이를 파악하려면 좀 더 오랜 시간이 흘러야 하리라.
무엇보다 지금은 아직 기반을 확실히 잡지 못했으니 시기상조였다.
추수하려면 가을을 기다려야 하는 법! 성급하게 거두어들여 보았자 알곡이 영글지 않아 헛되이 농사만 망치게 된다.
지금은 해적들을 물리쳐 백작의 신임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
목적이 있을 때는 그것에만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이 그의 성격이었다.
모용명은 그런 본심을 숨긴 채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제 기습이나 공격에 대응하는 속도가 빨라질 거다. 검술을 수련하는 데 한층 더 도움이 될 것이니 열심히 해 봐라!”
“네! 대장님.”
씩씩하게 대답한 크라이슨은 마음이 급했는지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아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슈아아아악!
확실히 예전보다 검의 속도가 빨라졌고 각각의 동작 사이의 전환도 민첩해졌다.
“앗! 비좁은 선실에서 뭐하는 거예요!”
아밀리에게 그에게 핀잔을 줬지만 크라이슨은 흥이 난 듯 검을 멈추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병사들은 그의 지시대로 훈련을 받기 위해 갑판 위에 모였다.
이번 작전의 목표 지역인 휴버트 해적단의 본거지까지 3일 걸리기 때문에 훈련 기간도 단 3일밖에 없었다.
‘훈련 일정을 모두 소화해 내게 하려면 그저 철저히 굴리는 수밖에!’
모용명이 그들에게 가르치려 계획한 것은 보법(步法)의 기본 원리다.
이걸 병사들에게 가르치려는 이유는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균형을 잘 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해적들과의 백병전은 주로 갑판 위에서 이루어진다. 갑판에 익숙한 해적들과는 달리 평범한 병사들은 갑판에서 균형을 잡지 못해 평소 훈련의 성과를 잘 발휘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불안정하면 공격에 충분한 위력을 실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 제라드 백작이 전생을 기억하는 무림인이라면 이 보법을 알아볼 수도 있으니 균형을 잡는 구결만 알려 주고 초식의 형태는 가르치지 않아야겠다!’
모용명이 알고 있는 무림의 무공은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그중에는 강호에 널리 퍼진 흔한 무공들도 많았지만 병사들에게 함부로 가르칠 수가 없었다.
만약 제라드 백작이 무공 초식을 알아보게 된다면 일이 몹시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정도만 가르쳐도 충분하겠지?’
모용명은 신발 밑창에 잉크를 바른 뒤 갑판 위에 보법을 펼쳐 발자국을 선명하게 찍었다.
“모두들 주목! 지금부터 모두 이 발자국을 따라 걸어간다.”
“네! 대장님.”
어제 일로 군기가 바짝 든 병사들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다들 발자국을 따라 걷는 것 정도가 어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 쉽게 대답한 것이다. 그러나…….
우당당!
무림의 보법을 처음 첩하는 병사들은 수차례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모용명은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보법 수련 횟수를 두 배로 늘리는 벌을 내렸다. 다소 그들을 혹독하게 몰아세운 셈이지만 어제 기선제압을 한 효과가 있는지 병사들은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훈련에 임했다.
그런데 그때 크라이슨이 슬그머니 다가와 그의 눈치를 살폈다.
“왜? 너도 하고 싶으냐?”
“그래도 됩니까?”
“내가 시킨 일은 다해 놓고 나온 거겠지?”
“네! 물론입니다.”
“그래, 그럼 좋을 대로 해!”
“감사합니다! 시온 님.”
크라이슨은 병사들과 함께 보법을 익혔는데 가장 의욕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제법 빠른 속도로 요령을 익혀 나갔다.
스스로 하려는 자와 시켜서 하는 자의 차이랄까?
게다가 모용명에게 직접 추궁과혈까지 받은 몸이니 성취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미련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제법 재능이 있군!’
그렇게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동안 모용명은 문득 다른 일행들이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병사 하나를 선실로 보내 알아보게 했다.
“윈프레겐 님은 뱃멀미가 심하셔서 누워 계시고 아밀리에 님 역시 뭘 하시는지 침상에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래, 알았다.”
윈프레겐은 병사의 보고대로 뱃멀미 때문에 오전 내내 갑판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반면 아밀리에 고래를 수십 배 확대시킨 듯한 바다 괴수인 바실로사우르스(Basilosaurus)를 길들이느라 정신이 없어서 선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고대 마법인 콤무니오(Communio)로 괴수를 길들이는 건 대상의 덩치가 클수록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훈련에 힘을 쏟는 동안 해가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그만! 신속히 점심을 먹은 뒤 다시 갑판 위에 모인다. 꾸물대는 녀석은 기절할 때까지 얻어맞게 될 테니 각오하도록!”
“네! 대장님!”
점심 식사가 끝난 후 오후에는 그들에게 자맥질을 가르쳤다.
“지금부터 모두 바다에 뛰어든다!”
“네? 저희는 헤엄을 칠 줄 모릅니다!”
병사들은 대부분 바다를 두려워했다.
제라드 백작의 병력 운용 방식은 무조건 갑판이나 섬에서 싸우는 백병전이라 자맥질에 능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용명은 가차 없이 그들을 몰아붙였다.
주저하는 병사들을 향해 검을 휘두른 것이다.
슈아아아악― 파악!
“크아아악!”
칼등으로 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하자 운 나쁘게 걸린 병사는 자지러질듯 신음을 내질렀다.
그것을 본 병사들은 어제 윈프레겐이 몰매를 맞고 쓰러지던 광경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기겁한 병사들을 결국 하나둘 씩 바닷물 위로 뛰어들었다.
풍덩―!
“어푸! 사, 사람 살려!”
“살려…… 어푸!”
모용명은 자꾸만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는 병사들을 향해 미리 잘라 둔 나무토막을 던져 주었다.
“다들 정신 차려라! 나무토막을 잡으면 가라앉지 않는다! 정신 못 차리고 가라앉는 놈은 절대 구해 주지 않겠다!”
병사들은 대부분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무토막을 움켜잡았다. 물을 먹고 의식을 잃은 놈들은 선원들을 시켜 그물을 던져 끌어 올리게 했다.
모용명은 정신이 번쩍 들도록 그들의 혈도를 건드렸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인체의 혈도 중에는 제대로 건드리면 지독한 통증을 유발하는 것들이 있다. 그는 일부러 그들을 끔찍한 고통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다른 병사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함이다.
그는 한차례 병사들을 둘러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훈련을 따라오지 못하는 자는 이렇게 된다! 다들 알겠나?”
“네! 명심하겠습니다!”
병사들은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부터 자맥질을 가르쳐 주겠다!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하는 자들도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모용명은 수공(水功)의 일종인 이추유영신법의 요결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번에는 요결을 가르친 후 자맥질은 직접 시범을 보여 주었다.
“각자 아홉 번 정도 연습할 시간을 주겠다! 그 후에는 나무토막을 뺐을 테니 가라앉고 싶지 않으면 혼신의 힘을 다해 몸에 익혀 두도록!”
“네! 알겠습니다!”
사실 몇 번 연습한다고 곧바로 자맥질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물에 가라앉았고 모용명은 그들을 건져 낸 후 가차 없이 혈도를 눌렀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자맥질에 매달렸다. 그 결과 몇 명 정도가 물에 뜨는 요령을 터득했다.
그런 식으로 몇 번 반복하자 대부분 그럭저럭 물에 뜰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익숙하게 자맥질을 펼치려면 아직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어느덧 저녁때가 되었다.
모용명은 병사들을 그물로 건져 낸 후 선원들을 시켜 식사를 가져오게 했다. 병사들이 너무 지쳐서 밥을 먹으려 내려갈 기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갑판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친 그는 병사들이 잠시 휴식할 틈도 줄 겸 선실로 내려가 보았다.
“아밀리에! 괴수를 길들이는 건 잘되어 가고 있나?”
“휴우, 이 녀석이 쉽게 마음을 열지 않네요! 내일 저녁까지 계속해서 마법을 펼쳐야 길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간단히 그녀와 대화를 마친 모용명은 윈프레겐을 힐끗 쳐다보았다.
원래는 그에게 뭔가 부탁하려 했지만 아직 지독한 뱃멀미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좀 어떠십니까?”
“우욱! 미치겠군! 자네 혹시 뱃멀미를 낫게 하는 재주는 없나?”
“그런 게 있다면 벌써 써 봤겠죠. 참! 아밀리에. 뱃멀미를 치료하는 마법은 없어?”
아밀리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그런 마법은 없어요. 뱃멀미를 진정시키는데 좋은 약초는 알고 있지만 아쉽게도 여기서는 구할 수 없을 것 같네요!”
그녀의 대답에 윈프레겐은 더욱 어두워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휴우, 차라리 잠들 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때 모용명이 불쑥 말했다.
“진작 그렇다고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주무시게 해 드리는 건 간단합니다.”
“정말인가? 우욱! 방법이 있다면 당장 해 주게!”
“푹 주무시게 해 드릴 테니 나중에 사소한 부탁 한 가지만 흔쾌히 들어주신다고 약속해 주시죠.”
윈프레겐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자네! 이런 상황에서…… 우욱! 알았네! 어떻게든 좀 해 주게!”
모용명은 그의 수혈을 짚어 깊이 잠들게 해 주었다.
사실 그는 롱 소드를 날을 조금 깎아 내 어린검(漁鱗劍)를 만들 생각이었다.
어린검은 물속에서 빠르게 칼날을 휘두를 수 있도록 특수하게 고안된 검이다. 이곳에선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칼날을 깎아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윈프레겐은 막대한 양의 내공을 가지고 있으니 금방 칼날을 깎아 어린검을 만들 수 있을 거다. 뱃멀미가 좀 진정되고 나면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야겠군.’
볼일을 마친 모용명은 다시 갑판으로 향했다.
지친 병사들은 그대로 갑판에 뻗어 졸고 있었다.
“모두 일어나라! 이제부터 일곱 명씩 조를 짜서 연수합격술을 연습한다.”
연수합격술에 대해 설명하려면 먼저 진법의 개념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무림의 진법(陣法) 크게 인술진과 기문진 두 가지로 나뉜다.
연수합격술은 인술진에 속하는 것으로 다수가 소수를 효율적으로 핍박할 수 있는 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 명의 강력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 다수가 포위했다고 하자. 이때 무턱대고 여럿이서 공격하는 것보다 어떤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공격한다면 같은 편끼리 방해받지 않고 효과적으로 적을 몰아붙일 수 있을 것이다.
고급 진법에는 여러 사람의 힘을 한곳에 모을 수 있게 해 주는 신비한 요결도 있지만 모용명이 그들에게 가르칠 것은 평범한 연수합격술이었다.
“당장 일어나지 않는 자들은 매로 다스리겠다!”
모용명의 엄포에 병사들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들을 일일이 가르칠 수는 없으니 우선 7명을 뽑아 가르쳐야겠군!’
그는 병사들 중 자원자를 먼저 받으려 했으나 아무도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크라이슨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시온 님! 제가 가르쳐 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앞으로 나와라.”
모용명은 크라이슨을 포함해 총 7명을 뽑은 뒤 연수합격술의 핵심적인 구결을 가르쳐 주었다. 이것 역시 요결만 가르치고 구체적인 응용 동작은 그들 스스로 만들게 했다.
크라이슨이 제일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모용명은 그가 어설프게 만들어 낸 동작을 조금 가다듬어 일정한 틀을 만들어 주었다.
“자! 이제부터 나를 상대로 포위해서 공격하라!”
“네? 대장님을 상대로요?”
병사들은 그의 무예가 몹시 뛰어난데다 손에 사정을 두지 않는 성격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주춤거리며 선뜻 나서지 못했다.
모용명은 싸늘한 말투로 그들에게 선포했다.
“나를 쓰러뜨리지 못하면 오늘 너희들은 죽도록 맞는다! 차라리 빨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될 것이다!”
병사들은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를 포위하여 공격했다.
슈아아악― 채앵!
모용명은 그들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 낸 뒤, 빈틈이 보이는 대로 사정없이 칼등으로 후려쳤다.
슈아아아악― 파악!
“크아아악!”
칼등에 어깨를 맞은 사내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내질렀다.
공력으로 혈도를 자극했기에 고통이 뼛속을 파고든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런 고통 속에서도 부상은 전혀 입지 않았다.
그러나 병사들에겐 신기하기보단 끔찍한 일이었다. 부상을 핑계로 쉴 수도 없었으니까!
모용명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빈틈을 찾아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여기가 비었군! 여기도! 여기! 여기! 여기!”
파악! 파악! 파악! 파악! 파악! 파악!
“으아악!”
“아악!”
“크아악!”
칼등에 얻어맞을 때마다 섬뜩한 고통이 골수를 파고든다. 하지만 그가 순전히 병사들을 괴롭히기 위해 고통을 주는 건 아니었다.
고통은 훈련의 성취를 앞당긴다!
병사들은 한 대라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고, 그 결과 그들은 빠른 속도로 연수합격술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3일 후.
바다는 평온했고 항해는 더할 나위 순조로웠다.
촤아아악―
용골에 와서 부딪혀 갈라지는 파도가 흰 포말을 만들어 냈다. 항해하기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기에 군선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를 내고 있었다.
계획대로 별동대를 태운 군선은 휴버트 해적단의 본거지가 있는 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난 삼 일 동안 이상 기후나 예상치 못한 해류에 휘말리는 사고 같은 것은 전혀 없었으나 병사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느라 풍랑을 몇 번이나 겪은 것처럼 몹시 치쳐 있었다.
하지만 혹독하게 몰아붙인 만큼 훈련의 성과는 있었다.
이제 병사들은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도 평지처럼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자맥질에 익숙해져 바다에 대한 두려움도 다소 줄어들었다.
다만 연수합격술은 아직 미흡했는데 삼 일 만에 합격술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병사들에게 애초부터 무리한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