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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바람이 멈추고 달빛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화영이 걷고 있던 계곡도 암흑에 휩싸였다.
지구의 그림자에 의해 달이 완전히 가려진 월식이 일어난 것이다.
“으음!”
다음 행보를 정하고 영물이 있는 곳으로 향하던 화영은 신음과 함께 멈춰 섰다.
별빛밖에 없어 시야가 명확하지 않음에도 화영의 시선이 멀리 남쪽 하늘로 향했다.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오늘이 손자의 몸을 차지하기 위해 진마(眞魔)의 기운이 움직이기 적당한 날이었다.
마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혼마(混魔)가 잠들고, 십계(十界)의 경계가 약해지게 만드는 음양혼원일(陰陽混元日)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시작인가?”
화영은 이날을 위해 손자를 위해 몇 가지 손을 써둔 것이 있었다.
혼마가 잠들어 진체가 깨어났다면 그가 안배한 것이 지금쯤 발동할 시기였다.
“진마가 태완이를 노리고 있을 테니 며느리가 무척 놀라고 있겠구나. 가지고 있는 힘으로도 손자 녀석의 상태를 회복시킬 수 없을 테니 말이야.”
진마의 힘을 가두기 위해 카라가 남긴 힘과 자신의 영력을 합하여 만든 법기가 움직였을 것이고, 이후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아가! 걱정하지 마라. 설마 이 시애비가 손자 녀석을 죽이기야 하겠느냐.”
진마의 본성은 소멸당할 것이고, 손자인 태완은 남겨진 힘을 흡수해야 하기에 가사 상태에 빠지게 될 테니 며느리가 놀라겠지만 걱정할 것은 없었다.
그 모두가 자신의 안배에 의해 일어나는 과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며느리에게 위로하듯 말을 던진 화영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지금부터는 영물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영력을 빼앗기지 않으려 도망을 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상념을 접은 화영은 영물만을 생각했다.
잡념이 스며들면 자신이 펼치고 있는 영막(靈幕)에 구멍이 생겨 찾아가고 있는 곳에 있는 영물이 도주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영물 주변에 넓게 둘러친 영막은 화영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감을 느낀 영물이 영막을 뚫고 그대로 도주할 수 있어 화영은 여간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영물의 기운을 확실히 느끼며 다시 걷기 시작한 화영이 만폭동을 지나 금강산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이런!’
걸어가던 화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계명성이 환하게 빛을 밝히고 있었다.
음양혼원의 징조가 끝나고 다시 나타났던 달은 이제 완전히 기울어 어둠이 좀 더 깊어가고 있었기에 계명성이 발하는 빛은 더욱 찬연했다.
축지의 술을 발휘하면 영물이 자신의 영기를 느낄 가능성이 있어 일부러 걸어온 탓에 어느새 새벽이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그대로 있구나. 날이 밝으면 소용이 없을 테니 빨리 일을 끝내야겠다.’
발산되는 영기의 근원을 살핀 화영은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귀찮은 존재들부터 처리를 해야 하니 영물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주법으로 묶어놔야겠다.’
화영은 먼저 금인주(禁印呪)를 외웠다.
“옴―바라, 나오―진 바라…….”
웅얼거리듯 낮게 읊조린 그의 음성이 대기에 퍼져 나갔다.
소리는 기운으로 변하고 그것은 봉인이 되어 절벽 중턱에 있는 작은 공터를 감쌌다.
앞으로 벌어질 소란으로 영물이 도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공터 뒤에 감추어진 동굴 주변을 봉쇄한 것이다.
‘그럼 어떤 놈들인지 살펴볼까?’
금강산에 들어오기 전부터 따라붙기 시작한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화영은 알고 있었다.
그리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기에 지금까지 모른 척 버려두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영력의 대부분을 소모하기는 했지만 지금 남아 있는 양만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처리를 해야 했다. 그냥 둘까도 생각했지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기에 허락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기감이 퍼지고 정보가 들어왔다. 미행을 해온 자들은 이미 주위를 에워싸 포위를 끝낸 상태였다.
‘상당한 놈들이군,’
하나 하나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방심했다가는 일이 꼬일 수도 있겠다.’
처리하지 못할 자들은 아니지만 방심할 수 있는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누구나 비장의 한 수는 간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자의 안위와 관련된 급한 일을 코앞에 두고 화영 마음속으로 단단히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지박령들을 천도시키느라 충분한 영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자칫 방심했다가는 평생의 심원이 물거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빨리 끝내자.’
시간이 얼마 없기에 미행자들을 빨리 처리하기로 마음을 굳힌 화영이 몸을 움직였다.
팟!
신형이 갑자기 신속하게 앞으로 죽 뻗어 나갔다.
샤아악!
땅속에서 화영을 향해 회색의 검기(劍氣)가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순간적으로 앞으로 이동하며 피하지 않았다면 가랑이 사이로 솟아오른 검기를 피하지 못하고 두 조각으로 갈라졌을 것이 분명했다.
팟!
예기조차 흘리지 않는 싸늘한 회색의 검기가 허공에서 방향을 꺾었다.
‘이런! 아주 작정을 하고 덤비는구나.’
쐐―애액!!
일차 공격이 실패한 까닭인지 회색의 검기는 조금 전보다 빠르게 공간을 가르며 화영의 움직임을 따라 빠르게 뒤를 쫓았다.
파파팟!
공간을 잘라 먹는 것 같은 움직임으로 옆으로 신형을 이동시켜 쇄도하는 검기를 피하며 화영은 땅 위로 솟아오른 자를 바라보았다.
‘죽음을 각오했구나.’
적은 자신이 피할 것임을 예상한 듯 땅 위로 솟아오름과 동시에 검기 뒤에 신형을 감춘 채 다시금 자신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으음, 나에 대해 철저히 분석을 하고 온 놈들이 분명하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적을 바라보며 화영은 신음을 삼켜야 했다. 적은 눈동자조차 보이지 않고 감각으로만 자신을 공격하고 있었다. 눈동자를 볼 수 없는 탓에 적의 심지를 제압하는 환몽의 술이 소용없는 것이다.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지만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이 내가 가진 전부가 아니다. 나조차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으니 말이다.’
날카로운 기세를 흘리는 검기가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었지만 화영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쇄도하는 적의 살기에 흔들린다면 자신의 뒤에 숨어 있는 두 명의 자객에게 기회를 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촤악!!
달려오는 자의 손에서 검은색의 가루가 뿌려졌다. 어둠 속임에도 화영은 그것을 똑똑히 인식할 수 있었다.
“암흑린(暗黑燐)이라니! 대체! 네놈들은 누구냐?”
노한 화영의 적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그의 외침에도 적은 대답 없이 그저 공세만을 취해올 뿐이었다. 암흑린이라 불리는 검은 가루를 뿌리며 다가서는 자의 움직임은 결코 심상치 않았다.
“젠장할!!”
숨어 있는 다른 자들에게 기회를 주려 한다는 것을 느낀 화영은 옆으로 신형을 돌렸다.
팟!
그 순간 화영의 손에서는 가느다란 채찍이 튀어나와 다가오는 자의 미간을 향해 찔러갔다. 다른 가문에서는 천편(天鞭)이라 불리는 천고의 기병인 단홍(丹紅)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팟!
붉은색의 용이 영활하게 허공을 갈랐다.
화영의 가문인 천절영가(千絶靈家)의 가주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비기가 펼쳐진 것이다.
공격을 해오던 적은 붉은색의 잔영을 흘리며 자신의 미간을 파고들어 오는 천편의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팅!
화영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검은 인영은 회색의 검기를 일으켜 단홍의 끝자락을 튕겨냈다. 그리고는 이내 다른 손으로는 주변에 검은색 가루를 뿌렸다.
화영의 인상이 구겨졌다.
암흑린이 대기를 타고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숨어 있던 나머지 놈들은 암습할 기회를 노린 것이 아니구나. 저자가 뿌리는 암흑린을 조정한 것이 놈들의 진짜 목적이었어.’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짐작한 화영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적은 움직임을 멈추더니 수인(手印)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독특해 적이 맺은 수인이 화영의 뇌리에 박혀들었다.
파팟!
치지지지지지지직!
수인을 맺음과 동시에 적의 몸에서는 알 수 없는 기운들이 퍼져 나갔다.
그 기운들은 허공중에 날아내리는 암흑린과 반응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산골짜기에 뿌려진 가루는 소음과 함께 주위의 빛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암흑이 주위에 펼쳐져 순식간에 모든 것을 가려 버렸다.
피―피핏!
팅! 티팅!
“으윽!”
강렬한 병기의 접촉 음이 일어나고 암흑 속에서 비명성이 울렸다.
타타타타탕!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는 연이어 퍼져 나왔다. 암흑 속에서 접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스스스슷!
삼십 분 정도가 흐르자 암흑린이라 불리는 물건이 연출한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장내에는 화영을 비롯해 땅 위에서 솟아난 검은 인영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네 명의 모습이 보였다.
화영은 왼쪽 어깨에 부상을 입은 듯 피를 흘리고 있었다.
상처 부위에는 등 뒤로 뚫고 나온 것으로 보이는 검은색의 칼날 같은 것이 보였다.
암습자가 세 명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이목조차 속인 자의 공격에 부상을 입은 것이다.
“으윽! 북방의 술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니 다른 가문에서 보낸 놈들 같은데, 음자(陰子)들이냐?”
“…….”
화영을 노리고 있는 자들은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서서히 화영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이미 죽음을 도외시한 그들의 움직임은 살기가 충만해 있었다.
자신들이 마련한 최후의 수가 실패한 이상 천절영가의 가주를 상대하는 것은 죽음만이 남아 있을 뿐임을 알기에 자신들의 살기를 최대한 일으키며 기세를 돋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 또한 이 세계를 수호하는 십대가문 중 천절영가의 수장! 네놈들 따위에게 쉽게 당할 내가 아니다. 네놈들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극한의 수련을 한 놈들인 것은 알겠지만 이 정도 가지고 나를 어쩔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내 오늘 왜 천절영가가 일인 단맥으로 내려오면서도 십대가문의 수위에 설 수 있었는지 몸소 보여주도록 하마! 천매 접신(千魅接神)! 출(出)!”
휘이이잉!
노한 목소리에 이어 기합성과 함께 눈을 감은 화영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화영의 몸에 여러 가지 빛이 어리고 있었다.
파파파팟!
느닷없는 화영의 변화에 화영을 에워싸고 있던 네 명의 검은 인영이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들도 화영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으음…….”
“음!”
포위하고 있는 자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뒤로 물러선 그들은 자신들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자신들의 예상과는 달리 화영의 몸이 이미 완전히 변해 있었다.
여러 가지 빛으로 완전히 물들어 본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에 술법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뜻했기에 물러서지 말고 공격했어야 할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화영을 공격하던 이들은 빠르게 신형을 움직여 자리를 바꿨다. 절호의 기회가 사라졌다고 포기한 것이 아닌 듯 눈빛이 달라진 그들은 어느새 전열을 가다듬었다.
슈슉!
파파파팟!
신형이 흐릿해짐과 동시에 그들은 다시 한 번 화영을 향해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미 죽음을 각오했기에 그들에게서는 조금 전과 같이 당황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텅!
터터터텅!
공격을 위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지만 화영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기파가 흘러나와 적들의 접근을 막았다.
이미 무형의 강막(剛幕)이 화영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와 동시에 화영의 몸에 어리기 시작한 여러 가지 빛이 순식간에 화영의 몸으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접신이 완성된 이상, 뜨거운 맛을 보리라.”
여러 가지 빛깔이 어리어 있는 화영의 눈동자가 주위를 바라보았다.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는 거대한 힘이 담겨 있었다.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자들이었기에 화영은 지금 무척이나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을 습격한 자들이 북방의 가문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인혼술(人魂術), 결(結)!”
화영의 몸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세를 흐르기 시작했다. 화영의 몸에 어리었던 여러 가지 빛들이 불꽃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순간적인 화영의 변화에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자들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갑자기 당황하기 시작했다.
암습자들은 화영의 변화가 끝나고 자신들을 가로막고 있던 기파가 사라짐을 느끼고 기회다 여기고 다시금 화영을 공격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뜻대로 모든 것이 되지는 않았다.
화영이 시전 한 술법에 자신들의 몸이 단단히 속박당한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으으으!”
“으윽!”
옭아매는 힘이 너무 강해 저항조차 할 수 없었던 암습자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네놈들이 어찌 천매 접신으로 펼치는 인혼술을 알 수 있었겠느냐. 네놈들이 쓴 술법을 보아 하니 음모를 꾸미는 모양이다만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놈들을 사주한 가문에 대해서는 필히 책임을 물을 것이다. 우선은 내 몸에 상처를 입힌 네놈들부터 본보기로 삼아 아직 천절영가가 세상에 살아 있음을 보일 것이다. 인혼술(人魂術) 첨(尖)!”
화영의 외침에 붉은색의 기운을 흘리는 네 개의 쐐기가 허공중에 생겨났다.
화영의 분노가 만들어낸 영력의 총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