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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욕망으로 인해 폭주한 존재들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의념의 파장이라는 강력한 염사로 결계가 펼쳐져 있어 접근하기가 그리 용이치 않았다.
기문둔갑술(奇門遁甲術) 중 은허(殷墟)의 술(術)로 온 방위를 차단하며 펼쳐져 있는 염사 계통의 결계도 상관없었다. 그리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뚫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염사의 결계가 약해지기가 무섭게 흘러나오기 시작한 강력한 힘이 문제였다.
신기(神氣)는 물론이고 주위에 날뛰는 잡귀들의 귀기(鬼氣)와 영체(靈體)들의 영기들까지 한꺼번에 차단하고 소멸시킬 수도 있는 제령주(制靈呪)였기 때문이다
간간이 들려오고 있기는 하지만 보통 제령주가 아니었다.
생명력을 보탠 탓에 강력한 언령의 힘이 깃든 것이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자신의 힘을 온전히 쓰지 못하고 제령주가 만들어낸 기운에 휩쓸리고 있었다.
“천절영가라고 하더니 정말 무서운 가문이다. 거의 호국신급에 맞먹는 존재가 두 명 씩이나 있다니 말이다.”
“그러게. 이렇게까지 강력한 결계로 보호받는 곳이 있을까 싶다.”
비록 땅에서는 자신들의 도력이 다른 지령신들보다는 월등히 뛰어났지만 천절영가에 펼쳐져 있는 이중 삼중의 결계는 세상은 물론, 천계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었다.
“또 기다려야겠다.”
“기분이 찜찜하기는 하지만 할 수 없지. 뭐.”
금령과 수환은 천절영가를 감싸고 있는 힘이 다하기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는 없었다.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제령주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거의 하루 가까이 이어지고 있어 금령과 수환은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단한 여자다. 어떻게 저렇게 버틸 수가 있지?”
“확실히 대단하다. 아마 그놈 못지않을 것 같다.”
“부창부수란 거겠지. 그나저나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어쩌지? 우리가 여기에 머물 수 있는 시간도 이제 하루밖에는 없는데 말이다.”
약속된 시간이 있었기에 수환이 걱정스러운 듯 멀리 금강산 쪽을 바라보았다.
“수환아, 나도 걱정이다. 그 어린놈이 말한 시간이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만약 우리가 시간을 어기면 그야말로 둘 다 끝장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지막에 펼쳐진 결계는 두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혼연(魂鍊)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두 사람의 영력이 다하기를 기다릴 수밖에는 없다.”
제령주와 함께 펼쳐진 결계는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영물이나 법보가 아닌 인간이 펼친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영력으로 펼쳐진 것이라 혼연일체가 되어 있지가 않았기에 오래 가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영력이 떨어지면 자연적으로 사라질 것이었다.
“그래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잖아. 저 아이의 기운을 느끼고 다른 잡것들이 다시 몰려왔으니 말이다. 자칫 마왕급의 악신(惡神)이라도 나타나면 그야말로 도로 아미타불이다.”
수환의 말에 금령은 큰일이라도 난 것 같은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다행히 마왕급 악신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인마,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가뜩이나 지령맥과 멀리 떨어져 있어 힘이 달리는 판에 마왕급의 악신이라니? 만약에 진짜로 나타난다면 너와 나는 박 터지는 거다. 그러니 나타나지 않기만을 빌어라.”
“저렇게 꾸역꾸역 몰려오는데 마왕급 악신이 나타나지 않을 리 있겠냐?”
내심 걱정이 많았던 수환이 기다리다 지쳤는지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저 아이는 데려가 봐야 아무 쓸모가 없다고. 악신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테니 나타나지 않을 거다.”
“그래도 그 어린놈이 저 아이를 어떻게 살릴 방법이 있으니까 데려오라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시간을 맞추어 데려간다고 해도 이미 정신이 붕괴되기 시작해 어떤 방법으로도 살릴 수 없는 아이를 급하게 데려갈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그걸 악신이 모를 리가 있겠냐?”
“쯧! 쯧! 넌 금강산의 지하수맥을 관장하는 수령신이나 된 주제에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그분의 부탁이라는 것을 잊은 거냐? 그분이 우리에게 부탁을 했다면 저 아이에 대한 정보가 악신들에게 들어가는 것을 차단했을 것이 분명한데 아직도 모르겠냐?”
“그, 그런 일이 있었던 거냐?”
“아이고, 답답해. 저러니 사이비란 말을 듣지. 쯧쯧쯧!”
수환의 얼굴이 점차 붉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가 수령신이 된 것도 약간 편법을 부려 된 것이었기에 오랜 세월 동안 앙금으로 남아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금령이, 너!! 경고하는데 앞으로 사이비라고 하면 암만 집주인이라고 해도 가만두지 않는다.”
수환의 서슬 퍼런 말에 뜨끔 했는지 금령은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어?”
“왜?”
금령이 흠칫하는 반응을 보이자 조금 전에 화를 내던 것도 잊어버리고 수환도 시선을 돌렸다.
“수환아, 결계가 희미해진다. 제령주도 기운을 잃고 있는 것을 보니 결계를 펼치고 있는 두 사람의 영력이 다 되어 가는 것 같다.”
“정말 희미해졌구나.”
수환의 눈에도 고옥 주변에 펼쳐진 염사가 흐려지는 것이 보였다.
“얼른 가보자. 자칫 늦기라도 하면 그놈에게 경을 칠 테니까. 그리고 엄한 잡귀라도 아이를 차지한다면 아주 골치 아파진다. 그건 알지?”
“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번만은 참아주겠다. 그놈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순전히 저기 있는 어린놈 때문에 참는 줄 알아라.”
조금 전의 일을 잊지 않는다는 듯 수환이 말했다.
“그래, 알았다.”
“네 말대로 자칫 저 아이를 잡귀들이 차지한다면 그도 큰일이니까. 어서 가자.”
“그래.”
천절영가 주위의 사방을 둘러치고 있던 가는 금빛 기운이 점점 색이 바래가는 것을 본 두 지령신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놈에게 빼앗기지만 않았다면 백 년 뒤에 저 녀석도 나와 같이 완전해 졌을 텐데. 그래, 얼른 데리고 가서 집을 도로 되찾자. 나도 그렇고, 저 녀석을 위해서라도.’
금령이 자신의 집을 되찾으려는 의지는 무척이나 투철했다. 부탁도 부탁이지만 자신이 자리 잡은 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 때문이었다.
자신의 집에 존재하는 만년지령석이라면 수련 기간에 따라 일반 지령신을 천신급으로 올려놓을 수 있기에 집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천신이 되는 것도 중요했지만 편법으로 지령신이 된 수환이 아직 완전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만년지령석은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었다.

◈◈◈

“윽!”
주르륵!
금사로 만들어진 금부(金符)를 온몸에 붙인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인(手印)을 짚고 있던 인국의 입에서 신음과 함께 피가 흘러나왔다.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탓에 내상을 입어 토혈을 한 것이다.
스윽!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낸 인국은 이제 자신이 할 일이 없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지고 있던 영력이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내 영력도 다 됐군.”
인국의 입에서 허탈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틈틈이 수련을 하기는 했지만 진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집안을 떠나 수련을 게을리 했다곤 하지만 이토록 빨리 영력이 떨어질 줄 몰랐던 것이다.
자신의 집에 펼쳐져 있는 은허천방진(殷墟千方陣)이라는 상고의 기문둔갑을 이용해 잡귀들로부터 아들을 지켜왔었다. 진의 기운을 이용하면 적어도 열흘은 더 버틸 줄 알았는데 자신이 못나 한계를 드러냈다.
“얼마나 버티실 수 있으실지…….”
귀신을 쫓고 있는 제령주와 더불어 영력을 이용해 시전 한 수호밀진(守護密陣)이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염사의 기운이 모두 사라지고 잡귀들이 더욱 날뛰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어머니 혼자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연로하신 분이 벌써 하루가 넘게 제령주를 펼치고 있는 중이다. 이 나라 제일의 박수라는 자신의 아버지가 오기 전까지는 무슨 수를 쓰던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조하고 있던 자신의 힘이 다했기에 그나마 그것도 머지않아 한계에 다다를 것이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인국은 어머니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못내 미안했다.
“후우, 일단은 어머니께 가봐야겠구나.”
인국은 상념을 털고 은허천방진의 중심에서 벗어나 아들과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당으로 다가가자 기하학적이면서도 여백의 은은한 운치를 풍기는 하얀 창호에서 희미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 기문의 법으로 만들어진 창호가 제령주의 힘을 증폭시키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인국은 사당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누워 있는 아들과 끊임없이 제령주를 암송하고 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으음. 어머니도 한계에 다다르셨구나.’
태완을 지키고 있는 어머니의 창백한 안색을 본 인국은 가슴이 쓰라렸다.
인국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어머니의 옆으로 가 자리에 앉았다.
“후우, 애비야. 은허천방진이 힘을 잃었나 보구나.”
“크흑! 예, 어머니. 제가 부족해서 끝까지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애비야, 네 잘못이 아니다. 수련을 깊이 하지 못했는데도 이 정도면 많이 버텨 준 거다.”
피를 토한 흔적이 옷깃에 묻어 있는 것을 보며 혜화는 최선을 다한 아들을 위로했다.
“어머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그래, 아직은 견딜 만하다. 하지만 은허천방진이 무너져 오늘밖에는 견디지 못할 것 같구나. 네 아버지가 이제 오실 때가 됐는데 걱정이다.”
“아버님께서 오실 날짜가 이미 지나지 않았습니까?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님.”
천절영가의 가주를 어떻게 할 이는 세상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이유 모를 불안감이 계속해서 인국의 가슴을 두들겼다.
“걱정이구나. 한평생 네 아버지와 살아오면서 이런 일은 없었는데 말이다. 세상을 떠돌며 지내기를 좋아하는 분이기는 하지만 십대가문의 회합이 있은 다음에는 어김없이 집에 돌아와 진혼제를 올리시던 분인데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네 염사가 걷혀졌음에도 태완이가 평안하다는 것이다. 이대로 놈들이 물러나 줬으면 좋으련만 절대 포기하지 않을 놈들이니 정말 걱정이구나.”
진의 위력이 현저히 반감됐는데도 잡귀와 영체들이 더 이상 날뛰지 않았다. 시간을 더 벌 수 있을 것 같아 좋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미지수였기에 혜화 또한 안색이 굳어 있었다.
“어머니, 태완이를 괴롭히는 놈들은 어떤 존재들입니까? 저도 얼핏 감지를 하긴 했지만 대부분이 처음 보는 놈들이었습니다.”
“나 또한 모르는 놈들이 많았다. 정체는 모르지만 풍기는 기운을 보니 아마도 고통으로 인해 생긴 악귀나 원한을 가지고 있는 지박령과 비슷한 존재인 것 같구나.”
태완을 괴롭히는 존재들은 혜화로서도 대부분 처음 보는 것이라 알고 있는 것에 대충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보통 놈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태완이의 몸에 저런 정도의 영흔(靈痕)이 남을 정도라면 천도를 시키는 것도 꽤나 까다로울 겁니다.”
누워 있는 태완의 몸에는 보통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가는 혈선이 줄기줄기 나 있었다. 영력을 가진 자의 눈에만 보이는 악령들의 흔적이다.
흉물스러울 정도로 가는 혈선들이 손자의 전신으로 뻗어 있는 것을 보며 헤화도 인상이 굳어졌다.
“그러게 말이다. 저 정도의 영흔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는 법인데…… 왜 저 아이에게 나타났는지 이 어미도 의문이기는 하다. 그나저나 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니 이제는 내일이 큰일이다. 법고라도 있었으면 그나마 막아낼 수 있기라도 할 터인데 방법이 없으니 큰일이구나.”
“법고(法鼓)는 삼십여 년 전에 잃어버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때 잃어버렸지. 그때 그렇게 법고를 잃어버리지만 않았어도…….”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혜화는 고개를 저으며 하염없이 태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법고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법고가 무엇이기에 저리도 처연한 표정을 짓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인국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법고에 얽힌 사연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인국이 법고에 의문을 가진 사이 혜화도 모종의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 이가 돌아오실 때까지 무슨 수를 내야만 되겠다.’
은허천방진의 기운이 떨어진 탓인지 귀기와 영기들이 더욱 난폭하게 날뛰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자신의 영력이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손자를 살릴 방법을 마련해야 했다.
‘지금 바깥에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분들이 도와만 주신다면 태완이를 살리는 일도 가능할 것 같지만 의중을 모르겠으니 걱정이로구나.’
제령주를 펼치며 바깥의 동정을 주시해 온 혜화는 금령과 수환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손자를 욕심내지 않는 것을 보면 돕기 위해 온 것 같지만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일이라 도움을 청하기가 망설여지는 혜화였다.
‘그래, 어차피 기회는 지금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태완이에게 준다면 아무리 다른 뜻을 품었어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이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지금 사태가 결코 태완이의 몸 때문만은 아닌 것 같으니 말이다.’
혜화는 손자를 지키며 그동안 생각해 왔던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 유일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존재들이기에 늦기 전에 그들을 부르기로 한 것이다.
“인국아!”
“예, 어머니.”
“다행히 얼마 전부터 집 근처에 강한 신기(神氣)가 보이고 있구나. 날뛰는 신령들과 다른 것을 보면 아무래도 천장급의 신령이 분명해 보인다.”
“천장급의 신령이 이곳에 강림하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지령신이신 것 같은데 저리 지켜보시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우리 태완이를 돕기 위해 오신 것 같구나.”
“그렇지만…….”
인국은 지령신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조금은 꺼려졌다.
지령신을 안으로 들이기 위해 자칫 제령주를 풀면 태완이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였다.
“걱정하지 마라. 해코지를 하기 위해서 오셨다면 벌써 그러고도 남았을 테니 말이다. 제령주로 그분들까지 막아왔지만 이제는 소통을 한 번 해봐야 할 것 같다.”
“어, 어머니.”
“어차피 힘이 다 되어서 얼마 있지 않아 제령주를 시전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네 아버지가 오시지 않으니 더 이상 어려워지기 전에 그분들을 불러야 될 것 같구나.”
“정말 그들을 불러들여도 괜찮을까요. 어머님!”
“인국아, 괜찮을 게다. 그러니 넌 어서 제법당(制法堂)에 가서 초혼령(招魂靈)을 가지고 오너라. 네 아버님이 오시기 전에 무슨 사단이라도 벌어지면 큰일이니 우선은 그들의 도움이라도 받아 보자꾸나.”
“예, 어머님!”
자신이 생각해도 유일한 방법이기에 인국은 바깥으로 나가 신기를 보관하고 있는 제법당으로 갔다.
“으으음!”
태완과 함께 법당에 남아 있던 혜화의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영력을 소모하며 펼치는 제령주는 최고라 일컬어지는 비술 중 하나였다. 비록 시댁 가문의 비전인 은허천방진이 펼쳐져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녀에게도 상당한 무리였다.
“으음, 이럴 줄은 알았지만 점점 더 버티기가 힘이 드는구나. 태완아.”
태완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혜화는 이미 자신의 생명을 도외시하고 있었다.
아들인 인국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태완을 위해 제령주를 베푼 것은 혜화의 생명을 갉아먹는 일이었던 것이다.
제령주를 무리하게 펼친 까닭에 자신의 수명이 상당히 깎여 나갔음을 알고 있었지만 여한은 없었다. 그나마 제령주가 없었다면 손자를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진혼인을 내가 펼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으니…….”
혜화는 자신의 손자인 태완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최후의 비술을 펼칠 결심을 굳혔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기도 하지만 조금 있으면 불러들일 지령신들도 확실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혜화의 친정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최후의 비술인 진혼인(鎭魂印)은 평생을 함께 살아온 남편에게조차 알려주지 않은 것이었다. 혜화의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진혼인은 전적으로 시전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비술이었기 때문이다.
진혼인은 초혼지체를 차지하기 위해 사방에서 저리 날뛰고 있는 잡귀들과 영체들로부터 태완이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최후의 비술답게 진혼인은 시전자의 원심(元心)을 이용해야만 펼칠 수 있었다.
자신의 영력의 원천인 원심은 깨어질 것이고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수명도 다할 것이 분명했지만 혜화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진혼인을 통해 손자의 영혼에 자신의 원심이 가득한 영력이 씌워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귀체들이나 영체들이 태완의 몸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할 터였기 때문이다.
“나는 죽겠지만 진혼인이라면 그 양반이 올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원심을 깬 힘으로 술법이 완성되면 생명력을 급격하게 소모하기에 살아날 가망성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손자를 살릴 수 있는 것 또한 틀림없었다.
“후우, 태완아! 난 이미 살 만큼 산 몸이다. 이 할미는 우리 태완이가 잡귀들에게 시달리며 평생을 살아가는 꼴은 죽어도 보지 못하겠구나. 사람도, 귀신도 아닌 그 삶이 너무도 비참해지기에 말이다. 진혼인이 펼쳐지면 잡귀와 영체들로부터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잘 버텨야 한다. 태완아.”
태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는 혜화의 표정이 무척이나 비장했다.
“애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아픔을 주겠지만 내 새끼를 살리는 일이니 이해를 할 것이다.”
자신의 희생으로 마음이 아플 아들에게 미안함이 들었지만 손자를 위한 일이기에 혜화는 마음이 홀가분했다.
“진혼인을 펼치고도 초혼할 수 있는 정도의 영력은 남겨야 한다.”
진혼인을 펼치고 나면 대부분의 생명력을 소진하기에 계산을 잘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