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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기사 1
2화



반짝이는 것을 본 뒤, 그 선임 병사는 그 물체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내딛는 발길이 쿵쾅쿵쾅 땅을 울릴 때마다, 그의 심장 또한 울리고 있었다. 보석이라면 정말 대박인 것이다.
지금 휴전협정이 한창이라니, 빠르면 1∼2년 사이 종전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고향에 돌아가서 한밑천 남겨 마을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으며 그 물체로 향하던 선임병은 돌연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뭐야, 칼날이었잖아. 젠장!”
그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칼날이었는데, 날과 날이 겹쳐 보이며 멀리서 볼 때 달빛에 의해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응? 저건 또 뭐야.”
그런데 그때, 칼날 옆에 한 사내가 배를 움켜쥐며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얼핏 본다면 쥐죽은 듯 잠잠하여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씩 몸을 움직이는 걸 보니 죽은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제, 젠장! 거기 사람 없나? 여기 부상병 하나가 더 있다. 어서 오란 말이다!”
그래도 투철한 직업 정신(?)을 가진 놈인지 마냥 내팽겨 두지는 않고 부상병을 들것에 실을 동료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의 동료,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부하들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에 안심한 선임병은 부상병에게로 다가갔다.
“눈을 뜬 걸 보니 죽지는 않겠군. 다행이다.”

자신에게로 다가오던 사내는, 옆에 있는 칼날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리고는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때, 천행인지 그 사내가 자신의 고통에 겨워하는 모습을 봤다.
있는 힘, 없는 힘 짜내어 그를 부르고 싶었으나, 반가운 마음인지 뭔지는 몰라도 목소리가 새어 나오질 않았다. 다행히 그는 자신에게 다가왔고, 자신에게 말했다.
“눈을 뜬 걸 보니 죽지는 않겠군.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의 머릿속에 불똥이 튀었다.
‘무, 무슨 말이지……?!’
알 수 없는 언어였다. 자신이 살던, 아니 정확히는 지구의 어떤 언어와 견주어 보았을 때 단연코 저런 언어는 없다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언어였다.
물론 그가 모르는 언어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이는 얼핏 보기에도 서양인처럼 보이는 외모였고 그렇다면 어느 정도 한정된 유럽 쪽의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데 이 언어는 어떤 나라, 지방의 언어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충격이 가는 것은 사내의 복장이었다. 피철갑을 하고 있어서 잘은 모르지만, 얼핏 보기에 저것은 쇠로된 갑옷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가 영화에서 보았던 풀 플레이트 아머라고, 일개 병사들이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 입는 흉갑 따위 정도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무슨 갑옷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주변의 시체들 또한 그랬다. 조금 전 시체들을 보았을 때는 몸과 팔, 다리 등의 찢어진 부위 때문에 눈에 잘 들어오진 않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들 또한 갑옷을 입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이는 풀 플레이트 아머까지 입고 있는 자도 있었다. 거기에 더해, ‘화살’을 머리에 관통당한 듯 보이는 시체도 보였었다.
이 일련의 사태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지극히 정상인이란 뜻이다. 어떻게 집에서 자다 일어났는데,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해한다면 그놈은 미친놈이지 당연히 정상인은 아닐 것이다.
각설하고 앞에서 알 수 없는 언어를 지껄이는 사내였지만, 그가 또 뭐라고 지껄였다.
알 수 없는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해석이 가능했는데, 들것을 가져와 이자를 실으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일단 그 말을 듣고는 의식을 잃어 갔다.
그래도 이 알 수 없는 곳에서 죽지는 않는다는 안도감에서이리라.

***

보인다.
조금씩 보였다. 그의 눈에서 여러 가지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흰 가운을 걸치며 자신에게 손가락을 이리저리 흔들며 외치는 사람도 보였다.
“이봐, 이봐 병사! 들리나? 이게 몇 개로 보여. 응? 말해 봐. 어서!”
그는 병석에 누워 있는 이 부상병이 다시금 쓰러질까 봐, 다급히 말하는 걸로 보였다.
‘두, 두 개…….’
흰 가운을 입은 이의 손가락을 보고는 우물우물거렸는데, 입 밖으로 나오진 않고 말 그대로 우물우물 정도에서 그쳤다.
“응? 뭐라고? 다시 말해 봐, 몇 개?!”
흰 가운을 입은 이, 아니 정확히는 흰 가운은 입었지만 온몸에 피가 범벅이 된 이가 우물우물하는 걸 보고 묻는다.
“두, 두…… 개.”
머리가 아파 말을 할 수 없었지만, 눈앞의 사내의 물음에 대답치 않으면 당장이라도 죽음의 사신이 그를 옥죌 것 같았기에 말을 하는 그, 아니 김현이었다.
김현.
그랬다. 그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사람이었다.
그는 평범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를 갔다 온,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물론 그가 하는 짓이 평범함과는 좀 거리가 먼 것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현은 군대를 갔다 와 복학을 준비했고 친구는 축하한다며 술을 거하게 샀다. 그리고 집으로 귀가 했고…….
한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다.
현은 이게 도통!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현의 이런저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흰 가운을 입은 이는 무슨 장부에 자신의 상태를 적는 것인지 뭐라 뭐라 쓰더니 곧, 조금 있다가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급히 후송되어 오는 병자들을 보고는 다시 뛰어갔다.
그를 보내고 나서 현은 이 뭣 같은 상황을 이해해 보자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머리만 더 아파올 뿐, 이렇다 할 결론은 나오질 않았다.
한참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자신에게 손가락 개수를 물었던 흰 가운을 입은, 아니 군의관으로 보이는 이가 다시금 자신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장부를 펼쳐 보이더니 물었다.
“정신을 차린 듯싶군. 그래, 이름이 무엇인가.”
아무래도 차트에 이름을 쓰지 않은 것 같았다.
한편, 현은 군의관의 ‘이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머릿속에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이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맴돌기 시작했다.
그 물음은 머리 전체로 퍼져 나갔고, 현은 머릿속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으아아악!”
배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도 머릿속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더욱 심했다.
군의관으로 보이는 이는 차트에 받아 쓸 준비를 하고 있다가 현의 행동에 당황한 듯 주춤거렸다.
“이, 이봐, 왜 그래? 정신 차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바로…….
‘로, 로터? 누구야! 로터가 누구냐고!’
로터.
자신의 머릿속으로 들어온 이름 때문이었다.
자신은 스물다섯의 ‘김현’이다. 한데 군의관의 말을 듣고 난 뒤로는 머리가 그걸 거부했다. 아니, 거부가 아니라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머리는 말했다. 자신은 김현이 아닌 로터라고 말이다. 거기다가 더해, ‘김현’의 기억이 아닌 ‘로터’의 기억이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깨질 것처럼 아팠다.
“로, 로터가 누, 누구…… 끅!”
현이 고갤 들어 로터에 대해 물으려 했지만, 군의관은 현의 목을 짚어 보고는 괜찮다 싶었는지 다시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알롱하게 의식을 잃어버리는 현, 아니 로터였다.
“크으윽…….”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아무래도 배에서 전해지는 고통이 많이 희석된 듯싶으니, 꽤 여러 날이 지난 듯싶었다.
현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돌연 얼굴을 찌푸렸다. 기억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온 다른 이의 기억 때문이었다.
‘로……터? 평민? 레노 왕국?!’
로터라는 이름과 평민이라는 신분은 그렇다고 쳤지만 왕국이라는, 머리가 말하는 단어에서는 그의 놀람이 컸다.
당연했다. 기억상 입헌군주제의 국가도 아니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기억상 이곳은 기사가 존재하는 곳이란다. 또 대부분의 국가가 봉건제를 채택하고 있어, 흡사 유럽의 중세 시대와 비슷하다고 할 만했다.
다만 다른 점은 지구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등으로 나뉜, 5대륙이었지만 이곳은 그 5대륙을 합한, 몇 배는 되는 크기의 2대륙이라는 것이었다.
또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문명은 중세 유럽의 그것과 다르고 근대화 이전이라고 보면 되었다.
그렇다고 총포와 화포가 개발된 것은 아니었고 생활의 자체 정도만 그렇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지구의 중세 시대와 같이 전쟁을 자주하는 것은 맞지만, 어찌 된 일인지 화포와 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았다. 다만, 기본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는 활, 창, 칼 등으로 전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 사람들의 머리가 멍청한 것인지, 무기를 발전시킬 생각이 없는 것인지, 무기 자체는 중세의 유럽과 매우 흡사했다. 아, 물론 말(馬)도.
거기다가 수십 개의 국가들이 난립하고 있다고 머리가 말해 주고 있었다.
자신의 나이는 스무 살이란다. 가족도 있다고 한다. 엄마, 아빠, 남동생, 누나.
그게 지금 그의 머리가 말하는 단편적인 기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개새끼가 개뼈다귀 먹는 소리야…….’
고통에 겨웠지만, 이 엿 같은 상황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스물다섯의 이제 군복무를 끝마치고 나온 대학생이다. 그런데 자신보고 로터라니?
그런데 또 하나 기분 나쁜 것은, 이 모든 이질적인 기억들이 다른 이의 기억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나’ 자신의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그게 더 황당한 현이었다.
그렇게 이 황당무계한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을 때였다.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자자, 이쪽으로! 어서어서 옮겨!”
“으아아악!”
“내 다리이!!”
한 병사의 인도에 들것을 든 병사들의 모습이 나타났는데, 들것에 들린 병사들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들의 형색을 보아하니, 고통에 고함을 내지를 만도 하였다. 그들은 팔, 다리 어느 한쪽은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은 계속하여 들어왔다.
그런데 그때, 환자들의 행렬이 끝날 무렵 자신이 익히 아는 인물이 들어왔다. 다름 아닌 군의관이었다.
그는 저번의 당황하는 모습은 어디 갔는지,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마냥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보이며 현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 일어났나 보군.”
도착한 군의관이 묻자, 현이 한 손으로는 배를, 한 손으로는 머리를 움켜잡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어어! 괜찮은데…… 쓰르릅!”
괜찮다며 말하며 군의관이 차를 마셨다.
“그, 그나저나 얼마나 된 겁니까?”
현의 물음에 군의관은 컵을 상에 올려놓더니 현의 머리를 집고는 말했다.
“자네가 의식을 잃고 난 뒤로 정확히 오 일이 흘렀네.”
군의관의 말을 듣고 난 뒤 로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날짜가 많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안도감이 들어서인지, 배에서 밥 달라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나저나 이곳은 어딥니까?”
현의 물음에 군의관이 이곳 전체를 손으로 으쓱해 보이며 말한다.
“그야 병원이지.”
뭐…… 당연하다. 아픈 자들이 떼로 있는 곳이 병원이 아니면 어디겠는가? 그에 할 말을 잃은 현이었다.
“아무튼 어서 빨리 몸을 추스르는 것이 좋을 게야. 아무래도 윗대가리들이 행하는 휴전협정인가 뭐신가가 조금 연장될 것 같아.”
“예?”
현은 그저, 휴전협정이 무슨 말이냐는 의미에서 물었던 것인데 군의관은 그게 아니라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되묻는 걸로 들렸나 보다.
“연장될 것 같다고. 뭐 윗대가리 놈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지만……. 그래도 다행이란 점은 그 확률이 오십대 오십이란 거야. 최소한 1∼2년은 꼬박 전쟁터에서 더 살아야겠지만, 휴전협정을 파기한다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아?”
“아무튼 자네도 몸조리 잘하게. 완쾌된 부상병을 바로 투입하는 전례는 없었지만, 그거야 서로가 비등한 전력을 가지고 있을 때나 그렇지, 안 그래도 약 5∼7만의 전력 차가 나는데 우리 연합군이 밀린다면 부상병, 정병, 따로 없이 모두 전투에 투입시킬 것이 분명하네. 부디 몸조리 잘하시게나. 크흠!”
군의관은 제 할 말만 마치고는 뒷짐을 지고는 현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다음 날이 되었다.
이곳의 고정된 병자들은 현을 비롯해서 몇 없었다.
대부분이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대부분 죽어 나가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완쾌되어 나갔는데, 죽어 나가는 수가 더 많았다.
현은 잠을 자기 전에 많은 생각을 했다. 이곳이 어디며, 자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 그리고 답은, 이곳은 지구가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또한 자신은 로터가 아닌 현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현은 일단 여기서 살자고 마음먹었다. 돌아가지 못한다고 떼를 쓰며 가슴 아파하는 건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이미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랄거리며 지구로 돌아가고 싶다고 외치는 건 병신이나 하는 짓이다.
엄연히 현실을 받아들이는 관록도 이럴 때쯤은 필요한 법이었다. 비록 이곳이 창칼이 성성한 곳이지만, 자신이 있었다.
현의 아비는 본국검법과 조선세법의 대가였고, 당연히 그는 여러 무인들을 비롯한 아버지에게 검법을 배웠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여러 무인들에게서 무예를 사사받았는데, 그중 하나는 검술을 제외한 창술로 조선에 마지막 남은 창법인, 창무지였다.
물론 본국검법과 마찬가지로 일제시대에 사장되어 그 대가 끊겨졌었으나, 여러 무인들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아서인지 점점 그 사료가 밝혀졌고, 그로인해 무인들은 본국검법과 같이 창무지를 복원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본국검법이 복원되었다 하더라도, 일제 치하의 식민시절 때문에 우리 고유의 검법이 아닌, 우리 고유의 검법에 일본식의 검법이 가미되었는데, 창무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뒤로도 여러 사료가 대거 발견되었는데, 어느 한 무인이 이러한 일을 미리 예견하고 묻어 둔 것 같다고 사람들은 조심히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걸 지금에 와서야 발견한 것이고.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본국검법과 창무지에도 능했지만, 협도술에도 능했다. 협도란 우리 민족 고유의 대보병 무기 중 하나였다. 물론 쓰는 정도는 세 무기 모두 능수능란하게 사용하지만, 현은 협도를 더 선호했다. 아무튼 그는 죽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실전 경험이었다. 그는 실전 경험이 없었다. 여러 가지 대련 방식과 양아치 몇을 혼내 주는 실전 방식은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진검으로 베거나, 찌르는 일, 사람의 살을 베는 일은 없었다.
물론 아버지와 겨울 훈련을 나갔을 때, 더러 멧돼지 등을 보아 직접 베어 죽이는 일 따위는 있었어도, 사람의 살을 베는 일은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행위를 한다면 바로 철창신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고 약자는 강자에게 잡아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실전을 겪음과 겪지 않음의 차이는 실로 크다 할 수 있는. 그게 조금 걱정이 되는 현이었다.
그는 검법보다도 창법(협도술)에 능했는데, 다름 아닌 그가 창술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뭐, 창술을 좋아한다고 해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멋있기 때문이었다.
검술도 멋이긴 하지만, 창은 그 특유의 길이로 인해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들었고, 그것이 현이 아버지에게 배운 본국검법이나 다른 검법보다 창법을 높이 치는(?) 이유였다.
아무튼 그렇게 현은 이곳에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돌아가지 못한다. 자신이 이곳에 왔던 것처럼 자고 일어나니 자신의 방이라면 몰라도 돌아갈 방법이 없는데, 생각만 하는 건 머리 아픈 일이다.
자신의 나이 스물다섯이며 자신의 이름 김현이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제 자신은 스무 살의 로터이며 일개 평민 병사였다. 앞으로 자신의 신분이 어찌 변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러했다.

며칠가량이 또 지나갔다.
그동안 이곳에서 살아가자고 마음먹긴 하였지만, 뜻대로 실행이 되지 않았기에 여러 가지 사념에 잠겼었다. 어느 날은 이런 자신이 미치진 않았나 하고 생각하긴 했지만, 역시 그건 아니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났는데, 그날 그는 깨달았다. 그는 정녕 이곳에서 김현이라는 이름이 아닌, 로터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