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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다름 아닌 그의 얼굴과 체격 때문이었다. 사실 김현은 무예를 익혀서인지 기골이 장대하였는데, 어느 날 자신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의 얼굴이 김현의 것이 아닌 다른 이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억이 들어왔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긴 있었지만, 자신의 얼굴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거기에 더해 혹시 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니 혹시가 역시나. 로터의 얼굴이었다.
준수하지도 그렇다고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함에서 약간 더나간 얼굴이었다. 그리고 체격은 이십 세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약 170cm의 키에 몸무게 60kg도 안 되어 보였다. 물론 이건 추측이다. 자신의 몸을 보며 한 추측.
아무튼 이곳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기로 한 이상 살아가야만 했다. 비록 이 모든 사태가 처음엔 충격으로 다가왔고 자신이 미친놈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들었으나, 이것은 현실이며, 진실이었다.
받아들여야만 했기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격언처럼 그는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하자 모든 것이 편하게만 느껴졌다. 모든 것을 떨쳐 낼 수 있었고, 이제 자신은 김현이 아니라 로터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로터라고 인식하면서 언제부터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곳의 특성이 그런 것인지, 그의 회복 상태는 날의 날을 거듭할수록 더해져, 지금은 어느 정도 움직일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 그는 더욱더 몸을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 몸을 깨끗이 닦았고 병상에만 있지 않고 밖으로 나아가 햇빛에 몸을 노출시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놀라기 일쑤였다. 비록 이곳에서 살아남자는 생각을 하긴 했으나, 여러 병사들이 입은 갑옷과 그들이 들고 있는 붉은색 피가 묻은 병장기들은 이곳에서 살자라는 생각과는 별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계속 보자 그것은 군 시절 총기와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자신은 어깻죽지에 총탄을 관통당해서인지 시간이 지나니,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되자 이제는 자신이 현인지 로터인지 구분도 안 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김현이란 기억과 함께, 로터의 기억도 존재하니 더욱 그런 걸 수도 있었다.
로터는 겁이 많은 아이라고 머리가 말해 주었다.
겁이 많은 아이가 왜 전쟁터에 왔냐고? 돈 때문이었다. 돈 때문…….
앞서 말했지만 그는 부모님과 남동생, 누나가 있다. 한데 그의 집은 뭔 구녕 찢어지게 가난했는데, 누나는 시집을 갔고 남동생은 아직 어려 사회생활을 하기가 힘들었다. 부모님이 돈을 벌긴 하지만 자신과 동생을 가르치기엔 무리였다. 그래서 원정군을 구한다는 말에 냅다 달려 나왔다.
당시 원정군은 사람을 구하기가 힘들었기에, 별 어려움 없이 올 수 있었다. 원정군은 비록 대륙 간 대륙을 이동한다는 어려움이 도사렸지만 월급이 있었다.
물론 영지전과 영지전에 참여하는 용병을 비롯한 영지군들이 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조금이었지만, 원정군들은 한 달에 약 1골드를 받았다.
1골드는 일개 4인 평민 가정의 두 달 생활비였다.
그걸 한 달에 한 번씩 번다?
평민에게는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참고로 대륙의 화폐 단위는 쿠퍼, 실버, 골드라고 불렸다. 이외에도 브론즈라는 쿠퍼 아래의 화폐가 있었지만, 잘 사용되지 않는 화폐였다. 설명하자면 쿠퍼는 브론즈의 100개가 모인 것, 실버는 쿠퍼의 100개가 모인 것, 마찬가지로 골드는 실버의 100개가 모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각설하고, 로터는 그래서 이곳에 온 것이다.
그의 성격은 온화했다고 머리가 또 말해 주었다. 마을에서도 착실하고, 예의 바른 아이로 통했다고도 말해 준다. 그런 아이가 전쟁터에 참여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불쌍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드는 현이었다.
‘휴우…….’
이 막막한 세계에 대한 한숨을 다시 한 번 내쉬는 현, 아니 로터였다.

또다시 두 달이란 시간이 지났다. 이곳에 온 지 거의 세 달이란 시간이 지난 셈이다.
아무래도 이곳은 지구와는 다른 것 같았다. 공기 중에 무슨 성분이 포함되어서 인지는 모르지만 전문 의료기가 없는 이곳에서 완쾌가 되려면 족히 반 년 이상은 걸릴 걸 3개월 만에 완쾌가 되었으니 말이다.
본래 현은 십오 일 전에 완쾌가 되었지만 마침 그때 또 다른 전면전 양상의 전투들이 있었고, 혹시나 완쾌된 자신이 그 전투에 참전하게 될까, 엄살을 부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날 전투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여 병실을 꿰찼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교적 많이 나은 현은 나올 수밖에 없었고, 예의 그때 그 군의관은 행정실로 가라고 일러 주었다.
이미 이곳, 아니 로터에 대한 삶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도망치자고 잠깐, 아주 잠깐 생각해 보기도 했으나 현실성이 없었다. 이곳에서 도망친다 한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곳은 전쟁터다. 그것은 이 대륙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똑같은 것, 무인으로서 도망치지나 않고 죽고 싶었다. 그래서 현은 군의관이 일러 준 행정실로 발길을 향했다.
끼이익.
현이 행정실 문을 열어젖혔다.
행정실 안은 조용했는데, 아마도 저번의 전투로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을 뿐, 완쾌자는 별로 없어서인 것 같았다.
현의 눈앞에 책상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가 보였다. 현, 로터가 앞으로 다가가 책상을 두들겼다.
탁탁!
“저기요……? 행정관님?”
일단 행정관도 대부분이 준귀족이 맡는다. 물론 평민도 맡긴 하지만 그건 소수였다.
이곳의 계급 체계는 농노(노예)>평민>방백>기사=준남작>남작>자작>백작>후작>공작=왕세자>대공=황태자>국왕>황제 순으로 나뉘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또 세습 작위와 단승 작위로 나뉘어졌는데, 세습 단위란 말 그대로 자식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작위이다. 단승 작위는 말 그대로 자신의 대에서만 끝나는 작위로 여러 상인들이 상업에 필요한 귀족위를 구매할 때 구매하는 작위였다.
또, 구매뿐 아니라 공을 세워도 작위를 내리기도 했지만, 평민이 이걸 받기란 매우 힘들었다. 그리고 백작 이상은 세습 작위만 있을 뿐, 단승 작위란 있을 수 없었다.
아무튼 현의 물음에 행정관이 눈살을 찌푸리며 기지개를 펴고 일어났다. 그리고 눈앞에 사람이 있는 걸 발견하곤 다시 한 번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단잠을 방해해서일 것이다.
“뭐냐?”
공손한 현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 행정관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걸 좀…….”
현이 품에서 군의관이 주고 간 종이를 건넸다. 다름 아닌 퇴원을 한 인증서나 마찬가지인, 어느 부대로 편입시키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축하하네. 몸이 완쾌했나 보군.”
“감사합니다요.”
현이 입가에 웃음을 달며 말했다.
이미 이곳의 삶에 적응하기 위해선 먼저, 자존심을 버려야 했다. 귀족들 앞에서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다간 딱 죽기 십상이었다.
자존심이란 것도 어느 정도 지위가 높아지거나, 강해야만 내세울 수 있는 것이었다. 일례로, 그의 기억 상 마을 청년 하나가 귀족 나리에게 객기를 부리다가 기사들에게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목이 잘려 나간 경우도 있었다.
물론 무예에 능한 현이 일격에 목을 내주진 않겠지만, 이곳엔 십만이 넘는 대군이 주둔 중이었다. 자신 하나를 수색하는 건 금방이었다.
아무튼 현의 태도에 행정관의 태도가 다소 부드러워졌다.
“가만 보자…… 어디가 좋을까나.”
그리고 그는 서류를 뒤적뒤적거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서랍에서도 서류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아, 여기가 좋겠군. 자, 여기 있네. 자네가 이제부터 몸담게 될 부대일세.”
행정관은 종이 하나를 현에게 건넸는데, 다름 아닌 부대의 명칭과 부대원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었다. 그와 더불어 행정관은 현에게 약도도 건네주었다.
부대의 명칭은 다름 아닌, 프라마티뉴 연합군 소속, 레노 왕국 2군단(3∼5만 명) ― 5사단(1만 명) ― 45천인대(천 명) ― 102백인대소속(백 명), 21십인대(열 명)가었다.
명칭이 조금 길다는 흠이 있지만, 현이 얼핏 보기에 군 체계가 확실히 잡혀 있었다.
로터는 행정관에게 밉보이지 않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선 약도를 보며 자신의 근무지(?)가 될 21십인대로 걸음했다.

일개 병사 따위를 안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현은 당연이라면 당연히, 행정관이 준 약도를 집어 가며 21십인대의 막사를 찾아다녔다.
그나마 프라마티뉴 대륙 연합군들은 점령한 남부와 서부 지방에 군대를 나누어 주둔시켰기에, 나라 별로 진영을 펼쳤는데 그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만약 한 지방에 여러 나라의 군대가 얽혀 있었다면 행정 체계와 명령 체계가 복잡해 일대의 혼란이 빚어졌을 것이리라.
‘후우!’
막사 앞에 도착한 현이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이곳에서 군의관을 제외한 이들과 친분을 맺는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망설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현은 남자답게 눈을 질끈 감고 막사의 막을 펼쳤다.
촤락!
현이 막사의 막을 걷고 나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랬다. 아무도 없었다.
현이 이게 뭐지? 하며 안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생각해 보니, 점심을 먹으러 간 것 같았다.
‘젠장!’
혼자 쌩쇼를 떨어서 자기 자신에게 뻘쭘해지는 현이었다.

21세기에서는 아버지를 따라 무를 숭상했기에, 당연히 먹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래서 유치원생 때쯤에는 모두 한다는 반찬투정도 결코 하지 않았던 현이었다.
만약 21세기의 자기 또래 아이들이 이 상황을 겪었다면 욕거거리를 내뱉으며 절망에 빠졌을 법도 했지만, 그는 아버지를 따라 음식보단 무예를 중요시 여겼기에, 음식은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는 정도, 혹은 배가 고플 때나 먹던 것이었다.
또, 아버지를 따라 산에서 한겨울에 무예를 익히는 날도 다반사였으니, 그에 따라 요깃거리를 찾지 못한다면 굶는 적도 많았다. 아무래도 겨울인 이상 잡아먹을 동물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멀건 죽 같은 걸 스프라고 내어 놓고, 딱딱한 검은색 돌덩어리를 흑빵이라고 내어 놓았다.
뭐, 그래도 스프에 흑색 빵을 찢어서 찍어 먹으니까 그런대로 씹혀지기는 했다.
‘젠장할…….’
쩝쩝!
흑색 빵을 스프에 찍어 먹으니 그래도 어느 정도 중독성이 있었기에, 현은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먹었다.
그렇게 현이 멀건 스프와 딱딱한 돌빵(?)을 먹고 있을 때였다. 그의 옆자리로 누군가 다가왔다.
“21십인대 소속 로터인가?”
현이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말한 자를 보았다. 묵직한 인상에 터질 듯한 근육을 가진, 한마디로 우람한 허우대를 가진 사내가 서 있었다.
“예, 맞습니다. 21십인대 로터입니다.”
현이 맞다고 수긍하자, 우람한 근육을 가진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판을 식탁에 내린 뒤 자리에 앉았다.
“난 아스니아일세. 21십인대의 대장이지.”
푸훅!
현의 입가에 들어가 있는 흑색 빵과 스프가 마주앉은 21십인대장에게로 흩뿌려졌다. 당황해서였다. 어떻게 자신을 찾았단 말인가?
“죄, 죄송합니다.”
아무튼 현은 최대한 겁에 질린(?) 표정으로 십인대장에게 사죄의 말을 했다. 그에, 십인대장은 수건으로 현의 입에서 나온 건더기들을 닦고는 최대한 웃어 보였다.
“괜찮네. 뭐 그럴 수도 있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거나…….”
“아, 아닙니다!”
“뭐, 됐네.”
말을 마친 십인대장은 흑색 빵을 스프에 찍어 먹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니, 십인대장의 옆에 몇몇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십인대원들인가 보군.’
십인대의 대장 옆에 붙어 있는 이들이 같은 십인대원들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당연히 십인대원이라는 추측은 가능한 일이었다.
“로터입니다. 반갑습니다.”
미리 예측을 하고는 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자신을 아스니아라고 밝힌 십인대장의 옆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우람한 근육을 가진 사나이가 말했다.
“요놈 참 눈치는 100단일세. 말하지 않았는데도 알고? 반갑다. 난 아크니아다.”
“그러게 말이다. 와, 눈치 하나는 빠르구먼? 난 필스다.”
“아, 예. 전 로터입니다. 헤헤.”
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어리숙한 표정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현이 이러는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이곳은 앞서 말했듯 약육강식의 세계다. 언제 아군이 적이 될지 모르고 적이 아군이 될지 모른다.
이곳은 법도가 없다. 강함이 곧 법이다. 현은 최대한 어리숙한 표정으로 하여금 얼마나 오래갈진 모르지만 최대한 저들을 속일 생각이었다.
자존심? 이미 로터가 되기로 한 이상 버린 지 오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인의 자존심까지 버린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최대한 저들에게 자신이 강하지 않다는 인식을 시켜야만 했다. 그래야 저들은 ‘아, 이놈 그냥 평범한 놈이구나.’라고 생각하여 아무런 경계와 견제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뭐, 반갑다. 난 스물여덟 살이고, 이 친구도 스물여덟 살이야. 그리고 이 친구는 스물네 살이지. 그리고 우리 둘은 쌍둥이다.”
아스니아가 흑색 빵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아크니아와 필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자신과 아크니아가 쌍둥이란 사실도 밝혔다.
“그렇군요. 쌍둥이끼리 전쟁터에 나오다니…… 흔치 않은 일이군요.”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 집안은 우리 말고도 남자가 많아서 괜찮아. 우리가 죽는다면 다른 형제들이 있으니까.”
잠시 회상에 잠긴 표정을 하는 듯한 아스니아였지만 다시 빵을 우물우물거리기 시작했다.
“행정관께 듣기로 네놈은 저번 샨트 평원의 국지전에서 살아남았다고 들었는데 정말이냐?”
아스니아의 물음이었다. 이는 이미 현의 기억 속에 있는 내용인지라 거짓말을 할 것도 없었다. 머릿속에 기억된 내용을 말하면 되니 말이다.
“예, 정말 죽을 뻔했습니다. 창과 칼, 그리고 화살이 난무하는데……. 어유, 지금 생각해도 오금이 저립니다.”
“처녀 전투였냐?”
아스니아 대신 아크니아가 물었다. 아무래도 어려 보이는 로터의 외모에 신병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아…… 예,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현을 보고는 이번엔 필스가 말했다.
“그럼 그때 겪은 일 좀 말해 줘라. 어떻게 살아남았냐? 그런 정보는 모두 공유해야 하는 거다.”
필스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로터가 입을 연 것은 긴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총 2천여 명이 벌이는 전투였습니다. 제가 있던 부대는 평소와 다름없이 경계를 철저히 하며 성책 위에서 근무를 서고 있었죠. 한데 웬걸? 갑자기 저 앞에서 불빛이 일렁이더라는 겁니다. 당시 경비를 서던 저와 동료들은 창을 곤두세우고 암호를 대라고 했지만, 그들은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말하더군요. ‘우리 공자님께서 매우 심심하시단다! 레노 왕국 놈들아 어디 용기라는 것이 있다면 샨트 평원으로 나와 보거라!’라고 말이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말을 우리 천인대의 대장님이 들으셨는데, 대장님은 바로 천인대를 꾸려서 샨트 평원으로 향했습죠. 그리고 벌어진 결과는…… 뭐, 아시다시피 대패죠.”
당시 샨트 전투는 현의 말대로 대패했다.
레노 왕국의 천인대의 병사들 중 총 구백칠십의 사상자가 나왔고, 멀쩡한 이들은 겨우 삼십에 불과할 뿐이었다.
반면,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기억하는 바로는 적국의 천인대들은 얼마간의 피해를 입지 않은 걸로 기억했다. 하니 대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구나…… 그래도 거기서 살아남다니,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모양인데?”
필스가 팔짱을 끼고 묻자, 현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실력을 알려 봐야 좋을 게 없다.
자고로 무인은 하수와 고수 말고 다른 두 종류로 나뉜다. 자신의 실력을 모두 드러내는 자, 드러내지 않는 자.
현은 후자에 속했다.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는 것은 위급한 상황이 올 때나, 전우가 위험에 처했을 때 드러내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무위가 뛰어나다고 떠벌렸는데, 알고 보니 이곳에서 자신의 실력은 알량한 정도로 취급받는다면 그만큼 쪽팔린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