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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정말 웬 고기냐? 진짜로 이곳에 온 뒤로 고기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아스니아가 침을 질질 흘리며 말하자, 현이 머리를 매만지면서 말했다.
“아니, 그냥 죽어 있었다니까요. 헤헤.”
“야, 그건 그렇고 손질은 어떻게 한 거냐? 설마 답답이 니가 했냐?”
필스의 예리한 질문에 잠시 흠칫한 현이었지만, 빠져나갈 방도는 무궁무진했다.
“아, 제가 말 안 했어요? 저희 마을은 사냥꾼 마을이었다니까요?”
필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현이 저번에 사냥꾼 마을 출신이었다고 말한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여어, 답답이에게도 이런 면모가 있었다니…… 대단한 걸? 아무튼 고맙다. 오랜만에 고기다운 고기를 먹어보겠네. 흐흐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현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는 필스였다. 그건 다른 이들도 다르지 않았는데, 탄테 마저 그랬다. 아마도 여기 오고 나서 사 먹는 것 빼고는 고기를 먹어 본 게 오랜만이라 그럴 것이다.
고기가 어느 정도 익기 시작하자, 너나 할 것 없이 그들은 마구마구 고기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냠냠, 쩝쩝.
누가 보면 걸신이라도 들린 것 같았는데, 열 명이다 보니 멧돼지 한 마리가 동이 나는 것은 금세였다.
필스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쩝, 더 없냐?”
“보시다시피요. 다음에 또 발견하면 해 드릴게요.”
필스가 현의 말을 듣고는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들어가자 만약 우리 빈 막사를 보면 우리 모두를 싸잡아서 탈영병으로 생각할지도 몰라.”
필스의 말에 다른 이들도 전적으로 동감하는지, 엉덩이를 탁탁 털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시기가 약 한 달간 지속되었다. 국지전 양상의 전투 또한 없었다.
하지만 이건, 진정한 전투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일 뿐이었다.
“휴우…….”
아스니아가 한숨을 내쉬며 막사 밖에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는 듯 보인다.
“말을 해야 되냐 말아야 되나…….”
그가 고민을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전투 때문이었다.
그래, 전투. 자신을 어느 병사가 불러 백인대장에게 찾아가 보니, 백인대장이 전면전이 머지않았단다. 다행이란 점은 그의 부대들이 요인을 호위하듯 감싸, 선봉에는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새 마칸타스 대륙의 여러 국가들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기에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제아무리 요인, 즉 지휘관들을 호위하는 곳에 선다곤 하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진다면 진영은 호위, 선봉, 후방 따로 없이 난전으로 들어설 것이 분명했다.
걱정이 되긴 했지만,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건 군율이었다. 하루 전에 병사들에게 마음을 다잡고 장비를 정비할 시간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피곤에 쌓인 정신을 맑게 하여 다음 날 전투에 임할 때 되도록 바른 정신을 가지고 전투에 임하게 만들려는, 군율이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면 군율을 어기는 것이기에 아스니아는 눈을 질끈 감고 막사의 천막을 걷었다.
살며시 눈을 떠 보니 모든 대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거기엔 오랜만에 고기를 먹게 해 준, 조금 답답하긴 하지만 썩 마음에 드는 신병도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였지만, 심호흡을 한 뒤 전대원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전투가 있을 것 같다.”
그에 필스가 투덜거린다.
“아, 씨팔. 평화롭다더니 이런 것 때문이었어?아, 썅!”
본래는 상관의 앞에서 욕을 하면 안 되지만, 이럴 때에는 예외였다. 울고 싶은 것은 아스니아도 마찬가지니 말이다. 뭐, 그렇다고 백인대장 앞에서 욕하면 처형당할 수도 있지만…….
“네 맘 이해한다, 필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동안 많이 쉬었잖냐.”
아스니아의 설득하는 듯한 말에 욕을 하며 투덜거리던 필스 또한 잠잠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묵묵하고 신중한 성격을 가지고 있던 탄테가 물었다.
“그래, 전면전이라든가 국지전이라던가?”
“전면전이 될 것 같답니다.”
아스니아의 말에 탄테가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 그럼 그 수가 얼마나 될 것 같수?”
케일이 물었다. 아마, 양쪽의 전면전을 치르는 수를 말하는 것 같았다.
“얼핏 듣기로 1만씩 2만이 될 것 같더군…….”
아스니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른 이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양반인 것이다. 심할 경우는 5만 대 5만, 총 10만이 한꺼번에 전투를 치른 적도 있었다. 뭐, 전투의 정도는 10만이 더 쉽긴 할 것이다. 그 수가 매우 많아 선봉에만 서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수 있으니…….
“선봉에 선다고 했수, 중군에 선다고 했수?”
“다행인 점은 중군에 선다고 했다.”
아스니아의 말에 모두가 다시 한 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휘관이 웅집한 중앙이라면 비교적 안전할 것이다.
“전투는 역시나 내일이겠지?”
탄테의 물음에 아스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푹 쉬고, 장비를 점검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모두 오늘은 푹 쉬고 내일 힘내서 전투에 임하자.”
2. 싱거운 첫 전투, 그리고 검투장
한편, 현은 긴장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른 이들은 대부분이 코를 곯고 자는 것 같았지만, 자신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저들은 모두 전쟁을 겪은 이들이다. 하지만 자신은? 자신은 아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따라 검을 연마하긴 했지만, 단연코 진검 승부 같은 것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위험하다는 아버지의 반대 때문이었다.
한데 내일 전투에 나가면 어떻게 되든 사람을 베게 될 것이다. 사람인 이상 여간 마음 쓰이지 않는 일이라 할 수 없었다.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현이 막사 밖에 있는 작은 바위 덩어리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여러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죽음, 배신, 살인…….
자신이 눈먼 화살이나, 창칼에 죽는다면? 아군이 적인 줄 알고 창칼을 찔러 넣는다면? 자신이 적을 베어 넘긴다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젠장할…….’
사실 전에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곳은 지구가 아니니 말이다. 지구가 아니고, 약육강식의 세계라 생각하니 그때는 마음이 편했고,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라면 당당하게 그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전투가 코앞에 다가오자 떨리는 가슴과 오만가지 잡생각이 드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검이나 쓰기로 마음먹었다.
십인대로 들어오며 아스니아가 창과 칼, 방패를 주었는데 칼과 방패는 마지막 무기이고 일단은 창을 들고 싸운단다. 그리고 투창을 하거나 그걸로 일단 첫 단추를 매긴다고 했다. 그 다음은 방패와 칼을 들고 전투에 임한다나 뭐라나…….
아무튼 멧돼지 고기를 선물한 이후, 아스니아가 아니 정확히는 아스니아가 동료들에게 물어 돈을 조금씩 모아 현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현재 현은 그들을 매우 감사히, 소중한 존재들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 달이라는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꽤나 많은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자리에서 일어난 현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창과 칼을 생각하자 다시 전투가 임박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서인지, 다리가 후들거린 것 같았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죽인 뒤에, 현이 막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과 칼, 방패는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막사 안으로 들어간 현이 자신의 장비를 들고 밖의 작은 공터로 향했다.
“일단 창던지기부터 해 보자.”
창던지기는 자신이 없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전장에 나선 이상 무슨 일이라도 해야만 했다.
아니, 그래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자신의 동료들이 위급한 상황에 빠졌을 때 다가갈 수 없다면 투창을 해서라도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창대의 중앙에서 조금 뒤로 쏠린 부분을 현이 움켜잡았다. 그리고 왼발을 앞으로 가져가 대며 있는 힘껏 창을 내던졌다.
목표는 나무였다.
파악!
운이 좋았음인지, 본래 실력이 있는 것인지 창이 작은 떨림과 함께 나무에 박혔다.
그 뒤로도 현은 꽤나 긴 시간을 투창 연습을 했고, 투창 연습을 한 뒤에는 칼과 방패를 이용한 공격과 방어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방패를 들고 하는 대전은 처음이니 말이다.
다음 날.
역시 꿈이 아니었다. 내심 이 모든 일이 다시금 꿈이길, 하는 바람으로 잠들었던 현이었지만 꿈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생생한, 모든 것이 느껴지는 현실 그 자체였다.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난 현에게 아스니아가 말을 걸어왔다.
“어제 바깥에서 기합 소리가 들리던데, 답답이 너였냐?”
“아, 아니요. 기합 소리라뇨? 전 여기서 대장님과 같이 잤잖아요.”
현이 손사래까지 치면서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아스니아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에이, 우리 사이에 뭘 그래, 그냥 전투를 앞두고 겁나서 좀 휘둘렀다고 하면 돼. 크크큭.”
“조금 휘둘렀어요…… 마음을 잡을 수가 없어서…….”
“하하핫! 그래, 그래. 우리 모두 처음엔 그랬다 욘석아! 걱정 마라, 이번 전투는 우리 모두 살아남을 거야. 중군에 편입되었으니…….”
“그럴까요?”
“그러엄! 너는 이 대장님 옆에 바싹 붙어 있어라. 이 대장님이 널 지켜 주마, 크하핫!”
그때, 아크니아가 검대로 아스니아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지랄하고 있네. 네놈 옆에 있다간 죽기 십상이지. 막내들은 이 형님에게 붙어 있어라.”
아크니아가 허리에 손을 떡 하니 올려놓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막내란 로터와 동갑인 게르비안과 람스였다.
“형 옆에 붙어 있으면 더 위험할 것 같은데…….”
아크니아의 말에 십인대의 진짜 막내인 람스가 훼를 쳤다. 그에, 아크니아가 람스에게 다가가 헤드록을 걸기 시작한다.
“이놈이, 뭐라고? 다시 말해 봐라.”
“켁켁! 아, 아니 형 옆에 있으면 살아날 수 있다구요. 켁켁! 좀 놔요!”
우람한 아크니아의 근육에 둘러싸인 가냘픈 람스가 소리치자, 그제야 목에 건 팔을 풀어내는 아크니아였다.
“까불고 있어. 그건 그렇고 답답아, 이 형 옆에만 있어라. 형이 전투의 화신이 무엇인지 보여 줄 테니. 하하하하!”
현의 입가에 왠지 모르지만 미소가 걸렸다. 모두들 전쟁을 앞두고 있지만, 자신을 달래 주고 있었다.
팀의 막내인 람스조차도…….
‘고맙습니다.’
본래 1만 대 1만의 전투라던 전면전은 어찌 된 일인지 그 수가 불어나 2만 대 2만, 총 4만이 맞붙는 전투로 변했다.
그에 여러 병사들이 투덜거렸지만, 눈을 부릅뜬 기사들 때문에 그들 앞에선 내색할 수 없었다.
“젠장, 그나저나 좆 됐군. 사람이 많다면 후퇴하다가 아군에 짓밟혀 뒈질 수도 있는데 말이야. 퉤!”
진군을 하는 도중 현의 옆 부대에 있는 얼굴에 길게 검상이 아로 새겨진 사내가 침을 뱉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제발 후퇴 명령만 안 떨어졌으면, 아니 신병 놈들이 후퇴 명령에 냅다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지만 않았으면 좋겠구먼.”
얼굴에 흉터가 있는 사내의 말에 옆에서 같이 행군하던 이가 말을 되받았다. 잠시 그들을 쳐다보던 현이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힘든 싸움이 될 것 같네…….’
전투장은 다름 아닌 샨트 평원이었다. 지형을 말하자면 멀리는 절벽이 나 있어 양쪽 최고 지휘관들이 올라가 바라볼 수 있게끔 나 있었고, 무성한 잡초들과 넓은 땅 떵어리로 인해서 다른 전술은 불가하고, 오로지 정석된 전술만 사용할 수 있어, 힘 대 힘을 겨루기엔 이곳이 제격인 것 같았다.
뿌우우―
그때 뿔고둥 소리가 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보아하니 적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나 보다.
“적군이 눈앞에 있다! 모두 침착하라!”
병사들을 독려하는 기사들의 고함 소리가 진군하는 행렬 사이사이로 울려 퍼졌다.
이들의 병과를 소개하자면, 친위대, 기사, 기병, 중보병, 보병, 경보병, 중궁병, 경궁병, 징집병 등으로 나눌 수 있었다. 친위대는 다름 아닌 주요 요인들을 호위하는 것으로, 사령관이나 높은 직위의 사람들은 적군의 지휘관들과 함께 절벽 위에서 사태를 관망한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낮은 직급의,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들은 전장에서 직접 병사들을 지휘해야 했기에, 따로 사령관이 친위대를 붙여 주었다. 친위대라고 별게 아니라 실력 있는 병사나 기사들 중 차출되는 것이었다. 뭐, 병사들이 차출되는 경우는 거의, 아니 아예 없지만…….
각설하고, 기사는 알다시피 기사 작위를 받은 이들을 일컫는다. 중보병은 말 그대로 중장비를 모두 착용한 보병, 보병은 저번에 현을 구해 주었던(?) 흉갑정도에 투구만 착용한 이들을 일컫고 경보병은 가죽 갑옷을 입은 이들을 일컫는다.
중궁병과 경궁병은 거의 똑같은 장비를 착용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다만, 경궁병은 활과 화살, 그리고 짧은 70cm 정도의 작은 단검밖에 없는데 비해, 중궁병은 어느 정도 장비를 착용하기도 했고, 등 뒤에 화살뿐만이 아닌, 방패와 숏소드가 배치되어 있었다.
징집병은 말 그대로 징집되어서 온 자들인데, 포로들 중에서 뽑거나, 본국에서 농노들을 데려다가 화살받이로 쓰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 행렬을 보자면 1열이 징집병, 2열이 궁병, 3열이 기사들, 4열이 보병들인데 징집병들을 화살받이로 내세운 뒤, 그들을 인간 방패로 삼아 아군의 궁병들이 공세를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사정거리가 다다랐을 때 궁병들은 좌우로 빠르게 흩어져 기사들과 기병들이 달려 나갈 틈을 내어 주고, 기사들이 돌격한다. 그 뒤를 보병을 비롯한 창병 등, 보병들이 뒤따라 전투를 마감 짓는다.
따지고 보면 궁병들이 제일 편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편제된 군제에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지휘했고, 사이사이 꽤 많은 기사들이 포진하여 명령 없이 후퇴하지 못하게 사기를 돋우었다.
지금 현은 4열, 마지막 열이라고 볼 순 있었지만, 중앙에 있는 지휘관들을 호위하기 위해 그들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아스니아 말로는 잘된 일이라고 한다. 지휘관들 옆에 있으면 죽을 일이 거의 없으니까.
현이 고개를 돌려 보니 역시나 친위대들이 예의, 매서운 눈빛을 하고는 말을 몰고 있었다.
‘죽진 않겠구나.’
그들을 보니 그나마 떨리는 마음이 조금씩 주체가 되는 현이었다.
그렇게 현이 이곳의 편제와 지구의 중세군편제를 비교해 가며 전진하고 있을 때였다. 또다시 거대한 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뿌우우. 뿌우우.
둥! 둥! 둥!
이번엔 고동 소리뿐만이 아니라, 북소리까지 울려 퍼졌는데 징집병들에 대한 돌격 명령이었다.
징집병들은 고작 죽창 하나 들고 전장에 나서는데, 역시 그대로 화살받이었다. 아무튼 이들을 인간 방패막으로 삼고 궁병들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쉬시쉭!
수천의 궁병들이 쏘는 것이라 그런지, 일순간에 하늘이 잿빛 어둠에 휩싸이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쏴라! 저들은 고작 방패일 뿐이다. 상관치 말고 쏘아라!”
기사들은 말을 타고 궁병들을 독려했는데, 아군의 징집병들이 아직 있기에 망설이는 이들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같은 아군을 죽이긴 뭣할 테니까.
적군들 또한 이와 다를 바 없었는데, 역시 처음에 희생되는 것은 징집병들이었다.
“궁병들은 좌우로 흩어지라!”
그리고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화살을 쏴 대던 궁병들 사이로 한 노장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궁병들이 좌우로 촤라락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를 기사와 기병들이 들이닥쳤다.
“히야!”
상대편도 다르진 않았는데, 그들 또한 아군과 같이 군을 배치하고 지금은 기사들이 돌격해 나오는 중이었다.
“보병들은 무엇하는가! 어서 달려 나아가라!”
예의 그 노장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고, 보병들이 함성 소리와 함께 적진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젠장! 이봐, 로터. 잘 따라오라고. 이제부터 진짜라고. 이제 곧 난전이 벌어질 텐데 거기선 실수로 자빠지기라도 하는 날엔 바로 짓눌려져서 황천길이니까, 알간?”
필스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말하자 현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필스가 현의 앞에 있었고, 그 뒤를 람스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람스의 뒤에는 다른 부대원들이었고, 옆으로 줄줄이 부대원들이 같이 진격하고 있었다.
콰앙!
이곳에 화약이 있는 것도 아닐진대,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현이 달리는 도중 살펴보니, 기사들이 충돌한 것 같았다.
히히힝.
“죽어랏!”
채앵!
주인 잃은 말들이 구슬프게 우는 소리, 고통에 몸부림치는 말들이 현의 눈에 포착되었다. 그리고 말에서 낙마한 이들이 검 대 검으로 적을 베어 나가는 게 보이기도 했다.
치열한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정말 웬 고기냐? 진짜로 이곳에 온 뒤로 고기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아스니아가 침을 질질 흘리며 말하자, 현이 머리를 매만지면서 말했다.
“아니, 그냥 죽어 있었다니까요. 헤헤.”
“야, 그건 그렇고 손질은 어떻게 한 거냐? 설마 답답이 니가 했냐?”
필스의 예리한 질문에 잠시 흠칫한 현이었지만, 빠져나갈 방도는 무궁무진했다.
“아, 제가 말 안 했어요? 저희 마을은 사냥꾼 마을이었다니까요?”
필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현이 저번에 사냥꾼 마을 출신이었다고 말한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여어, 답답이에게도 이런 면모가 있었다니…… 대단한 걸? 아무튼 고맙다. 오랜만에 고기다운 고기를 먹어보겠네. 흐흐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현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는 필스였다. 그건 다른 이들도 다르지 않았는데, 탄테 마저 그랬다. 아마도 여기 오고 나서 사 먹는 것 빼고는 고기를 먹어 본 게 오랜만이라 그럴 것이다.
고기가 어느 정도 익기 시작하자, 너나 할 것 없이 그들은 마구마구 고기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냠냠, 쩝쩝.
누가 보면 걸신이라도 들린 것 같았는데, 열 명이다 보니 멧돼지 한 마리가 동이 나는 것은 금세였다.
필스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쩝, 더 없냐?”
“보시다시피요. 다음에 또 발견하면 해 드릴게요.”
필스가 현의 말을 듣고는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들어가자 만약 우리 빈 막사를 보면 우리 모두를 싸잡아서 탈영병으로 생각할지도 몰라.”
필스의 말에 다른 이들도 전적으로 동감하는지, 엉덩이를 탁탁 털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시기가 약 한 달간 지속되었다. 국지전 양상의 전투 또한 없었다.
하지만 이건, 진정한 전투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일 뿐이었다.
“휴우…….”
아스니아가 한숨을 내쉬며 막사 밖에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는 듯 보인다.
“말을 해야 되냐 말아야 되나…….”
그가 고민을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전투 때문이었다.
그래, 전투. 자신을 어느 병사가 불러 백인대장에게 찾아가 보니, 백인대장이 전면전이 머지않았단다. 다행이란 점은 그의 부대들이 요인을 호위하듯 감싸, 선봉에는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새 마칸타스 대륙의 여러 국가들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기에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제아무리 요인, 즉 지휘관들을 호위하는 곳에 선다곤 하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진다면 진영은 호위, 선봉, 후방 따로 없이 난전으로 들어설 것이 분명했다.
걱정이 되긴 했지만,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건 군율이었다. 하루 전에 병사들에게 마음을 다잡고 장비를 정비할 시간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피곤에 쌓인 정신을 맑게 하여 다음 날 전투에 임할 때 되도록 바른 정신을 가지고 전투에 임하게 만들려는, 군율이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면 군율을 어기는 것이기에 아스니아는 눈을 질끈 감고 막사의 천막을 걷었다.
살며시 눈을 떠 보니 모든 대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거기엔 오랜만에 고기를 먹게 해 준, 조금 답답하긴 하지만 썩 마음에 드는 신병도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였지만, 심호흡을 한 뒤 전대원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전투가 있을 것 같다.”
그에 필스가 투덜거린다.
“아, 씨팔. 평화롭다더니 이런 것 때문이었어?아, 썅!”
본래는 상관의 앞에서 욕을 하면 안 되지만, 이럴 때에는 예외였다. 울고 싶은 것은 아스니아도 마찬가지니 말이다. 뭐, 그렇다고 백인대장 앞에서 욕하면 처형당할 수도 있지만…….
“네 맘 이해한다, 필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동안 많이 쉬었잖냐.”
아스니아의 설득하는 듯한 말에 욕을 하며 투덜거리던 필스 또한 잠잠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묵묵하고 신중한 성격을 가지고 있던 탄테가 물었다.
“그래, 전면전이라든가 국지전이라던가?”
“전면전이 될 것 같답니다.”
아스니아의 말에 탄테가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 그럼 그 수가 얼마나 될 것 같수?”
케일이 물었다. 아마, 양쪽의 전면전을 치르는 수를 말하는 것 같았다.
“얼핏 듣기로 1만씩 2만이 될 것 같더군…….”
아스니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른 이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양반인 것이다. 심할 경우는 5만 대 5만, 총 10만이 한꺼번에 전투를 치른 적도 있었다. 뭐, 전투의 정도는 10만이 더 쉽긴 할 것이다. 그 수가 매우 많아 선봉에만 서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수 있으니…….
“선봉에 선다고 했수, 중군에 선다고 했수?”
“다행인 점은 중군에 선다고 했다.”
아스니아의 말에 모두가 다시 한 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휘관이 웅집한 중앙이라면 비교적 안전할 것이다.
“전투는 역시나 내일이겠지?”
탄테의 물음에 아스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푹 쉬고, 장비를 점검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모두 오늘은 푹 쉬고 내일 힘내서 전투에 임하자.”
2. 싱거운 첫 전투, 그리고 검투장
한편, 현은 긴장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른 이들은 대부분이 코를 곯고 자는 것 같았지만, 자신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저들은 모두 전쟁을 겪은 이들이다. 하지만 자신은? 자신은 아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따라 검을 연마하긴 했지만, 단연코 진검 승부 같은 것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위험하다는 아버지의 반대 때문이었다.
한데 내일 전투에 나가면 어떻게 되든 사람을 베게 될 것이다. 사람인 이상 여간 마음 쓰이지 않는 일이라 할 수 없었다.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현이 막사 밖에 있는 작은 바위 덩어리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여러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죽음, 배신, 살인…….
자신이 눈먼 화살이나, 창칼에 죽는다면? 아군이 적인 줄 알고 창칼을 찔러 넣는다면? 자신이 적을 베어 넘긴다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젠장할…….’
사실 전에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곳은 지구가 아니니 말이다. 지구가 아니고, 약육강식의 세계라 생각하니 그때는 마음이 편했고,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라면 당당하게 그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전투가 코앞에 다가오자 떨리는 가슴과 오만가지 잡생각이 드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검이나 쓰기로 마음먹었다.
십인대로 들어오며 아스니아가 창과 칼, 방패를 주었는데 칼과 방패는 마지막 무기이고 일단은 창을 들고 싸운단다. 그리고 투창을 하거나 그걸로 일단 첫 단추를 매긴다고 했다. 그 다음은 방패와 칼을 들고 전투에 임한다나 뭐라나…….
아무튼 멧돼지 고기를 선물한 이후, 아스니아가 아니 정확히는 아스니아가 동료들에게 물어 돈을 조금씩 모아 현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현재 현은 그들을 매우 감사히, 소중한 존재들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 달이라는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꽤나 많은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자리에서 일어난 현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창과 칼을 생각하자 다시 전투가 임박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서인지, 다리가 후들거린 것 같았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죽인 뒤에, 현이 막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과 칼, 방패는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막사 안으로 들어간 현이 자신의 장비를 들고 밖의 작은 공터로 향했다.
“일단 창던지기부터 해 보자.”
창던지기는 자신이 없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전장에 나선 이상 무슨 일이라도 해야만 했다.
아니, 그래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자신의 동료들이 위급한 상황에 빠졌을 때 다가갈 수 없다면 투창을 해서라도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창대의 중앙에서 조금 뒤로 쏠린 부분을 현이 움켜잡았다. 그리고 왼발을 앞으로 가져가 대며 있는 힘껏 창을 내던졌다.
목표는 나무였다.
파악!
운이 좋았음인지, 본래 실력이 있는 것인지 창이 작은 떨림과 함께 나무에 박혔다.
그 뒤로도 현은 꽤나 긴 시간을 투창 연습을 했고, 투창 연습을 한 뒤에는 칼과 방패를 이용한 공격과 방어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방패를 들고 하는 대전은 처음이니 말이다.
다음 날.
역시 꿈이 아니었다. 내심 이 모든 일이 다시금 꿈이길, 하는 바람으로 잠들었던 현이었지만 꿈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생생한, 모든 것이 느껴지는 현실 그 자체였다.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난 현에게 아스니아가 말을 걸어왔다.
“어제 바깥에서 기합 소리가 들리던데, 답답이 너였냐?”
“아, 아니요. 기합 소리라뇨? 전 여기서 대장님과 같이 잤잖아요.”
현이 손사래까지 치면서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아스니아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에이, 우리 사이에 뭘 그래, 그냥 전투를 앞두고 겁나서 좀 휘둘렀다고 하면 돼. 크크큭.”
“조금 휘둘렀어요…… 마음을 잡을 수가 없어서…….”
“하하핫! 그래, 그래. 우리 모두 처음엔 그랬다 욘석아! 걱정 마라, 이번 전투는 우리 모두 살아남을 거야. 중군에 편입되었으니…….”
“그럴까요?”
“그러엄! 너는 이 대장님 옆에 바싹 붙어 있어라. 이 대장님이 널 지켜 주마, 크하핫!”
그때, 아크니아가 검대로 아스니아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지랄하고 있네. 네놈 옆에 있다간 죽기 십상이지. 막내들은 이 형님에게 붙어 있어라.”
아크니아가 허리에 손을 떡 하니 올려놓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막내란 로터와 동갑인 게르비안과 람스였다.
“형 옆에 붙어 있으면 더 위험할 것 같은데…….”
아크니아의 말에 십인대의 진짜 막내인 람스가 훼를 쳤다. 그에, 아크니아가 람스에게 다가가 헤드록을 걸기 시작한다.
“이놈이, 뭐라고? 다시 말해 봐라.”
“켁켁! 아, 아니 형 옆에 있으면 살아날 수 있다구요. 켁켁! 좀 놔요!”
우람한 아크니아의 근육에 둘러싸인 가냘픈 람스가 소리치자, 그제야 목에 건 팔을 풀어내는 아크니아였다.
“까불고 있어. 그건 그렇고 답답아, 이 형 옆에만 있어라. 형이 전투의 화신이 무엇인지 보여 줄 테니. 하하하하!”
현의 입가에 왠지 모르지만 미소가 걸렸다. 모두들 전쟁을 앞두고 있지만, 자신을 달래 주고 있었다.
팀의 막내인 람스조차도…….
‘고맙습니다.’
본래 1만 대 1만의 전투라던 전면전은 어찌 된 일인지 그 수가 불어나 2만 대 2만, 총 4만이 맞붙는 전투로 변했다.
그에 여러 병사들이 투덜거렸지만, 눈을 부릅뜬 기사들 때문에 그들 앞에선 내색할 수 없었다.
“젠장, 그나저나 좆 됐군. 사람이 많다면 후퇴하다가 아군에 짓밟혀 뒈질 수도 있는데 말이야. 퉤!”
진군을 하는 도중 현의 옆 부대에 있는 얼굴에 길게 검상이 아로 새겨진 사내가 침을 뱉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제발 후퇴 명령만 안 떨어졌으면, 아니 신병 놈들이 후퇴 명령에 냅다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지만 않았으면 좋겠구먼.”
얼굴에 흉터가 있는 사내의 말에 옆에서 같이 행군하던 이가 말을 되받았다. 잠시 그들을 쳐다보던 현이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힘든 싸움이 될 것 같네…….’
전투장은 다름 아닌 샨트 평원이었다. 지형을 말하자면 멀리는 절벽이 나 있어 양쪽 최고 지휘관들이 올라가 바라볼 수 있게끔 나 있었고, 무성한 잡초들과 넓은 땅 떵어리로 인해서 다른 전술은 불가하고, 오로지 정석된 전술만 사용할 수 있어, 힘 대 힘을 겨루기엔 이곳이 제격인 것 같았다.
뿌우우―
그때 뿔고둥 소리가 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보아하니 적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나 보다.
“적군이 눈앞에 있다! 모두 침착하라!”
병사들을 독려하는 기사들의 고함 소리가 진군하는 행렬 사이사이로 울려 퍼졌다.
이들의 병과를 소개하자면, 친위대, 기사, 기병, 중보병, 보병, 경보병, 중궁병, 경궁병, 징집병 등으로 나눌 수 있었다. 친위대는 다름 아닌 주요 요인들을 호위하는 것으로, 사령관이나 높은 직위의 사람들은 적군의 지휘관들과 함께 절벽 위에서 사태를 관망한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낮은 직급의,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들은 전장에서 직접 병사들을 지휘해야 했기에, 따로 사령관이 친위대를 붙여 주었다. 친위대라고 별게 아니라 실력 있는 병사나 기사들 중 차출되는 것이었다. 뭐, 병사들이 차출되는 경우는 거의, 아니 아예 없지만…….
각설하고, 기사는 알다시피 기사 작위를 받은 이들을 일컫는다. 중보병은 말 그대로 중장비를 모두 착용한 보병, 보병은 저번에 현을 구해 주었던(?) 흉갑정도에 투구만 착용한 이들을 일컫고 경보병은 가죽 갑옷을 입은 이들을 일컫는다.
중궁병과 경궁병은 거의 똑같은 장비를 착용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다만, 경궁병은 활과 화살, 그리고 짧은 70cm 정도의 작은 단검밖에 없는데 비해, 중궁병은 어느 정도 장비를 착용하기도 했고, 등 뒤에 화살뿐만이 아닌, 방패와 숏소드가 배치되어 있었다.
징집병은 말 그대로 징집되어서 온 자들인데, 포로들 중에서 뽑거나, 본국에서 농노들을 데려다가 화살받이로 쓰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 행렬을 보자면 1열이 징집병, 2열이 궁병, 3열이 기사들, 4열이 보병들인데 징집병들을 화살받이로 내세운 뒤, 그들을 인간 방패로 삼아 아군의 궁병들이 공세를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사정거리가 다다랐을 때 궁병들은 좌우로 빠르게 흩어져 기사들과 기병들이 달려 나갈 틈을 내어 주고, 기사들이 돌격한다. 그 뒤를 보병을 비롯한 창병 등, 보병들이 뒤따라 전투를 마감 짓는다.
따지고 보면 궁병들이 제일 편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편제된 군제에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지휘했고, 사이사이 꽤 많은 기사들이 포진하여 명령 없이 후퇴하지 못하게 사기를 돋우었다.
지금 현은 4열, 마지막 열이라고 볼 순 있었지만, 중앙에 있는 지휘관들을 호위하기 위해 그들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아스니아 말로는 잘된 일이라고 한다. 지휘관들 옆에 있으면 죽을 일이 거의 없으니까.
현이 고개를 돌려 보니 역시나 친위대들이 예의, 매서운 눈빛을 하고는 말을 몰고 있었다.
‘죽진 않겠구나.’
그들을 보니 그나마 떨리는 마음이 조금씩 주체가 되는 현이었다.
그렇게 현이 이곳의 편제와 지구의 중세군편제를 비교해 가며 전진하고 있을 때였다. 또다시 거대한 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뿌우우. 뿌우우.
둥! 둥! 둥!
이번엔 고동 소리뿐만이 아니라, 북소리까지 울려 퍼졌는데 징집병들에 대한 돌격 명령이었다.
징집병들은 고작 죽창 하나 들고 전장에 나서는데, 역시 그대로 화살받이었다. 아무튼 이들을 인간 방패막으로 삼고 궁병들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쉬시쉭!
수천의 궁병들이 쏘는 것이라 그런지, 일순간에 하늘이 잿빛 어둠에 휩싸이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쏴라! 저들은 고작 방패일 뿐이다. 상관치 말고 쏘아라!”
기사들은 말을 타고 궁병들을 독려했는데, 아군의 징집병들이 아직 있기에 망설이는 이들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같은 아군을 죽이긴 뭣할 테니까.
적군들 또한 이와 다를 바 없었는데, 역시 처음에 희생되는 것은 징집병들이었다.
“궁병들은 좌우로 흩어지라!”
그리고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화살을 쏴 대던 궁병들 사이로 한 노장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궁병들이 좌우로 촤라락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를 기사와 기병들이 들이닥쳤다.
“히야!”
상대편도 다르진 않았는데, 그들 또한 아군과 같이 군을 배치하고 지금은 기사들이 돌격해 나오는 중이었다.
“보병들은 무엇하는가! 어서 달려 나아가라!”
예의 그 노장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고, 보병들이 함성 소리와 함께 적진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젠장! 이봐, 로터. 잘 따라오라고. 이제부터 진짜라고. 이제 곧 난전이 벌어질 텐데 거기선 실수로 자빠지기라도 하는 날엔 바로 짓눌려져서 황천길이니까, 알간?”
필스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말하자 현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필스가 현의 앞에 있었고, 그 뒤를 람스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람스의 뒤에는 다른 부대원들이었고, 옆으로 줄줄이 부대원들이 같이 진격하고 있었다.
콰앙!
이곳에 화약이 있는 것도 아닐진대,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현이 달리는 도중 살펴보니, 기사들이 충돌한 것 같았다.
히히힝.
“죽어랏!”
채앵!
주인 잃은 말들이 구슬프게 우는 소리, 고통에 몸부림치는 말들이 현의 눈에 포착되었다. 그리고 말에서 낙마한 이들이 검 대 검으로 적을 베어 나가는 게 보이기도 했다.
치열한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