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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4. 전사대전
다음 날.
댕! 댕! 댕!
종소리가 요란하게 레노 왕국 진영 전체에 울려 퍼지고, 그 요새 위에 곱게 뻗은 망루의 망루병들이 다급히 소리친다.
“적군이다, 적군이 나타났다. 모두 장비를 갖춰 입고 전선으로 이동하라!”
“모두 장비를 갖춰 입고 부대별로 열을 맞춰 전선으로 이동하라!”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성루에서 망을 보던 이들이 적이 나타났다며, 소리를 치자 단잠에 빠져 있던 레노 왕국의 모든 병사들이 잠에서 깨어나, ‘이게 무슨 소리야?’ 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막사 밖으로 기어 나왔다.
이에 성루에 있던 병사들이 ‘적이 나타났으니 무장을 하고 전선에 나와라!’라고 다시 한 번 소리쳤고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는지, 모든 이들이 완전무장을 하고는 전선으로 향했다.
물론 21십인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개새끼들이 쳐들어오고 지랄이야, 지랄은! 전투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아스니아가 욕지거리를 입에 담으며 부츠를 신자, 그의 말을 이번엔 케일이 받았다.
“그러게 대장. 오랜만에……는 아니고 아무튼 어젯밤에 회포 좀 풀었다고 해서 좋아라 했는데, 이리 뒤통수를 칠 줄이야!”
“모두 튼튼하게 갑옷을 입도록 해라! 성루병이 당황한 채 소리를 지르는 걸 보니, 꽤나 많은 수가 온 것 같으니.”
당황하며 갑주를 챙겨 입는 대원들과 다르게 역시나 나이를 헛먹은 게 아니라는 걸 말해주듯 탄테는 침착히 부대원들을 타일렀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기에 양 지휘관들이 합의하지도 않았는데 쳐들어온 거지?”
갑주를 입던 도중 혼자 중얼거리는 람스의 말에 모두가 멈칫한다.
그랬다.
양 지휘관들의 합의가 있어야 전투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지휘관들이 전투 날짜를 잡아 놓으면 그건 곧 군단에서 사단으로, 사단에서 천인대로, 천인대에서 백인대로, 백인대에서 십인대로 하달된다.
한데 십인대장인 아스니아는 아무런 소리도 못 들었다.
“젠장! 람스 이 녀석아. 사람 마음 졸이게 왜 그딴 소리를 하고 지랄이야.”
“아, 혼자 중얼거린 거죠.”
케일의 말에 람스가 목을 빳빳이 들고 대꾸한다.
“모두 다 준비했으면 무기 잘 챙겨 들고 나와. 아! 그리고 로터, 넌 창을 잘 쓴댔지? 옜다.”
덥석!
아스니아가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멋스러운 맛이 없는 것도 아닌, 길이 2m 정도의 창을 현에게 던져 주었다.
“이게 뭐예요?”
창을 내려다보며 되묻는 현에게 아스니아는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여자한테도 선물 안 하는데, 남자인 너한테 하게 될 줄이야……. 그거 어제 사창가 가서 돈 쓰다 남은 거다. 너와 탄테 형님이 방에 안 들어가서 마담이 1골드 50실버 내어 주더라. 비싼 건 아니니 부담 갖지 마라.”
“오오, 뭐냐. 이야, 근사한데!”
케일이 모두 챙겨 입었는지 끼어들었다. 거기에 더해, 필스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 깐족댔다.
“우오와, 이 정도면 어제 락센을 잡은 무위를 21십인대원들에게 보여 줄 수도 있겠는 걸? 야, 로터. 너의 그 화려한 창술로 저 개새끼들 다 쓸어버려. 알간?”
필스가 눈을 부라리며 하는 말에 현이 피식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모두 무장 완비했다면 전선으로 나가자.”
“후하!”
***
전선.
전선은 다른 게 아니라, 진영의 성문밖에 있는 곳인데 현재 프라마티뉴 연합군 소속 레노 왕국 병사들은 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성 밖으로 나가 있었다.
전투가 일어난다면 성안에서 싸우는 것이 좋겠으나, 지금 온 놈들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전령이오! 길을 비켜 주시오!”
풀 플레이트 아머를 갖춘 기사 하나가 소리를 치자, 성문 위와 성 바깥쪽에서 진을 치며 그들을 노려보던 이들 중 하나가 외친다.
“무슨 전령이 이리도 많이 온단 말인가?”
그의 말에 모두들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그것도 모두 풀 플레이트 아머를 갖춰 입은 기사들처럼 보이는데, 지휘관들께서 허락은 하신건가?!”
그들은 절대 길을 내어 줄 수 없다는 듯 완강히 버티고 섰다. 그런 그들을 보며 눈앞에 있는 베니티아 왕국 기사들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합의된 게 아니오. 하지만 레노 왕국 사령관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왔소이다. 그대들은 잘 듣고 전해 주시오. 이건 우리 베니티아 왕국의 왕세자 저하께서 보내시는 것이오!”
베니티아 왕국이란 다름 아닌 레노 왕국과 맞대고 있는 이들로서, 프라마티뉴 대륙처럼 여러 곳에 연합군을 주둔시켰는데 그들 또한 이곳, 다키스 지방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은 군대였다.
“나, 사밤 폰 베니티아는 그대들, 용감한 레노 왕국의 기사들을 존경하는 바이다. ……해서 전사대전을 신청하는 바이다. 사령관께서는 즉흥적인 나의 제안에 기분 나빠하지 말길 바란다.”
기사는 왕세자 저하가 보내는 서찰을 다 읽었다는 듯, 다시 곱게 접어 품에 갈무리했다. 서찰을 다 읽은 기사의 말 뒤엔 레노 왕국의 진영은 조금 어수선했는데, 바로 사밤이 청한 전사대전 때문이었다.
전사대전은 다름 아닌 기사들 끼리 맞붙는 대결인데 기사의 계급이 생겨나기 전의 계급인 전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사대전을 한다는 것은 전쟁을 끝마치고 싶다는 암묵적인 의사였다.
해서 병사들은 모두 저마다의 동료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중엔 로터와 21십인대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는 건가? 이야아! 드디어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겠다!!”
람스가 좋아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속단하긴 이르다. 전사대전은 전에도 몇 번 있었으니까.”
로터의 기억에는 없었지만, 몇 번 있긴 있었나 보다.
전사대전은 각각 진영에서 추천받은 기사들이나, 자진해서 나와 타국의 기사들과 맞붙는 것인데, 수는 거의 열 명대 열 명으로 개인전과 단체전으로 나뉜다.
하지만 단체전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개인전만 한다고 보면 된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부사령관을 모셔오겠다.”
일개 전령 따위에게 사령관을 데려오는 건 격이 맞질 않기에 부사령관을 데려오겠다고 외치는 레노 왕국 진영의 지휘관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지휘관의 말에 병사 몇이 뛰어가더니 부사령관을 데리고 왔다.
부사령관은 다름 아닌 피리오 폰 레노로, 레노 왕국의 제2왕자였다.
아무튼 그가 오자 미리 준비되어 있던 막사로 들어갔다.
“그래, 전사대전을 청한다고?”
피리오의 물음에 서찰을 읽었던 기사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여기서 밉보여 봤자였다.
“예, 저하. 사밤 저하께오서 직접 청하셨나이다. 간곡히 청하건데, 부디 받아 주시옵소서.”
기사는 사밤이 부탁했다는 말을 강조했다.
“흐음…… 근데 기사들을 이렇게 많이 데려온 연유는 무엇인가? 우리 측 병사들이 일순간 혼란에 휩싸였다네.”
“그 점은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하옵나이다. 하오나, 왕세자 저하께오서 귀측의 지휘관들께오서 인정을 하신다오면 바로 하고자 하셔서 말이옵니다.”
기사의 말에 피리오는 얼마 나지도 않은 수염을 만지작만지작거리며 골몰히 생각했다.
‘우리 측 군세는 현재 십오만 이상, 하지만 저쪽은 이십만 정도. 요새를 등에 지고 있는 우리가 유리하긴 하나 이렇게 된 것, 차라리 전쟁을 끝내 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싶은데…….’
수십만이 넘는 군세를 데리고 왔었던 레노 왕국이었지만, 이미 200여 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본토에서는 야만족들의 침입에 꽤나 골치 아팠던 적도 있었기에, 피리오는 차라리 전쟁을 끝내 버리자는 식으로 생각했다.
아닌게 아니라, 자신들이 주둔한 다키스 지방을 제외하고 다른 왕, 공국들이 주둔한 몇몇 지방은 지금 그들과 맞닿은 마칸타스 대륙의 국가들과 휴전을 맺었다고 피리오도 들었기 때문이다.
“좋다. 내 일단 사령관께 말씀드리겠다. 기사들은 물리지 마라. 곧 전사대전을 치르게 될 터이니.”
기사들을 물리지 말라는 것을 보아하니 사령관을 설득할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아무리 사령관이라지만 레노 왕국의 제2왕자인 피리오의 말을 무시할 간 큰 사령관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원정군 사령관이라면 대부분 중앙 정계에서 토사구팽 당하거나, 버림받아 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좌천되어 오는 곳이 이곳, 마칸타스라는 것이다.
아무튼 피리오는 밖으로 나아가 성안으로 들어갔다.
사령관을 만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사령관 또한 미리 성문 위에서 사태를 관망하는 중이었기에 바로 만날 수 있었고, 사령관에게 설득 아닌 설득을 하여 전사대전을 인정받았다.
사령관 또한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마치고 본토로 돌아가고 싶어 했기에 인정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양측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비교적 기사들을 선택하고 온 베니티아 측은 덜했지만, 잠결에 나온 레노 왕국은 좀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소란스러움도 잠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양측의 지휘관들이 샨트 평원으로 나아갔고, 그곳엔 거대한 경기장이 만들어졌다.
뭐, 경기장이라 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원형의 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주위로 커다란 동그라미 형태로 베니티아와 레노 왕국 병사들이 둘러쌌다.
“로터, 누가 이길 것 같나?”
못 잔 잠을 다시 가서 자려 하던 현이었지만, 아스니아가 전사대전은 정말 보기 힘든 것이라며 현을 끌고 왔고 찌푸린 채 전사대전을 감상하려는 현에게 탄테가 말을 걸어 왔다.
“잘 모르겠습니다. 갑주를 착용해서인지 기사들의 골격 또한 제대로 보여지지 않고, 아직 제가 저들의 실력을 봤었던 것도 아니라서요.”
“흐음…… 그럴 만도 하겠지. 아아, 그리고 저자 보이지?”
탄테가 손가락을 가리켜 베니티아 왕국 측의 기사 중 한 명을 가리켰다.
“아, 네. 보입니다. 한데, 다른 기사들과는 다르게 창을 들고 있군요?”
현의 물음에 탄테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저자가 바로, 모라이트 데 사라하네.”
“모, 모라이트요? 저자가요? 하지만 너무 젊어 보이는 걸요?”
현의 물음은 당연했다.
투구 사이로 드러난 모라이트는 이제 20대 초중반이 되어 보일 법한 외모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뭇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준수한 외모의 사나이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지. 그래서 더 그 이름이 널리 퍼진 게야. 오오, 잡담은 그만하지. 시작하려는 모양이군.”
탄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니티아 왕국 측에서 한 기사가 나왔다.
“나는 레이첼 가문의 포나스다! 나와 싸울 레노 왕국 기사는 어디 있는가?”
포나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기 이번에는 레노 왕국 측 기사가 그를 향해 다가갔다.
“반갑소. 나는 밀레 가문의 데니온이라 하오. 부디 정정당당한 결투를 하길 바라겠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외다. 합!”
자신을 포나스라 밝힌 기사가 검을 고쳐 잡았다. 그에 데니온 또한 얼굴 가득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채 검을 다잡았다.
“나부터 가겠소!”
선공은 포나스였다.
포나스는 약 5m가량 떨어져 있는 데니온을 향해 도약했는데,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서도 약 2m가량을 도약하는 걸 보니 꽤나 숙련된 기사임이 분명했다.
그에 반해 데니온은 이제 막 기사가 된 초급 기사인 듯, 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티엥.
그래도 오른팔에 끼고 있던 원형 방패로 데니온이 포나스의 공격을 막았다. 포나스는 자신의 공격이 막히자 이번엔 찌르기로 데니온의 복부를 공략했다.
“햐압!”
빠르게 쇄도하여 날아오는 검을 데니온이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이번에도 방패 덕으로 막을 수 있었다.
터엉.
이에 포나스는 몸을 살짝 비틀어 데니온의 측면, 즉 오른쪽으로 이동하더니 바로 검을 찔러 넣었다.
“허억!”
하지만 살짝 몸을 비틀어 피했는지라 포나스의 검은 데니온의 갑옷을 슬쩍 긁히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쥐새끼 같군!”
그에 열이 받았던 모양인지 포나스가 그를 ‘쥐새끼’로 비유했다.
자신을 쥐새끼라 비유해서 열이 받아서인지 데니온이 공세를 취했다.
“쥐새끼의 공격을 받아 보거라!”
도약하듯 날아서 내려찍는 데니온의 공격이었지만,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게다가 이 모든 게 계략이었다는 걸 말해 주듯 포나스의 얼굴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 것이 보였다.
데니온의 뜀박질과 동시에 포나스는 잠시 자세를 굽히더니 그대로 두 어깨로 데니온의 허리 부분을 받았다.
갑옷에 둘러싸여 고통은 없었지만 포나스의 힘이 꽤나 강한지라 데니온은 그대로 뒤로 밀려나갔고 급기야는 뒤로 벌러덩 넘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포나스가 데니온의 목에 검을 겨눴다.
“져, 졌다.”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야 항복이란 말을 입에 담자, 포나스는 그가 가소로운지 코웃음을 치고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 레노 왕국 측의 기사와 병사들 몇이 다가와 그를 부축해 나갔고, 베니티아 왕국 측에서는 또 다른 기사가 나왔다. 그에 분하다는 듯 이번에는 꽤나 건장한 레노 왕국 측의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베니티아 왕국 측은 아마도 휴전을 맺으려는 것이 아니라 왕국 측의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이번 전사대전을 주선 한 모양이다.
그리고 레노 왕국 측은 이래도 휴전, 저래도 휴전이 될 테니 이름 없는 기사를 보낸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경기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결과는 8:0으로 8승 모두가 베니티아 왕국 측의 승리였다.
그에 부사령관인 피리오 폰 레노는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갔다는 걸 깨닫고는 사령관인 라시온 드 파베니아 후작에게 다가가 말했다.
“사령관 각하,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내 보기에 저자들은 휴전을 맺을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사령관이라는 직함이 괜스레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듯 사령관 또한 이미 그 사실은 간파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것 같소. 아무래도 저자들은 휴전을 맺으려는 것이 아니라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그 기세로 하여금 다시 우리를 칠 계략인 모양이외다.”
사령관의 말이 일리가 있는지라 부사령관인 피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쯤에서 전사대전을 물리면…….”
피리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라시온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대전을 중지한다면 우리 측의 사기는 지하의 신이 있는 곳까지 떨어질 것이 분명하오. 지금도 보시오. 축 처져 있는 아군 측의 병사들을…….”
피리오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그간 전사대전에 몰두하여 보이지 않았던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하나같이 어깨가 축 처져 있는 모습이었다.
거기에 살짝 고개를 돌리자 베니티아 왕국 측이 보였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레노 왕국 측의 기사들을 욕하고 있었다.
“우우우.”
“레노 왕국엔 기사가 없는 모양이다. 하하핫!”
“그러게, 모라이트 경이 나서기도 전에 다 쓰러지다니, 이건 뭐 역시 프라마티뉴 대륙의 제국 기사들이 와도 짚단 베듯 쓰러지겠는 걸?”
“캬하하하하!”
본래 전사대전의 취지가 암묵적인 휴전을 맺는 것도 있지만, 저렇게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경우의 것도 있다. 하지만 피리오와 라시온은 하루빨리 본토로 돌아가고 싶은지라 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약한 자들만 보내어 대충 대전을 끝마무리 지으려 했는데, 저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필시 베니티아 왕국 측의 사기를 북돋으려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아까는 보이지 않았는데, 사라하 제국의 기사인 모라이트 또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라하 제국이 아무리 베니티아 왕국의 옆에 있어, 쉽사리 기사들과 병사들을 지원한다고는 하지만 일개 전사대전에서까지 모라이트가 모습을 보일 이유는 없었다.
이리된 이상 확실해졌다.
“비겁한 놈들…….”
이가 저절로 갈려 왔다.
본래 전사대전에서는 쉽게 흥분하는 관객들, 즉 병사들을 각 진영의 백인대장들이나 그에 맞는 직책에 있는 이들이 잘 통솔하여 욕설이 난무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4. 전사대전
다음 날.
댕! 댕! 댕!
종소리가 요란하게 레노 왕국 진영 전체에 울려 퍼지고, 그 요새 위에 곱게 뻗은 망루의 망루병들이 다급히 소리친다.
“적군이다, 적군이 나타났다. 모두 장비를 갖춰 입고 전선으로 이동하라!”
“모두 장비를 갖춰 입고 부대별로 열을 맞춰 전선으로 이동하라!”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성루에서 망을 보던 이들이 적이 나타났다며, 소리를 치자 단잠에 빠져 있던 레노 왕국의 모든 병사들이 잠에서 깨어나, ‘이게 무슨 소리야?’ 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막사 밖으로 기어 나왔다.
이에 성루에 있던 병사들이 ‘적이 나타났으니 무장을 하고 전선에 나와라!’라고 다시 한 번 소리쳤고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는지, 모든 이들이 완전무장을 하고는 전선으로 향했다.
물론 21십인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개새끼들이 쳐들어오고 지랄이야, 지랄은! 전투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아스니아가 욕지거리를 입에 담으며 부츠를 신자, 그의 말을 이번엔 케일이 받았다.
“그러게 대장. 오랜만에……는 아니고 아무튼 어젯밤에 회포 좀 풀었다고 해서 좋아라 했는데, 이리 뒤통수를 칠 줄이야!”
“모두 튼튼하게 갑옷을 입도록 해라! 성루병이 당황한 채 소리를 지르는 걸 보니, 꽤나 많은 수가 온 것 같으니.”
당황하며 갑주를 챙겨 입는 대원들과 다르게 역시나 나이를 헛먹은 게 아니라는 걸 말해주듯 탄테는 침착히 부대원들을 타일렀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기에 양 지휘관들이 합의하지도 않았는데 쳐들어온 거지?”
갑주를 입던 도중 혼자 중얼거리는 람스의 말에 모두가 멈칫한다.
그랬다.
양 지휘관들의 합의가 있어야 전투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지휘관들이 전투 날짜를 잡아 놓으면 그건 곧 군단에서 사단으로, 사단에서 천인대로, 천인대에서 백인대로, 백인대에서 십인대로 하달된다.
한데 십인대장인 아스니아는 아무런 소리도 못 들었다.
“젠장! 람스 이 녀석아. 사람 마음 졸이게 왜 그딴 소리를 하고 지랄이야.”
“아, 혼자 중얼거린 거죠.”
케일의 말에 람스가 목을 빳빳이 들고 대꾸한다.
“모두 다 준비했으면 무기 잘 챙겨 들고 나와. 아! 그리고 로터, 넌 창을 잘 쓴댔지? 옜다.”
덥석!
아스니아가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멋스러운 맛이 없는 것도 아닌, 길이 2m 정도의 창을 현에게 던져 주었다.
“이게 뭐예요?”
창을 내려다보며 되묻는 현에게 아스니아는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여자한테도 선물 안 하는데, 남자인 너한테 하게 될 줄이야……. 그거 어제 사창가 가서 돈 쓰다 남은 거다. 너와 탄테 형님이 방에 안 들어가서 마담이 1골드 50실버 내어 주더라. 비싼 건 아니니 부담 갖지 마라.”
“오오, 뭐냐. 이야, 근사한데!”
케일이 모두 챙겨 입었는지 끼어들었다. 거기에 더해, 필스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 깐족댔다.
“우오와, 이 정도면 어제 락센을 잡은 무위를 21십인대원들에게 보여 줄 수도 있겠는 걸? 야, 로터. 너의 그 화려한 창술로 저 개새끼들 다 쓸어버려. 알간?”
필스가 눈을 부라리며 하는 말에 현이 피식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모두 무장 완비했다면 전선으로 나가자.”
“후하!”
***
전선.
전선은 다른 게 아니라, 진영의 성문밖에 있는 곳인데 현재 프라마티뉴 연합군 소속 레노 왕국 병사들은 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성 밖으로 나가 있었다.
전투가 일어난다면 성안에서 싸우는 것이 좋겠으나, 지금 온 놈들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전령이오! 길을 비켜 주시오!”
풀 플레이트 아머를 갖춘 기사 하나가 소리를 치자, 성문 위와 성 바깥쪽에서 진을 치며 그들을 노려보던 이들 중 하나가 외친다.
“무슨 전령이 이리도 많이 온단 말인가?”
그의 말에 모두들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그것도 모두 풀 플레이트 아머를 갖춰 입은 기사들처럼 보이는데, 지휘관들께서 허락은 하신건가?!”
그들은 절대 길을 내어 줄 수 없다는 듯 완강히 버티고 섰다. 그런 그들을 보며 눈앞에 있는 베니티아 왕국 기사들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합의된 게 아니오. 하지만 레노 왕국 사령관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왔소이다. 그대들은 잘 듣고 전해 주시오. 이건 우리 베니티아 왕국의 왕세자 저하께서 보내시는 것이오!”
베니티아 왕국이란 다름 아닌 레노 왕국과 맞대고 있는 이들로서, 프라마티뉴 대륙처럼 여러 곳에 연합군을 주둔시켰는데 그들 또한 이곳, 다키스 지방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은 군대였다.
“나, 사밤 폰 베니티아는 그대들, 용감한 레노 왕국의 기사들을 존경하는 바이다. ……해서 전사대전을 신청하는 바이다. 사령관께서는 즉흥적인 나의 제안에 기분 나빠하지 말길 바란다.”
기사는 왕세자 저하가 보내는 서찰을 다 읽었다는 듯, 다시 곱게 접어 품에 갈무리했다. 서찰을 다 읽은 기사의 말 뒤엔 레노 왕국의 진영은 조금 어수선했는데, 바로 사밤이 청한 전사대전 때문이었다.
전사대전은 다름 아닌 기사들 끼리 맞붙는 대결인데 기사의 계급이 생겨나기 전의 계급인 전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사대전을 한다는 것은 전쟁을 끝마치고 싶다는 암묵적인 의사였다.
해서 병사들은 모두 저마다의 동료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중엔 로터와 21십인대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는 건가? 이야아! 드디어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겠다!!”
람스가 좋아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속단하긴 이르다. 전사대전은 전에도 몇 번 있었으니까.”
로터의 기억에는 없었지만, 몇 번 있긴 있었나 보다.
전사대전은 각각 진영에서 추천받은 기사들이나, 자진해서 나와 타국의 기사들과 맞붙는 것인데, 수는 거의 열 명대 열 명으로 개인전과 단체전으로 나뉜다.
하지만 단체전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개인전만 한다고 보면 된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부사령관을 모셔오겠다.”
일개 전령 따위에게 사령관을 데려오는 건 격이 맞질 않기에 부사령관을 데려오겠다고 외치는 레노 왕국 진영의 지휘관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지휘관의 말에 병사 몇이 뛰어가더니 부사령관을 데리고 왔다.
부사령관은 다름 아닌 피리오 폰 레노로, 레노 왕국의 제2왕자였다.
아무튼 그가 오자 미리 준비되어 있던 막사로 들어갔다.
“그래, 전사대전을 청한다고?”
피리오의 물음에 서찰을 읽었던 기사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여기서 밉보여 봤자였다.
“예, 저하. 사밤 저하께오서 직접 청하셨나이다. 간곡히 청하건데, 부디 받아 주시옵소서.”
기사는 사밤이 부탁했다는 말을 강조했다.
“흐음…… 근데 기사들을 이렇게 많이 데려온 연유는 무엇인가? 우리 측 병사들이 일순간 혼란에 휩싸였다네.”
“그 점은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하옵나이다. 하오나, 왕세자 저하께오서 귀측의 지휘관들께오서 인정을 하신다오면 바로 하고자 하셔서 말이옵니다.”
기사의 말에 피리오는 얼마 나지도 않은 수염을 만지작만지작거리며 골몰히 생각했다.
‘우리 측 군세는 현재 십오만 이상, 하지만 저쪽은 이십만 정도. 요새를 등에 지고 있는 우리가 유리하긴 하나 이렇게 된 것, 차라리 전쟁을 끝내 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싶은데…….’
수십만이 넘는 군세를 데리고 왔었던 레노 왕국이었지만, 이미 200여 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본토에서는 야만족들의 침입에 꽤나 골치 아팠던 적도 있었기에, 피리오는 차라리 전쟁을 끝내 버리자는 식으로 생각했다.
아닌게 아니라, 자신들이 주둔한 다키스 지방을 제외하고 다른 왕, 공국들이 주둔한 몇몇 지방은 지금 그들과 맞닿은 마칸타스 대륙의 국가들과 휴전을 맺었다고 피리오도 들었기 때문이다.
“좋다. 내 일단 사령관께 말씀드리겠다. 기사들은 물리지 마라. 곧 전사대전을 치르게 될 터이니.”
기사들을 물리지 말라는 것을 보아하니 사령관을 설득할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아무리 사령관이라지만 레노 왕국의 제2왕자인 피리오의 말을 무시할 간 큰 사령관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원정군 사령관이라면 대부분 중앙 정계에서 토사구팽 당하거나, 버림받아 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좌천되어 오는 곳이 이곳, 마칸타스라는 것이다.
아무튼 피리오는 밖으로 나아가 성안으로 들어갔다.
사령관을 만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사령관 또한 미리 성문 위에서 사태를 관망하는 중이었기에 바로 만날 수 있었고, 사령관에게 설득 아닌 설득을 하여 전사대전을 인정받았다.
사령관 또한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마치고 본토로 돌아가고 싶어 했기에 인정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양측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비교적 기사들을 선택하고 온 베니티아 측은 덜했지만, 잠결에 나온 레노 왕국은 좀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소란스러움도 잠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양측의 지휘관들이 샨트 평원으로 나아갔고, 그곳엔 거대한 경기장이 만들어졌다.
뭐, 경기장이라 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원형의 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주위로 커다란 동그라미 형태로 베니티아와 레노 왕국 병사들이 둘러쌌다.
“로터, 누가 이길 것 같나?”
못 잔 잠을 다시 가서 자려 하던 현이었지만, 아스니아가 전사대전은 정말 보기 힘든 것이라며 현을 끌고 왔고 찌푸린 채 전사대전을 감상하려는 현에게 탄테가 말을 걸어 왔다.
“잘 모르겠습니다. 갑주를 착용해서인지 기사들의 골격 또한 제대로 보여지지 않고, 아직 제가 저들의 실력을 봤었던 것도 아니라서요.”
“흐음…… 그럴 만도 하겠지. 아아, 그리고 저자 보이지?”
탄테가 손가락을 가리켜 베니티아 왕국 측의 기사 중 한 명을 가리켰다.
“아, 네. 보입니다. 한데, 다른 기사들과는 다르게 창을 들고 있군요?”
현의 물음에 탄테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저자가 바로, 모라이트 데 사라하네.”
“모, 모라이트요? 저자가요? 하지만 너무 젊어 보이는 걸요?”
현의 물음은 당연했다.
투구 사이로 드러난 모라이트는 이제 20대 초중반이 되어 보일 법한 외모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뭇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준수한 외모의 사나이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지. 그래서 더 그 이름이 널리 퍼진 게야. 오오, 잡담은 그만하지. 시작하려는 모양이군.”
탄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니티아 왕국 측에서 한 기사가 나왔다.
“나는 레이첼 가문의 포나스다! 나와 싸울 레노 왕국 기사는 어디 있는가?”
포나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기 이번에는 레노 왕국 측 기사가 그를 향해 다가갔다.
“반갑소. 나는 밀레 가문의 데니온이라 하오. 부디 정정당당한 결투를 하길 바라겠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외다. 합!”
자신을 포나스라 밝힌 기사가 검을 고쳐 잡았다. 그에 데니온 또한 얼굴 가득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채 검을 다잡았다.
“나부터 가겠소!”
선공은 포나스였다.
포나스는 약 5m가량 떨어져 있는 데니온을 향해 도약했는데,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서도 약 2m가량을 도약하는 걸 보니 꽤나 숙련된 기사임이 분명했다.
그에 반해 데니온은 이제 막 기사가 된 초급 기사인 듯, 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티엥.
그래도 오른팔에 끼고 있던 원형 방패로 데니온이 포나스의 공격을 막았다. 포나스는 자신의 공격이 막히자 이번엔 찌르기로 데니온의 복부를 공략했다.
“햐압!”
빠르게 쇄도하여 날아오는 검을 데니온이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이번에도 방패 덕으로 막을 수 있었다.
터엉.
이에 포나스는 몸을 살짝 비틀어 데니온의 측면, 즉 오른쪽으로 이동하더니 바로 검을 찔러 넣었다.
“허억!”
하지만 살짝 몸을 비틀어 피했는지라 포나스의 검은 데니온의 갑옷을 슬쩍 긁히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쥐새끼 같군!”
그에 열이 받았던 모양인지 포나스가 그를 ‘쥐새끼’로 비유했다.
자신을 쥐새끼라 비유해서 열이 받아서인지 데니온이 공세를 취했다.
“쥐새끼의 공격을 받아 보거라!”
도약하듯 날아서 내려찍는 데니온의 공격이었지만,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게다가 이 모든 게 계략이었다는 걸 말해 주듯 포나스의 얼굴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 것이 보였다.
데니온의 뜀박질과 동시에 포나스는 잠시 자세를 굽히더니 그대로 두 어깨로 데니온의 허리 부분을 받았다.
갑옷에 둘러싸여 고통은 없었지만 포나스의 힘이 꽤나 강한지라 데니온은 그대로 뒤로 밀려나갔고 급기야는 뒤로 벌러덩 넘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포나스가 데니온의 목에 검을 겨눴다.
“져, 졌다.”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야 항복이란 말을 입에 담자, 포나스는 그가 가소로운지 코웃음을 치고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 레노 왕국 측의 기사와 병사들 몇이 다가와 그를 부축해 나갔고, 베니티아 왕국 측에서는 또 다른 기사가 나왔다. 그에 분하다는 듯 이번에는 꽤나 건장한 레노 왕국 측의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베니티아 왕국 측은 아마도 휴전을 맺으려는 것이 아니라 왕국 측의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이번 전사대전을 주선 한 모양이다.
그리고 레노 왕국 측은 이래도 휴전, 저래도 휴전이 될 테니 이름 없는 기사를 보낸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경기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결과는 8:0으로 8승 모두가 베니티아 왕국 측의 승리였다.
그에 부사령관인 피리오 폰 레노는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갔다는 걸 깨닫고는 사령관인 라시온 드 파베니아 후작에게 다가가 말했다.
“사령관 각하,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내 보기에 저자들은 휴전을 맺을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사령관이라는 직함이 괜스레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듯 사령관 또한 이미 그 사실은 간파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것 같소. 아무래도 저자들은 휴전을 맺으려는 것이 아니라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그 기세로 하여금 다시 우리를 칠 계략인 모양이외다.”
사령관의 말이 일리가 있는지라 부사령관인 피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쯤에서 전사대전을 물리면…….”
피리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라시온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대전을 중지한다면 우리 측의 사기는 지하의 신이 있는 곳까지 떨어질 것이 분명하오. 지금도 보시오. 축 처져 있는 아군 측의 병사들을…….”
피리오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그간 전사대전에 몰두하여 보이지 않았던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하나같이 어깨가 축 처져 있는 모습이었다.
거기에 살짝 고개를 돌리자 베니티아 왕국 측이 보였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레노 왕국 측의 기사들을 욕하고 있었다.
“우우우.”
“레노 왕국엔 기사가 없는 모양이다. 하하핫!”
“그러게, 모라이트 경이 나서기도 전에 다 쓰러지다니, 이건 뭐 역시 프라마티뉴 대륙의 제국 기사들이 와도 짚단 베듯 쓰러지겠는 걸?”
“캬하하하하!”
본래 전사대전의 취지가 암묵적인 휴전을 맺는 것도 있지만, 저렇게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경우의 것도 있다. 하지만 피리오와 라시온은 하루빨리 본토로 돌아가고 싶은지라 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약한 자들만 보내어 대충 대전을 끝마무리 지으려 했는데, 저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필시 베니티아 왕국 측의 사기를 북돋으려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아까는 보이지 않았는데, 사라하 제국의 기사인 모라이트 또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라하 제국이 아무리 베니티아 왕국의 옆에 있어, 쉽사리 기사들과 병사들을 지원한다고는 하지만 일개 전사대전에서까지 모라이트가 모습을 보일 이유는 없었다.
이리된 이상 확실해졌다.
“비겁한 놈들…….”
이가 저절로 갈려 왔다.
본래 전사대전에서는 쉽게 흥분하는 관객들, 즉 병사들을 각 진영의 백인대장들이나 그에 맞는 직책에 있는 이들이 잘 통솔하여 욕설이 난무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