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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5. 전사대전의 영웅, 로터!


이렇게 된 이상 현은 선공을 취해 빠르게 저 강아지 기사를 잡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바로 몸으로서 실천되었다.
“간다아!”
팟!
현의 몸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놀랍게도 현이 공중에서 180도 회전을 하는 게 아닌가?
중년 기사는 그에 좀 당황한 듯싶었지만, 나이를 헛먹은 게 아니라는 듯 방어를 취했고, 현은 그대로 창을 그어 베듯이 중년 기사의 어깨 부분을 향해 그대로 내려찍었다.
콰앙!
하지만 역시 방어를 취하고 있던 중년 기사의 방패에 쉽사리 막혔고, 창대의 울림에 의해 손이 찌르르 떨려 오는 현이었다.
“제법이다!”
제법이라는 말에 중년 기사가 감자 모양의 주먹을 현에게 내보였다.
“좆까.”
“기사가 맞는지 참으로 의심되는구나.”
“그래? 그럼 진정한 기사가 무엇인지, 내 일개 병사 따위인 네놈에게 필히 가르쳐 줄 의무가 있겠구나. 간다앗!”
중년 기사가 그대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검을 찔러 넣었는데, 로터는 창대의 가운데 부분으로 어렵지 않게 쳐 냈다.
티잉!
잠시 창대에 의해 튀어나간 검이었지만, 중년 기사는 당황하지 않고 다시금 내려쳤다.
하지만 이번엔 현이 창대의 뒷부분을 손으로 잡고 앞부분으로 창을 돌리듯 방어했기에 기사는 현과 같이 팔을 오른쪽으로 돌려야 했다.
그리고 거기서 중년 기사의 빈틈이 보였는지라, 현은 그걸 놓치지 않고 복부를 가격했다.
푸억!
단단한 갑옷인지라 별다른 충격은 없었는지 다시 검을 날리는 중년 기사였는데, 이미 늦었다.
현은 그의 공격을 간파하고는 몸을 숙여, 곧바로 중년 기사의 오른쪽에 위치해 바로 날카로운 창날로 중년 기사의 목을 노렸기 때문이다.
“항복하겠나?”
창날을 갖다 댄 뒤 현이 항복하겠냐고 묻자, 중년 기사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항복하겠다.”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은 곧이어 환호성으로 이어졌다.
“와아아아!!”
“로터! 로터! 로터! 로터! 로터!”
병사들이 로터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렀다.
로터는 그에 응답하듯 2m 길이의 창을 하늘 높이 뻗었다.
“와아아아아아!!”
사실 이들은 로터가 나선다고 해서 이긴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저 군중심리에 이끌려, 나설 자가 없을 때 누가 나선다는 것에 흥분해서 로터의 이름을 울부짖었던 것인데, 일이 이리 되자 그들 또한 놀랐을 것이다.
아무튼 동급의 병사들은 환호를 하고 있지만, 자신들도 당할까 두려워 나가지 못했던 중년 기사를 일개 병사인 로터가 잡자 기사들은 심기가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로터는 그들의 환호를 받으며 링에서 내려왔다. 아니, 내려오려고 했다.
“죽어!”
그런데 그때, 고개를 떨구고 항복을 자인했던 중년 기사가 비겁하게 현의 뒤를 노렸다.
중년인의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려던 현이었지만, 종아리 쪽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져, 돌릴 수가 없었다.
“크윽!”
그리고 몸을 돌렸을 땐 현의 다리를 베어서인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중년 기사가 서 있었다.
“방심하면 안 되지!”
콰앙!
중년 기사는 말을 하고 나서 바로 검을 내질렀는데, 아슬아슬하게 그가 노린 쪽은 다리여서인지 현이 몸을 살짝 비틀어 피할 수 있었다.
“비겁한 놈!”
“지랄 마라!”
중년 기사는 또다시 검을 내질렀다.
현이 피하려고 몸부림 쳤지만, 이미 한쪽 다리에 길게 검상이 나 있는지라, 몸의 움직임이 둔화되어 나머지 한쪽다리를 또 내어 주어야 했다.
“으윽!”
저절로 입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행이란 점은 아킬레스건을 베이진 않고, 허벅지 쪽을 스치듯 지나갔다는 것이다.
“오냐, 잘도 피하는구나. 그래, 이것도 한 번 피해 보거라!”
중년 기사가 검을 높게 들었다. 그리고 현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아니, 내려 치려고 할 때였다.
슈우욱!
베니티아 왕국 측에서 현의 창 길이와 같은 길이의 창이 쏘아져 나오더니 중년 기사의 가슴 어림을 뚫고 나왔다.
푸학!
중년 기사의 뚫린 가슴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려 베니티아 왕국 측을 쳐다보니, 그곳엔 젊은 기사 하나가 화가 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모, 모……모라……이트……경?”
중년 기사가 ‘왜?’라는 의문이 가득 담긴 눈초리를 한 채 죽어 갔다.
이미 꿰뚫린 창에 의해 가슴 부분이 뚫려 있었는데 거기에 더해 몸이 태풍에 벼 쓰러지듯 쓰러지자 창이 더욱 깊숙이 그의 가슴을 관통한 것이다.
양측 진영에서 정적이 흘렀다.
그렇지 않겠는가? 레노 왕국 측은 비열한 기사를 욕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는데, 베니티아 왕국 측에서 창이 날아와 그 비열한 중년 기사의 가슴을 뚫었으니 말이다.
당황스럽기는 베니티아 왕국 측 또한 레노 왕국 측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다름 아닌 중년 기사를 죽인 이가 무려, 무려! 모라이트였기 때문이다.
이미 당황한 나머지 베니티아 왕국 측의 사령관들을 위시한 지휘관들이 원형 경기장으로 뛰어왔고, 그건 레노 왕국의 측도 마찬가지였다.
“모라이트 경! 이게 무슨 짓이오!”
현을 향해 걸어 나가던 모라이트, 그를 향해 베니티아의 사령관이 호통을 친다.
그에 모라이트의 눈썹이 꿈틀, 하더니 옆 병사가 차고 있는 칼을 어느새 뽑아 들어 베니티아 사령관의 목에 겨누었다.
“닥쳐라! 기사도의 기 자도 모르는 녀석들이 무슨 전사대전을 청했단 말인가? 같은 편에 서 있던 나, 모라이트가 더 창피하구나!”
“하, 하지만…….”
사령관이 자신의 목에 겨눠진 검을 쳐다보며 말하자, 모라이트가 다시 한 번 호통을 쳤다.
“네 이놈! 참다 참다 못해 나온 나를, 감히 능멸하는 것이더냐? 지금 네놈은 이게 맞다고 생각하는가? 저 기사는 일개 병사 따위에게 진 것이 분해, 기사도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 거기다 그전에도 레노 왕국 측의 부사령관을 향해 모욕을 했다. 과연 누구의 잘못이 크다 할 수 있겠는가?”
“그, 그건…….”
“닥쳐라!”
움찔!
이미 죽어 버린 중년 기사를 두둔하려는 사령관의 말에 모라이트가 겨눠진 검을 더욱 힘주어 겨누자, 사령관의 목의 살이 살짝 찢어지며 붉은 피가 모라이트의 검을 적셨다.
그걸 보고 난 뒤, 모라이트는 본래 주인인 병사에게 다시 검을 돌려주고는 현을 향해 다가갔다.
“이름이 무엇인가?”
“로터입니다.”
“귀족인가?”
모라이트의 물음에 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당국의 기사들 앞에서 이런 행위를 했다면 바로 참수형에 처하겠지만, 상대는 타국 기사인데다가 지금 병사들이 분노에 치를 떠는 베니티아 왕국 측에 지원을 온 기사였기에 상관치 않았다.
“보시다시피 일개 병사 따위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말에 잠시 모라이트가 얼굴을 찌푸렸다.
“자네의 실력을 보아하니, 병사로 있을 만한 자는 아닌 것 같은데……. 혹여, 몰락한 귀족가의 후손인가?”
“모, 몰락한 귀족이요? 아뇨, 전 그냥 평민입니다.”
모라이트는 현을 몰락귀족의 후예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현은, 아니 로터는 평민이다. 성도 없는데 무슨 귀족이겠는가?
“그렇다면 창술은 어디서 배웠는가? 보아하니 조예가 깊어 보이던데.”
“뭐, 조예랄 것까지야……. 제가 살던 마을에서 배웠습니다.”
“자네의 고향에서 말인가?”
“예, 그곳에 대륙 간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신 마을 아저씨가 한 분계셨는데, 그분께 배웠습죠.”
청산유수와 같이 거짓말을 내뱉는 현이다.
“그래? 한 번 만나보고 싶군.”
“불가능합니다. 이미 돌아가셨거든요.”
“그렇군. 그나저나 다리는 괜찮은가? 깊은 검상인 걸로 보이는데.”
모라이트의 말에 신경을 끄고 있다가 갑작스레 생각해 내서인지 다리에 다시 화끈한 통증이 밀려왔다.
“괘, 괜찮습니다.”
“저놈은 비열한 놈이었네. 기사라는 작위를 하사받았음에는 그 의무와 책임을 충실히 해야 하는 것이거늘……. 저 녀석들도 마찬가지라네.”
모라이트가 고개를 슬쩍 돌려 방금까지 나온 베니티아 왕국 측의 기사들과 레노 왕국 측의 기사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 점에서 난 자네를 높이 사고 싶네.”
“네? 저, 저를요?”
“자네는 병사임에도 불구하고 기사 못지않은 역량과 기사도에 어긋나지 않은 자비로움을 가졌네. 물론 저자가 자네의 자비로움을 배반했지만…….”
현이 듣고만 있자, 이번에는 돌연 모라이트가 주먹을 말아 쥐고 하늘로 주먹을 번쩍 든 뒤, 이 주위에 있는 모든 병사들이 다 들리게끔 소리쳤다.
“그래서 나, 모라이트 데 사라하는 로터를 기사로 인정한다!”
기사!
기사로 인정한다는 모라이트의 말에 양측의 군영이 소란스러워졌다.
기사에게 기사로 인정받는 건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 아무리 기사가 기사도로 무장하고 있다 한들, 아까 보았듯 다수의 사람은 기사도를 지키지 않고 있었고 기사들도 사람인지라, 또 일개 평민 병사 따위에게 기사로 인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대는 나, 모라이트에게 인정받은 기사다. 알겠는가?”
모라이트의 압도적인 기세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현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모라이트가 이번엔 레노 왕국 측의 사령관을 쳐다보더니 소리쳤다.
“라시온 후작 각하! 나, 모라이트는 사라하 제국의 황족으로서, 또 창술의 대가인 모라이트라는 이름으로서, 로터를 기사로 인정했소이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지 기탄없이 말해 주시오!”
라시온 후작은 현재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모라이트! 사사로이는 사라하 제국의 방계 황족임과 동시에 자신과 동등한 후작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이자, 기사다. 그리고 그는 현재 마칸타스의 희망으로 불리고도 있었다.
그런 그가 아무리 기사 하나를 잡았다곤 하지만 일개 평민 병사를 기사로 인정하다니……. 하지만 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묻는 모라이트에게 대답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비록 저자가 적국인 사라하 제국의 귀족이자 기사이긴 하지만, 직접 싸운 적이 없었기에 악감정이 별로 없었고, 또 모라이트는 그도 마칸타스에서 존경하는 기사 중 하나였다.
“그대가 저 평민 병사 로터를 기사로 인정하는데 어찌 그대를 존경하는 나, 라시온 드 파베니아가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소? 나도 로터를 기사로 인정하는 바요!”
두둥!
로터와 레노 왕국 측의 병사들 모두가 둔기에 머리를 맞은 듯 어지러움을 느꼈다.
라시온 후작이 비록 좌천되어 이곳에 오긴 했지만, 그의 말 한마디면 이곳에선 생과 사를 넘나들 수 있는 것이다.
막말로 라시온 후작이 싫어하는 있다고 치자, 예를 들어 그는 10인대에 속했는데 후작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10인대를 선봉에 서게 하여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는 것이고, 백인대장이나 천인대장 등에게 뒷돈을 쑤셔 넣지 않아도 전장 수습을 할 수 있는 임무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라시온 후작은 로터를 기사로 인정한다고까지 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저 말은 기사로 인정했으니, 곧 기사 작위가 내려온다는 말과 동일하다.
기사 작위와 귀족위(자작위부터는 국왕만이 임명할 수 있다.)는 직계 왕족만 내릴 수 있는데, 이곳엔 제2왕자가 있다. 게다가 2왕자의 치욕을 로터가 씻겨 주기까지 했지 않은가?
그렇다면 열이면 열, 기사 작위에 임명되고도 남을 것이다.
“고맙소! 적국의 기사를 인정하다니, 그대는 군자 중의 군자요!”
“별말씀을…….”
모라이트가 다시 고개를 힐끔 돌려 왕자를 쳐다본다. 아마,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물음을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왕자는 그런 모라이트의 물음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그런고로, 그대와 창술로 대결을 겨뤄 보고 싶다. 받아 주겠는가?”
지금 현은 이 모든 게 황당 그 자체였다.
어찌 황당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가 이세계로 와서 귀족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다.
귀족? 당연히 좋지 않겠는가? 대한민국에서 본국검법을 비롯한 무예를 익힌 것만 빼면 평범한 시민과 다름없는 그가, 귀족이 된다면 사뭇 기분이 좋을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 또한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 공을 세우는 건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탐내 버리니 내버려 두고서라도 전쟁이 끝난 뒤 본토에 돌아가면 국왕이 1년에 한 번씩 주최하는 토너먼트에 참가해 기사 작위를 획득하려고 했었다.
한데 일이 너무 쉽게 풀려 나갔다. 아니, 쉽게 풀려 나간 게 아니라 이건 뭐 치트키를 쓰는 것과 진배없었다. 뜻하지 않는 기연이란 게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아무튼 모라이트의 자신과 한 번 붙어 보자는 말에 현은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 허락을 했다. 자신 또한 아스니아에게 모라이트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창을 쓰는 무인으로서 겨뤄 보고 싶긴 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시다시피 제 다리가 온전치 못합니다. 송구합니다만, 일정을 조금 미뤄도 되겠습니까?”
현의 말에 모라이트가 아차! 하는 생각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아, 미안하네. 내 호승심에 자네의 몸 상태를 깜빡했구먼.”
“죄송할 뿐입니다.”
현의 말에 모라이트가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 또한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이들이 있었다.
“승부를 거절하는 자에게 더 이상의 승부를 요청하지 않는 것도 기사도에 존재하네. 내, 잠시 창술을 쓰는 그대에게 간만의 호승심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구먼.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로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스니아와 필스가 뛰어왔다. 21십인대원들 모두가 뛰어나온다면 눈치를 받을 수도 있기에 두 사람만 나온 것 같다.
그들은 걱정하는 표정이 훤히 보일 정도로 로터의 다리를 살폈다.
“괜찮냐?”
필스의 말에 현은 답 없이 고개를 끄덕여 줬다. 모라이트의 말 덕에 갑작스레 다리의 통증이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저런 병신 새끼! 어떻게 기사라는 새끼가 지를 살려 준 놈을 뒤에서 기습을 하지? 개새끼!”
필스가 현을 부축하면서 쓰러진 중년 기사를 힐끔 바라보곤 욕을 한다. 하기야 필스의 말은 레노 왕국 병사들 모두가 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자, 가자.”
그나마 허벅지를 살짝 베인 오른발은 쓸 수 있었기에 아스니아와 필스는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현을 부축해 갈 수 있었다.
그때 모라이트의 목소리가 레노 왕국 측 병사들과 현에게 크게 울려 퍼졌다.
“이보게 로터, 조만간 찾아감세.”
모라이트의 말에 뒤를 돌아본 현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어째서 모라이트의 대결을 하자는 말을 듣고 통증이 사라진 건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도 모라이트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깊은 호승심음 느끼고 있었나 보다.
사람의 정신력은 매우 뛰어나기에, 때때로 불가사의한 일도 스스로 만들어 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