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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그렇게 현은 모라이트와는 다음을 기약하고 21십인대원들의 부축을 받아 성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기사들의 멸시하는 눈초리와 협박을 조금씩 듣긴 했지만 그저 웃어넘길 뿐이었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로터의 이름을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수많은 병사들을 뚫고 성안 의무실로 가려는데 한 기사가 찾아와서 간단한 치료만 받고 와서 부사령관을 찾으라고도 말했다.
현은 지금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기에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 기사를 보냈고, 그렇게 현은 21십인대원들과 의무실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반가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다.
“여어! 오랜만이군. 그나저나 또 다친 겐가?”
예전에 그 군의관이었던 것이다.
“아, 예…… 오랜만이시군요. 어쩌다 이렇게 됐습니다. 하하!”
아마 아직까지는 성안에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에끼, 이 사람아. 그러니 조심해야지 목숨이 어디 두 개씩이나 된다던가?”
“하하!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이들은 누구인가?”
군의관이 21십인대원들을 조심스레 묻자, 현은 그들을 같은 부대원이라고 소개했고, 차례차례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렇게 간단한 치료를 받았고, 동료들의 부축을 해 준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목발을 사서 직접 걸어 다녔다.

부사령관이 있는 곳은 성안에 있는 병영 중에서도 중앙에 자리한 곳이었는데, 사령관이 자리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거대하고도 화려했다.
“들어갔다 오겠습니다.”
현이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는 21십인대원들에게 말을 하고 사령관실로 들어갔다.
사령관실은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급한 용무가, 즉 타 지방에서 보내오는 전령이 아니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고 기사들 또한 확실한 신분이 있질 않다면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설사, 간단한 용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똑똑!
현이 나무로 된 사령관실의 문을 두들기자, 그곳에서 반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터인가? 어서 들어오게.”
사령관의 말을 듣고 문을 살며시 열어젖히자, 그곳엔 사령관과 부사령관 둘만이 자리해 있었다.
한 시간 전에 보았던 사람들이라, 가벼운 고갯짓으로 인사를 마무리 하고 사령관이 할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뜻밖에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사령관이 아닌, 부사령관이었다.
“먼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네.”
부사령관은, 아니 정확히 제2왕자는 이제 약관의 나이를 넘겼을 법한 외모였고, 그런대로 왕궁에 살고 있는 여자들을 깨나 울렸을 법한 외모의 사나이였다.
하지만 중년 기사에 의해 처참히 당해서인지, 얼굴 부분 부분에는 찢겨진 곳이 그의 준수한 외모를 반감시켰다.
“고맙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현이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하자, 부사령관, 피리오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아닐세. 사실 나는 호기심 비슷한, 아니지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길 수 있다는 어리석은 자신감 때문에 나간 것일세.”
“어, 어리석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셨습니다.”
위로하는 듯한 현의 말에 피리오가 자조적인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이렇게 된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단 말인가?”
“그, 그것이 아니오라…….”
“됐네, 자네를 심문하려는 것이 아니니. 아무튼 난 자네에게 깊은 감사를 하고 있네. 난 그 중년 기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 다른 기사가 그를 상대했을 때, 나는 그의 패턴을 잘 봐 왔고 그의 검로를 이미 꿰뚫었다고 생각했었네. 거기에 내가 나선다면 병사들의 사기도 북돋아질 것이라 생각하니, 훗. 그렇게 된 것이지…… 하지만 결과는 아주 치욕스러웠네. 나설 때부터 베니티아 병사들은 날 모욕했지. 얼굴이 화끈거려 그냥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이대로라면 다음 전투에선 대패를 당할 수도 그렇게 된다면 수많은 레노 왕국의 청년들이 죽어 갈 거란 생각에 돌아갈 수가 없었네. 하지만 난 그 중년 기사에게 패했고, 그 기사에게 엄청난 치욕을 당했네. 그 결과, 병사들의 사기 또한 바닥으로 떨어졌고, 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됐었네. ‘내가 죽으면 이 사기가 다시 북돋아지지 않을까?’하는…… 그런데 그때, 마안투스 기사단의 튜크 단장이 자네를 검투장에서 봤다고 소리치더군. 기절한 척했던 나에게까지 들릴 만한 소리였어. 자네는 들리지 않았을까 모르지만, 베니티아 왕국 놈들도 동요를 하더군. 난 그에 설마, 하고 살며시 고갤 들어 아군 측을 쳐다보았네. 자네가 나오고 있더군. 동료들에 등 떠밀리듯 나오는 자네 말일세. 자네는 그때 그저 ‘헤헤’거리며 다시 돌아가려고 했지? 난 저런 얼간이 녀석이 무슨 락센 같은 검투사를 잡았겠냐며 생각을 했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튜크 단장이 자네를 보았다는 말에는 정신이 파뜩 들었지. 락센이라면 나도 익히 그 명성을 들었거든. 그렇게 자네는 등떠밀리듯 나왔고, 중년 기사를 혼쭐을 내 줬지. 물론 강아지 새끼마냥 기사란 놈이 뒤에서 다시금 기습을 했지만 말이야. 너무 말을 많이 한 건가?”
현의 고개가 살며시 양쪽으로 움직인다.
“아닙니다. 들을 만했습니다.”
“그럼 잠시 더하지. 사실 평민인 자네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왕족, 아니 귀족 이상만 되더라도 모욕이란 것이 얼마나 큰 치욕스러움인지 알 것이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만 자네는 나를 그 치욕에서 그나마 구해 줄 수 있었네. 내가 그 기사에게 짓밟히고 있을 때의 심정이 무엇이었는 줄 아는가?”
현이 고개를 젓는다. 평민인, 대한민국에서도 뚜렷한 지위도 없었던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정말 눈앞의 기사들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싶었네. 중년 기사가 아니라, 레노 왕국의 기사들 말이야. 왕자임을 떠나서 아군이, 엄연히 국왕 전하께 기사 작위를 받은 내가, 사사로이 동료인 내가 모욕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나오지 않아서이지.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네만, 만약 내가 거기 서 있는 기사들이었다면 전사대전의 관습을 깨 버리고 동료를 구하러 나왔을 걸세. 아, 물론 이 경우는 내 명예에 먹칠을 하게 되는 경우가 되겠지만 말이야.”
현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을 때 피리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눈물이 나오더군. 내가 2왕자이긴 하지만 기사란 놈들이 분노에 치를 떨면서도 자신의 이름에 먹칠을 할까 봐 나오지 않는 꼴들을 보자니 말이야. 뭐, 이렇게 된다면 전사대전의 율을 지켰으니 그들은 기사도를 지킨 셈이 되는 건가. 훗…….”
피리오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 떨어져 식어 버린 찻잔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나는 말일세. 왕자 시절, 아니 유년 시절 때부터 친구가 없었네. 당연하지, 나는 왕자니까 말일세. 제2왕자니까……. 접근하는 귀족들은 더러 있었네만 그들은 나, 피리오가 아닌 왕자라는 허울을 보고 접근했을 뿐이네. 이 나이, 이때까지도 변변한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한 내가 참으로 한심하더군. 중년 기사에게 짓밟히던 순간에는 ‘설마 내가 기사들에게 잘해주지 못해서, 기사들과 이렇다 할 친분이 없어서 나오지 않았나?’라는 자조적인 생각까지도 들더군. 후우…… 미안하네. 사령관 각하와 자네 앞에서 주절거렸군.”
피리오가 흘러내린 굵은 눈물방울을 여린 팔로서 거둬들였다.
‘왕자란 자리가 녹록한 자리만은 아니구나.’
“아닙니다, 저하.”
“자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겠는가?”
여린 팔로 슬며시 눈물을 닦은 피리오가 현에게 말하자, 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큰 동정심이 유발했던 것 같다.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친구 하나 없고 제2왕자란 이유로 기사들이 나서지 않았던 것 때문에.
“자네 나이가 몇이지?”
“올해 스물입니다.”
“나도 스물이네. 그래서 그런데, 우리 친구가 되면 안 되겠는가?”
“에엑?!”
현의 눈이, 아니 현과 사령관의 눈이 부릅떠졌다.
친구라니? 제아무리 피리오가 제2왕자이긴 하지만 현은 평민이다. 비록 모라이트가 눈짓으로 기사 작위를 현에게 내린다는 약속을 받아내긴 했지만, 기사가 된다하더라도 엄연한 주종 관계가 된다. 한데 친구라니?!
아무리 기사, 아니 귀족이 된다하더라도 왕자와 친구가 되려면 최고위급 귀족인 후작이나 공작의 자제들만이 왕자와 친구라는 울타리를 어느 정도 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평민이고, 사사로이는 명을 받드는 부사령관과 병사의 관계다. 어찌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그에, 현은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왕자 저하와 친구를 하겠습니까?”
“아닐세. 난 자넬 나의 평생 친구로 맞이하고 싶네.”
계속해서 거절하는 현에게 피리오가 간곡한 말로 다시 한 번 청한다. 그 눈빛이 매우 간절한, 이제 곧 명이 다하여 죽어 가는 노인과 같아 보였다.
현이 힐끔 라시온 후작을 쳐다보자 라시온 후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왕자와 친구가 된다라…….’
썩 괜찮을 듯싶었다. 물론 다른 귀족들처럼 피리오의 왕자라는 이름 때문이 아니라, 피리오의 사람됨 때문에 괜찮다고 여겨지는 현이다.
왕족이 뭐던가? 귀족보다도 더 우위에 있는 족속들이 아닌가? 게다가 피리오가 제아무리 멸시를 당하고 산다고 하더라도 제2왕자라는 직함은 일개 후작위, 조금 더 올라가 공작위에 맞먹는다. 물론 실권은 없겠지만, 그들이 대하는 태도가 그렇다는 것이다.
게다가 귀족이라 함은, 콧대가 높기로 소문난 족속들이다. 이번에도 보지 않았는가, 준귀족이라고 칭해지는 기사들이 자신의 이름에 먹칠을 당할까 봐, 제2왕자가 당함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않는 모습을.
한데, 왕자가 먼저 숙이고 현에게 친구를 하자고 한다. 게다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게 나이 또한 스물, 같다고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일단 피리오가 어떤 사람됨을 가지고 있는지 더 떠보기로 하고 결정을 내리기로 한 현이다.
평생 친구라 함은, 위기가 있을 때 서로 도와주고 기쁨이 있을 땐 함께 누림이 평생 친구일진대, 친구의 사람됨조차 모르고 연을 맺을 수는 없었다.
피리오를 본 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부하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얼추 그의 사람됨을 알 수는 있었기에 살짝만 떠 보자고 생각하는 현이었다.
“그렇다면 부사령관, 아니 왕자님. 저는 평민입니다. 저와 친구가 되신다면 친구인 이상 존대를 할 수 없을 터이니, 말을 놓아야 할 터인데 귀족들이 이걸 가만 보고 있겠습니까?”
현의 물음에 피리오가 주먹을 말아 쥐고 말했다.
“내겐 친구가 없었네. 이제 친구가 생길 작정인데 귀족들의 눈초리가 무에 대수겠는가? 설령 그런 자들이 있다 한들, 앞에서는 어쩌지 못할 걸세.”
‘흐음…….’
사실 현이 떠본다는 건 다른 게 아니라, 귀족들 앞에서 자신과 떳떳이 이야기할 수 있는가를 물으려 했던 것이다.
보아하니,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면, 송구스럽지만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어째서 저와 친구가 되시려는 겁니까? 저 말고도 뛰어난 기사들이 존재할 테고, 저보다 더 좋은 사람도 존재할 텐데요.”
“그래, 그렇겠지.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지. 자네보다 뛰어난 실력을 겸비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자네보다 더 좋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네. 하지만 말이야. 사람은 여타 동물들과 다름없이 본능이란 게 살아 있다네. 자네는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내 본능은 지금 자네를 친우로 맞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네. 그렇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거라고…….”
“…….”
“게다가 자네는 내 치욕을 갚아 준, 모라이트가 인정한 기사일세. 어느 누가 감히 자네와 친구가 된다는 것을 손가락질할 수 있겠는가?”
사실 현의 육체인 로터가 모라이트에 대한 지식이 얄팍하기에 현도 잘 모르지만, 모라이트는 대단한 기사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모라이트를 숭배하는 프라마티뉴 기사들과 병사들이 있을 정도였고, 라시온 후작도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 나온다면 늘 최선두에 서서 적을 베어 넘겼고 최고위 귀족인 황족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소박한 삶을 살고 있었다. 게다가 마음 씀씀이 또한 푸르른 하늘보다도 넓었다.
모라이트는 마칸타스 대륙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마칸타스 대륙의 마지막 영웅이라고까지 불려지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현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사실 피리오와 친구가 된다 하더라도 귀족들이 손가락질하지 못할 것이다.
이 시대는 기사 작위를 받는 방법이 네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을 세워 받는 법, 하나는 영토를 가진 영지기사로 들어가는 방법. 그리고 하나는 다른 기사에게 인정받는 방법, 나머지는 돈을 주고 사는 것.
하지만 다른 기사에게 인정받는다고 하더라도 보통 기사라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개나 소나 다 인정할 테고, 그렇게 된다면 세상에 기사 아닌 사람은 없게 될 것이다.
법적으로 다른 기사에게 인정받는다 하여 기사 작위를 얻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망 높은 기사가 인정을 해야만 했다.
뭐, 그런다고 기사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순간 국왕은 직접 그 사람을 기사로 임명한다. 물론 지금과 같은 전시라면 전장에 나온 왕자나 방계 왕족이라도 왕족의 피가 흐르는 이들이.
아무튼 현은 모라이트에게 인정받은 기사였고 왕자의 치욕을, 레노 왕국과 베니티아 왕국의 전사대전에서 8전 8패를 당하는 레노 왕국 기사들의 치욕을 갚아 준, 기사 중의 기사였다. 현, 자신만이 그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좋다. 너와 난 이제 친구다. 아무도 우릴 갈라 놓을 순 없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제국의 황제들일지라도.”
넉살좋게 현이 말을 놓자, 피리오의 얼굴이 돌연 환해진다.
“정말인가?”
“그래, 너와 난 이제 친우다. 하늘이 갈라 놓을 수도 없을 것이고, 제국의 황제들 또한 우리의 우정을 가를 순 없을 것이다. 우린, 서로의 피를 나눈 형제 같은 친구가 될 테니까.”
현의 말에 라시온과 피리오가 무슨 말인가 하며 쳐다보고 있을 때, 현이 뒤에 장식용으로 걸쳐진 단검을 빼 들었다.
라시온 후작이 깜짝 놀라 저지하려 했지만, 현이 피리오가 아닌 자신의 손에 단검을 댄 다는 걸 알고는 멈칫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현은 곧바로 단검을 빼 들고는, 자신의 손목 윗부분을 그어 버렸다.
붉은 피가 새어 나오자 피리오와 라시온이 말리려 일어났지만, 현은 그들을 제지하고는 찻잔에 든 차를 뿌려 찻잔을 비게 한 뒤에 자신의 팔목에 맺어진 피를 짜, 찻잔에 넣었다.
피를 짜는 행위는 찻잔의 1/3 정도가 찰 때까지 계속되었고, 찻잔에 어느 정도 피가 차오르자 현은 그걸 피리오에게 건넸다.
“마셔라. 피를 나눈 친우가 된다는 증거다.”
그에 잠시 멈칫하던 피리오였지만, 눈을 질끈 감고 찻잔에 들어 있는 피를 마셨다.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지만, 꾹 참고 마셨다. 지금 이 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현과 친구가 될 수 없을 거란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찻잔에 든 피를 비워 버린 뒤, 피리오 또한 단검을 들고는 자신의 손목 윗부분을 그어 방금 자신이 비운 찻잔에 피를 채워 넣었다. 그렇게 1/3가량을 채워 넣었을 때, 피리오 또한 현에게 피가 든 찻잔을 건넸다.
현은 망설임 없이 피가든 찻잔을 비워 버렸다.
“앞으로 우린 피를 나눈 형제와 다름없는 친우가 되었다. 아까 말했듯, 우리의 우정은 이 땅의 신조차도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며, 지하의 신조차 우리가 죽고서의 우정을 가를 순 없을 것이다.”
현이 말하자, 이번엔 피리오가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좋다, 나의 친구여.”
말을 하는 피리오의 어깨가 부르르 떨려 오는 것은 필자의 착각일 뿐일까?

***

막사로 돌아온 로터는 부대원들에게 온갖 질문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대충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필스의 끈질긴 노력(?) 끝에 결국 현은 불고야 말았다. 피리오와 친구가 되었다는 걸.
그에 부대원들은 입을 쩌억! 벌리며 또다시 온갖 질문을 퍼부어 댔다. 어떻게 친구가 되었냐는 둥, 말은 텄냐는 둥, 설마 너 이런 사람이었냐라는 둥.
하지만 현은 애써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잠을 청했다. 잠을 잔다는 핑계로 정리할 생각이 많았기 때문이다.
동료들이 이리 호들갑을 떠는데 현이라고 머릿속이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지금 혼란스러운 걸로 따지자면 현도 1등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왕자와 친구라…….’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21세기라면 자신이 이런 일을 겪을 수 있었겠는가? 결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왕자와 연을 맺다니…… 그것도 피를 나눈!
또한, 그것 못지않게 베니티아 왕국 측에 대한 생각도 많았다. 그들은 어째서 전사대전을 취했을까? 왜 이렇게 욕설을 내뱉었던 걸까? 등등.
하지만 지금 그런 걸 생각해 봐야 뭘 하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이니 그러려니 하고 베개를 움켜잡는 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