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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6. 기사 작위와 방백위 그리고 특수부대
다음 날.
잠 못드는 새벽도 잠시 뿐이었고, 현은 어느새 잠이 들어 기분 좋게 일어날 수 있었다.
“하아암!”
일어나서 보니 람스와 필스, 케일 등만 빼놓고는 이미 다 일어나 식당으로 향한 듯싶었다.
어제는 사령관실에 찾아가 피리오와 친구가 되고 나서 바로 막사로 돌아왔는지라 뭘 먹은 게 없었기에 더욱 배가 고팠다.
이불을 게고 자리에서 일어난 현이 일단은 람스와 필스, 케일을 깨웠다.
“람스! 필스 형님, 케일 아저씨! 일어나십쇼!”
“으아암, 조금만 더…….”
“나두 나두…… 크르렁.”
“저리 안 꺼져어?”
모두 발길질을 하며 현을 거부했다.
‘젠장할, 깨워 줘도 난리라니까.’
마음속으로나마 삼인을 욕하며 그 혼자 식당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막사의 막을 치자,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날씨 좋다.’
이런 날에는 소풍을 가야하는데라는 생각을 잠시 하며 현은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식당과 막사는 다행히도 5분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였기에 얼마가지 않아 식당에 도착했다.
그리고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부대원들이 어디 있나라는 생각을 할 무렵! 식당 안이 돌연,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아닌가?
“저, 저기 봐! 모라이트에게 인정받은 로터라는 병사 아니야?”
“너 봤냐? 저자가 바로 그 모라이트에게 인정받은 병사야!”
“그때 그 기사와 싸울 때 보인 창술 봤냐? 우와, 진짜 눈이 호강한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 같더라.”
현은 병사들의 시선에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누구에게 저런 말을 하나 살펴보았지만, 그들은 대부분이 현에게 시선을 쏟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는 잠시 머쓱해진 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일단은 식판을 들고 배급을 해 주는 곳으로 향했다.
그때 까지도 병사들은 현에 대한 웅성거림을 멈추지 않았는데, 배급을 해 주는 병사 또한 현의 얼굴을, 아니 현의 명성을 익히 들었는지 아는 체를 했다.
“혹시, 로터라는 분이신가요?”
이곳에 떨어진 뒤, 로터라는 삶을 살아가고서도 로터를 알아본 사람은 몇 없었기에 현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만…….”
“와아! 정말이요? 그 모라이트에게 인정받았다는?”
배급병사의 말에 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와! 대단해요. 어떻게 모라이트 경에게 인정을 받을 수가…… 아아, 내 정신 좀 보게. 자 여기요.”
배급병사는 현의 뒤에 밀린 병사들의 모습을 이제야 목격했는지, 아차, 하며 현에게 빵 두덩어리를 넣어 주었다. 원래는 배급량이 빵 1개이지만, 어째서인지 빵을 두 개 넣어 주는 배급병사였다. 그리고 빵을 나눠 주는 병사와 마찬가지로 스프를 나눠 주는 병사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저 멀리서 아크니아가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에, 현은 상처 입은 다리를 움직여 아크니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물론,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다른 애들은 어딨냐?”
빵을 우걱우걱 씹으며 아크니아가 다른 부대원들의 안부를 묻자, 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훗, 그 자식들 아직도 자고 있나 보지.”
“그나저나 언제 오셨어요? 깨우지 않고…….”
현의 아쉽다는 듯한 말투에 아크니아가 먹던 빵을 도로 식판에 내려놓고는 장난치듯 말했다.
“야, 우리가 어떻게 널 깨우냐? 넌 모라이트에게 인정받은 ‘기사’님이신데. 킥킥킥.”
모라이트의 장난에 현도 마냥 싫지만은 않은 듯, 아크니아의 옆구리를 쑤셔댔다.
“짜샤, 뭐하는 거야 지금. 감히 이 형님의 옆구리를 쑤시다니. 이 우람한 팔뚝으로 목이 좀 조여 봐야 정신 차리겠느냐?”
아크니아가 자신의 팔뚝을 내보이며 말하자, 현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하하!”
“짜식이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잠시간 떠들썩한 아침식사를 어느 정도 끝낸 현에게 탄테가 물어왔다.
“그나저나 어제 했던 말 사실인가?”
“어제했던 말이요?”
“그래, 왕자 저하와 친구가 됐다는 말 말일세.”
“어제 말씀드렸다시피, 사실입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마음에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렇게 우린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린 피를 나눈 형제와 다름 없습니다.”
“흐음…… 그렇군.”
그런데 그때였다.
현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병사들 사이로 거구의 사내 하나가 병사들을 가로지르며 나오더니, 현의 식판이 놓여진 식탁에 발을 텅! 하고 놓는 것이 아닌가?
그에, 현이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자 그곳엔 기억하기 싫은 놈이 서 있었다.
“평민 새끼가 어디서 눈을 부라려? 너 이 새끼, 모라이트한테 인정받았다고 기사고 뭐고 없다는 것이냐!”
그랬다. 그는 다름 아닌, 저번에 식당에서 마주친 그 기사였는데, 그는 말을 마치고는 현의 머리를 검지로 튕기듯 밀며 그를 농락했다.
“잘 들어라. 네가 아무리 모라이트에게 인정받았고, 우리를 대신해서 베니티아 왕국 기사를 처단했어도, 우리 기사들은 아마 널 받아줄 마음이 없을 거다. 이십오만의 군대 사이에 기사가 몇 명인 줄 알아? 3천 명이다. 물론 천인대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기사들까지도 포함해서 말이야. 그렇다곤 하지만 너를 받아줄 기사들은 없어. 네가 아무리 모라이트에게 인정을 받았다손 치더라도 넌 그저 그런 평. 민. 병. 사일 뿐이니까 말이다. 하하하하!”
그 기사는 제 할 말만을 하고는 다시 식당을 빠져나갔다. 마치, 이런 더러운 곳에는 더 이상 있기 싫다는 양 말이다.
“저 개자식이!”
뒤늦게 아크니아가 나선다.
“그만두십쇼. 그래 봤자 놈만 손해일 테니.”
현의 말에 아스니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야, 너는 왜 저딴 새끼 그대로 놔두냐? 저런 새끼한테는 본때를 보여 줘야 한다고.”
아스니아의 말에 다른 부대원들도 동의하는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새끼를 상대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골치만 아파질 뿐이죠.”
“그런가?”
아스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자 현이 웃으며 말했다.
“저런 새끼들은 나중에 호되게 당할 일이 있을 겁니다.”
현의 말에 아스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자 다 먹은 것 같으니.”
아스니아의 말에 모든 부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현 또한 자리에 일어나 식판을 놓고는 부대 막사로 향했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막사로 돌아오던 중, 한 병사가 급하게 뛰어오는 모습이 그들에게 포착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 병사가 갑자기 현의 앞에서 무릎 꿇고 군례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사령관 각하께서 급히 오시라는 전갈입니다.”
현은 눈앞의 병사가 누구에게 말을 하는 것인가,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주변에는 자신의 부대원들과 자신 말고는 별로 없었고, 그 병사는 자신을 쳐다보고 말하고 있었기에 곧,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령관께서?”
“예, 그럼…….”
병사는 말을 하고는 어디론가 금세 뛰어갔다. 다른 일이 또 있나 보다.
“사령관께서 무슨 일이시냐, 로터?”
아스니아가 현에게 묻자 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도 지금 어리둥절한 상황인데 답해 줄 수 있겠는가?
“일단 가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부대원들 모두 떼거리로 몰려간다면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기에, 아스니아의 말에 따라 모두는 막사로 돌아가고 일단 현만 사령관실로 향했다.
사령관실은 로터가 있는 곳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렸는데, 사령관실에 도착하자 피리오와 함께 여러 병사들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오, 로터. 자네 왔나?”
피리오가 현을 반긴다.
주위를 의식하였으나 대수롭지 않게 인사를 건네는 피리오의 말에 현 또한 편안히 대하기로 했다.
“무슨 일인가?”
주위를 둘러보자 얼핏 수십이 넘어가는 병사들이 바짝 긴장한 채로 현과 피리오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아마, 부사령관에게 반말을 찍찍 내뱉어서일 것이다.
“아, 다름이 아니라. 기사 작위 때문이네.”
“작위?”
현의 말에 피리오가 말없이 서랍을 열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 피리오의 모습을 바라보던 라시온 후작은 현에게 조용히 말했다.
“자네가 저하와 친구가 되었다는 점은 나도 아네만, 지금은 조촐하지만 기사 작위식이니, 왕손에 대한 예우를 갖추시게나.”
“기, 기사 작위식이요?!”
현이 놀람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밥을 먹고 막사로 다시 복귀하던 중 전령 하나가 와서 사령관실로 찾아오래서 왔더니, 기사 작위식이라고 하니 말이다.
“자네부터 기사 작위를 받는 걸 영광으로 알게나.”
그때, 피리오가 입을 열었다.
“무릎을 꿇으라.”
친구는 친구고, 왕손은 왕손이기에 일단은 라시온의 말대로 예우를 갖추고 무릎을 꿇은 현이었다.
그러더니 피리오는 라시온 후작이 건넨 장검으로 현의 어깨와 이마 부위를 톡톡 건드리더니 증서와 함께 입을 열었다.
“나, 피리오 폰 레노는 제2왕자의 신분으로 로터에게 방백의 작위와 함께 기사 작위를 내리노라. 또한, 그대에게 루마니라는 성 또한 함께 내린다.”
“가, 감읍하나이다.”
얼떨결에 피리오가 건네준 증서를 받아 든 현이었고, 거기엔 대충 기사로 임명한다는 내용과 왕자의 도장이 박혀 있었다.
거기다 잠시 후, 피리오가 다른 이들에게 현에게 한 것과 똑같은 행위를 하고 있을 무렵 라시온이 다가와 다른 증서 하나를 건네주었다.
“자 받게, 다른 이들은 기사의 작위만 함께 받네만, 자네는 방백이란 작위도 함께 받았네. 축하하네.”
“바, 방백이요?”
“그래, 방백. 준남작과 기사 아래의 작위긴 하네만, 일단 준귀족에 속하긴 하는 작위일세.”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는 말에 라시온이 양껏 웃음을 머금고는 말했지만 현은 아직도 이 상황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래도 준다고 한다면 보는 사람 많은 곳에서나 줄 것이지 폼 안 나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피리오가 다른 이들에게도 똑같이 기사 작위를 내려주었다. 그 뒤 피리오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이제부터 왕국의 기사가 되었음이다. 부디, 국왕 전하께 충성을 맹세하고 레노 왕국과 왕실이 크게 성하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하라.”
피리오의 말에 현을 제외한 모든 이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국왕 전하께 충성을! 2왕자께 영광을!”
그에, 현 또한 ‘어어’거리며 따라하긴 했지만, 역시나 한 템포 느리긴 했다.
“조금 있다가 따로 부를 걸세. 모두들 물러가시게. 아, 로터 자네는 할 말이 있으니 잠시만 기다리시게.”
피리오가 다른 이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라시온 후작과 로터, 피리오만 남게 되었을 때 그간 의문점이 많았던 현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경우인가?”
“무슨 말인가?”
“기사 작위를 주는 것도 그렇고, 주려면 사람이 좀 많은 곳에서 폼 좀 잡게끔 주지 그랬나?”
현의 넉살스러운 말에 피리오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미안하네, 사실 자네에겐 저번에 전사대전 때 즉시 내리려고 했었네만, 내 경황이 없었네. 해서 단출하지만 다른 부대에서 공을 세운 이들과 함께 작위를 내렸네. 물론 이는 임시식일 뿐이고, 아마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전하께서 전장에서 공을 세운 이들에게 상과 함께 작위를 다시 내리실 걸세.”
피리오의 말을 듣자 이제야 이해가 갈 것 같은 현이었다.
한마디로, 지금은 전시이니 대충 작위를 내리고, 전쟁이 끝나거나 어느 정도 상황이 나아진다면 본국에서 공을 세운 이들을 위해 크게 작위식을 다시 한 번 연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군.”
“그나저나 로터, 자네만 알고 있게나.”
피리오가 돌연 정색을 한 채, 현에게 말하자 현 또한 무슨 일인가, 하며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큰 전면전이 한 번 있을 것 같네.”
“전면전?”
현의 되물음에 피리오가 앞에 있는 상을 힘껏 내려치고는 다시 몸을 쇼파에 뉘였다.
“젠장할 녀석들! 이번 전사대전을 빌미로 크게 벌일 모양이야. 오늘 아침 전령이 왔더군. 전쟁을 그만 끝내자며 십만대 십만의 전면전을 요구했어.”
“시, 십만?!”
현의 놀란 되물음이었다.
놀랄 만도 했다. 아무리 전사대전으로 베니티아 왕국 측 병사들이 사기가 하늘을 찌른다곤 하나, 그 기세를 현이 어느 정도 꺾어 놓기도 했었고, 제아무리 사기 충만한 병사들이라 한들, 십만대 십만은 베니티아 왕국 측으로서도 도박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십만. 일단 생각하겠다며 전령을 다시 돌려보내긴 했네만, 전령의 말을 다시금 곱씹어 보아하니, 아무래도 합의를 하지 않는다면 무작정 쳐들어올 것 같더군.”
“무작정? 그렇다면 무에 걱정인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을 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현의 말에 피리오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는다.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성 뒤에 도시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그거야 잘 아네만?”
“한데 문제는 번화가를 통해 우리 군량이 들어오고 있다는 점일세. 하지만 번화가는 성안에 포함이 되지 않고 있고, 성 자체도 이쪽 지역민 모두를 성안에 몰아넣기란 턱없이 부족한 크기지. 물론 도시 전체가 성곽을 두러 싼 형태를 하고 있지만 베니티아 군은 이십만의 군세일세. 도시의 경비대와 소수의 치안군은 썰물 밀 듯 들어오는 베니티아 군에 속절없이 도시를 내어 주고 말 걸세. 그렇게 된다면 베니티아 병사들에게 약탈을 당할 테고, 그들의 원망은 베니티아는 물론, 우리들에게까지 전가 될 것이 분명함세. 게다가 그들이 성 전체를 포위하듯 둘러싼다면 우리는 어찌할 도리가 없네. 물론 성안에 비축 식량을 모아두긴 했으나, 그것도 얼마가지 못하고 다 써 버릴 테고……. 혹여, 자네에게 방책이 있나 하여 물어보는 걸세.”
피리오의 말에 현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용을 정리하자면, 피리오의 걱정은 베니티아 왕국의 공격이었다. 그들은 합의를 하든 안 하든 공격을 할 작정인 것 같았고, 공격을 온다면 아군은 농성을 해야 하는데 도시의 주민들은 구할 수가 없게 된다.
물론 양 대륙이 얼마 전 합의한 법률상, 민간인을 약탈할 순 없겠으나, 사람 일이란 혹시나 모르는 것이기에 피리오는 걱정하는 것이다. 거기에다 만약 민가를 약탈한다면 그들의 원망은 하늘을 찌를 테고, 그 책임은 고스란히 피리오와 라시온이 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본국으로 가서 문초를 당할 테고, 왕당파인 라시온과 피리오를 귀족파에서는 이 기회로 삼아 왕자를 제거하려 할 것이 분명하다. 현재 그것이 걱정인 셈인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과 전면전을 꼭 해야 한다는 말이군. 그렇다고 병력을 나눌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현의 생각처럼 그들과 꼭 전면전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피리오와 라시온이 후덕한 마음 씀씀이를 가지고 있어,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지 악덕 사령관이라면 이런 건 안중에도 없이, 성문을 걸어 잠그고 도시의 식량을 모두 징수한 뒤 농성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병력을 나눌 수는 없었다. 물론 나눈다면 나눌 수는 있다. 지금 남은 병력이 전투 가능한 자가 약 13만 5천 정도인데, 이 수를 반씩 나눠 크라망 요새와 도시, 리벨에 주둔시키면 되긴 된다.
하지만 그래봤자. 6만 2, 3천 가량을 나눌 뿐이다. 적군의 수는 20만. 아무리 도시가 요새와 근접해 있다곤 하나, 가장 가까운 성문인 요새의 북문에서도 걸어서 40∼50분은 걸린다. 그것이 여러 군대가 모여서 간다면 족히 1시간∼1시간 30분은 걸린다는 뜻.
게다가 군대를 나눈다면 적들은 요새를 칠지, 도시를 칠지 점찍을 수가 없다.
역시 착한 것이 팔자라면 팔자일 수도 있겠다.
“방책이라…….”
정적을 깨고 중얼거리는 현의 물음에 라시온 후작과 피리오가 반색한다.
“생각해내셨는가?”
라시온이 물었지만 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라시온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마는지였다.
‘결론은 성밖 도시민들과 최소의 피해로 곧 쳐들어올 베니티아 군사들을 저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민들을 성안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는 일이니…….’
6. 기사 작위와 방백위 그리고 특수부대
다음 날.
잠 못드는 새벽도 잠시 뿐이었고, 현은 어느새 잠이 들어 기분 좋게 일어날 수 있었다.
“하아암!”
일어나서 보니 람스와 필스, 케일 등만 빼놓고는 이미 다 일어나 식당으로 향한 듯싶었다.
어제는 사령관실에 찾아가 피리오와 친구가 되고 나서 바로 막사로 돌아왔는지라 뭘 먹은 게 없었기에 더욱 배가 고팠다.
이불을 게고 자리에서 일어난 현이 일단은 람스와 필스, 케일을 깨웠다.
“람스! 필스 형님, 케일 아저씨! 일어나십쇼!”
“으아암, 조금만 더…….”
“나두 나두…… 크르렁.”
“저리 안 꺼져어?”
모두 발길질을 하며 현을 거부했다.
‘젠장할, 깨워 줘도 난리라니까.’
마음속으로나마 삼인을 욕하며 그 혼자 식당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막사의 막을 치자,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날씨 좋다.’
이런 날에는 소풍을 가야하는데라는 생각을 잠시 하며 현은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식당과 막사는 다행히도 5분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였기에 얼마가지 않아 식당에 도착했다.
그리고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부대원들이 어디 있나라는 생각을 할 무렵! 식당 안이 돌연,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아닌가?
“저, 저기 봐! 모라이트에게 인정받은 로터라는 병사 아니야?”
“너 봤냐? 저자가 바로 그 모라이트에게 인정받은 병사야!”
“그때 그 기사와 싸울 때 보인 창술 봤냐? 우와, 진짜 눈이 호강한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 같더라.”
현은 병사들의 시선에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누구에게 저런 말을 하나 살펴보았지만, 그들은 대부분이 현에게 시선을 쏟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는 잠시 머쓱해진 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일단은 식판을 들고 배급을 해 주는 곳으로 향했다.
그때 까지도 병사들은 현에 대한 웅성거림을 멈추지 않았는데, 배급을 해 주는 병사 또한 현의 얼굴을, 아니 현의 명성을 익히 들었는지 아는 체를 했다.
“혹시, 로터라는 분이신가요?”
이곳에 떨어진 뒤, 로터라는 삶을 살아가고서도 로터를 알아본 사람은 몇 없었기에 현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만…….”
“와아! 정말이요? 그 모라이트에게 인정받았다는?”
배급병사의 말에 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와! 대단해요. 어떻게 모라이트 경에게 인정을 받을 수가…… 아아, 내 정신 좀 보게. 자 여기요.”
배급병사는 현의 뒤에 밀린 병사들의 모습을 이제야 목격했는지, 아차, 하며 현에게 빵 두덩어리를 넣어 주었다. 원래는 배급량이 빵 1개이지만, 어째서인지 빵을 두 개 넣어 주는 배급병사였다. 그리고 빵을 나눠 주는 병사와 마찬가지로 스프를 나눠 주는 병사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저 멀리서 아크니아가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에, 현은 상처 입은 다리를 움직여 아크니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물론,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다른 애들은 어딨냐?”
빵을 우걱우걱 씹으며 아크니아가 다른 부대원들의 안부를 묻자, 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훗, 그 자식들 아직도 자고 있나 보지.”
“그나저나 언제 오셨어요? 깨우지 않고…….”
현의 아쉽다는 듯한 말투에 아크니아가 먹던 빵을 도로 식판에 내려놓고는 장난치듯 말했다.
“야, 우리가 어떻게 널 깨우냐? 넌 모라이트에게 인정받은 ‘기사’님이신데. 킥킥킥.”
모라이트의 장난에 현도 마냥 싫지만은 않은 듯, 아크니아의 옆구리를 쑤셔댔다.
“짜샤, 뭐하는 거야 지금. 감히 이 형님의 옆구리를 쑤시다니. 이 우람한 팔뚝으로 목이 좀 조여 봐야 정신 차리겠느냐?”
아크니아가 자신의 팔뚝을 내보이며 말하자, 현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하하!”
“짜식이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잠시간 떠들썩한 아침식사를 어느 정도 끝낸 현에게 탄테가 물어왔다.
“그나저나 어제 했던 말 사실인가?”
“어제했던 말이요?”
“그래, 왕자 저하와 친구가 됐다는 말 말일세.”
“어제 말씀드렸다시피, 사실입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마음에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렇게 우린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린 피를 나눈 형제와 다름 없습니다.”
“흐음…… 그렇군.”
그런데 그때였다.
현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병사들 사이로 거구의 사내 하나가 병사들을 가로지르며 나오더니, 현의 식판이 놓여진 식탁에 발을 텅! 하고 놓는 것이 아닌가?
그에, 현이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자 그곳엔 기억하기 싫은 놈이 서 있었다.
“평민 새끼가 어디서 눈을 부라려? 너 이 새끼, 모라이트한테 인정받았다고 기사고 뭐고 없다는 것이냐!”
그랬다. 그는 다름 아닌, 저번에 식당에서 마주친 그 기사였는데, 그는 말을 마치고는 현의 머리를 검지로 튕기듯 밀며 그를 농락했다.
“잘 들어라. 네가 아무리 모라이트에게 인정받았고, 우리를 대신해서 베니티아 왕국 기사를 처단했어도, 우리 기사들은 아마 널 받아줄 마음이 없을 거다. 이십오만의 군대 사이에 기사가 몇 명인 줄 알아? 3천 명이다. 물론 천인대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기사들까지도 포함해서 말이야. 그렇다곤 하지만 너를 받아줄 기사들은 없어. 네가 아무리 모라이트에게 인정을 받았다손 치더라도 넌 그저 그런 평. 민. 병. 사일 뿐이니까 말이다. 하하하하!”
그 기사는 제 할 말만을 하고는 다시 식당을 빠져나갔다. 마치, 이런 더러운 곳에는 더 이상 있기 싫다는 양 말이다.
“저 개자식이!”
뒤늦게 아크니아가 나선다.
“그만두십쇼. 그래 봤자 놈만 손해일 테니.”
현의 말에 아스니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야, 너는 왜 저딴 새끼 그대로 놔두냐? 저런 새끼한테는 본때를 보여 줘야 한다고.”
아스니아의 말에 다른 부대원들도 동의하는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새끼를 상대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골치만 아파질 뿐이죠.”
“그런가?”
아스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자 현이 웃으며 말했다.
“저런 새끼들은 나중에 호되게 당할 일이 있을 겁니다.”
현의 말에 아스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자 다 먹은 것 같으니.”
아스니아의 말에 모든 부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현 또한 자리에 일어나 식판을 놓고는 부대 막사로 향했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막사로 돌아오던 중, 한 병사가 급하게 뛰어오는 모습이 그들에게 포착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 병사가 갑자기 현의 앞에서 무릎 꿇고 군례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사령관 각하께서 급히 오시라는 전갈입니다.”
현은 눈앞의 병사가 누구에게 말을 하는 것인가,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주변에는 자신의 부대원들과 자신 말고는 별로 없었고, 그 병사는 자신을 쳐다보고 말하고 있었기에 곧,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령관께서?”
“예, 그럼…….”
병사는 말을 하고는 어디론가 금세 뛰어갔다. 다른 일이 또 있나 보다.
“사령관께서 무슨 일이시냐, 로터?”
아스니아가 현에게 묻자 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도 지금 어리둥절한 상황인데 답해 줄 수 있겠는가?
“일단 가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부대원들 모두 떼거리로 몰려간다면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기에, 아스니아의 말에 따라 모두는 막사로 돌아가고 일단 현만 사령관실로 향했다.
사령관실은 로터가 있는 곳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렸는데, 사령관실에 도착하자 피리오와 함께 여러 병사들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오, 로터. 자네 왔나?”
피리오가 현을 반긴다.
주위를 의식하였으나 대수롭지 않게 인사를 건네는 피리오의 말에 현 또한 편안히 대하기로 했다.
“무슨 일인가?”
주위를 둘러보자 얼핏 수십이 넘어가는 병사들이 바짝 긴장한 채로 현과 피리오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아마, 부사령관에게 반말을 찍찍 내뱉어서일 것이다.
“아, 다름이 아니라. 기사 작위 때문이네.”
“작위?”
현의 말에 피리오가 말없이 서랍을 열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 피리오의 모습을 바라보던 라시온 후작은 현에게 조용히 말했다.
“자네가 저하와 친구가 되었다는 점은 나도 아네만, 지금은 조촐하지만 기사 작위식이니, 왕손에 대한 예우를 갖추시게나.”
“기, 기사 작위식이요?!”
현이 놀람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밥을 먹고 막사로 다시 복귀하던 중 전령 하나가 와서 사령관실로 찾아오래서 왔더니, 기사 작위식이라고 하니 말이다.
“자네부터 기사 작위를 받는 걸 영광으로 알게나.”
그때, 피리오가 입을 열었다.
“무릎을 꿇으라.”
친구는 친구고, 왕손은 왕손이기에 일단은 라시온의 말대로 예우를 갖추고 무릎을 꿇은 현이었다.
그러더니 피리오는 라시온 후작이 건넨 장검으로 현의 어깨와 이마 부위를 톡톡 건드리더니 증서와 함께 입을 열었다.
“나, 피리오 폰 레노는 제2왕자의 신분으로 로터에게 방백의 작위와 함께 기사 작위를 내리노라. 또한, 그대에게 루마니라는 성 또한 함께 내린다.”
“가, 감읍하나이다.”
얼떨결에 피리오가 건네준 증서를 받아 든 현이었고, 거기엔 대충 기사로 임명한다는 내용과 왕자의 도장이 박혀 있었다.
거기다 잠시 후, 피리오가 다른 이들에게 현에게 한 것과 똑같은 행위를 하고 있을 무렵 라시온이 다가와 다른 증서 하나를 건네주었다.
“자 받게, 다른 이들은 기사의 작위만 함께 받네만, 자네는 방백이란 작위도 함께 받았네. 축하하네.”
“바, 방백이요?”
“그래, 방백. 준남작과 기사 아래의 작위긴 하네만, 일단 준귀족에 속하긴 하는 작위일세.”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는 말에 라시온이 양껏 웃음을 머금고는 말했지만 현은 아직도 이 상황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래도 준다고 한다면 보는 사람 많은 곳에서나 줄 것이지 폼 안 나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피리오가 다른 이들에게도 똑같이 기사 작위를 내려주었다. 그 뒤 피리오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이제부터 왕국의 기사가 되었음이다. 부디, 국왕 전하께 충성을 맹세하고 레노 왕국과 왕실이 크게 성하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하라.”
피리오의 말에 현을 제외한 모든 이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국왕 전하께 충성을! 2왕자께 영광을!”
그에, 현 또한 ‘어어’거리며 따라하긴 했지만, 역시나 한 템포 느리긴 했다.
“조금 있다가 따로 부를 걸세. 모두들 물러가시게. 아, 로터 자네는 할 말이 있으니 잠시만 기다리시게.”
피리오가 다른 이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라시온 후작과 로터, 피리오만 남게 되었을 때 그간 의문점이 많았던 현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경우인가?”
“무슨 말인가?”
“기사 작위를 주는 것도 그렇고, 주려면 사람이 좀 많은 곳에서 폼 좀 잡게끔 주지 그랬나?”
현의 넉살스러운 말에 피리오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미안하네, 사실 자네에겐 저번에 전사대전 때 즉시 내리려고 했었네만, 내 경황이 없었네. 해서 단출하지만 다른 부대에서 공을 세운 이들과 함께 작위를 내렸네. 물론 이는 임시식일 뿐이고, 아마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전하께서 전장에서 공을 세운 이들에게 상과 함께 작위를 다시 내리실 걸세.”
피리오의 말을 듣자 이제야 이해가 갈 것 같은 현이었다.
한마디로, 지금은 전시이니 대충 작위를 내리고, 전쟁이 끝나거나 어느 정도 상황이 나아진다면 본국에서 공을 세운 이들을 위해 크게 작위식을 다시 한 번 연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군.”
“그나저나 로터, 자네만 알고 있게나.”
피리오가 돌연 정색을 한 채, 현에게 말하자 현 또한 무슨 일인가, 하며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큰 전면전이 한 번 있을 것 같네.”
“전면전?”
현의 되물음에 피리오가 앞에 있는 상을 힘껏 내려치고는 다시 몸을 쇼파에 뉘였다.
“젠장할 녀석들! 이번 전사대전을 빌미로 크게 벌일 모양이야. 오늘 아침 전령이 왔더군. 전쟁을 그만 끝내자며 십만대 십만의 전면전을 요구했어.”
“시, 십만?!”
현의 놀란 되물음이었다.
놀랄 만도 했다. 아무리 전사대전으로 베니티아 왕국 측 병사들이 사기가 하늘을 찌른다곤 하나, 그 기세를 현이 어느 정도 꺾어 놓기도 했었고, 제아무리 사기 충만한 병사들이라 한들, 십만대 십만은 베니티아 왕국 측으로서도 도박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십만. 일단 생각하겠다며 전령을 다시 돌려보내긴 했네만, 전령의 말을 다시금 곱씹어 보아하니, 아무래도 합의를 하지 않는다면 무작정 쳐들어올 것 같더군.”
“무작정? 그렇다면 무에 걱정인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을 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현의 말에 피리오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는다.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성 뒤에 도시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그거야 잘 아네만?”
“한데 문제는 번화가를 통해 우리 군량이 들어오고 있다는 점일세. 하지만 번화가는 성안에 포함이 되지 않고 있고, 성 자체도 이쪽 지역민 모두를 성안에 몰아넣기란 턱없이 부족한 크기지. 물론 도시 전체가 성곽을 두러 싼 형태를 하고 있지만 베니티아 군은 이십만의 군세일세. 도시의 경비대와 소수의 치안군은 썰물 밀 듯 들어오는 베니티아 군에 속절없이 도시를 내어 주고 말 걸세. 그렇게 된다면 베니티아 병사들에게 약탈을 당할 테고, 그들의 원망은 베니티아는 물론, 우리들에게까지 전가 될 것이 분명함세. 게다가 그들이 성 전체를 포위하듯 둘러싼다면 우리는 어찌할 도리가 없네. 물론 성안에 비축 식량을 모아두긴 했으나, 그것도 얼마가지 못하고 다 써 버릴 테고……. 혹여, 자네에게 방책이 있나 하여 물어보는 걸세.”
피리오의 말에 현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용을 정리하자면, 피리오의 걱정은 베니티아 왕국의 공격이었다. 그들은 합의를 하든 안 하든 공격을 할 작정인 것 같았고, 공격을 온다면 아군은 농성을 해야 하는데 도시의 주민들은 구할 수가 없게 된다.
물론 양 대륙이 얼마 전 합의한 법률상, 민간인을 약탈할 순 없겠으나, 사람 일이란 혹시나 모르는 것이기에 피리오는 걱정하는 것이다. 거기에다 만약 민가를 약탈한다면 그들의 원망은 하늘을 찌를 테고, 그 책임은 고스란히 피리오와 라시온이 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본국으로 가서 문초를 당할 테고, 왕당파인 라시온과 피리오를 귀족파에서는 이 기회로 삼아 왕자를 제거하려 할 것이 분명하다. 현재 그것이 걱정인 셈인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과 전면전을 꼭 해야 한다는 말이군. 그렇다고 병력을 나눌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현의 생각처럼 그들과 꼭 전면전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피리오와 라시온이 후덕한 마음 씀씀이를 가지고 있어,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지 악덕 사령관이라면 이런 건 안중에도 없이, 성문을 걸어 잠그고 도시의 식량을 모두 징수한 뒤 농성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병력을 나눌 수는 없었다. 물론 나눈다면 나눌 수는 있다. 지금 남은 병력이 전투 가능한 자가 약 13만 5천 정도인데, 이 수를 반씩 나눠 크라망 요새와 도시, 리벨에 주둔시키면 되긴 된다.
하지만 그래봤자. 6만 2, 3천 가량을 나눌 뿐이다. 적군의 수는 20만. 아무리 도시가 요새와 근접해 있다곤 하나, 가장 가까운 성문인 요새의 북문에서도 걸어서 40∼50분은 걸린다. 그것이 여러 군대가 모여서 간다면 족히 1시간∼1시간 30분은 걸린다는 뜻.
게다가 군대를 나눈다면 적들은 요새를 칠지, 도시를 칠지 점찍을 수가 없다.
역시 착한 것이 팔자라면 팔자일 수도 있겠다.
“방책이라…….”
정적을 깨고 중얼거리는 현의 물음에 라시온 후작과 피리오가 반색한다.
“생각해내셨는가?”
라시온이 물었지만 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라시온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마는지였다.
‘결론은 성밖 도시민들과 최소의 피해로 곧 쳐들어올 베니티아 군사들을 저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민들을 성안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는 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