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휘돌리던 창세를 거둬들인 후 오 장여의 거리를 벌리고서 득달같이 튕겨 오르며 31호를 향해 쇄도해 갔다.
이야앗! 다다다당!
일순 번갯불이 번쩍이는 듯한 착각이 일며 31호는 갑작스레 뒤바뀐 관량의 공세의 전율적인 빠르기에 휘청거리며 정신없이 뒤로 밀려갔다.
연강휘창식에서 연속섬창식(軟速閃槍式)으로 관량의 공세가 변화한 것이었다. 다급히 도를 휘둘러 막아 가는 31호였으나 그의 재주는 강(剛)이었지 빠름이 아니었다. 금세 도세가 어지러워지며 몇 합이 못 가서 결국 낭패한 신색으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크윽!
추풍낙엽이 이러할까? 마치 실 끊어진 연처럼 31호는 거세게 곤두박질쳐졌다.
“그만!”
생각지 못했던 전개에 일순 넋을 잃고 있던 목염이 뒤늦게 장내로 뛰어들어 혹여라도 창세를 전개할까 저어하여 관량을 막아 갔다. 그가 알기로 관량이란 자의 싸움은 마치 사나운 미친개의 그것과 같아 끝을 보기 전에는 손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 관량은 그런 목염의 기우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미 신형을 돌린 후 예의 고목나무 둥치로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 31호의 상세는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번쩍이며 다가든 놀라운 찌르기에 의해 오른 손목이 탈골되고 상의 여기저기에 손가락만 한 구멍이 뚫려 낭패한 모습을 제외하고는 말이었다.
일수유에 펼쳐진 숨 돌릴 틈 없는 일전에 쏟아졌던 정신을 환기시키고자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어느새 해는 서산으로 저물어 가고 있었고 어느덧 시간도 유시(酉時) 중엽, 목염은 훈련을 마치기로 하였다.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지.”

2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깊은 밤, 은밀한 움직임으로 훈련동을 벗어나는 괴인이 있었다.
짙은 흑의를 차려입은 괴인의 신색은 야행인의 그것. 굳이 특이점을 찾아보자면 괴인의 우수에 들린 기다란 장창뿐이었다.
괴인은 다름 아닌 관량이었다.
한밤중에 야산으로 향하는 것은 훈련위사가 된 후 오래된 관량의 습관이었다. 그는 다른 이들이 곤한 잠에 들 시간에 야산에 올라 수련을 하였다.
훈련동에 든 후 반년이 흐르며 관량은 점차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근근이 수련을 따라오기 바쁘던 초반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놀라울 만한 성장이었다.
하나 관량은 언제나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힘든 모습을 내비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싸움에 임할 때 느껴지는 독기 어린 모습을 제외한다면 말이었다.
그리하여 여타의 훈련위사들은 관량이 뛰어난 기재(奇材)라 여겼다. 기재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단기간에 빠른 성장을 보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 관량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기재라 하기에는 부족한 자였다. 다만 자존심이 강하여 누구에게도 지려 하지 않는 독심이 있을 뿐이었다.
관량은 처음 야산에 들 때 떨어지는 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다. 하루 동안 수개의 산등성이를 넘어 훈련동으로 돌아오면 온몸이 노곤해지고 다리를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하나 그럴수록 관량은 밤이 되면 더욱 독하게 다리를 놀렸다. 처음에는 암굴을 반도 가지 못해 후들거리는 다리에 신형을 돌려야 했다. 하나 그 회가 거듭될수록 관량의 체력은 놀랄 만큼 급증하여 한 달여가 지났을 무렵에는 십여 개의 산을 넘고도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두 달여가 지나 체력 훈련이 끝나고 십팔반무예와 암기술, 정보 분야의 훈련이 시작되자 새로이 이들을 수련하게 되었다.
관량이란 자는 이러한 자였다. 반드시 마음먹은 것은 해내고야 마는 독심을 지닌.
암굴을 나와 야산에 발을 디디며 관량은 산중에 떠오른 밝은 빛을 느끼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만월(滿月)인가? 벌써 여섯 번째 만월이니 반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군.’
관량은 문득 자신의 신색을 돌아보았다. 반년의 세월이 아깝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닦여진 신체와 전신에서 흐르는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힘이 느껴졌다. 그간의 고련이 아깝지 않은 변화였다. 일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갈 때 문득 낮에 있었던 31호와의 격전이 떠올랐다.
‘과연…… 도(刀)라는 병기는 힘이 대단했다. 아직도 팔의 떨림이 느껴질 정도니…… 무(武)란 수련하면 수련할수록 아득하기만 하구나. 더욱…… 매진해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을 만큼!’
두 눈을 빛내던 관량은 다시금 걸음을 놀려 산중으로 들어갔다.
금의위의 훈련위사들의 수련장인 진회하 동편의 야산은 사방산(四方山)이라 하였다.
사방산은 모두 스물여덟 개의 준봉들로 이루어진 험산이었는데 이를 고대천문학으로부터 사방의 각 7수씩인 동방 창룡(蒼龍), 북방 현무(玄武), 서방 백호(白虎), 남방 주작(朱雀)의 총 28수의 항성과 형태가 같다 하여 사방산이라 불러오게 된 터였다.
‘오늘은…… 휘몰아치는 물보라 속에서 창세의 강맹함을 수련해야겠다.’
문득 한낮의 일전을 떠올린 관량은 그중 산세가 험준하며 암굴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또한 가깝지 않은 여산(女山)으로 향했다.
여산은 북방 현무의 7수의 준봉 중 하나로 깎아지른 산등성이부터 흘러내린 폭포수가 일절이어서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간다 하여 여(女) 자를 따서 여산이라 불러 온 곳이었다.
본래 관량은 여산 옆의 우산(牛山)이나 벽산(壁山)에서 주로 수련을 하였는데 오늘 있었던 31호와의 격전으로 창세에 강맹함이 부족함을 느끼고 여산 폭포수 아래 소용돌이 속에서의 수련이 떠올랐던 터였다.

족히 스무 장에 달하는 높이에서 청백의 폭포수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세인(世人)의 발길이 닿지 않는 험준한 산중에 폭포수로 인한 물안개마저 진득이 피어나자 인세에 다시없을 신비로운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한 폭포수 아래 한 떨기 꽃과 같은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옥용(玉容)을 들어 올려 폭포수에서 떨어져 내리는 시원한 물줄기를 맞아 갔다. 폭포수에서 떨어지는 물은 따뜻한 온천수(溫泉水), 알고 보니 폭포 주변의 뿌연 물안개는 이러한 온천수에 기인한 것이었다.
물에 젖어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자 드러난 여인의 얼굴은 가히 절색(絶色)이었다.
옛말에 명모유반(明眸流盼)이란 말이 있었다.
이는 맑고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뜻하여 미인에게 눈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여인은 뛰어난 미인이라 할 만했다.
크고 또렷한 검은 눈동자는 얼핏 백치미마저 풍길 정도였고 사내라면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을 그러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러면서도 천하지 않은, 기품이 있는 아름다움이었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명모유반의 여인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갔다.
무려 일주일여 만에 찾아온 폭포수였다.
금의위 훈련동(訓鍊洞)은 지금껏 여자 훈련위사가 드물었다. 이번 기수의 두 여인을 포함해도 수년을 통틀어 모두 열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했기에 사내들만 득시글거리는 훈련동에는 씻을 수 있는 곳이 달랑 뒤편의 우물가가 전부였다.
비록 후미진 곳에 위치하였다 하나 여인으로서는 낭패한 일이었기에 자연 몸의 땀을 닦아 내는 정도로만 사용할 따름이었다.
그로 인해 불편을 느끼던 여인은 얼마 전 산을 오르며 훈련 도중 이곳 여산의 폭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인에게 있어 목욕을 하지 못함은 불편함을 넘어 수치심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제 반년이구나. 아직도 반년을 더 이곳에서 지내야 하는구나. 목욕 한 번 하기 위해 야밤을 틈타 폭포수에 몸을 담가야 하는 이곳에서…….’
여인은 문득 다 포기한 채 다시금 돌아가고 싶어졌다. 한때 가슴을 옥죄는 차가움만이 가득한 새장이라 여긴 적도 있었지만 자신에겐 집이자 안식처인 그곳으로.
자꾸만 약해지는 마음에 심란해진 여인은 깊은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머리를 차갑게 식혀 갔다.
‘약해지지 말자. 이러려고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잖아?’
한동안 중앙의 소용돌이를 피해 가장자리의 따스한 폭포수를 유영하자 답답하던 마음도 뻥 뚫린 듯 시원해지며 다시금 기분이 좋아졌다.
이윽고 한참 동안의 유영을 마치고 물가로 올라온 여인은 널찍한 바위 위에 나신을 뉘여 갔다.
드리운 월광 아래 드러난 여인은 월하신녀(月下神女)가 따로 없었다. 삼단처럼 흘러내린 흑옥(黑玉)과도 같은 흑단은 봉긋하게 솟은 두 개의 준봉을 감추었고 달빛 아래 교교히 빛나는 은빛 물방울은 그녀의 세요설부(細腰雪膚)를 투영하여 더욱 빛이 나게 하고 있었다.
달빛마저 놀라 눈을 가릴 만큼 절색의 미색(美色).
하나 다음 순간 여인의 표정이 낭패감으로 물드는 데는 일수유의 시간조차 걸리지 않았다.
바스락!
산중의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에 돌려진 여인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고, 여인의 시선이 맞닿은 그곳에 일순 당황스런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관량이 있었다.

사람들은 가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목도하게 되면 한순간 숨조차 멎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 관량이 그러했다.
두 눈을 가득 메운 여인의 전율적인 나신은 관량의 사고를 정지시켰고 한순간 숨마저 멎게 하였다. 그만큼 달빛 아래 교교히 드러난 여인의 나신은 황홀하였다.
하나 관량이란 사내가 본시 여색(女色)을 즐기는 자가 아니었던 데다 의지가 고목의 뿌리처럼 굳건한 이였기에 촌극의 시간이 흐른 후 금세 자신의 신색을 깨닫고 급히 고개를 돌려 갔다.
풍덩!
신형을 돌린 관량의 귀로 수면이 요동치는 소리가 들리며 여인의 매서운 노성이 뒤따랐다.
“흥! 파렴치한 자가 아닌가! 감히 본녀(本女)를 능멸하고도 살기를 바라더냐?!”
여인의 음성은 표독스럽기 그지없었다. 일생을 지켜 온 순결지신(純潔之身)을 들킨 것이니 천한 요부(妖婦)가 아니고서야 어찌 노하지 않겠는가?
관량은 낭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시 인세의 발길이 쉬이 닿지 않는 곳인지라 별다른 경계심 없이 무심코 들어선 걸음에 난감한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으니 딱히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나 자신의 고의가 아니지 않던가? 관량은 지극히 건조한 어투로 냉랭히 말했다.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소. 하나 내 의도된 바가 아님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소.”
관량은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일수유에 불과하였지만 너무도 강렬한 장면이었기에 그의 뇌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탓이었다.
하나 숲 속으로 향한 관량의 발걸음은 채 몇 걸음도 내딛지 않아 멈추어지고 말았다.
귓전으로 다가드는 파공성이 들려온 까닭이었다.
핫!
다급한 가운데 관량은 급히 신형을 좌로 틀었다.
콰직!
날아든 매서운 검봉은 관량이 있던 자리 다섯 치 앞의 고목에 가 박혔다.
치잇!
여인은 낭패한 기색으로 용을 써 뽑아내려 하였으나 고목 둥치에 깊숙이 박힌 검은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다.
어느덧 다섯 걸음을 물러서 그러한 여인을 바라보던 관량의 눈매가 일순 매서워졌다.
창졸간의 일이었으나 피하지 않았다면 저 고목의 둥치가 아닌 자신이 검봉에 꼬치처럼 꿰어졌을 터였다.
자칫 목숨을 잃었을 악랄한 일수에 노화가 치민 관량은 싸늘한 어조로 여인을 대하였다.
“흥! 내 비록 실수를 저질렀다 하나 어찌 이리도 독랄한 살수(殺手)를 전개한단 말인가?! 내 잘못에 대한 값은 치를 것이나 또다시 악랄한 수를 펼친다면 내 손속이 무정타 원망치 마시오!”
창대를 고쳐 잡고 신장과도 같이 달빛을 받아 우뚝 선 관량의 모습은 굳건하였다.
여인은 그러한 관량의 태도에 낭패한 자신의 모습과 비추어 더욱 수치심이 들었고 입술을 잘게 떨었다. 어느새 몸에 두른 흑의경장은 전신에 묻어 있던 물기에 젖어 있었고 연방 힘을 주어도 뽑히지 않는 검신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일순 상대에 대한 살심(殺心)마저 들었다. 숨겨 둔 진면목을 드러낸다면 눈앞의 악적을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었다.
하나 그리된다면 그토록 준비한 대계(大計)가 허투루 돌아가고 말 것이었다.
‘참아야 한다. 감정에 휘둘려 대계를 물거품이 되게 할 수는 없음이야.’
어찌나 수치심에 분노하였던지 입술에 피가 배어 나왔다. 그녀도 모르는 새에 깨문 모양이었다.
숙여진 여인의 고개가 들리며 관량을 향해 매서운 광망(光芒)이 폭사되었다.
흠칫!
여인의 눈빛을 대한 관량은 자신도 모르게 창대를 고쳐 잡으며 잔뜩 경계심을 일으켰다.
‘대체 저 여인의 눈빛은…… 마치 온몸을 밧줄로 옥죄는 듯하지 않은가?!’
어찌 관량이 알 수 있으랴? 여인이 펼치는 것이 내가공력(內家功力)에 의한 기세의 발현이라는 것을!
침음을 삼키며 잔뜩 경계한 관량의 귓전으로 여인의 차디찬 음성이 들려왔다. 흡사 천고의 한이 서린 귀곡(鬼哭)과도 같은 음산한 음성이!
“반드시 이 빚은 받고야 말겠다. 네놈의 목숨 값으로!”
북풍한설(北風寒雪)이 저러할까? 한기 어린 노성을 터뜨린 여인은 그렇게 용을 써도 뽑히지 않던 검을 단숨에 뽑아내며 신형을 돌려 사라져 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관량의 마음속에 여인의 모습은 씻을 수 없이 깊이 각인되고 있었다.
‘7호라 했던가? 7호……?!’
그가 알기로 여인은 자신과 같은 조에 속해 있었다. 그간 조우가 없었다 하나 반년의 세월을 함께 보낸 동료위사였기에 그녀가 누구인지는 당연히 아는 터였다.
복잡한 시선으로 여인을 응시하던 관량은 문득 발아래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보고 손을 뻗어 갔다.
그것은 비취빛의 옥비녀[玉簪]였다. 아마도 여인이 떨어뜨리고 간 것이라.
잠시간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옥비녀를 바라보던 관량은 가슴 섶에 넣어 깊숙이 갈무리하고는 자신 또한 신형을 돌려 장내를 떠나 갔다.
‘아무래도 오늘은 쉬이 잠이 오지 않을 듯하구나. 한바탕 창무(槍舞)라도 추어야겠다.’
어느새 폭포수변으로 다가든 관량의 신형이 번쩍이며 손에 들린 창대가 유유히 달빛을 수놓았다. 창세는 유난히도 힘이 넘쳤고 또한 변화무쌍하였다. 마치 머릿속을 가득 메운 여인의 모습을 떨쳐 내기 위한 몸부림처럼.


3

방 안[房內]. 장방형의 널찍한 방 안은 호사스러운 장식이나 가구 따위는 놓여 있지 않았으나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졌다.
그 중앙에 자리한 다탁(茶卓), 상석에 자리한 웃는 낯의 중년인을 위시하여 사 인(四人)이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과연…… 총교관님의 철관음(鐵觀音)은 언제 맛보아도 일절입니다그려. 입 안을 가득 메운 깊은 다향에 정신마저 혼미할 지경입니다. 하하하!”
문사풍의 중년인이 연방 감탄성을 터뜨리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고 그 옆에 자리한 미색(美色)의 여인과 철탑 같은 사내 또한 이에 고개를 끄덕여 갔다.
하나 정적을 깨뜨리며 굵은 저음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도통 모르겠소이다. 씁쓰름하고 떫은 물일 뿐이거늘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는 건지! 크음!”
족히 두 치[寸]는 될 듯한 깊은 검상이 얼굴을 가로지른 험악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무엇이 못마땅한지 뚱한 얼굴이었다.
이들은 훈련위사들의 교육을 맡은 네 명의 교관들과 총교관 엽우로 훈련의 추이를 보고받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예끼! 사람 하고는…… 어찌 차 맛을 모르고 중원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자주 마셔 보게.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그 맛을 알게 될 것이니!”
문사풍의 중년인 공손후(公孫譃)는 못마땅한 얼굴의 가전을 웃는 낯으로 조용히 타일러 갔다. 하나 여전히 가전의 얼굴은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펴질 줄을 몰랐다.
그러던 가전이 쾅! 하고 다탁을 치더니 벌떡 일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총교관 어른! 아직도 상부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는 것이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안하무인(眼下無人)격의 가전이었으나 일순 미간을 찌푸린 총교관 엽우는 여전히 예의 미소 띤 낯으로 담담히 말할 따름이었다.
“아직 별 소식이 없더군. 그리도 떠나고 싶은가?”
“물론이외다. 더 이상 저 젖비린내 나는 것들을 가르치다가는 제 명에 못 살 거 같소. 한 번 더 상부에 말해 주시구랴. 이 가전! 그 정도 요구를 할 정도는 된다 생각되오!”
가전이란 사내는 본시 낭인(浪人)으로 세상을 주유하며 크고 작은 싸움터를 전전하던 사내였다. 그러다 오 년 전 금의위에 입문하여 그 싸움 실력과 독기를 인정받아 한때 금의위 비밀 단체인 월영(月影)에 들 뻔한 적도 있을 만큼 뛰어난 자였다.
하나 어찌 된 일인지 이 년여의 활약 후 이곳 훈련동의 교관으로 좌천되어 근 삼 년여를 허송세월하고 있었으니 그 딴에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본시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체질상 맞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숱한 전장을 누비며 적의 피를 볼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던 그였기에 이런 고적한 생활에 염증이 난 이유가 컸다.
그리하여 상부에 자리를 옮겨 줄 것을 청한 지 벌써 일 년여, 여태껏 어떠한 말도 없었으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좋네. 내 이번 기수의 훈련이 마무리되면 입청하여 반드시 자네의 소원을 들어주도록 하지. 최전선의 황무위사면 족하겠는가?”
“황무위사라…… 그것도 최전선! 물론이오. 그리만 해 주신다면 내 그 은혜 잊지 않을 것이외다.”
금세 표정이 밝아지는 가전의 신색을 보며 총교관 엽우의 미소가 더욱 짙어져 갔다.
“그건 그렇고 이번 기수들의 실력은 어떻던가? 벌써 반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실력의 고하가 윤곽이 드러났을 것이 아닌가?”
“그것은 저 목염이 답해 드리겠습니다. 이번 차 서른여덟의 훈련위사 중 가장 떨어지는 자도 이전 기수의 중간 이상은 웃돌 정도이니 그간 보아 온 기수 중 단연 최고의 실력임을 감히 단언드릴 수 있습니다.”
“호오! 그 정도인가? 하면…… 그중에 월영에 들 만한 자들도 있단 말인가?”
무심결에 들린 월영이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던 가전의 검미가 일순 바르르 떨려 갔다. 그에게 있어 월영은 그렇게나 들기를 희망하였고 손에 잡힐 듯 그 기회가 찾아온 적도 있었으나 자신과는 연이 닿지 않는 것이었기에 작은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러한 가전의 모습에 잠시 측은한 눈빛을 보이던 목염은 이내 다시금 말을 이어 갔다.
“월영에 들 자라면…… 세 명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셋이나 말인가?”
엽우는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월영이 어디던가? 대명 천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암행술과 첩보 능력을 지니고 있는 불과 서른 명도 되지 않는 정예 집단이 아니던가? 한데 그에 들 만한 자들이 셋이나 된다는 것은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에 가장 두각을 보인다 보고드린 바 있는 23호 외에 7호와 38호입니다.”
“7호는 제가 검증할 수 있습니다. 제 암기술 수업에서 가장 특출한 능력을 보인 그녀는 비도술이 가히 일절이라, 훈련위사 중 유일하게 회류도(回流刀)를 연성하였습니다. 게다가 난영무형보 또한 경지에 들어 암행에 탁월한 재주를 보이는 바 월영에는 더없이 적합할 것으로 보입니다.”
암기술 교관인 취설(醉雪)이란 여인의 말이었다.
감탄한 표정으로 엽우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때 약간은 음산하기까지 한 가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38호 녀석이 장족의 발전을 보인 모양이구려. 하긴…… 녀석이라면……!”
“어떤 자이기에 가전 자네가 그리 말할 정도인가?”
“놈은…… 독한 놈이요. 온몸이 끊어질 듯 고통에 겨울 것이 뻔한데 남이 곤히 잠들 한밤중에 몰래 고련을 할 정도로…… 낭인으로 활동할 당시 수없이 사지(死地)를 넘나들며 온갖 기괴한 자들을 다 본 나이지만 그런 내가 보기에도 녀석은…… 독기로 똘똘 뭉쳐진 괴상한 자요.”
“일전에 들었던 그자로군? 야밤을 틈타 암굴을 지난다는 그자 말일세. 과연!”
엽우는 가전이 말한 38호라는 자에 대해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다시금 목염이 말을 이었다.
“38호는 그 성장의 끝이 어디일지 예측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워낙에 의지가 강하고 독기로 똘똘 뭉친 자라 지금껏 수없이 불가능할 것 같은 난제를 주었으나 반드시 이루고 말았었지요.”
“음…… 좋군. 좋아! 어찌 되었든 이제 반년도 채 남지 않았네. 이번 기수가 그렇게 뛰어나다 하니 교육에 더욱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야. 훈련을 마치자마자 최전선으로 배치가 될 것이니 말일세.”
“밖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습니까?”
엽우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지워지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백련교(白蓮敎)와 조정의 신료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