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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명제국이 세워진 지 어언 십여 년에 이르렀지만 백련교와 홍무제 주원장과의 앙금은 씻어지지 않아 하루가 멀다 중원 각지에서 민란을 조장하고 민심을 혼란하게 하는 등 끊임없이 말썽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데 백련교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조정 신료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라니?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네. 마치…… 역모(逆謀)라도 일어날 것처럼!”
“역모 말입니까?! 어찌…… 허허…….”
갑작스런 총교관 엽우의 말에 장내는 술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역모라니, 이 얼마나 갑작스러운 말인가?
“폐하의 문신들에 대한 탄압으로 중원 천하의 유생들의 규탄이 끊이지 않고 있네. 거기다 육부(六部)의 윗대가리에 앉은 인물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고 말일세. 명년부터는 아마도 금의위가 바빠질 것이네. 그러니 만전을 기하여 교육하도록 하게.”
총교관 엽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가는 중인들의 표정에는 근심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조용하기만 하던 천하에 다시금 좋지 않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으니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4화


“눈앞에 보이는 깎아지른 듯한 백 장에 달하는 단애(斷崖)가 바로 주작익산(朱雀翼山)이다. 단 두 시진(時辰)이 주어질 것이다. 정상에 가장 먼저 오른 다섯을 제외한 나머지는 뼈를 깎는 고련이 기다릴 것이다. 아마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음충스런 표정을 지어 보인 목염을 바라보며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좌중은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에 뒤덮인 정상이 보이지도 않는 높이의 수직에 달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어찌 이곳을 단 두 시진 만에 오른단 말인가?
하나 이를 해내지 못한다면 자신들을 기다리는 것은 상상치 못할 고련일 것이었다. 좌중은 연방 눈을 굴려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그때 들려온 목염의 시작 소리에 서른여덟 훈련위사들은 백 장에 달하는 단애를 오르기 시작했다.

후두둑!
일순 잘못하여 헛디딘 발에 주먹 크기의 돌덩이가 모래와 같이 부서져 나가며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져 갔다.
관량은 등골이 오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정신 차리자!’
산란한 정신을 가로저으며 채찍질한 관량은 다시금 비쾌하게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손에 들린 일곱 촌(寸) 암향비도(暗香飛刀)를 차례로 박아 넣으며 마치 답보하듯 절벽을 오르는 관량의 모습은 비조와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올랐을 때 눈앞으로 짙은 운무에 휩싸인 정상이 보였다. 이제 일다경 정도만 더 오른다면 능히 정상에 오를 터였다. 앞서 가는 23호를 제외한다면 다른 이들 또한 보이지 않았으므로 무난히 다섯 안에 들 수 있을 터였다.
문득 십여 장을 앞서 오르는 23호의 뒷모습을 보자 갑작스레 경쟁심이 이는 관량이었다. 항시 저자의 오만한 콧대를 한 번쯤 꺾어 주고자 마음먹어 왔거늘 아직 그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었으나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렇게 관량이 두 다리에 진력을 모으며 두 눈에 힘을 실어 갈 때 무심히 돌려진 시야에 흑의경장을 차려입은 한 여인이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일순 관량은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여인은 다름 아닌 전날 밤 여산 폭포에서 만났던 7호였다.
관량은 자신도 모르게 전날에 보았던 달빛 아래 선녀와 같던 여인의 나신이 떠오르며 가슴이 두근거려 옴을 느꼈다.
이에 고개를 가로저어 가던 관량의 시선과 올려다본 여인의 시선이 맞닿았다.
일순 놀란 표정을 짓던 여인의 눈빛은 삽시간에 노기가 깃들어 갔고 차디찬 한풍처럼 냉랭히 고개를 홱 돌리고는 신형을 움직여 갔다.
여인의 냉랭한 반응에 관량 또한 기분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흥! 일부러 본 것도 아니거늘 어찌 사람을 이리 매도한단 말인가?!’
거칠게 고개를 돌려 다시금 절벽을 오르는 관량의 귀로 낭패한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돌려진 관량의 시야에 절벽에 박힌 손가락 세 마디 정도의 비침에 대롱대롱 위태로이 매달려 있는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곳 주작익산의 단애를 이룬 암석 중에는 강도가 약해 잘 부서지기 쉬운 퇴적암 중에서도 쇄설암(碎屑岩)이 섞여 있었는데 관량으로 인해 산란된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잘못하여 쇄설암에 비침을 꽂아 넣다 낭패한 꼴을 당한 것이었다.
운무에 덮인 정상에서 불어오는 거센 한풍마저 동반되자 여인은 금세라도 떨어져 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일순 이를 바라보며 안색을 굳힌 관량은 미끄러지듯 절벽을 타고 여인에게 다가갔다.
한달음에 십여 장을 달려 내린 관량은 단애에 암향비표를 박아 넣어 몸을 지탱한 후 여인에게 한 손을 뻗어 갔다.
하나 여인의 눈빛은 여전히 냉랭하여 마치 네 도움을 받을지언정 차라리 떨어져 죽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에 관량은 차갑게 냉소했다.
“흥! 이것으로 어제의 빚을 갚으려는 건 아니니 염려 마시오.”
말을 마친 관량은 완강히 저항하는 여인의 손을 거칠게 잡아 끌어당겼다.
아아! 갑작스런 관량의 행동에 일순 당황한 빛을 보이던 여인은 이내 예의 차가운 낯빛으로 돌아서며 잡아당긴 반동에 몸을 실어 그대로 비조와 같이 관량을 넘어서 갔다.
휙휙!
한달음에 이 장여 높이의 절벽 위로 날아 내린 여인은 관량을 한 번 일견하고는 그대로 신형을 날려 절벽을 올라갔다.
관량은 쓴웃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저 여인의 마음을 돌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 여인에 대해 문외한인 그인데다 저리 냉랭한 태도를 보이는 여인은 접해 보지 않았기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일순 난감한 기색을 보이던 관량은 갑작스레 가슴섶으로 손을 넣었다가는 여인을 향해 무엇인가를 발출하였다.
쐐액!
갑작스레 귓전으로 들려오는 파공성에 고개를 돌린 여인은 우수에 든 검으로 그것을 쳐 내려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급히 손을 뻗어 잡아 갔다.
‘이것은?’
여인이 손을 펴자 드러난 것은 비취빛의 옥비녀[玉簪]였다. 이는 다름 아닌 여인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물건으로 전날에 잃어버려 안 그래도 근심해 오던 터였다.
의혹 어린 눈길의 여인의 귓전으로 관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그대가 떠나간 자리에 떨어져 있더군. 언뜻 보기에도 그리 가벼운 물건이 아닌 듯해서 돌려주는 것이야. 그러니 그런 차가운 눈빛 좀 거두지그래?!”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던 것도 잠시, 관량은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비쾌한 걸음으로 다시금 절벽을 올라 사라져 갔다.
관량이 떠나간 자리에 우두커니 남겨진 여인의 얼굴에 언뜻 홍조가 어려 갔고 여인의 복잡한 시선은 손에 들린 옥비녀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옥비녀는 다름 아닌 여인의 죽어 간 어머니의 유품으로 정인(情人)에게 주라 일러 주셨던 것이었기에.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갔다. 어느덧 여름은 가고 차가워진 북풍한설이 기승을 부리는 겨울이 되었다.
이제 훈련 기한인 1년이 되기까지는 칠 일이 남았을 뿐이었다.
어느덧 서른여덟의 훈련위사들은 당당한 금의위사로 성장하였고 이제 그 대미를 장식할 칠 일 동안의 마지막 조별 시험만을 앞두고 있었다.
초지에 들어서자 오랜만에 총교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랜만이네. 다들 멋진 모습으로 성장했구먼. 좋아. 이제부터 마지막 시험에 대해 말하겠네. 마지막 시험은 말 그대로 실전과 같은 훈련이네. 조별로 상대에 대한 정보(情報)를 누가 보다 정확하게, 그리고 흔적을 남기지 않고 빼내느냐 하는 것이 이번 시험의 목적일세. 칠 일 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실행하게. 대신 서로의 목숨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하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우승한 조의 조장에게는 그가 원하는 한 가지를 들어주기로 하겠네. 그럼 모두들 무운을 비네.”
총교관은 말을 마치고는 멀찌감치 물러섰고 뒤이어 교관들이 목함(木函) 하나를 가지고 왔다.
“지금부터 다시 조를 편성하겠다. 목함 속에는 얇은 나무 막대가 들어 있고 조 번호가 쓰여 있다. 순서대로 나와서 뽑도록 해라.”
그렇게 조 편성이 실시되었다.
이는 모두 관량이 속한 제8조 때문에 하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훈련이 진행될수록 관량이 속한 제8조의 사 인(四人)들은 모두들 저마다의 기량을 뽐내기 시작했다.
초반부터 그 기량이 돋보이던 23호뿐만 아니라 7호와 4호, 특히나 관량의 욱일승천한 기량으로 새롭게 조 편성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진행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관량은 제7조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23호만 떨어져 나가고 4호와 7호는 또다시 같은 조가 되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관량의 눈에 냉랭한 눈빛으로 일관하는 7호의 모습이 보였다.
벌써 여산 폭포에서의 일이 있은 지 반년이 다 되어 가건만 차디찬 한기 어린 그녀의 눈빛에 관량 또한 마음이 상해 냉소해 갔다.
‘흥! 여인의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게 한다더니 틀림이 없음이구나!’
절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을 구해 주고 옥비녀를 돌려준 날 이후로 그녀가 자신을 대하는 것이 달라졌다고 어렴풋이 느꼈건만 채 달포가 못 돼 여인은 전보다 더욱 차갑게 대하여 왔으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여인이었다.
하나 그것은 7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저자를 보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지? 그때의 일 때문인가? 하지만 이미 그 일은 용서했다 생각했거늘…….’
7호는 자신이 어째서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발을 헛디뎌 절벽에서 떨어질 뻔한 자신을 구해 주며 옥비녀를 건네주던 그날부터 관량을 보면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여인 특유의 감(感)은 그것이 어떠한 감정인지를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으나 7호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어째서…… 내가 그를?!’
수많은 상념으로 복잡해진 머리를 가로저으며 7호는 애써 자신을 타일러 갔다.
‘태어나 처음으로 순결지신(純潔之身)을 보인 사내이기에 수치심에 인한 것이야! 분명히 그럴 것이야!’
그러는 사이 조 편성은 어느덧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자! 이것으로 조 편성이 이루어졌다. 현재 시각 사시(巳時) 말엽. 잠시 후 오시(午時)를 기해 마지막 시험을 시작하겠다. 마지막 시험을 제외한 모든 훈련은 끝이 났기에 그 시각을 기점으로 금의위 내로 귀환할 것이며 귀환 후의 행동의 제약은 모두 해제될 것이다. 너희에게는 금의위 하급 무사(下級武士)의 패인 동패(銅牌)가 주어질 것이고 너희의 직급에 맞는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충고를 해 줄 것은 이것 한 가지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믿을 것은 너희 자신뿐이라는 것이다. 어떤 것도 믿지 마라. 비록 두 눈에 똑똑히 보이는 것일지라도! 이상이며 너희에게 무운을 빈다.”
총교관의 말과 함께 잠시가 흐른 오시(午時)를 기해 드디어 1년간의 훈련위사의 마지막 시험이 시작되었다.

시작과 동시에 38명의 훈련위사들 간에는 벌써부터 서로 간의 견제와 암투가 벌어지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상대를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이 훈련위사 시절을 거쳐 배운 것이었기에.
관량 또한 그 암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하나 어찌 된 셈인지 관량은 쉬이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하루, 하루가 지나 감에도 관량은 전혀 미동도 없이 금의위 내 식당과 주루만 드나들며 이런저런 얘기에 귀 기울일 뿐이었다.
마지막 시험이 고작 칠 일에 불과한 기간이었기에 시일이 지날수록 관량의 조원들은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이따금 답답한 조원들이 찾아가 호소를 해 봐도 관량의 반응은 묵묵부답(默默不答)! 좀 더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하나 조원 중 유일하게 동요하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7호였다.
7호는 이따금 관량이 자주 찾는 주루 등을 들러 멀찌감치 바라보다 이내 발길을 돌리곤 할 뿐이었다.
그녀는 복수를 다짐하며 이를 가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관량이란 사내가 어떤 사내인지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게 된 터였다.
관량이란 사내는 생각보다도 더 생각과 심기가 깊은 사내였다. 그는 분명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고 또한 그가 그리 자신하는 일이라면 분명 승부를 뒤집을 수 있는 패(貝)일 것이라 여긴 것이었다.
그 후로도 시일은 물과 같이 흘러갔다. 7호 또한 비록 관량이란 사내에게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불안감이 지워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점점 시일이 흘러감에 따라 불안감도 늘어가 한편으로 관량 없이 작전을 해 볼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훈련위사 마지막에 이르러 두각을 보이는 4호가 있다지만 다른 조원들에 비해 한 명이 적은 조인데다가 가장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관량 없이는 움직이는 순간 다른 조들의 먹이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나마 지금껏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것만도 대단한 것이었다. 한데 다른 조원들은 알지 못했으나 그간 수차례에 걸쳐 상대 조들에게서 공작이 들어왔었고 이를 모두 물거품으로 만든 것이 바로 관량의 솜씨였다.
한편 어느덧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두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관량이 비로소 신형을 일으켰다.
관량은 이른 아침부터 조원들을 자신의 방으로 모았다.
그리고 작전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작전을 들은 조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연방 목울대로 침을 삼켰다. 너무도 생각지 못한 작전인지라 그들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이제부터 한순간에 역전시키도록 하지. 그동안 다들 좀이 쑤셨을 거 아닌가?”
관량의 표정에 굳건한 자신감이 담겨 갔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승부를 뒤집을 대역전의 시작!


4

짙은 어둠이 깔린 밤[夜], 한 거구의 사내가 금의위 내 하급 무사들이 애용하는 주점인 가인(賈人)을 향해 걷고 있었다.
사내의 걸음걸이는 마치 자로 잰 듯 일정했고 발걸음 또한 매우 가벼웠다. 그러한 모습은 일견 거구의 사내의 외형에 미뤄 무학을 체계적으로 익힌 자임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허리춤에 매인 한 자루 장도(長刀)는 사내의 위풍당당한 체구에 꽤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사내가 모퉁이를 돌았을 때 갑작스럽게 유엽비도 두 개가 사내의 앞, 뒤를 노리며 명문혈(命門穴)과 곡지혈(曲池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삼엄하던지 바람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로 거세었다.
차앗!
그러나 사내는 당황한 기색 한 점 없이 극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호쾌하게 고함을 지르고는 신속하게 장도를 빼 들고 유엽비도를 맞아 갔다. 경지에 다다른 반양의도법(反兩儀刀法)의 재주였다.
챙! 챙!
사내의 도법은 동작이 매우 커서 일견 그 위력은 클 것이나 속도와 정확도는 떨어져 보였다.
한데 유엽비도를 쳐 낸 방금 전의 한 수는 그 위력에 버금가는 속도와 정확도를 자랑하였다. 새삼 사내의 도법이 대단히 여겨졌다.
그러나 숨 돌릴 여유도 주지 않은 채 다시금 유엽비도 세 개가 날아왔다. 이번 유엽비도는 두 개는 직선으로 강력한 바람 소리를 동반하고 날아왔으나 한 개만은 느릿느릿한 속도로 천천히 흔들리며 날아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이를 보고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되레 긴장하는 게 아닌가? 느릿느릿한 속도로 비도를 날리는 기술은 회류도(回流刀)라는 것으로 암기술의 절정 기술이었다.
이 느릿느릿한 비도술은 상대에게 천천히 다가서다 면전에 이르러 빛살 같은 속도로 예측할 수 없는 각도로 꺾이며 곡선으로 적을 꿰뚫는 기술이었다.
그러니 장도를 든 사내가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사내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회류도를 막아 내기 위해서는 온몸의 기량을 모조리 보이지 않으면 안 될 터였다.
그때부터 사내는 마치 장도를 풍차처럼 휘젓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내가 일 년 동안의 십팔반무예 중 반양의도법의 수련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기술로 만들어 낸 풍도술(風刀術)이라 이름 붙인 것이었다.
마치 풍차가 돌아가듯 주변을 칼의 그림자로 뒤덮은 사내는 먼저 날아온 유엽비도 두 개를 잘라 내었다.
서걱!
순식간에 가랑잎처럼 땅에 떨어져 내린 유엽비도는 그러나 사내에게는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다.
이미 뒤를 이어 회류도의 기술로 쏘아진 유엽비도가 지척에 이르렀음이었다.
사내의 반 장의 거리까지 압축해 온 비도는 순식간에 괴이한 곡선을 그리며 쏜살같이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한데 공교롭게도 비도가 노린 곳은 사내의 머리 꼭대기이자 사혈 중 가장 독하다고 이름난 백회(百會)였다.
사내가 깜짝 놀라서 일도양단의 기세로 비도를 쪼개어 갔으나 그 비도에는 눈이라도 달렸는지 풍도를 피해 갔다.
꼼짝없이 목숨을 잃게 된 사내가 눈을 부릅뜨자 백회혈을 쪼갤 듯 날아들던 비도가 순식간에 되돌아갔고 잠시 후 눈앞에 사뿐히 한 여인이 내려섰다.
그 여인의 손에는 주먹 크기의 동패가 하나 들려 있었다.
방금 사내의 가슴에서 빼낸 것이었다.
여인은 다름 아닌 7호였다.
7호는 관량의 지시를 받고 평소 이 시간에 주루 가인을 찾는 습관을 가진 풍도술의 사내 31호를 노린 것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동패를 얻어 낼 수 있었다.
“31호! 동패는 내가 가져가겠어.”
그리고는 순식간에 몸을 날려 사라져 갔다. 한데 신형을 날리는 7호의 모습에서는 어딘지 모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어려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38호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아! 설마?! 안 돼!’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녀가 이리 불안해 하는 것인가?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7호는 급히 신형을 날려 갔다.
한편 31호는 무공에서 패한데다 언제 가져간지 모를 동패까지 빼앗기자 낭패한 신색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가슴속으로 불을 토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이성은 차갑게 식어 갔다.
‘모두들 7호를 너무 과소평가했어. 그녀는 지금껏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게다가 그 실력은 23호와 38호와도 견줄 정도다!’

그 시각, 4호와 19호 또한 동패 하나씩을 획득하였고,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바야흐로 제7조의 회심의 일격이 성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관량은 지금 23호를 쫓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자신의 조원들은 잘해 주고 있을 터였다. 그만큼 지난 오 일의 시간 동안 철저히 상대를 파악했으며 그에 맞는 상대를 배정해 준 탓이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은 가장 값진 동패를 얻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그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진회하 동편의 스물여덟 준봉 중 중앙에 자리한 자산(紫山), 바로 23호가 향한 방향이었다.
‘오늘 비로소 실력의 고하(高下)를 가려 보자, 23호!’

산중은 깊고 깊어 한낮이건만 하늘을 뒤덮은 높게 솟은 거목들에 가려 숲은 어둡기까지 할 정도였다.
반경 십여 장에 이르는 낮은 수풀로 덮인 원형의 공터에 이르러 23호의 걸음은 멈춰졌고 서서히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나와라!”
어찌나 무미건조하던지 마치 사람의 소리가 아닌 듯 들릴 정도였다. 그때였다. 그런 그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그의 시야 안으로 장창을 꼬나 쥔 한 인형이 들어왔다.
그는 다름 아닌 관량이었다.
일순 광망을 터뜨린 23호의 입매가 비틀리며 싸늘히 뇌까렸다.
“네놈 짓인가?”
“물론! 별다른 이유는 없어. 단지 네 녀석과 한번 겨뤄 보고 싶었거든. 그건 너도 그렇지 않았나? 나만의 착각일까?”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여유로운 신색의 관량의 말에 23호는 피식 웃었다.
“그렇군. 역시…… 예사 인물이 아니었던가?”
하나 그의 신색에서는 어떠한 당황의 빛도 엿볼 수 없었다. 막다른 길목까지 몰린 상황이거늘.
23호, 공교롭게도 그 또한 야음을 틈타 남몰래 수련을 해 오고 있었다. 그 수련 장소가 바로 이곳 자산(紫山)이었고 지난 오 일여의 기간에 관량은 그의 이러한 점을 알아냈고 이를 이용하여 지금의 순간을 만들었다.
23호가 자산으로 수련을 간 틈을 타 그의 조원들에게서 그를 고립시키고 이렇게 그와 겨룰 기회를 만든 터였다.
아마 지금쯤 제7조의 다른 조원들은 그의 지시대로 23호가 속한 조원들의 동패를 노리고 격전을 벌이고 있을 터였다.
두 사내 모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단지 눈앞의 상대를 꺾으면 되는 것을!
한 발, 두 발 관량은 23호의 주변을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발의 움직임과 동시에 두 손으로 맞잡은 창대가 무섭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붕붕!
원(圓)을 그리며 장창은 무섭게 회전하였다. 하나 이를 바라보는 23호의 신색은 유수(流水)와 같이 고요하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