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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턱!
그 순간 관량의 발걸음이 멈춰지며 오른발을 뒤로 쭉 뻗어 낸 후 빛살처럼 뻗어 나갔다.
스스슥!
무릎에 닿을 듯 자란 수풀이 날아든 비조에 크게 요동쳤다. 그리고 뻗어진 회전하는 창날!
챙!
하나 23호는 여전한 신색으로 검집째로 이를 막는 게 아닌가?! 관량은 자신의 공격이 막힌 것보다도 이를 너무도 손쉽게 검집으로 막아 간 23호의 태도에 더욱 분노하였다.
“흥! 이것도 받아 봐라! 이얏!”
순간 투기(鬪氣) 어린 관량의 창세가 급변하였다. 뻗어지는 창세는 번갯불처럼 쾌속의 빠르기로 23호를 엄습해 왔다.
따다당!
검집을 들어 급히 막아 가는 23호였으나 단 세 번의 부딪힘으로 어느새 검집엔 눈에 보일 듯 선명한 금이 가 있었고 이에 검을 뽑지 않을 수 없었다.
“네놈은…… 지금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내 검은 한 번 뽑히면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마니까!”
스릉!
날렵한 검신을 드러낸 검(劍)은 백광을 머금고 요요하게 빛을 내었다. 척 보기에도 명장의 손길이 닿은 듯한 기보(奇寶)!
관량 또한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켜 갔다. 그만큼 드러난 검의 위용은 인세에 보기 드문 것이었다.
하나 그러하던 것도 잠시, 이내 관량은 기이한 눈빛을 띠며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과연…… 그래야 네놈답지. 그럼 제대로 한번 해볼까?!”
창공을 가르는 일창(一槍)과 이를 맞아 가는 일검(一劍).
그들의 격돌은 백중지세(伯仲之勢). 마치 청룡과 백호가 어울리는 듯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어느새 두 사내의 얼굴에는 자신들도 모르는 새에 희열에 찬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손에 쥔 병장기로 느껴지는 상대의 힘과 투지가 그들의 심금을 울린 탓이었다.
23호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한 자로군. 이것이 과연 외공(外功)의 단련으로 가능한 무위던가? 이대로라면 반나절을 더 겨루어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겠구나.’
관량의 무위는 뼈를 깎는 고련이 아깝지 않을 고절한 것! 암중에 막강한 무력을 숨기고 있는 23호조차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한다. 숨은 힘을 드러내야 하는가?’
일순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그리한다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야 했으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하앗!
갑작스레 거센 공격으로 관량을 물려 낸 23호는 의혹 어린 관량의 발 앞으로 무엇인가를 던져 냈다.
챙그랑!
“네 녀석 조원들이 이 동패를 모은다지?! 분명 네 녀석이 계획한 일일 테고 말이야. 가져가라! 내게 그따위 동패 따위는 필요치 않으니!”
던져진 동패로 향하는 관량의 시선을 보며 23호는 신형을 돌려세웠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비록 그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었으나 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사사삭!
산 아래쪽으로 난 소로에서 나뭇가지가 부딪히는 따위의 소리가 들리며 한 사내가 장내로 날아 내렸다.
사내는 훈련위사 중의 하나이나 그다지 두각을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한데 놀랍게도 장내로 내려선 사내는 23호의 앞에 부복하며 고개를 숙여 갔다.
“대주(隊主)! 정체가 발각됐습니다. 지금 흑영(黑影)이 이리로 향했다 합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흑영이? 어찌 단 하루를 앞두고 우를 범했단 말인가?”
23호의 얼굴에 전에 볼 수 없었던 분노한 기색이 어려 갔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일 년을 참으며 고대하던 일이 단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었으니 말이었다.
“한시가 급합니다. 서두르십시오!”
다시금 경호성을 발하는 수하의 말에 23호는 하는 수 없이 신형을 돌려세웠다. 흑영(黑影)이 누구던가? 금의위에서도 비밀리에 움직이는 강호의 숨겨진 고수들로 이루어진 무력 단체가 아니던가? 그들과 조우한다면 십중팔구 탈출은 불가능할 터였다.
이에 급히 신형을 날리던 23호의 발걸음은 갑작스레 들려온 파열음에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파삭!
그것은 수십의 파편으로 조각난 동패의 잔해였다.
노기에 찬 23호의 두 눈으로 관량의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내 성격이 그렇거든. 꼭 뒷간 갔다가 뒤를 못 닦고 나온 것처럼 찜찜한 것이 도저히 안 되겠다. 네놈들의 뒤가 구린 데가 있는 모양인데 곱게는 못 보내 주지.”
이 순간 관량의 모습은 저잣거리의 왈패가 따로 없었다. 그는 지금 도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23호가 돌아서서 자신에게 덤벼 주기를. 그래서 못다 한 승부를 결정짓게 되기를.
“좋다. 네놈이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내 그리해 주지.”
“하나 대주님! 한시가 급한…….”
수하의 말은 들려진 23호의 검에 다물어지고 말았다.
그만큼 검을 들어 올린 23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와 위압감은 가히 개세무비(蓋世無比). 평소 그의 성정을 아는 수하는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으로 보일 만한 흑빛 기운이 그의 전신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혈기(血氣) 어린 듯 사이하고도 전율스런 기운!
“네놈은 충분히 대단한 무인이었다. 진면목을 드러내지 않고는 나조차 막아 내기 힘들 정도로……. 하나 너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디뎌진 일 보(一步)에 다섯 촌은 될 듯한 족적이 찍혀져 갔다. 발걸음이 더해 갈수록 그의 전신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기운이 넘실거렸고 이는 마주한 관량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관량은 갑작스럽게 달라진 23호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찌 사람이 이런 기운을 흘려보낸단 말인가?
하나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느새 다섯 걸음 앞으로 다가온 23호에 관량 또한 자신의 최절초를 준비해 갔다.
관량의 굳건한 두 다리에서는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기운이 용솟음쳤고 두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상대를 베어 넘길 듯 신광이 번뜩였다. 창은 어느새 관량의 몸과 하나가 된 듯 지극히 자연스럽게 더할 나위 없이 밀착되었다.
눈앞에 선 관량의 존재감에 23호 또한 심중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한 자다. 아무리 백일창(百日槍)이라지만 이렇게나 빠른 성장을 보이다니…….’
하나 그는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그에게 내려질 것은 죽음뿐이었다.
어느새 23호의 주변으로 검은 아지랑이들이 피어나며 공간을 장악하였고 이는 다섯 걸음 떨어진 관량에게까지 그 여파가 미칠 정도였다.
관량은 숨 막힐 듯한 기운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마치 그대로 있으면 기운에 질식해 죽을 것만 같은 느낌에 그는 굳게 마음을 먹은 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느릿하게 이동하는 관량이었으나 어찌 된 셈인지 느린 듯한 발걸음이 어느새 23호 앞에 삼 장을 격하고 서 있었다. 금의위 훈련위사로서 익히게 되는 난영무형보(亂影無形步)의 재주였다.
그리고 관량의 전신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찰나의 일이었으나 관량의 전신은 마치 해일이 밀려오듯 너울거렸고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전신의 떨림을 멈추고는 빛살같이 창을 찔러 갔다.
관량이 지난 1년여간 갈고닦은 기술인 극강의 빠르기와 바위마저 뚫는 위력을 지닌 섬전창(閃電槍)이 펼쳐진 것이다.
온몸의 근육이 팽창되었다가 마치 막힌 둑이 열린 물길을 통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가듯 일순간 말 그대로 섬전과도 같이 찔러 갔다.
창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극쾌의 찌르기라 할 만했다.
흡사 창의 중심은 바람이 일지 않는 듯했다.
태풍의 중심이 저러할까?
섬전창에 휩쓸린다면 어떠한 것도 모조리 뚫릴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그 전면에 놓인 23호는 아득하게 밀려오는 창의 폭풍우의 한가운데에 처하게 되었다.
‘과연! 마음의 공부를 하지 않은 자가 이런 위력을 낼 수 있다니! 하나…… 빈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들려진 검이 앞으로 쭉 뻗어지며 일도양단(一刀兩斷)의 모양으로 창세를 맞아 왔다. 흑빛 아지랑이를 머금은 검의 기세는 가히 땅을 허물 정도!
관량은 문득 섬전창의 강맹한 기세가 그대로 반쪽으로 갈리며 속절없이 짓이겨 나가는 것을 보았다.
어느새 면전으로 다가든 흑빛의 검세, 다급히 창대를 들어 이를 막아 가는 관량이었으나 당랑거철(螳螂拒轍)에 불과한 것!
관량은 실 끊어진 연의 그것처럼 속절없이 오 장여를 날아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쿨럭!
관량의 입에서 검붉은 피와 함께 내장 조각이 섞여서 토해졌다.
전신을 가눌 수 없게 하는 고통에 정신이 아득한 가운데서도 관량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저것이 인간의 검이란 말인가?
분명 자신의 섬전창은 바위마저 두부 뚫듯 꿰뚫었고 그 무엇도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자부심 또한 확고한 터였다. 한데 이렇듯 속수무책으로 깨어지다니!
관량은 알까? 그가 지금 강호상의 극악하기로 유명한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에 당한 것을 말이다. 그것도 강호상에 금지된 마검(魔劍)에 의한!
관량에게 발걸음을 디뎌 가며 23호는 싸늘히 말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그만 죽어라!”
그의 우수(右手)에 들린 요요로운 빛을 발하는 검에는 흑빛의 아지랑이가 연방 일렁이며 죽음의 손길을 내뻗고 있었다.
한 발, 두 발 어느새 관량의 삼 장 앞에 이른 23호의 우수가 들려 갔다.
그리고 들려진 우수의 흑빛 검이 관량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리려는 찰나! 갑작스레 장내로 한 인형(人形)이 뛰어 들어왔다.
“사형! 그 사람을 해쳐서는 안 돼요!”
한달음에 장내로 뛰어들어 관량의 앞을 막아선 인형은 여인이었고 그녀는 다름 아닌 7호였다.
“무슨 짓이냐?! 대체 왜 네가 그자를……?!”
“사형! 여기서 흑염라(黑閻羅)를 시전한다면 지금껏 우리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아요! 그것은 사형이 더 잘 알잖아요?”
“이미…… 끝났다. 저들이 눈치 챘다 하더구나.”
이에 완강한 태도로 일관하던 여인 또한 낭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그럴 수가?!”
“그러니 어서 비키거라. 녀석을 죽이고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다시금 요검을 들어 올린 23호의 일검이 관량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릴 때 번쩍거리며 다가든 물체에 또다시 막히고 말았다.
“이 무슨 짓이냐?!”
일검을 막아선 그것은 다름 아닌 7호가 발출한 암향비도(暗香飛刀)였으니 대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 혹여 그 녀석을?!”
의혹에 찬 23호의 음성이 들려오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7호가 얼른 고개를 저어 갔다.
“아니에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 7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자신이 어째서 사형의 일검을 막아 갔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그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
“이잇! 비켜라. 내 당장 저 녀석을 처죽이겠다.”
노기를 참지 못한 23호는 기어이 앞을 막아선 7호를 밀쳐 냈고 관량을 향해 다시금 검을 뻗어 갔다.
하나 그의 일검은 또다시 멈춰지고 말았다.
갑작스레 들려온 비명 소리 때문이었다.
“크악!”
깜짝 놀라 뒤돌아선 그의 눈에 피분수를 토하며 쓰러지는 수하의 모습과 함께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무수한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들은 흡사 유령과도 같은 몸놀림이었는데 어느새 그들은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23호의 입술이 질끈 깨물어지며 분노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흑영…….”
흑영(黑影)! 명제국의 정보기관이자 홍무제 주원장의 오른팔인 금의위에서도 요인 암살 및 강호 무림인들에 대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전문적인 암살자 집단의 이름이었다.
한데 그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족히 수십에 달하는 수였으니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관량은 아득해져만 가는 정신의 끈을 부여잡으며 가까스로 눈을 떠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는 여인의 모습은 안타까웠다.
‘7호…….’
흐릿해져 가는 두 눈 가득 그녀의 모습을 담아 가던 관량은 이윽고 정신을 잃어 갔다.
5
관량이 다시 깨어나 눈을 뜨자 낯선 방에 누워 있었다.
자신이 묵던 방에 비해 규모만 좀 더 컸지 더 나아 보일 것이 없을 만치 간소한 방이었다.
신형을 일으키려던 관량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다시금 쓰러지고 말았다.
크윽!
마치 전신을 칼로 난자하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고 관량은 고통에 이빨을 악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던지 잇새로 붉디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하나 그리하고 나자 고통이 약간은 가신 듯하였고 그제야 비로소 관량은 시선을 돌려 창문에 등을 보인 채 선 괴인을 바라보았다.
관량은 무척이나 힘들게 입을 떼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총교관님!”
그러자 등을 보이던 자가 돌아섰다.
그는 다름 아닌 만면에 미소를 지어 보이는 사십 대 중년인 총교관 엽우였다.
“이제 정신이 드는가? 자네가 정신을 잃은 지 벌써 나흘째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지. 심맥에 무리가 갔으나 절단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한 한 달 정양하면 나을 수 있다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그는 허연 치아를 드러낸 채 연방 미소를 지어 댔다.
“결과는 어찌 되었소? 23호는? 시험은?”
‘그리고 7호는…….’
목울대로 올라왔으나 차마 뒷말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관량이었다.
“하하. 진정하게! 하나하나 차근차근 물어봐야지. 원! 사람 하고는. 그래, 먼저 결과를 물었나? 아직 결과랄 것은 나오지 않았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과를 이름이라면 자네가 의도한 대로 23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흑영들에 의해 압송되었네. 이미 그는 우리의 손을 벗어나서 흑영들에게 넘어간 상태라 더 이상의 진행 사항은 나도 들은 바가 없네. 금의위에서도 그건 극비거든! 한데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이네만 대답해 주겠는가? 자네는 어떻게 23호가 첩자라는 것을 알아챈 것인가?”
한동안 관량은 그에 답하지 않은 채 멍하니 허공만을 응시했다.
그로서도 23호가 첩자라는 생각은 추호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공교롭게 상황이 흘러 그의 구린 속내를 들여다보게 된 것일 뿐.
어쨌든 총교관에게 그 같은 사실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관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연한 것이오.”
그의 말에 총교관은 껄껄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랬구먼. 23호로서는 참으로 공교롭게 된 것이로군. 하필 자네와 겨루던 중 흑영이 나타나다니…… 여하튼 시험은 알다시피 나흘 전에 끝이 났네. 우승은 23호가 속했던 3조가 했네. 녀석의 실력이 대단하긴 하더군. 이미 모든 조에 대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고 있었어. 녀석이 빠졌지만 그 조원들의 혐의점과 녀석과의 관련성은 전혀 무근으로 밝혀졌기에 자연스럽게 결과대로 우승을 주었지. 우스운 것은 그중 자네 7조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더군!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나 그것은 자네만이 알고 있겠지. 2등은 1조가 하였네. 역시 자네 조와 3조를 제외한 모든 정보를 알아냈더군. 그리고 3등이 문젠데…… 사실 다른 이들은 이 문제에 대해 꽤나 고심하는 눈치였어. 나머지 조들의 수준은 비슷비슷한데 유일하게 한 조가 다른 조들과 달리 독특한 성과를 올렸거든. 자네도 예상하겠지만 이건 순전히 자네 조 때문이네. 다른 조원들이 상대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정보전을 벌일 때 자네 조는 엉뚱하게도 상대의 동패만을 얻으려 다녔을 뿐이니 말이야. 그러나! 내가 그 자리에서 일단 3등을 보류시켰네. 자네가 깨어나면 묻고 싶었거든.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그럼 묻겠네. 왜 동패를 모으게 하였는가?”
그의 물음은 언제나 관량의 머릿속에 예정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이랄 것도 이미 머릿속에 갖춰진 터였다. 하나 관량은 자신이 지금껏 생각해 왔던 대답이긴 하되 본래의 대답과는 약간 다른 대답을 했다.
“동패가 진정한 상대의 내력이기 때문이오. 알다시피 우리는 금의위의 훈련위사요. 이미 이곳에 들어오면서 지금껏 우리의 신분은 사라져 버렸소. 그런 이유로 작전 도중 상대에게 붙잡혔을 때 이런 정보 따윈 얼마든지 불어도 상관이 없소. 그러나 금의위의 위사임을 상징하는 동패는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 되는 정보이오.”
관량의 말에 총교관 엽우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했다.
“하하하. 역시 자네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먼! 그래. 자네의 말이 정답일세. 나 또한 그런 목적으로 이번 마지막 시험을 계획한 것일세. 그리고 결국 자네 조인 3조가 가장 우수한 결과를 얻은 셈이지만 자네 조는 엄연히 3등이네. 왠 줄 아는가? 그것은 말이야, 자네 때문일세. 자네는 7조의 조장 격인 자이네. 한데 자네는 23호에 대한 경쟁심 하나로 조원들을 버려 두고 단독 행동을 하였네. 이는 금의위사의 기본 수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내 오랜 경험에 비추어도 가장 잘못된 선택이었네. 그로 인해 자네 7조가 위험에 빠질 뻔하였으니 3등이 된 것이야. 알겠는가?”
관량은 단지 어깨를 으쓱거렸을 뿐 여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던 터였다.
그 같은 선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하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씩 잘못된 결정인 것을 알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관량에게는 이번의 경우가 그랬다.
그에게 있어 23호와의 일은 반드시 마무리 지어야 할 우선되는 일이었기에.
“자! 어서 훌훌 털고 일어나게! 이럴 시간이 없으니 말이야. 지금도 자네 동기들은 이미 일선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네. 일종의 새로운 시험을 치르는 중이지!”
갑작스런 그의 말에 관량은 의문이 담긴 시선을 던졌다.
“왜? 몰랐는가? 이것으로 훈련이 끝이 났다고 누가 그러던가. 고작 한 단계를 통과했을 따름인데? 축하하네. 자네는 단지 1단계를 통과하였고 이제 2단계를 치르게 될 것이네. 놀리려는 게 아닐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네는 자부심을 느낄 필요가 있다네. 이 1단계는 사실 비밀 요원과 일반 금의위 하급 무사를 가려 내기 위한 시험이었다네. 그로 인해 3등을 한 자네 조까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5개 조는 모두 탈락되었네. 그들은 이미 일반 금의위사로 배치가 되었다네. 그러니 좋게 생각하란 말이야. 흠. 어찌 되었든 2단계는 말이야,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단계라 볼 수 있네. 일선에 배치되어 정보를 빼 오고 조작하는 것을 실전으로 평가하는 것이니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이제부터 자네는 훈련위사 38호가 아니라 중서성(中書省) 포정사사(布政使司) 낭관(郎官) 관량일세. 자네가 그곳에 배치된 이유는 당금의 승상 호유용(胡惟庸)에 대한 첩보 임무를 상부에서 자네에게 부여한 탓이네. 알겠는가?”
이에 관량은 어찌나 놀랐는지 자신도 모르게 아픈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말았다.
곧이어 찾아온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결국 쓰러지듯 털썩 누워 버렸지만 얼마나 관량이 심적으로 동요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아니, 무관에게 갑자기 낭관이 무엇인가, 낭관이?
낭관이라 하면 문사가 아닌가? 그것도 포정사 상서(布政使尙書)의 보좌관을 이름이 아닌가?
“하하. 걱정할 필요 없네. 자네의 상관인 포정사 상서 여의(旅義)는 우리 쪽 사람일세. 그러니 자네야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말만 잘하면 업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걸세. 거기다 이 사람아, 그 자리가 얼마나 좋은 자린 줄 아는가? 녹봉이 자그마치 사백 석일세. 원! 이거 나보다도 높은 거 아닌가? 일단 그렇게 알고 몸조리 잘하게. 내 다음에 또 들르지. 아! 그리고 내 분명히 단언하네만 지금껏 자네만큼 뛰어난 훈련위사는 본 적이 없네. 자네는 타고난 정보 요원인 게야. 암! 내 장담하네!”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총교관 엽우가 나가고도 한동안 관량은 머리가 복잡해 이런저런 상념을 하느라 골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수가 있나?
이내 마음을 정리하는 관량이었다.
그런 면에서 관량은 이미 닥쳐온 일에 대해 후회하거나 돌아보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지난 일은 과거의 것으로 치부한 채 닥쳐올 일에 대한 고민을 하는 자였다.
“젠장. 이제 할 짓이 없어서 먹물쟁이까지 하게 생겼구먼. 아! 관량. 네놈은 뭐 이리 운수가 꼬이는 거냐. 그래도 별수 있나. 8등관에 녹봉 사백 석이라……?”
사백 석이라면 그리 가벼운 금액이 아니었다. 작은 저택 한 채도 충분히 살 수 있는 것이었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문득 관량은 정신을 잃기 전 어렴풋이 보았던 7호가 떠올랐다.
‘어째서 7호가 그곳에 나타났던 것이지?! 그리고 그녀는 어디로 배정되었을까?’
그녀를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져 가는 관량이었다.
‘인연이 닿는다면 언젠가…… 보게 되겠지. 언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