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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제3장 포정사사(布政使司) 낭관(郎官) 관량
1
남경의 금릉(金陵).
이곳은 당금의 황제인 홍무제가 거하는 황성이 있는 곳이었다. 하루에도 수백의 문무백관들이 드나들던 이곳이 최근 들어 눈에 띌 정도로 그들의 발길이 줄어들어 무척이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홍무제의 폭정 때문이었다.
당금의 황제인 홍무제 주원장(朱元璋)은 12년 전 대륙을 통일하고 남경에 도읍하여 명제국임을 온 천하에 알리고 친히 자신을 태조라 칭한 후 대대적인 개혁을 감행하였다.
문무(文武)와 내외(內外)에 걸친 개혁은 나라를 점차 안정시켜 갔고 백성들의 삶 또한 더욱 나아져만 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주원장의 폭정이 시작되었으니 그 한 예가 문자(文字)의 옥(獄)이었다.
주원장은 관리들이 상주하는 문서와 시문을 조사해 그의 과거 행적과 관련되는 것이 있으면 처벌했다. 대머리처럼 빛난다는 의미의 광(光), 민둥산이라는 독(禿), 도적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 승(僧)과 발음이 비슷한 생(生) 등의 글자를 쓴 것이 있으면 무조건 처벌했다. 이것은 주원장이 승려 생활을 할 때 머리를 깎았었고, 홍건적 집단에 가담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 비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정에 이르자 문관들은 상소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내거니와 일반 문서와 시문을 작성하는 데에 있어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다. 그리고 혹여나 가끔씩 변장을 한 채 순시를 돈다는 주원장의 눈에 띌까 무서워 아예 황성 근처로는 가지 않으려 하였으니 가히 문관들에게 암흑의 시기가 찾아왔다 할 만했다.
남경성 중화문(中華門) 내 중서성(中書省).
이곳은 당금의 명제국의 행정 기관의 중추에 해당하는 곳으로써 육부에서 올라오는 모든 행정을 최종적으로 처리하는 곳이었다.
그러한 중서성의 정문을 통해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사내가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어찌나 무겁고도 힘이 없던지 바라보는 사람도 절로 힘이 빠질 정도였다.
사내는 머리에 검은 오사모(烏紗帽)를 썼고 몸에는 남색 반령포(半嶺袍)를 입었는데 그 보자 문양이 난초(蘭草) 문양인 것으로 미루어 종 구품에 해당하는 문관으로 미뤄 보였다.
사내에게서는 한눈에 보기에도 헌앙한 기상이 엿보였다.
약간은 작은 듯하나 맑은 눈에는 정광이 깃들어 있었고 또한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그의 강직한 절개를 느낄 수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원관녕(元官寧)으로 종 구(九)품에 해당하는 중서성 포정사사의 태창령(太倉令)를 맡고 있었다. 태창령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곡식을 수납하는 관리로서 그 급수에 비해 비교적 녹봉이 높은 편이라 할 수 있는 자리였다.
터벅터벅 중화문을 지나는 원관녕의 마음은 천 근의 바위라도 짊어진 듯 무겁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은 도저히 업무를 볼 흥이 나지 않았다.
혹여나 상부에 올린 문서에서 꼬투리를 잡아 갑작스럽게 도찰원이나 금의위로 붙들려 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특히나 신경 쓰이는 것은 관사(官司)에서고 퇴청 후 집에 가는 길이고 간에 빼놓지 않고 자신의 행적을 쫓는 검교 때문이었다.
검교(檢校)는 주원장이 백관들의 언행을 감시하기 위해서 파견한 자들로 관 안에서든 퇴청 후 본가에서든 자신이 맡은 자의 뒤를 따르며 감시하곤 하였다.
최근에 문신 전재(錢宰)가 퇴청 후에 본가로 향하는 길에 답답한 마음에 시국의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한 수의 시를 지어 읊었는데 하필 그것이 검교들에 의해 주원장의 귀에 들어가 전재의 구족을 멸한 사건이 있었다.
그 후로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신들이 문자의 옥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는데 이로 인해 모든 문신들의 마음이 원관녕과 같았다.
다행히 원관녕의 검교는 비교적 업무를 열성적으로 보는 자가 아니었던지라 거의 일주일에 사 일은 보이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원관녕은 답답한 마음에 본가로 가던 발길을 돌려 부자묘의 번화가로 향했다.
최근에 원관녕은 가슴속에 쌓인 울분을 술로 달래곤 했는데 그가 자주 찾는 곳이 부자묘 내의 청루인 월루(月淚)였다.
이곳은 전문적으로 창기를 성적으로 판매하는 홍루와는 달리 가무와 시예를 익힌 청기(靑妓)가 술을 따르는 곳으로 찾는 손님들이 점잖은 지자(知者)들이었기에 비교적 깔끔하게 놀고 가는 곳이었다.
월루의 입구에 들어서자 총관이 뛰어나와 반겼다.
“아이고! 원 태창령 나리 아니십니까? 그동안 너무 적적하셨던 거 아닌지요? 자! 오늘도 매향(梅香)이로 들이겠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총관의 다소 격망스러운 말에 마음이 편해짐을 느끼는 원관녕이었다.
이곳 월루는 이래서 좋았다.
사람을 반길 줄을 알면서도 아무런 걱정이나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술과 기예를 즐길 수 있어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었다.
총관은 평소 그가 늘 이용하던 정자로 안내하였다.
벌써 계절은 가을의 중엽에 이른 터, 해가 저문 지 오랜지라 약간 쌀쌀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원관녕은 그리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탁 트인 정자에서 정원의 기화요초(琪花瑤草)를 바라보며 술과 음악을 즐기노라면 절로 몸이 훈훈해지곤 하였기에 이 정도의 날씨에 굴할 이유가 없는 것이리라.
총관이 물러가고 잠시 후 소흥주 한 병과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진 한 상이 들여졌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정자에서 정원의 꽃 내음을 맡으며 소홍주 한 잔을 들이켜자 온몸이 훈훈해지며 절로 흥이 돋았다.
그리고 흥에 겨운 원관녕의 입에서는 시구가 절로 흘러나왔다.
天若不愛酒 천약불애주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酒星不在天 주성부재천, 주성(술별)이 하늘에 있을 리 없고
地若不愛酒 지약불애주, 땅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地應無酒泉 지응무주천, 땅에 어찌 주천(술샘)이 있겠는가
天地旣愛酒 천지기애주, 천지가 이미 술을 즐겼으니
愛酒不愧天 애주불괴천, 술을 사랑함이 하늘엔들 부끄러우랴
已聞淸比聖 이문청비성, 이미 듣기에는 청주는 성인에 비하고
復道濁如賢 복도탁여현, 탁주를 일러 현인과 같다 하니
聖賢旣已飮 성현기이음, 성현(청주탁주)을 이미 다 마셨으니
何必求神仙 하필구신선, 어찌 신선(더 좋은 술)을 더 구하겠는가
三盃通大道 삼배통대도, 석 잔 술을 마시면 큰 도를 깨닫고
一斗合自然 일두합자연, 한 말 술을 먹으면 자연과 하나 되니
俱得醉中趣 구득취중취, 취하고 취하여 얻는 즐거움을
勿謂醒者傳 물위성자전, 깨어 있는 이에게 전하려 말라
한 수, 한 수 읊어 낼수록 흥에 겨워 전신을 들썩들썩이며 종래에는 춤사위까지 함께하니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다.
그러던 원관녕의 귀에 무뚝뚝한 사내의 음성이 들어왔다.
“이태백(李太白) 어른! 언제 이리 젊어지셨소. 신수가 헌앙하외다.”
불쑥 말을 던지며 들어서는 사내는 역시 관복을 입은 자로 남색의 반령포에 매화 문양의 보자가 그려져 있었다.
사내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원관녕의 맞은편에 앉았는데 7척이 넘는 키에 마치 먹물을 뿌린 듯 짙은 호랑이 눈썹, 왕방울만 한 큰 눈을 지닌 매우 강건해 보이는 사내였다. 문관의 복색이 아니었다면 무관이라 보기 딱 좋은 체격이었다.
사내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원관녕의 잔을 뺏어 들고는 소홍주를 따라 순식간에 목울대로 넘겨 버렸다.
“크∼ 술 맛 좋구먼. 그나저나 이태백 어른! 이 무슨 초라한 신색이요. 이래 가지고 시선(詩仙)이 가당키나 하겠소?”
무례한 사내의 말에도 오히려 원관녕은 언제 침울했냐는 듯 대소를 터뜨리며 반겼다. 그 하는 양으로 보아 둘은 꽤나 오래 사귄 벗으로 보였다.
“하하. 내 잠시 흥취가 올라 한 번 나도 모르게 읊은 것일세. 원! 사람 참! 그나저나 어찌 알고 왔는가? 의립(義立)!”
의립이라 불린 사내는 종 팔품의 중서성 직예주(直隸州) 주부(主簿)를 맡는 자였다.
의립은 그의 자로 본명은 낙황(洛黃)이라 했다.
그는 원관녕과는 동향의 죽마고우로서 산서 정양(定襄) 사람이었다. 척 보기와 같이 불같은 성정에 대쪽 같은 절개를 지닌 자로 그런 면에서 친구인 원관녕과는 마음으로 통하는 지기였다.
그런 자가 이 어두운 시기에 아무 피해 없이 자리 보존하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자네 일거수일투족이야 내 손바닥 안 아니겠는가? 크윽. 그나저나 오늘은 어찌하여 이리도 비통해 하는 겐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소홍주 한잔을 더 들이켠 후 마음속이라도 들여다본 듯 물어오는 지기의 말에 원관녕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어떤 결심이라도 굳혔는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 말일세, 이번에 옷을 벗을까 생각 중이네.”
그의 말에 잠시 그 큰 눈을 부라렸던 낙황은 이내 눈빛을 풀며 연거푸 술 넉 잔을 더 들이켰다.
“크윽. 그래, 잘 생각했네. 이따위 가시방석에 연연할 필요가 무어 있는가? 나도 자네와 뜻을 함께하겠네. 이미 하늘이 빛을 잃었거늘 그 하늘을 우러를 이유가 무어 있겠나? 그런 하늘 따위는 나 낙황이 부정하겠네!”
지기의 갑작스런 말에 깜짝 놀라 그의 입을 막아 가던 원관녕은 이미 늦어 버린 것을 알고 공허하게 뻗어 가던 손을 술잔으로 향할 따름이었다.
이미 대역죄에 해당하는 불경한 말을 내뱉어 버린 터! 들은 자가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낙황 또한 술기운과 더불어 일어난 화를 못 이겨 뱉어 내었으나 순간 자신의 크나큰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둘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술잔을 주고받으며 주변을 살폈다.
혹여나 들은 자가 없는지 살피는 것이었다.
한참 주변을 살폈으나 다행히 아무런 기색이 없어서 겨우 안심을 하고는 두 사내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찰나 동안의 악몽을 잊고자 술을 기울였다.
그때였다. 수풀에서 바스락 소리가 나더니 괴인영 하나가 튀어나와 쪽문을 향해 뛰어갔다.
대경실색한 두 사내는 뒤따라가려 하였으나 괴인영의 몸놀림은 체계적으로 수련을 한 자의 것으로 문관에 불과한 그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쪽문을 지나 사라져 버린 괴인영의 흔적을 살피며 그들의 눈은 절망으로 가라앉아 갔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나라를 부국강병시키고자 출사하였던 원대한 꿈도, 죽어 버린 문관의 세상을 다시 일으키고자 주어진 업무에 매진하던 작은 소망조차도 모두 물거품이 돼 버린 것이었다.
두 사내가 절망하여 나락으로 치닫는 그 순간 쪽문을 통해 웬 커다란 물건이 날아와 장내에 떨어졌다.
풀썩!
이미 죽어 버린 눈빛으로 그 커다란 물건을 바라보는 두 사내의 눈은 금세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그 물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사람의 몸뚱이였고 방금 전 달아난 검교의 것이었다.
검교는 죽은 듯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연이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만 보고 있는 두 사내의 눈이 순간 쪽문 쪽으로 돌려졌다.
그곳에서는 한 사내가 허허롭게 들어서고 있었다.
남색 장삼에 흑색 두건을 두른 사내의 입 꼬리는 치켜 올라가 미소랄 것을 짓고 있었고 그의 눈에서는 여유로움과 함께 총기가 번뜩거렸다.
그러나 그 순간 사내의 표정은 돌변하여 눈에서 광망을 쏘아 냈고 입에서는 불을 토해 냈다.
“이런 멍청한 작자들을 보았나! 대의를 생각하는 자들이 이런 하잘것없는 실수로 목숨을 내놓는단 말인가! 그럴 생각이면 당장 고향으로 낙향하여 초야에 묻혀 평생 죽은 자들의 말만 외다 죽으시오!”
서릿발 같은 사내의 말에 원관녕과 낙황, 두 사내는 다급히 사내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대인(大人)! 우매하여 벌인 한순간의 실수를 용서해 주옵소서.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라고 다시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사옵니다.”
사내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자칫 일이 다 허사로 돌아갈 뻔했잖아. 고리타분한 작자들 같으니라고!’
한편 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의 가장 큰 원인이었으나 한순간에 세 사내에게서 관심을 빼앗겨 버린 검교의 시신 위로 그득한 월광이 비추어졌다.
그러자 시신의 가슴 섶 안에서 무언가 반짝거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흰 종이쪽지였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근무 태만으로 처형함. 월영(月影) 3호, 관량(關良).’
그리고 그 뒤에는 핏물을 머금은 하나의 직인이 찍혀 있었는데 그것은 둥그런 원 안에 한 마리의 학이 비상하는 문양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분을 상징하는 패(牌)를 찍은 직인이었다.
학의 문양이 음각된 은패란 명제국에 오직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금의위 비밀 정보 요원인 월영의 신분 패인 것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검교 하나를 근무 태만의 명목 아래 살해한 자는 다름 아닌 금의위의 월영이 된 관량이었다.
2
부자묘에서도 손꼽히는 청루 중 하나인 월루(月淚).
월루는 명제국의 수도인 남경에서도 가장 번화한 부자묘에 둥지를 튼 만큼 그 규모 또한 작다 할 수 없는 축에 들었다.
특히나 달의 눈물이라는 아름다운 이름만큼이나 삼재(三才)와 오행(五行)을 바탕으로 한 건물 배치는 식견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발길을 끊을 수 없게 하였다.
월루에서도 귀빈에게만 허용된다는 심처(深處) 난소각(蘭笑閣).
상석에 앉은 남삼 사내의 앞에 문관이 입는 관복 복장을 한 두 사내가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관량, 원관녕, 낙황 세 사람이었다.
상황이 벌어진 후 관령은 보는 눈이 많았으므로 자리를 난소각으로 옮긴 터였다.
사실 이곳 월루는 다른 말로 혹자들에게 충월루(忠月淚)라 불리는 곳이었는데 이는 이곳의 루주(樓主)가 뛰어난 학식과 타고난 덕망으로 현 홍무제 치하에서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해 손발을 아끼지 않는 데서 생겨난 말이었다.
한데 실상은 이곳의 루주는 호유용의 사람으로서 그들의 정보와 연락책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비록 호구(虎口) 속이라 하나 현 상황에서는 이보다 더 안전한 곳이 없다 할 수 있었다.
한데 이 같은 사실을 공교롭게도 적(敵)이라 할 수 있는 관량은 알고 있지만 원관녕, 낙황 두 사내는 그 맡은 조직 내에서의 지위가 낮아 전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한편 관량 앞의 두 사내는 여전히 좀 전의 상황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쯧쯧. 좌우지간 글줄깨나 읊었다는 이들은 이렇듯 꽉 막혔다니까! 이미 지나간 일 후회해 봐야 무어 쓸 데 있다고…… 속 터지는구먼! 끄응! 하는 수 없지. 직접 손을 쓸 수밖에!’
잠시 자신의 눈을 빛내 보인 관량은 이내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크게 호통을 쳐 갔다.
“답답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세상이 썩은 것이 하루 이틀 일이던가?! 더군다나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닌가?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고민해야지, 이리 걱정만 한다고 될 일인가? 내 사람을 잘못 봤나 보네. 이런 소인배들인 줄 알았다면 어찌 벗하고자 했겠는가? 크흠!”
일장 호통을 터뜨린 관량은 거침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으로 향하였다.
가히 대쪽 같은 모습의 대인의 풍모라 아니할 수 없었다.
원관녕과 낙황은 이에 대경실색하여 바닥에 엎드려 연방 읍하였다.
“대인! 소인들을 벌하시되 버리지는 말아 주옵소서. 그리하신다면 우매한 소인들은 너무도 부끄러워 자진하고 말겠습니다.”
그러자 관량은 걸어가던 만큼이나 거칠게 휙 돌아섰다.
그의 전신에서는 노화가 만연해 보였다.
“그대들이 지금 본인을 목숨으로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이러할까?
관량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이라도 되는 듯 두 사내의 전신을 짓눌렀다.
이에 두 사내는 더욱 깊이 읍하며 다급히 말했다.
“대인! 소인들이 무슨 염치로 대인을 협박하겠사옵니까? 다만 소인들의 진심을 알아주십사 하여 드린 말이니 삼가 대인의 넓은 가슴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며 이제는 아예 바닥에 머리를 찧어 대는 것이 아닌가?
상황이 상황이었으나 그들의 처사는 과한 데가 있었다.
그들의 의기를 이해하는 터이나 그들이 하는 양이 꼭 주군에게라도 하는 양 같았다.
사실 과한 데가 많았으나 두 사내에게 관량은 가히 경외의 대상이라 할 수 있었다.
관량과 두 사내가 알게 된 지는 반년도 채 되지 않았다.
관량은 포정사사 낭관으로 임명되어 일 년 전에 중서성으로 왔었다. 그리고 그때를 기해 전재의 사건이 발생하며 문자의 옥의 파장이 심화되면서 중서성 또한 안팎으로 극히 조심스러워졌던 시기인지라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자중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었다.
그러던 때에 태창령의 자리에서 근근이 자리 보존을 하던 원관녕은 관량이란 자를 처음 보게 되었다.
얼마 전에 포정사 상서의 보좌관으로 임명되어 온 자란 것만을 알고 있었을 뿐 자신과는 업무 분야가 다른 데다가 관심을 갖기에는 꽤나 높은 지위의 차가 가로막고 있어서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한데 이자의 행실이 괴이하여 관심을 갖지 않으려야 안 가질 수가 없었다.
시국이 어느 땐데 그는 감히 황상에게 하루가 멀다 상소를 올려 댔다.
상소의 내용은 다름 아닌 홍무제의 독재에 관한 것이었으니 주목을 받지 않으려야 안 받을 수가 없었고 다들 또 덧없이 한 목숨 떠나 가겠구나 하며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예상대로 금의위에서 무관들이 나와 사내를 잡아 갔다. 금의위에 끌려간 뒤의 일은 눈으로 보지 않고도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렇게 사내에 대해 관심을 접어 갈 즈음 거의 폐인이 된 모습으로 사내는 돌아왔고 다행히 목숨만은 붙어 있어 한 달 정도의 정양 후 다시금 출근하게 되었다.
그 후로 사내는 이전과는 다르게 업무에만 매진할 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주변의 관심들도 서서히 사그라졌다.
원관녕 또한 그러려니 하고 관심을 접어 사내에 대해서는 잊고 지낼 즈음에 마음을 다스리고자 찾은 월루에서 우연치 않게 사내와 첫 만남을 갖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자신이 자주 애용하던 정자를 먼저 차지하고 홀로 술판을 벌이는 이가 있어 다가갔더니 그자가 바로 관량이었던 것이었다.
그날 밤새 대작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얘기를 주고받자 어느 순간부터 관량이라는 사내에 대해 사나이로서 반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관량이라는 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걱정하고 그 재주로 만민을 평온하게 하려는 포부를 지닌 데다 그간의 정황을 미루어 그 과감성과 행동력 또한 지니고 있는 자였다. 특히나 듣고 보니 그 일이 있은 후로 지금껏 새로운 방법을 모색 중이라 하니 보면 볼수록 대단한 자라 생각되었다.
첫 만남을 가진 그 후로 가끔씩 월루에서 조우해 두 사람은 술을 기울이며 세상을 얘기하고 시를 읊으며 우정을 쌓아 갔고 어느 날부터는 원관녕의 친우인 낙황마저 이에 동조하여 자리를 갖던 터였다.
한데 그런 시간이 많아질수록 원관녕과 낙황은 관량이라는 사내의 넓고도 깊은 포부와 그 지닌 절개, 그리고 세상을 향해 펼치려는 그의 해박한 지식에 매료되어 종래에는 마음으로써 따르게 되었었다.
한편 관량은 그들의 반응을 살피다 슬쩍 미소를 짓고는 어깨마저 들썩거리며 크게 대소하였다.
“하하하∼.”
갑작스러운 관량의 웃음소리에 두 사내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의아한 표정을 던졌다.
그러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짓누르는 듯 애써 입을 막아 가며 관량이 말했다.
“우스운 일 아니오?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이들은 이런 빌어먹을 상황이나 걱정하고 있고, 명제국을 집어삼킨 빌어먹을 탁발승은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며 편히 발 뻗고 자니 말이요. 이 어찌 우습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으하하하!”
한데 관량의 말에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침울해 하던 낙황이 갑작스럽게 고개를 들며 덩달아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그는 마치 마음속의 터럭만큼의 비통함까지도 토해 내듯 미친 듯이 웃어 댔다. 그리고 잠시 멍하니 친우를 바라보던 원관녕까지 이에 합세하니 방 안은 갑작스럽게 웃음바다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다 한순간 눈물까지 질금대며 웃던 관량이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그 앞의 두 사내들 또한 때를 같이하여 웃음을 그치니 마치 방금 전의 일이 한편의 극이라도 됐던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탓해 뭐 하겠소. 단지 그 세상을 어찌 바꿀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뿐!”
말을 마친 관량은 큰 소리로 외쳤다.
“거나하게 한 상 봐 오너라. 또한 기녀들은 들일 필요가 없느니라. 오늘 한번 사내들끼리 밤새도록 대작할 터이니 말이야, 하하하.”
말을 마친 관량이 자리에 가서 앉자 뒤이어 두 사람도 그의 앞에 자리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술상이 들여오고 술잔이 몇 순배가 도는 동안에도 세 사내는 한마디 말도 없이 술만 공허하게 들이켜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