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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그렇게 얼마가 흐른 후 원관녕이 입을 열었다.
“대인! 어찌하실 겁니까? 소인들이야 사실 일이 불거지더라도 관직을 내놓고 물러나면 별 피해가 없습니다만 대인께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술 한 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관량은 원관녕의 말에 얼굴에 수심이 쌓여 갔다.
“그렇다고 별수 있겠소. 저번처럼 옥살이하며 고생 좀 하다 나오면 될 것이고 말이오.”
그러자 이번에는 낙황이 나서서 말했다.
“대인! 아니 될 말입니다. 이번은 저번과는 경우가 전혀 다릅니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거기다 그 신분이 검교입니다. 이게 혹여나 금의위나 그 빌어먹을 탁발승의 귀에 들어간다면 꼼짝없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이에 관량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술만 연거푸 퍼 나를 따름이었다. 그리고 뾰족한 수가 있을 턱이 없었다. 사람이 죽은 것이다. 거기다 홍무제의 수족인 검교가! 이 어찌 가벼운 일이 될 수 있겠는가?
그때였다. 원관녕이 갑자기 주변을 의식하면서 목소리를 낮춰 귓속말을 해 왔다.
“대인! 전에 말씀드렸듯이 제가 모시는 도절 어른을 만나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분께서는 대인께서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기개와 절개가 있으신 분입니다. 게다가 그분께서는 예전 강호에서 활동하셨던 경험도 있으셔서 대인을 보신다면 흔쾌히 받아 주실 겁니다. 한 번만 제 말을 따라 주시옵소서.”
원관녕은 뒤이어 다시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갔고 이에 낙황 또한 그의 뒤를 따르니 관량은 그저 꿰뚫을 듯 술잔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관량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윽고 말했다.
“좋소. 내 친우들을 믿고 만나 보겠소. 도절이란 분을 말이오.”
이에 원관녕과 낙황이 크게 기꺼워하며 술잔을 권하니 그날 밤 난소각의 불은 꺼질 줄을 몰랐다.
그러나 웃는 낯으로 술을 들이켜는 관량의 머릿속에서는 앞으로의 일들이 마치 바둑의 다음 수를 생각하듯 치밀히 정리되어 갔다.
‘후∼! 드디어 첫 번째 단추를 꿰었구먼. 호유용의 심복 도절(塗節)이라…… 애석한 일이나 네놈으로 인해 간신 호유용은 파멸을 맞을 것이다.’


3

저녁[夕]의 어스름이 짙게 깔리는 때 남경성 내 황성, 늦은 시각까지 남아 있던 문무백관들도 분주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최근에 연이어 일어나고 있는 문자의 옥 사건으로 인해 황성에 드나드는 관리들의 수가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정기적으로 입궐하여 업무 보고를 올리고 업무 승인과 새로운 업무를 받아 가야 하는 자들의 수가 그리 적은 것이 아니었기에 퇴궐 시간이 막바지에 이르자 천안문(天安門) 앞은 퇴궐하는 사람들로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천안문을 향해 몰려오는 인(人)의 행렬 속에 한 사내가 있었다.
자색 옷깃이 비스듬하고 소매가 넓은 삼이 눈에 띄는 반령포에 난초(蘭草) 문양의 보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사내는 다름 아닌 포정사사 낭관(郎官) 관량이었다.
그는 갈 길이 급한지 군자의 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종종걸음으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천안문 앞에 이르자 그 큰 문 앞에 퇴궐하는 문무백관들로 가득했다.
한데 길을 서두르던 관량은 사람이 많아 발길이 늦어질 게 뻔한 좌측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비록 학식과 더불어 예도(禮道)를 익힌 자들이라 하나 수많은 인파가 단 하나의 문을 통과하려면 혼잡해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관량이 좌측의 행렬에 들어서자 어느 순간 그를 눈여겨 찾으려 해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만큼 사람의 수가 많았고 그들의 복장 또한 대동소이했다. 그리하여 관량의 뒤를 쫓던 눈동자는 어느새 관량의 소재를 놓치고 말았다.
천안문에서 백여 장 떨어진 거대한 지주(支柱) 기둥 뒤를 지날 때쯤 갑작스레 튀어나온 손이 관량의 몸을 낚아채려 하였다.
전혀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상황에서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관량은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며 회전시켜 괴인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아마 괴인의 공격에 살의가 담겨 있었다면 괴인의 앞이 아닌 사각지대로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공격이 들어갔을 터였다.
그렇게 훈련 받았고 또한 그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는 관량이었으나 눈앞의 괴인이 적이 아님을 알았기에 그러지 않았다.
눈앞의 괴인이 다름 아닌 자신과 유일하게 접촉하는 금의위의 연락책인 총교관 엽우였으니까.
오랜만에 만난 엽우는 여전히 주름 가득한 사십 대 중년의 얼굴에 그득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만 전과 다른 점이라면 한 조각 놀라움이 깃들어 있는 것을 빼고 말이다.
“이거이거! 대단하구만. 먹물이나 읊어 대며 수련을 게을리했을 것으로 알았더니만 오히려 전보다 더 강해졌군. 이제는 나도 자네에게는 별수 없겠어! 대단하이! 하하하.”
만나자마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너스레를 떠는 총교관의 말에 슬쩍 기분이 좋아짐을 느꼈지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음을 알기에 관량은 본론으로 들어가길 독촉했다.
“알다시피 시간이 많지 않소. 무슨 일이오?”
관량의 상황이야 총교관 엽우가 더 잘 아는 터였기에 그도 더 이상 너스레를 떨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물론이네. 당연히 그래야지. 그나저나 자네 이번에 꽤 복잡한 사건을 일으켰더만. 하필 검교를 죽이다니 말이야.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나 상부에서 이에 대해 보통 난감해 하는 것이 아닐세. 검교는 홍무제의 단일 세력이네. 비록 우리 금의위가 홍무제의 오른팔이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 해도 이는 엄연히 민감한 상황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네. 좌우지간 오늘 그 일로 보자 한 게 아니니 그건 일단 접어 두고…… 자네 문자의 옥이라고 들어 보았나? 아마 들어 보았겠지. 아는 얘길지라도 일단 들어 보게. 최근에 이런 일이 있었네. 절강부학교수 임원량이 어떤 사람 대신 사은 표를 지어 주면서 ‘작칙수헌(作則垂憲)’이란 구를 썼는데 주원장은 ‘則’이 그를 ‘賊’이라 욕한 것이라며 우겼네. 또 상주부학훈도 장진이 하표(賀表, 조정 경사에 신하가 왕실에 올리는 축하의 글)를 지어 주면서 ‘예성생지(睿性生知)’란 구를 썼는데 주원장은 ‘生’자를 ‘僧’자로 잘못 보고 자기를 중이 된 적 있다고 고의로 욕한 것이라 생각했다네. 그리하여 주원장은 임원량과 장진을 모두 사형에 처하였지. 이것을 발단으로 문자의 옥이라 칭해지며 최근의 연이은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네. 한데 말이야.”
엽우는 잠시 말을 쉬어 가며 뜸을 들였다.
이는 엽우가 중요한 얘기를 꺼내기 전에 꼭 하는 습관으로 이에 관량은 특히 귀 기울여 듣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이 문자의 옥으로 인해 전국의 문인들을 위시한 소위 글줄깨나 읽었다는 작자들이 어떠한 모략을 획책하려 한다는 것일세. 이는 다른 월영요원의 투고로 이루어졌네. 물론 너무도 다급을 요하는 것이라 투고하는 과정에서 관련 일당들로부터 살해당했지만 말일세. 한데 그들을 규합하고 선동하는 핵심에 있는 자가 누군지 아는가? 자네가 접근하고자 하는 바로 그 호유용일세. 참으로 자네에게는 공교롭기 그지없는 일이지. 홍무제의 명으로 제법 세가 있다는 공신들에게 한 명씩의 월영 요원이 붙여지면서 자네 또한 그중 승상의 위에 올라 있는 호유용에게 보냈지만 사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호유용 그 작자는 그럴 위인이 못 되거든. 비록 잔머리가 제법 돌아가고 시운과 인물도 따르는 자이나 그게 다일세. 지금의 승상 자리가 그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점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지.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네. 자네 어째서 어제 검교 하나를 죽인 것인가? 내 짐작하는 바가 있기는 하네만 자네에게 직접 듣고 싶구만.”
“도절이라는 자가 있소. 내가 지난 1년여간 호유용의 주변을 살핀 결과 그에게 심복이랄 자가 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바로 진녕이라는 자와 도절이라는 자요. 그중 진녕이란 자는 호유용의 오른팔 격인 자로 무장들을 규합하고 이끄는 그 수장이라 할 수 있소. 하나 나는 그자보다는 도절이라는 자를 주목했소. 도절은 호유용의 심중의 혹과 같은 자로 지난 세월간 호유용의 구린 일을 도맡아 하며 그의 치부를 모두 알고 있는 자라 할 만하오. 특히 3년 전의 도찰원 어사 유기(劉基)가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된 후 죽은 채 발견된 일이 있었소. 독약을 먹고 죽은 것인데 내 은밀히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것 또한 도절이라는 자가 연관이 되어 있었소. 한마디로 도찰원 어사 유기를 죽인 자는 호유용이라는 말이 되오.”
관량은 엽우의 습관을 본떠 잠시 말을 끊으며 엽우의 관심을 모은 후 말을 이었다.
“그런 이유로 도절이라는 자에게 접근하고자 하오. 전에 보냈던 연통의 내용대로 이번에 검교를 죽인 일은 나로서도 공교로운 일인지라 그로 인해 세간의 관심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소. 이것만 본다면 이번 사건은 내 실책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일 것이오. 하나 이번 일로 도절과의 끈을 이을 수 있었소. 그간 도절의 측근 중에 원관녕이라는 자와 낙황이라는 자에게 은밀히 접촉하였었소. 그자들은 생각보다도 도절에게 신임을 받는 자들이어서 그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게 되자 자연스럽게 그들이 나에게 도절을 만나 보기를 권했었소. 그러나 단번에 허락한다면 공연히 의심을 살 수 있기에 만전을 기하며 누차 거절을 하였으나 이번 사건으로 확실한 믿음을 얻을 수 있었소. 그로 인해 도절과의 끈도 이어지게 되었고 말이오. 그래서 말인데 도절의 취미, 성격, 여성 편력, 괴벽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조사하여 자료를 넘겨주시오. 빠르면 나흘, 닷새 안에 만날 계획이니 그 안에는 내게 넘겨줘야 할 것이오.”
말하는 도중에도 연방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엽우는 관량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네. 자네의 공은 검교 하나 죽인 것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일세. 상부에 보고하면 자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은 물론 필요하면 사람까지도 더 지원해 줄 수 있을 것이네.”
이에 관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도절이란 자는 사내로서 의기와 포부가 넓은 자이나 한 가지 의심이 많은 단점이 있소. 비록 확실한 정황으로 그의 믿음을 산다 할지라도 그는 끝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나를 주목할 것이오. 일단 내가 말한 대로만 해 주시고 다음에 또 연락드리리다.”
말을 하던 관량은 서둘러 지붕의 그림자 속에 동화되어 갔다.
말이 길어져 서둘러 가지 않는다면 잘못하다가는 달라붙은 꼬리에게 의심을 살 수 있는 일이었다.


제4장 어사중승 도절(塗節)


1

방 안[房內].
너비 삼 장 남짓한 좁은 방 안에 창문 하나 문짝 하나만 달랑 달려 있는 전형적인 서민적인 형태의 방이었다.
이곳에는 그 흔한 장식품이나 농(籠) 하나 놓여 있지 않았고 침상 하나 탁자 하나만이 을씨년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탁자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사내는 무언가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아예 고개를 들이박은 채 보고 있는 데다 또한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열중하는 것이 그 양피지에 담긴 것이 무언가 중요한 것인 듯했다.
대체 무엇을 보나 하여 사내의 시선을 따라가니 글씨가 빽빽이 채워진 양피 첩지(帖紙) 한 장이 손에 들려 있었다.
사내는 한두 번 읽은 것이 아닌지 닳고 닳아 보이건만 다시금 처음부터 훑어 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양피지를 탁자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자 드러난 사내는 다름 아닌 관량이었다.
관량은 오늘 조반을 내려놓기 무섭게 찾아든 낙황으로부터 그간 노심초사하며 기다리던 도절로부터의 전갈을 받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금일 정오에 영곡사에서 뵙기를 청하오. 어사중승 도절.’
짧고도 간결한 글귀였으나 이를 바라보는 관량의 기분은 그에 비할 데가 아니었다.
낙황이 시간에 맞추어 데리러 온다며 돌아간 뒤 관량은 쭉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채 어제 엽우로부터 건네받은 도절에 관한 서찰을 읽고 또 읽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도절이라는 자에 대하여 파악이 끝난 터였다.
물론 기본적인 대강의 파악이 끝났을 뿐 실제로 대면하지 않은 채 문서상으로의 파악은 완전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관량은 이것만으로도 꽤 만족해 하는 눈치였다.
도절이라는 자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를 결정한 것이리라.
그는 이미 생각을 정리하였고 실행에 옮기기 위한 재료 또한 엽우에게 부탁하며 서찰을 보낸 후였다.
이제 만반의 준비는 끝이 났고 실행에 옮길 일만 남았다.
관량의 시선은 어느덧 창문을 넘어 저 멀리 보이는 높이 솟은 준봉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너무 멀어 자그맣게 보이는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영곡사였다.

마치 머리숱이 무성한 수백, 수천의 머리[頭]들이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는 듯하고 사시사철 형형색색의 기화요초들이 자라는 종산(鐘山)의 가을 산은 붉디붉었다.
녹음과 함께 뒤덮은 붉은 물결은 종산을 뒤덮은 것도 모자라 응천부 전체를 아우를 듯 뻗어 있었으니 가히 장관(壯觀)이라 할 만했다.
이 산은 금릉(남경)의 동쪽에 위치한 종산(鐘山)으로 다른 말로 자금산(紫金山)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본래는 금릉산으로 불렸는데, 전국 시대 때 초나라 위왕(威王)이 월(越)나라를 대파하고 남경을 보니 제왕의 기가 서려 있는 바, 금으로 만든 인형을 묻어서 그 왕기를 눌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후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동진(東晋)이 남경에 도읍을 정하고 있을 때, 금릉산 정상에서 자금색이 서린 빛을 보고서 자금산 혹은 약칭으로 금산(金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종산의 중턱.
누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古) 사찰이 수려한 산세와 조화를 이루며 또 하나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사찰의 이름은 영곡사(靈谷寺).
본래 이름은 개선사(開善寺)이고, 514년 남조 양무제 때 건설되었다. 처음 건설되었을 때는 명 건국 초기부터 주원장의 명에 의해 건설 중인 효릉이 있는 자리에 지어졌으나,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이름도 개산사에서 영곡사로 바뀌었다.
새로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기에 그 사찰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었을 것이라 여기는 것이 당연하였으나 영곡사는 오히려 본래의 아름다움에 종산의 산세와 조화를 이루어 더욱 그 수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주원장이 명을 내려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본래의 주춧돌 하나까지 모조리 통째로 옮겨 놓았던 이유였다.
참으로 인력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세 개의 산문인 일주문(一柱門), 천왕문(天王門), 불이문(不二門)을 차례로 지나자 대웅전(大雄殿)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석등과 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세 개의 산문의 웅장함과 줄지어 늘어선 신장(神將)들의 위엄과 기상에 놀라는 것도 잠시, 연이어 이어지는 고아한 탑과 석등의 아름다움은 눈을 돌릴 데가 없게 만들었고 종래 길의 끝에 이르러 대웅전이 시야를 가득 메우자 도리어 놀라움보다는 마음의 안정과 함께 크나큰 불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대웅전 내에서는 연이어 목탁 소리와 함께 불법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한 사내가 연방 금으로 된 관음불상 앞에서 절을 올리고 있었다. 사내는 가벼운 경장복 차림이었으나 화려하진 않아도 비단으로 고아하게 만들어진 것이 그의 신분이 낮지 않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사내는 몸집이 무척이나 크고 건장하였는데 그 큰 몸으로 하는 것이라 그 동작 또한 보통의 두 배는 족히 될 정도로 큰 것이어서 엉뚱하게도 절하는 일련의 동작이 무척이나 호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던 동작이 끝이 났고 사내는 노승에게 합장한 후 매우 조심스럽게 대웅전을 걸어 나왔다. 그리고 걸어오는 사내의 뒤로는 대웅전 밖에서 그를 호위하던 서너 명의 사내들이 뒤를 따랐다.
사내가 천천히 걸어 눈앞에 당도하자 생각보다도 더 큰 몸집과 험상궂은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눈앞의 사내가 바로 어사중승 도절(塗節)이었다.
호탕한 성격과 호목(虎目)에 귀면(鬼面), 웅신(熊身)의 사내.
전형적인 무장으로 다혈질에 직선적인 성격으로 미루어지며 장점으로는 사람을 널리 사귀는 것을 좋아하였다. 강호에서의 별호는 발도즉살(拔刀則殺). 그가 도를 뽑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명호로 그만큼 그가 도를 뽑는 데 신중하며 함부로 뽑지 아니하고 그러나 뽑았을 때는 반드시 그 대상 되는 자를 죽인다는 뜻이었다.
이상이 도절에 대한 금의위의 조사 결과였다.
그러나 관량은 여기에 몇 가지를 더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의심이 많고 또한 조심스럽지만 귀가 얇다는 것이다.
관량은 예의를 차리면서도 또한 당당함을 잃지 않은 채 가볍게 포권하였다.
“관량이라 합니다.”
포권이라 함은 강호상의 예의로서 주먹을 가볍게 맞대고 인사하는 것을 말함이었다. 비록 강호인으로서는 흠잡을 데 없이 예의를 차린 것이었으나 도절이라는 사내는 강호인이기 이전에 금의위와 함께 명제국의 최고 감찰 기관인 어사대의 이인자였기에 이는 무례하다 비치기 충분한 것이었다.
그에 대한 반응은 곧바로 이어져서 그를 인도해 온 낙황과 원관녕의 표정은 난감하다 못해 납빛으로 변해 갔고 도절의 뒤에 시립해 있던 자들은 흉흉한 빛을 뿜어내다 못해 당장에라도 베어 낼 기세였다. 좌중의 분위기가 급격히 차가워질 때 도절이 손을 들어 올렸다.
가볍게 오른손을 슬쩍 들어 올린 단순한 동작이었으나 이에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낼 듯하던 흉안의 사내들이 순식간에 기세를 줄이니 그의 기량에 관량 또한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보다 대단한 자군. 다혈질이라 하던데 신중함이 혈기를 잠재우고도 남을 만하군. 더욱더 만전을 기해야겠어!’
도절은 호목을 번뜩이며 한차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관량을 쏘아보면서도 여유롭게 말했다.
“재밌는 친구로구먼. 나는 도절이라 하네. 강호상의 친구들은 나를 발도즉살이라고 하더군. 내 생각에는 말이야, 꽤 어울리는 별명이라 생각하네. 혹여 궁금하다면 이 자리에서 확인시켜 줄 수도 있네만.”
넌지시 내뱉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는 흉흉함이 감돌았고 말 그대로 당장에라도 도를 휘둘러 베어 낼 듯했다.
그러나 관량에게서는 어떠한 신색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잠시 후 혹여 미치기라도 한 것인지 도절을 향해 입 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는 게 아닌가?
“하하하!”
혹여 방금 전의 도절의 웃음을 이겨 보려는 것이었다면 충분히 그의 승리를 인정해 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사찰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괴의한 행동에 좌중은 순간 황당하여 일순 멍해졌다가는 다시금 오히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살의로 팽배해졌다.
도절은 잠시 그 하는 양을 보려는 속셈인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곧이어 웃음을 멈춘 관량의 입이 열렸다.
“이거 소문이란 것은 역시 다 못 믿을 것이었구먼. 누가 발도즉살이 불의를 두고 보지 못하고 화통하며 귀인을 사귀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였단 말인가! 실상은 소인배가 따로 없구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하니 어찌 대인(大人)이라 하겠는가!”
챙! 챙!
순식간에 좌중은 검광이 난무했다.
도절의 수하들은 저마다 극의에 이른 살심을 드러내며 검을 뽑아 들었고 이에 관량의 뒤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낙황 또한 수중의 도를 뽑아 들고 친우와 주인 사이에서 결정을 못 내리고 도만 뽑아 든 채 우두커니 주위를 살피니 일촉즉발의 상황에 다름없었다.
도절은 미간을 찡그리며 이마에 내천 자를 그렸고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억누르느라 애를 태우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화를 가라앉히는 것이 역시 범인이 아니었다.
도절은 비록 화를 가라앉혔다 하나 그것에는 다 뜻이 있었기 때문이지 한 번 일어난 살심은 동해 있던 터라 그의 입에서는 한 자 한 자 곱씹듯 내뱉어졌다.
“그래. 네놈이 그런 말을 하는 연유가 있을 것이다. 깊이 생각하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한마디로 네놈 목숨이 왔다 갔다 할 것이니 말이다!”
그러자 관량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치 이곳이 도산검림이 아닌 자신의 안방이라도 되는 듯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는데 이에 도절 또한 관량의 배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량이라…… 듣기로 무관의 자식으로 뒷골목을 전전하다 아비의 친우인 부천호 하후평에게 무예와 함께 글을 배우고 뛰어난 문재로 낭관에까지 오른 인물이라 했는데 녀석의 비범함은 그의 문재가 아니로구나. 바로 녀석의 배짱과 기개가 진신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겠구나. 경시할 수 없는 자로군.’
도절이 자신을 속으로 들었다 놨다 죽였다 살리기를 반복하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량은 감았던 눈을 풀며 입을 열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을 아시오?”
일순간 도절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짚이는 바가 없어 의심스런 눈초리로 이어지는 관량의 입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