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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승상 호유용에게는 두 명의 심복이 있소. 어사대부 진녕과 어사중승 도절이라 하오. 그중 진녕은 어사대 최고의 자리에 앉은 데다 타고난 심계와 배짱, 호방함으로 수많은 무장들의 지지를 받으며 호유용의 심복 중 심복이라 할 만하오. 그리고 이어 어사중승 도절은 또한 호방한 성격과 지닌 무예로 많은 강호 친구들과 벗하며 호유용의 심복이라 할 만큼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두 사내에 대한 신임은 크나큰 차이가 있소. 진녕이란 자는 무장들을 규합하고 힘을 모으는 데 탁월하여 중임을 맡았으나 도절이란 자는 그와는 지닌 재능의 쓰임새가 달라 정적의 제거와 같은 구린 일을 벌일 때 주로 사용하였소. 특히나 근자에 있었던 전(前) 도찰원 어사 유기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혐의가 의심되고 있으니…….”
챙!
관량의 말은 갑작스럽게 뽑혀 목에 드리워진 시퍼런 도날에 의해 멈춰질 수밖에 없었다.
도날에서는 시퍼런 도광이 번뜩였고 관량의 목에서는 핏물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도를 뻗어 가면서 스친 것이었다.
도절의 눈은 수없이 핏발이 솟구쳐 붉은 빛을 띠었고 붉은 안광을 폭사시키는 그의 전신에서는 노도와 같은 기세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이어 도절의 입이 열리며 지옥 유부의 사자(死者)의 것인 양 가래 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이에 관량은 더할 나위 없이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진득한 미소를 지었고 가슴 섶으로 손이 뻗어 갔다.
이에 움직인 도날로 목에 애꿎은 상처 하나를 더 남겼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관량은 손을 집어넣은 채 하나의 둥근 물건을 꺼내 보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동으로 이루어진 패였다.
그곳에는 별다른 문양이 없이 둥그런 패의 중앙에 커다랗게 음각된 위(衛)라는 글자만이 가득 메워 있었다.
그리고 관량은 씩 웃음 지으며, 동패를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여유롭게 도날을 잡아 가며 말했다.
“금의위사요. 이제 이 도날은 치우고 얘기하는 게 어떻겠소? 도절 어른?!”
2
영곡사의 대웅전과 범종각 사이에는 소롯길이 하나 나 있다.
그것은 너비가 2장도 안 되는 좁은 소롯길로 길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다 보면 고아한 건물 한 채가 시야에 들어온다.
다름 아닌 영곡사의 지객당으로서 이따금씩 찾곤 하던 홍무제 주원장을 위해 지은 건물이었다.
한데 당금의 황제가 머물곤 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여타 지객당에 비해 눈에 띄게 거대할 뿐 지극히 평범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주원장의 뜻에 따른 것으로 평소 그는 허례허식이나 쓸데없는 권위 의식을 즐기지 아니하였다. 그런고로 자신이 이따금씩 찾는다 하여 공연히 산사의 조화를 깨뜨리는 건물을 만들길 원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는 누가 들어도 코웃음 칠 얘기였다.
주원장이 누구던가? 당금의 중원천하를 지배하는 절대자에다 말 한마디, 글자 한 자를 탓하여 공신을 죽이고 그래도 못 미더워 검교까지 파견한데다 친히 변장을 한 채 순찰을 도는 자가 아니던가?
그런 포악한 자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시커먼 사람 속내는 모르는 게 세상사가 아니던가?
지객당의 내실, 두 사내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다향(茶香)이 그윽한 가운데 이윽고 눈앞의 철관음에서 시선을 뗀 도절이 두 눈을 부릅뜨고 거칠게 입을 열었다.
“동패의 위(衛)라면 하급 무사겠군? 한데 어째서 너 같은 조무래기를 보낸 것이냐? 내가! 이 도절이 그리도 하찮게 보였단 말이냐?”
갑작스런 도절의 말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가?
짜 놓은 각본대로 돌아가던 상황에 여유가 묻어나던 관량이었으나 갑작스런 도절의 말은 예상 밖이었다.
속으로 없지 않아 당황한 관량이었으나 속내야 어찌 되었든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은 채 태연하게 물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오?”
관량은 일단 떠보기로 한 것이다.
두루뭉술한 자신의 말에 도절이 의도를 드러내기를 노리는 수였다.
태연히 물어오는 관량의 말에 도절은 일순 울화가 치밀었으나 신중히 관량의 말속에서 숨은 뜻을 찾으려 하였다.
이에 관량 또한 도절의 말속의 의미를 찾으려 하니 다시금 장내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 적막이 깨지기까지는 수초도 걸리지 않았다.
일순 수중의 도를 뽑아 든 도절이 갑작스럽게 도를 뻗어 온 것이다.
이는 관량으로서도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무척이나 신중한 성격으로 알고 있는 도절이 아니던가?
한데 갑작스럽게 도를 휘둘러 오다니?!
하나 생각을 길게 할 상황이 아니었다. 코앞으로 도영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이때 도절의 손에 들린 도는 그 크기가 무척이나 큰 거도(巨刀)였는데 도절이 거도를 든 채 웅신의 힘을 실어 휘두르니 사람 열댓은 족히 들어갈 정도로 넓은 승방을 한일(一) 자로 쪼개 낼 듯 패도적인 모습이었다.
웅웅!
마치 눈앞의 바람을 밀어내듯 괴의한 소리를 동반한 도풍은 거도보다 먼저 이르러 순식간에 눈앞에 다가왔고 이에 관량은 마치 뒤에서 누가 신형을 끌어당기듯이 주룩 물러나는데 그 움직임이 실로 묘한 구석이 있었다.
순식간에 미끄러지듯 물러나는 족영(足影)은 분명히 눈에 보이건만 그 근본이 되는 족신(足身)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괴이하고도 묘한 걸음걸이였다.
이는 강호상에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관부의 요직에 든 자가 본다면 기겁을 할 것이었으니 세간에 널리 악명을 떨치고 있는 무소불위의 무력 감찰 기관인 금의위 요원들의 독문신법이었다.
이는 난영무형보(亂影無形步)라는 것으로 금의위에 입문한 자라면 훈련위사 시절에 배우게 되는 이대신법 중 하나였다.
“난영무형보! 크음!”
눈으로 관량의 움직임을 확인한 도절은 그제야 뻗었던 도를 회수했지만 그 전율스러운 살기만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묻겠다. 지금부터 하는 말에는 조금도 거짓이 없어야 할 것이다. 네놈의 난영무형보는 이미 그 극의(極意)에 근접해 있는 것이었다. 그 정도의 실력자가 고작 하급 무사일 리가 없을 것이다! 네놈의 정체가 무엇인가? 바른대로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도절의 눈썰미는 참으로 예리한 데가 있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더욱 신중하며 또한 냉철한 자였다. 이에 관량은 낭패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미 퇴로는 도절의 수하들이 차단한 상태였고 눈앞의 도절 또한 방심할 수 없는 사내였기에 비록 몸을 빼자면 충분히 한 몸 건사한 채 빠져나갈 만큼 신법에 자신이 있었으나 이와 같은 기회를 놓치기에는 던져 놓은 떡밥과 낚아 올릴 물고기가 너무도 큰 것이었다.
관량은 일순 눈빛을 빛내며 가슴 섶에서 주먹만 한 크기의 하나의 원형의 물체를 꺼내더니 도절을 향해 던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월영을 상징하는 은패(銀牌)였는데 날아가는 속도가 어찌나 느린지 성질 급한 사람이라면 도중에 다가와 낚아채고도 남을 정도였다.
분명 자연의 법칙이란 것이 엄연히 존재하거늘 이리도 느린 속도로 날아가는 물체가 추락하지 않은 채 같은 속도, 같은 궤적을 그린 채 이동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금의위의 월영에 들며 배우게 되는 암기술 중 하나로 유운투(流雲投)라 하였다. 옛 무인이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만들었다는 암기술로 황궁무고에서 찾아내 월영에게 익히게 한 것이었다.
한데 이 유운투는 느리고 여유로운 움직임 속에 날 선 비수를 간직한 비술로 혹여 그 움직임을 중간에 방해하려 막아선 것이라면 바위든 무쇠든 그 느린 움직임 속에 감춰진 무수한 회전력으로 뚫어 버리고 마는 뛰어난 절기로 소면(笑面) 속에 감춰진 흉심(凶心)이라 할 만했다.
관량은 이미 대어를 낚기 위해 제 살을 뜯어 낚싯바늘에 꿴 터! 확실한 포획을 위해 제 팔다리마저 먹이로 준 격이었다.
그럴 것이 관량에게 있어 월영이라는 임무의 비밀은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우선되는 것이었다. 그는 정보 요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정보 요원에게 있어 신분 노출만큼 큰 실수는 없는 것이다.
한데 지금 관량은 도절이라는 대어를 낚기 위해 과감히 치명적인 승부수를 띄우는 것이었다.
도절은 한눈에 유운투의 비술을 알아챘다.
그는 강호에서 활동한 바 있는 무림인인데다 금의위 다음가는 무력 감찰 기관인 어사대의 이인자인데 모르는 게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유운투를 본 도절은 대경실색하였다.
“유운투?! 월영이었단 말인가? 금의위에서도 극비에 가려진 대명제국 최정예 첩보 요원들의 집단이라는…… 음…….”
눈앞에 다가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은패를 받아 든 도절은 한참을 응시하다 다시 관량에게 되돌려 주었다.
유운투의 비술에 절대 위조가 불가능하다는 은패의 진위까지 확인한 마당에 더 이상 의심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금세 살기를 갈무리한 뒤 마치 순식간에 십 년은 늙어 버린 듯한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음! 미안하네. 내가 요즘 제정신이 아니라네. 이해해 주게.”
마치 방금 전의 상황이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내뱉는 그의 말은 절절한 진심이 담겨 있되 의도된 것임을 짐작하게 하였다.
관량은 확신했다. 도를 뻗어 온 순간부터의 일련의 상황이 모두 돌다리도 두들겨 건너고자 하는 도절의 속셈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도절이란 자가 쉬운 자가 아님을 다시금 상기하는 관량이었다. 앞으로 행동 하나하나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관량은 내심 불쾌하였으나 어찌 되었든 먼 길을 돌아갔으나 다시금 제 길로 들었으니 그것이 어딘가 싶었다.
다시금 탁자를 마주한 채 앉기를 권한 뒤 도절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뒤이어 도절은 그간의 일들을 빠짐없이 얘기하였다.
근자에 이르러 호유용은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승상 왕광양이 자리에서 물러난 후 그 자리에 올라선 호유용은 그야말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사실상 육부의 권한과 중서성의 권한을 한 손에 쥔 승상의 자리에 오르자 관직의 임명권 및 박탈권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던 호유용은 종래에 요직에 든 자들을 모두 자신의 사람들로 채우기에 이르렀다.
한데 주원장은 이를 알면서도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호유용의 권세는 날로 커져만 갔다.
특히 근자에 문자의 옥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신들의 불만이 커졌고 그로 인해 수많은 유신들이 호유용에게 의탁해 왔으니 그 권세가 오죽했겠냐마는 그럼에도 주원장은 여전히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
한데 최근에 한 가지 소문이 남경뿐만 아니라 중원 전체로 확산되어 가면서 사건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소문이란 바로 죽은 도찰원 어사 유기의 사인에 관한 것이었다. 유기가 죽은 날에 그를 치료한다는 목적으로 약을 지어 보낸 이가 있었는데 그 약을 먹고 유기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의 범인이 바로 도절이었고!
소문이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자 결국 며칠 전에 금의위의 위사들이 몰려와 도절을 잡아들였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끌려가서 심문을 받았으나 그가 어사중승이라는 고관인데다가 어떠한 혐의점도 발견할 수 없어 다시 방면되어졌다. 이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한데 문제가 그리 쉽게 볼 것이 아니었다. 소문과 함께 금의위에 끌려갔다 온 사실이 호유용에게 알려진 것이었다. 그로 인해 최근 호유용은 이미 쓸 만큼 써 버린 도절을 밖으로만 돌게 하였고 도절의 불안감은 점차 커져만 갔던 것이다.
그럴 것이 그가 아는 호유용은 필요 없게 된 계륵을 가만히 둘 자가 아니었다. 이에 도절은 살아남기 위해 궁리를 하게 되었고 결국 금의위에 투고를 하기로 결심을 했을 때 공교롭게도 관량이 나타난 것이었다.
도절의 얘기를 듣자 관량은 슬그머니 의혹이 들기 시작했다.
‘어째서 금의위에서 도절에게 접근한 것을 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인가? 또한 어째서 금릉 전체에 퍼진 소문을 나만 접하지 못한 것이지? 무엇인가 정보 조작이 있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최근에 접선 당시 총교관 엽우는 어째서 나에게 그 같은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한 번 든 의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것은 세 가지 중 하나다. 금의위 전체가 나를 속였거나 월영에게만 알리지 않은 것! 그리고 총교관 엽우가 나를 속인 것! 금의위 전체나 월영 전체가 나 하나만을 속일 이유나 가치 따윈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은 엽우인가?’
총교관 엽우는 그가 금의위에 든 후 훈련위사 때부터 지켜봐 준 자가 아닌가?
헤아릴 수 없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깊은 의구심에 상념을 이어 갈 때 갑작스런 도절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런! 깜박했구먼. 이럴 게 아니네. 어서 일어나게.”
갑작스런 도절의 호들갑에 관량이 의혹 어린 눈초리를 보내자 도절은 급히 말했다.
“오늘이 바로 호유용의 딸인 호화옥과 또 하나의 승상 이선장의 동생 이존의가 혼인하는 날이라네. 말 그대로 용과 봉이 사돈을 맺는 것이지. 모르긴 몰라도 이번 역모에 가담한 자들은 오늘 결혼식에 죄다 참가할 것이네! 이제 반 각도 남지 않았네. 서둘러야 하네!”
도절에게서 나온 놀라운 말에 급히 함께 신형을 날리며 관량은 전신을 전율하게 하는 떨림을 느꼈다. 긴장감인 동시에 기대감이 교차하는 묘한 것이었다. 그럴 만했다. 그가 가는 곳은 용담호혈의 적진 한가운데였으니 말이다.
3
진회하(秦淮河).
강소성 남경에 있는 운하로 진나라 때 만들어져서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 색향으로 유명하며 홍등선과 유곽이 번창하였다.
하나 진회하는 이외에 남경성에서 지리적으로 그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만 남경성은 황도(皇都)인 까닭에 수많은 고관대작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특히나 빈부격차가 심하였는데 이로 인해 당연히 거주 지역이 나눠지게 되었고 그 경계선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진회하였다.
진회하를 기준으로 그 위를 강북(江北)이라 하고, 그 아래를 강남(江南)이라 하였지만 흔히 북천(北天)과 남지(南地)로 불렀는데 이렇게 불리게 된 데에는 힘의 논리가 크게 관여되었음은 당연한 것이리라.
북천에서도 중심가라 할 수 있는 대옥로(大玉路)의 한 장원.
워낙에 고관대작들이 거주하는 대옥로상의 장원인지라 그에 준하면 규모가 그다지 크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큰 장원임에는 틀림없는 한 장원의 주위로 벌 떼처럼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 정문이 되는 대문 앞에만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고 또한 끊이지 않고 그 인파가 늘어나니 가히 장관이라 할 만했다.
그 줄에 선 저마다 화려한 복색으로 치장한 가지각색의 인물들에게서 굳이 공통점을 찾으려 한다면 두 가지가 있었다.
그 첫째로는 상(商)계든 관(官)계의 인사든지 간에 저마다 일가(一家)를 이룬 자들이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는 그들의 수레에 가득 담긴 재화들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오늘 이 장원의 주인인 이선장의 결혼식에 참석하려는 자들이었다. 이선장이란 인물이 비록 전(前) 승상의 위에 올라 있는 권력의 정점에 선 인물이라 하나 이는 과한 데가 있었다. 하나 오늘 사돈을 맺을 상대가 좌승상 호유용인 데야 고개마저 끄덕여질 정도였다.
호유용은 그만큼 근자에 황제 다음가는 권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 밑에 모여든 사병만 수만에 이르고 그를 따르는 문무의 가신들만 해도 수천은 된다 하니 가히 일개의 나라를 세우고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선장이라는 인물은 비록 권세는 떨어진다 하나 그 인물됨이 호유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선장은 호유용과 마찬가지로 명제국의 개국공신으로 자는 백실(百室)이라 하고 정원(定遠) 출신의 문무를 겸한 인물이었다.
그는 법가(法家)의 학문에 능통했고 많은 계책을 세워 주원장을 도왔는데 주원장 또한 언젠가 유기와 이선장이 있어 명제국을 세웠다라고 했을 정도니 그의 출중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명제국 건국 후에 근거지였던 남경의 경영에 주력함과 동시에 행정과 재정 기구의 정립, 국가 통일의 기초 확립에 큰 공을 세워 왔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국가의 원훈(元勳)으로 전(前) 승상이 되었고 한국공(韓國公)에 봉해지기까지 하였으니 그 인물됨이 호유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이선장이기에 비록 오랜 세월을 함께 전장을 누빈 같은 개국공신이라 하나 그 인물됨이 편협하고 간사하며 재물을 탐하는 호유용과는 전혀 왕래가 없을뿐더러 상대를 하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명제국이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주원장의 독선과 교만함에 수많은 문무백관들이 좌절하였고 또한 이선장마저 위기를 느끼기에 이르렀다. 제국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주원장이 자신의 권력에 위기감을 주는 개국공신들을 배척하려 한 탓이었다.
그로 인해 일부 개국공신들은 일찌감치 위기감을 느끼고 관직을 버린 후 초야에 든 자도 있었으며 그들끼리 규합하는 자들 또한 생겼는데 이선장은 후자였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게 흘러간다 해도 그간의 이선장의 성품을 미루어 봤을 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 어떤 무리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무조건 자신의 의견만을 관철시킬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선장 또한 이 경우에 해당되었는데 그가 세를 불리는 데 의식하지 않았다 하여도 수많은 전장을 돌아다니고 제국을 통일한 후 승상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세월 동안 그 밑에 모여든 능력 있는 자들의 수가 족히 기백에 달했고 이번의 경우에도 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자신은 이제 흙으로 돌아갈 날만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들은 아직 젊었다. 비록 말은 안 해도 한 세상 그 능력을 뽐내다 가려는 가신들의 의중을 짐작하지 못할 이선장이 아니기에 그로 인해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선택하고 만 것이었다.
이선장은 정문을 통해 밀려드는 수많은 인파들을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후후…… 이들은 알까? 지금 자신들이 서서히 빠져 드는 늪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 또한!’
이선장은 어떠한 예감이 든 것이리라.
한참을 공허한 시선을 던지던 이선장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그는 동생인 이존의였다.
혼례의 신랑답게 붉은색으로 치장한 예복에 화려한 옥 장식을 달고 있는 것이 절로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래. 비록 어떤 결과가 찾아온다 해도 후회는 없다. 나에게는 동생이 있고 가족들이 있으며 또한 가신들이 있으니까!’
복잡하던 마음을 가볍게 환기시키며 웃는 낯으로 동생을 맞아 갔다.
“하하하. 이거 원! 몰라보겠구나. 어린 신부가 좋긴 좋은 게로구나? 이렇듯 근사하게 차려입은 것을 보니 말이다!”
농을 던지는 형의 말에 가볍게 얼굴을 붉히는 이존의였다.
“형님도 참. 그나저나 이것으로 대명천하의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축하드립니다. 형님!”
이존의의 말에서는 진심이 절로 묻어 나왔고 이에 이선장 또한 사심 없이 받아 주었다.
“그래! 이제부터 바빠질 것이다. 이미 우리는 크나큰 거선에 올라타 버렸다. 종착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도중에 내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앞으로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난파선이 될지 만선이 될지는 네 녀석에게 달렸다. 존의야!”
“예! 형님. 저만 믿고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하하하!”
호탕한 새신랑의 웃음소리에 절로 웃음이 동하여 함께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니 가슴속에 쌓였던 시름도 서서히 풀려 갔다. 그리고 이윽고 가슴속에 점화된 불꽃으로 심마를 태워 버렸다.
‘그래. 새로운 전장이 주어졌다면 장수 된 도리로 최선을 다할 뿐! 후회도 미련도 없다! 한바탕 멋지게 검무를 춰 주마!’
이선장의 가슴속에서는 다시금 특유의 열화의 불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십여 년 전 전장을 누비던 그때처럼.
줄은 끝이 없었다. 도절을 따라 거침없이 앞을 헤치며 나아갔지만 여전히 정문은 까마득하기만 했다.
이래서는 제 시간에 맞춰 들어가기가 막막해 보였다.
이미 장원 안은 인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장원 밖의 사람들도 들어가려는 목적을 버린 채 그저 장원에 들지 못하더라도 멀리서라도 참관하려 하고 있었다.
하나 관량은 반드시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이와 같은 천우신조의 기회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으리라.
한참을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앞에 있던 도절이 눈을 빛내며 소리치는 것이 보였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칠 척이 훨씬 넘는 키에 껑충한 체격을 지닌 말상의 사내가 정문을 지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대부 어른! 대부 어른!”
도절은 금세 발을 놀려 정문을 지키던 사내의 앞으로 다가섰다.
“왜 이리 늦었는가?”
사내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툭 내뱉듯이 말했는데 어찌나 쌀쌀맞은지 찬바람이 쌩쌩 부는 듯했다.
“하하!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승상께서는 안에 계신지요?”
“이미 반 시진 전에 내가 뫼시고 온 지 오래네. 그건 그렇고 뒤에 있는 저자는 누군가?”
말상의 사내는 냉엄한 표정으로 관량을 주시하며 물었다.
말상의 사내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관량은 마치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불쾌한 느낌이 들며 사내에게 전신이 노출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관량은 알지 못했으나 이는 강호상의 무예 중 심안법(心眼法)이라는 것으로 상대의 진신절기를 꿰뚫어 보는 비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