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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관량 앞의 말상의 사내는 도절과 함께 호유용의 심복 중 하나인 진녕이라는 자였다. 그는 본래 강호상에서 꽤 알려진 검객으로 활약하다 호유용의 밑에 든 자였다.
“흥. 뭐 하는 자인가? 설마 새로 거둔 수하인가?”
말상의 사내는 심안법으로 들여다본 후 관량에게서 어떠한 특이점도 발견하지 못하자 이내 관심을 접으며 툭 내뱉었다.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승상께 보고드렸던 관량이라는 바로 그자입니다. 이번에 제 수하들을 구하는 과정에서 검교를 죽인 자 말입니다. 이 녀석이 제법 문무를 겸한 터라 제가 거두기로 하였습니다.”
“흠. 마음의 공부는 안 되었으나 꽤 외공을 경지에 들게 익힌 자이군. 한데 이런 자가 어찌 낭관의 벼슬에 있었단 말인가?”
진녕의 말은 예리한 구석이 있어서 금세 핵심을 짚고 말았다.
관량은 일순 당황하였으나 금세 신색을 바로하고는 여유롭게 한 손을 떨쳐 냈다.
쉭!
그러자 머리카락보다 가는 세침이 빛살같이 날아가 진녕의 발 앞에 깊이 박혔다. 어찌나 빠른지 눈으로 보고 반응을 한다면 도저히 당해 내지 못할 솜씨였다. 땅에 박힌 세침에는 어떤 극독이라도 발라져 있던지 그 주변이 순식간에 검게 변해 버렸다. 참으로 극악한 독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그런 극독임에도 어떠한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진녕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 냈다.
“허! 비응침(飛應針)에 무색무취의 극독 십면독(十面毒)이라! 어쩐지 다른 곳에 비해 다리의 근육이 특히 잘 발달돼 있다 했더니 네놈! 흑살회의 일급 살수로구나?”
갑작스런 진녕의 반응에 도절 또한 어리둥절하였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란 말인가?
분명 금의위 월영임을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거늘?
하나 도절은 눈치가 빠른 자였다. 금세 관량의 의중을 파악한 도절은 시치미를 뚝 떼고는 호탕하게 말했다.
“역시 대부의 안목은 대단하십니다. 사실 이 친구가 근자에 색출되어 몰살당한 흑살회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저도 그 사실을 알고 어찌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하하하!”
“유일한 생존자라…… 하지만! 아무리 원의 잔존 세력인 흑살회의 살아남은 살수라 해도 그 의도를 알기 전에는 함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야! 신분은 확실한 건가?”
역시 호유용의 실질적인 무력의 수장답게 그 심계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하나 세간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도절 또한 그리 녹녹한 자가 아니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물론 제가 확실하게 확인하였습니다. 게다가 적의 적은 동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몸담고 있던 곳을 몰살시킨 그…… 주가 놈에게 누구보다 원한이 많은 자입니다!”
도절의 말에 그제야 진녕은 고개를 끄덕이며 관심을 돌렸다.
물론 도절의 뒷말은 진녕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서둘러 들어가게. 일다경도 남지 않았네. 그리고 승상께서 기다리시니 특히 서둘러야 할 게야!”
의심을 풀자 진녕은 얼굴 표정을 풀며 호탕하게 말했다.
마치 방금 전의 사람과는 딴사람을 보는 듯했다. 진녕이란 자는 이면(二面)을 가진 자였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냉철하고 차가운 얼굴과 사람을 사귈 때의 호탕한 얼굴.
이런 사내일수록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관량은 머릿속으로 진녕이란 이름을 되뇌었다.
읍을 하고 돌아서는 도절과 관량은 절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말 그대로 임기응변으로 고비를 넘긴 터였다.
삼 년 전에 흑살회라는 원의 잔존 세력인 살수 집단이 몰살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주원장의 금의위에서 행한 것으로 당시 관량은 위사로 활동을 하지 않았었기에 나중에 알게 되었다. 월영에 뽑혀 수련을 받으면서 신분을 위장할 수많은 무예를 익히게 되었고 그중 하나가 흑살회의 암살술이었다.
도절 또한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 관량의 재치를 받아쳐 절묘하게 상황을 넘긴 것이었다.
일단 가장 중요한 한 고비는 넘겼다. 그리고 또 다른 고비는 최악으로 상황이 흐르지 않는 한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미 장원 안에는 경쾌한 음률이 흐르기 시작했고 그들의 발걸음도 서둘러 안으로 향하였다.
그들은 알지 못하였으나 안으로 향하는 관량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이 있었다. 찰나지간에 향해졌던 시선은 다시금 정문으로 들어서는 수많은 인파를 훑기 시작했으니 일순간에 보였던 그 시선은 무척이나 날카롭고 매서웠다.
‘관량이라…… 흥! 흑살회의 살아남은 살수는 분명 추성 하나라 전해 들었다. 한데…… 흑살회를 가장한 자라…….’
일수유에 광망을 번뜩인 자는 다름 아닌 어사대부 진녕이었다.
제5장 무인지로(武人之路)
1
진회하 남지(南地)의 한 골목.
서민층이 주로 거주하는 골목인지라 폭이 좁아 사람 서너 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을 지나며 둘러보자면 비슷한 모양의 남루한 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유난히 허름한 집이 있었으니 이곳이 바로 홍문관(弘門館) 학사 나복인(羅復仁)의 집이었다.
그는 개국공신 중의 하나로 뛰어난 문장가로 유명했다. 높은 관직에 올라 떵떵거리며 권세를 누리는, 함께 명제국의 초석을 다졌던 여타 개국공신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초라한 모습이라 할 수 있었으나 그는 그런 것을 중요시 여기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평소에 ‘학문을 하는 자에게 살아갈 작은 집이 있고 의지할 처자식이 있으며 평생을 함께할 좋은 책이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자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며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니 그의 검소하고 곧은 심성을 알 만했다.
그 나복인의 집으로 한 계피학발의 후줄근한 신색의 넝마를 얼기설기 차려입은 노인이 들어섰다.
노인의 신색이란 거지 중에도 상거지라 할 만해서 절로 인상을 찌푸려지게 하였는데 괴이한 것은 숙인 고개가 잠시 들릴 때마다 언뜻 내비치는 눈빛이 매우 깊고 또한 간악했다.
괴노인이 집으로 들어설 때 나복인은 담장을 수리하고 있었다.
지난겨울 한파로 인해 낡고 허름한 담장은 결국 쌓이고 쌓인 눈덩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고 올봄에 급조하여 다시 쌓은 짚을 엮어 만든 담장 또한 여름에 내린 폭우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로 인해 나복인은 큰맘 먹고 고서(古書)를 사는 데 들일 돈을 아껴 튼튼한 돌담벼락을 쌓아 올리는 중이었다.
차곡차곡 쌓아 올려지는 돌담장만큼 나복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또한 늘어만 갔지만 이번 겨울을 거뜬히 버텨 낼 담장의 모습을 상상하자 흐르는 땀조차 시원한 단비로 느껴졌다.
오랜만에 노동을 통해 땀을 흘리자 새삼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고통스런 삶이 느껴지며 최근에 심란했던 마음 또한 눈이 녹듯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최근에 나복인은 생각지도 못했던 곤혹스러운 일을 당했다. 다름 아닌 자신에게 배정된 검교가 허위로 조작하여 보고하는 바람에 졸지에 어사대에 끌려갔다 온 것이었다. 문자의 옥 사건 이후에 거의 중신 한 명당 검교 한 명씩이 딸렸으니 검교 수만 해도 족히 수만에 이를 정도였다. 한데 이렇듯 검교의 수가 늘어나면서 그들이 실적을 쌓기 위해 월권을 행사해 허위로 조작하여 보고한 후 실적을 올리는 행위가 만연해졌다. 나복인 또한 어처구니없게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다.
하나 어사대에서 아무리 밝히려 한다 한들 없는 일이 생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특히나 평소 오롯이 학문에만 전념하며 검소한 생활을 하던 나복인에게 공금 횡령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죄목을 씌웠으니 죽이기로 마음먹지 않는 이상 증거가 나올 리가 없었고 결국에는 풀려나게 되었다.
하나 어찌 된 셈인지 그 후로 자신을 따라다니던 검교가 안 보이면서 오히려 나복인은 그것이 더 불안해졌다.
아무리 학문에 대한 열정과 굳은 심지를 지닌 사내라 하나 그는 글에만 파묻혀 사는 새가슴을 가진 문인일 따름이었다.
잠시 손을 놓고 상념에 빠져 있던 나복인은 갑작스레 뒤에서 들린 인기척에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았다.
돌아서자 보이는 것은 웬 거지 노인이었다.
너무도 곤궁해 보이는 그 신색을 보며 절로 불쌍한 마음이 들어 아내에게 의자를 가져오게 한 후 죽 한 그릇을 내오게 하였다.
노인은 의자에 앉더니 죽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먹어치운 뒤 그릇에 남은 국물마저 깨끗이 핥아 먹고는 고개를 들었다.
한데 고개 들린 노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눈에서는 광구가 반짝이듯 광명을 발하고 있었다.
무심코 해괴한 짓을 하는 거지 노인을 바라보던 나복인은 순간 놀라서 그 자리에 부복했다.
“황제 폐하!”
그러자 그릇을 가져와 옆에 서 있던 아내와 집 안에 있던 자식들이 모두 뛰어나와 절을 하였고 이윽고 거지 노인으로 변장한 주원장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일어선 후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내 속이 좁았음이야. 자네 같은 훌륭한 자를 의심하였으니 말이야. 한데 그대는 어찌하여 이런 곤궁한 생활을 한단 말인가?”
마치 토해 내듯 내뱉는 주원장의 질책 어린 호통에 나복인은 더욱더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주원장은 사실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저마다 세를 차지하고 나라를 좀먹는 개국공신들을 눈엣가시로 여겨 왔었다. 그러던 중 나복인에 대한 사건을 접하고 그를 의심하여 확인코자 직접 변장한 채 방문한 터였다.
한데 방문해 보니 자신의 경솔함과 나복인의 청렴함과 굳은 학구심에 절로 후회가 들었다.
이에 주원장이 스윽 고개를 돌려 가내(家內)를 살피니 열린 방문 사이로 한쪽 벽을 차지하고 들어선 책장을 가득 메운 고서들이 보였다. 사정을 알 만하였다. 이 학문 하나밖에 모르는 답답한 자는 봉급을 받는 족족 꽤 값나가는 고서를 사들였으니 그 나머지 돈으로는 근근이 살아가기도 빠듯했으리라.
이에 주원장은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그는 성큼 다가가 부복한 나복인을 일으켜 세웠다. 나복인은 황제의 갑작스런 처사에 몸 둘 바를 몰라 머리만 조아렸고 이에 주원장은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당장 북천(北天) 대옥로에 저택 하나를 장만하여 나복인에게 주도록 하여라. 그리고 이 사실을 대명천지에 공포하여 이를 귀감토록 하여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누구의 명이라 거역하겠는가? 몰래 뒤를 따르던 자가 선창을 하자 금세 허름한 나복인의 모옥 안은 만세 삼창이 떠나가라 울려 퍼졌다.
나복인의 집을 나온 주원장은 어느새 평범한 무복으로 갈아입었고 몇 명의 수행원을 대동한 채 말에 올라 진회하 강변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 수행하는 자들은 방갓을 깊이 눌러쓴 채 흑색 무복을 차려입고 있었는데 마치 한 자루의 검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자들이었다.
그중 우두머리 되는 자가 조용히 주원장에게 말했다.
“폐하! 지금쯤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주원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무엇을 이름인가?”
“무엇이겠습니까? 호유용과 이선장이 사돈을 맺는 일 말씀입니다.”
하나 주원장은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다만 눈빛만이 약간의 노화를 띤 것을 제외하면.
“그건 그렇고 저번에 놓친 자는 어떻게 되었는가? 아직도 잡아들이지 못했는가?”
서릿발 같은 주원장의 말에 흑의인은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분명 흔적을 미루어 볼 때 그자가 속한 단체에서 빼낸 것으로 보이는데 남경성을 이 잡듯 뒤졌지만 오리무중입니다. 송구스럽습니다. 다만 그 단체를 예측한다면…….”
주원장은 이어지는 흑의인의 말을 끊은 채 씹어 내듯 한 자, 한 자 끊어서 말했다.
“백! 련! 교!”
“그렇습니다, 폐하.”
“음…… 참으로 질긴 악연이로구나…… 흑영대주!”
“예!”
잠시 말을 멈춘 주원장은 잠시간 너울 치는 진회하를 바라보다 이윽고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흑영은 도망간 자와 백련교의 잔당들을 찾아내는 데 전력을 다하라! 중원 온 천지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내거라!”
“예, 폐하!”
주원장의 얼굴 가득 잔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너무나도 짙어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나는 그런 잔인한 미소가.
그 시각, 명제국을 좌지우지하는 두 가문이 사돈을 맺는 성대한 잔치는 한창 흥을 돋우고 있었다.
이미 식은 마친 지 오래였으나 몰려든 인파들의 선물을 수거하는 가장 큰 일과 함께 잔치가 벌어져 여기저기 술상이 차려지고 웃음소리가 장원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이에 성공적으로 두 가문의 규합을 치러 낸 호유용과 이선장 또한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으니 참으로 기분 좋은 날에 기분 좋은 모습이었다. 그들은 환담을 주고받으며 은밀히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그들의 주위에는 수많은 무장들이 시립하였고 인의 장막 속에서 그들의 밀담은 이어졌다.
“이제 사실상 병권의 육 할은 우리 손에 넘어왔소. 나머지 사 할을 담당하는 지방군과 황실 친위대, 그리고 금의위의 삼만 위사들이 문제인데 역시 그중 금의위가 가장 큰 걸림돌이라 할 수 있소. 그들의 무력은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았으나 듣기로 황군 친위병을 넘어선다 하니 좌시할 수 없을 것이오.”
이선장은 냉철하게 사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병법과 전술에 관한한 명제국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할 만했다. 그런 그의 말이었으니 호유용 또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 호유용은 그의 말의 진위 여부보다는 그의 소극적인 태도가 마땅치 않았다. 이미 대세를 장악한데다 아직 주원장이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지금이 가장 적기라 생각하는데 이선장은 연이어 제동을 걸고 있었다.
호유용은 차라리 빠른 시일 내에 거사를 벌이고 싶었다.
사실 그는 두려웠던 것이다. 주원장이라는 사내가!
과거 그와 함께 전장을 누빌 때도 그의 냉정하면서도 차갑고 간악한 모습은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는 호유용조차도 질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최근에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며 주원장이라는 벽을 마주하게 되자 밤마다 악몽을 꾸며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그로 인해 그는 가능하면 빨리 거사를 일으켜 마음 편히 두 발 뻗고 자고 싶었던 것이다.
한데 우습게도 그것은 이선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선장은 그에 대한 두려움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쪽을 선택하였고 호유용은 시(時)와 세(勢)를 얻었을 때 속전속결로 가기를 선택한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따름이었다.
그들의 논의는 좀처럼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둘의 의견 모두 타당한 것이었으나 둘의 의견 차이가 너무도 극명하여 진행이 되지 않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지루한 논의만 계속되고 머리가 아파 올 때 갑작스럽게 장내가 소란스러워짐을 느꼈다.
무슨 일인가 하여 고개를 돌려 보니 웬 추한 노인이 정문을 막아선 무사들을 밀쳐 내고는 장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장내에 들어선 노인은 다짜고짜 가까운 상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캬! 술맛 한번 좋∼구나! 역시 호가와 이가가 마시는 술이라 그런지 그 맛 한번 기가 막히는구나!”
술 한 병을 통째로 들이켜자 코가 얼큰하게 붉게 오른 추레한 노인은 금세 갈지(之) 자로 휘청거렸고 돌연 수중에서 녹이 슬 대로 슬어 구릿빛이 나는 청강검을 뽑아 들더니 거침없이 휘젓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좌중의 무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다가서려 하자 어사대부 진녕이 손을 들어 제지하였다.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저 노인이 바로 광노(狂老)다!”
일순 검을 뽑아 들고 뛰어나가려던 무사들은 진녕의 말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잘못 나섰다가 세상을 하직할 뻔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등에는 어느새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대저 광노란 자가 누구이관데 이렇듯 좌중을 두려움에 휩싸이게 한다는 말인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2
광노란 자는 강호상의 절세적인 고수로 괴팍한 성격과 종잡을 데 없는 행동거지로 유명하였다. 그는 한 자루 녹슨 청강장검을 들고 수십 년 전에 강호에 홀연히 나타났는데 워낙 예측할 수 없는 괴팍한 성격으로 뜻에 거슬리는 자를 족족 일검에 베어 버렸으니 가히 거마(巨魔)가 따로 없었다.
하나 그는 정사지간의 인물로 비록 사람들이 그를 대하기를 꺼려하나 그를 사파로 취급하는 이들은 없었는데 그가 죽인 이중 대부분이 흉악한 마인들이었던 까닭이다. 게다가 그가 지닌 무위가 강호상의 절대무인들인 정도육절(正道六絶)과 육대사마(六代邪魔)에 버금간다는 강호사괴(江浩四怪)의 일인인지라 감히 그에게 검을 겨누는 멍청한 짓을 할 자는 많지 않았고 그런 자들은 이미 고혼이 된 지 오래였다.
결국 장내에 운집한 수백이 넘는 자들이 모두 물끄러미 바라볼 따름이었다.
연방 술을 들이켜며 광노는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입에서 노랫가락을 뽑아내듯 음을 실어 노래했다.
“크크크. 놀아 보자. 놀아 보자. 호가야! 이가야! 어서 나와 놀아 보자! 검을 들고 나오너라! 이 어르신의 일검이라도 받아 낸다면 내 기꺼이 네놈들 가랑이 사이를 기어 주마! 대신 못하겠다면…… 네놈들 모가지를 따 주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광노는 빛살 같은 속도로 호유용과 이선장을 향해 부딪혀 왔고 주변을 호위하던 수많은 무인들이 그를 맞아 갔다.
하나 말 그대로 질풍노도(疾風怒濤)가 따로 없었으니 가볍게 내쳐진 일검은 기이한 소성을 발하며 한일(一) 자로 베어 갔고, 그 앞을 막아선 수십 무인들의 무기와 부딪히는 순간 신기하게도 쇠와 쇠가 부딪혔건만 어떠한 소리도 나지 않고 부딪힌 무인들만 뒤로 고꾸라지며 피를 토하니 괴이한 일이었다.
하나 더욱 기이한 것은 일검을 맞은 자 중 목숨을 잃은 자가 없으니 살성으로 소문난 광노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였다. 아무리 광노라 하나 천하를 아우르는 승상의 권세에는 그도 두려움을 느껴 손속에 사정을 둔 탓인가?
하나 뒤이어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피를 토하고 전신을 부르르 떨던 자들이 모두 그대로 숨을 거둔 것이다. 어떠한 외상도 없건만 단 일검에 어찌 수십의 목숨을 거둘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강호상의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에 의한 것이었다.
마음의 공부를 한 자들은 경지에 이르면 내기(內氣)를 다스려 발경(發勁)을 통해 내기를 전달할 수 있는데 방금 전의 광노의 일검은 참으로 오묘한 기술로 사량발천근(四兩撥天斤)이라 하였다.
상대의 힘을 이용해 역으로 돌려주는 기술로 듣기에는 무척이나 단순해 보이나 수십 무인들의 힘을 사량발천근의 묘리를 실어 단숨에 목숨을 끊어 놓는 것은 강호상의 어느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고절한 무학이었다.
놀라운 광노의 무위에 좌중의 안색은 납빛으로 변하고 말았고 광노는 무인지경으로 호유용과 이선장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다시금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는데 앞을 막아선 삼 인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진녕, 도절, 그리고 관량이었다.
“흥! 분수를 모르는 것들이로구나. 네놈들이 자처한 터, 너무 섭섭해 하지 말거라!”
광노는 마치 아이를 타이르듯 말하더니 순식간에 검을 뻗어 냈다. 삼 인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손에 쥔 병기에 더욱더 힘을 가하였으나 두려움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는 방금 전 한 수에서 보았듯 천외천의 무학을 지닌 자였다. 그러나 삼 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진녕은 그의 주군을 위해, 그리고 도절과 관량은 먹잇감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각자 자신의 최고 절기를 펼칠 준비를 하였다.
사실 그들의 마음속에서 어느 정도 호승심이 작용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었다. 강호상의 정상을 달리는 자와 실력을 겨루고자 하는 것은 무인으로서는 당연한 마음이리라.
그런데 눈부신 속도로 짓쳐 들던 광노가 마치 거짓말처럼 우뚝 선 채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닌가?
광노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였는데 어찌나 괴기스러운지 모골이 송연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천우신조를 넋 놓고 바라볼 삼 인이 아니었다. 먼저 도절이 거도를 뽑아 들고 중앙을 천지양단의 기세로 베어 갔고 우측을 검을 꼬나 쥔 진녕이 열십(十) 자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좌측을 관량이 창을 몸에 밀착한 채 그가 훈련위사 시절 새롭게 가다듬은 24로 창법의 후삼식 중 극쾌의 빠르기를 자랑하는 가장 강한 초식인 섬전창을 펼쳐 냈다.
그들의 공세는 놀랄 만큼 위력적인 것이어서 바람도 그들 주변으로는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듯 쇄도하는 삼 인의 무인들.
삼로의 흉흉한 공세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광노의 모습은 지극히 위태로워 보였다. 하나 다음 순간 기광을 번뜩인 광노는 광소성을 터뜨리며 여유롭게 검을 내뻗었다.
“흥! 가소로운 것들! 찻!”
지잉!
일순 검이 울음을 토하며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리는 검에 붙어 있던 녹이 툭툭 떨어져 나가며 놀랍게도 삼 로의 중간 지점을 찔러 갔다. 마치 검에 흡입력이라도 실린 듯 삼 로상의 검, 도, 창은 검봉에 붙다시피 모여들었고 이윽고 검에 부딪히는 순간 외마디 장소성을 토하며 삼 인은 휘청거리며 뒤로 연방 물러났다.
그중에서도 도절과 진녕은 열 걸음을 물러선 채 붉게 변한 얼굴로 기식을 고르고 있었으나 관량은 끊어진 연처럼 거칠게 날아가 뒤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관량은 입에서 연방 피를 게워 내며 괴로워하였으나 특유의 지독한 독기로 고통을 짓누르며 전신을 일으켜 세운 뒤 부들거리면서도 힘껏 창을 꼬나 잡고는 광노를 노려보았다.
이에 광노는 이채를 발하였다.
제법 내외공 고루 실력을 갖춘 두 명의 검, 도 무인들보다도 내가공력(內家功力) 한 줌 없는 외공의 달인으로 보이는 창술가에게 무척이나 흥미가 동했다.
그 지닌 창술의 오묘함과 막강함 또한 뛰어난 것이었으나 그 독기 어린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