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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호! 재미있는 아해로구나! 하나 주인을 잘못 두었으니 어찌하겠는가! 아까운 인재로구나!’
하나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는데 그가 짓는 미소는 무척이나 괴기스러워 오히려 그에게 더욱더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사실 광노는 중간에 갑자기 전음입밀(傳音入密)의 수법으로 들려온 수하의 목소리에 공격을 멈추고 고민을 하던 터였다. 그리고 어차피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이 호유용과 이선장을 죽이러 온 것이 아니므로 더 살계를 펼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눈앞의 창을 든 청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으니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잠시 창을 든 사내를 미소를 띤 채 바라보다가 호유용과 이선장을 향해 차디찬 한광을 발하며 말했다.
“흥! 천하를 어지럽히는 간웅들이여! 비록 천하대란(天下大亂)의 시기가 왔다 하나 네놈들은 암천존자(暗天存者)가 아닌 일개 암흑의 졸개들일 따름이니라. 곧 광명(光明)이 도래하고 광명존자(光明存者) 미륵불이 이 땅에 현신(現身)하시는 날, 만백성이 평등한 세상이 열리리라. 하하하!”
일장 장소성을 터뜨린 광노는 순식간에 신형을 날려 높디높은 담장을 한달음에 뛰어넘고는 유유히 사라져 갔다.
장내의 인물들은 너무도 절세무비(絶世無比)한 광노의 무위에 차마 쫓아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니 단 일인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저마다 외쳐 대기 시작했다.
“백련교다! 마교다! 광노가 마교의 무리였던 게야!”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광노의 마지막 말을 떠올린 자들은 퍼뜩 그것이 백련교, 마교라 불리는 단체의 교리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장내는 이로 인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그때였다.
“뭣들 하느냐!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자는 모두 단칼에 베어 내겠다! 어서 장내를 정리하여라!”
퍼뜩 정신을 차린 이선장은 호통을 쳐 넋이 나간 좌중을 일깨웠고 그들은 입을 다물고는 분주히 시신을 치우고 장내를 정리해 갔다.
이선장과 호유용은 문득 시선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공통적으로 생각을 정리하였으니 더 힘을 모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단 한 명의 무인에게 휘둘릴 정도로 어찌 나라를 도모한다는 말인가?
호유용과 이선장은 머릿속이 지끈거림을 느끼고는 입술을 깨물며 화를 삭일 따름이었다.
저마다 정신을 차리고 분주히 움직일 때 가슴에 크나큰 상처를 입고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움직일 생각도 못하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관량이었다.
‘내 실력이란 게 고작 이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단 말인가?! 고작 이 정도 실력을 가지고 그렇듯 자신하였단 말인가?! 크윽! 내 기필코 뼈를 깎고 피를 말리며 고련에 고련을 거듭해 다시 만나는 날 네놈을 반드시 꺾어 주마! 광노!’
그날 비로소 관량은 무인으로서의 본능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때 어느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관량이란 보잘것없는 무인이 후에 강호를 진동시키는 무인으로 성장하게 되리라는 걸!


3

어둑한 밤 요요하게 솟아 있는 종산(鐘山) 아래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을 대저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당금 천하의 제일권세를 자랑하는 좌승상 호유용의 저택인 호가장(胡家場)이었다.
호가장은 그 거대한 규모만큼이나 방비 또한 물샐틈없이 이뤄지고 있었는데 최근에 이르러서는 호유용이 광적으로 호위병을 늘림에 따라 가히 그 삼엄함이 황궁에 비견될 만했다.
외택과 내택으로 나눠진 저택은 한밤중임에도 외택에만 기백에 달하는 무인이 돌아가며 번을 서고 있었고 내택은 그가 초빙한 무수한 고수들이 즐비하였으니 말 그대로 용담호혈(龍潭虎穴)이 따로 없었다.
금일(今日) 밤은 월광(月光)이 짙은 흑운무(黑雲霧)에 가려 이미 빛을 잃고 천지사방이 어둠에 휩싸여 횃불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한 걸음 내딛기도 어려운 날이었다.
한데 한 걸음도 쉬이 내딛지 못할 짙은 운무를 뚫으며 어둠을 벗 삼아 낙엽 밟는 소음조차 내지 않은 채 날쌘 제비처럼 담장을 넘는 비조(飛鳥)가 있었다.
그는 흑색 무복에 흑색 두건을 쓴 전형적인 야행인이었는데 그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사내의 눈에는 백태가 없었다. 오로지 검은 동자만이 두 눈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빛 한 점 새어 나올 틈조차 없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마치 환한 대낮을 달리는 듯 비조처럼 거침없이 나아갔으니 기사(奇事)가 따로 없었다.
야행인은 다름 아닌 관량으로 그는 월영의 삼대 비술 중의 난영무형보(亂影無形步)와 암로명안(暗路明眼)을 시전한 채 호유용의 저택을 잠입 중이었다.
이 암로명안의 안법은 무척이나 특이한 비술이었는데 그 연성 과정이 무척 고련을 요하는 것이어서 그 효능과 속성의 연성 기간에 비해 월영 내에서도 익힌 자들이 극히 적은 비술 중 하나였다.
그 연성 비결이란 다름 아닌 특수한 약물을 눈에 넣은 채 한 달 동안 잠잘 때조차 눈을 감지 않아야 하는 단순한 것이었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터득하는 비술이나 그 과정에서 겪는 엄청난 고통으로 인해 한 달을 버티는 자가 극히 드물었으나 관량은 이 비술의 뛰어난 효능을 단박에 눈치 채고 지독한 고련을 거쳐 완성해 낸 것이었다.
암로명안의 외관상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이 명(明)이 담기지 않은 온통 암(暗) 일색의 눈이었다.
관량은 이미 기백에 달하는 무인의 감시망을 비웃듯 유유히 통과하여 외가를 순식간에 지나왔고 어느덧 내택(內宅)으로 들어서 갔다. 하나 내택의 담장을 넘어선 관량의 걸음이 갑작스럽게 멈추며 서서히 담장의 어둠 속에 동화되어 갔다.
내택에 들어서자마자 외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삼엄한 경비를 통해 경계심이 든 까닭이었다. 내택은 짙은 어둠에 휩싸였던 외택과는 달리 삼 장 간격으로 횃불이 장대 위에 걸려 있었고 번을 서는 무사들 또한 만만치 않은 자들인데다 그 수 또한 수십이 넘어 보였다. 지금 시각이 벌써 사경(四更, 새벽1∼3시)을 넘긴 지 오래였건만 경계는 더욱더 삼엄해졌으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이에 관량은 마치 두꺼비처럼 몸을 바닥에 바짝 밀착시킨 채 땅에 귀를 대고는 두 눈을 감아 갔다.
그는 지청술(地廳術)을 펼치려는 것이었다.
금의위사 중에서도 가장 베일에 싸인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월영(月影)과 흑영(黑影)이었다.
그중 흑영이 무공의 고수들로 이루어진 요인 암살과 무력 행사를 전문적으로 하는 집단인 데 반해 월영은 정보 조작과 각종 공작을 위한 집단이었으므로 고강한 무력보다는 온갖 다양한 비술을 익히게 하였다.
관량 또한 월영에 든 지 어언 일 년여, 그의 무공에 대한 재능은 그리 떨어지는 편이 아닌데다 워낙에 독기로 똘똘 뭉친 인물이다 보니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여 종래에는 몇 가지의 비술을 그 극에 이르도록 익히게 되었으니 지청술 또한 그중에 하나였다.
잠시 후 고개를 든 관량의 안색은 무척이나 어두워 보였다.
‘내택의 외원 무사만 약 서른 명에다 그들의 무위는 모두 십호장(十戶長) 이상 급! 게다가 본원에는 진녕이나 도절에 버금가는 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니 대체 어찌 된 일인가? 게다가 기척을 잡아내지 못한 자 또한 여럿 더 있을 것으로 보이니…… 낮에 모인 것이 전력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관량이 크게 낭패할 만하였다.
사실 호유용에게는 그림자처럼 따르는 십전호위(十戰護衛)라는 무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강호상에 흉명을 날리던 살수들로 호유용이 어마어마한 금전을 들여 사 온 자들이었다.
낮에 있었던 광노로 인한 소란에도 십전호위들은 호유용의 주변에 몸을 숨긴 채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으나 호유용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았기에 나서지 않은 것이었다.
그들은 단지 돈에 의해 호유용의 목숨만을 보호해 줄 뿐 그 밖의 일에는 나서 줄 의무도 마음도 없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호유용의 수하들 중 일부는 그들을 돈에 미친 자들이라 경멸하며 십전호위(十錢護衛)라고 바꿔 부르곤 하였는데 그러고도 남음이 있어 보였다.
관량은 낭패한 마음에 잠시간 세상천지를 뒤덮은 암흑 속에서 교교한 불빛을 발하는 내택의 위용을 하릴없이 바라보다가 결국은 신형을 돌려세웠다.
모험을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무리수가 따랐다.
게다가 오늘 낮의 일로 호유용과 이선장 또한 더욱더 만전을 기할 것이므로 거사일은 더욱 늦춰질 것이었으니 아직 시간적 여유는 남아 있었다.
관량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어지러이 발을 놀리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잠시 후 공허하게 휘도는 때 이른 삭풍만이 관량이 다녀간 자리를 털어 내듯 불어 갈 따름이었다.

일다경(一茶頃) 정도를 달리자 진회하 남지의 환락가가 나왔다.
어느덧 달빛을 덮은 운무도 어느 정도 개인 후인지라 제법 시야가 밝아져 있었다.
사경이 끝나 가는 늦은 새벽임에도 어둠을 밝힌 붉은 유등 사이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자, 호객에 나선 창기를 옆에 끼고 골목 으슥한 곳으로 향하는 자 같은 한량들로 인해 이곳 환락가는 아직도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환락가를 지나 좁고 복잡하게 난 골목을 한참을 돌아가자 비교적 깔끔한 단칸 모옥이 나왔다. 관량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하나 모옥 안에 이른 관량은 낯빛을 굳히며 갑작스레 신형을 날렸다.
한달음에 모옥 안으로 뛰어든 관량은 복면만을 벗어 던진 채 한 자루 장창을 꼬나 쥐고는 마당 중앙에 우뚝 섰다.
“흥!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만 말고 어서 나오시오!”
관량은 잔뜩 경계심을 끌어올린 채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담장을 쏘아보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관량이 쏘아보는 곳에는 돌담장만이 우두커니 자리하고 있을 따름이었는데 잠시 후 놀랍게도 관량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 자리에서 한 초로한 노인이 걸어 나오니 참으로 해괴한 일이었다.
“눈썰미가 제법이구나! 하나 속 빈 강정일 따름이지! 내외공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친 무예는 그 한계가 있는 바! 그래서 네놈은 아직 애송이인 게다!”
독설을 내뱉으며 장내로 걸어오는 이는 다름 아닌 낮에 보았던 광노였다. 관량 또한 광노의 등장이 예상 밖인데다 그를 보자 낮에 있었던 치욕스런 패배가 떠올라 일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가 금세 본래의 신색을 찾았다.
광노는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연방 보기 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짙은 어둠 속을 비치는 한 줄기 달빛에 반사된 섬뜩한 미소가 보는 이로 하여금 움찔할 정도로 기괴한 모습이었다.
이에 으드득! 하며 이를 가는 관량이었으나 광노의 무위를 이미 체험한 터, 감히 그에게 경거망동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광노의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차갑게 물었다.
“무슨 일로 나를 미행한 것이오?!”
이때만은 광노도 꽤 놀란 눈치였다.
“호오∼! 그것도 알아챘단 말이더냐. 외공을 극에 이르도록 수련한 무인들에겐 육감이란 것이 생긴다더니 네놈이 딱 그 짝이로구나. 기감조차 발달하지 않은 놈이 내 존재를 눈치 채다니! 크크크. 과연!”
하나 광노를 발견하게 된 실상은 육감이란 것에 기인한 게 아니라 특수하게 발달된 관량의 오감과 시기적절하게 불어온 삭풍 탓이었다.
관량의 오감은 훈련을 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특히나 극도로 발달하였는데 지청술을 펼치지 않고도 족히 그를 중심으로 반경 오 장 이내에서는 숨죽인 쥐새끼조차 찾아낼 정도니 대단하다 할 만했다.
게다가 뒤따르는 광노를 발견한 것은 때 이른 삭풍 덕분이 컸다.
그는 내원으로의 잠입을 포기하고 돌아서던 중 바람에 실려 온 냄새를 맡게 된 것이다. 아주 미약한 냄새였으나 후각 또한 고련한 그였기에 어렵사리 흔적을 잡아낼 수 있었다. 그 냄새란 사람 특유의 비린내였는데 관량은 처음에는 호가장을 벗어나고부터 상대를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어내어 처단하려 하였으나 뒤따르는 상대의 실력이 그리 녹록치 않아 보였다.
이에 차선책으로 진회화 남변에 이르러 골목을 넓게 빙 돌아가며 그를 떨쳐 내려 하였으나 이것도 여의치 않게 되었고 그나마 다행히 상대를 끌고 다니며 뒤따르는 상대의 행동에서 살의가 담겨 있지 않음에 이렇듯 역으로 끌어내는 과감한 선택을 하게 된 것이었다. 관량은 광노의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뜻밖에 찾아온 광노의 의중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광노는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네놈! 노부의 고절한 무학을 전수 받고 싶지 않더냐?!”
일순 관량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한동안 말을 잊고 말았다.
본시 광노는 강호상에 기행(奇行)을 일삼기로 이미 명성이 자자한 자였다. 그가 강호에 나온 지도 어언 수십여 년, 그는 이따금씩 눈에 든 자들에게 무공을 전하곤 하였는데 그것을 본다면 참으로 존경 받아 마땅한 신비로운 고수의 풍모가 아닐 수 없었다.
하나 누가 미친 늙은이 아니랄까 봐 그는 무공을 전해도 무림행 중에 구한 것 중에서도 꼭 완전하지 않은 것들을 전했으니 그의 무공을 전수 받은 자 중 강호를 질타하는 자가 한 명도 없었고 개중에는 주화입마로 반신불구가 된 자도 허다했으니 과연 광노답다 할 만했다.
한편 이 사실을 모르는 관량은 광노가 나쁜 뜻을 품은 것도 아닌데다 그의 무공을 전수 받는다면 자신에게는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인 셈이었으니 사실 거절할 까닭이 없었다.
하나 낮에 있었던 치욕적인 패배로 그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가진 관량은 차갑게 냉소했다.
“시답잖은 말일랑 그만 하고 용건을 말하시오!”
거칠게 나오는 관량의 말에 미소 짓던 광노 또한 좋은 뜻으로 찾아왔건만 대꾸가 고약하게 나오니 자연 심사가 꼬일 수밖에 없었다.
“흥! 성미가 고약한 놈이로구나! 엎드려 빌어도 전해 줄까 말까 한데 이렇듯 오만방자한 모습이라니! 네놈이 주가(朱家)의 개라 하나 그 재능과 투기가 쓸 만해 보여 한 수 전해 주려 하였더니 네놈 스스로 복을 찬 게니 나를 원망 말거라! 흥!”
이 말과 함께 광노는 거칠게 휙 돌아서 다시금 담장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흥! 고집스러운 녀석 같으니라고! 네놈에게만은 특별히 내 진신절학(眞身絶學)을 전수해 주고자 마음을 먹었었거늘! 에잉∼ 몹쓸 놈!’
올 때와 마찬가지로 기이한 모습이었다.
광노의 이 기이한 수법은 마치 담장에 동화되듯 모습을 서서히 감추었는데 참으로 해괴한 술법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광노의 신형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관량이 신형을 돌려세울 때 그의 귓속으로 광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강호상의 전음입밀의 수법이었다.
“흥! 네놈은 지금부터 귀를 씻고 들어야 할 것이다! 이불관심(以佛貫心)이니 심(心)은 불야(佛也)오, 이심관불(以心貫佛)이니 불(佛)은 심야(心也)라. (마음이 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불이 마음의 공부에 달린 것이니라. 겉모습을 보려 하지 말고 그 본질을 꿰뚫라!) 네놈의 개 같은 성미에 그냥 돌아가려 했으나 이곳까지 따라온 내 수고가 아쉬워 한 수를 전하는 것이니 고마운 줄 알아라! 이것은 어떤 무공의 귀결도 아니고 다만 상승으로의 경지에 이르는 무학의 도리이니 인연이 닿으면 얻을 것이오, 연이 없다면 얻을 수 없을 것이리라! 네놈은 오늘의 실수로 평생을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이다! 흥!”
귓가에 흐르던 목소리가 사라지고도 한동안 관량은 우두커니 선 채 움직일 줄 몰랐다. 그의 표정에는 어떠한 후회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광노의 무공을 얻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는 다만 광노에게 차갑게 대한 것에 후회하는 것이었다.
광노의 선심(善心) 어린 호의를 어찌 그도 모르겠는가? 하나 관량이란 자는 본시 자존심이 강하고 양보를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의 이런 자존심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연을 걷어찬 셈이었다.
그는 알까? 천고의 고학(高學)을 얻을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친 것임을……. 하나 모르긴 몰라도 관량이란 자는 후에 이를 깨닫게 된다 해도 후회 따윈 하지 않으리라. 그는 본시 그런 사내였음이니.


4

다음날 아침, 관량은 얼마 되지 않은 세간을 정리하고 호유용의 외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미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었기에 중서성(中書省) 포정사사(布政使司) 낭관(郎官) 직을 내놓고 도절의 휘하로 들어간 것이었다.
전날의 이선장의 장원에서 일어났던 광노로 인한 사건으로 인해 덕분에 관량은 호유용에게서 의심을 어느 정도 지울 수 있었고 비록 외택에 불과하나 호유용의 저택에 잠입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으니 비교적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호유용의 저택의 규모는 가히 황궁에 비할 만하였다.
내택의 크기만 전날에 갔던 이선장의 장원 두 배에 달하는데다가 지금 관량이 지나는 대연무장(大演武場)의 크기만 해도 기천명은 족히 수용할 만하였으니 입이 쩍 벌어질 정도였다.
하나 관량이 이곳에 놀러 온 것이 아니었으니 놀랍기는 하되 그에게 별다른 감응을 주지는 못했다.
대연무장을 지나 전각들이 즐비한 곳을 향하며 소롯길을 따라 들어서는 동안에도 앞서 안내하는 사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 길을 따라 적어도 차 한 잔 마실 정도는 걸어야 비로소 외원 무사들의 거처가 나온다네. 어떤가? 가히 일개 성의 규모에 비유할 만할 정도지. 자네는 자긍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네. 대저 중원 천지에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무예를 닦는 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하하하.”
짙은 녹의를 입은 염소수염의 삼십 대 장한은 자신이 이곳에 속해 있다는 것에 무척이나 자부심을 갖는 눈치였다. 다소 경망되어 보이기는 하나 순수하고 또한 열의 가득해 보였으므로 관량 또한 그리 거슬리는 눈치는 아니었다.
사내는 포융(包絨)이라 하였는데 도절의 휘하에 속한 자로 백호장(百戶長) 중 하나였다.
호유용 휘하의 무력 단체는 크게 어사대(御史臺)와 천, 지(天, 地)의 무단(武團)이 있었다. 이외에 호유용 휘하에 들어온 육부(六部)의 무력과 이번에 규합한 이선장의 1개 군단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무력이라 할 수 있으나 손짓 하나에 움직일 만한 것으로는 이들을 들 수 있었다.
그중 어사대는 감찰 기관으로서 사실상 어사대부 진녕이 좌지우지하고 있는 세력이었다. 그 수가 오천에 이르는 규모였으나 삼 만에 이르는 금의위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관리들의 감찰을 임무로 만들어진 단체이다 보니 상위의 무력을 지닌 단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무단과 지무단의 무단들은 각기 이만의 정병을 거느리고 있는 호유용의 사병단이었다.
그 두 단을 합한다면 사만에 이르는 병력이었는데 그만한 병력을 운집하자면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었다. 하나 호유용은 이를 운용함에 있어 치밀하게도 남경 근처에 여러 개의 지부(支部)를 설치하여 병력을 나누었으므로 현재 호가장에는 각각 이천씩 사천의 병력만 운집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중 천무단의 부단장을 도절이 맡고 있었다. 그리고 관량을 안내하고 있는 포융이란 자가 이천의 병력 중 스물에 불과한 백호장 중 하나이니 그 능력이 꽤 비범하다 할 만했다.
족히 잡아도 수백 여 채에 이르는 전각군을 지난 뒤 포융은 서너 채의 저택으로 이루어진 한 장원을 들어서며 말했다.
“이곳이 자네가 머물 곳이네. 그중 가장 우측의 건물을 쓰면 되네. 건물은 방 하나 딸린 작은 것이나 살기엔 불편함이 없을 것일세. 일단 자네는 천무단의 십호장(十戶長)으로 보직될 것이네. 듣기로 자네 창술이 대단하다고 하더군. 도절 어른께서 특별히 창술 부교관으로 임명하였으니 자네는 감사해야 할 걸세. 일단 교관에 들면 근무에 투입되지 않으므로 자기 시간이 많을 테니까 말이야. 아무쪼록 잘 지내길 바라네. 아! 그리고 같은 장원을 쓸 자가 셋이 있는데 저마다 개성이 강한 사내들이니 제법 신경 좀 써야 할 걸세! 후후.”
마지막 말을 하며 포융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눈빛을 빛내는 것이 무척이나 장난스러웠는데 아무래도 같은 방을 쓸 사내들이 악명이 자자한 자들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관량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소싯적에 남경 뒷골목을 전전하던 한량이었던 데다 금의위에 들면서 거친 사내들과 하루가 멀다 부딪히며 살아온 관량인지라 대수롭지 않았음이다.
네 개의 작은 건물이 사방(四方)으로 자리하고 있었고 그 중앙에 너른 공터와 함께 녹빛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기척이 없는 걸로 봐서 거주하는 자들 모두 집을 비운 것으로 보였다. 시간이 이른 아침인지라 아마도 아침을 들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으리라.
소연무장을 가로질러 우측으로 향하자 가까운 곳에 한 채의 모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남향으로 자리 잡은 소박한 단칸 모옥이었으나 과거 훈련위사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관량은 무척이나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짐이래 봐야 몇 벌의 무복과 장창 하나, 몸에 지니고 다니는 수많은 종류의 암기가 전부이기에 정리하는 데는 채 일다경도 걸리지 않았다.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이었다. 일단 흘러가는 정황을 파악해야 했으며 천, 지무단의 지부들의 위치와 정확한 병력 규모 및 주요 무장들의 면면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정확한 거사일 또한 알아내야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월영으로서의 임무보다도 관량의 머릿속을 가득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 무예에 관한 부분이었다.
이미 광노로 인한 충격에서는 벗어난 후였다. 하나 그로 인해 자신의 무력에 대한 실망과 함께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최소 올해 안에는 거사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니 그 안에 수련에 박차를 가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