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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어느덧 미시가 가까워지면서 식당 안은 서서히 비워져 갔고 그들 또한 일어서려 하였다.
“하하. 여하튼 즐거웠네. 아! 그나저나 자네 오늘 저녁에 시간이 있는가?”
“미안하네. 첫날이라 할 일이 있어 여유가 없을 듯하네.”
관량은 설군이 기방에 가자는 말을 할까 봐 얼른 거절하였다. 관량이 여색을 멀리하는 자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아무 때나 드나드는 호색한도 아니었다.
하나 설군은 이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 사람 참! 나라고 매일 주색에 빠지겠는가?! 풍류남아로 태어나 주색을 즐기는 것이 뭐 흠이 되겠는가?! 하지만 오늘 같이 가고자 하는 곳은 그곳이 아니라네. 자네 무고(武庫)에 가 봤는가?”
“무고라니?”
“하하. 역시 그럴 줄 알았다네. 오늘 처음 왔으니 가 본 것이 이상한 것이지! 십호장급 이상은 내원에 있는 무고를 이용할 수 있다네. 그곳에는 천하 각지에서 모아 온 무공서들이 망라되어 있다네. 나도 전에 딱 한 번 갔다 왔으나 너무 방대하여 머리가 어지러워 그냥 돌아왔다네. 어떤가? 한번 가 보겠는가?”
관량은 절로 호기심이 드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최근에 상승 무예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바, 그런 곳이 있다면 자신의 벽을 깨 줄 내공서도 있을 것이었다.
“혹시 그곳에 내공서들도 있는 것인가?”
“물론 있지. 이 사람아! 당연한 게 아닌가. 비록 천하를 질타할 최상승의 무예는 아니지만 저마다 일가를 이룬 자들의 무공서들을 수년에 걸쳐 모아놨으니 그중에 잘하면 절세의 신공도 있을 게야. 암! 내 그래서 안 그래도 한번 가 볼 생각이었다네. 요즘 윤자겸 저놈의 거만한 꼬락서니를 보자니 배알이 상해서 말일세. 내 절세의 신공만 얻어 봐라! 제 까짓 놈이 내 앞에서 콧방귀나 뀔 수 있을까?!”
설군은 연방 중얼거리며 건너편에서 식사 중인 윤자겸이란 자를 향해 손가락질을 해 가며 침을 튀겨 갔으나 관량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무고에 마음이 가 버린 것이었다.
‘상승절학이 있는 무고(武庫)라…….’
관량의 눈에서는 어떤 설렘과 함께 희망의 빛이 반짝거렸다.


6

호가장에 밤이 찾아들었다.
야조가 많기로 유명한 종산이 아니랄까 봐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가 호가장의 밤을 유난히 을씨년스럽게 하였다.
짙은 운무에 휩싸인 하현달이 고적하게 떠 있는 깊은 밤, 호가장 외원의 한 장원 안의 단칸 모옥에서 옅은 유등불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어느덧 시각은 축시(丑時, 새벽1∼3시) 초.
저마다 곤한 잠에 빠져 들 시간에 한 사내가 낡은 책자 하나를 닳도록 보고 또 보고 있었다.
사내는 다름 아닌 관량이었고 그는 무엇을 보는지 한 자, 한 자 마치 새기듯이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책자를 들여다보니 언제 만들어졌을지 모를 낡고 삭은 책자에 용사비등한 필체로 여암진경(呂岩眞經)이라 쓰여 있었다. 넉 자에 불과하건만 마치 천하를 아우를 듯한 기상으로 쓰여 있었고 어떠한 현기마저 느껴지는 듯하였으니 고금에 없을 기서로 보였다.
하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보름 전의 일이었다.
저녁이 되어 일과를 마치고 설군을 따라 무고에 들어선 관량은 그 방대함에 혀를 내둘렀지만 어차피 하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기에 천천히 분야별, 고하별로 분류된 서가들을 천천히, 그리고 세세하게 뒤지기 시작했다. 첫날 무고 전체를 둘러보며 파악한 것은 이곳이 관부에 속하기 때문인지 전체적인 무공서들이 외문무공에 관한 것들이란 것이었다.
그 후로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관량은 그 전체 내용을 모두 읽은 것은 아니었으나 전체적인 내용을 통한 추측을 통해 무고 안에 있는 서책 중 절반 이상이 잡서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잡서라 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온갖 사이한 술법을 다룬 것들, 관량이 보기에도 불가능할 것 같은 미완성의 무공서들, 그리고 심지어는 온갖 색공, 마공에 이르기까지 손을 대기가 꺼려지는 것들이 절반에 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삼 일 전 드디어 성과를 올렸으니 잡서들을 모아 놓은 곳에서 세 권의 현묘한 서책들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옥추보경(玉樞寶經), 태을경(太乙經), 그리고 여암진경(呂岩眞經)이란 책자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옥추보경과 태을경은 내공 공부에는 문외한인 관량이 보기에도 무당산에 있다는 도인들의 양생술인 양 현묘함이 느껴졌고 약간을 뒤적이며 보자 이것이 말로만 듣던 등선(登仙)의 길에 드는 책이 아닌가 생각되어질 정도였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는데 이 두 서책은 다름 아닌 신선이 되는 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무학이라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두 권의 책을 거치며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기대감을 안고 세 번째 여암진경의 첫 장을 펼쳤을 때 아! 하며 경탄하던 관량은 얼마 못 가 이내 실망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처음 여암진경을 대하자 겉표지에 나와 있는 용사비등한 웅혼한 필체로 쓰인 여암진경이란 넉 자만 보더라도 그 측량할 수 없는 깊이의 현묘함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첫 장을 넘기고 서서히 읽어 감에 따라 앞의 두 권의 책과는 전혀 다른 전율과 흥분을 느끼게 하였으니 앞의 두 권의 책이 등선을 위한 선로(仙路)의 책자라면 여암진경은 선(仙)에 이를 수 있는 무공에 관한 것이었던 터였다.
초반부에 세간에도 널리 알려진 도가의 운기토납법이 담겨 있었고 뒤이어 누워서 하는 것, 앉아서 하는 것 등의 다양한 수련 방법이 기술되어 있었다.
그 뒤로 저자의 소개가 이어지며 드디어 책의 본론에 들어가고 있었는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이 끝이었던 것이다.
어이없게도 ‘여암진경은 나의 진신절학을 담은 것으로 나는……’이라 쓰인 그 뒷부분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는데 뒷부분은 누르스름한 종이에 마치 먹물이 물에 번진 듯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이 돼 있었고 불안한 마음에 정신없이 뒷장을 넘기고 또 넘겨 종래에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자 관량은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본격적인 내용이 담긴 책의 절반에 해당하는 분량이 모두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탓에 무용지물이 된 것이었다.
관량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앞의 옥추보경과 태을경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을 성과라 할 수 있었음에 미소를 지으며 무고를 나올 수 있었다. 나오면서 보니 설군의 수중에도 두서너 권의 책이 들려 있었는데 그것을 들여다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으니 다름 아닌 방중술에 관한 비술들이었다.
이에 설군은 헤헤거리며 어깨를 으쓱하였는데 역시 설군답다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무고 밖에 나오자 문제가 발생하였다.
두 명의 천호장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이 갑작스레 책을 내놓으라 한 것이었다.
“천무단의 십호장들인가? 우리는 무고를 관리하는 지무단의 천호장들로 나는 지무단의 천호장인 위속(爲餗)이라 하네. 이곳 호가장에서는 무고에서 반출되는 서책들을 우리 천호장들이 돌아가며 감시하고 있다네. 그리고 반출되는 서책들을 검색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이니 협조하게나. 크흠.”
위속이라 말한 사내는 매번 행하는 일인 듯 무척이나 귀찮은 표정이 역력했는데 마지막 말에 힘을 주며 수중의 검을 들어 올리는 것이 무척이나 고압적으로 행여나 따르지 않겠다면 검을 쓰겠다는 의중을 내비치고 있었다. 이에 하는 수 없이 관량과 설군은 수중의 책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먼저 설군의 책을 살핀 위속은 낄낄거리며 서책과 설군의 위아래를 살피며 무안을 주었고 설군도 대놓고 무안을 주자 얼굴이 벌게져 성미를 참느라 씩씩거렸다. 설군의 서책을 살핀 후 관량이 내놓은 세 권의 서책 중 첫 번째 옥추보경을 손에 든 위속은 이채를 발했고 곧이어 경악에 찬 시선을 던지며 연이어 태을경과 여암진경을 살피기 시작했다. 태을경에서 이어지던 놀랍던 표정은 여암진경을 살피며 서서히 침잠되며 가라앉았고 이내 흥! 하며 코웃음을 치고는 달랑 여암진경 하나만을 던져 주며 말했다.
“수고가 많았다. 옥추보경과 태을경은 그동안 승상께서 심혈을 기울여 찾으시던 서책이었는데 네놈들이 찾아왔으니 이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내 승상께 보고해 상을 내리게 할 터이니 어서들 돌아가 보거라!”
겉으로는 무척이나 좋은 말이었으나 말인즉슨 마치 맡겨 논 물건이라도 찾은 듯 책을 뺏어 가면서 은연중에 승상의 위세를 빌려 아무 소리도 못하게 압력을 행사한 것이었다.
사실 이는 일반 십호장 이하의 무인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었으나 관례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무고에 있는 서책의 수만 수천, 수만에 달했기에 그 전부를 파악하기란 요원했던 까닭이었다. 결국에는 적당히 무고에 모아 놓고는 머리를 써서 그 안에서 나오는 자들의 서책을 뒤져 고학이 담긴 책자들을 회수하고 있었으니 관량으로서는 힘이 없음을 탓하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나 이미 손을 떠난 터, 그날 밤부터 관량은 그래도 드디어 찾게 된 내공서인 여암진경의 운기토납법과 수련법들을 수련하기 시작하였는데 하면 할수록 그 오묘함에 반하여 요사이 수련에 푹 빠져 있었다.
관량은 여암진경을 내려놓고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는 다시금 수련에 들어갔다.
천천히 눈을 감고 내부를 관조하기 시작하자 눈에 보일 듯 여암진경의 말들이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정충(精充)이면 기장(氣壯)이고 기장(氣壯)이면 신명(神明)이라.
마음의 공부[心工]란 정과 기를 단련하여 신을 이루는 것이라.
만물은 음과 양[陰陽], 그리고 오행(五行)으로 이루어져 윤회의 간극에서 돌고 도는 무한의 원을 그린다.
음의 기는 물[水]에 가까운 성질을 띠어서 차갑고 내려가는 성질을 가지려는 데 반해서 양의 기는 불[火]에 가까운 성질을 띠어서 뜨겁고 솟구치려는 성질을 지닌다.
음과 양의 기운으로 나누어진 기는 생령의 활동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데 이는 이미 탁하고 그 힘이 미약하여 이를 후천의 기[後天之氣]라고 부른다.
반면 갓 태어난 영아는 백회가 말랑말랑하여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음양이 조화를 이룬 태극지기를 갈무리해 있기 때문에 이때의 기운을 선천지기(先天之氣)라고 부른다. 내기의 수련이라 함은 선천지기를 바탕으로 후천지기를 수행하여 신(神)을 이루는 것이라 하겠다.
수련의 첫 단계는 몸에 있는 화기가 내려가고 수기가 올라가서 옥당혈에서 침이 솟고 머리가 시원해지는 단계를 수승화강(水昇花降)이라 한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관량의 내부에서는 기운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은 어떠한 인공적인 것이 아닌 관량의 선천지기란 것들이었다.
관량은 서서히 내부를 관조하며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배꼽 아래 단전에 의식을 집중하자 몸속의 기운들이 요동치며 어떤 것은 내려가려고 하고 어떤 것은 올라가려고 하며 엎치락뒤치락 요동을 쳐 대고 있었다. 이에 호흡에 집중하며 서서히 자연적으로 숨을 들이켜고 내쉬어 갔다. 얼마나 고된 과정인지 어느새 관량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갔고 그것이 수어 번 흘러내렸으나 관량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호흡에 집중하였다.
그러자 서서히 요동치던 기운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화기는 내려가고 수기는 올라가기 시작하였고 숨을 조절하며 호흡의 깊이를 유지하자 옥당혈에서 침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서서히 입 안을 적시는 수승화강의 진경의 결과물에 희열을 느끼기도 잠시, 관량은 흐른 땀을 닦지도 않은 채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성과로 더 이상 아랫배 단전에 실제로 손을 대지 않아도 그 안에 자리 잡은 손톱 크기만 한 기운들이 자연스레 느껴지고 호흡이 의식하지 않아도 하복부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에 관량은 더욱 의식을 강화하여 강하게 단전에 집중했다. 강하게라는 말은 배를 내밀거나 물리적인 힘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여암진경에서 말하는 호흡은 문과 무로 구분했는데 길고 강하게 쉬는 호흡을 무라 하고 짧고 약하게 쉬는 호흡을 문이라 하여 마치 약을 달이는 데 센 불과 약한 불로 조절하듯이 호흡의 강약을 조절하여 정을 축적해 나가는 것이라 했다.
서서히 의념을 집중하자 기경팔맥, 사지백해에서 기가 저절로 발생하는 게 느껴졌고 더욱 강하게 집중함에 발생한 기운이 의념과 호흡으로서 조절, 운행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에 벅찬 감동과 무궁한 희열을 느끼며 서서히 단전 안에 갈무리를 하자 마치 날아갈 듯 상쾌한 기분이었다.
관량은 자신도 모르게 감격한 어조로 내뱉었다.
“드디어 연정화기의 단계를 이루었구나!”
연정화기란 수승화강의 다음 단계로 하단전의 기초를 쌓는 단계였다. 관량은 근 삼 일간 잠을 잘 때며, 앉아 있을 때며, 또 걸을 때고 무공을 수련할 때고 간에 시간이 나면 틈틈이 여암진경에 담긴 운기토납법을 수련하였는데 그간의 수련이 성과가 있어 오늘에 이르러 연정화기의 단계를 완성한 것이다.
이는 말 그대로 내공의 기초를 다진 것으로 극히 초급적인 단계에 불과한 것이나 서른에 가까운 늦은 나이로 무도(武道)의 길에 발을 디딘 관량임을 감안하면 무척이나 대단한 성과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의 감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어 관량은 그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으니 얼마나 그가 심적으로 감동하였는지를 알 만하였다.
관량의 인생에서 무예가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십 분지 구는 된다 말할 수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어릴 적 십오 세에 불과한 나이에 세상천지에 홀로 남겨진 관량은 그 가슴속 외로움과 자괴감을 해소하고자 한때 뒷골목을 전전하며 한량으로 살았으나 그는 아무리 주먹에 피를 묻히고 여자를 안아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을 느꼈다.
결국 관량은 가슴속에 응어리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항상 바라 마지않았던 무의 길로 다시금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관량은 그렇게도 바라던 마음의 공부에 크고도 웅대한 첫발을 딛게 되었다.


7

반경 오십여 장 정도의 장방형의 소(小)연무장.
그 중앙에 가벼운 백색 무복 차림의 장신의 비쩍 마른 삼십 대 초반의 무표정한 사내가 한 자루 장창을 손에 든 채 우뚝 서 있었다.
때는 아직 어둠이 채 지지 않은 동이 터 오지도 않을 이른 시간.
사내는 눈을 감은 채 입을 다물고 고요 속에 잠겨 있었고 그의 손에 들린 장창은 대각선으로 자리하고 있었으며, 한 척 두 치에 이르는 창날은 그 끝부분 십 분지 일가량이 바닥에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을 사내의 고요 속의 침묵은 대전(大殿)에서 들려온 핫! 하는 웅혼한 기합성에 의해 순식간에 깨어졌다.
그 순간 사내의 열리지 않을 두 눈이 떠지며 그 주변을 장악하듯 창세를 뿌려 대기 시작했다.
조용한 가운데 한 마리 붉은 뱀이 장내에 나타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제1식, 적사유수(赤巳流水)! 마치 물 위를 유영하는 듯 유유히 장내를 유선의 움직임으로 가득 메우던 녀석이 일순간 공중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독물이 진득이 흘러내리는 독아를 번뜩이며 수직의 움직임으로 쾌속 낙하하였다. 제2식, 적사비천(赤巳飛天)! 쾅! 창날이 땅을 찌르자 땅이 움푹 팼고 그때부터 창의 움직임 속에 마치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둥둥! 웅혼한 소리가 실리기 시작했다. 사내가 진중한 내력을 한껏 내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뱀은 핏빛 어금니를 번뜩이며 영혼마저 불사를 듯 거칠게 전방을 물어 갔다. 두두두둥! 사내의 손에서 펼쳐진 제3식, 적사혈아(赤巳血牙)는 모두 다섯 번의 찌르기를 보여 주었는데 이는 이미 사내의 창법이 내외공을 아우르는 상승의 경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사내는 다섯 번의 극강의 찌르기를 펼치고도 다음 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 가고 있었는데 그가 가진 전부를 보인 것이 아닌 듯 여유로워 보였다. 참으로 사내의 창술은 놀라운 데가 있었다.
뱀이 쾌속의 속도로 먹이를 노린다. 제4식, 적사속보(赤巳速步)!
그리고 쾌속의 움직임을 거짓말처럼 뚝! 끊은 채 제자리에 멈춰서 주변을 끊임없이 움직이며 붉디붉은 광영을 뿌리기 시작했다. 적사창법의 가장 뛰어난 방어 초식인 제6식, 적사유변(赤巳流變)이 펼쳐진 것이다. 뒤이어 창의 기세는 더할 수 없이 웅혼해져 마치 바위를 정으로 치는 것처럼 쩡쩡! 소리가 진동을 하였고 창에서는 팔방을 점하고 베기와 찌르기가 연환되어 펼쳐졌으니 이것이 바로 붉은 뱀이 세상을 나오는 제7식, 적사출세(赤巳出世)의 초식이었다. 과거 제6식, 적사창법의 창시자 서문휘는 이 적사출세의 초식과 적사혈아 두 초식만으로 강남 무림을 종횡하였던 바가 있었다. 그만큼 적사출세의 공격력은 가히 절세무비하였다.
한바탕 창무(槍舞)를 펼쳐 보인 사내는 금세 가빠진 호흡을 갈무리하며 다시금 정(靜)의 움직임으로 그 자리에 멈추어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대전에서 한 중년의 호한(好漢)이 장내로 유유히 걸어 나왔는데 그는 바로 앞전에 기합성으로 창을 든 사내의 연공의 시발점을 지핀 인물이었다.
어느새 창을 든 사내의 삼 장 앞에 이른 중년인은 갑작스레 신형을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사내에게 짓쳐 들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치 잠을 자듯 눈을 감은 채 고요하게 있던 사내가 순간 마치 용수철이 튕겨 오르듯, 강하게 저며 논 화살이 시위를 떠나듯 가히 빗살 같은 빠르기로 지척에 다가선 중년인을 향해 말 그대로 쏘아졌다.
슉!
너무도 빠른 속도에 그것이 찌르기였는지 베기였는지 그도 아니면 치기였는지 그 공격 방법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공방이 멈춰진 장내에는 놀랍게도 일직선으로 창을 쭉 뻗은 창수와 얼굴의 바로 옆에 다가선 창을 창날째 잡고 있는 중년인이 있었다.
그 눈으로 식별조차 할 수 없는 빠른 공격을 맨손으로 잡아냈단 말인가? 아무런 피해도 없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하나 자세히 보면 중년인의 창에 면한 볼에 반 치가량의 상처가 생겼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잡았던 창을 천천히 놓아주고는 자신의 얼굴에서 흐르는 피를 쓰윽 손으로 닦아 눈앞으로 가져가더니 눈을 번뜩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와하하! 겸아야. 많이 성장했구나. 아무리 적사이이(赤巳痍离)의 초식이라 하여도 이런 위력을 보이다니……. 게다가 어느새 적사심공(赤巳心功)의 화후가 완전한 오사화(五巳花)를 피워 낼 수 있게 되었다니…… 더군다나 전력을 기울인 것이 아니니 완전하지 못하나 육사화를 넘보는 듯 보이는구나?”
중년인의 외형은 입 주변과 턱 주변을 가득 메운 덥수룩한 수염이 구레나룻과도 이어질 정도로 털북숭이라는 게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거기에 덩치가 무척이나 큰 자였다. 하나 우습게도 머리는 대머리여서 가운데가 휑하였으니 얼굴을 가득 덮은 수염들과 무척이나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었다.
그는 제자로 보이는 눈앞의 삼십 대 장한의 성장이 무척이나 기쁜 듯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뜨렸는데 이 사내가 바로 호유용의 무장 중 수위를 다투는 천무단주 임현이었다.
임현의 앞에 자리한 자는 다름 아닌 그의 제자인 십호장 윤자겸이었다.
과연 그의 창술 실력이 4만여에 이르는 천, 지무단의 무리 중에도 세 번째를 다툰다더니 임현의 제자였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 이는 이 둘을 제외하고는 극히 소수만 아는 일로 어찌 된 셈인지 이미 윤자겸이 십여 세일 때 거두어 제자로 키운 아이건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었다.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이리라.
윤자겸은 급히 그 자리에 오체투지하였다.
“제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감히 사부님의 존안에 상처를 입히다니…… 이런 몹쓸 제자 놈은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며 실제로 자신의 전신을 마구 주먹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에 깜짝 놀란 임현이 급히 말리자 그제야 그만두었으나 이미 몇 곳에서는 백색 무복에 피가 묻어 나올 정도로 자국이 생겨 있었으니 제자의 지극한 마음에 코끝이 시큰거리는 임현이었다.
이에 감동하여 제자를 일으켜 세웠다.
“이런 미련한 놈을 봤나! 이 녀석아! 언제 목숨이 떨어질지 모르는 도산검림 속에 살아가는 무인이 이깟 상처가 무어 대수라고 이리 미련하게 구는 것이냐! 어서 대전으로 가자꾸나. 금창약이라도 발라야겠다. 에잉∼ 쯧쯧!”
무뚝뚝한 관부의 무장답게 거칠게 말을 뱉으면서도 제자가 걱정되어 부축하다 못해 안아 들듯이 들고는 대전으로 향하였다.
임현은 대전으로 향하면서도 속으로 미련한 제자에 대해 욕을 하면서도 그 사부를 생각하는 마음에 여간 감동되어지는 게 아니었다. 임현은 천성이 불같이 뜨거운 웅심에 지극히 단순한 인물이었다. 다만 젊었을 적, 치기에 저지른 일생 동안 가장 클 죄악으로 인해 마음이 깊어졌으나 그 순수한 마음만은 여전하였다.
하나 이렇듯 지극한 사부의 생각과는 반대로 놀랍게도 그 순간 제자 윤자겸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의 행동과는 상반된 생각이 이어지고 있었다.
‘문득 차라리 이 한 수로 죽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만큼 위력적인 창세였고 또한 자신이 있었지. 하나…… 이를 손쉽게 막아 낸 그대가 오히려 고맙군. 쉬이 죽을 그대였다면 그대를 죽이고도 내 마음속 원한이 씻기지 않을 것이 저어되었는데 말이야. 얼마 남지 않았음이다. 목을 씻고 기다려라. 인면수심(人面獸心)한 두 얼굴의 사내 임현이여!’
찰나 동안 임현의 뒤통수를 향한 윤자겸의 눈빛은 그야말로 꿰뚫을 듯 강렬하고 원독에 찬 것이었다.
대체 그는 무슨 사연으로 자신을 길러 준 아버지 같은 사부 임현에게 살심을 품는단 말인가? 과연 수심가측(水深可測)하나 인심난측(人心難測)이라는 옛말이 틀린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