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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진회하(秦淮河) 남지(南地)의 번화가.
진회하의 남지는 크게 두 곳으로 나누어진다.
동쪽에 있는 청루(靑樓)와 고급 객잔들이 즐비해 있는 동화로(東花路)와 중구난방으로 자리한 홍루(紅樓), 그리고 그곳에 상주하는 한량들과 창기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는 값싼 객점 및 음식점들이 있는 서화로(西譁路)가 그것이었다.
서화로의 대로변을 관량과 설군이 거닐고 있었다.
때는 점심때였는데 평소 호가장 내 십호장 이상 천호장 이하 급의 장교 식당에서만 식사를 하다가 오늘 모처럼 시간을 내서 온 것이었다. 사실 관량은 미식가는 아니었던지라 맛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먹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오늘 오후 창술 훈련이 없었던지라 설군이 한번 거나하게 사겠다고 하여 떠밀려 온 터였다.
정오의 서화로는 끼니때라서 특히나 붐비고 있었다. 한데 이상한 점은 오늘은 특히나 칼을 찬 무인들이 많이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태양혈이 불끈 솟은 강호상의 내가의 고수들로 보였는데 그런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관량 또한 눈이 휘둥그레져 잠시 둘러보았다. 그들의 수는 서화로에만 족히 백여 명은 되어 보였다. 무언가 일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짐작도 할 수 없는 데다 그다지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기에 이내 관심을 접는 관량이었다.
시선을 돌려 대로변을 걷다 보니 여기저기 상인들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대며 호객이 벌어지고 있었고 길거리 노점상들은 온갖 군침 도는 먹을거리들을 늘어놓고 유혹의 손길을 뻗치니 관량도 절로 입 안에 침이 고여 갔다.
특히나 관량이 어릴 적 서화로에 올 때마다 아버지가 사 주던 꿀 전병이 지나간 추억을 되살려 주며 입맛을 자극하였다.
이에 하나 사 먹을 요량으로 손을 뻗어 가는데 설군이 탁! 치며 만류하였다.
“어허! 사람 참! 산해진미(山海珍味)가 눈앞에 있거늘 그깟 꿀 전병에 손을 대려 하는가! 입맛 버리네, 이 사람아!”
고집 하면 한고집 하는 관량이었지만 설군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확실히 단것을 먼저 먹고 식사를 한다면 그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 게다가 먹는 것에 대해 그리 따지는 성격도 아니었고 오늘 밥을 살 물주가 하는 말이니 응당 들어줘야 할 터였다.
이에 돌아오는 길에 사야겠다 생각하며 발길을 돌리는 관량이었다.
대로변을 따라 끌고 가던 설군은 이윽고 저 앞에 보이는 서화일미(西譁一味)라 쓰인 객잔(客棧)을 손가락질하였다.
“저곳이네! 내가 호가장에 들어온 지 어언 삼 년이 넘었지만 남경에서 먹어 본 음식점 중에서는 최고라 할 수 있다네! 보시게! 얼마나 맛이 있으면 저렇듯 사람이 바글바글하겠는가?”
이에 관량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설군의 말대로 서화일미라 쓰인 객잔 앞에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한데 자세히 보니 아무래도 객잔에 들려는 것이 아닌 무엇인가를 삥 둘러싼 채 구경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에 흥미가 동한 두 사내는 한달음에 군중 속에 끼어들어 그 중앙을 바라보았다.
중앙에는 각기 검(劍)과 도(刀)를 든 두 명의 사내가 서로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검을 든 사내는 이십 대 중반으로 보였고 곱상한 외모에 자색 무복을 입고 있는 자였는데 태양혈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고절한 내가의 고수로 보였다. 그와 맞서는 상대인 도수(刀手)는 내외공을 겸비한 듯 우락부락한 근육에 태양혈도 불룩 솟아 있는 산적 같은 거친 외모를 지닌 삼십 대의 장한이었다. 특히나 머리가 일반인의 배는 컸는데 제법 큰 몸집에 비해도 꽤 큰 것이어서 약간은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무치도(無恥刀) 육승(陸升)! 듣던 대로 무례하기 그지없는 분이시구려. 나 화산(華山)의 속가제자(俗家弟子) 백운검(白雲劍) 편여락(扁礖落)이 그대를 바른길로 인도해 주겠소.”
편여락은 무척이나 진중한 어조와 함께 선수를 양보하겠다는 듯 검병을 고쳐 잡고 구름과 같은 신색으로 육승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이에 육승은 대소하며 수중의 대감도를 들어 올렸다.
“과연 명문정파(名門正派)의 속가다운 혓바닥이로구나. 흥! 좋다! 네놈들이 요즘 황실을 등에 업고 기고만장(氣高萬丈)하여 이제 안하무인격으로 나온다만 나 육승이 그리 만만한 자가 아님을 보여 주마! 핫!”
말을 마친 육승은 곧장 그 큰 대감도를 훙! 하고 크게 휘두르며 눈앞의 편여락을 베어 갔다. 그의 보폭은 대단히 컸으며 몸놀림 또한 시원시원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펼치는 그의 독문도법 폭랑도법(暴狼刀法)은 과연 일절이라 할 만했다.
“오호! 젊은 놈이 대단하구만!”
이를 보던 관량의 옆에서 늙수그레하면서도 시원한 장탄식이 들렸으나 관량은 듣긴 하였으나 이내 관심을 접고 다시금 전장에 눈을 돌렸다.
폭풍 같은 기세로 연이어 펼쳐지는 패도적인 육승의 도법에 편여락은 아차 하며 금세 수세에 몰려 그저 방어하기에 급급하였다.
육승을 맞이하며 편여락이 펼치는 것은 화산의 대표적인 검법 중 하나인 육합검법(六合劍法)으로 연방 풍운사기(風雲乍起)의 초식으로 막아 내고는 있었으나 선수를 양보한 탓에 승기를 빼앗긴 것이 쉽사리 뒤집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상 편여락과 육승의 무위는 육승이 반 치는 앞서는 터였다.
육승은 사파의 고수 중에서도 홀로 강호행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만큼 무력에 자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화산 속가 중에서도 제법 이름난 편가장(扁家場)의 장남인 편여락이라 하나 육승에게는 손색이 있는 게 당연하였다.
하나 편여락은 실력의 고하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채 어리석게도 떨어지는 실력으로 선수를 양보하고 만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도에 베일 듯 위태로운 상황이 이어졌다.
이미 수십 합이 넘어서고 있었고 아직도 육승은 팔팔한 데 비해 편여락의 내력은 급격히 고갈되고 있었다.
결국 연방 뒤로 밀리던 편여락은 수세를 면하고자 회심의 일격으로 오룡탐해(烏龍探海)의 초식으로 전환하다 그만 진기가 이어지지 못해 보법이 엉키어 바닥에 볼썽사납게 뒹굴고 말았다.
이에 육승은 베어 가던 도를 멈추고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흥! 실력이 입심을 따르지 못하는 게로구먼! 다시는 세력을 등에 업고 함부로 날뛰지 마라! 한 번 더 마주친다면 아예 골을 깨 버리는 수가 있으니! 케엑! 퉤!”
육승은 거칠게 바닥에 침을 뱉어 내고는 퉤 하며 마치 구린 뒷간에 들어갔다 나오는 듯 거칠게 몸을 돌렸다.
편여락은 금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수치심을 참지 못했다. 구대문파의 수좌를 다투는 당당한 화산파의 속가제자로서 이대로 무너지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이에 그는 놀랍게도 등을 돌린 육승을 향해 살수를 펼쳐 갔다. 극성의 진기를 실은 삼환투월(三環套月)의 초식이었다. 이는 처음 선공을 양보하지 않았다면 육승 또한 꽤 까다로웠을 초식이었지만 설마 정파의 무리가 뒤를 공격할 줄은 생각도 못한 육승은 지척에 이르러서야 이를 감지하였고 뒤늦게 도를 휘둘러 막아 갔으나 결국 팔 하나를 내주고 말았다.
대감도와 함께 육승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다.
툭!
바닥에 떨어져 꿈틀거리는 자신의 팔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육승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토해 내며 도를 들어 갔다.
“이런 육시랄 놈을 봤나! 네놈이 그러고도 정의(正義)를 부르짖을 수 있단 말이냐?”
그는 손에 익지 않은 좌수검이지만 몸속에 있는 진기를 모조리 끌어올려 서투른 솜씨로 폭랑도법을 펼쳐 갔다. 그것도 가장 살기가 강한 혈랑투(血狼鬪)의 초식이었는데 이미 진력을 모두 소모한 편여락은 금세 목이 떨어져 나갈 판이었다.
그때였다. 쉭쉭! 소리가 일며 갑작스레 날아든 은빛 서기가 육승의 머리와 심장을 꿰뚫었다.
툭! 육승은 눈을 부릅뜬 채 항거하지 못할 힘에 눌려 서서히 빛을 잃어 갔다. 그의 입에서는 끄륵거리며 채 못다 한 말들이 뱉어지고 있었다.
“큭! 빌어먹을…… 정……파…… 놈……들.”
육승이 쓰러지자 파팍!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도인이 구경꾼들의 머리 위를 날아 장내에 들어섰다.
청색 도복을 입은 대춧빛을 띤 얼굴의 오십 대의 도인이었는데 그는 미간을 꿈틀거리며 다짜고짜 멍해 있는 편여락의 뺨을 후려쳐 댔다.
“이런 멍청한 녀석! 네놈이 대화산파(大華山派)의 망신을 다 시키고 다니는구나! 몹쓸 놈!”
노도인의 손매는 무척이나 매워 두 번을 거듭 치자 편여락은 얼굴이 벌게진 채 일 장여를 날아가 버렸다.
고통에 거칠게 숨을 토해 내는 편여락을 보고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수중의 검을 들어 올리는 노도인을 두 명의 사내가 장내로 날아들며 만류하였다.
“자엽(紫葉) 사숙! 고정하십시오.”
삼십 대의 두 도인들은 내려서 자엽이라 불린 노도인의 앞을 막아서며 만류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내려섬과 동시에 십수 명의 화산파의 검수들이 장내에 모인 군중을 해산시키며 주위를 물렸다.
“편가장(扁家場)의 장남입니다. 금전적으로 편가장이 담당하는 부분이 얼마나 큰지 아시지 않습니까?”
작은 목소리로 은밀한 말에 자엽이라 불린 노도인은 하는 수 없이 심기를 가라앉히며 검을 회수했다.
“그건 그렇고 광노(狂老)는 찾았느냐?”
비록 검은 거뒀다 하나 심기만은 아직 불편한 터였기에 노도인의 말은 한풍이 절로 불었다.
이에 삼십 대 도인은 혹여나 그의 성미를 건드릴까 노심초사하며 고개를 조아리고는 공손히 말했다.
“아직입니다. 하나 백련교 잔당들이 이곳 서화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니 그 광명우사(光明右士) 되는 광노 또한 곧 나타날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저희뿐 아니라 구대문파가 이곳을 쥐 잡듯이 뒤지고 있으니 곧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이에 자엽은 크음! 하며 좋지 않은 심기를 다스릴 따름이었다.
관량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놀라워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날아온 두 가닥 은빛 서기에 육승이 순식간에 주검으로 변하는 한 수는 말 그대로 세간에서 말하는 검기상인(劍氣傷人)의 고절한 수법이었다.
내경을 다스려 유형의 기운을 발출하여 그 기운만으로 사람을 상하게 한다는 고학을 보게 되자 관량은 절로 안계가 넓어짐을 느꼈다. 하나 감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수십의 화산검수들이 막아서며 군중을 해산시켰기 때문이다.
관량은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눈이 휘둥그레지지? 본래 자엽 저자가 성격은 꼬장꼬장해도 제법 한 수 실력이 있는 친구지.”
갑작스레 들리는 말에 고개를 돌리자 관량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왼편에 한 추레한 노인이 함께 걷고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광노였던 것이다.
“아니? 광…….”
하나 관량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광노가 관량의 입을 급히 막아 간 것이다.
“쉿! 지금 이 근처에 쫙 깔린 무인들이 다 나를 찾고 있다네. 여하튼 그간에 제법 진전이 있었구먼? 기초를 제대로 잡았어! 호오∼ 그것도 꽤 정순한 내공을 쌓고 있음이야?! 기연이 있었나 보이? 하나 신공절학은 아닌 듯하구먼. 이래서는 백 년이 가도 연성하기가 어려울 텐데…….”
그때였다. 뒤에서 한 검수가 크게 소리쳤다.
“엇?! 광노다! 광노가 저기 있다!”
그 순간 주변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무인들이 몰려들었고 광노는 금세 이크! 하며 신형을 띄웠다.
“나중에 보세! 내 자네와는 꽤 인연이 있는 듯하네그려! 나중에는 거나하게 술이나 한잔하세나! 와하하하!”
어느새 저 멀리 신형을 날린 광노의 전음입밀로 날아든 호쾌한 말은 관량의 귓가에 공허하게 맴돌았다.
이미 광노는 앞을 막아선 수십의 무인들에게 검광을 휘날리며 질풍노도로 길을 뚫어 갔고 순식간에 장내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아마도 정도육절(正道六絶)이나 육대사마(六代邪魔) 중 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를 막아설 자는 없으리라. 그의 뒤를 자엽 도장과 수십의 화산의 일대검수들이 쫓고 있었으나 그다지 걱정은 되지 않았다.
관량은 어느새 입구에서 손짓하는 설군을 따라 서화일미로 들어섰다. 일단 주린 배를 채우고 생각할 일이었다. 광노든 무공이든 말이다.
제6장 격동천하(激動天下)
1
점심때의 이곳 서화일미 식당은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뤄 단 세 가지의 음식만 주문 받고 있었다.
그것은 청초우육사(靑椒牛肉絲), 차소포(叉燒飽), 동파육(東坡肉)이었는데 보통 서민들을 상대로 하기에 앞의 두 음식이 주로 판매되었다.
설군은 다 못 먹을 거라는 관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먹고 남기더라도 제대로 한번 먹어 보자며 호방하게 세 요리를 모조리 주문하였다. 역시 설군다운 모습이랄까?
주문한 지 일다경 정도가 흘렀을까?
요리들이 탁자 위로 날라져 왔다. 주문한 순서대로 차례로 탁자 위에 놓였는데 세 요리의 오묘한 향과 맛깔스러운 모양새가 여간 군침이 돌게 하는 게 아니었다.
설군은 이를 스윽 훑어보더니 자못 자부심 가득하게 말하였다.
“자! 내 손님께 음식에 대해 설명해 드리리다. 먼저 청초우육사는 말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고추잡채 요리라네. 알다시피 우리 강소성이 절강성과 함께 볶음 요리로 유명하잖은가. 강절요리라 따로 불릴 정도로 말이야. 이 청초우육사도 강절요리 특유의 방법으로 소고기와 풋고추를 볶아 기름기가 좌르르 흐르면서도 그 느끼함이 느껴지지 않네. 이는 또 이 집만의 특유의 향신료로 느끼함을 제거해서인데 그것은 이곳 영업 비밀이라 나도 알아내지 못했다네. 크흠! 아쉬운 일이지.”
설군은 자못 아쉽다는 표정이었는데 정말로 향신료를 뭘 썼는지 숙수에게 물어본 모양이었다. 관량은 문득 그의 괴벽에 식도락(食道樂) 또한 추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설군은 쩝쩝 입맛을 다시다가는 이내 요리를 보고 절로 웃음 지으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다음 걸로는 차소포라네. 자네는 남경 토박이니 아마 어릴 적부터 고추잡채는 즐겨 먹었을 테지만 차소포는 처음일 것이네. 이건 광동 요리로 보다시피 고기만두 요리라네. 밀가루를 쪄 낸 후 그 안에 광동 특유의 돼지고기 불고기를 넣어 만드는 것일세. 이게 또 맛이 그만인데…….”
말을 잇던 설군은 약간 식어 가는 음식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관량을 보고는 헛기침으로 애써 무안함을 달랬다. 하나 고집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크흠! 말이 길어졌구먼. 여하튼 이런 요리일세. 그다음 것은 알다시피 동파육이라고 송나라 때 관리이자 문학가인 소식(蘇軾)이 만든 요리라네. 그 사람 호가 동파지 않은가. 뭐 남경 토박이니 자네가 더 잘 알겠지. 그런 의미에서…… 일단 드세!”
말하다 보니 절로 흥이 나서 음식이 식는 줄도 모르고 말을 이었던지라 그런 자신도 객쩍었던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얼른 젓가락을 놀리는 설군이었다.
설군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던가 싶은 관량이었으나 아무래도 자신에게 민망해서가 아니라 음식에게 미안해서 하는 행동인 듯한 눈치였다. 그런 의미에서 설군은 꽤 광적인 미식가인 듯했다.
잠시 고개를 젓던 관량도 금세 음식에 손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과연 이곳의 음식 맛은 뛰어났다.
정갈하면서도 서민적인 맛과 그 푸짐한 양으로 서화로 최고의 음식이라는 말이 오히려 부족한 듯싶었다. 과연 설군이 호언장담할 만하였다.
처음 젓가락을 어디 둘지 몰라 하던 때가 언제였던가 싶게 관량은 정신없이 손을 놀렸다. 얼마 만에 먹어 보는 진미인지 몰랐다. 제법 허기진 터였던지라 두 사내는 이렇다 말도 없이 먹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때였다.
정신없이 젓가락을 놀리는 관량의 귓속으로 전음이 들려왔다.
“듣기만 하게. 나 엽우일세. 잘 있었는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니 대각선에 자리한 객잔의 끄트머리에 한 사십 대 사내가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총교관 엽우였다.
놀라운 마음도 잠시 관량 또한 그에게 답을 보내고 싶었으나 자신은 아직 내공의 화후가 지극히 낮아 전음을 시전할 수준도 되지 않았다.
이에 고개를 살짝 끄덕여 준 후 다시금 음식을 입에 가져가며 귀를 기울였다.
“그동안 자네 고생이 많았더군. 그래도 광노와 맞서 용케 살아남은 걸 보니 자네도 명줄이 제법 길구먼. 하하하. 미안하네. 농이었네. 여하튼간에 대단하이. 광노에게 창을 들이밀 생각을 다 하고 말이야. 이제 전음은 그만 하고 독순술(讀脣術)로 얘기하세나.”
이에 관량이 고개를 들어 보니 마침 설군이 앉은 자리가 엽우와 자신 사이의 중간의 위치에다 약간 비스듬하게 앉아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 간에 시야가 확보되어 있어 독순술로 대화를 나누기에는 적당한 위치였다.
이에 음식을 먹으며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의위사들에게 독순술은 훈련위사 시절에 배우는 기본에 해당했다.
“어떻게 된 일이오? 내가 이곳으로 오리라는 걸 어찌 안 것이오?”
“하하. 그리 불쾌해 할 것이 없다네. 혼자 사지에 들어가 있는 요원을 방치해 둘 기관이 아니지 않은가. 이미 잠입해 있는 금의위의 일반 요원이 자네를 주시하고 있다네. 자네도 동료가 누군지 안다면 도움이 되겠지. 물론 잘못하면 두 사람 모두 노출될 위험이 따르지만 자네나 그자나 그리 호락호락한 자들은 아니니 말이야. 그자는…….”
엽우에게서 호가장에 잠입한 또 다른 요원의 이름을 들은 관량은 흠칫 놀랐다.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던 것도 있었지만 아는 자였던 까닭이 컸다. 하나 그것도 잠시 금세 다시 신색을 회복하였다.
“그래도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은 적을 모조리 소탕하기 전까지 서로 아는 체를 하지 말도록 하게. 그게 서로에게 좋을 것이네. 여하튼 그자 말로는 최근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고 하던데. 자네는 뭐 좀 알아낸 게 있는가?”
“전혀요. 아직 별다른 특이점은 발견하지 못했소. 내성으로 잠입을 시도해 봤으나 여의치가 않았소. 예상외로 그곳에는 범상치 않은 자들이 즐비했소.”
“흠…… 알겠네. 일단 앞으로도 연락은 내가 자네를 찾는 방법을 사용하지. 혹여나 급하게 나를 찾을 일이 생기면 이자들을 이용하게.”
말을 마친 엽우는 슬쩍 손에 든 종잇조각을 들어 관량에게 보여 준 후 그의 등 뒤 난간 뒤의 나무 틈새에 조심스럽게 끼워 넣고는 계산을 치르고는 객잔을 걸어 나갔다.
잠시 입구를 벗어나는 엽우의 뒷모습을 지켜볼 때 갑작스럽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엽우와의 접선 중이었던지라 흠칫 놀라 쳐다보니 설군이었다.
비록 최근 호가장에 든 후 잠행을 자제하며 자중하느라 심적으로는 안정돼 있다 하나 마치 외줄을 타는 듯한 위험천만한 형국이었기에 긴장감에 일순 흠칫 놀랐다가 겨우 신색을 회복했다.
“응? 맛이 별론가?”
제법 바삐 손을 놀렸지만 독순술에 전념하는 통에 관량이 음식을 별로 들지 않자 의아하여 설군이 물은 것이다.
“아니네. 생각할 게 있어서 말이야. 드세나.”
생각해 보니 아직 허기진 배를 충분히 채우지 않았던지라 공복감이 느껴짐에 가빠진 호흡을 다스리며 다시금 손을 놀려 가는 관량이었다.
일다경 정도가 지나자 어느덧 탁자를 가득 메웠던 풍성한 요리도 바닥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포만감이었다.
“잠시 뒷간 좀 다녀오겠네.”
“그러게나.”
몸을 일으킨 관량은 객잔의 입구를 나와 뒤편으로 돌아가는 기둥의 모서리를 지나쳐 갔다. 모서리를 지날 때 관량은 재빨리 손을 뻗어 나무 틈새에서 엽우가 남기고 간 종잇조각을 빼내었다.
스윽 하고 조심스럽게 훑어보니 제법 많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나 그중 아는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연락책의 용도로만 사용하는 자들이라 모두 하급 무사들이었던 까닭이었다.
뒷간에 이르는 동안 내용을 머릿속에 각인시킨 관량은 종이를 뒷간 옆의 타고 있는 장작 더미에 던져 태워 버린 후 돌아섰다.
서둘러 호가장으로 귀환해야 할 터였다. 비록 오후 훈련 계획이 없어 시간적으로는 자유로웠지만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은 공연한 의심을 살 수 있는 것이었다.
관량은 엽우와의 오늘의 만남으로 가까운 시일 내에 내택으로 또 한 번의 잠행을 할 필요성을 느꼈다. 특급 정보 요원인 월영 특유의 감각에 무언가 벌어지고 있음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풍랑을 헤치며 한 척의 거선(巨船)이 남경의 장가항(張家港)으로 향하고 있었다.
폭풍이라도 몰려오려는 듯 높은 풍랑이 일고 바닷바람도 사나워지는 데다 먹구름이 끼고 있어 배를 띄우기에는 최악의 조건으로 치닫고 있었으나 이 배의 뱃사람들은 그다지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느덧 목적지인 장가항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폭풍우가 밀려오려면 최소한 이각여가 흘러야 하지만 장가항에는 못해도 일각이면 도착할 것이리라.
배는 누선(樓船)의 형태를 띠고 있었고 길이만 백 장, 폭이 오십여 장 정도로 꽤 큰 규모였다. 못해도 수백 명은 족히 들어갈 듯했다.
갑판에는 어느덧 장가항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이를 구경하려는 수많은 승객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들은 모두 대륙인의 복색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뱃머리에 올라 있는 세 사내가 눈에 띄었다.
그들은 전신을 짙은 피풍의로 덮고 있었고 머리에는 삿갓을 썼으나 동영인임을 감추지는 못하였다. 자세히 본다면 그들의 발에 왜나막신[一本下駄]이 신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동영인들의 신으로 눈여겨본다면 쉽게 구별해 낼 수 있었다.
그리 생각하고 둘러보니 과연 갑판에 있는 자들 중에도 절반은 동영 특유의 복색을 한 가지씩은 하고 있었으니 이 배는 다름 아닌 동영과의 밀항선(密航船)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