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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뱃머리의 세 사내는 앞의 한 사내를 중심으로 뒤의 두 사내가 조용히 시립하고 있는 형세였는데 아마도 그들 간의 고하(高下)가 있는 듯했다.
그중 삿갓 사이로 드러난 우두머리 되는 사내의 얼굴에는 짙은 수심이 잠겨 있었다.
사내는 오가사하라 마츠모토[松本]. 동영의 천황인 유타나리의 차남이었다. 그는 천황의 명을 받아 호유용의 허와 실, 더 나아가서는 명제국의 허와 실을 보기 위해 선발대로 파견된 것이었다.
하나 그렇다 하여도 그의 얼굴에 짙게 깔린 수심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동영인들의 가장 큰 소망인 대륙으로의 진출의 기회가 왔건만 무엇 때문에 이리도 심려한단 말인가?
‘반드시 성공해야 된다! 실패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만일 이번 일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마츠모토는 입술을 악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던지 입술에는 피가 배어 나왔다.
‘고카메야마[後龜山]파의 공세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잘못하면 천황께서 실각되는 최악의 상황도 맞을 수 있는 것이야. 그러니 반드시! 성공하게 만들겠다. 나 동영삼검(東瀛三劍)의 일인 마츠모토가!’
그의 눈에서는 깊고 깊은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고 그의 전신에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일대 종사(一代宗師)의 폭풍 같은 기세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날 밤, 남경의 북동부에 바다와 면한 운태산(雲台山)의 기슭에서는 한 척의 나룻배가 조심스럽게 배를 뭍에 정박시키고 있었다.
이미 바다는 한 시진 전부터 시작된 폭풍우가 심하게 몰아치고 있는데다가 짙게 깔린 어둠으로 도저히 항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한데 배는 한 치도 파손된 것이 없는데다 일련의 은밀한 행동으로 미루어 아마도 폭풍우가 몰려오기 전에 이미 도착해 있다가 야음을 틈타 정박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이 닻을 내리고 뭍에 올라서자 정박한 뭍의 오 장여의 거리에 떨어진 커다란 바위 뒤에서 숨어 있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겠습니다.”
어둠을 헤치며 다가선 사내는 호유용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진녕이었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고도 공손한 태도로 뭍에 내려선 괴인들을 반기고 있었는데 최근 호가장에서 진녕의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위치를 생각한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뭍에서 내린 자 중 오 척이 조금 넘어 보이는 단구의 사내가 북방 특유의 강한 어조로 물었다.
“사투무수[沙圖穆蘇] 님, 저는 호유용 님의 부장 중 진녕이라 합니다.”
“그대가 진녕인가?”
사투무수는 북원의 황제인 투구스테무르[脫古思帖木爾]의 친동생으로 초원의 삼엄한 국경을 피해 야음을 틈타 동쪽 바다를 헤치고 온 터였다.
이때 사투무수는 무척이나 놀란 눈치였는데 그럴 만한 것이 사실 진녕은 호유용의 부장이 되기 전 명제국 건국 당시 뛰어난 무장으로 원을 몰아내는 데 크게 공헌을 한 용장 중 하나였다. 그 후 십수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북원에서는 그의 이름을 아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에 사투무수도 동족의 목숨을 앗아 간 자이자 지금은 그와 한 배를 타기로 한 자의 수하된 자이기도 한 진녕을 대하자 만감이 교차되는 느낌이었다.
진녕은 이를 짐작하고 깊게 읍을 한 후 말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비록 승상께서 육부의 권세를 장악하고 계시다 하나 수많은 눈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음. 알겠네. 어서 가지.”
사투무수 또한 범인(凡人)이 아닌지라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재촉하였다. 어느새 뒤에 있던 사투무수의 수행원들은 타고 온 나룻배에 구멍을 뚫어 깊은 바다로 수장을 시킨 후였다.
곧이어 야음을 틈타 야인(夜人)들이 탄 십여 필의 말들이 거칠게 발을 놀리며 짙은 어둠을 뚫고 남진(南進)하였다.
바야흐로 호유용을 중심으로 피의 수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폭풍의 중앙에 관량이 있었다.
2
핫! 차앗!
열한 명의 십호장(十戶長)들이 펼치는 적사창법은 과연 일반 무사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뛰어났다.
일수마다 힘이 넘쳤고 웅혼한 기상과 함께 중원 무예 특유의 조화로움 또한 담고 있었다.
어느덧 햇무리가 저물어 가는 저녁 무렵이 다가오자 한낮의 무더위는 물러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십호장들의 호쾌한 연무로 인해 달아오른 후끈한 열기를 식혀 주었다.
적사출세(赤巳出世)의 초식을 마지막으로 십호장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기운을 다스린 후 호흡을 골랐다.
“좋군. 다들 그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나 보군. 좋은 자세네. 앞으로도 일반 무사들의 창술 부교관들로서 그 책임을 알고 수련에 일로정진(一路正進)해 주게나.”
창술교관 흠패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십호장들이 보여 준 적사창법의 화후는 그 수련 기간에 비해 무척이나 뛰어난 것이었다. 적사창법이 천무단주 임현에 의해 새롭게 다듬어진 지 반년, 또한 일반 무사들의 창술 수련에 채택된 지는 석 달 남짓한 시간에 불과했기에 십호장들 또한 일반 무사들과 다를 바 없는 수련 기간을 거친 것임을 감안할 때 놀라운 결과였다.
관량은 한바탕 연무를 마치고 흘리는 시원한 땀방울을 손으로 쓸어 내며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사실 최근 여암진경의 운기토납법을 수련한 이후에 그 호흡의 양이 많아지고 기력이 좋아져 전에 비해 쉬이 지치지 않았고 또한 거칠게 몸을 혹사시켜도 이전에 비해 금세 회복되곤 하였다.
이는 무공에도 도움이 되어 약간이나마 단전에 쌓인 내공을 끌어올려 펼치면 그 위력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대단하여 단단한 바위조차 꿰뚫을 정도였다. 전력으로 시전하여 겨우 바위에 세 치 남짓한 흔적만을 남겼던 이전에 비해서는 몇 곱절은 위력이 상승한 것이었다.
관량을 비롯한 십호장들이 호흡을 모두 골라 갈 즈음 시범교관 윤자겸(倫柘兼)이 장내에 걸어 나오며 교관 흠패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에 흠패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비켜 주었고 중앙으로 걸어 나온 윤자겸이 담담하면서도 무척이나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한 가지 알려 줄 것이 있네. 앞으로 칠 일 후 내성의 대연무장에서 십호장 이상 급들을 대상으로 한 무술대회(武術大會)를 개최하기로 승상께서 명령을 하달하셨네. 이번에 모시게 된 귀빈들 앞에 우리 천, 지무단의 무용(武勇)을 보이기 위함이신데 자세한 사항은 극비라서 나도 알지 못하네. 여하튼 비록 다른 무과(武科)에 비해 수가 특히나 적은 우리 창술 과이지만 부교관 중에도 걸출한 자들이 나가 주어 명성을 드높여 주었으면 하네. 참가할 자들은 앞으로 나오게나. 참고로 나 또한 참가하기로 하였네.”
말을 마친 윤자겸이 스윽 좌중을 둘러보자 대부분이 서로 눈치를 보기만 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다가 일순간 그들은 어느 한 사람에게 시선을 보냈는데 다름 아닌 관량이었다.
관량이 들어온 지 한 달여가 지나감에 따라 신입인지라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던 동료들은 윤자겸과 함께 두각을 나타내는 관량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미 어릴 적부터 관부의 무장이셨던 아버지에게서 기본을 탄탄히 익힌 데다 24로 관부창법을 극성으로 익힌 그는 적사창법을 마치 솜뭉치가 물을 흡수하듯 빠른 속도로 익혀 나갔고 최근에는 은연중 다른 이들로부터 윤자겸과 함께 창술 부교관 중 최고수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관량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골똘히 궁리하였으나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좋은 기회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번에 좋은 성과를 거둔다면 호유용의 측근으로 한 번 더 깊이 잠입할 수 있는 기회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만큼 위험 요소 또한 따르는 터였다. 자칫 잘못하여 혹여 월영만의 비전의 무공을 펼치게 된다면 단번에 와호장룡(臥虎藏龍)의 고수들의 눈에 띄어 지금까지의 공작이 모두 다 물거품이 되는 수가 있었다.
하나 확실히 실보다는 득이 확률이 높은 기회였다. 이에 관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십호장 관량(關良)! 무술대회에 참가하겠소.”
이에 관량을 스윽 훑어본 윤자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최근 두각을 나타내는 관량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은연중에는 관량이 걸어 나와 주길 바라는 바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자신과 비교되고 있는 자이니 무인 특유의 자존심으로 당연한 것이리라.
“자네라면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겠지. 좋소. 그렇다면 시범교관으로서 참가할 자격을 심사하고자 하는데 응할 텐가?”
윤자겸의 도발적인 말에 관량은 잠시 생각에 잠겼으나 비록 같은 십호장이라 하나 그 직급이 다른 윤자겸의 말을 거절할 명분이나 힘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기에 그저 가볍게 읍을 한 후 기수식을 취할 뿐이었다.
“잘 부탁드리겠소.”
관량은 최근 연성한 적사창법이 아닌 본래의 진신절학(眞身絶學)인 24로 관부창법의 기수식을 펼쳐 갔다. 윤자겸이란 자의 무공 수위는 아무리 낮게 잡아도 자신보다 두 수, 세 수 앞을 달려가는 자이니 비교적 서투른 적사창법보다는 손에 익은 것이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관량은 무인 특유의 끓어오르는 호승심을 느꼈다. 상대가 자신이 이길 수 없는 고수라는 데 오히려 더욱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펼칠 수 있는 상대이기도 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무척이나 광오한 태도였다. 하나 관량은 이런 면에서 뼛속까지 무인의 혼이 흐르고 있었음이었다.
“먼저 들어오시게. 세 수를 양보하지.”
윤자겸은 오른손으로 창을 비껴든 후 여유롭게 말했다.
마치 무시하는 듯한 상대의 말에 순간 울컥 뜨거운 피가 올라왔지만 관량은 호흡을 고르며 전신에 기운을 휘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에서 떨어진 단풍잎 하나가 윤자겸의 심장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순간 한 자루 빛이 되어 발출하였다.
“가겠소. 핫! 발창식(拔槍式)!”
목숨을 놓고 싸우는 전투가 아닌 서로의 무공을 견주어 보는 비무이기에 관량은 자신의 초식을 말하며 공격해 들어갔다.
“좋은 자세!”
순식간에 지척으로 짓쳐 들며 발창(拔槍)과 동시에 극쾌의 찌르기를 감행하는 관량의 공격에 윤자겸은 감탄성을 터뜨렸다.
“하나 힘과 빠르기가 아직 부족하군!”
왼다리를 축으로 오른 다리로 휙! 하고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 관량의 일 수를 흘려 버린 윤자겸은 과연 창술의 달인이라 할 만했다. 하나 관량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자연스레 다음 수로 넘어갔다.
“연강휘창식(軟剛揮槍式)!”
발창과 동시에 뻗어 낸 극쾌의 찌르기를 마치 길바닥의 조약돌을 집어 들 듯 손쉽게 회수한 관량은 이내 전후좌우, 사방팔방으로 쾌속무비(快速無比)하고도 능수능란(能手能爛)하게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을 종횡하며 고도의 휘두르기를 펼쳐 내었다.
끊임없이 회전하는 무한한 원(圓)의 움직임 속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수많은 나뭇잎들이 공중으로 치솟아 주위를 어지러이 맴돌았다.
이때의 공격이 어찌나 변화무쌍(變化無雙)한지 윤자겸도 놀라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창으로 막아 나갔다.
따다다다닥!
과연 윤자겸의 창술은 대단한 것으로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관량의 연강휘창식의 변화를 일일이 하나씩 막아 내는 것은 신기에 가까울 정도였다.
이에 관량은 더욱더 끓어오르는 호승심과 함께 상처 입은 한 마리의 맹수처럼 자신의 최후 초식이라 할 수 있는 섬전창(閃電槍)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언제 공격했냐는 듯 뻗은 속도만큼 빠르고 자연스럽게 창을 거둬들인 관량은 순간 사지백해(四脂百骸)에 흐르는 기력(氣力)을 모조리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윤자겸은 관량의 연강휘창식이 가벼이 상대할 것이 아니었던지라 그가 가진 오 할의 힘을 사용하여 막아 낸 후 잠시 관량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사내라 생각되어졌다. 지칠 줄 모르는 투기와 타고난 싸움 감각은 그저 배운 대로 무공을 휘두르는 나약한 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하리라. 자신 또한 비록 무위에서는 확실한 우위에 있다 하나 관량의 예측 불허의 현란한 초식과 힘, 그리고 극쾌의 빠르기가 동반된 창술에 적잖이 당황했으니 이를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핫!
그 순간 이윽고 관량이 섬전창을 뻗어 왔다.
이 한순간에는 그의 진신전력이 담겨 있던 탓인지 창 끝이 부르르 진동을 하며 공기를 찢어발기며 쇄도해 왔다.
윤자겸은 예상보다 훨씬 웃도는 관량의 무위에 확실한 힘으로 질끈 눌러 줄 필요를 느꼈다. 이에 마음을 독하게 먹은 그는 팔 할의 공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순간 바람도 멈춘 지 오래건만 윤자겸의 무복은 마치 순풍이라도 부는 듯 펄럭이기 시작하였고 다음 순간 안광을 번뜩인 윤자겸이 오른팔을 대각선으로 쭈욱 뻗어 창을 높이 쳐든 후 신형을 날렸다.
타핫!
섬전창의 공격로상의 중앙으로 돌진하는 윤자겸의 모습은 일순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듯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하나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극도로 내력을 운용한 윤자겸은 하늘에 닿을 듯 들어 올려진 우측 손에 들린 창을 관량의 섬전창을 향해 크게 휘둘렀다.
촤악!
마치 바람을 가르는 듯, 천 조각을 찢어 내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섬전창을 뻗어 내는 관량의 우측 손등을 강타했다.
딱!
관량의 손등은 여지없이 거칠게 강타당했고 관량은 크악! 하고는 신음을 토하며 오른손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손을 벗어난 관량의 창은 공중으로 튀어 올라갔다.
관량은 비록 공격당하는 순간 내력을 이용해 손등을 보호하였지만 이미 붉게 변한데다 크게 부어오른 손등의 아픔보다는 제대로 공격다운 공격을 격중시키지도 못하고 패한 것이 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냈다.
그제야 공중으로 치솟았던 관량의 장창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려 종래 창날을 거꾸로 한 채 땅에 깊숙이 박히었다.
푸욱!
창날째 깊숙이 박힌 자신의 창을 보자 더욱 마음이 아려 오는 관량이었다.
“대단한 실력이었네. 하지만 그 정도 실력으로는 무술대회의 본선조차 꿈도 꾸지 못할 것이네. 내 마지막 순간에 힘을 빼내었으니 상처는 크지 않아 며칠만 정양하면 붓기는 가라앉을 것이네.”
윤자겸은 상처 입은 맹수처럼 두 눈을 부릅뜬 채 아직도 투기를 드러내는 관량을 잠시 응시하다가는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것으로 관량과 나 윤자겸, 둘이 무술대회에 참가하는 것으로 하겠네. 이의는 없을 것으로 보이네. 그럼 이만 오늘의 수련은 마치지. 다들 돌아가서 쉬도록 하게나.”
신형을 돌리는 윤자겸의 눈은 한동안 관량에게서 떼어질 줄 몰랐으나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도 관량은 심중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으리라. 무인의 가장 치욕스런 것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병기를 놓치는 공격을 당했으므로. 비록 미안할지언정 윤자겸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만큼 힘든 상대였기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자신 또한 지금처럼 멀쩡한 모습이지는 못했으리라.
그것은 윤자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가자 여실히 드러났다.
섬전창이 닿지도 않은 심장 부위의 가슴 섶이 섬전창이 발한 풍압에 짓눌려 너덜너덜하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3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호유용은 서탁에서 자리하고 있다가 문으로 들어서는 삿갓 쓴 흑삼인을 보고는 곧장 일어서 한달음에 달려 나와 예의를 차려 반겨 주었다.
흑삼인 또한 공손히 읍하고는 뒤로 돌아 삿갓을 벗으니 갈매기 눈썹에 깊은 눈망울을 한 날카로운 인상의 미남자가 나타났다.
“반갑습니다. 동영천황(東瀛天皇)님의 명을 받고 온 마츠모토라 합니다.”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되 당당함을 잃지 않는 모습은 대국을 대하는 일개 섬나라의 태도가 아니었다. 하나 호유용 또한 풍진세월을 지나 온 백전의 노장, 한눈에 상대의 진면목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천황께서 가장 총애하신다는 마츠모토 님을 보내셨으니 그만큼 이 일에 만전을 기해 주신다는 것이겠지요. 동영의 최고의 무인이라는 동영삼검(東瀛三劍)의 일인이기까지 하다 들었습니다.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입니다그려.”
“부끄럽지만 그러한 허명을 얻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대륙의 권세를 손에 쥐고 있다는 좌승상님께야 터럭이나 하겠습니까?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들은 주거니 받거니 인사를 나누며 서로를 각자의 잣대로 평가하였다.
‘흠. 섬의 미개인들이라 해서 쉬이 볼 녀석들이 아니로구나. 대륙에 와서도 이리 당당한 모습이라니. 아무래도 거사를 치른 후 동영을 각별히 신경 쓸 필요가 있겠구나!’
‘호유용은 간신에다가 그 속이 좁아 대인(大人)이 못 된다 하더니 이는 그의 진면목을 모르는 말이로구나. 이자는 그러한 잣대로 판단하기에는 어려운 자이다. 비록 겁이 많아 보이나 그만큼 신중하고 사려가 깊은 탓이겠지. 이번 일을 계기로 좀 더 대륙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음이야!’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 두 사내의 가슴속에는 시커먼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여하튼간에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곧 북원의 사자도 도착할 것이니 내일 중으로 함께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모쪼록 편안히 쉬시길 바랍니다.”
깊게 읍을 하고 돌아서는 마츠모토는 속으로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북원까지 끌어들였단 말인가. 이번 일은 패(敗)보다 승(勝)할 확률이 더 높겠구나. 하지만…….’
분명 더욱 고무적인 일이었는데도 이상하리만치 마츠모토의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커져 갔다.
‘너무 상황이 호재(好材)가 겹치고 있다. 길(吉)과 흉(凶)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 꼬리를 물고 따라다닌다 하였다. 연달아 일어나는 길(吉)이 과연 좋은 것이기만 한 것일까?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게 있음이야. 주원장이라…… 그는 일세의 효웅(梟雄)이다. 그가 너무도 잠잠하지 않은가! 음…… 좀 더 알아봐야겠다. 이번 일은 우리 조케이[長慶]파의 사활이 걸린 일이니!’
마츠모토를 따라 이어지는 복도의 유등이 바람 한 점 들 곳이 없건만 유난히도 요사스럽게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어떠한 경고를 말하려는 듯.
어둠이 짙게 깔린 자시(子時) 중엽, 남경의 서화로의 환락가 사이의 골목을 적색 무복을 입은 한 사내가 술에 취해 갈지(之) 자로 흐느적거리며 길을 걷고 있었다.
이미 만취하여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로 보이건만 한 손에 떡하니 호리병으로 된 술병을 들어 연방 들이켜 대니 술이 사람을 마실 듯 보였다.
사내는 술병을 기울여 탁탁 털어내 마지막 한 모금까지 혀로 핥아 낸 다음 빈병을 흔들며 짜증이 섞인 손놀림으로 담벼락으로 던져 깨뜨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깨진 술병 조각을 몇 번 발로 툭툭 차 내던 사내는 이내 다시금 흐느적거리며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구름에 가렸던 달빛이 드리워지자 어둠에 잠겼던 골목길은 일순 환한 달빛에 모습을 드러냈고 사내의 모습 또한 드러났다.
드러난 사내는 붉은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는 호가장의 십호장들이 입는 복색이었다. 이에 유심히 사내를 들여다보자 놀랍게도 그는 관량이었다.
관량의 행색은 머리나 입고 있는 무복이나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것이 마치 폐인 같은 행색을 하고 있었는데 게다가 두 눈의 동공마저 풀려 있었다. 그에게 몇 시진 전의 윤자겸에게 패한 일은 크나큰 상처가 되어 가슴에 못 박혔던 듯했다.
하나 이렇듯 초라한 패배자의 모습이라니…… 관량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다시금 한량 때로 돌아가려 함이란 말인가?
1 버렸
일각여를 위태롭게 걸어가자 호가장에 도착하였다. 느릿느릿하게 걸어가는 듯했으나 그래도 무인의 걸음인지라 그것도 제법 빠른 속도였나 보다.
호가장의 후문에 이르자 후문을 지키는 무사들이 관량을 보고는 눈빛을 빛냈다. 그들도 관량이란 자가 누구인지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그만큼 최근 광노에게 창을 들이댄 데다 창술의 달인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관량의 이름은 하급 무사들 사이에서는 유명세를 톡톡히 타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자세히는 알지 못했으나 몇 시진 전의 윤자겸과 관량의 비무 소식을 들었던지라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잠시 고개를 들어 그들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관량은 히!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후문 무사들은 이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따름이었다.
일다경 정도를 안으로 더 걸어 들어가자 종래에 머물고 있는 장원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장원 안은 조용했다. 같이 지내는 세 명의 괴이한 자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서화로의 홍루로 발 도장을 찍으러 간 듯싶었다.
장원의 마당에 들어선 관량은 순간 쓰러질 듯하던 몸을 우뚝 세우고는 고개를 들어 머리 위에 뜬 둥근 달덩이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술기운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비록 취하고자 하여 마셨으나 몸에 배인 금의위사로서의 습관은 무서운 것이어서 어느 정도에 이르자 몸이 술을 거부하였다. 그래도 가슴속 깊게 자리한 시름이 달래지지 않아 취기를 빌어 마음 가는 대로 움직여 보았으나 장원에 도착하여 유난히도 밝게 빛나는 만월(滿月)을 보자 까닭 모를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