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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건(乾)과 곤(坤) 사이를 가득 메운 맑디맑은 흰 꽃무리를 보자 문득 관량은 절로 웅심이 일고 그 속에서 한바탕 노닐고 싶어졌다. 이에 얼른 침상 옆에 세워 둔 애병(愛兵)을 챙겨 들고는 눈 덮인 소연무장으로 나섰다.
눈은 족히 발목의 복사뼈 정도까지 수북이 쌓여 있었고 겨우 얇은 무복만을 입은 데다 동이 트지 않은 새벽녘의 한기가 동반되자 관량은 전신을 부르르 떨게 만드는 한기를 느꼈다.
잠시 추위에 몸서리치던 관량은 갑작스레 어린애처럼 오기가 일었다.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마저 띠고 있었다.
‘이 정도의 추위에 굴복하면 어찌 사내대장부라 하겠는가! 어디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
잠시 발밑에 수북이 쌓인 눈을 훑어본 관량은 튕기듯 몸을 회전하며 무겁게 창을 휘둘렀다.
쏴아아!
마치 파도가 이는 듯한 모양의 풍압을 동반한 휘두르기에 의해 관량의 주변 삼 장여의 눈들이 쏴아 밀려 나갔다.
그 가운데서 관량은 두 눈을 반개한 채 몸의 기운을 도인하기 시작했다. 영보부법상의 공력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영보부법을 익히기 시작한 지 이제 삼 일째.
과연 팔선의 무학은 높고도 높았다. 양의 기운으로 음의 기운을 몰아내면 몰아낼수록 온몸에는 강렬한 진기가 소용돌이쳤고 사지백해로 뻗은 그 웅대한 공력은 다시금 단전으로 돌고 도는 태극(太極)의 궤를 따라 마치 눈을 굴리듯 그 크기를 키워 갔다.
어느덧 음의 기운은 머리 꼭대기의 백회혈(百會穴)까지 쫓기어 마지막 힘을 짜내어 양의 기운에 저항하고 있었다.
백회혈의 음의 기운을 소멸시키고 전신을 순양의 기운으로 가득 채운다면 연기화신(煉氣化神)의 경지를 이뤄 신공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리라.
하나 이는 요원한 일이었다.
영보부법상의 두 번째 경지에 해당하는 순양지신(純陽之身)의 단계는 가히 손에서 불을 뿜고 발경으로 발출된 기운만으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양기상인(揚氣傷人)의 경지에 들 수 있는 것이나 이는 상승의 경지에 드는 초입으로 무공의 수련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때[時]와 연(緣)이 따라야 하며 또한 무도(武道)에 대한 올바른 깨우침이 수반되어져야 할 것이었다.
강가의 모래알과도 같은 수많은 무인 중에서 상승의 경지에 든 자들은 많이 잡아도 기백을 넘지 않을 것이니 그야말로 높디높은 험산이 아닐 수 없는 것이리라.
관량은 기운을 갈무리한 후 천천히 창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비록 천천히 전개해 갔으나 금세 속도가 붙기 시작한 창은 쉭! 쉭! 소리를 내며 빠르고 또한 극강한 창세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는 눈을 의심케 만들 만큼 빠르고 또한 강한 창세였으나 너무도 극쾌와 극강에 치우쳐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하였다. 이는 관량의 사지백해를 흐르는 양의 기운의 영향이었다.
순양지신의 단계에 들지 못한 양의 기운은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아 더욱더 빨리 달리려 하고 제멋대로 발길질을 해 대니 비록 강대한 힘을 얻게 되었으나 반쪽의 검과 같았다.
이를 깨달은 관량이 날뛰는 기운을 다스리려 하였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간 더 용을 써 본 관량은 도저히 방법이 없자 이를 단념하고는 생각을 바꿔 몸속에 내재된 기운이 아닌 발출되는 기운을 다스리기로 하였다.
이는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비록 극양에 치우친 기운이지만 강대한 힘이기에 문제가 될 것은 크게 없으나 발출되는 기운은 그 경우가 달랐다.
그 기운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일수마다 극강의 기운이 실려 상대를 상하게 할뿐더러 이를 시전하는 관량 또한 진기가 급속도로 고갈되어 제대로 무공을 활용하지 못할 터였다.
반 시진의 시간이 흐르자 관량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간의 성과를 보았으나 아무래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족히 열흘은 걸려야 진기의 수발을 자유로이 할 수 있을 듯한데 이제 겨우 무술대회까지는 나흘이 남았을 따름이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시름이 쌓여 갈 때 갑작스레 뒤에서 여럿의 인기척이 들렸다.
경계한 채 돌아서자 그들은 다름 아닌 서화삼괴(西譁三怪)였다.
장원을 같이 쓰는 녹저(祿猪), 능한(凌寒), 광불(狂佛)의 세 사내로 그들의 괴이한 외모만큼이나 그들의 행동은 유별난 데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지나친 색골들이라는 것이었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여색을 탐하는 게 그리 흠이 될 것은 없으나 이자들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서화로의 홍루를 드나들었으니 그들을 가리켜 서화삼괴라 사람들이 부르게 된 것이었다. 이는 관량과 이들이 함께 살고 있는 장원의 이름이 서화장(曙花場)인 까닭에 음을 따다 뜻을 바꿔 붙인 것이었는데 새벽의 꽃이 피는 장원이라는 좋은 이름을 갖고 있었으나 이 괴이한 삼괴로 인해 최근에는 장원까지 싸잡아서 서화장(西譁場)이라 불릴 판이었다.
서화삼괴 중 특히 녹저는 지금 무척이나 놀라고 있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일취월장(日就月將)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성장한 관량 때문이었다. 사실 이전에 관량에게 패할 당시 그가 그리도 쉽사리 패한 까닭은 방심한 탓이 컸었다. 하나 정신을 차리고 깨어난 후 분기탱천하여 다시금 주먹을 들이대었을 때 관량의 실력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게 되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히 단 한 수도 받아 내기가 힘들어 보였으니 어찌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없이 서 있는 삼 인을 보자 관량은 무섭게 쏘아붙였다.
“무슨 일인가? 다시금 드잡이질이라도 하자는 것은 아닐 텐데?”
간밤에 내린 눈보라만큼이나 차가운 관량의 싸늘한 말에 일순 움찔한 삼 인이었으나 그중 녹저는 두 눈에 노화를 띤 채 휙 돌아서고는 장내를 벗어나려 하였다.
“아직 내 말에 답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분명히 일전에 다시는 내 주위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하였지 않았던가?”
그와 함께 관량의 전신에서는 폭풍 같은 기세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에 녹저의 발걸음이 멈춰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스라치게 놀란 능한이 급히 입을 열었다.
“오해 마시오. 우린 다만 이번에 열리는 무술대회에 관 공께서 참가하신다는 말을 듣고 대련 상대가 되어 드리기 위해 온 것이오. 우리 세 사람 또한 이번 무술대회에 나가게 되어 관 공과 같은 고수와 대련을 한다면 서로에게 득이 되지 않을까 싶어 온 것뿐이니 관 공은 노여움을 푸시오. 다만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그다지 도움이 될 거 같지는 않지만 말이오.”
능한은 관량의 기세를 가라앉히고자 노심초사하였는데 그 성과가 있어서 관량은 서서히 기운을 가라앉혀 갔다.
능한의 말은 사실이었다. 서화삼괴는 모두 십호장 중에서도 제법 이름난 자들로 무술대회 출전권을 딴 것은 당연한 것이어서 최근 그들끼리 수련에 임하던 중 관량이 떠올라 그와 더불어 수련하고자 찾아온 터였다. 그들에게 있어서도 비록 관량과의 초면이 좋지 않았다 하나 그것은 그들이 자초한 일, 대를 위해서 굽혀 주고 들어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 찾아와 보니 이미 관량의 무위는 자신들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라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던 것이었다.
듣고 보니 관량 또한 대중의 상황의 짐작이 갔다. 사실 이자들과 첫 만남이 워낙 안 좋았던 탓에 그 후로 왕래가 없었으나 서로 척을 질 이유가 없었다. 물론 녹저에게는 무척이나 과하게 힘을 쓴 바가 있어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말이다. 사실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녹저와 화해를 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었다.
관량은 생각할수록 무척이나 좋은 생각이라 여겨졌다. 저들의 무위는 그리 낮은 것이 아니었다. 전력으로 전개하지 않는다면 저들도 쉽게 쓰러질 자들이 아닌지라 대련을 통해 잘 만하면 나흘 안에 진기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나 또한 무척이나 도움이 될 것이오.”
관량의 대답에 오히려 세 사람이 깜짝 놀랐다.
“정말이오? 그대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될 거 같지 않소만?”
“보다시피 진기의 수발이 아직 자유롭지 못하오. 그로 인해 적지 않은 고련이 필요했는데 그대들과의 대련이라면 대회 날짜에 맞출 수 있을 것이오.”
이에 좀 전의 상황을 더듬어 보자 확실히 관량의 무위는 뛰어난 것이었으나 너무도 폭급하고 또한 거침이 없었다. 마르지 않는 샘이 없듯이 내공 또한 쓰면 쓸수록 줄어들어 관량처럼 써 낸다면야 채 백 합도 겨루기 전에 공력을 다 써 버리리라.
고개를 끄덕인 세 사람이 응낙하자 그날부터 관량과 서화삼괴는 함께 연무를 해 나갔다. 공교롭게도 네 사람의 장기는 창, 육장, 검, 봉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인 것이어서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가 총망라되는 무술대회에 대한 또 다른 대비책이 되어 그들의 수련에 불을 지폈다.

금릉(金陵)의 황성(皇城) 내 어화원(御花園).
간밤에 내린 눈으로 덮인 어화원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눈 덮인 연못에 떠 있는 연꽃 무리들은 눈꽃들 사이에서 조심스레 얼굴을 감춘 분홍의 얼굴을 보이고 그 주위에 수놓아진 기암괴석들과 겨울이 무색하게 자라난 형형색색의 기화이초(琪花異草)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하였다.
연못의 우측에 고고하게 주변의 아름다움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는 하나의 정(亭)의 형태의 건물이 있었으니 이곳이 바로 어경정(御景亭)이었다.
어경정의 안에 한 사내가 홀로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사내는 매우 강퍅한 인상에 무척이나 추남이었는데 얼굴에는 곰보가 얼기설기 서려 있었고 광대뼈는 심하게 돌출되어 있었으며 눈은 쫙 찢어져 넙치를 연상시켰다.
사내의 이름은 주원장(朱元璋). 현 명제국의 황제였다.
그의 이러한 외모는 그의 광폭한 성격을 낳게 하여 명제국이 건국된 이래로 중신들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만큼 폭정을 펴 왔다. 다만 그가 평민 출신인 탓에 평소 허례허식을 탐하지 않았던지라 오히려 일반 백성들의 삶은 윤택해졌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주원장은 술을 기울이며 한 곳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뿌리는 두 개인데 나무는 하나인 요상한 모양의 나무가 한 그루 놓여 있었다. 하나 나무에서는 묘한 정취가 흐르고 있었고 그 특이한 모양새가 왠지 가슴을 찡하게 하였다.
나무의 이름은 연리지(連理枝)!
서로 다른 두 나무가 서로 맞닿아서 결이 통하게 된 나무였다. 공허하게 연리지 나무를 바라보던 주원장은 매우 쓸쓸한 어조로 조용히 뇌까렸다.
“한낱 초목(草木)에게도 평생을 함께할 반려가 있거늘 나에게는 아무도 없구나. 평생의 스승이자 지기인 유기(劉基)도 저세상으로 먼저 떠났고, 나와 전장을 누비던 서달(徐達), 이선장(李善長), 호유용(胡惟庸) 등은 나와 갈길을 달리하는구나. 이는 모두 내 잘못이 크네. 그대들을 감싸 안았다 한들 이리되지는 않았을 터! 하나 어쩔 수 없는 일이네. 자네들은 개국공신인데다 지닌 권세가 너무도 높은 바 감싸 안으려 한다면 제국의 안정을 꾀할 수 없네. 너무 야속타 생각지들 말게나.”
장탄식을 터뜨린 주원장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그는 매우 슬퍼 보였다. 믿고 따르던 팔, 다리를 가차 없이 쳐 내는 냉혈한에게도 뜨거운 가슴은 있었다. 다만 이보다 그의 신념이 앞서는 따름이었다.
잠시간이 흐른 뒤 고적한 기분에 잠겨 있던 주원장의 뒤로 한 흑의인이 부복하였다. 그는 다름 아닌 흑영대의 대주였다.
“아뢰옵니다.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호유용이 북원의 투구스테무르와 동영천황 유타나리를 끌어들였다고 합니다. 사흘 전에 그 선발대로 북원 황제의 동생 사투무수와 동영천황의 차남 마츠모토가 도착했다 하니 머지않아 그들의 본대를 이끌고 중원 땅에 발을 들일 것으로 보입니다. 일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저들이 동시에 호유용과 때를 같이하여 호응해 온다면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명을 내리신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금의위와 황군을 동원해 일망타진하겠습니다. 폐하!”
깊이 부복하며 간청하는 흑영대주의 말에 주원장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노화를 감추지 못하였다.
‘호유용! 결국 오랑캐까지 끌어들이겠다는 말이더냐! 네놈이 진정으로 이렇게까지 해야겠더냐?! 북원과 동영이라……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저들을 제압해야 할 것이야. 하나…… 아직은 아니다! 아직 무대가 무르익지 않았어!’
주원장은 의중을 굳히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계속 감시하되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자칫 잘못하다가는 전란이 발생할 수 있음이다. 건국 초기이니라. 전란이 발생한다면 다시금 제국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갈 수 있음이다.”
“폐하!”
안타까움에 절규하는 흑영대주의 말에도 주원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주원장의 고집을 알기에 흑영대주는 안타깝지만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나 돌아서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분은 나 같은 범부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분이시다. 무엇인가 염두하고 계신 바가 있으실 것이야! 그저 신하된 도리로 명을 기다릴 뿐!’
조용히 물러나는 흑영대주를 뒤로한 채 주원장은 다시금 연리지 나무에 시선을 돌렸다. 하나 그 시선은 좀 전과는 정반대로 무척이나 무섭고도 차가운 눈빛이었다.
‘어서 모여들거라! 나의 연리지의 연(緣)으로 맺어진 자들이여! 어서 꼬리를 물고 나에게 이빨을 드러내거라! 그때가 되면 드디어 그대들과의 기나긴 악연도 종식되리라!’


제7장 무술대회(武術大會)


1

육중한 신형의 빠른 움직임에 그 발밑에서 눈꽃들이 아우성치며 비명을 질러 댔다.
퍽! 퍽!
한 발, 한 발 디뎌짐에 따라 이리저리 짓뭉개지고 휘날려 대는 눈꽃들의 소리 없는 외침이 번져 갈 즈음 녹저의 신형이 관량의 삼 장여의 앞까지 이르렀다.
관량은 이미 한 번 겪어 본 바 있는 녹저의 무공이기에 그의 절기 중 가장 고강하게 여겨졌던 파혼장(破魂掌)의 장세에 맞서기 위해 공력을 돋우었다.
하나 파혼장을 펼치려면 최소 일 장 이상의 거리는 격하고서야 가장 확실히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음에도 어찌 된 셈인지 녹저는 멈추지 않고 관량의 몸으로 들이받듯 머리부터 맹렬히 돌진해 왔다.
크릉! 성난 멧돼지가 돌진해 오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관량은 급히 창세를 전개해 막아 갔다.
쩡! 창과 둔중한 녹저의 이마가 부딪힌 것이건만 그 내면에 담긴 그들의 공력의 부딪힘으로 거센 충돌음이 들려왔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오히려 한 걸음을 더 내디디며 손쉽게 녹저의 육탄 공격을 막아 낸 관량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금 급히 창을 놀려야 했다.
녹저가 연이어 돌진해 온 것이다. 이번에는 기괴한 각도로 주먹과 발이 동시에 들어왔다. 참으로 기괴한 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교묘하게 들어오는 두 공격은 각기 주먹은 사혈 중 인후(咽喉) 아래쪽의 기문혈(氣門穴)을, 발은 척추 아래쪽의 명문혈(命門穴)을 노리고 있어 모두 조금의 충격을 받아도 진기가 흩뜨려지고 강한 충격을 받는다면 그대로 즉사할 수도 있는 사혈이었다.
이에 관량은 감히 경시할 수 없어 적사창법의 방어식인 제6식, 적사유변(赤巳流變)을 펼쳐 팔방을 극쾌의 휘두르기와 찌르기로 막아 갔다.
따당!
그때부터 차 한 잔 마실 시간에 걸쳐 녹저와 관량의 괴이한 대결이 펼쳐졌다. 마치 공이 굴러가듯 육중한 몸을 놀리며 상례를 벗어난 기괴한 공격을 펼치는 녹저의 공격에 관량이 일일이 한 수, 한 수를 모조리 쳐 내는 식으로 전개가 되었는데 이는 마치 누가 먼저 지치나 보자는 모양새였다.
매 수마다 사혈을 노리는 잔혹한 공방이었으나 딱히 결정지을 만한 일격을 가하지 않은 채 흉흉한 대련이 이어졌다.
그러한 양상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방어하는 관량이 이 기괴한 대결을 즐기고 있는 탓도 있었으나 기운을 제어하지 못해 오 할 이상의 공력을 높이면 혹여나 녹저가 상하게 될까 봐 저어한 탓이었다.
그로 인해 지금도 녹저의 공격이 거세어짐에 관량이 약간만 내공을 돋우어도 녹저의 전신을 위태롭게 하여 벌써 녹저의 소매와 가슴 섶은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한편 녹저가 펼치는 것은 태산북두(泰山北斗) 소림(少林)에서 뻗어 나온 복호권(伏虎拳)으로 이것은 강호에 전해진 본래의 복호권이 변형된 것이었다.
이는 본래 녹저의 부모의 고향인 서역의 유술(柔術)이 합치된 형태로 제일식 복호출산(伏虎出山)의 돌진세에서 시작하여 끊임없이 연환하는 형태의 권법으로써 녹저가 펼치니 마치 호랑이가 아니라 선불 맞은 멧돼지가 돌진하는 듯 모양새는 그리 좋지 않았으나 그 위력은 가히 일절이라 할 만했다.
다시금 전개하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녹저는 신형을 거두었다.
“그만 합시다. 이거 이래서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도 못하겠소이다.”
관량 또한 이에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본 적도 겪어 본 적도 없는 괴이한 공격에 그 또한 흥이 돋았지만 점차 흉흉한 공방이 오갈수록 내공을 억제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합시다. 벌써 차례로 관 공에게 우리 삼 인이 연달아 패한 터! 그대의 전력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대련조차 할 수 없을 것이오.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 삼 인이 합격을 하겠소!”
관량은 그게 과연 도움이 될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량 시절에 저잣거리의 왈패와 다수 대 일인으로 싸워 본 적은 있으나 수만 많았지 그렇게 위협이 되지는 않았었다.
하물며 단 셋인데 별다른 차이야 있겠냐 싶으면서도 딱히 별다른 수가 생각나지 않았기에 관량은 삼 인과의 대련에 임했다.
그러나 관량은 단 한 수의 겨룸으로써 이 생각을 고쳐먹어야 했다.
애초부터 강호상의 칼밥을 먹고사는 무인의 합격술과 저잣거리의 왈패들의 막 싸움식의 집단 공격을 비교하는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 할 만했다.
관량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찌 세 사람의 힘이 합해졌을 뿐인데 그 곱절은 되는 위력을 보인단 말인가?
핫!
삼재(三才) 중 천(天)의 방위를 밟고 있는 녹저의 일갈과 함께 지(地)와 인(人)의 방위를 점한 능한과 광불이 노도와 같은 힘을 실어 왔다.
이번에 녹저는 파혼장(破魂掌)으로 공격해 왔다.
삼 장여를 격하고 선 녹저의 광폭하고도 음유한 장력이 삼재진의 조화와 함께 그 위력이 배가되어 둥둥! 소리와 함께 관량의 전신을 엄습해 왔다.
탓! 감히 경시할 수 없어 오 할의 공력을 돋우어 연강휘창식(軟剛揮槍式)으로 맞서 가는 관량이었으나 장력과 부딪히는 순간 속에서 울컥하고 핏물이 올라옴을 느꼈다.
그야말로 대경실색할 일이었다. 좀 전에 오 할의 공력으로도 녹저의 공격을 손쉽게 무위로 만들 수 있었건만 이번에는 도리어 손해를 입은 것이었다.
손으로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는 핏물을 훔친 관량은 씩 하고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어 갔다.
과연 녹저가 자신할 만했다.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나 저들이 펼치는 합격술은 전력을 다해도 막아 낼 수 있을지 의문스럽게 하였다. 이에 관량은 상대를 걱정하던 마음을 모조리 떨쳐 버린 채 날뛰고 싶어 안달 난 고삐 풀린 망아지들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우웅!
감당할 수 없는 기운에 창이 부르르 떨어 댔고 공력이 실린 진각에 관량의 발은 한 자나 땅속에 깊숙이 파묻혔다.
이에 막 관량에게 짓쳐 들려던 삼 인 또한 두 눈이 휘둥그레져 일순 동작을 멈추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더욱더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려 공격해 왔다.
먼저 뻗어 오는 것은 파혼장이었고 파혼장을 상쇄해 내기도 전에 살기 어린 검경이 엄습해 왔다.
쉬악!
능한의 검식은 조용하면서도 날카롭고 음흉하였다.
파혼장을 맞아 가는 그 찰나를 노리고 달려드는 기운은 은밀하여 혹여 살수의 검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관량은 중원 제일을 자랑한다는 금의위 월영의 첩보 요원이 아니었던가? 고도로 단련한 특유의 감각에 잡힌 이질적인 살기에 그대로 반응하였다.
따다다당!
관량이 감지하였을 때는 이미 지척에 이른 후였던지라 그의 창술 중 가장 빠른 섬전창을 연거푸 네 번을 펼쳐 내고서야 겨우 공세를 멀찌감치 밀어낼 수 있었다.
하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뻗었던 창을 회수하기도 전에 빛살 같은 찌르기가 들어왔다. 급히 창을 베어 가며 막아 갔으나 그 진로를 겨우 바꾸었을 뿐 어깨를 강타당하고 말았다.
퍼퍽!
두 걸음이나 물러서고서야 광불의 봉술에 실린 암경을 떨쳐 낸 관량은 욱신거리는 어깨를 돌볼 틈도 없이 다시금 녹저의 파혼장을 맞아 가야 했다.
참으로 오묘하고도 위력적인 합격술이었다.
서화삼괴가 펼치는 합격술은 강호상에 널리 알려진 도가의 진법 중 하나인 삼재진(三才陣)으로 천, 지, 인의 세 방위를 점하여 연환되어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맞물려 돌아가는 공격이 무서운 진법이었다. 게다가 진법상의 조화로 본래의 힘보다 배는 강한 위력이 발휘되니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간단한 진법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