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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잠시 후, 점소이가 태호(太湖) 동정산(洞庭山)에서 재배한 벽라춘(碧螺春)을 내왔다. 탕색이 선명한 벽록색이고, 여린 비취빛의 어린 차 싹과 소라고동처럼 구부러져 있는 것이 청명(淸明)을 전후해서 채엽한 최상품의 벽라춘이었다. 손님을 속이지 않는 객잔의 운영 방침을 다행으로 여기며 차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짙고 신선한 과일 향이 뭉실 풍겨나며 신선하고 부드러운데다 뒷맛이 깔끔해 단맛의 여운이 오래 감돌았다.
‘이런 차를 할아버지들께 드리면 좋아하실 텐데.’
떨어져 지낸 지 겨우 며칠이 지났건만, 할아버지들이 그리워진 양곤의 눈에 우수(憂愁)가 가득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지나가던 여인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비록 반안 송옥 같은 절세미남은 아니지만, 제법 커다란 눈에 어린 우수가 여인들의 방심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점차 객잔 앞에는 그의 모습을 보려는 여인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지나던 행인들이 웅성거렸다. 고개를 든 양곤은 여인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두 손을 가슴에 모은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양곤 소협, 또 뵙네요.”
갑자기 들려오는 영롱한 목소리에 안 그래도 놀랐던 양곤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네∼.”
낯익은 얼굴의 여인이 서 있는 것을 확인한 양곤은 스르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리자 양곤은 은형술을 펼쳐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은지라 참아야 했다.
“인기가 많으시네, 양곤 소협.”
여미려는 어제 헤어지고 난 후에도 그의 영상을 지울 수 없어 오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을에 왔었다. 그런데 뭇 여인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 양곤을 보고는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었다.
“소저만 하겠습니까?”
조금씩 옅어지던 얼굴의 붉은 기운이 다시 짙어지는 듯 느낀 양곤이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되받아쳤다.
“호호호. 기분 좋은 소리네요. 그런데 앉으란 소리도 안 해요?”
“네? 네∼에. 앉으시지요, 소저.”
다시 평정을 잃은 양곤이 허둥지둥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양곤이 그녀의 잔에 찻물을 부어 주었다. 양곤의 맞은편에 앉은 여미려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양곤 소협, 설마 일부러 그런 매력적인 표정을 지으신 거 아니겠죠?”
그녀가 양곤의 앞에 앉자 객잔 밖에 있던 여인들은 ‘임자 있는 몸이네’ 하는 표정으로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다.
“절! 대! 아닙니다.”
“호호호.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이런, 소저에게 말로는 못 당하겠군요. 하하하.”
“당연하지요. 호호호.”
두 사람이 즐겁게 웃자 옆자리의 안쪽에 앉아 있던 청년이 한 명 그들에게 걸어왔다.
“좋은 분이신 거 같은데 여 소저, 저희에게 소개를 좀 해 주심이 어떤지요?”
정중하게 말을 건넨 청년은 허리에 단필(短筆)을 차고 문사의를 입은 잘생긴 청년이었다. 다만 흠이라면 입술이 얄팍한 것이 조금은 고집스러운 듯 보였다.
“아! 제게 일행이 있었어요. 이분은 제 사형이신 뇌영필협(雷影筆俠) 단소운(丹小雲)이고요, 이분은 양곤 소협이세요.”
“단소운이라 합니다.”
“양곤이라 합니다.”
둘은 포권을 하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남아 있던 다른 일남일녀도 양곤의 자리로 다가왔다. 여미려가 그들을 소개했다.
“이분은 위타문(韋陀門)의 소문주이신 절강일도(浙江一刀) 포천룡(包天龍)이시고 이 소저는 제 사매 냉면옥수(冷面玉手) 도소미(悼小美)예요. 이분은 양곤 소협이세요.”
“위타문의 포천룡입니다.”
“보타문의 도소미예요.”
“양곤이라 합니다.”
다시 포권하며 인사를 나눴다. 포천룡은 우람한 덩치와 사내답게 생긴 얼굴의 청년으로 등에 커다란 대도를 매고 있었고 도소미는 얼굴에 한 겹 얼음을 깐 듯 무표정했지만, 묘한 매력을 풍기는 소저였다. 그들이 아예 자리를 옮겨 앉자 점소이는 그들의 자리에 있던 죽엽청과 안주를 양곤의 자리로 옮겨 놓았고, 양곤은 그들에게 차를 한 잔씩 권했다. 차가 최고급 벽라춘임을 안 그들은 순식간에 차 주전자를 탁탁 털어 마셔 버렸다.
“정말 좋은 차입니다. 오늘 제 입이 큰 호강했습니다. 하하하.”
단소운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리며 포권하며 감사했다.
“좋은 차군요.”
심지어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도소미도 냉랭한 음성으로 차 맛을 칭찬했다.
양곤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속은 타고 있었다. 자신의 또래를 만난 적이 없었던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의 걱정은 기우였다. 작금의 무림이 돌아가는 형편을 몰랐던 양곤은 현 정세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듣기만 했다. 나중에 북해로 갈 때 큰 도움이 될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림인이었기에 대화의 중심이 무공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졌다. 무공에 대한 지식은 양곤 역시 빠지지 않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고 대화의 깊이는 더해 갔다.
그러나 한참을 무림에 대해 이야기하던 포천룡이 우람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요즘 내공이 영 늘지 않아 고민이 많아.”
“용 형, 가끔 정체가 될 때가 있는 것 같아. 계속하다 보면 내공이 늘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겠지. 너무 걱정하지 말게.”
단소운이 그를 위로했다. 모두들 양곤과 비슷한 또래라 서로 평대하기로 한 그들은 자신의 고민을 조금씩 털어놓았다. 타인 앞에서 감히 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양곤에게는 털어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그들이었다. 양곤의 천혜지체가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이었다.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혜기(慧氣)를 느끼고 고민을 털어놓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직 양곤은 그런 것을 모르고 있었다.
“자네도 정기신이 무엇인지 알 거네. 정기신에 대해 가장 간결하고 명확하게 밝힌 동원(東垣)에 말하기를 ‘기(氣)는 신(神)의 할아버지요, 정(精)은 기의 아들이 되니 기란 정신의 근본이요 뿌리와 꼭지가 된다’고 하였네. 또한 정(精)은 몸의 근본이고, 기는 신의 주이며, 형은 신의 집이지. 그래서 신을 너무 쓰면 멈추게 되니 쉬어야 하고, 정을 너무 쓰면 마르게 되며, 기도 지나친 과로에는 끊어진다네. 사람이 곡기를 섭취하면 청정한 것은 위로 올라 기가 되고 탁한 것은 아래로 가 정이 된다네. 정이 일곱 방울 모이면 한 방울의 기가 되고, 일곱 방울의 기가 모이면 한 방울의 신이 된다네. 반대로 정을 지나치게 소모하면 기가 변하여 정을 채워 주네. 그럼 신이 다시 기로 변하는 것이지. 그것은 정이 삶의 기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네. 정은 기본이 되면서도 물처럼 흐르는 것이라 저절로 몸 밖으로 흘러나오네. 그런데 지나치게 몸을 혹사하면 정이 과도하게 누출되고 정이 누출되면 일정한 양의 정을 유지하기 위해 기가 변해 정이 된다네. 무인이 수련을 지나치게 하여 땀을 많이 흘리게 되면 정이 소실되어 기가 쌓이질 않는다네. 무리한 수련이 독이 되는 것이지. 내 말 알겠나?”
양곤의 말이 길게 이어지자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청하던 네 사람은 굳어진 석상이 되어 있었다. 백면서생으로 보이는 양곤의 해박한 지식에 여미려가 입을 열었다.
“무림인이 아니라면서요?”
“무림인이 아니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세요?”
“의서에서 읽은 것이에요.”
“맞, 맞네. 자네 말이 맞아. 요즘 내공이 증진되지 않는다고 초식 수련만 집중했었는데, 그것이 아마 원인인 듯하네. 어쩐지 몸이 좀 쉬이 피곤한 듯했는데 수련이 과했던 모양이야.”
포천룡이 원인을 깨닫고 탄성을 질렀다. 단소운이 그 모습을 보고 음성을 낮추며 은밀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일세. 요즘 초식을 수련하면서 가끔씩 내기(內氣)가 끊어지며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네. 왜 그런지 아는가?”
그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사, 사형, 그런 얘길 하면 어떻게 해요?”
“자네 너무했네. 자네 초식이라도 펼쳐 보일 요량인가?”
하지만 양곤의 말에 그들은 다시 몸이 굳어 버렸다.
“자네는 보타문의 하나 있는 필법인 뇌영필법(雷影筆法)을 익힌 듯한데, 몇 초식을 펼칠 때 그렇던가?”
“맞네. 오 초식을 펼칠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나네.”
“오. 벌써 그런 경지에 이르렀는가? 오초 뇌광투산(雷光透山)을 펼칠 때 등파보(登波步)를 밟으며 펼칠 것이고, 사초에서 오초로 넘어가는 순간에 그런 현상이 일어날 것이네. 맞나?”
“맞, 맞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양곤은 단소운의 무공에 대한 이야기라 조금 꺼려졌다. 하지만 천혜지체의 매력에 빠진 단소운은 거리낌이 없었다.
“초식의 투로에 문제가 있는 건가?”
“아닐세. 기본 원리를 이야기할 걸세.”
“그렇다면 문제가 없지 않은가?”
“자네가 원한다면 내 이야기 해 주겠네. 그건 말일세. 등파보뿐 아니라 보통 보법을 밟을 때 기운이 족소음신경(足少陰腎經)을 타고 흐르네. 사초 뇌영분광(雷影分光)까지는 초식을 펼칠 때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으로 기운을 인도하네. 그러다 뇌광투산 초식은 펼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수태양소장경(手太陽小腸經)으로 기운이 흐르게 되네. 취하는 동작이 기운을 그렇게 유도하는 것이네. 족소음신경은 육기(六氣)로는 화(火)에 속하고, 오행(五行)으로는 수(水)에 속하지. 그리고 수태양소장경은 육기로는 수(水)에 속하고 오행은 화(火)에 속하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양곤이 물끄러미 단소운을 바라보았다. 단소운은 양곤의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실마리는 잡힐 듯하면서도 자꾸 손에 든 물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생각하던 단소운이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듣던 다른 사람들도 안타까움에 고개를 흔들었다.
“족소음신경과 수태양소장경은 극(克)하는 관계일세. 육기와 육기가, 오행과 오행이 극하는 관계는 완전한 극을 이루는 손바닥, 손등과 같은 관계란 말일세. 그러니 자연 두 경맥에 흐르는 기운이 서로 간섭을 받게 되고, 약한 기운이 끊어지게 되는 것일세. 해결책은 의식적으로 간섭을 덜 받는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이나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으로 기운을 유도하면 되는 것일세. 내 생각에는 취하는 자세로 보나 초식의 형태로 보나 수소양삼초경으로 도인하는 것이 나을 듯하네.”
말을 마친 양곤이 미소를 지으며 단소운을 쳐다보았다. 단소운은 아무런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남은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멍하니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당황한 양곤은 자신의 말이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는가 걱정이 되었다.
“미안하네. 내가 괜한 말을 해서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모양일세. 나중에 그를 보면 미안하다 대신 좀 전해 주게.”
“내가 보긴 아닌 것 같은데?”
포천룡이 의아한 표정으로 양곤을 바라보았다. 단소운이 갑자기 나가며 약간 어색해진 분위기로 양곤이 약간 침울해지자 여미려가 그의 코앞에 잔을 불쑥 내밀었다.
“받아요.”
“네?”
“잔 받으라고요.”
얼떨결에 잔을 받은 양곤에게 여미려가 술을 부어 주었다. 난생처음 받은 술을 어쩔 줄 몰라 하며 들고 있는 양곤을 보고는 포천룡이 파안대소를 터뜨리고 두 여인도 입을 가리고 웃었다.
“설마, 자네 처음 술을 마시는가?”
“그, 그렇게 되었네.”
“제가 드린 술을 버리실 생각은 아니죠?”
얼굴을 가까이 대고 눈꼬리를 늘어뜨린 여미려를 보고는 눈을 딱 감고 단숨에 들이켰다. 순간 뜨거운 기운이 양곤의 목젖을 자극했다.
“컥. 쿨럭.”
“하하하.”
“호호호.”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의 모습을 살피던 세 사람은 기침하는 그를 보며 크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여미려는 안주를 한 점 집어 주었다.
“이것도.”
양곤이 얼떨결에 안주를 받아먹자 포천룡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한마디 던졌다.
“두 사람 사이가 보통 사이가 아닌 모양이야?”
양곤은 술기운과 쑥스러움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고, 여미려는 포천룡을 곱게 흘겨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지울 수가 없었다. 그들이 잠시 양곤을 놀리는 사이 단소운이 객잔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고맙네.”
들어오자마자 덥석 양곤을 안은 단소운이 호들갑스럽게 그를 흔들어 댔다.
“무, 무우, 스은, 이일, 인가?”
양곤의 흔들리는 음성이 흘러나오자 단소운은 크게 웃으며 그를 해방시켜 줬다.
“자네 말이 맞았네. 확실하게 효과가 있었어. 기운도 끊어지지 않고, 위력도 크게 늘었네. 고맙네. 자넨 내 스승이야.”
성격이 외골수 기질이 있는 단소운은 한번 마음을 준 양곤에게 연방 고맙다고 인사했다.
“잘된 일이네. 내가 한 것도 없지만, 잘되었다니 나도 기쁘네. 자, 축하주 한잔 받게나.”
양곤이 단소운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워 주었다.
“하하하. 나도 곤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니 내게도 스승이네. 나도 고맙네.”
포천룡도 크게 웃으며 양곤의 잔에 술을 채웠다.
“스승에게 평대를 하다니 몹쓸 제자네요. 호호호.”
여미려의 한마디에 모두 웃음을 터뜨리고 각자의 잔을 들었다.
“내 오늘 일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네. 자∼ 각자의 무운을 위하여!”
단소운은 들뜬 기분에 마치 전장에 출전하는 병사마냥 외치며 건배하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다른 이들도 ‘건배’를 외치고 각자의 잔을 비웠다. 양곤은 술을 딱 두 잔 마셨는데 처음 마신 술이라 금방 취기가 올랐다. 더 있으면 실수할지도 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가르치는 아이들의 물품을 가지고 돌아가야겠기에 먼저 일어나겠네. 만나서 반가웠네. 다음에 또 보세나.”
“자네 아이들을 가르치나?”
“마을이 작아 훈장이 없어 내가 대신하고 있네.”
“자네의 집에 꼭 방문하겠네. 쫓아내지 말게나.”
단소운이 일어서서 양곤의 손을 꼭 잡았다.
“오면 환대할 것이니 걱정 말게.”
“소협, 저도 꼭 가 볼게요.”
여미려가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했다.
“모두들 잘 있게. 먼저 가네.”
양곤이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객잔을 나섰다. 들고 있는 짐이 서책이라 제법 묵직했지만, 마음이 가벼워서인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마을 밖의 한적한 곳에 다다른 양곤이 주문을 외웠다.
“권서천지 급급여율령.”
축지법을 펼쳐 빠르게 자신의 집에 도착한 양곤은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자신이 술을 먹은 것을 감추려 얼른 잠자리에 누웠다. 술법 중에 술을 깨는 술법은 없었다. 잠시 몽롱한 기분을 느끼며 만났던 이들을 생각하던 양곤은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한편, 객잔에 남은 이들은 들뜬 기분이 가라앉자 양곤에 대해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첫인상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처음 만난 그에게 자신들의 고민을 너무 쉽게 털어놓았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물론 결과야 아주 좋았지만, 그가 상대의 경계심을 허무는 어떤 기운을 가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높은 식견과 해박한 지식을 가진 그의 몸에서 내공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그들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반박귀진(返撲歸眞)?”
“그렇지?”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이 되질 않아요.”
냉정한 목소리의 도소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너무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던데요.”
“하긴 아까 내가 손을 잡았을 때도 무공을 수련한 흔적이 전혀 없는 고운 손이었어.”
단소운이 중얼거렸다.
“그럼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 특히 자네 무공에 대해서는 초식까지 알고 있었고 내공의 운용도 알고 있지 않았나?”
“어떻게 생각하면 소름 끼치는 일이지. 내 무공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
“하지만 그가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사실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을 거예요. 그에게서 전혀 사심을 찾을 수 없었어요.”
“사심은 없는 게 확실해요.”
도소미가 나지막이 결론지었다.
“하여튼 난 그를 믿네. 그가 내 무공에 대해 나보다 잘 안다면 난 그에게 무공을 배울 것이네. 진정한 스승으로 대접할 것이네.”
자신의 무공을 더 낫게 해 준 양곤에게 이미 마음이 기운 단소운은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졌다.
“저도 그를 믿어요.”
콩깍지가 씌기 시작한 여미려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그를 믿고 싶네.”
“저도요.”
의견을 모은 그들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내일 그의 집에 가 볼래?”
“내일 그의 집에 가 볼래요?”
매일 무공수련을 팽개치고 놀러 다니다시피 하는 그들을 문파에서 곱게 볼 리 없었지만, 그들은 반항아들이었다.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