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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4화 낭중지추(囊中之錐)
이른 새벽에 몸을 일으킨 양곤은 어제 일이 떠올랐다. 처음 마신 술에 취한 탓인지 저녁도 거르고 잠에 빠졌다가 이제야 일어났다.
‘분명 촌장님이 어제저녁에 오셨을 텐데. 죄송해서 어쩌나.’
잠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나 가부좌를 튼 양곤은 오수주(五獸呪)를 외웠다.
“목간중청기는 종좌이출하야 화위청룡재좌하고, 금폐중백기는 종우이출하야 화위백호재우하고, 수신중흑기는 종족하출하야 화위현무재호하고, 화심중적기는 종정상출하야 화위주작재전하고, 토비중황기는 종구중출하야 화위황룡재중이라.”
오수주는 자신의 심령을 밝히고 정신을 안정시켜 내부를 관조함을 목표로 한다. 수련할수록 청룡, 백호, 현무, 황룡, 주작의 다섯 신수(神獸)의 기운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오장의 상태와 움직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주문이 통령(通靈)되면 머리가 맑아져 기억력이 증진되고, 눈의 능력이 크게 좋아진다. 귀신들을 볼 수 있으며 밤에도 낮처럼 환하게 볼 수 있을 만큼 안광이 밝아진다. 내공을 수련할 수 없었던 양곤은 무인들이 내공수련 하듯이 항상 자신의 마음을 수련하는 목적으로 오수주를 외웠다. 몇 번이고 오수주를 외우던 그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내부를 관조(觀照)하는 중에 자신의 오장에 좁쌀만 한 기운이 뭉쳐 있는 것을 보았다.
‘저게 뭐지? 오장에 모두 있는 것을 보면 해로운 것은 아니고, 기운 또한 순수한데?’
꽤 오랜 시간 정신을 집중해 살펴보니 좁쌀만 한 것이 자신이 주문을 외우며 받아들이는 오수의 기운을 조금씩 축적하고 있었다. 신기한 현상을 본 양곤은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웠고 좁쌀만 한 것은 더 확연하게 오수의 기운을 빨아들였다. 하지만 너무 느린 진행이라 크기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명상에 잠긴 고요한 그의 감각에 누군가 자신의 집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낀 양곤은 아쉬운 마음으로 주문을 멈추고 허리를 좌우로 틀며 몸을 풀었다.
“훈장, 일어났는가?”
“네, 촌장 어르신.”
양곤이 대답하며 문을 밀고 밖으로 나서자 촌장이 웃음을 참느라 찡그러진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제 약주를 한잔한 모양이지?”
양곤이 ‘어제 내가 실수를 했나?’ 생각하며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죄송할 문제가 아니야. 자네도 이제 약관이 다 되었는데 약주하는 것이 흠이 될 수 있는가? 다만, 자네가 어제 처음 약주를 한 듯 보였네. 맞는가?”
“네.”
“앞으로 나와 종종 술자리를 가지세나. 술도 자꾸 마셔야 느는 법일세.”
“네. 알았습니다.”
“자자, 우리 집으로 가세나.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걸세.”
촌장이 앞장서고 양곤은 그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촌장님, 훈장님, 안녕하세요?”
“어르신, 훈장님, 편히 주무셨습니까?”
마을 사람들의 아침 인사에 촌장의 여유로운 응대와는 달리 양곤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깍듯이 마주 인사했다. 그들의 인사가 어색하기 때문이었다.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중에 촌장이 입을 열었다.
“자네,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인사하는 것이 부담스러운가?”
“네, 어르신. 아직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인사를 받는 것이 어색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부드럽게 응대하게. 배우지 못했지만, 자식들을 가르치는 스승에 대한 예는 아는 사람들일세. 그들에게 자네는 스승이란 말일세. 자네가 부담스러워하면 자신들이 못난 탓이라 여길지도 모르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네, 촌장 어르신. 명심하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집에 돌아온 양곤은 아이들이 이미 모여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열심에 흐뭇해진 양곤은 어제 자신이 구입한 서책과 지필묵을 꺼내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서책을 받으면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스승님.”
“고맙습니다.”
서책과 지필묵을 다 나누어 준 양곤이 입을 열었다.
“서책의 맨 앞에 쓰인 글자가 일천 천자와 글자 자, 글월 문 자이다. 천 자로 이루어진 글이라는 뜻이다. 자 첫 장을 넘겨라.”
아이들은 조심스런 손길로 책장을 넘겼다.
“어제 배운 부분부터 복습해 보자. 다 같이 읽어 보자. 시∼작.”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모든 아이들이 어제 배운 부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아이들은 글을 배우고 요소연의 지도를 받으며 해변 모래에 글을 쓰며 놀았던 것이었다. 달랑 여덟 자를 어제 오후 내내 가지고 놀았던 터라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잘했다. 오늘은 그다음 구절을 배우자. 내가 먼저 읽을 테니 다들 큰 소리로 따라 하거라. 날 일, 달 월, 찰 영, 기울 측.”
“날 일, 달 월, 찰 영, 기울 측.”
양곤의 초옥에서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퍼져 나가자 갯벌에서 일하던 아낙들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자신들이야 글을 배울 기회가 없어 이런 무지렁이로 살아가지만, 자신들의 아이들은 장차 자신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었다.
아낙들의 손길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캐서 훈장님께도 좀 가져다 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계속될수록 그녀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 갔다.
며칠 뒤.
아이들에게 글을 읽으라 하고는 밖을 내다보던 양곤은 멀리서 네 명의 인영이 마을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오수주(五獸呪)를 오랫동안 암송했던 터라 시력이 남달리 뛰어난 양곤은 그들이 상산에서 함께했던 친구들임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자신의 집을 자세히 몰랐던지 두리번거리다가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를 따라 그에게로 다가왔다.
어느덧 오시(午時)가 다 되었는지라 양곤은 아이들에게 글 읽는 것을 멈추라 하고 모두 돌려보냈다. 아이들이 앞 다투어 그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우르르 몰려 나가자 친구들이 들어왔다.
“아이들이 글 읽는 소리가 듣기 좋았어요.”
여미려가 고운 입술을 움직이며 미소를 보냈다.
“훈장님이라 불러야 하나?”
집 안을 휘 둘러보던 포천룡이 아이들이 떠난 방에 털썩 주저앉았다.
“잘 지냈나?”
단소운이 그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무표정한 도소미는 그냥 고개만 까닥였다.
“빨리도 왔네.”
“약속은 지켜야지.”
“잠시만 기다리게. 집에 있는 것이 없어. 촌장님께 손님 접대할 것 좀 얻어 오겠네.”
“역시 청빈한 우리 양곤 소협일세. 괜찮네. 그럴 줄 알고 우리가 직접 가지고 왔네.”
포천룡이 품에서 술병을 꺼내고, 단소운은 건포를 주섬주섬 꺼냈다. 여미려가 작은 목갑을 건넸다.
“이건 차예요. 최상품은 아니지만, 제법 맛이 좋은 거니 아껴 드세요.”
“당연히 그래야지. 여 소저가 주는 차인데. 안 그런가?”
포천룡이 눈을 찡긋거렸다. 양곤은 그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도소미가 불쑥 뭔가를 내밀었다. 부채였다. 의아한 표정으로 부채를 받아 든 양곤에게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문사가 부채는 필수라 하기에.”
“하하하.”
포천룡과 단소운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 마을에서 문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자신들에게 물었던 도소미가 기억난 탓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양곤은 그저 그들의 웃는 모습을 번갈아 볼 수밖에 없었다.
단소운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다가 한마디 던졌다.
“자넨, 복이 터졌구먼. 하하하.”
“도 소저, 이 포천룡은 마음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제 마음을 거절하시더니. 흑흑.”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우는 흉내를 내는 포천룡의 모습에 모두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 도소미는 별호에 어울리지 않게 살짝 붉어진 얼굴로 포천룡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가 장난으로 그러는 것을 알기에 물리적 충격은 가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도 소저.”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했다.
웃음이 가라앉자 양곤은 술병과 건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사는 게 이 모양이니 이해하게. 다음에는 내가 손님을 대접할 것을 좀 준비해 두겠네.”
양곤이 미안한 기색으로 말을 하자 다들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며 둘러앉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일 뿐이었다. 그때, 동네 아낙 중 한 명이 안으로 들어서며 입을 열었다.
“훈장님, 손님이 오셨다기에 먹을 것을 좀 가져왔습니다.”
아낙이 너무 적어 부끄럽다는 듯 멍게와 해삼을 건네고는 얼른 멀어져 갔다.
“고맙습니다.”
멀어지는 아낙의 뒤에 대고 인사를 한 양곤의 음성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자네, 이 마을에 유지일세그려. 어디 해삼 맛 좀 볼까나.”
싱싱한 해물을 보자마자 젓가락을 든 포천룡이 해삼을 입으로 가져갔다. 두 여인은 해삼이 징그럽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본 양곤이 해삼물이 담긴 그릇을 들어 올렸다.
“잠시만 기다리게. 내가 손질 좀 해 오겠네.”
사실 섬에 살면서 해산물을 많이 다뤄 본 터라 먹기 좋게 손질하는 것은 양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보기에 징그럽지 않게 잘게 토막 내어 깨끗한 접시에 담아 내어 왔다.
그사이에 단소운과 포천룡은 잔을 꺼내 술을 부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곤이 다시 내어 온 해삼과 멍게는 예쁘게 잘려져 보기에 좋았다. 하지만 좀 전에 본 해삼을 기억하는 두 여인은 그곳에 젓가락을 가져가지 않았다.
술이 두 순배가량 돌고 취기가 약간 오른 양곤이 슬며시 장난기가 돌아 입을 열었다.
“예로부터 해삼(海蔘)은 바다의 삼(蔘)이라고 불렀네. 그만큼 뛰어난 효능을 가졌다는 말일세. 특히 뼈를 튼튼하게 하는데 이는 무인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지. 해삼의 뼈 강화 작용이 어른의 뼈뿐만 아니라 ‘복중태아의 골격 형성’에도 미침을 뜻하니 임신부 보약으로 인삼 대신에 해삼을 써 왔다네. 임신부가 해삼을 먹고 낳은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는 그 뼈 굵기부터 차이가 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라네.”
포천룡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호! 정말인가?”
“뿐만 아니라네. 빈혈과 변비에도 효과가 크다네. 임신부가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하고 태원(胎元)이 든든하지 못하는 증후를 치료할 때는 몸을 보하는 팔물탕(八物湯) 중에서 인삼 대신에 응용하고, 여기에다가 사인(砂仁), 진피(陳皮)를 이용하면 태아와 임신부를 튼튼하게 해 주는 데 아주 좋다네. 이렇게 신기능(腎機能)을 왕성하게 하므로 계속 먹었을 때는 정력을 더해 주는 회. 춘. 효. 과를 얻을 수 있다네.”
양곤은 일부러 ‘회춘효과’, 즉 젊어진다는 말에 강조를 했다. 여인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더 어려 보이기를 원한다는 글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말을 마친 양곤은 은근슬쩍 두 여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두 여인은 젊어진다는 말에 혹했는지 먹고는 싶었지만, 아까 그 징그러웠던 모습이 떠올라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조금 더 냉정한 도소미가 먼저 젓가락을 가져가 해삼을 집어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처음에는 얼굴을 찌푸리던 그녀는 먹을 만했는지 젓가락이 오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은 여미려도 해삼을 한 점 입에 물었다. 도소미와 비슷한 과정을 거친 그녀의 젓가락도 바쁘게 움직였다.
두 여인은 먹느라 바빴지만, 그 모습을 보던 세 청년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일그러졌다. 참을성이 조금 부족한 포천룡이 마침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리자 나머지 두 청년도 웃음에 동참했다.
“하하하. 아이고, 배야.”
세 청년이 허리를 접으며 웃음을 터뜨리자 두 여인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양곤을 노려보았다.
“양곤 소협, 아까 했던 말이 사실이 아닌가요?”
“하하하, 아, 하하하, 아니오. 내 말은 한 점 거짓이 없는 말이오. 다만, 두 소저의 먹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너무 보기 좋아서 웃은 것뿐이오.”
나머지 두 청년도 서슬이 퍼런 두 여인의 표정을 보고는 웃음을 뚝 멈췄다. 갑자기 웃음을 멈춘 탓에 그들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나중에 아니라고 밝혀지면, 각오하세요.”
으름장을 놓은 두 여인은 조금 남은 해삼을 아까운 듯 바라보다가 잔을 들어 비웠다. 시절이 중추절(仲秋節)이 다가왔는지라 하늘은 푸르렀고 바람은 시원했다. 은근히 취기가 오른 다섯 청춘은 가만히 눈을 감고 불그스레한 그들의 얼굴을 부드럽게 간질이는 바람을 즐기며 한가롭고 평화로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해가 서산에 걸리자 그들은 자리를 파했다.
“내일 또 오겠네. 내일은 일찍 와서 이곳 주변에 무공을 수련할 장소가 있는지도 찾아봐야겠네. 연무장은 답답하거든.”
포천룡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저도 여기 근처에서 수련할 곳을 찾아봐야겠어요.”
여미려가 돌아가기 아쉬운 듯 주저하며 인사를 했다.
“내일 또 보세나.”
“안녕히 계세요, 양곤 소협.”
“조심해서 가게들.”
인사를 나눈 그들은 마을을 나서 한적한 곳에 이르러 신법을 펼쳐 부리나케 문파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그들은 가서 들어야 되는 잔소리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냈기에 후회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중간 즈음에서 포천룡과 헤어진 단소운과 사매들은 서둘러 보타문에 도착했다. 그들을 기다리는 이는 문에서 꼬장꼬장하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계율원주인 보타신니(普陀神尼)였다.
“수련은 안 하고 어딜 싸돌아다니다 이제 오는 게야?”
날카로운 고음으로 그들을 맞이한 보타신니가 데리고 간 곳은 검후(劍后) 요소령(謠小鈴)의 처소였다. 여미려가 검후의 직전제자였고, 단소운의 사부인 채운신니(彩雲神尼)와 도소미의 사부인 냉미랑(冷美狼)도 검후의 처소에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직전 제자들이 수련은 하지 않고 몰려다니며 놀기만 한다는 한탄을 하던 사부들이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문을 열고 나왔다.
보타신니에게 끌려온 제자들이 마치 도살장에 도착한 소마냥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편으로 안쓰럽기도 했지만, 수련에 게으른 제자들을 바르게 인도해야 할 사부의 처지에서 마냥 너그럽게만 대할 수 없었다.
“도대체 너희들은 정신이 있는 게냐, 아니면 없는 게냐! 어디서 무엇을 하느라 수련도 빼먹고 그리 싸돌아다니는 게냐?”
검후가 엄한 목소리로 그들을 질책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여미려가 고개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그렇지만, 좋은 벗을 만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우의를 다지느라 늦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도 남자라고 단소운이 수련을 빼먹은 이유를 밝혔다. 도소미는 표정 없는 얼굴로 서 있었고 그녀의 사부인 냉미랑도 표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장부가 핑계를 대는 것이냐?”
“아닙니다, 문주님.”
“어떤 벗을 만났기에 수련을 빼먹으면서도 만나고 싶었단 말이냐?”
평소 조용한 성격이라 큰소리 내지를 못하는 채운신니가 물었다.
“작은 어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양곤이라는 소협인데, 무공에 대한 식견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제자가 가지고 있던 초식 운용에 대한 문제도 그가 해결해 주었습……. 헙.”
양곤이 좋은 벗이라는 것을 설명하다가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하게 된 단소운이 서둘러 입을 막았지만, 일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내뱉은 말은 주워 담지 못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였다.
“뭐, 뭐라? 그게 무슨 말이냐. 본문의 무공을 타인에게 보여 줬단 말이냐?”
성격이 불같은 보타신니는 당장이라도 손을 쓸 듯 화를 내며 단소운을 다그쳤다.
“저…… 그게 아니라, 그 소협은 사형의 무공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사형은 무공을 보여 준 적이 없었습니다.”
여미려가 단소운이 궁지에 몰리자 서둘러 구원에 나섰다.
“네 말은 그 소협이 너희가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본문의 무공을 안다는 말이냐?”
놀란 검후가 여미려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사형의 무공만 아니라 위타문 소문주인 절강일도 포천룡 소협의 고민도 해결해 주었어요.”
사부의 음성에서 자신들에 대한 질책보다는 양곤에 대한 호기심이 더 많이 느껴진 여미려가 속으로 다행의 한숨을 쉬며 포천룡을 들먹였다. 그러자 표정 없이 서 있던 냉미랑이 도소미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이냐?”
“네.”
모인 사부들은 도소미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여미려와 단소운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은 물러가 반성하고 있어라.”
검후가 최종 판결을 내리자 제자들이 혼찌검이 날 거라 기대했던 보타신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네.”
세 제자들은 혹시 결정이 바뀔세라 서둘러 인사하고 자신들의 처소로 돌아갔다. 남은 사부들과 보타신니는 검후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자리에 앉은 그녀들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아이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확한 연유를 조사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채운신니의 말이 맞습니다.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검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무래도 내일 아이들을 앞세워 그 소협을 한번 만나 봐야겠습니다.”
검후는 침중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보타문의 무공이 어떤 경로를 통해 타인에게 알려졌는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자신들의 독문무공이 모두 다른 사람에게 밝혀진다면, 보타문의 무공은 약점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문파의 위세가 줄어들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가볍지 않은 문제였다.
특히나 각 문파들이 자신들의 성세를 넓히려 애를 쓰는 춘추 전국 시대와 같은 상황에서는 문파의 절기가 유출된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아는 세 사부와 보타신니의 한숨 속에 보타문의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한편.
촌장 집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온 양곤은 자신의 방에서 아침에 오수주를 외우며 느꼈던 것을 곰곰이 되씹고 있었다.
‘그게 어떤 현상일까? 병이 생긴 것은 분명 아니고, 그 좁쌀들에게서 오신수(五神獸)의 기운이 느껴진 듯도 한데…….’
천혜지체인 양곤도 쉽게 깨닫지 못했다. 자신에게 선술을 가르쳐 준 광극 할아버지도 그에 대한 말은 한 적이 없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좋은 것임에는 분명했다. 오장에 있던 좁쌀들은 오행의 기운과 연관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단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뿐이지 알아내지 못할 이유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당장 오수주를 외우며 명상에 잠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술기운이 남아 있어 명상을 하기보다는 잠을 자는 것이 나았다.
‘에이, 내일 다시 오수주를 수련하다 보면 뭔가 알 수 있겠지. 잠이나 자자.’
눈을 감은 양광의 깜깜한 의식 속에 여미려의 미소 짓는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은 양곤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심마(心魔)다. 난 심마에 빠졌어.”
4화 낭중지추(囊中之錐)
이른 새벽에 몸을 일으킨 양곤은 어제 일이 떠올랐다. 처음 마신 술에 취한 탓인지 저녁도 거르고 잠에 빠졌다가 이제야 일어났다.
‘분명 촌장님이 어제저녁에 오셨을 텐데. 죄송해서 어쩌나.’
잠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나 가부좌를 튼 양곤은 오수주(五獸呪)를 외웠다.
“목간중청기는 종좌이출하야 화위청룡재좌하고, 금폐중백기는 종우이출하야 화위백호재우하고, 수신중흑기는 종족하출하야 화위현무재호하고, 화심중적기는 종정상출하야 화위주작재전하고, 토비중황기는 종구중출하야 화위황룡재중이라.”
오수주는 자신의 심령을 밝히고 정신을 안정시켜 내부를 관조함을 목표로 한다. 수련할수록 청룡, 백호, 현무, 황룡, 주작의 다섯 신수(神獸)의 기운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오장의 상태와 움직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주문이 통령(通靈)되면 머리가 맑아져 기억력이 증진되고, 눈의 능력이 크게 좋아진다. 귀신들을 볼 수 있으며 밤에도 낮처럼 환하게 볼 수 있을 만큼 안광이 밝아진다. 내공을 수련할 수 없었던 양곤은 무인들이 내공수련 하듯이 항상 자신의 마음을 수련하는 목적으로 오수주를 외웠다. 몇 번이고 오수주를 외우던 그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내부를 관조(觀照)하는 중에 자신의 오장에 좁쌀만 한 기운이 뭉쳐 있는 것을 보았다.
‘저게 뭐지? 오장에 모두 있는 것을 보면 해로운 것은 아니고, 기운 또한 순수한데?’
꽤 오랜 시간 정신을 집중해 살펴보니 좁쌀만 한 것이 자신이 주문을 외우며 받아들이는 오수의 기운을 조금씩 축적하고 있었다. 신기한 현상을 본 양곤은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웠고 좁쌀만 한 것은 더 확연하게 오수의 기운을 빨아들였다. 하지만 너무 느린 진행이라 크기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명상에 잠긴 고요한 그의 감각에 누군가 자신의 집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낀 양곤은 아쉬운 마음으로 주문을 멈추고 허리를 좌우로 틀며 몸을 풀었다.
“훈장, 일어났는가?”
“네, 촌장 어르신.”
양곤이 대답하며 문을 밀고 밖으로 나서자 촌장이 웃음을 참느라 찡그러진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제 약주를 한잔한 모양이지?”
양곤이 ‘어제 내가 실수를 했나?’ 생각하며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죄송할 문제가 아니야. 자네도 이제 약관이 다 되었는데 약주하는 것이 흠이 될 수 있는가? 다만, 자네가 어제 처음 약주를 한 듯 보였네. 맞는가?”
“네.”
“앞으로 나와 종종 술자리를 가지세나. 술도 자꾸 마셔야 느는 법일세.”
“네. 알았습니다.”
“자자, 우리 집으로 가세나.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걸세.”
촌장이 앞장서고 양곤은 그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촌장님, 훈장님, 안녕하세요?”
“어르신, 훈장님, 편히 주무셨습니까?”
마을 사람들의 아침 인사에 촌장의 여유로운 응대와는 달리 양곤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깍듯이 마주 인사했다. 그들의 인사가 어색하기 때문이었다.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중에 촌장이 입을 열었다.
“자네,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인사하는 것이 부담스러운가?”
“네, 어르신. 아직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인사를 받는 것이 어색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부드럽게 응대하게. 배우지 못했지만, 자식들을 가르치는 스승에 대한 예는 아는 사람들일세. 그들에게 자네는 스승이란 말일세. 자네가 부담스러워하면 자신들이 못난 탓이라 여길지도 모르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네, 촌장 어르신. 명심하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집에 돌아온 양곤은 아이들이 이미 모여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열심에 흐뭇해진 양곤은 어제 자신이 구입한 서책과 지필묵을 꺼내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서책을 받으면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스승님.”
“고맙습니다.”
서책과 지필묵을 다 나누어 준 양곤이 입을 열었다.
“서책의 맨 앞에 쓰인 글자가 일천 천자와 글자 자, 글월 문 자이다. 천 자로 이루어진 글이라는 뜻이다. 자 첫 장을 넘겨라.”
아이들은 조심스런 손길로 책장을 넘겼다.
“어제 배운 부분부터 복습해 보자. 다 같이 읽어 보자. 시∼작.”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모든 아이들이 어제 배운 부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아이들은 글을 배우고 요소연의 지도를 받으며 해변 모래에 글을 쓰며 놀았던 것이었다. 달랑 여덟 자를 어제 오후 내내 가지고 놀았던 터라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잘했다. 오늘은 그다음 구절을 배우자. 내가 먼저 읽을 테니 다들 큰 소리로 따라 하거라. 날 일, 달 월, 찰 영, 기울 측.”
“날 일, 달 월, 찰 영, 기울 측.”
양곤의 초옥에서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퍼져 나가자 갯벌에서 일하던 아낙들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자신들이야 글을 배울 기회가 없어 이런 무지렁이로 살아가지만, 자신들의 아이들은 장차 자신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었다.
아낙들의 손길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캐서 훈장님께도 좀 가져다 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계속될수록 그녀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 갔다.
며칠 뒤.
아이들에게 글을 읽으라 하고는 밖을 내다보던 양곤은 멀리서 네 명의 인영이 마을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오수주(五獸呪)를 오랫동안 암송했던 터라 시력이 남달리 뛰어난 양곤은 그들이 상산에서 함께했던 친구들임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자신의 집을 자세히 몰랐던지 두리번거리다가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를 따라 그에게로 다가왔다.
어느덧 오시(午時)가 다 되었는지라 양곤은 아이들에게 글 읽는 것을 멈추라 하고 모두 돌려보냈다. 아이들이 앞 다투어 그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우르르 몰려 나가자 친구들이 들어왔다.
“아이들이 글 읽는 소리가 듣기 좋았어요.”
여미려가 고운 입술을 움직이며 미소를 보냈다.
“훈장님이라 불러야 하나?”
집 안을 휘 둘러보던 포천룡이 아이들이 떠난 방에 털썩 주저앉았다.
“잘 지냈나?”
단소운이 그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무표정한 도소미는 그냥 고개만 까닥였다.
“빨리도 왔네.”
“약속은 지켜야지.”
“잠시만 기다리게. 집에 있는 것이 없어. 촌장님께 손님 접대할 것 좀 얻어 오겠네.”
“역시 청빈한 우리 양곤 소협일세. 괜찮네. 그럴 줄 알고 우리가 직접 가지고 왔네.”
포천룡이 품에서 술병을 꺼내고, 단소운은 건포를 주섬주섬 꺼냈다. 여미려가 작은 목갑을 건넸다.
“이건 차예요. 최상품은 아니지만, 제법 맛이 좋은 거니 아껴 드세요.”
“당연히 그래야지. 여 소저가 주는 차인데. 안 그런가?”
포천룡이 눈을 찡긋거렸다. 양곤은 그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도소미가 불쑥 뭔가를 내밀었다. 부채였다. 의아한 표정으로 부채를 받아 든 양곤에게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문사가 부채는 필수라 하기에.”
“하하하.”
포천룡과 단소운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 마을에서 문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자신들에게 물었던 도소미가 기억난 탓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양곤은 그저 그들의 웃는 모습을 번갈아 볼 수밖에 없었다.
단소운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다가 한마디 던졌다.
“자넨, 복이 터졌구먼. 하하하.”
“도 소저, 이 포천룡은 마음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제 마음을 거절하시더니. 흑흑.”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우는 흉내를 내는 포천룡의 모습에 모두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 도소미는 별호에 어울리지 않게 살짝 붉어진 얼굴로 포천룡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가 장난으로 그러는 것을 알기에 물리적 충격은 가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도 소저.”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했다.
웃음이 가라앉자 양곤은 술병과 건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사는 게 이 모양이니 이해하게. 다음에는 내가 손님을 대접할 것을 좀 준비해 두겠네.”
양곤이 미안한 기색으로 말을 하자 다들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며 둘러앉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일 뿐이었다. 그때, 동네 아낙 중 한 명이 안으로 들어서며 입을 열었다.
“훈장님, 손님이 오셨다기에 먹을 것을 좀 가져왔습니다.”
아낙이 너무 적어 부끄럽다는 듯 멍게와 해삼을 건네고는 얼른 멀어져 갔다.
“고맙습니다.”
멀어지는 아낙의 뒤에 대고 인사를 한 양곤의 음성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자네, 이 마을에 유지일세그려. 어디 해삼 맛 좀 볼까나.”
싱싱한 해물을 보자마자 젓가락을 든 포천룡이 해삼을 입으로 가져갔다. 두 여인은 해삼이 징그럽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본 양곤이 해삼물이 담긴 그릇을 들어 올렸다.
“잠시만 기다리게. 내가 손질 좀 해 오겠네.”
사실 섬에 살면서 해산물을 많이 다뤄 본 터라 먹기 좋게 손질하는 것은 양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보기에 징그럽지 않게 잘게 토막 내어 깨끗한 접시에 담아 내어 왔다.
그사이에 단소운과 포천룡은 잔을 꺼내 술을 부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곤이 다시 내어 온 해삼과 멍게는 예쁘게 잘려져 보기에 좋았다. 하지만 좀 전에 본 해삼을 기억하는 두 여인은 그곳에 젓가락을 가져가지 않았다.
술이 두 순배가량 돌고 취기가 약간 오른 양곤이 슬며시 장난기가 돌아 입을 열었다.
“예로부터 해삼(海蔘)은 바다의 삼(蔘)이라고 불렀네. 그만큼 뛰어난 효능을 가졌다는 말일세. 특히 뼈를 튼튼하게 하는데 이는 무인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지. 해삼의 뼈 강화 작용이 어른의 뼈뿐만 아니라 ‘복중태아의 골격 형성’에도 미침을 뜻하니 임신부 보약으로 인삼 대신에 해삼을 써 왔다네. 임신부가 해삼을 먹고 낳은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는 그 뼈 굵기부터 차이가 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라네.”
포천룡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호! 정말인가?”
“뿐만 아니라네. 빈혈과 변비에도 효과가 크다네. 임신부가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하고 태원(胎元)이 든든하지 못하는 증후를 치료할 때는 몸을 보하는 팔물탕(八物湯) 중에서 인삼 대신에 응용하고, 여기에다가 사인(砂仁), 진피(陳皮)를 이용하면 태아와 임신부를 튼튼하게 해 주는 데 아주 좋다네. 이렇게 신기능(腎機能)을 왕성하게 하므로 계속 먹었을 때는 정력을 더해 주는 회. 춘. 효. 과를 얻을 수 있다네.”
양곤은 일부러 ‘회춘효과’, 즉 젊어진다는 말에 강조를 했다. 여인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더 어려 보이기를 원한다는 글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말을 마친 양곤은 은근슬쩍 두 여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두 여인은 젊어진다는 말에 혹했는지 먹고는 싶었지만, 아까 그 징그러웠던 모습이 떠올라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조금 더 냉정한 도소미가 먼저 젓가락을 가져가 해삼을 집어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처음에는 얼굴을 찌푸리던 그녀는 먹을 만했는지 젓가락이 오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은 여미려도 해삼을 한 점 입에 물었다. 도소미와 비슷한 과정을 거친 그녀의 젓가락도 바쁘게 움직였다.
두 여인은 먹느라 바빴지만, 그 모습을 보던 세 청년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일그러졌다. 참을성이 조금 부족한 포천룡이 마침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리자 나머지 두 청년도 웃음에 동참했다.
“하하하. 아이고, 배야.”
세 청년이 허리를 접으며 웃음을 터뜨리자 두 여인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양곤을 노려보았다.
“양곤 소협, 아까 했던 말이 사실이 아닌가요?”
“하하하, 아, 하하하, 아니오. 내 말은 한 점 거짓이 없는 말이오. 다만, 두 소저의 먹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너무 보기 좋아서 웃은 것뿐이오.”
나머지 두 청년도 서슬이 퍼런 두 여인의 표정을 보고는 웃음을 뚝 멈췄다. 갑자기 웃음을 멈춘 탓에 그들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나중에 아니라고 밝혀지면, 각오하세요.”
으름장을 놓은 두 여인은 조금 남은 해삼을 아까운 듯 바라보다가 잔을 들어 비웠다. 시절이 중추절(仲秋節)이 다가왔는지라 하늘은 푸르렀고 바람은 시원했다. 은근히 취기가 오른 다섯 청춘은 가만히 눈을 감고 불그스레한 그들의 얼굴을 부드럽게 간질이는 바람을 즐기며 한가롭고 평화로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해가 서산에 걸리자 그들은 자리를 파했다.
“내일 또 오겠네. 내일은 일찍 와서 이곳 주변에 무공을 수련할 장소가 있는지도 찾아봐야겠네. 연무장은 답답하거든.”
포천룡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저도 여기 근처에서 수련할 곳을 찾아봐야겠어요.”
여미려가 돌아가기 아쉬운 듯 주저하며 인사를 했다.
“내일 또 보세나.”
“안녕히 계세요, 양곤 소협.”
“조심해서 가게들.”
인사를 나눈 그들은 마을을 나서 한적한 곳에 이르러 신법을 펼쳐 부리나케 문파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그들은 가서 들어야 되는 잔소리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냈기에 후회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중간 즈음에서 포천룡과 헤어진 단소운과 사매들은 서둘러 보타문에 도착했다. 그들을 기다리는 이는 문에서 꼬장꼬장하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계율원주인 보타신니(普陀神尼)였다.
“수련은 안 하고 어딜 싸돌아다니다 이제 오는 게야?”
날카로운 고음으로 그들을 맞이한 보타신니가 데리고 간 곳은 검후(劍后) 요소령(謠小鈴)의 처소였다. 여미려가 검후의 직전제자였고, 단소운의 사부인 채운신니(彩雲神尼)와 도소미의 사부인 냉미랑(冷美狼)도 검후의 처소에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직전 제자들이 수련은 하지 않고 몰려다니며 놀기만 한다는 한탄을 하던 사부들이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문을 열고 나왔다.
보타신니에게 끌려온 제자들이 마치 도살장에 도착한 소마냥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편으로 안쓰럽기도 했지만, 수련에 게으른 제자들을 바르게 인도해야 할 사부의 처지에서 마냥 너그럽게만 대할 수 없었다.
“도대체 너희들은 정신이 있는 게냐, 아니면 없는 게냐! 어디서 무엇을 하느라 수련도 빼먹고 그리 싸돌아다니는 게냐?”
검후가 엄한 목소리로 그들을 질책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여미려가 고개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그렇지만, 좋은 벗을 만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우의를 다지느라 늦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도 남자라고 단소운이 수련을 빼먹은 이유를 밝혔다. 도소미는 표정 없는 얼굴로 서 있었고 그녀의 사부인 냉미랑도 표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장부가 핑계를 대는 것이냐?”
“아닙니다, 문주님.”
“어떤 벗을 만났기에 수련을 빼먹으면서도 만나고 싶었단 말이냐?”
평소 조용한 성격이라 큰소리 내지를 못하는 채운신니가 물었다.
“작은 어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양곤이라는 소협인데, 무공에 대한 식견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제자가 가지고 있던 초식 운용에 대한 문제도 그가 해결해 주었습……. 헙.”
양곤이 좋은 벗이라는 것을 설명하다가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하게 된 단소운이 서둘러 입을 막았지만, 일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내뱉은 말은 주워 담지 못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였다.
“뭐, 뭐라? 그게 무슨 말이냐. 본문의 무공을 타인에게 보여 줬단 말이냐?”
성격이 불같은 보타신니는 당장이라도 손을 쓸 듯 화를 내며 단소운을 다그쳤다.
“저…… 그게 아니라, 그 소협은 사형의 무공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사형은 무공을 보여 준 적이 없었습니다.”
여미려가 단소운이 궁지에 몰리자 서둘러 구원에 나섰다.
“네 말은 그 소협이 너희가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본문의 무공을 안다는 말이냐?”
놀란 검후가 여미려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사형의 무공만 아니라 위타문 소문주인 절강일도 포천룡 소협의 고민도 해결해 주었어요.”
사부의 음성에서 자신들에 대한 질책보다는 양곤에 대한 호기심이 더 많이 느껴진 여미려가 속으로 다행의 한숨을 쉬며 포천룡을 들먹였다. 그러자 표정 없이 서 있던 냉미랑이 도소미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이냐?”
“네.”
모인 사부들은 도소미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여미려와 단소운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은 물러가 반성하고 있어라.”
검후가 최종 판결을 내리자 제자들이 혼찌검이 날 거라 기대했던 보타신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네.”
세 제자들은 혹시 결정이 바뀔세라 서둘러 인사하고 자신들의 처소로 돌아갔다. 남은 사부들과 보타신니는 검후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자리에 앉은 그녀들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아이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확한 연유를 조사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채운신니의 말이 맞습니다.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검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무래도 내일 아이들을 앞세워 그 소협을 한번 만나 봐야겠습니다.”
검후는 침중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보타문의 무공이 어떤 경로를 통해 타인에게 알려졌는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자신들의 독문무공이 모두 다른 사람에게 밝혀진다면, 보타문의 무공은 약점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문파의 위세가 줄어들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가볍지 않은 문제였다.
특히나 각 문파들이 자신들의 성세를 넓히려 애를 쓰는 춘추 전국 시대와 같은 상황에서는 문파의 절기가 유출된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아는 세 사부와 보타신니의 한숨 속에 보타문의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한편.
촌장 집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온 양곤은 자신의 방에서 아침에 오수주를 외우며 느꼈던 것을 곰곰이 되씹고 있었다.
‘그게 어떤 현상일까? 병이 생긴 것은 분명 아니고, 그 좁쌀들에게서 오신수(五神獸)의 기운이 느껴진 듯도 한데…….’
천혜지체인 양곤도 쉽게 깨닫지 못했다. 자신에게 선술을 가르쳐 준 광극 할아버지도 그에 대한 말은 한 적이 없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좋은 것임에는 분명했다. 오장에 있던 좁쌀들은 오행의 기운과 연관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단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뿐이지 알아내지 못할 이유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당장 오수주를 외우며 명상에 잠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술기운이 남아 있어 명상을 하기보다는 잠을 자는 것이 나았다.
‘에이, 내일 다시 오수주를 수련하다 보면 뭔가 알 수 있겠지. 잠이나 자자.’
눈을 감은 양광의 깜깜한 의식 속에 여미려의 미소 짓는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은 양곤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심마(心魔)다. 난 심마에 빠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