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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아침 일찍 여미려는 사부에게 불려 갔다. 사부인 검후는 외출 준비를 모두 마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후는 아무런 표시도 없는 간편한 경장 차림이었다. 뛰어난 미모를 가진 검후에게는 소박한 경장도 화려한 비단옷처럼 잘 어울렸다.
“사부님, 편히 주무셨습니까?”
“너도 잘 잤느냐?”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내가 직접 그 소협을 만나 봐야겠다. 안내하거라.”
“네.”
여미려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오늘도 수련을 빼먹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았다. 양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더구나 어머니로 생각하는 검후와 단둘이 나가는 것이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사부와 양곤이 만나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자신과 사형이 이야기한 모든 것에는 조금도 거짓이 없기 때문이었다.
검후와 함께 뭍으로 가는 배를 타러 가며 여미려는 어린아이처럼 깡충거렸다. 절기의 유출 문제로 마음이 무거웠던 검후도 여미려의 마음을 짐작하는지라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보았다. 배에서 내린 두 사제는 양곤이 머무는 어촌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소협이 무공을 펼칠 줄 아느냐?”
자상한 검후의 음성에 여미려는 그가 무공을 할 줄 아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 한 번도 무공을 펼치는 것은 본 적이 없어요. 무공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 것을 보면 무공도 높을 것이라 생각되기도 하는데……. 에이, 이제 겨우 세 번 만났는데요.”
한 번을 만나도 무공의 경지가 비슷하면 여미려가 알 수 있을 터인데 모른다는 것은 아마 그녀보다 월등히 높은 경지를 이루었거나 무공을 이론적으로만 아는 서생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 검후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가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간에 도착할 텐데요?”
“아이들을 가르치다니?”
“네. 동네 훈장님이거든요.”
“그래? 음. 언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끝나느냐?”
“오시(午時)에 마치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럼 오시까지 기다렸다 그를 만나자꾸나.”
“네. 마을 부근에 가서 잠시 쉬다가 그를 만나러 가요.”
한적한 곳에 이른 사제는 신법을 발휘해 바람처럼 달려갔다. 진시(辰時)경에 마을 부근에 다다른 사제는 마을이 훤히 보이는 언덕으로 가 그늘에 자리 잡고 앉았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해변에는 조개와 각종 해산물을 채집하는 아낙들, 탁 트인 바다 위에 갈매기가 한가로이 노니는 평화로운 모습이 보였다. 두 사제는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풍경에 모든 시름이 다 날아가는 기분을 즐겼다. 짓궂은 바람이 흩트려 놓은 머릿결을 쓸어 올리던 검후가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수련이 그렇게 힘들더냐?”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당황하던 여미려는 그동안 자신이 수련을 빼먹고 밖으로 돌았던 사실을 다 아는 사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나도 너만 할 때 수련하기 싫어서 꾀병을 많이 피웠단다. 나중에는 쫓아온 사부님께 잡혀간 적도 있었지. 훗.”
지난 일이 생각났던지 검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여미려는 처음으로 듣는 옛이야기에 호기심 어린 눈빛만 반짝였다. 검후의 말이 이어졌다.
“미려야, 우리는 모두 태어나면서 각자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는 것 같구나. 그 할 일을 하려면 그 앞의 일을 다 마쳐야 다음 일을 할 수 있는데, 앞의 일을 다 마치지 못하면 다음 일을 할 수가 없단다. 그렇게 할 일이 자꾸 미루어지면 나중에 받을 수 있는 행복이 자꾸 미루어지고 잘못하면 행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단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라는 말은 용기를 주기 위해 하는 말이지 결코 실제로 늦지 않은 것은 아니란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제자가 우둔하여 확실하게 알지 못하겠습니다.”
“나는 총명하고 착한 너를 제자로 삼아 가르치는 것이 큰 행복이고 기쁨이란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지. 이 행복을 누리기 위해 내가 했어야 했던 일은 내 무공을 너를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수련하는 일이었다. 만약 내가 너를 가르칠 수 있는 만큼 수련하지 못했다면 너를 제자로 삼지 못했을 것이고, 이런 행복을 누릴 수도 없었을 것이야. 그러니 앞의 했어야 하는 일이 지금 할 일의 준비인 셈이지. 준비가 없으면 할 일을 못하고, 할 일을 못하면 행복도 없단다. 지금 하는 일은 더 큰 행복을 얻기 위한 준비이지. 이제 알겠느냐?”
여미려는 사부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이 지금 늘지 않는 무공이라 수련을 게을리 하면 앞으로 올 행복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네. 사부님, 이제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사매! 힉!”
여미려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달려온 단소운은 검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딸꾹질했다.
“안, 안녕하십니까, 문주님.”
“안녕하십니까, 문주님.”
같이 달려온 도소미도 검후에게 고개를 숙였다. 당황한 사형의 모습이 보기 좋았던지 여미려가 생글거리며 검후를 돌아보았다.
“사형도 행복을 놓칠 수 있겠어요. 그렇죠? 사부님.”
“호호호. 그럴 수도 있겠구나.”
두 사제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던 단소운과 도소미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어리둥절했다.
“그나저나 너희들은 이곳에 무슨 일이냐?”
“네, 문주님. 사실 문에서 수련하면 마음이 답답해 이 근처에 수련할 곳이 있나 찾아보러 왔습니다.”
단소운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도소미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같은 목적으로 왔다는 표현이었다. 검후는 냉면옥수라 불리는 도소미가 덤벙대는 단소운과 항상 같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는 도소미의 마음을 대충 짐작했다.
“알았다. 그런데 네 사부께는 말씀드리고 온 것이냐?”
“그, 그게.”
“다음부터는 사부께 말씀은 드리고 행동하도록 해라.”
“네, 문주님.”
별다른 질책이 담기지 않은 자상한 목소리의 검후에게 감사하며 두 사람은 자리를 떠났다. 아무래도 그들은 문주와 함께 있는 것이 편하지 않을 터였다.
“두 사람이 잘 어울려요. 그렇죠?”
“그래. 잘 어울리는구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사제는 오시가 된 듯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가 보자꾸나.”
“네, 사부님.”
양곤은 아이들이 글 읽는 소리를 눈을 감고 즐기다가 공부를 마치는 시간이 다 되자 입을 열었다.
“그만.”
아이들이 입을 다물고 자신들의 스승을 쳐다보았다.
“다들 잘 읽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오너라.”
“네, 스승님.”
“수고하셨어요, 스승님.”
“안녕히 계세요, 스승님.”
종달새마냥 지저귄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자 양곤은 그제야 조용해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구나 생각하며 서책을 덮었다. 맑은 하늘은 한없이 높았고 간혹 보이는 솜털 같은 하얀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가로움을 즐겼다.
느껴지는 인기척에 시선을 싸리문으로 돌린 양곤은 벌떡 일어섰다. 아름다운 중년의 여인과 여미려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양곤 소협.”
“안녕하십니까, 여 소저. 그런데 이분은…….”
“제 사부님이신 검후세요.”
“아! 네에. 안녕하십니까. 양곤이라고 합니다.”
“검후라네.”
“어서 드시지요.”
탁자에 앉은 두 여인에게 여미려가 자신에게 선물한 차를 내온 양곤이 입을 열었다.
“대접할 것이 이것뿐이라 죄송합니다.”
“아니네. 훌륭한 차구만.”
“미리 기별을 주셨으면 대접할 것을 좀 준비해 둘 것인데…….”
“괜찮아요. 소협, 저희가 불쑥 찾아온 것인데요.”
세 사람은 침묵을 지키며 차가 주는 향과 맛을 즐겼다. 검후는 처음 보는 청년이 눈에 많이 익었다. 하지만 보타문의 무공을 아는 내막을 먼저 밝혀야 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듣자 하니 자네가 단소운의 무공을 손봐 주었다던데 사실인가?”
“손봐 주다니요?”
“단소운의 초식을 자네가 풀어 가르쳤다고 들었네.”
“네에. 그 일 말씀이시군요. 초식 운용에 조금 문제가 있다고 해서 작은 조언했을 뿐입니다.”
“자네가 가르쳐 주지도 않은 그의 초식을 어떻게 아는가?”
“할아버지께 배운 것들 중에 각 파의 무공에 관한 것도 있었습니다. 거기다 의술의 지식을 조금 가미해 해석한 것이지요.”
“그래, 단소운의 초식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내게 말해 줄 수 있겠는가?”
검후의 질문에 양곤은 여미려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리 말하지 않았냐고 묻는 의미였다.
“자세하게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저도 잘 모르는 내용이라…….”
양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게 제가 아는 바로는…….”
양곤은 단소운에게 했던 설명을 다시 검후에게 이야기했다. 검후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보법에 흐르는 기운과 초식을 펼치기 위해 내기를 도인(導引)하는 경맥에 대한 설명과 내기가 흐르는 경맥의 상생상극 원리까지 세세한 부분을 지적하는 양곤의 설명은 검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보타문의 무공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그토록 자세하게 초식과 진기 운용을 설명할 수 없을 터였다. 실제로 자신도 단소운의 뇌영필법(雷影筆法)에 대해 양곤만큼 알지 못했다. 필시 보타문의 무공이 외부로 흘러 나간 것이 분명했다. 문주로서 이 문제는 반드시 밝혀야 하는 것이었다.
“자네의 설명을 들을수록 자네가 보타문의 무공을 아는 것이라 확신을 하게 되네. 자네가 알게 된 경위를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오해의 소지가 많을 것이야.”
“말씀드렸듯이 조부님들께서 제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조부님들의 함자를 알려 줄 수 있겠나?”
“죄송합니다. 세상에 알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은거기인들 중에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들이 있었고 보타문과 어떤 연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신중해야 할 일이었다.
“단소운이 없으니 미안하지만, 자네가 시범을 보여 줄 수 있겠나?”
무공을 펼칠 줄 아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기 힘들었던 검후는 양곤에게 무공의 시범을 부탁했다.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무공을 펼칠 수가 없습니다. 어렸을 때 단전이 깨져 심법을 익히지 못했습니다. 뇌영필법의 동작들 중 많은 부분이 내공이 없으면 취할 수 없는 동작이라 시범을 보이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양곤이 정중하게 사죄를 했지만, 무림의 속임수를 많이 경험했던 검후는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다만, 여미려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그런 줄 몰랐어요.”
“아닙니다. 저는 무림인이 아니니 내공이 없어도 전혀 불편함이 없습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해맑은 웃음으로 양곤이 여미려에게 대답했다.
양곤의 말을 시험해 보리라 생각한 검후는 내력을 끌어올려 양곤에게 손을 흔들어 진기를 뿜어냈다. 검후의 진기를 느낄 수 있었던 양곤은 오수주를 외우면서 보았던 기운과 비슷한 기운이 검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자 당황했다. 오수주의 기운이 자신의 몸에 들어올 때 항상 상쾌한 기분을 느꼈지만, 검후의 진기는 그에게 위험스럽게 보였다.
5화 검후(劍后)
할아버지들이 무공을 시범 보이며 위험한 것이라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몸으로 직접 공격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피할 틈도 없이 검후의 공격이 양곤의 몸에 격중하자 강한 충격을 받은 그는 입에서 붉은 피를 토하며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튕겨져 갔다.
펑―
“큭.”
꽈당―
검후는 자신이 기를 뿜자 양곤이 눈을 빛내는 것을 보고 그가 무공을 익혔다 생각하고 끝까지 자신의 공격을 거두지 않았었다. 그러다 양곤이 뒤로 피를 뿜으며 튕겨 나가자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공을 아는 듯한 그가 내상을 입을 정도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방어를 하지 않고 자신을 속이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 내공을 수련하지 않은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가 쓰러진 것이 사부의 시험 때문임을 깨달은 여미려는 쏜살같이 쓰러진 양곤에게 다가가 그의 상세를 살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으윽.”
“미, 미안해요, 소협.”
“왜?”
상체를 일으킨 양곤은 검후를 향해 의문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그의 입가에는 피가 흘렀고 가슴은 빠개지는 듯 통증이 느껴졌다.
“내상을 입혀 미안하네. 나는 자네가 진정으로 내공이 있는지 시험해 보고자 했었네. 내공이 없으면 내가 펼친 기운을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자네가 눈치를 챈 듯해 중도에 거두지 않았었네. 내공이 없다면 어떻게 내가 기운을 뿜었을 때 알 수 있었는가?”
여전히 양곤을 확실하게 믿지 못하는 검후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 쿨럭, 그랬군요.”
겨우 자세를 바로 한 양곤이 일어서서 다시 검후의 앞에 와 앉았다. 무공을 모르는 이에게는 제법 큰 타격이었을 텐데 몸을 움직이는 양곤을 보던 검후의 눈빛이 반짝였다. 여미려는 내내 그의 상세를 살피며 부축했다.
“쿨럭. 저는 기운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검후께서 기운을 뿜으실 때 알았던 것이고요. 그러나 그 기운이 저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사람을 상하게 하는 기운을 처음 경험했거든요. 제 말이 의심스러우시면 제 몸을 살펴보셔도 좋습니다.”
양곤은 서슴없이 소매를 걷고 검후에게 팔을 내밀었다.
“실례하네.”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검후는 사양하지 않고 양곤의 맥문을 잡고 기운을 흘려 넣었다. 그의 몸에서는 내공을 수련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더구나 그의 말대로 단전이 완전히 깨져 존재했었다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기운을 거둔 검후가 포권을 하며 정중히 사과했다.
“미안하네. 무림이 하도 험하다 보니 내가 너무 심했네.”
“괜찮습니다.”
“사부님, 처음부터 이렇게 진맥하셨으면 소협이 내상을 입지 않아도 됐잖아요.”
여미려가 원망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림에서 자신의 맥문을 남에게 쉽게 내어 준다더냐? 맥문을 내어 주면 상대의 기운이 내 몸속을 마음대로 주무를 텐데. 어느 무인이 선뜻 내주겠느냐. 그래서 처음부터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리 등을 돌리고 앉게.”
검후의 목소리가 자상하게 변해 양곤에게 전해졌다.
“네.”
검후의 음색에서 자신에게 이로운 일을 할 듯 느껴진 양곤은 주저 없이 등을 돌리고 앉았다. 검후의 손이 느껴지고 그 손을 통해 따뜻하고 청량한 기운이 흘러들어 왔다. 그 기운이 자신의 경맥을 타고 돌자 느껴지던 통증이 사라지고 한결 부드러워졌다. 기운이 자신의 전신을 돌고 검후의 손으로 돌아가자 등에 있던 손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 양곤이 몸을 돌려 바로 앉았다.
“감사합니다.”
“아니네. 내가 소협에게 내상을 입힌 것이니 감사할 필요가 없네.”
“고마워요, 사부님.”
“넌 또 뭐가 고맙냐? 너를 치료한 것도 아닌데?”
“그, 그래도…….”
검후의 가벼운 농이 던져지고 여미려는 당황해 약간 붉어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분위기는 부드럽게 풀려졌다.
“사실 외인이 문파의 무공을 안다는 것은 큰 문제네. 문파의 독문절기가 다른 이에게 퍼져 나가면, 그 무공의 약점과 경로가 다 드러날 것이고, 그 무공에서 나오는 무위는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네. 그래서 모든 무림문파들은 절기의 유출을 엄격히 금하고 있네. 유출된 절기를 회수하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감내한다네. 또한 무림의 역사를 보면 유출된 절기로 음모를 꾸미는 나쁜 무리들도 많았었네. 문파의 절기는 그토록 중요한 것이네. 내가 오늘 온 것도 보타문의 절기가 어떻게 유출된 것인지 확인하고 싶은 이유에서였네.”
“네, 그렇겠군요.”
“자네를 보아하니 전혀 사심이 없는 인물로 보여 내 이번 일은 없던 걸로 덮겠네. 그러나 자네는 앞으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데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일세.”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자네 다른 무공도 아는 게 있는가?”
“보타문의 무공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리 문의 무공은 물론이고 다른 문파의 무공도 말일세.”
“음. 대답하기 곤란한데요.”
“왜요?”
여미려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검후께서 제 능력을 드러내지 말라 하셨잖습니까?”
“호호호. 그래도 기왕 알게 되었으니 한번 말해 보시게.”
“제법 많은 무공을 알고 있습니다.”
양곤의 대답에 눈이 커진 검후는 입을 딱 벌렸다. 단소운의 무공을 아는 정도로 다른 무공도 안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양곤은 자신의 몸조차 보호하지 못하는 백면서생이 아닌가. 이익에 눈이 먼 무림인들이 알면 분명 쟁탈전이 벌어질 일이었다.
“사실인가?”
겨우 신색을 회복한 검후가 다급히 물었다.
“네.”
“세상에…….”
여미려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자신은 겨우 몇 가지 되지도 않는 무공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지지부진하고 있는데 양곤은 많은 무공을 깊이 있게 안다고 하지 않는가. 양곤이 새삼 다르게 보인 그녀는 눈빛을 반짝거렸다.
“사실이라면, 정말 조심해야 하네. 마교나 사파가 알게 되면, 소협의 안위는 바람 앞의 등불같이 되네.”
“명심하겠습니다.”
처음 무림에 나온 양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그저 남을 돕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지 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자네가 이곳에 머무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듯하네. 혹시 누가 자네의 능력을 알아차리면 이곳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될 것이네. 보타문으로 가세. 내가 자네를 보호해 주겠네.”
“네. 그렇기도 하군요. 하지만 아이들에게 천자문이라도 완전히 가르치고 떠날 생각입니다. 꼭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알았네. 조심하게. 내가 특별히 우리 문의 무인들을 이곳에 보내 자네와 마을을 지키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게도 생각이 있으니 신경 쓰실 필요 없으십니다.”
자신이 조금 신경 쓰면 되겠기에 검후의 진심이 담긴 마음만 받아들였다.
아침 일찍 여미려는 사부에게 불려 갔다. 사부인 검후는 외출 준비를 모두 마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후는 아무런 표시도 없는 간편한 경장 차림이었다. 뛰어난 미모를 가진 검후에게는 소박한 경장도 화려한 비단옷처럼 잘 어울렸다.
“사부님, 편히 주무셨습니까?”
“너도 잘 잤느냐?”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내가 직접 그 소협을 만나 봐야겠다. 안내하거라.”
“네.”
여미려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오늘도 수련을 빼먹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았다. 양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더구나 어머니로 생각하는 검후와 단둘이 나가는 것이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사부와 양곤이 만나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자신과 사형이 이야기한 모든 것에는 조금도 거짓이 없기 때문이었다.
검후와 함께 뭍으로 가는 배를 타러 가며 여미려는 어린아이처럼 깡충거렸다. 절기의 유출 문제로 마음이 무거웠던 검후도 여미려의 마음을 짐작하는지라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보았다. 배에서 내린 두 사제는 양곤이 머무는 어촌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소협이 무공을 펼칠 줄 아느냐?”
자상한 검후의 음성에 여미려는 그가 무공을 할 줄 아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 한 번도 무공을 펼치는 것은 본 적이 없어요. 무공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 것을 보면 무공도 높을 것이라 생각되기도 하는데……. 에이, 이제 겨우 세 번 만났는데요.”
한 번을 만나도 무공의 경지가 비슷하면 여미려가 알 수 있을 터인데 모른다는 것은 아마 그녀보다 월등히 높은 경지를 이루었거나 무공을 이론적으로만 아는 서생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 검후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가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간에 도착할 텐데요?”
“아이들을 가르치다니?”
“네. 동네 훈장님이거든요.”
“그래? 음. 언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끝나느냐?”
“오시(午時)에 마치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럼 오시까지 기다렸다 그를 만나자꾸나.”
“네. 마을 부근에 가서 잠시 쉬다가 그를 만나러 가요.”
한적한 곳에 이른 사제는 신법을 발휘해 바람처럼 달려갔다. 진시(辰時)경에 마을 부근에 다다른 사제는 마을이 훤히 보이는 언덕으로 가 그늘에 자리 잡고 앉았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해변에는 조개와 각종 해산물을 채집하는 아낙들, 탁 트인 바다 위에 갈매기가 한가로이 노니는 평화로운 모습이 보였다. 두 사제는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풍경에 모든 시름이 다 날아가는 기분을 즐겼다. 짓궂은 바람이 흩트려 놓은 머릿결을 쓸어 올리던 검후가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수련이 그렇게 힘들더냐?”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당황하던 여미려는 그동안 자신이 수련을 빼먹고 밖으로 돌았던 사실을 다 아는 사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나도 너만 할 때 수련하기 싫어서 꾀병을 많이 피웠단다. 나중에는 쫓아온 사부님께 잡혀간 적도 있었지. 훗.”
지난 일이 생각났던지 검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여미려는 처음으로 듣는 옛이야기에 호기심 어린 눈빛만 반짝였다. 검후의 말이 이어졌다.
“미려야, 우리는 모두 태어나면서 각자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는 것 같구나. 그 할 일을 하려면 그 앞의 일을 다 마쳐야 다음 일을 할 수 있는데, 앞의 일을 다 마치지 못하면 다음 일을 할 수가 없단다. 그렇게 할 일이 자꾸 미루어지면 나중에 받을 수 있는 행복이 자꾸 미루어지고 잘못하면 행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단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라는 말은 용기를 주기 위해 하는 말이지 결코 실제로 늦지 않은 것은 아니란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제자가 우둔하여 확실하게 알지 못하겠습니다.”
“나는 총명하고 착한 너를 제자로 삼아 가르치는 것이 큰 행복이고 기쁨이란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지. 이 행복을 누리기 위해 내가 했어야 했던 일은 내 무공을 너를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수련하는 일이었다. 만약 내가 너를 가르칠 수 있는 만큼 수련하지 못했다면 너를 제자로 삼지 못했을 것이고, 이런 행복을 누릴 수도 없었을 것이야. 그러니 앞의 했어야 하는 일이 지금 할 일의 준비인 셈이지. 준비가 없으면 할 일을 못하고, 할 일을 못하면 행복도 없단다. 지금 하는 일은 더 큰 행복을 얻기 위한 준비이지. 이제 알겠느냐?”
여미려는 사부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이 지금 늘지 않는 무공이라 수련을 게을리 하면 앞으로 올 행복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네. 사부님, 이제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사매! 힉!”
여미려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달려온 단소운은 검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딸꾹질했다.
“안, 안녕하십니까, 문주님.”
“안녕하십니까, 문주님.”
같이 달려온 도소미도 검후에게 고개를 숙였다. 당황한 사형의 모습이 보기 좋았던지 여미려가 생글거리며 검후를 돌아보았다.
“사형도 행복을 놓칠 수 있겠어요. 그렇죠? 사부님.”
“호호호. 그럴 수도 있겠구나.”
두 사제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던 단소운과 도소미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어리둥절했다.
“그나저나 너희들은 이곳에 무슨 일이냐?”
“네, 문주님. 사실 문에서 수련하면 마음이 답답해 이 근처에 수련할 곳이 있나 찾아보러 왔습니다.”
단소운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도소미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같은 목적으로 왔다는 표현이었다. 검후는 냉면옥수라 불리는 도소미가 덤벙대는 단소운과 항상 같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는 도소미의 마음을 대충 짐작했다.
“알았다. 그런데 네 사부께는 말씀드리고 온 것이냐?”
“그, 그게.”
“다음부터는 사부께 말씀은 드리고 행동하도록 해라.”
“네, 문주님.”
별다른 질책이 담기지 않은 자상한 목소리의 검후에게 감사하며 두 사람은 자리를 떠났다. 아무래도 그들은 문주와 함께 있는 것이 편하지 않을 터였다.
“두 사람이 잘 어울려요. 그렇죠?”
“그래. 잘 어울리는구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사제는 오시가 된 듯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가 보자꾸나.”
“네, 사부님.”
양곤은 아이들이 글 읽는 소리를 눈을 감고 즐기다가 공부를 마치는 시간이 다 되자 입을 열었다.
“그만.”
아이들이 입을 다물고 자신들의 스승을 쳐다보았다.
“다들 잘 읽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오너라.”
“네, 스승님.”
“수고하셨어요, 스승님.”
“안녕히 계세요, 스승님.”
종달새마냥 지저귄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자 양곤은 그제야 조용해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구나 생각하며 서책을 덮었다. 맑은 하늘은 한없이 높았고 간혹 보이는 솜털 같은 하얀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가로움을 즐겼다.
느껴지는 인기척에 시선을 싸리문으로 돌린 양곤은 벌떡 일어섰다. 아름다운 중년의 여인과 여미려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양곤 소협.”
“안녕하십니까, 여 소저. 그런데 이분은…….”
“제 사부님이신 검후세요.”
“아! 네에. 안녕하십니까. 양곤이라고 합니다.”
“검후라네.”
“어서 드시지요.”
탁자에 앉은 두 여인에게 여미려가 자신에게 선물한 차를 내온 양곤이 입을 열었다.
“대접할 것이 이것뿐이라 죄송합니다.”
“아니네. 훌륭한 차구만.”
“미리 기별을 주셨으면 대접할 것을 좀 준비해 둘 것인데…….”
“괜찮아요. 소협, 저희가 불쑥 찾아온 것인데요.”
세 사람은 침묵을 지키며 차가 주는 향과 맛을 즐겼다. 검후는 처음 보는 청년이 눈에 많이 익었다. 하지만 보타문의 무공을 아는 내막을 먼저 밝혀야 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듣자 하니 자네가 단소운의 무공을 손봐 주었다던데 사실인가?”
“손봐 주다니요?”
“단소운의 초식을 자네가 풀어 가르쳤다고 들었네.”
“네에. 그 일 말씀이시군요. 초식 운용에 조금 문제가 있다고 해서 작은 조언했을 뿐입니다.”
“자네가 가르쳐 주지도 않은 그의 초식을 어떻게 아는가?”
“할아버지께 배운 것들 중에 각 파의 무공에 관한 것도 있었습니다. 거기다 의술의 지식을 조금 가미해 해석한 것이지요.”
“그래, 단소운의 초식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내게 말해 줄 수 있겠는가?”
검후의 질문에 양곤은 여미려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리 말하지 않았냐고 묻는 의미였다.
“자세하게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저도 잘 모르는 내용이라…….”
양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게 제가 아는 바로는…….”
양곤은 단소운에게 했던 설명을 다시 검후에게 이야기했다. 검후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보법에 흐르는 기운과 초식을 펼치기 위해 내기를 도인(導引)하는 경맥에 대한 설명과 내기가 흐르는 경맥의 상생상극 원리까지 세세한 부분을 지적하는 양곤의 설명은 검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보타문의 무공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그토록 자세하게 초식과 진기 운용을 설명할 수 없을 터였다. 실제로 자신도 단소운의 뇌영필법(雷影筆法)에 대해 양곤만큼 알지 못했다. 필시 보타문의 무공이 외부로 흘러 나간 것이 분명했다. 문주로서 이 문제는 반드시 밝혀야 하는 것이었다.
“자네의 설명을 들을수록 자네가 보타문의 무공을 아는 것이라 확신을 하게 되네. 자네가 알게 된 경위를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오해의 소지가 많을 것이야.”
“말씀드렸듯이 조부님들께서 제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조부님들의 함자를 알려 줄 수 있겠나?”
“죄송합니다. 세상에 알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은거기인들 중에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들이 있었고 보타문과 어떤 연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신중해야 할 일이었다.
“단소운이 없으니 미안하지만, 자네가 시범을 보여 줄 수 있겠나?”
무공을 펼칠 줄 아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기 힘들었던 검후는 양곤에게 무공의 시범을 부탁했다.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무공을 펼칠 수가 없습니다. 어렸을 때 단전이 깨져 심법을 익히지 못했습니다. 뇌영필법의 동작들 중 많은 부분이 내공이 없으면 취할 수 없는 동작이라 시범을 보이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양곤이 정중하게 사죄를 했지만, 무림의 속임수를 많이 경험했던 검후는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다만, 여미려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그런 줄 몰랐어요.”
“아닙니다. 저는 무림인이 아니니 내공이 없어도 전혀 불편함이 없습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해맑은 웃음으로 양곤이 여미려에게 대답했다.
양곤의 말을 시험해 보리라 생각한 검후는 내력을 끌어올려 양곤에게 손을 흔들어 진기를 뿜어냈다. 검후의 진기를 느낄 수 있었던 양곤은 오수주를 외우면서 보았던 기운과 비슷한 기운이 검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자 당황했다. 오수주의 기운이 자신의 몸에 들어올 때 항상 상쾌한 기분을 느꼈지만, 검후의 진기는 그에게 위험스럽게 보였다.
5화 검후(劍后)
할아버지들이 무공을 시범 보이며 위험한 것이라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몸으로 직접 공격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피할 틈도 없이 검후의 공격이 양곤의 몸에 격중하자 강한 충격을 받은 그는 입에서 붉은 피를 토하며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튕겨져 갔다.
펑―
“큭.”
꽈당―
검후는 자신이 기를 뿜자 양곤이 눈을 빛내는 것을 보고 그가 무공을 익혔다 생각하고 끝까지 자신의 공격을 거두지 않았었다. 그러다 양곤이 뒤로 피를 뿜으며 튕겨 나가자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공을 아는 듯한 그가 내상을 입을 정도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방어를 하지 않고 자신을 속이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 내공을 수련하지 않은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가 쓰러진 것이 사부의 시험 때문임을 깨달은 여미려는 쏜살같이 쓰러진 양곤에게 다가가 그의 상세를 살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으윽.”
“미, 미안해요, 소협.”
“왜?”
상체를 일으킨 양곤은 검후를 향해 의문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그의 입가에는 피가 흘렀고 가슴은 빠개지는 듯 통증이 느껴졌다.
“내상을 입혀 미안하네. 나는 자네가 진정으로 내공이 있는지 시험해 보고자 했었네. 내공이 없으면 내가 펼친 기운을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자네가 눈치를 챈 듯해 중도에 거두지 않았었네. 내공이 없다면 어떻게 내가 기운을 뿜었을 때 알 수 있었는가?”
여전히 양곤을 확실하게 믿지 못하는 검후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 쿨럭, 그랬군요.”
겨우 자세를 바로 한 양곤이 일어서서 다시 검후의 앞에 와 앉았다. 무공을 모르는 이에게는 제법 큰 타격이었을 텐데 몸을 움직이는 양곤을 보던 검후의 눈빛이 반짝였다. 여미려는 내내 그의 상세를 살피며 부축했다.
“쿨럭. 저는 기운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검후께서 기운을 뿜으실 때 알았던 것이고요. 그러나 그 기운이 저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사람을 상하게 하는 기운을 처음 경험했거든요. 제 말이 의심스러우시면 제 몸을 살펴보셔도 좋습니다.”
양곤은 서슴없이 소매를 걷고 검후에게 팔을 내밀었다.
“실례하네.”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검후는 사양하지 않고 양곤의 맥문을 잡고 기운을 흘려 넣었다. 그의 몸에서는 내공을 수련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더구나 그의 말대로 단전이 완전히 깨져 존재했었다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기운을 거둔 검후가 포권을 하며 정중히 사과했다.
“미안하네. 무림이 하도 험하다 보니 내가 너무 심했네.”
“괜찮습니다.”
“사부님, 처음부터 이렇게 진맥하셨으면 소협이 내상을 입지 않아도 됐잖아요.”
여미려가 원망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림에서 자신의 맥문을 남에게 쉽게 내어 준다더냐? 맥문을 내어 주면 상대의 기운이 내 몸속을 마음대로 주무를 텐데. 어느 무인이 선뜻 내주겠느냐. 그래서 처음부터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리 등을 돌리고 앉게.”
검후의 목소리가 자상하게 변해 양곤에게 전해졌다.
“네.”
검후의 음색에서 자신에게 이로운 일을 할 듯 느껴진 양곤은 주저 없이 등을 돌리고 앉았다. 검후의 손이 느껴지고 그 손을 통해 따뜻하고 청량한 기운이 흘러들어 왔다. 그 기운이 자신의 경맥을 타고 돌자 느껴지던 통증이 사라지고 한결 부드러워졌다. 기운이 자신의 전신을 돌고 검후의 손으로 돌아가자 등에 있던 손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 양곤이 몸을 돌려 바로 앉았다.
“감사합니다.”
“아니네. 내가 소협에게 내상을 입힌 것이니 감사할 필요가 없네.”
“고마워요, 사부님.”
“넌 또 뭐가 고맙냐? 너를 치료한 것도 아닌데?”
“그, 그래도…….”
검후의 가벼운 농이 던져지고 여미려는 당황해 약간 붉어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분위기는 부드럽게 풀려졌다.
“사실 외인이 문파의 무공을 안다는 것은 큰 문제네. 문파의 독문절기가 다른 이에게 퍼져 나가면, 그 무공의 약점과 경로가 다 드러날 것이고, 그 무공에서 나오는 무위는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네. 그래서 모든 무림문파들은 절기의 유출을 엄격히 금하고 있네. 유출된 절기를 회수하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감내한다네. 또한 무림의 역사를 보면 유출된 절기로 음모를 꾸미는 나쁜 무리들도 많았었네. 문파의 절기는 그토록 중요한 것이네. 내가 오늘 온 것도 보타문의 절기가 어떻게 유출된 것인지 확인하고 싶은 이유에서였네.”
“네, 그렇겠군요.”
“자네를 보아하니 전혀 사심이 없는 인물로 보여 내 이번 일은 없던 걸로 덮겠네. 그러나 자네는 앞으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데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일세.”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자네 다른 무공도 아는 게 있는가?”
“보타문의 무공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리 문의 무공은 물론이고 다른 문파의 무공도 말일세.”
“음. 대답하기 곤란한데요.”
“왜요?”
여미려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검후께서 제 능력을 드러내지 말라 하셨잖습니까?”
“호호호. 그래도 기왕 알게 되었으니 한번 말해 보시게.”
“제법 많은 무공을 알고 있습니다.”
양곤의 대답에 눈이 커진 검후는 입을 딱 벌렸다. 단소운의 무공을 아는 정도로 다른 무공도 안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양곤은 자신의 몸조차 보호하지 못하는 백면서생이 아닌가. 이익에 눈이 먼 무림인들이 알면 분명 쟁탈전이 벌어질 일이었다.
“사실인가?”
겨우 신색을 회복한 검후가 다급히 물었다.
“네.”
“세상에…….”
여미려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자신은 겨우 몇 가지 되지도 않는 무공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지지부진하고 있는데 양곤은 많은 무공을 깊이 있게 안다고 하지 않는가. 양곤이 새삼 다르게 보인 그녀는 눈빛을 반짝거렸다.
“사실이라면, 정말 조심해야 하네. 마교나 사파가 알게 되면, 소협의 안위는 바람 앞의 등불같이 되네.”
“명심하겠습니다.”
처음 무림에 나온 양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그저 남을 돕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지 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자네가 이곳에 머무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듯하네. 혹시 누가 자네의 능력을 알아차리면 이곳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될 것이네. 보타문으로 가세. 내가 자네를 보호해 주겠네.”
“네. 그렇기도 하군요. 하지만 아이들에게 천자문이라도 완전히 가르치고 떠날 생각입니다. 꼭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알았네. 조심하게. 내가 특별히 우리 문의 무인들을 이곳에 보내 자네와 마을을 지키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게도 생각이 있으니 신경 쓰실 필요 없으십니다.”
자신이 조금 신경 쓰면 되겠기에 검후의 진심이 담긴 마음만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