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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 * *

친우들이 돌아가고 혼자 남은 양곤은 오늘 검후와의 일을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의 능력이 다른 문파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면 그녀의 말대로 조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자신 때문에 이 조용한 마을이 무림의 표적이 되어, 날벼락 맞게 할 수는 없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듯이 비밀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가능한 길게 그 비밀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했다.
마을을 보호할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검후가 좋은 사람이었기 망정이지 악인이 무방비인 자신의 코앞에까지 불쑥 들이닥친다면, 그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잘 대해 주는 마을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방도를 생각하던 양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일단, 진법을 펼쳐 마을을 보호하고, 외지인이 다가올 때 내게 경고해 줄 수단을 만들어야겠군.”
마을 밖으로 나간 양곤은 나직이 소청금강역사주(召請金剛力士呪) 진언을 외웠다. 소청금강역사주는 자신의 몸에 힘을 상징하는 금강역사의 능력을 불러들이는 주문이었다.
“다디야타 전달리 전달라비제 전달라마 훔 전달라발제 전달라불리 전달라사이 전달라지리 전달폐양 전도루 전달라바라자 전달라물달리 전달라바디이 전달라바양 전달라카기 전달라노기 사바하.”
양곤의 몸이 환한 금빛으로 빛나더니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빛나던 금빛이 잦아들자 드러난 그의 몸은 평생을 외공을 수련한 무인의 몸처럼 울퉁불퉁하고 단단한 근육에 싸여 있었다. 다시 양곤의 입술이 달싹이고는 축지법을 읊었다.
“권서천지 급급여율령.”
몸이 가벼워진 그는 마을의 외곽을 크게 돌며 돌을 옮기고 나무를 꽂아 두며, 어떤 곳에는 커다란 바위를 옮겨 두는 등 부지런히 진법을 펼쳤다. 진법의 중심만 빼고 다 설치한 양곤은 처음으로 자신이 펼친 진법을 다시 확인하고 크게 만족했다.
“이 정도면 어지간히 몰려와도 걱정이 없겠군.”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마을 근처로 와 해제진언을 외워 본래 모습을 찾았다. 마을로 들어온 그는 자신의 집 뒤에 있는 진법의 중심에 작은 돌무더기를 쌓았다.
‘이제 이 돌탑만 무너뜨리면 진법이 발동되게 했으니 다 됐다.’
손에 붙은 먼지를 털어 내며 일어선 양곤은 자신이 펼친 만상만귀호지진(萬象萬鬼護地陣)의 효력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 진은 특정 지역을 보호하는 진으로 변화에 빠지면 각종 환상에 시달리다 정이 고갈되어 죽게 되는 진법이었다. 넓은 지역에 설치하기 좋은 진법이며 생각을 하는 모든 생물은 진법을 거두지 않으면 절대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진법은 되었고. 이제 경종을 울릴 방도를 처방해야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결가부좌를 틀고 앉은 양곤은 심안을 열고 나직이 보이영이문(報耳靈耳文)의 주문을 외웠다. 보이영이문은 귀신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술법으로 이용하는 귀신의 능력에 따라 들을 수 있는 정보가 차이 났다. 섬에서 사용해 본 적이 있던 양곤은 제법 능력이 있는 신령을 이용할 수 있었다.
“천지조화태을경 일월성신조화정.”


6화 대사부(代師父)


잠시 후, 심안을 연 양곤 앞에 마른 나무처럼 바짝 여위고 마음은 사그라진 재처럼 감정이 없어 공허하게 보이는 신령이 나타났다. 그의 입이 열리며 음기가 가득해 약간 으스스한 음성이 울려 나왔다.
[누가 나를 부르는가?]
[내가 불렀다.]
[무엇을 원하는가?]
[이름은?]
[사일(死日)이라 한다.]
[그대에게 지금부터 내 호위와 마을의 수신호위를 부탁한다.]
[나를 아는가?]
[모른다.]
[모르면서 너를 지켜 달라 하는가?]
일반 귀신이라면 주술자의 명을 이의 없이 받아들이겠지만, 양곤이 심안을 통해 보기에 나타난 신령은 귀선(鬼仙)인 듯 보였다. 귀선은 천성이 본래 비천하여 큰 깨달음은 얻지 못했지만, 한 가지에 몰두하여 수련해 어떤 이치를 추구하는 신선의 한 종류였다. 보기에는 비루해 보이지만, 마음이 통일될 때에는 음신(陰神)을 밖으로 내보낼 수도 있고 죽은 뒤에는 혼백(魂魄), 즉 영혼이 흩어지지 않아 저승명부에 오르지 않고, 윤회를 하는 귀신 중에는 신선으로 통했다.
남의 태중(胎中)으로 들어가 아이로 다시 출생하기도 하고 죽었다가 동자로 소생하기도 하는 신선이니, 이는 순음(純陰)으로 양기(陽氣)가 없어 끝내 귀신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선을 귀선이라 했다.
[귀선도 신선인데 내가 믿지 못할 까닭이 있는가?]
[내가 도와줘야 할 이유가 있는가?]
[나를 도와 선업을 쌓으면 귀선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내가 귀선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도 있다.]
[그대가 그리 말한다면 도와주지.]
사일은 느껴지는 양곤의 선력이 뛰어났던지라 순순히 대답했다.
정신 감응으로 대화를 나누던 사일이 양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심안을 거둔 양곤은 사일의 능력은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았다. 자신이 했던 일들을 찬찬히 다시 한 번 점검한 양곤은 심마인 여미려가 자꾸 떠올라 잠시 뒤척이다 달콤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이들을 가르치던 양곤은 사일의 음한한 목소리의 이보(耳報)를 받았다.
[여인 여섯 명이 교자를 들고 마을로 오고 있다. 어떻게 할까?]
[일단 지켜봐. 누군지 알아보고 다시 알려 줘.]
[알았다.]
양곤은 여인들이란 소리에 아마 보타문에서 왔을 거라 짐작하고 계속 아이들을 가르쳤다.
“현득아, 오늘 배운 글자를 소리 내어 읽어 보아라.”
“네, 스승님.”
현득이 큰 목소리로 배운 글자를 읽어 나갔다.
“쇠 금 날 생 빛날 려 물 수[金生麗水] 구슬 옥 날 출 뫼 곤 뫼 강[玉出崑岡]…….”
제자의 글 읽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는지 양곤은 지그시 눈을 감고 음미하고 있었다. 스승이 눈을 감고 자신들을 지켜보지 않는데도 아이들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고, 모두들 동무가 읽어 가는 글을 따라 읽고 있었다. 비록 어린아이들이지만, 자신들이 지금 얼마나 큰 행운을 누리는지 부모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또 스승이 눈을 감고 있어도 자신들의 행동을 모두 아는 것을 글을 배우기 시작한 다음 날부터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기에 모험할 생각을 못했다.
다시 사일의 이보가 전해졌다.
[여인들이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이야기 나누는 걸 들어 보니 보타문에서 온 듯하다. 어떻게 할까?]
[그냥 들여보내 줘. 아는 사람인 듯하다.]
[알았다.]
잠시 후, 그의 사리문 앞에 사인교와 함께 두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미려는 양곤이 아직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같이 온 자수신니(慈手神尼)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저, 아직 글공부가 다 끝나지 않은 모양이에요. 잠시 기다려야겠어요.”
“그러지 뭐.”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수신니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양곤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의 반듯한 심성이 확연히 보였다. 한참을 양곤을 보다 마을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평온하고 조용한 어촌의 풍경이 마음에 쏙 들었다.
메고 온 교자를 땅에 내려놓은 이대 제자인 매란국죽은 입을 삐죽거렸다.
‘아이, 뭐야. 이렇게 교자꾼 하려고 무공을 배운 게 아닌데…… 저 공자가 도대체 누구기에 우리가 교자까지 매야 되는 거야. 짜증나.’
교자를 멘 것이 처음이라 오는 동안 발을 맞추느라 배는 힘들었던 매란국죽은 평소 토닥거리는 모습과 달리 한마음이 되어 청년을 씹었다.
어느덧 오시가 되자 양곤은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자신을 찾아온 이들을 영접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아이들을 가르치시는 것을 알면서도 시간을 잘 못 맞춘 저희들이 잘못이죠.”
“그런데 이분들은?”
“네. 이분은 자수신니세요. 이쪽은 매란국죽이고요.”
“안녕하십니까. 양곤입니다.”
“자수신니라고 합니다, 소협.”
“안녕하세요. 전 매, 이쪽은 난, 다음은 국, 막내인 죽이에요.”
가장 나이가 많은 매가 동생들을 소개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양곤이 그들을 자리로 안내하고 차를 내왔다. 은은하고 향긋한 차향이 주위에 퍼지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네. 문주님께서 양곤 소협께서 혼자 계시느라 불편한 점이 많으실 것 같다고 제게 이곳에 머물며 도와드리라 하셨습니다.”
자수신니의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오자 양곤은 그제야 어제 검후가 자신과 마을의 안전을 위해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저는 이곳이 마음에 드니 제 걱정은 않으셔도 됩니다.”
양곤이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를 보이자 자수신니가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양곤 소협, 사부님이 소협을 보타문에 초청하셨어요.”
여미려가 찻잔을 비우고 내려놓았다.
“지금요?”
“네.”
“허! 무슨 일인지 혹시 아십니까?”
“아뇨. 저는 자세한 내용을 몰라요.”
양곤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알았습니다.”
“소협, 다녀오실 동안 저는 이곳에 제가 머물 곳을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수신니는 양곤에게 합장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저도 얼른 준비를 해 나오겠습니다.”
양곤은 방으로 들어가 깨끗한 백색 유생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가시지요.”
양곤이 앞장서 마당으로 걸어가자 사인교를 대문 밖에 두었던 터라 여미려와 매란국죽이 그의 뒤를 따랐다. 싸리문을 나선 여미려가 입을 열었다.
“양곤 소협, 저희가 소협을 위해 교자(轎子)를 준비했으니 오르세요.”
양곤은 그녀의 말에 약간 난감함을 느꼈다. 그래도 자신은 남자인데 여자들이 드는 교자에 오르기는 창피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축지법을 펼치면 그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의 난감해 하는 모습을 보던 여미려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괜찮아요. 소협, 여자라도 무공을 익혀 소협보다 힘이 강하니 얼른 올라앉으세요. 너무 늦으면 점심을 굶어야 해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양곤이 교자에 앉자 매란국죽이 교자를 가뿐히 들더니 마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사일, 내가 없는 동안 마을을 잘 부탁한다.]
[어떻게 하라고?]
[네 판단에 맡기지. 해를 끼칠 인물이라 생각되면 쫓아 버려. 그리고 적들의 숫자가 많으면 내 집 뒤뜰에 있는 돌탑을 쓰러뜨려. 그럼 진법이 발동할 거야. 잘 부탁한다.]
[알았다.]
조금 한적한 곳에 다다른 그들은 신법을 발휘해 보타문으로 가는 배가 있는 나루터로 날아갔다. 교자를 메고 있는 매란국죽은 조금 익숙해졌는지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약간 불편한 심기였던 양곤은 시간이 흐르자 편해졌고, 마음이 가라앉은 그는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너무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해 나직이 환신망각주(幻神忘覺呪)를 외웠다.
“옴 살바라도 바하리니 사바하.”
환신망각주는 본래 눈을 치료하기 위한 치료 주문에서 온 것인데 약간 변형하면 자신의 모습을 타인의 기억 속에서 지우는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금방 양곤을 보고 돌아서서 그의 모습을 기억하려 해도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일부러 알아차리려 하거나 양곤보다 도력이 높은 이가 아니면 아무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터였다. 느긋한 마음이 된 양곤은 자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여유를 즐겼다.
나루터에 도착한 일행은 시간을 제대로 맞추었는지 곧바로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보타산은 불교의 성지인지라 많은 향배객들이 찾는 곳이었다. 그에 따라 상가가 제법 번창했는지 들어가는 짐 꾸러미들도 많았다. 뱃사람들의 출항 준비에 분주한 모습과 삼삼오오 모여앉아 입담을 나누는 사람들로 선상은 소란스러웠다.
양곤은 일행과 함께 선상의 한 곳에 자리 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라 여미려와 양곤은 서로의 체온을 느낄 정도로 바짝 붙어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가운데 두고 매란국죽이 자리했다.
양곤은 그의 팔에 느껴지는 여미려의 부드러운 느낌과 달콤 야릇한 여인의 향기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심박이 빨라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몸을 조금 움직여 웅크렸지만, 출렁이는 배는 그녀를 자꾸 그에게 디밀었다. 당황한 모습을 감추려 뱃전에 부딪치는 파도를 응시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여미려도 당황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늘따라 사람들이 많은 선상(船上)에는 보타산으로 들어가는 짐들이 더해져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자꾸 느껴지는 양곤의 체온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고개 숙인 채 흔들리는 그녀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도 싫지 않은 느낌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교자를 세워 두고 곁에 앉아 있던 매란국죽은 서로 손짓발짓으로 이야기하며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 있었다.
양곤은 시종일관 물속의 고기라도 관찰하는지 뱃전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고, 여미려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여미려가 나이는 어려도 검후의 직전제자라 자신들에게는 사고(師姑)였다. 그런 그녀의 당황한 모습을 보는 것은 그녀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이윽고, 보타산에 도착한 매란국죽은 싱글거리며 배에서 내렸고 양곤과 여미려가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다시 교자에 오른 양곤을 데리고 보타산에 오른 그녀들은 곧장 문주의 집무실로 갔다.
“사부님, 양곤 소협을 모셔왔습니다.”
“어서 뫼셔라.”
“네.”
여미려를 따라 문주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둥근 탁자에는 나이 든 두 노비구스님과 검후가 앉아 있었다. 양곤이 들어서는 모습을 본 검후가 자리에서 일어서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시게, 소협.”
“안녕하셨습니까, 문주님.”
“이분은 내 사부님이신 전대검후이시고, 이분은 수석 장로이신 백검신니(百劍神尼)시네.”
“양곤이라고 합니다.”
“어서 오시게, 소협.”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양곤은 여미려가 가져다준 차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갑자기 이렇게 소협을 초대한 것은 부탁할 것이 있어서이네.”
검후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내비쳤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전대검후가 말을 받았다.
“그 전에 내가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네.”
“하문하십시오.”
“자네가 문주에게 주산흑운검법(舟山黑雲劍法)이 모두 칠초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나?”
“네.”
“일곱 번째 초식은 나도 모르네. 다만 내 사부께서 그 초식이 있었으나 실전되었다고 하시었네. 그런 초식을 자네가 어떻게 알고 있나?”
“조부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래? 조부님의 함자를 알 수 있겠나?”
“죄송합니다. 이미 세상과 인연을 끊으신 분이라 알려드리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그분들이 청정을 방해 받고 싶어 하시지 않는다면 별수 없지.”
은거를 한 후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하는 고인들이 종종 있는지라 고개를 끄덕인 전대검후는 말을 이었다.
“내게 그 초식을 알려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그 무공의 주인은 검후시지 않습니까?”
양곤이 순순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자 전대검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사실 그가 좀 무리한 요구를 해도 받아들여야 할 만큼 중요한 무공초식을 조건 없이 전해 주겠다는 대답이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검후가 미리 준비해둔 지필묵을 양곤에게 건넸다.
양곤은 마지막 초식인 산운개천(散雲開天) 초식을 적어 주었다. 그가 글을 써 내려가는 모습을 보던 이들이 모두 세 가지에 크게 놀랐다. 첫째는 그의 글이 용사비등(龍蛇飛騰)한 명필이었고, 두 번째는 막힘없이 글을 써 가는 그의 식견이었으며, 세 번째는 그가 초식의 풀이까지 상세히 적는 것이었다. 무공이 이미 경지에 오른 전대검후와 수석장로인 백검신니는 양곤의 주석에서 또 다른 경지를 엿볼 수 있었다.
양곤이 붓을 내려놓을 때까지 호흡조차 조심하며 지켜보던 전대검후와 백검신니는 양곤이 건네는 글을 받아 들고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간간이 의견을 교환하며 초식을 살피는 사부와 수석장로를 보던 검후가 손짓으로 양곤과 여미려를 불러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때까지 밖에서 한담을 나누던 매란국죽을 불러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라 이른 검후는 양곤과 여미려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양곤 소협, 고맙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아니, 자넨 감사를 받을 만하네. 누가 그런 초식을 아무런 대가 없이 내주겠는가?”
“전 주인에게 돌려 드린 것뿐입니다.”
“진심으로 고맙네. 그리고 염치없지만, 아까 말했던 부탁 말일세.”
“네. 말씀하시지요.”
“자네가 우리 제자들에게 무공을 좀 가르쳐 줬으면 하네.”
“네? 제가 알기로 문파의 무공을 외인에게 보여 주는 일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지. 하지만 자네는 이미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는 하지만…….”
“모든 제자를 다 가르치라는 말이 아닐세. 몇몇 특정한 제자만 가르치면 되네. 많은 숫자는 아닐 게야.”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그럼 여기서 생각해 보게. 자네가 생각하는 동안 난 제자들을 시켜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겠네. 분명 점심을 걸렀을 테니. 그렇지?”
부드러운 미소와 자상한 음성이 너무 잘 어울리는 검후가 향기로운 방향을 남기고 방을 나가며 여미려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여인의 방은 처음인 양곤은 처음 방에 들어설 때부터 너무 좋은 향기에 정신이 어질거렸다. 시종 미소를 지우지 못하던 여미려는 잘하면 양곤을 매일 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고 행복한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그의 입에서 긍정적인 답을 얻어야 했다.
“소협, 저는 소협이 좀 도와주셨으면 해요. 물론 귀찮으시겠지만…….”
“귀찮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다만, 좀 갑작스런 일이라…….”
“부탁드려요. 네?”
갑자기 콧소리를 울리며 애교를 부리던 여미려가 양곤의 손을 덥석 잡았다. 후다닥 놀란 양곤은 식은땀을 비칠거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네, 네. 그렇게 하지요. 손 좀…….”
양곤의 말에 여미려가 잠시 자신이 잡고 있는 양곤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후다닥 떨어져 앉았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지며 양곤은 벽에 걸린 족자가 무슨 비밀을 간직한 양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여미려는 꼼지락거리는 자신의 손만 바라보았다. 제자들에게 음식을 들려 방으로 들어서던 검후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빙그레 웃고는 입을 열었다.
“소협, 그래, 생각해 보셨소?”
“네.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대답은 엉뚱하게 여미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검후가 고개를 돌려 이상한 듯 바라보자 여미려의 고개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고맙소, 소협.”
“아, 아닙니다.”
아직도 평정을 찾지 못한 양곤이 더듬거렸다. 제자들이 음식을 다 차리고 밖으로 나가자 검후는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많이 드시게.”
“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사부님.”
비록 절간에서 차린 음식이라 고기 종류는 없었지만, 맛깔스런 산채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세 사람은 잠시 말없이 그저 음식을 먹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