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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한편, 문주의 집무실에서 숙제(?)를 하던 전대검후는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소협, 그런데 이 문장이 말이오. ……잉?”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전대검후가 아직도 글을 보며 생각에 빠진 수석장로의 어깨를 툭 쳤다.
“수석장로, 양곤 소협은 어디로 갔소?”
“아까 문주와 밖으로 나갔습니다.”
펼쳐진 종이를 곱게 접어 품에 넣은 전대검후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매란국죽이 양측으로 벌려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너희들, 문주와 소협이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제자들이 태상문주님을 뵙습니다. 아까 문주님의 처소로 갔습니다.”
“그래?”
전대검후는 뒤따라 나온 수석장로와 문주의 방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문주, 계시는가?”
“네. 드시지요.”
안으로 들어선 전대검후는 그들이 식사 중인 것을 보고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눈빛을 날카롭게 하고는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당장 궁금해 물어봐야겠는데 밥을 먹는 양곤을 방해하기에는 자신의 위신이 있는지라 눈빛으로 얼른 식사를 마치라고 압박하는 중이었다. 같이 들어온 수석장로는 전대검후의 표정을 보더니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검후는 사부가 같이 식사하고 싶어 하는 줄 알고 식사를 권했지만, 전대검후는 냉랭한 표정으로 고개만 흔들고는 다시 노려보았다. 어른과 같이 식사하는 것도 불편한데 그저 노려보고만 있으니 세 사람은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대충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탁자를 치우자 전대검후의 안색이 풀어지며, 자상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소협, 많이 드셨는가?”
양곤은 ‘체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기에 짧게 대답했다.
“네.”
“자네가 아까 적어 준 초식 말인데…….”
자신의 품에서 조심스레 꺼낸 종이를 다시 펼친 전대검후는 한 글귀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왜 보법을 건(乾) 방위를 밟지 않고 감(坎) 방위를 밟고, 내기를 신경(腎經)이 아니라 간경(肝經)으로 흘리라 했는가?”
전대검후는 초식의 운용을 설명한 양곤의 주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빙그레 미소 짓던 양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그것은 전대검후께서도 잘 아시듯이 주산흑운검법은 대자연의 힘에서 창안된 무공입니다. 특히 바다에서 일어나는 태풍을 보고 창안했는데, 태풍은 바람입니다. 팔괘에서 바람은 손(巽)괘에 속합니다. 손괘는 외형인 오행의 목(木)과 내기인 육기의 궐음풍목(厥陰風木)을 나타냅니다. 마지막 초식은 이런 유목(柔木) 기운을 품은 무공의 극에 이르는 초식인데 무공의 위력을 더해 줘야 할 보법이 건(乾)에 있으면 건이 표하는 강금(强金)의 기운이 오행[木]과 육기[木]를 모두 눌러 약해지게 됩니다.”
잠시 말을 멈춘 양곤은 재촉하는 전대검후의 눈빛에 말을 이었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보법을 서북방이 아니라 정북방인 감(坎)방으로 디뎌 감괘의 기운인 수(水)로 목(木)을 생(生)해 주는 것이 올바르다 할 수 있습니다. 이때의 내기가 흐르는 경맥은 보법을 밟을 때는 족태양방광경(足太陽膀胱經)을 이용해 강하게 진각하시며, 초식을 펼칠 때는 수궐음심포경(手厥陰心包經)을 이용해 빠르게 펼치시는 것이 좋습니다. 정북방이 서북방보다 자세도 안정되게 하니 일석이조가 아니겠습니까?”
양곤의 복잡한 설명에 여미려는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전대검후와 검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전대검후는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펼쳐져 있던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어 가슴에 품고는 쏜살같이 방을 나갔다. 백검신니도 무언가 느꼈는지 전대검후의 뒤를 따랐다.
남은 이들이 갑작스런 전대검후의 행동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몇 번 본 기억이 있던 여미려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너는 왜 웃느냐?”
“네. 배움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게 무슨 말이냐?”
“사형이나 사매가 모두 같은 행동을 했거든요. 양곤 소협의 설명이 끝나고 사라졌다가 좀 있다 다시 나타났습니다. 아마 사조님께서도 얼른 깨달은 것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으셨던 모양이에요.”
“그렇구나. 소협,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양곤이 겸양을 떨자 검후의 입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검후는 양곤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이것저것 평범한 이야기를 나두던 검후는 양곤이 북해에 가야 한다는 말에 이유를 물었다.
“왜 북해에 가야 하는가?”
“네. 구해야 할 물건이 있어서입니다.”
“내게 알려 주면 구할 방도를 알아보겠네.”
“청린빙어를 구해야 합니다.”
양곤의 말에 검후는 청린빙어에 대해 기억하고는 난색을 표했다.
“그것은 구하기 힘든 영물(靈物)이 아닌가?”
“네.”
“음. 나도 방법을 연구해 보겠네.”
“감사합니다, 문주님.”
검후 또한 무인인지라 무공에 욕심이 없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정색하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말일세. 나도 지금 커다란 벽에 막혀 무공에 진전이 없다네. 무슨 말인가 하면 말일세. 그…….”
쾅―
방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얼굴이 상기된 전대검후가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양곤을 바라보고는 합장하며 인사했다.
“아미타불. 고맙네, 소협. 내 크게 깨달았네.”
전대검후는 양곤의 말에 그동안 자신의 무공이 정체된 이유를 깨닫고 연무장으로 가 깨달음을 시험하고 온 길이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상생하는 경맥으로 기를 도인했을 때 상충하는 경맥으로 기를 도인했을 경우보다 훨씬 부드럽게 초식이 펼쳐지고 위력도 크게 나아졌다. 양곤이 전해 준 마지막 초식뿐 아니라 자신이 아는 초식에 적용해 그 결과를 확인한 그녀는 너무 기뻐 한달음에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도움이 되셨다니 소생도 기쁩니다.”
양곤이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전대검후에게 고개 숙였다.
“사부님, 감축 드립니다.”
검후는 사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 십 년은 젊어 보인다고 생각하며 사부의 깨달음을 축하했다.
“고맙구나.”
전대검후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자 모두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사부님, 그러면 양곤 소협을 문의 대(代)사부로 모시는 것을 사부님도 찬성하시지요?”
검후가 전대검후의 안색을 살폈다. 전대검후는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문의 무공이 크게 발전할 수 있는데 왜 내가 반대하겠느냐. 그런데…….”
“네?”
전대검후가 토를 달자 무슨 말이 나올지 몰랐던 검후가 되물었다.
“양곤 소협의 가르침을 받을 첫 상대는 나다.”
“네?”
“그, 그건…….”
“내가 첫 번째로 그에게서 지도를 받겠다. 불만 있냐?”
전대검후는 정색한 표정으로 은근히 검후를 노려보았다. 다른 문파의 인물들이 알면 기절할 일이었고, 자신의 명예는 땅에 곤두박질칠 일이었지만, 무공에 대한 욕심이 생긴 그녀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방해하면 뒷일은 네 책임이라는 전대검후의 표정에 검후는 할말을 잊고 멍하니 자신의 사부를 바라보았다.
양곤은 일이 요상하게 돌아가자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사조님, 그렇게 되면 대(代)사부가 아니라 대(大)사부가 되는 거잖아요.”
여미려가 분위기에 휩쓸려 생각나는 대로 툭 뱉었다. 순간 검후와 전대검후도 조금은 고민이 들었다.
“여 소저, 저는 보타문도도 아니고, 제가 보타문의 초식과 모든 무공을 가르치는 것도 아닌데 대(大)사부라니요. 전 그런 자격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대(代)사부도 사실 제게는 과분합니다. 그저 도움이 되신다면 조금의 도움을 드릴 수는 있습니다.”
양곤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자 검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누구를 가르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무공수련에 도움을 주신다 생각하게. 그리고 아무런 직책이 없으면 본문의 제자들을 대할 때 체계가 없으니 대(代)사부 직책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네. 어떤가? 양곤 소협.”
“검후의 말이 옳네. 비록 큰 권한이 있는 자리는 아니지만, 문의 장로 급에 해당되는 직책이니 소협이 그건 양보하시게.”
“양곤 소협, 저도 그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세요. 네?”
모두가 그에게 권하고 여미려가 애교 전술을 펼치려는 듯하자 양곤은 자신의 뜻을 물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았습니다. 그럼 대(代)사부의 직책은 과분하지만, 제가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맙소, 양곤 소협.”
‘휴, 이제 가르칠 이들을 선별하는 일만 남았군.’
“잘 생각하셨네, 소협.”
‘소협은 내 차지요.’
“고마워요, 소협.”
‘이제 잘하면 매일 볼 수 있겠구나.’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양곤의 말이 떨어지자 일이 다 됐다고 좋아하던 세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닙니다. 마을의 아이들도 가르치기로 약속한 바도 있고,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낭비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내는 마을이 비록 작은 어촌이지만, 근처에 찾아보면 제법 큰 장소도 있을 겁니다. 제가 장원을 마련하면 그때 제 조언이 필요한 제자들을 보내십시오. 그러는 것이 효과적일 것입니다.”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마친 양곤이 세 여인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휴우. 알았네. 그럼 보타문에서 장원을 찾아보고 적당한 곳이 없으면 한 채 짓도록 하지.”
검후도 사실 그를 강제할 권리는 없었다. 자신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이에게 자신들의 입장만 강요할 수 없었다.
“장원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문주님께서는 심려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 양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세 여인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왜? 가시려고?”
“왜?”
“가시려고요?”
“네. 녕파(寧波)에 들러 알아볼 일도 있고 얼른 가서 장원을 찾아봐야지요.”
해안에 인접해 있지만, 주변 마을보다 많이 번창한 곳이 녕파라는 말을 촌장에게 들었던 양곤은 그곳에 들러 새로운 책과 아이들이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싶었다.
“급하기도 하구만. 조금 더 있다가 가시게.”
전대검후는 양곤에게 물어볼 말이 많았던지라 조금 더 머물기를 권했다.
“아닙니다. 할 일은 미루지 말고 그때그때 해야 내일이 편해지지요.”
전대검후의 속내를 짐작한 양곤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급히 먹는 떡은 체하는 법이고, 일조일석(一朝一夕)에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많은 금과옥조(金科玉條)를 들어도 시와 때가 맞지 않으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 진리였다.
“소협이 그렇게 말하시면 그러야겠지.”
검후도 처음부터 너무 그를 속박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순순히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제가 소협을 모셔다 드리고 올게요, 사부님.”
여미려가 발딱 일어나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보던 전대검후와 당대 검후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양곤이 여미려를 따라 방문을 나서자 두 검후는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빠른 소식 기다리겠네.”
“조심해서 가게, 소협.”
“미려야, 소협을 잘 모시고. 소협이 대사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직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마라.”
“네. 안녕히 계십시오.”
사부의 전음에 고개를 끄덕인 여미려는 양곤을 데리고 매란국죽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매란국죽은 교대로 식사를 하고는 아직도 문주의 집무실에서 타인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갑작스레 문주의 명이 떨어졌었기에 사인교도 따로 치우지 못했었다.
“매 언니, 지금 집무실에 아무도 없는데 우리는 뭘 지키고 있죠?”
막내인 죽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맏이인 매에게 물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문주님의 명이시니 따라야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때 여미려의 음성이 들렸다.
“이제 집무실을 지키지 않으셔도 돼요. 양곤 소협을 댁으로 모셔다 드리라는 문주님의 명이세요.”
“네, 사고.”
“전 녕파에 볼일이 있으니 네 분 소저께서 수고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문주님의 명이 계셨으니 당연히 저희들이 모셔야지요.”
매의 단호한 말에 다른 토를 달지 못한 양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타문의 산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옆에 여미려가 나란히 서고 매란국죽은 사인교를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지나가던 보타문의 제자들은 여미려를 보고 모두 인사를 하고는 제자리에 서서 이상하다는 듯 일행을 바라보았다.
“저 공자는 누구지?”
“글쎄. 누구기에 문주님께서 사인교를 내주신 걸까?”
“아마. 고관대작의 아드님이시겠지.”
“그러게. 무공을 모르는 백면서생으로 보이니 거상의 자제이거나 그렇겠지.”
그들의 속삭임을 들은 여미려가 고개를 획 돌렸다.
“이분은 본문의 대사부님이시다. 무례를 범치 말도록.”
장문제자인 여미려가 엄한 목소리로 꾸짖자 속닥거리던 제자들은 고개를 숙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뒤따르던 매란국죽도 여미려의 처음 보인 모습에 찔끔하면서도 양곤이 대사부라 불리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물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닌지라 꾹꾹 눌러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다경도 지나지 않아 사부의 당부도 까맣게 잊어버린 여미려는 양곤의 신분을 대사부라 밝히면서 마치 자신이 높아진 양 기분이 좋았다.
양곤은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스러웠다. 말이 길어지기 전에 얼른 그녀를 만류했다.
“소저, 그냥 가시지요.”
“네, 대사부님.”
다소곳하게 대답한 여미려가 고개 숙인 제자들을 한번 노려보고는 다시 양곤의 뒤를 따랐다. 여미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제자들이 웅성거렸다.
“대사부?”
“대(大)사부?”
“우리 문에 대사부란 분이 계셨어?”
“처음 듣는데?”
“소저라고 부르는 소리도 들었는데?”
“별호인가?”
“에이. 무슨 별호가 그런 별호가 있겠어?”
“그럼 뭐지?”
그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그중에 속가제자인 연영경은 눈을 빛내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사부라? 어라? 그런데 좀 전에 본 공자의 얼굴이 기억이 안 나네.’
연영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