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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7화 작은 연인(戀人)


“요즘은 무림이 조용한 편이라 각 문파에서 무공수련에 치중하는 편이에요. 사부님께서도 한참 제자들의 무공을 향상시키려 고민하고 계셨는데 대사부님께서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녕파에 오는 동안 내내 양곤의 옆에서 재잘대던 여미려는 말끝마다 대사부님이라 불러 양곤이 조금은 불편했다.
“여 소저, 저기, 부탁이 있습니다. 저를 자꾸 대사부라 부르시니 제가 불편합니다. 달리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그냥 소협이라 부르시던지…….”
녕파에 도착한 양곤은 더는 필요가 없었던 환신망각주(幻神忘覺呪)의 술법을 풀었다.
“음……. 소협은 대사부님인데 그건 너무 평범하고……. 공자? 음…… 가가?”
“헉.”
책에서 읽은 바로는 가가라 부르는 경우 오라버니라는 뜻도 있지만, 연인끼리의 호칭이라 아는 양곤이 헛숨을 삼켰다.
“그건 조금 과한 듯합니다.”
양곤의 말에 샐쭉해진 여미려가 고개를 팩 돌렸다.
“그게 싫으시면, 그냥 대사부님이라 부를래요.”
두 사람을 뒤따르던 매란국죽이 그 모양을 보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보통 때는 사고인 여미려가 조금은 어려웠었는데 지금은 자신들보다 어린 막내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가가라 부르시는 게 사람들의 이목을 덜 끌 듯합니다, 대사부님.”
죽이 여미려의 마음을 읽었는지 역성을 들었다. 양곤은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꼬박꼬박 대사부님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나을 듯했다.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언제 토라졌냐는 듯 고개를 돌린 여미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가가, 그럼 가가께서도 어투를 바꾸셔야지요.”
“어떻게 말입니까?”
“제가 가가라 부르는데 가가가 동생에게 말을 높이시면, 모양새가 우습잖아요.”
“그것도 옳은 말입니다.”
죽이 끝까지 여미려를 밀어주었다. 여미려가 죽을 돌아보며 고마워했다.
“음, 알았습니다.”
“가가?”
“네?”
“또?”
“으……응.”
“가가?”
“네?”
“틀렸어요.”
“응.”
양곤은 그녀의 장난이 조금 난감했지만, 마음 한쪽이 따뜻해졌다. 이윽고 일행이 마을에 들어서자 여미려가 재잘거렸다.
“가가, 어디로 가실 거예요?”
“저는…… 나는 책방에 들러 필요한 책과 지필묵을 사 올 테니, 객잔에서 기다리시……는 게 어떻겠냐?”
말이 꼬이면서 이상하게 나왔지만, 무사히 자신의 뜻을 표현한 양곤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여미려를 바라보았다.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여미려의 얼굴은 눈꼬리가 처지고 붉어진 채 이상하게 변했다.
“소저들께서 무거운 교자를 들고 움직일 수는 없으시니 객잔에서 기다리시지요.”
“네.”
매란국죽은 그의 뜻을 순순히 따랐지만, 여미려는 냉큼 양곤의 뒤를 따랐다.
“객잔에서 기다리는 게 더 좋을 텐데…….”
그녀의 행동에 고개를 흔든 양곤은 책방을 찾아 걸어갔다. 상산보다는 마을이 커서인지 책방에 있는 책도 종류가 많았다. 여러 종류의 책을 펼쳐 보며 고르는 양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여미려는 한길에 익숙한 인영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포 소협!”
포천룡은 자신을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여미려임을 확인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 소저, 또 무공수련을 빼먹으셨군요.”
“헤헤, 오늘은 대사부님을 모시느라고요.”
“대사부님?”
포천룡은 처음 듣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호도 아닌 것이 문파의 직책에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네. 양곤 가가가 보타문의 대사부님이 되셨어요. 헙.”
그제야 사부의 당부가 기억난 여미려는 자신의 입을 가렸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양곤 소협이 대사부님이 되셨다고 하였습니까? 대사부님은 뭐고 가가는 또 뭡니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얼굴을 드민 포천룡의 모습에 여미려는 자신의 입을 찰싹 때리며 중얼거렸다.
“비밀로 하라고 하셨는데……. 이런 못된 주둥이가…….”
“포 형이군. 반갑네?”
“아! 양 형, 이곳에는 어쩐 일인가?”
“필요한 물품이 있어 사러 나왔네.”
“내 집이 이곳에 있네. 왔으면 얼른 기별할 것이지. 섭섭하네.”
“몰랐었네. 미안하이. 마침 다 구했으니 차나 한잔 하세나.”
“그것 좋은 생각이네.”
일행은 매란국죽이 기다리는 객잔으로 자리를 옮겼다. 매란국죽은 차를 마시며 양곤을 기다리다 객잔으로 들어서는 그를 보고 손짓하며 미리 잡아 둔 자리를 내주었다.
“안녕하십니까.”
면식이 있던 포천룡이 그녀들에게 인사를 건네자 그녀들도 마주 포권을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절강일도 소협.”
매란국죽이 앉은 옆자리에 자리 잡은 일행은 차를 주문했다. 차를 기다리면서 포천룡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여 소저가 뭐라 말하던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
“무슨 소리?”
그때 포천룡의 귓가에 여미려의 전음이 들렸다.
“포 소협, 그것이 비밀이니 나중에 제가 말씀드릴게요. 지금 꺼내지 마세요.”
포천룡은 작게 손을 흔드는 여미려의 낭패한 모습을 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 소저가 자네를 가가라 부르던데?”
여미려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게 그렇게 되었네.”
딱히 핑계 댈 말이 없었던 양곤이 말을 돌렸다.
“그래, 내공수련에 진전이 있던가?”
“이제 며칠이나 됐다고 진전씩이나 있겠나. 다만, 마음을 비우고 순리에 따르려 노력할 뿐일세.”
자신의 내공수련에 진전이 없다고 생각한 포천룡이 한 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양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데 들어 볼 텐가?”
포천룡이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빠르게 고개를 돌려 양곤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는 간사해 보이기까지 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무공에 대한 식견이 남다름을 아는 여미려의 시선도 양곤의 입술에 고정되었다.
“선인들이 말하기를 만물의 이치는 도(道)가 일(一)을 낳고, 일은 이(二)를 낳으며, 이는 삼(三)을 낳으니, 일이 체(體)가 되고 이는 용(用)이 되며, 삼은 조화(造化)가 된다고 했네. 체와 용이 음양(陰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조화는 일과 이의 교합(交合)에서 기인하는 것이네. 상, 중, 하의 삼재(才)로 배열하고, 천, 지, 인이 모두 한 도를 얻는 것이지. 도(道)가 이기(二氣)를 낳고 삼재를 낳으며 오행(五行)을 이루어 만물을 운행하네. 그런 만물 중에 가장 신령하고 귀한 것이 사람이네.”
점소이가 주문한 차를 가져오자 말을 끊은 양곤이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권했다. 잘 이해는 가지 않지만, 뒤의 말이 궁금한 포천룡과 여미려는 냉큼 잔을 들어 차를 받았다. 두 사람의 눈빛에서 말을 이으라고 채근하는 빛을 알아챈 양곤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천지의 기미(幾微)는 음양의 오르내림에 있네. 한번 상승하고 한번 하강함에 태극이 상생하고, 상생하여 서로 성하면 다시 달려 시작하니 이에 맞추면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네. 수련하는 무인이 천지에서 법을 취하면 저절로 성취가 늘 수 있네. 일월의 바뀌는 것과 움직임과 교차하는 것에 비유한다면, 달이 해의 기를 받는 데 머물면서 양으로써 음을 변화시키므로 음은 다하고 양이 순수해져 달빛이 밝고 깨끗해져 혼탁한 정(精)을 없애고 해의 빛나는 것과 같이 아래의 땅을 밝게 비추네. 이때가 되어 수련하면 자연에 충만한 기운이 저절로 스며드니 큰 성과를 볼 수 있을 것이네.”
말을 멈춘 양곤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설명을 계속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내공수련에는 낮보다 밤이 낫다는 말일세. 천기를 본떠 배우고 음양이 오르내리는 이치로써 진수(眞水)와 진화(眞火)로 하여금 하나가 되도록 하여 기(氣)로 신(神)을 양성하여 신이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 오행이 받아 이룬 기가 생극(生剋)을 다스리고 변화하여 원황정(元黃庭)으로 돌아가는 오기조원(五氣朝元)할 수 있고, 옥화(玉華), 금화(金華), 구화(九華)가 모여 태초로 돌아가는 삼화취정(三花聚頂)을 이룰 수 있다네. 그리고…….”
양곤의 난해한 말을 듣던 여미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가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진수, 진화, 옥화, 등등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너무 많아요.”
“나도 그러네. 공부한다고 했지만, 머리가 영…….”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양곤이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과 비슷한 학문의 경지를 이룬 사람이라야 알아들을 말을 해 댔으니,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미안하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겸연쩍은 미소를 지은 양곤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간단하게 이야기하지. 밤에 내공을 수련하게. 새벽에 일어나 수련하는 것도 좋지만, 오행이 순행하여 기가 상생에 전해지는 것은 자시(子時, 밤 11∼12시)에서 오시(午時, 낮 11시∼12시)까지니 곧 양(陽)의 시(時)에 양(陽)을 낳는 것이네. 이때 기를 수련하는 것이 제일 좋네. 초식 수련은 오행이 역행하는 오시에서 자시까지 하는 것이 좋다네. 하늘에 삼보(三寶)가 있어 해, 달, 별이고, 땅에 삼보가 있어 물, 불, 바람이며, 사람에 삼보가 있어 정기신(精氣神)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네. 기는 신을 자식으로 두고 정을 어미로 두었네. 정이 기를 낳고 기가 신을 낳는 것일세.”
양곤은 그들이 자신의 설명을 이해하는지 안색을 살피더니 설명을 이어 갔다.
“그중에 인신운화기(人身運化氣)라고 하는 기(氣) 자는 사람[人]에 하나 일(一) 자의 의미와 바람[風]의 의미를 가지는데 사람이 바람과 하나 되어 흐르는 것을 의미한다네. 이것에 쌀 미(米)를 합한 것이니 기를 얻는 데는 쌀이 으뜸이라네. 쌀 미의 의미를 살펴보자면 열 십(十) 자는 사방이며 공간적인 의미를 가지고 여기에 네 개의 점은 춘하추동의 정기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곡식의 쌀이 아니라 시공(時空)의 정기를 말한다네. 따라서 천지의 정기와 하나가 되어 바람처럼 행하는 것이 기라는 말일세.”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포천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에 그런 뜻이 있는 줄 미처 몰랐었군.”
“이런 기는 흡을 통해 몸으로 받아들이고 호를 통해 밖으로 흘린다네. 기를 몸속에 잘 간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가 부족하면 천지의 이치가 작용하여 다시 채우려 노력한다네. 다시 말해 단전을 비우게 되면 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정이 기로 내려앉고 주변의 기를 끌어당기게 되어있네. 그러니 단전을 완전히 비우고 채우는 것이 기의 수발을 좋게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네.”
알 듯 모를 듯 다가오는 양곤의 말에 포천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양곤이 아주 쉽게 정리했다. 기실 너무 쉽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한다면 의문을 가질 테지만, 자세하게 설명하고 요점을 말해 주면 누구든 쉽게 수긍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양곤이었다.
“내공수련은 오전에 하고 초식 수련은 오후에 하는 것이 좋다는 말일세. 그리고 단전을 완전히 비우는 훈련을 하는 것이 내공 증진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고.”
그제야 의미를 깨달은 포천룡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미려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강의 감을 잡았다. 옆에서 귀를 쫑긋거리며 경청하던 매란국죽은 양곤의 해박한 지식에 할 말을 잊고 멍하니 탁자만 바라보았다.
“내가 말이 너무 많아 지루했던 모양이군.”
매란국죽의 태도를 오해한 양곤이 찻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가, 돌아가시려고요?”
“그래야지. 돌아가서 촌장님과 장원에 관한 문제도 상의해야 하고…….”
“나도 같이 가겠네.”
“너무 늦지 않았나? 조금 있으면 해가 질 터인데. 나중에 보세나.”
자신을 따라다니다 수련에 소홀해질까 염려한 양곤이 포천룡을 만류했다.
“알았네. 내일 보세나.”
“잘 있게.”
“안녕히 계세요, 포 소협.”
인사를 한 일행은 객잔을 나섰다. 매란국죽이 교자를 메고 그의 뒤를 따라오다 마을을 벗어나자 입을 열었다.
“대사부님, 오르시지요.”
전과 달리 그녀들의 음성에서 진심 어린 존경심이 물씬 풍겨졌다. 마을에 도착한 시간이 제법 늦은 터라 양곤은 더 머무르려는 여미려를 겨우 달래어 매란국죽과 함께 돌려보내고 사일을 찾았다.
[사일.]
[나를 불렀나?]
예의 건조하고 차가운 음성이 양곤에게 전해 왔다.
[내가 없는 동안 별일 없었나?]
[없었다.]
[지켜 줘서 고맙다.]
[한 일도 없다.]
고저 없이 메마른 사일의 대답에 피식 웃은 양곤은 바로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촌장님, 저 양곤입니다.”
“훈장이신가? 들어오시게.”
안으로 들어서자 촌장이 꼬던 새끼줄을 한쪽으로 치우며 자리를 권했다. 자리에 앉은 양곤이 보타문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의견을 구했다.
“그래서 장원을 한 채 구해야 하는데 혹시 버려진 장원이나 구입할 수 있는 장원이 근처에 있습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이곳은 작은 어촌이네. 좀 크다 싶은 집은 요선주의 집뿐이네. 그것도 큰 마을에 있는 장원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작은 규모고.”
“할 수 없이 한 채 지어야겠군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네. 자네가 사는 집이 따로 떨어져 있으니 그곳에 장원을 지으면 될 것일세.”
“그럼 촌장어른께서 인부들과 목수들을 좀 구해 주시는 수고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제가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알았네. 내가 그 정도도 못해 주겠나. 내일 당장 알아보겠네.”
“고맙습니다.”
촌장 집을 나선 양곤이 자신이 머무는 집에 도착하자 그곳에서 저녁 짓는 냄새가 풍겨 나왔다. 이상하게 생각한 양곤이 싸리문을 들어서자 그의 인기척을 듣고 부엌에서 나온 자수신니가 자상한 미소로 그를 맞았다.
“소협, 잘 다녀오셨습니까? 잠시만 기다리시면 저녁이 준비될 것입니다.”
“신니께서 왜 이런 수고를 하십니까?”
“제가 원하는 일이지요.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래도…….”
“어서 씻으시고 방으로 드시지요.”
말을 마친 자수신니가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자 남은 양곤은 세안을 하기 위해 우물로 향했다.
‘촌장어른이 저녁을 먹고 가라 권하지 않으신 이유가 이것이군.’
자신이 구입한 물목을 잠시 점검하며 기다리던 양곤은 자수신니가 소담하게 차려진 밥상을 들고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르시지…….”
“괜찮습니다. 찬이 별로 없지만, 맛있게 드십시오.”
말을 마친 신니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양곤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같이 드시지 않고 어딜 가십니까?”
“저는 부엌에서 먹겠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같이 드세요. 안 그러면 저도 안 먹겠습니다.”
양곤이 짐짓 안색을 굳히며 말하자 자수신니는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알았습니다, 소협.”
같이 수저를 들고 식사를 하던 양곤이 요리 솜씨를 칭찬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 맛있습니다.”
“입에 맞으시니 다행입니다.”
“그렇게 존대하시면 제가 불편하니 하대해 주십시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천부당만부당하지요.”
정색하며 단호한 음성으로 말하는 자수신니의 태도에 양곤이 찔끔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신니께서는 어디에 거처를 마련하셨습니까?”
“마침 빈 가옥이 있어 손보았습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네.”
식사를 마치고 자수신니가 상을 치우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자 혼자 남은 양곤은 오늘 있었던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앞으로 할 일을 생각했다.
‘장원을 지어야 할 거면 내가 설계를 해 봐야겠어. 이번 기회에 기관진식의 실제 응용을 해 봐야지.’
생각을 정리한 양곤은 자세를 단정히 하고 오수주를 외웠다. 지난번 보았던 좁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목간중청기는 종좌이출하야 화위청룡재좌하고, 금폐중백기는 종우이출하야 화위백호재우하고, 수신중흑기는 종족하출하야 화위현무재호하고, 화심중적기는 종정상출하야 화위주작재전하고, 토비중황기는 종구중출하야 화위황룡재중이라.”
내부를 관하며 나직이 오수주를 읊조리던 양곤은 지난번에 느끼지 못했던 좁쌀들의 색을 느낄 수 있었다. 오장의 특색인 청홍황백흑의 서기(瑞氣)가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서기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기도 하고 겹쳐지면 움츠러들기도 하면서 빛의 모양을 바꾸기도 하였다. 마치 좁쌀들끼리 장난치는 모습처럼 보였다.
‘고것들 참 신기하네. 진기(眞氣)가 진수(眞水)를 만남으로써 심장의 화(火)와 신장의 수(水)가 서로 교섭하고 연성하여 정화(精華)를 이룬다고 했는데. 그것인가?’
양곤은 신선경에 나오는 글귀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정화가 나와 모(母)의 음을 만나면 먼저 수(水)로 나아가서 용(用)이 없는 곳에서 더러운 것을 씻어 내고, 모의 양을 만나면 먼저 혈(血)로 나아가서 수정을 이루어 정혈이 포태를 이룬다. 건곤(乾坤)이 서로 찾아서 삼음과 삼양을 낳으니, 진기(眞氣)는 양이 되고 진수(眞水)는 음이 된다. 양은 수에 감추어져 있고, 음은 기(氣) 속에 감추어져 있다. 기는 상승함을 주로 하며 기 가운데 진수가 있고, 수는 하강함을 주로 하여 수 가운데 진기가 있으니, 기 중에 있는 수가 진수이고 진수는 진음이요 수 가운데 있는 기가 진수이며 진기는 진양이다. 그렇구나! 그래서 수승화강(水昇火降)이란 말이 나오는구나. 물은 본디 아래로 흐르고 불은 위로 향하는데 이를 반대로 이야기한 것이 이런 뜻이구나.’
양곤의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지며 원단(元旦)에 밤하늘을 밝히는 폭죽이 터지듯 잠자는 의식이 깨어났다. 머리로는 이해를 하고 있었지만, 마음으로 느끼지 못했던 이치들이 그에게 다가와 사그라졌다.
저절로 하늘로 붕 뜨는 느낌이 들고 입 안 가득 감로수가 맺혔다. 뱃속에서 천둥소리가 울리며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한참을 소란하던 뱃속에서 천지를 울리는 뇌성이 들리더니 진동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다시 고요한 지경에 이른 양곤은 온몸이 새털마냥 가벼움을 느꼈지만, 조용히 주문을 계속 외웠다.
깨달음의 달콤함과 오장에 맺힌 작은 서기들의 신비로운 형상에 그만 밤을 꼴딱 새우고 그가 눈을 떴을 때는 동녘이 훤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