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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한편, 전대검후는 자신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신형을 감추며 양곤에게 날아간 세 노인의 무위에 너무 놀라 그저 눈만 깜빡이며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세상에. 내 눈이 그들의 움직임을 쫓지 못했어.’
더는 자신이 누군가의 종적을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전대검후는 세 노인의 정체가 궁금해서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겨우 세 노인을 진정시킨 양곤이 검후에게 다가왔다.
“할아버지, 이분은 보타문의 전대검후십니다.”
“이분은 무슨.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비구니구만.”
혈불은 양곤이 ‘이분’이라 하는 것이 못마땅했던지 툴툴거렸다.
“이분들은 제 할아버지들이십니다, 전대검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미타불.”
근엄한 비구니의 모습으로 돌아간 전대검후가 정중히 인사했다.
“반갑네. 이 친구의 말은 괘념치 말게. 워낙 불만이 많은 인간이라 그러네.”
마뇌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저 양곤을 어떻게 하면 한 번이라도 더 만질 수 있을까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들의 태도에 멋쩍게 웃은 양곤은 그들을 이끌고 자신의 서재로 갔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어느새 준비를 했는지 자수신니는 차를 내왔다.
“감사합니다, 신니.”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대사부님.”
자수신니가 인사를 하고 나가자 혈불이 당장 양곤의 턱밑에 와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대사부님이라니?”
“너 제자를 두었냐?”
말이 없던 마뇌까지 눈을 빛내며 양곤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닙니다. 그저 저들의 무공수련을 조금 도와줄 뿐입니다.”
“그래? 하긴 네 나이가 아직 제자 둘 나이는 아니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는 혈불을 보며 빙긋이 웃던 광극이 입을 열었다.
“그래, 지낼 만하냐?”
“네, 할아버지. 그런데 세 분이 어쩐 일로?”
보통 광극만 뭍으로 나오지 혈불과 마뇌는 좀체 섬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양곤이 물었다.
“아! 그거. 하도 광극이 혼자 가기 적적하다고 노래를 불러 같이 나왔지. 그렇지 않은가, 마뇌?”
마뇌에게 자신의 핑계에 동참하라고 은근한 눈빛을 보내는 혈불을 보고 양곤은 대충 짐작이 갔다. 분명 혈불 할아버지가 아직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궁금해 따라나섰을 것이고 마뇌도 슬쩍 묻어 나왔을 터였다.
“잘 오셨어요.”
“그런데 이 장원은 무엇이고 또 검후는 왜 이곳에 있느냐?”
“일이 그렇게 되었어요.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요.”
양곤이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소상히 밝히자 세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네 녀석의 무(武)에 대한 식견은 우리조차 놀라게 할 정도니…….”
혈불과 마뇌는 섬에서 보여 줬던 양곤의 놀라운 능력을 떠올렸다. 그러다 양곤의 단전이 깨진 사실을 상기하며 우울해졌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전대검후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르신들의 존함을 알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전대검후의 말에 떠올리던 추억이 깨어진 혈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하러?”
전대검후가 혈불의 격한 반응에 움찔하자 광극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미 이름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네. 그냥 세 광노라고 부르게. 내가 일 광노, 땡중이 이 광노, 시커먼 놈을 삼 광노라 부르게.”
광극의 말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얼레. 누가 네놈에게 첫 번째라고 인정했냐?”
혈불이 펄쩍 뛰었다. 마뇌도 음산한 음색으로 말을 받았다.
“내가 일 광노다.”
방 안의 공기가 세 노인의 충돌로 이상하게 변해 가자 전대검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양곤이 얼른 입을 열었다.
“가위바위보라는 좋은 해결책이 있잖아요, 할아버지.”
“좋다.”
양곤의 말에는 토를 잘 달지 않는 그들인지라 동시에 대답했다. 잠시 긴장이 흐르고 모두 마음을 정했는지 오른 손을 뒤춤에 감추었다.
“꼼수 쓰기 없기다.”
혈불은 눈을 크게 뜨고는 광극과 마뇌의 얼굴을 살폈다.
“가위바위보!”
동시에 손을 내민 세 노인의 안색이 다양하게 변했다. 혈불은 푸르죽죽하게 안색이 죽었다. 그만 바위를 내고 마뇌와 광극은 보를 낸 것이었다.
다시 마뇌와 광극이 오른손을 뒤로 가져갔다.
“가위바위보!”
결과는 광극이 일 광노, 마뇌가 이 광노, 혈불이 삼 광노가 되었다. 혈불이 삼판양승이라 우겼지만, 광극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네가 보다시피 이름이 정해졌네.”
광극이 전대검후를 보며 말을 하자 그녀는 황당한 상황 전개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할아버지, 전 아이들의 글공부를 살피러 가야 하니 이야기들 하고 계세요.”
“오냐. 얼른 보내고 오너라.”
양곤이 성큼성큼 걸어 나가고 남은 네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저 아이를 이용해 꾸미는 일이 무엇이냐?”
싸늘한 표정으로 변한 마뇌가 지옥에서 울리는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혈불과 광극도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네? 일을 꾸미다니요?”
그들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전대검후는 당황스러웠다. 그들의 기운은 이미 강호에서 가장 높은 배분에 속하는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 만큼 두려웠다.
“대사부는 뭔가?”
혈불의 음성은 좀 전의 경박스러움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차갑고 냉정했다.
“그건……. 아까 양곤 대사부가 말했듯이 보타문에서 그에게 내린 직책입니다. 대(大)사부가 아니라 대(代)사부로서 직전제자는 두지 않고 수련하는 무인들을 지도하는 장로 급 직책입니다.”
“그 아이를 감히 보타문에서 묶어 두려 하는가?”
광극의 인자한 음성은 어디로 가고 건조하고 무거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닙니다. 보타문의 소속이 아니라 그냥 그에게 마땅한 다른 호칭이 없었기에 적당한 직책을 준 것뿐입니다.”
“매인 게 아니라면 다행이다. 만일 딴 뜻이 드러나면 보타문은 멸문(滅門)을 각오해야 할 것이야. 알았느냐?”
마뇌의 으름장이 전대검후의 신형을 흔들었다. 거침없이 뱉는 말이지만 사실이 될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입니다.”
“할아버지.”
아이들을 돌려보낸 양곤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순식간에 세 노인의 기세가 바뀌고 얼굴에 미소까지 띠었다.
“그래, 아이들은 잘 돌려보냈느냐?”
광극의 인자한 음성의 부활이었다.
“오, 내 새끼 왔느냐?”
혈불의 약간 경박스런 음성. 그리고 짧지만 정이 담긴 음성으로 마뇌가 말을 이었다.
“왔느냐?”
세 노인의 돌변한 모습에 전대검후는 또다시 말을 잃었다.
양곤은 세 노인에게 장원을 만든 거며 자신이 오행과 육기, 팔괘를 이용해 어떻게 설계를 했는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세 노인은 간간이 장단을 맞추며 그의 말을 흐뭇한 표정으로 들었다.
“그래. 이곳에 계속 머물 테냐?”
양곤의 이야기가 끝이 나자 광극이 앞으로의 일을 물었다.
“아뇨. 할아버지들께 약속한 대로 북해(北海)로 가야죠. 그런데 지금 벌여 놓은 일이 있어 쉽게 떠날 수가 없어요.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양곤의 주술력을 믿어 그가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 세 노인은 그저 그를 넓은 세상에 보내 더 많은 견식(見識)을 쌓게 하려 꺼낸 말이었지만, 양곤이 자신들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함을 알고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은 양곤을 이 작은 어촌에 머무르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음. 시작한 일이니 그냥 관둘 수는 없을 테고…….”
광극이 말을 흐리고 생각에 잠기자 혈불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대신 봐 주면 안 될까? 곤이가 북해에 갔다 오는 동안 우리가 장원을 지켜 주지 뭐. 어때?”
“좀 귀찮기는 하지만,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다.”
마뇌까지 찬성하자 광극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양곤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하겠느냐?”
“네. 그렇게만 해 주시면 저야 좋지요.”
세속에 연을 모두 끊고 은거한 할아버지들이 자신을 위해 은거를 깨고 나온다는 말에 양곤은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알았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자꾸나.”
“말코, 네가 학동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쳐라. 나와 검댕이가 무인들을 지도할 테니.”
혈불이 광극에게 아이들의 글공부를 떠넘기고는 마뇌를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은 ‘나 잘했지?’ 하는 표정이었다.
“왜 내가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그럼 내가 가르치랴? 아니며 저 삭막한 검댕이가 가르쳐? 누가 봐도 도사인 네놈이 가르치는 게 좋지. 암.”
혈불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광극이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뭐.”
“그럼, 내가 무련각을 맡겠네.”
혈불이 선뜻 무련각을 맡겠다고 뜻을 밝히자 광극의 고개는 마뇌에게 돌아갔다.
“찾아보면 내가 할 일이 있겠지. 일단 땡중을 도와주면서 찾아보지.”
세 노인은 각자의 역할을 정했다. 광극이 학동들에게 글공부를 시키고, 혈불은 연무장에서 수련할 무인들을 가르치고, 마뇌는 그를 도와주기로 했다. 광극은 양곤과 함께 학동들의 글공부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하고, 혈불과 마뇌는 전대검후의 안내를 받아 무련각으로 갔다.
무련각에 도착한 혈불과 마뇌는 무련각을 둘러보고는 양곤의 정확한 건물 배치와 오운(五運) 육기(六氣)의 운용에 크게 감탄했다.
“정말 잘 지었네. 우리가 해도 이렇게 할 수 없겠어. 하여튼 곤이 그놈은 난 놈이야.”
“그렇군.”
전대검후는 무련각에서 수련하던 후기지수들을 불러 모았다. 어차피 점심을 주지 않을 양곤이기에 그들은 수련에만 매진하고 있었다. 전대검후가 그들을 불러내자 자신들이 배정 받았던 방에서 나온 그들은 낯선 노인들이 있는 것을 보고 의문을 나타냈다.
“사조님, 저분들은 누구십니까?”
단소운은 자신의 무기를 갈무리하며 전대검후에게 물었다.
“대사부의 조부님들이시다. 인사드려라.”
전대검후의 말에 모두들 화들짝 놀라며 급히 인사했다.
“조부님께 인사드립니다. 보타문의 제자 단소운이라고 합니다.”
“조부님께 인사드립니다. 위타문의 포천룡입니다.”
“인사드려요. 보타문의 도소미라고 해요.”
“인사드려요. 보타문의 여미려예요. 정말 곤 가가의 조부님들이세요?”
여미려가 가가라고 부르자 두 노인은 눈을 똥그랗게 떴다.
“검댕아, 저 여아가 곤이를 가가라고 불렀지?”
“그래.”
“험험, 그래, 아가. 난 삼 광노라고 하고 저 시꺼먼 옷 입은 놈이 이 광노라고 한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근엄한 음성으로 혈불이 아까 가위바위보로 정한 서열대로 자신을 소개했다.
“네? 왜 그렇게 이름을 정하셨어요?”
“어쩌다 보니 그리 됐다.”
“그래도……. 전 스님 할아버지, 흑의 할아버지라고 부를래요. 그래도 되죠?”
여미려가 영롱한 목소리로 귀엽게 이야기하자 혈불은 빙그레 웃었다. 심지어 표정 없던 마뇌도 얼굴에 살짝 미소가 맺혔다.
“그러려무나.”
전대검후는 여미려가 두 노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듯하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강호에서는 알아주는 무위를 가졌지만, 양곤의 조부 앞에 서면 마치 고양이 앞의 생쥐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런 강한 이들이 여미려로 인해 보타문에 좋은 감정이 생기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녀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입을 열었다.
“어르신들, 일단 객청으로 가셔서 차를 드시며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그러세. 아가, 함께 가자꾸나.”
“네, 스님 할아버지.”


10화 삼선장(三仙莊)


여미려가 다소곳한 모습으로 인사하자 혈승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나머지 후기지수들은 왠지 어렵게 느껴지는 두 노인의 분위기에 따라가고 싶지 않았지만, 검후가 눈을 부라리며 재촉하자 하는 수 없이 두 노인을 따라 객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객청에 도착해 차를 마시며 여미려의 이모저모를 살피던 혈불이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마뇌의 희미한 미소도 사라졌다. 두 노인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남은 이들은 화들짝 놀라며 그들의 행적을 찾으려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그들의 종적은 묘연했다.
‘대단하다.’
그들의 머릿속에 공통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한편, 서재에 남은 광극과 양곤은 학동들의 글공부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지금은 가르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천자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천자문을 다 가르치고 다음 단계는 할아버지께서 알아서 가르치시면 됩니다.”
“알았다. 이제 시작이니 그리 어려울 것도 없겠구나.”
“죄송합니다. 귀찮게 해 드려서.”
“아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거야 뭐 힘들 게 있겠느냐? 그런데…….”
“네?”
“너 혹시 이보법(耳報法)을 사용했느냐?”
“네, 할아버지. 주변을 경계하려 귀선(鬼仙)을 불렀습니다.”
“곤아, 귀선은 음기(陰氣)가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에 가까이 두면 그다지 좋지 않다.”
“네, 할아버지.”
“일단 내가 한번 보자꾸나. 불러 보거라.”
“네.”
양곤은 보이영이문(報耳靈耳文)을 외워 사일을 불렀다.
“천지조화태을경 일월성신조화정.”
주변에 으스스한 음기가 강해지더니 사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일은 광극이 두려운지 그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광극은 심안(心眼)을 열어 두었기에 사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불렀나?]
[그래. 할아버지께서 너를 보자고 하신다.]
광극은 사일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한줄기 바람이 일더니 혈불과 마뇌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이 강한 음기는?”
두 노인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양곤의 앞에 서서 그를 보호했다. 그들이 뿜어내는 날카로운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사일의 그 메마른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어쭈. 귀선(鬼仙)인 듯한데 표정을 지을 줄 아네?”
혈불이 놀랍다는 듯 툭 뱉었다. 마뇌는 당장이라도 주술을 사용할 듯 수인(手印)을 맺고 있었다.
“이리 앉게. 지붕 안 무너지네.”
광극이 두 노인을 앉으라 이르고는 양곤을 돌아보았다.
“본디 귀선은 음기로만 뭉쳐진 존재라 양기가 왕성한 살아 있는 이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다. 그런데 저놈은 의외로 양기도 조금 가지고 있는 듯하구나.”
“그래요?”
[어떻게 귀선이 양기를 가지게 되었느냐? 혹시 생령(生靈)을 해치고 빼앗은 것이냐?]
[아닙니다, 선인.]
세 노인이 지선(地仙)의 경지에 이른 것을 느끼는 사일이 제법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럼 그 양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저를 부른 이가 제게 태을주(太乙呪)를 전수해 주었습니다.]
그를 부른 이는 양곤이기에 광극이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할아버지. 그의 음기가 너무 강하고 사연이 딱해 그에게 태을주를 가르쳐 주었어요.”
양곤이 사실대로 이야기하자 광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이고 저놈의 복연이다.”
머릿속에 한 가지 계책이 떠올랐던 광극은 혈승과 마뇌를 돌아보았다.
“난 저놈을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자네들의 생각은 어떤가?”
“이것도 천기의 일환이니 난 반대하지 않겠네.”
“그러세.”
광극이 어떤 계책을 생각해 낸 것이라 생각한 두 노인이 동의를 했고, 광극은 다시 사일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도와주면 너는 귀선의 굴레를 벗을 수 있다. 그리고 태을주를 더욱 정성껏 수련하면 인선(人仙)이 될 수도 있다.]
[진심으로 원합니다, 선인.]
[단, 조건이 있다. 너는 곤이가 북해에 다녀올 동안 그를 보호해 줄 수 있겠느냐?]
비록 양곤을 믿고는 있지만, 혼자 험난한 강호로 내보내기 찜찜한 면이 없지 않았었다. 그들이 따라다니면 강호가 한바탕 뒤집어질 수도 있었기에 사일을 이용하기로 했다.
[저도 그를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럼 시작할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거라.]
그의 대답에서 진심을 느낀 세 노인은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자세를 잡은 광극의 입에서 나직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천지간에 흩어진 백(魄)을 모으는 환백법(還魄法)의 주문이었다. 그들은 주변의 양기를 끌어모아 사일에게 불어넣어 음양의 균형을 이루어 주었다.
“옥제고존 상황지진 만신안진 칠백패신 부득월착 여악위군 장옥실후 구화성선 영수신형 보의득진 유행상궁 동위옥빈 내유영액 체유옥진 보아호명 부득사음 급급여율령 칙.”
심안을 열지 않고는 볼 수 없었던 사일의 몸이 흩어진 백(魄)을 모으며 점점 형체를 갖춰 갔다. 처음에는 바짝 마른 재처럼 메마른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얼굴에 약간의 화색이 돌며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일은 점점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둘러보며 놀란 기색을 띠었다.
이윽고 세 노인이 감았던 눈을 뜨고 광극의 주문이 멈추었다. 양곤은 환백법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 벌어진 기사(奇事)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 되었다.”
“감사합니다, 선인.”
사일은 잠시 자신의 몸을 살펴보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큰절을 올렸다. 그의 육성으로 전해지는 음성이 여전히 차가웠고 고저가 없었지만, 담긴 고마움은 잘 전해졌다.
“너는 이제 귀선의 허물을 벗고 인선의 토대를 닦았다. 그래도 앞으로 부단히 수련해야 완전한 인선에 오를 수 있을 게다. 태을주를 성심껏 외우고 생혼(生魂), 각혼(覺魂), 영혼(靈魂)의 삼혼을 잘 연마하고 칠백(七魄)을 제어해야 할 것이다. 알았느냐?”
“네. 명심하겠습니다, 선인.”
“정말 축하해, 사일.”
“고맙다.”
“일단 네가 머물 곳을 정해 줄 테니 따라와.”
양곤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일과도 정이 들었던 터라 그를 항상 곁에 둘 수 있게 되어 정말 좋았다. 양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 세 노인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양곤의 기쁨이 곧 그들의 기쁨이었기에…….

* * *

‘이게 무슨 소리야?’
아구의 보고를 받은 개방의 녕파 분타주 파장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받은 전서구에는 그냥 가위표가 하나 달랑 있었다. 매일 전서구로 보고하라 지시했던 그가 깜빡했던 것은 아구가 글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파장걸은 열이 뻗쳐올라 기절할 뻔했다.
“내 이놈을…….”
눈앞에 있었으면 바로 걸레가 되도록 패 주었겠지만, 떨어져 있는 아구를 어찌할 수도 없었기에 괜한 바가지만 박살났다.
와작.
“컥.”
자신의 전용 밥그릇이 박살난 모양을 멍하니 보던 파장걸은 콧김을 뿜으며 아구가 있는 어촌으로 신형을 날렸다. 파장걸의 기세를 보아하면 오늘이 아구의 제삿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