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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검인 1권(4화)
1장 ― 타심통(4)


“있소.”
그를 대신해서 또다시 나선 것은 진철이었다. 별호 하나 없는, 까마득한 후배가 나서는 모습에 황권을 비롯한 많은 무인들이 은근히 나설 때가 아니라며 눈치를 줬지만, 진철은 당당했다.
“남에게 피해가 가는 일에 사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맞는 말이오. 하지만 묻겠소, 대협. 대협은 일생 동안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다 말할 수가 있소?”
“……없네.”
“남에게 피해 한 번 주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하시오?”
“그건 아니네. 하지만 이건 그것과는 다른…….”
“타심통이라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오. 자신의 능력을 자신이 썼다. 그것의 어디가 나쁜 것이오? 머리가 좋은 사람은 남의 행동과 행적을 분석하여 사고방식을 알아내고 그것을 이용하오. 제갈무후를 비롯한 병법가가 그러하였고, 많은 위정자가 그러했소이다. 마음을 읽는다 하지만 사실 조금의 확신이 더하여졌을 뿐이오. 다를 것이 있소?”
“하지만 타심통이란 능력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일반인들까지도 두려워한다면…….”
“산동의 유가는 오대세가가 되었소. 일반인의 마음을 읽을 이유가 있다 생각하시오? 지금까지 본인이 만나본 바로는 두려워하기는커녕 헛소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소.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지. 민초들의 편에서 말하자면, 대협의 불만은 극소수의 불만이오. 그 불만은 오히려 대협이라는 그 이름이 부끄럽게도 절대다수의 민초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 세가, 거대 문파, 거대 상가의 불만이겠지. 아니라 생각하시오? 그렇다면 말해 보시오.”
“크으……!”
유정군의 굳었던 표정이 풀리고, 황권이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논파되고 모욕받았다는 생각에 황권이 분노를 토했다. 황권의 소매가 펄럭이고, 점차 부풀어 오르는 기세가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월영대 부대주 셋이 검을 뽑아 들어 황권의 기세를 흘려내며 유선영의 앞을 막았다.
“어린 여아가 있는 곳이오. 그리 화를 내셔도 되겠소?”
오래전, 약관의 어린 나이에 절정에 달한, 천재적인 무인의 기세였다. 같은 절정의 무인조차 숨이 턱 막힐 듯한 기운임에도 진철의 입은 다물어지지를 않았다. 하지만 적절한 말이었다. 황권은 억울한 자에게 피해를 준 악인과 마인들에게나 살수를 쓰는 협사다. 화가 나지만 여아 앞에서, 거기에 잘못을 한 것도 아닌 진철에게 살수를 쓸 수는 없는 노릇.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기운을 중단전으로 휘돌려 냉정을 찾으며 황권은 진철에게서 등을 돌렸다.
“쓸데없는 말싸움은 지나간 것 같군. 비켜라, 애송이.”
진철과 황권이 말을 나누는 동안 줄곧 못마땅한 표정이던 단세명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남아 있는 경력의 잔재를 교묘하게 흘려내며 앞으로 나서는 모습이, 과연 천인살을 이룬 낭인왕 후보라 불릴 만했다. 월영대 부대주 세 명이 양쪽에 서고 단세명이 바로 앞에 서자 유선영이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없는 듯 빛이 느껴지지 않는, 흐리고 희미한 눈동자. 그러나 단세명은 신경 쓰지 않고 묘한 흥분이 느껴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마음을 보이라고 했던가? 웃기는 소리. 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읽는 거다. 읽어 봐라, 꼬맹아. 네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똑똑히 봐주마.”
그러나 유선영은 무표정을 일관하며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인형이라 해도 이 여아보다는 생기가 넘칠 것 같았다. 유선영의 앞에 서 있던 단세명은 속으로 육십을 셀 때까지도 답하지 않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젠장, 그럼 그렇지. 이런 꼬맹이가 타심통은 무슨 타심통이더냐. 쓸데없는 미련이었다.”
중얼거리고 뒤돌아서려던 그때, 유선영이 슬며시 발을 옮기며 단세명의 손등에 손가락을 대고 입을 열었다.
“미안해.”
떼어졌던 단세명의 발이 그대로 굳어졌다. 손등에 닿은 손가락에서 전류가 흐르듯 찌리릿, 오른손에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단세명의 미간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뭐, 라고 했느냐?”
“미안해.”
“도대체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단 대협!”
“비켜!”
단세명이 유선영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자 유가의 인물들이 소리치며 막으려 들었다. 하지만 단세명은 정련되지 않은 기운을 광포하게 흘리며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단세명의 떨리는 회색 눈동자가 달빛조차 없는 밤 깊은 연못 같은 유선영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미안해.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 많았지?”
유선영의 말이 이어졌다.
“그동안 줄곧 오빠를 원망했었어. 오빠는 옛날부터 장난이 심한데다 힘까지 세서 골목에서 대장놀이를 했었지.”
무감각하게 읊어 가는 단어의 나열.
“그러다 실수로 고관대작의 자제를 건드렸고, 오빠 대신에 부모님이 모두 참수당했지. 거기에 부모님의 유산까지 모두 몰수돼서 우리는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어. 고관대작의 미움을 받았으니 우리를 써 줄 사람들은 없고, 오빠는 결국 낭인이 되었지.”
무감정한 표정.
“그거 알아? 오빠가 돌아올 때마다 웃는 표정이었지만, 그동안 나 정말 힘들었어. 아이들은 놀리고, 몸은 아프고, 돈은 없고, 가족은 전쟁터에 나간 오빠 하나뿐. 오빠가 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을지 짐작이 가? 줄곧, 줄곧 오빠가 죽기를 바랐어. 오빠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우리 행복했던 가정이 박살이 나 버렸다고. 오빠가 죽으면 전부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멍하니 듣던 단세명의 눈가에서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하지만 아니더라. 그렇게도 원망했던 오빠가 있어서 내가 쭉 살아올 수 있었더라. 오빠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며 웃어 준 덕분에 내가 버틸 수 있었더라. 바보 같다 생각하지? 괜찮아, 오빠의 여동생은 언제나 바보였으니까.”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한 푼, 두 푼 모아서 내 병을 치료해 주려고 노력했던 거 알아. 나 때문에 무리하면서 돌아다닌 거 알아. 하지만 괜찮아. 이제 오빠가 죽기 직전까지 싸우며 벌었던 돈, 더 이상 밑 빠진 독처럼 쓰지 않아도 돼. 사실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도 힘들어. 그래도, 오빠에게는 할 말이 있으니까 힘내서 하는 거야.”
단세명의 동공이 몽롱해졌다. 때가 낀 낡은 모포, 앙상한 얼굴, 희미한 미소, 두 손에 남긴 온기. 그리는 것은 누구인가.
“오빠, 열심히 잘살았어. 남들이 사람 죽이고 괴롭힌 돈으로 먹고산다고 오빠를 욕해도, 나만은 오빠를 칭찬해 줄게. 오빠는 정말 열심히 살았어. 나 같은 바보 동생 만났는데도, 오빠는 정말 열심히 살아왔어.”
멍하니 벌려져 있던 단세명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 슨 소리를. 그런 소리 마라. 난 지금껏 잘못 살았다. 부모님을 죽인 패륜아고, 동생을 지키지 못한 못난 오빠고, 피 묻은 돈으로 사는 죄인이다. 나는 깨끗하게 살지 못했어.”
“깨끗하게 살지 못했지만, 오빠는 열심히 잘살았어. 말했잖아. 나만은 오빠를 칭찬해 줄게. 오빠가 오빠를 욕해도, 나만은 오빠를 두둔해 줄게. 하지만 앞으로도 그러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하겠네.”
“약한 소리 하지 마! 넌 살 거다! 분명히 살 것이야! 내가 살릴 것이라고!”
연극을 하는 것만 같은 유선영과 단세명의 대화. 유선영은 동생이고, 단세명이 오빠다. 과거를 헤집고 발자취를 뒤지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오빠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죽기 싫어. 난 아직 더 살고 싶어. 하지만, 하지만 끝인걸. 내 몸은 내가 알아. 난 오늘로 끝이야.”
유선영의 눈동자에서 유리구슬 같은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그리 말하지 말래도! 제발,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너는, 너는……!”
“오빠? 거기 있는 거 맞지?”
“그래!”
“벌써, 눈이 안 보이기, 시작했어. 말도, 조금씩, 안, 나오…….”
“연아! 연아!”
“한, 마디, 할, 말이…….”
“연아! 연아아아아─!!”
정적.
깨질 것만 같은 울부짖음과 함께 끝이었다. 이어지던 그림의 연결되는 장면이 찢겨진 것처럼, 유선영과 단세명의 대화는 그렇게 억지스럽게 끊어졌다.
유선영의 두 어깨를 부여잡고 고개를 떨군 단세명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유정군이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이해한 듯 열네 명의 무인 중 몇 명이 굳은 표정이었다. 다만, 진철은 의미 모를 싸늘한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말해라.”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단세명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비명 섞인 절규를 토해냈다.
“그다음을 말해! 또다시 여기서 멈추는 것이냐! 들었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그다음 말을 들었을 것이야! 그다음을 말해! 말하라고 하지 않느냐, 이 빌어먹을 꼬맹아─!!”
“그만하시지요, 단 대협. 마음은 알겠지만,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비켜! 떨어져! 나는 알아내야 할 것이 있다! 그 한마디! 그 한마디를 알기 위해 내가 몇 년을 방황했다 생각하는 것이냐!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 꼬마가 내 마지막 희망이란 말이다!”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단세명을 바라보는 유선영. 절정고수의 위명에 걸맞지 않게 월영대 부대주의 팔에 어깨를 붙잡히고 시정잡배처럼 난동을 부리는 단세명을 보며 황권이 신음하듯 말했다.
“타심통,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까지 읽다니…….”
그에 답하듯 진철이 중얼거렸다.
“뿐만 아니라 감응까지 하오.”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현재 누군가의 생각을 글을 보듯 읽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마음, 과거와 현재를 묶는 무형의 재산이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깊이 박힌 상처와 고통과 즐거움과 행복을, 오욕칠정 모든 감정의 잔재를 읽어 낸다. 자신이 아닌 상대방이 되어 그에 감화된다. 자신의 마음이 아닌, 상대방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에 자리 잡는다. 한 사람의 인생,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다.
과거 동생이 남겼을 그 한마디에 얽매여 방황하던 단세명은 승려도 찾고, 도사도 찾고, 잡신을 모시는 자들 또한 찾았다. 그러나 한 명도 그의 기대에 부응하는 자는 없었다. 그러다 들려온 것이 산동유가의 소문이었다. 현 시대에 단 한 명뿐인, 신이라 추앙받는 이들을 제외하고 생생히 살아 숨 쉬는 타심통을 가진 인간. 일반인들은 그저 상대방의 마음을 글을 읽듯 안다고, 그렇게 이해했지만, 단세명은 달랐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면 과거의 기억 또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처음 유선영이 단세명의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단세명이 원하는 것을 읽어 들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었다. 단세명이 여동생과의 기억 재현을 원하기에 유선영은 단세명의 기억대로 여동생이 되어 그 말을 읊었고, 단세명은 그에 현혹되어 실지로 여동생이 되살아난 것같이 과거의 그날에 사로잡혔다.
이것은 타심통과도 달랐다. 편의상 타심통이라고 하였지만, 유선영의 재능은 그와도 차이가 있었다. 그저 마음을 읽는다, 이 한마디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재능이었다.
그리고 그 재능은…….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는다.
“말해라, 말해! 읽어 들였을 것 아니냐! 그렇다면, 내 마음을 안다면, 네가 인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 요구에 부응하란 말이……!”
“그쯤 하시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법이니.”
단세명의 어깨를 붙든 부대주를 밀어내고 진철이 단세명과 얼굴을 마주했다.
“또다시 네놈이더냐!”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법이오. 포기하시오.”
“네가 정할 것이 아니다! 할 수 있고 없고는 내가 정할 것이야!”
짜악!
그 소리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무명소졸의 후배가 낭인왕 후보라는 절정고수의 뺨을 때려 버린 것이다.
“내 그대가 못 들은 것 같아 다시 한 번 말하겠소.”
불같은 분노로 두 눈을 이글거리며 진철이 말했다.
“어린애에게 무슨 짐을 지우려는 속셈이시오?”
돌려진 고개. 시야에 들어온 것은 유선영이었다. 마주친 눈동자. 하지만 느껴지는 것이 없다. 마치 인형처럼 눈물을 흘렸다는 흔적만이 남았을 뿐, 어떤 슬픔조차 받지 못한 무감정한 표정.
“이, 건…….”
단세명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제 아셨소?”
진철이 냉랭하게 비웃어도 단세명은 반발하지 못했다.
‘마음이, 없어?’
다른 자의 마음이 깃든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이 자신의 것처럼 생생하다. 그것은 자신의 자아조차 성립 못한 어린아이가 경험하기엔 지옥과도 같은 일이었다.
내가 없고, 타인만이 남았다.
나의 마음이란 것을 알기 전에 남의 마음을 알아 버렸다. 자신이 누구라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조차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고역인 일을 어린아이가 겪었다.
결국 아이는 인형이 되어 버릴 뿐이었다.
“어린아이에게 짐을, 지운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을 읽었을까? 얼마나 많은 타인이 그 여린 가슴속에 들어 있을까? 상상할 수도 없다. 나쁜 기억, 좋은 기억, 나쁜 생각, 좋은 생각…… 모든 것이 섞여 들어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소우주라 할 정도로 신비스러운 것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일까지도 해낸다. 자아가 없는 기운조차 주인의 목숨이 위험하면 홀로 움직이는데, 어찌 그 그릇이 해내지 못할까.
남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정립하지 못하여 유선영이 정신적으로 죽어갈 때, 몸은 살기 위해 결정을 내렸다.
자신을 없애라.
죽어가기 전에 먼저 없애 버려라. 누구의 마음도 그녀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모든 것을 무로 돌려라. 그저 엉킨 기억의 실타래가 부유할 뿐인 그릇으로 만들어라.
그렇게 되어 지금의 유선영이 있었다. 어린아이에게 짐을 지운다. 맞는 말이었다. 이미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없는 유선영에게 어찌 또다시 하나의 짐을 지울 생각을 했을까.
“젠, 장…….”
하지만 그렇다고 미련이 어찌 남지 않을 수 있을까. 어린아이에게 짐을 지울지언정 그래도 꼭 듣고 싶은 한마디의 말인데. 단세명이 고개를 숙이곤 입술을 꽉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