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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검인 1권(5화)
1장 ― 타심통(5)


“…….”
충격에 휩싸인 응접실. 단세명과 진철마저 입을 다물자 정적이 흘렀다.
그러던 중 멍하니 단세명을 바라보던 유선영이 눈을 돌렸다. 옆으로, 뒤로. 왼쪽, 오른쪽 훑어보던 눈동자가 진철의 바로 옆, 황권과 마주쳤다.
“무, 무어냐!”
당황한 황권이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그러나 당당했을 목소리는 떨려 더듬었고, 근엄한 표정에 비해 턱 선을 따라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을 읽혀 버린다. 도망가야 하는가? 이 믿기 힘든 기사(奇事)가 도대체 왜 이 정도 소문밖에 흐르지 않았던 것이지? 이건 오히려 소문보다 더하지 않은가.
혼란스럽고 불유쾌한 감정들이 눈을 타고 황권의 가슴에서 유선영의 가슴으로 흘러 들어갔다.
타박! 타박!
유선영이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절정고수의 자존심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덕분에 유선영은 황권의 앞에 다가설 수 있었다.
“유선영이 증오스럽구나.”
청아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였다. 아까 전 단세명에게 답했을 때와는 목소리가 달랐다. 연기인가, 아니면 이것이 실제의 목소리인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목소리기에 더욱 대조되는 물음이었다.
“나는 대협이다! 협을 가슴에 품고 협을 행한다! 사정을 알게 된 내가 어찌 너를 미워할 수 있겠느냐!”
유선영이 묻는 잠시의 시간 동안 마음을 다잡은 황권이 타이르듯 말했다. 넘쳐 나는 기세는 정심하니 공명정대하여 과연 대협이라 불릴 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선영은 손을 내밀어 황권의 손가락을 꾹 붙잡고 말했다.
“아니라 하면, 들킬까 봐 두렵구나.”
“아니라고 했잖느……!”
답하던 황권의 입이 덜컥 멈추었다.
“찾았다, 음살간마 황의검.”
유선영이 말했다.
“못난 놈, 어찌 네놈이 그리 나를 부를 수 있단 말이냐.”
“네 이년, 도대체 무슨…….”
그리고 충격적인 한마디.
“자식이 아버지에게 그리 말해도 되겠느냐?”
“그 입 다물지 못할까──!!”
“무슨 짓을!”
분노를 표출하는 광포한 기운이 유선영의 여린 몸에 쏟아졌다. 천재적인 무인이 살기를 머금고 뿜어낸 기운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이었다. 월영대 부대주들이 다급히 다가와 기운을 흩으며 유선영을 뒤로 밀쳐 냈다.
“멈추시오, 황산대협!”
“비켜라!”
“크으윽!”
일보에 태산처럼 내리꽂히는 압력. 부중보(仆重步), 단 한 걸음 걷는 것으로 상대방을 무릎 꿇린다는 천고의 무학이다. 황산대협이라는 이름을 얻게 만든 희대의 절기에 월영대 부대주 셋이 신음을 흘렸다.
“결국 손을 쓰게 만드는구나! 내 너를 결코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창백하게 질려 가는 유선영의 얼굴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무인들이 나섰다.
“멈추시지요. 멈추지 않으신다면 손을 쓰게 될 겁니다.”
“맞소. 무림맹 내에서 그리 움직이신다면 어떤 처벌이 떨어질지 모릅니다. 잠자코 있으십시오.”
유정군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하자 연이어 청명이 거들었다. 그러나 오대세가의 장로와 화산파 일대제자가 앞뒤로 압박을 함에도 황권은 담담했다.
“내 산동유가에 큰 유감은 없으나 일이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구려. 그러나 알게 되었다면 모르게 만들어야지. 그것이 아무리 뭣 모르는 꼬맹이라 하더라도.”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가만히 있으라, 청명. 싸움이 인다 해도 산동유가와 나의 싸움이다. 네가 끼어든다면 화산파에까지 화가 미칠 것이다.”
“큭!”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본인과 싸우고 싶지 않은 자는 바깥으로 나가라.”
황권의 제안에 몇몇 인물들이 조심스레 일어나 창문과 문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본래부터 황산대협과는 이름값부터가 차이가 나는 인물들이니, 실력이야 두말할 새가 있으랴. 죽고 싶지 않으면 나가는 것이 당연했다.
“결국 화산은 남았는가. 화산에 해가 미친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대의 탓이리라.”
단숨에 사문을 들먹이는 대담함. 평범한 이가 그러하다면 무시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황산대협은 달랐다. 그 이름만으로도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산처럼 들고일어날 바, 진심으로 싸운다면 일개 문파와 싸울 정도가 되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소! 성지인 무림맹에서 싸움이라니, 그것도 알 수 없는 이유로 황산대협이 어린아이에게 살수를 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소!”
“화산에 화가 미쳐도?”
“협을 행함에 있어 이해타산에 몸을 맡긴다면 그야말로 불의. 사문이 감당치 못할 것이라고 보오?”
“…….”
화산은 화산이다. 실리를 중시하는 오대세가와는 달리 협을 중시하는 전통의 구파일방. 더구나 엄정하기로는 소림보다도 더하다는 화산의 무인, 부러질지언정 꺾일 일은 없었다.
“황산대협, 내 대협이라는 이름을 보아 지금이라도 물러선다면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손을 쓰신다면 산동유가와 척을 진다는 것을 아시지요.”
황산대협에 대항하여 해일같이 밀려드는 무서운 기세. 신생이라 하더라도 오대세가는 오대세가였다. 속가 문파들의 정점이자 지주. 장로라는 유정군의 실력은 결코 황산대협의 아래가 아니었다.
“결국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는구나.”
“벌주를 마시는 것은 너다.”
유정군의 머리 옆으로 유성 같은 빛살 한 가닥이 쏘아졌다.
“큭!”
상체를 틀어 피했으나 빛살은 마치 뱀처럼 몸을 꺾어 황권의 가슴을 노렸다.
깡!
황권이 주먹을 내치자 쇳소리가 울렸다. 호권지력(護拳之力), 정오권(淨汚拳)이다.
“단세명, 그대 또한 벌주를 마시려는가.”
씹어뱉듯 내뱉는 말에 단세명은 코웃음을 쳤다.
“벌주를 마시는 건 너라고 말했을 텐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찮은 이유로 무공조차 배우지 않은 여아를 죽이겠다고 나서다니, 대협이라는 그 이름이 울겠군.”
“……알지도 못하면서 건방진 소리 지껄이지 말라. 오히려 네놈이야말로 여동생의 마지막 한마디를 듣겠다는 하찮은 이유로 나서지 않았나?”
“네 이놈──!!”
단세명이 분을 참지 못하고 다시 한 번 도를 휘둘렀다. 휘돌려 삭풍처럼 쓸어가니 도풍이 사방으로 일었다. 호아도법 타육세(打肉勢)였다.
그에 대항하여 황권은 둔중하게 주먹을 내쳤다. 난폭하게 쓸어 가던 도풍이 빨려들 듯 황권의 주먹으로 모여 미풍처럼 흩어졌다. 정오권 연상관세(蓮上觀世)의 수법이다.
일격을 단숨에 막아 내니 당황할 법도 하지만, 괜히 고수가 아닌 것인지 단세명은 침착하게 도를 회수하곤 황권의 어깨를 향해 내려쳤다. 휘돌리는 그 순간에 단숨에 진산의 거력이 모이니, 막아 내던 황권이 신음을 흘렸다.
“크하핫!”
쩌저정! 카카칵! 슈걱!
기세를 탄 패도의 참격이 황권을 유린했다. 단 두 호흡에 육연격. 황권이 다시 한 번 연상관세의 수법으로 막아서려 하였지만, 단세명의 도법은 날뛸수록 더욱 강해지는 무공이었다. 초장에 막아 내지 못하면 기세가 올라 본래의 위력보다 몇 배는 강한 위력을 발하니, 자리에서 한 발자국 물러난 황권의 옆구리에 호랑이가 문 것 같은 기묘한 상흔이 남았다.
“과연 낭인왕에 근접한 낭인이라 할 만하구나.”
황권이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아 내며 말했다.
“네놈은 생각했던 것보다 강하지 않구나. 황산이 배출해 낸 불세출의 천재라 하더니, 허명에 무릎 꿇은 무인들이 저승에서 통탄할 일이다.”
“……다시 한 번 가 보지.”
단세명의 놀림에 분한 듯 황권이 얼굴을 붉히며 팔을 뻗었다. 주먹을 기점으로 단세명이 있는 곳까지의 공간에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땅!
“웃!”
반사적으로 도신으로 가슴을 막아 낸 것이 다행이었다. 파랑에 휩쓸린 소선처럼 흔들리는 도신에 도를 잡은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뒤로 세 발자국 물러난 단세명, 물러난 발자국의 흔적이 바닥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힘에 밀려 경력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벽진권(霹晉拳)이라 하지. 마음에 드는가?”
“……실력을 속였군. 격공권(隔空拳)인가?”
격공권은 아무런 매개체도 없이 공간을 격하여 타격을 가하는 무공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림의 이름이라 할 수 있는 백보신권(百步神拳). 절정의 고수라 하더라도 묘리를 모르고, 묘리를 안다 하더라도 내공의 소모가 심해 쓸 수 없다 알려진 경지의 무공이었다.
음살간마를 죽이고 절정의 고수라 공인받은 지 십 년. 황권은 이미 절정을 넘어 새로운 경지에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가겠다.”
황권의 주먹이 원을 그리다 회수되었다. 두 주먹에 모이는 가공할 진력. 단세명이 크게 놀라 입술을 깨물고 단숨에 달려들었다. 호랑이가 먹이를 노리고 달려들 듯 폭발적인 속도였다.
“이 작은 공간에서 격공권을 써 봐야 내공 낭비……!”
소리치던 단세명의 도가 공중에서 멈췄다. 내뻗을 것이라 생각했던 권이 부드럽게 치고 올라와 도신을 잡은 것이었다. 도신을 붙잡은 손이 교묘히 흔들리자 힘이 빠지며 병장기를 빼앗길 것만 같았다.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의 수법이라 판단한 단세명이 내공을 강하게 밀어 넣으며 거칠게 손을 털었다. 하지만 황권은 그마저 노린 듯 병장기를 격하고 내공을 음유하게 풀어내 혈맥을 진탕시켰고, 내딛은 한 걸음에 부중보 천 근의 압력이 단세명의 어깨를 짓눌렀다.
뻐엉!
“커헉!”
단세명이 정신을 차리고 발을 차 냈지만, 황권의 주먹이 그보다 먼저 단세명에게 닿았다. 가죽 북이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단세명의 몸이 뒤로 크게 밀려나며 날아갔다. 끝낼 수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펼쳐지는 벽진권. 또다시 주먹을 중심으로 일직선상에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그만!”
매화 무늬를 수놓은 붉은 검 자루가 아지랑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공간을 수놓는 꽃송이가 눈부셨다. 화산파의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의 일초, 매화토염(梅花吐艶)이었다. 활짝 피어난 붉은 매화꽃이 벽공권의 진력을 정면에서 막아 냈다.
“대협이라는 자가 이제는 상대방의 목숨까지 끊으려는가! 부끄러운 줄 아시오!”
핏줄기를 토하며 기절한 단세명의 앞에 선 청명이 노호성을 토해 냈다.
“생사결의 결전이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그런 소린가?”
“대협의 지금 행동은 협의에 어긋나 있소! 어찌 이리 엉뚱하게 마두와 같은 행동을 하시는 것이오!”
“엉뚱하다? 하, 그대와 같은 도사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대협이라는 별호 또한 그대들이 지어 준 것. 그동안 내가 진심으로 협의를 행하고 싶었다고 생각하는 겐가?”
“그렇지 아니하다면 그동안의 협행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연극.”
황권은 딱 잘라 말했다.
“그저 내 마음이 기껍기 위해서 그리하였을 뿐이다.”
“남을 도와 자신이 기껍다면 그야말로 서적에서나 나올 법한 협의지사의 마음! 그것이 어찌 연극이란 말이오!”
“네놈은 모른다 했다. 됐으니 덤벼라. 차륜전이니 운기를 하라든가, 덤비지 않겠다든가 말하지는 말도록 하여라. 네가 어찌 행동하든 나는 저 여아를 죽이고 말 터이니.”
유선영을 노려보는 황권의 눈빛은 연민으로, 증오로 얼룩져 있었다. 어두운 감정에 진심이란 것을 느낀 청명이 싸늘한 눈빛을 한 채 황권에게 기운을 집중하였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오. 유 장로, 내 대신 저자와 싸울 터이니 유 소저를 지켜주시오.”
“알겠습니다.”
대신 싸워 준다는 것을 막을 정도로 유정군은 어리석지 않았다. 또한 청명과의 싸움을 거절하여 자신이 싸운다면 황권이 죽음을 무릅쓰고 유선영을 죽일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가주의 장중보옥, 거기에 산동유가의 부흥을 이끈 소녀다. 조금이라도 덜 위험한 선택을 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화산의 검은 눈이 없어 협의를 어긴 자, 그 대가를 치르게 할 따름이니…….”
청명의 검에 홍옥빛 진기가 주입되자 매화검(梅花劍)이 덜덜덜 진동했다.
“자비를 바라지는 마시오.”
“누가 할 소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청명이 암향표(暗香飄)의 신법에 따라 표홀하게 몸을 움직였다. 스치듯 움직이는 발걸음에 향기가 남듯 잔상이 스러지니, 한 떨기 매화의 끝과 같았다. 이어지는 검법은 매화삼릉검(梅花三凌劍). 정오권 기수식을 취한 황권의 가슴을 매화검의 검첨이 날카롭게 찔러 갔다.
“감히!”
청명의 정면 도전에 황권이 노호성을 터뜨리며 손을 쳐 냈다.
땅! 따당! 땅!
손가락을 모으고 손목의 탄력만을 이용해 손등으로 검을 쳐 내니 완벽한 구루수(佝僂手)의 수법이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구루만으로 세 줄기 검로를 모두 막아 내자 청명이 놀란 듯 검을 뒤로 회수했다.
“화산의 기상이 겨우 이 정도이던가!”
황권이 부중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디며 주먹을 뻗었다. 뒤로 회수되던 검이 연상관세의 와류(渦流)에 휩쓸려 길을 잃었다.
그러나 청명은 냉정을 잃지 않고 다리를 안쪽으로 모으며 와류의 안쪽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오히려 흔들림이 덜한 중심으로 몸을 이끄니, 청명의 상처란 그저 옷의 소매가 찢겨진 것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황권은 청명의 비화보(飛花步)에서 이어지는 낙화장(落花掌)에 어깨를 내주고 말았다.
“큭!”
잠깐의 사이에 태을기(太乙氣)가 어깨의 혈을 파고들며 혈도를 막았다. 황권이 어깨를 뒤로 빼며 철산고의 수법으로 청명을 밀어냈다. 그러나 청명은 비화보 화려한 발놀림으로 공격을 피하곤 황권의 옆구리를 슬며시 베고 지나갔다.
“황산의 기상은 겨우 이 정도이더이까?”
“네놈─!”
분노한 황권이 정오권 연상관세에서 칠초식, 일위도강(一葦渡江)까지 초식을 올올이 펼쳐 냈다. 넓은 공간에서 퍼져 나가는 경력이 잔재만으로 벽을 무너뜨리고 바닥을 부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