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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검인 1권(8화)
2장 ― 괴뢰(傀儡)의 혼(魂)(1)


“밥은 먹었어?”
“…….”
“날씨도 더운데 시원한 냉수 한 잔 마셨고?”
“…….”
“목욕은 어때? 뒷산에 가 보니 작은 계곡이 하나 있더라.”
“…….”
“아니면 물놀이도 괜찮아. 생각해 보니 수공(水功)을 하나 배웠는데, 한 번 보여 줄까? 응? 전문적인 수공은 보통 배우질 않아서 희귀한데. 어때?”
“…….”
나른한 오후. 버섯을 닮은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하얗게 빛나는 뜨거운 계절. 하지(夏至)를 일주일이나 넘은 어느 날이었다.
호남성(湖南省) 무림성(武林城)은 땀이 주룩주룩 흐르는 날씨에도 번화했다. 거상이라 불리는 자들이 드나들고, 연고를 맺은 자들을 통해 일을 받은 상인들이 들어와 물자를 팔았다. 천하 각지의 무공 조금 배웠다는 무인들은 고수를 견식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꽤나 이름이 났다는 무인들은 무림맹(武林盟)의 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높은 자들과 담화를 나누었다.
진철과 유선영은 그런 활기와 욕망의 틈바구니 속에서 한가한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호위무사를 뽑기 위한 대회가 끝나고 벌써 한 달여가 지났다. 유선영에게 직접 호위무사로 지명된 진철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별호 하나 없는 무인이 직접 지명을 받았고, 거기에 황산대협과 일전을 벌였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유가의 가옥이지만, 본가는 물론이고 윗선에서 또한 어떠한 일도 시키지 않으니 차츰 관심이 사라지는 때였다. 진철은 유선영과 거실에서 한 뼘 틈을 두고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한마디 답조차 하지 않는데, 귀찮아하는 것 아니냐? 내가 듣기에도 시끄러워 죽겠으니 닥치고 있어라.”
진철과 유선영의 뒤쪽, 벽에 기대앉은 단세명이 진철에게 핀잔을 주었다.
“상처가 좀 나았다고 이제 살 만한가 보오? 그리 농을 건네게.”
“이게 농으로 들린다면 네 귀를 한 번 의심해 봐야겠구나. 어디, 새로 하나 구할 수 있게 내가 직접 잘라 줄까?”
“자신의 귀나 먼저 조심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 일가를 이룰 정도가 되었으니, 미리 대비해 두는 게 낫지 않겠소?”
“아직 네놈 같은 애송이에게 걱정 들을 배분은 아니다.”
“그런 대단하신 분이 황권에게 일수에 기절하더이까?”
“……큭!”
진철이 비웃으며 한 말에 단세명이 이를 꽉 깨물고 신음을 흘렸다. 생사신의에게 치료를 받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욱신거리는 일격이었다. 거기에 낭인왕 후보라고 불렸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받았으니 수치심은 또 얼마나 클까. 단세명을 촌철살인한 진철은 피식 웃곤 유선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귀찮아?”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오히려 날 선 혀 놀림이 그저 불안감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
유선영이 이번엔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돌려 진철과 눈을 마주했다. 초점조차 보이지 않는 흐릿한 눈망울에 압박을 느낄 만함에도 진철은 귀엽다는 듯 유선영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답은?”
“……코오.”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유선영이 털썩 쓰러졌다. 진철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눈을 감았다. 한 달의 시간이 경계심을 허물은 듯 자연스럽고 사양 없는 태도였다.
“불편할 텐데.”
“지가 좋아서 하겠다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 거냐? 그냥 대 주고 가만히 있어라.”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혹시 부러운 거 아니오?”
“무, 무슨 소리를!”
단세명이 무심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진철이 왼손으로는 귀를 막고 오른손으로는 유선영의 귀를 덮었다. 그래도 소리가 컸는지 유선영의 눈가가 슬쩍 찡그려졌다. 진철이 미간을 찌푸리고 으름장을 놓았다.
“조용히 하시오. 애 자는데 깨겠소.”
“으음, 미, 미안하다.”
정신이 들었는지 사과를 한다. 그래도 얼굴에 당황의 홍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보다 무슨 헛소리더냐. 내가 뭘 부러워한다고?”
“정황이 그렇지 않소? 본인은 선영이에게 직접 지명을 받은 호위무사, 그대는 빚을 갚아야 한다고 사정해서 얼마 전에야 겨우 접근을 할 수 있게 된 후임. 거기에 선영이와 친해지려 안간힘을 써도 소득이 없건만, 까마득한 놈팡이 후배는 선영이와 무릎베개도 할 만큼 친한 사이. 부러움을 느껴도 당연한 상황이라 생각하오만?”
진철이 부드럽게 말하자 단세명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얼굴이 붉어져 어두운 그림자 아래에서도 티가 날 정도가 되자 입을 열었다.
“부, 부럽다면 문제 있느냐?”
“나이 서른 넘게 먹고 추태요.”
반전의 단도가 심장을 푹 찔렀다.
“네, 네놈─!!”
그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으면서 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단세명이 참지 못하고 등에 비껴 멘 박도의 손잡이를 쥐었다.
“시끄러.”
그러나 짜증이 깃든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금세 석상이 된 듯 몸을 굳혔다.
“풋, 다리에 쥐라도 났소?”
까드득.
이빨 가는 소리가 무시무시했다. 옷깃 스치는 소리 하나 나지 않게 앉던 자세 그대로 돌아가는 모습에서 오기조차 느껴졌다. 진철은 더 놀렸다간 큰 사고가 날 듯싶어 그만 입을 다물고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인지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해졌다. 우렁차게 들려오던 매미 소리가 희미해졌다. 바람에 출렁이던 풀잎이 고개를 숙이고 움츠렸다.
“선영이 잠자기는 글렀군.”
진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소리냐고 단세명이 물으려 한 순간, 마당을 넘어 한 노인이 나타났다.
“오랜만이네.”
짧게 깎은 수염, 옷 너머로도 보이는 근육과 정광 어린 눈동자는 노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두 자루 검이 허리춤에 차여져 있다. 기문쌍검 문겸익, 숭검단의 단주로 있는 전대 고수였다.
“선영이 낮잠 자는데 일은 나중에 보심이 어떠시오?”
“미안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선영이가 나서야 할 일이네.”
문겸익이 딱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곤 유선영을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손녀를 보는 할아버지의 시선이었다. 확실히 이 노인은 확고한 유선영의 편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녀의 편을 들어주리라. 진철은 그에 대한 마지막 한 줄기 경계심을 놓았다.
“문 선배의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입니까?”
깍듯한 예의를 차린 물음이었다. 칼 한 자루로 먹고사는 낭인이라고는 하나 기문쌍검 문겸익이라고 하면 누구나 존경을 표할 만한 거물이었다. 단세명 또한 마찬가지인 듯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웠다.
“나 또한 선영이를 부르고 싶진 않네. 그저 편안히 무사고로 지내 줬으면 하지. 하지만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닐뿐더러 산동유가의 인물이 나서겠다고 하였으니 어쩌겠는가. 안타까움이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내 미안해 대신 말이나 전해 주러 왔네.”
문겸익의 말에 진철이 한 사람을 떠올렸다. 현재 이곳에서 발언권을 가진 산동유가의 인물은 하나뿐이었다. 유정군, 그가 유선영을 일에 내보내자 하였으리라.
‘아니, 그 하나뿐만은 아닌가.’
그저 장로 하나만을 붙이고 무림맹으로 보냈다는 것 자체에서 가주의 진의가 엿보였다. 가주뿐만이 아니라 유가 전체의 의견이 그러하리라.
유선영은 본가에서 이용당하는 것이 당연한 처지일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선영이가 깨어나면 대신 말해 주지요.”
“하아암.”
진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선영이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를 정리해 주지 않고 그대로 퍼질러 잤더니, 부스스하니 산발이 되었다. 문겸익이 따스한 눈웃음을 짓고는 손빗으로 유선영의 머리를 쓸어내려 주었다.
“오랜만이구나, 선영아.”
“응.”
“낮잠은 잘 잤느냐?”
“시끄러워서 얼마 못 잤어.”
딱히 누구를 대고 한 말은 아니지만, 단세명이 고개를 팩 돌렸다. 진철이 비웃자 단세명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미안하지만 잠시 바깥에 나갔다 와야겠구나.”
“매번 이리 지켜 주지 못해 가슴이 아프구나. 이 불쌍한 아이를 어찌할꼬. 내 유가의 가주에게 할 말을 하고 싶다만, 그리 능력이 되지 못하니 애석하구나.”
“그래, 역시 아는구나.”
유선영이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타심통으로 인한 감정의 전이(轉移)였다. 문겸익의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무림성의 바깥으로 나가서 관도를 따라 동쪽으로 닷새를 달리면 마을이 나올 것이다. 농사로 근근이 먹고 사는 동네지만, 질이 좋아 무림맹의 식료를 대주는 곳이지. 그곳에서 사람이 죽었다. 범인으로 짐작 가는 인물이 두엇 있는 바, 가서 진실을 밝히고 오거라.”
“응.”
“으음, 그, 선영아.”
진철이 아니라 단세명이 부른 목소리였다. 주저하는 듯 더듬었지만, 이름을 그대로 불렀다. 혹여나 대답을 안 해 줄까 전전긍긍, 단세명의 등허리로 식은땀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
다행히 신경 쓰지 않고 대답을 해 주었다.
“이해는 했느냐?”
“얼빠진 질문이오. 부끄러움에 열이 뻗쳐 머리가 녹아내렸나 보오?”
“시비를 거는 것이라면 사양치 않으마.”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쓰라는 소리요. 타심통이라 했잖소.”
“아!”
단세명이 그제야 이해한 듯 칼자루를 놓았다. 유선영의 타심통은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고, 알 수 없는 것이 없다. 이론상이라면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해탈의 경지에 든 중이 될 수 있다. 간단한 임무 정도야 이해 못할 리가 없었다.
“이해했어. 무슨 뜻인지 알아.”
유선영이 살쩍을 쓸어내리며 목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사람을 죽이면 되는 거야.”
문겸익과 단세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린아이가 할 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유선영이 한 소리이기에 어색하게만도 볼 수 없는 말이었다.
진철이 그들의 표정을 보지 못하도록 유선영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가자.”
단세명이 함께 떠나고, 문겸익의 한숨 소리만이 바람에 쓸려 흩어졌다.

“참 멀리도 왔구나.”
진철이 씹어뱉듯 읊조리며 먼지 묻은 피풍의를 집어 던졌다. 분명히 문겸익의 말로는 달려서 닷새 정도 걸리는 거리에 마을이 있다 했다. 그것이 경공(輕功)을 써서 달려 닷새가 걸린다는 것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문겸익 정도의 대단한 고수가 경공을 써서 그 정도였다.
며칠은 마차를 타고 갔다. 하지만 닷새가 지나도 도착하지 않자 마부에게 그 마을까지 얼마나 걸리느냐 물었고, 보름은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놀랐다. 마부는 그 모습에 무언가 사정이 있다 생각한 듯 그럼 더 빨리 가겠다 하여 지름길인 듯한 숲 속을 달렸다. 그러다 웬 마가 끼었는지 푸른 숲의 친구라 자칭하는 녹림도(綠林徒)를 만나 버리고 만 것이었다.
함정에 걸려 마차는 풍비박산. 녹림도는 모두 해치웠으나 마부가 죽을죄를 지었다 하여 눈물을 흘리자 연민이 일어 녹림도들에게서 얻은 재물을 모두 주고 할 수 없이 피풍의에만 의지해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씻지도 못하고 닷새를 더 걸어 도착한 마을이었다. 단세명은 수염이 덥수룩해졌고, 유선영은 예쁜 얼굴에 모래 먼지가 묻어 누렇게 변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눈을 흘기며 수군거리는 모습에 진철은 어흠, 헛기침을 하곤 한 남성에게 물었다.
“안녕하시오. 무림맹에서 왔소만, 혹시 촌장께 언질을 받은 것이 있지 않소?”
상대방은 이리 더러운 일행이 무림맹의 사람인 줄 몰랐던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람을 표했다.
“무림맹에서 오셨습니까? 견식이 미천하여 그만 몰라뵈었습니다. 존성대명이 어찌 되십니까?”
“존성대명이라 할 건 없고, 산동유가에서 왔소이다.”
“그러시군요. 오대세가라는 산동유가에서 오셨다니, 고맙고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과연 마을 전체에 언질이 되어 있던 듯 수월하게 일이 진행되었다. 이상하다는 눈초리의 사람들도 이제는 호의와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한 채 일행을 바라보았다.
진철은 주변을 둘러보며 마을의 수준을 파악하곤 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런데 미안한 말이지만 이런 마을에서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닌 듯한데, 혹시 유명한 학당에서 공부를 하지는 않았소?”
“그런 건 아니고, 부친께서 낙향한 관리셨습니다. 나라의 녹을 먹고살던 자의 자식이 공부를 하지 못한다면 놀림의 대상이 된다 하여 어려서부터 많이 배웠지요.”
“그렇소이까? 알려 주어 감사하오. 개인적으로 호감이 있어 그런데, 이름이 어찌 되시오? 본인은 진철이라 하오.”
“진철 대협이시군요. 제 이름은 유 씨 성에 변이라 하고, 자(字)는 공인(空刃)이라 합니다.”
“공인이라니, 자가 특이하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말라 하여 부친의 친우께서 지어 주셨습니다. 한적한 시골에서 남과 마찰을 빚을 일만 없다면 안빈낙도(安貧樂道)할 수 있을 터이니까요.”
“하하, 맞는 말이오.”
짝짝, 박수까지 쳐 가며 대화를 이어 가는 진철에 반해 단세명은 아무 말이 없었다. 기분 나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박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 했다. 진철이 슬쩍 자리를 피하고 단세명의 옆에 섰다.
“왜 그러시오?”
“상종 못할 냄새가 난다.”
“착한 친구인 것 같은데, 혹시 그냥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싫으신 건 아니오?”
“낭인은 사람들에게 의뢰를 받는 직업이다. 이 정도까지 명성을 쌓으려면 의뢰인과의 소통 또한 중요하지.”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단세명이 누구에게나 모질게 군다면 실력이 좋은들 어찌 이 정도까지 명성을 쌓고 천인살을 이뤘을까. 진철은 놀릴 건수가 못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화제를 이어 갔다.
“그래도 마을에서 한 사람 정도 친한 사람이 있으면 정보를 모으기 쉽지 않겠소?”
“선영이가 있는데 무슨 상관이냐, 읽으면 그만인 것을.”
“글쎄.”
진철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쉽게 알 것 같진 않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