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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검인 1권(9화)
2장 ― 괴뢰(傀儡)의 혼(魂)(2)
“도착했습니다.”
얼마간 걷자 촌장의 집 앞에 도착했다. 마을의 규모에 맞게 아담한 집이었다. 대문의 손잡이를 들고 몇 번 두드리자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누구시오?”
“무림맹에서 왔소.”
“아이고, 그러셨군요.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염소수염을 한, 간사한 모습의 중년인이었다. 진철이 안으로 들어가려다 유변이 보이지 않아 주변을 훑자 그가 돌아가려 하는 모습이 보였다.
“유 공자, 어찌 그리 그냥 가시려 하오?”
“밭에 물을 줘야 합니다. 때를 놓치면 안 되니 양해해 주시지요.”
그리 말하는 것치고는 손에 굳은살이 보이질 않았다. 농사란 어떠한 일보다도 궂은일인 법, 농부와 농부가 아닌 자는 확연한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의 어색한 미소에 진철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후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마을의 촌장인 이유라 합니다.”
“무림맹에서 온 진철이라 하오.”
“단세명이라 한다.”
“……저, 이쪽은?”
낮잠 잘 시간이 되었는지 유선영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진철은 그녀의 머리를 슬쩍 건드려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였다. 그러자 유선영은 편안해졌는지 새근새근 잠에 빠져들었다.
“산동유가의 여식인 유선영이라 하오. 어리지만 출중한 분이시지. 우리 둘은 모두 이분의 호위무사요.”
“아, 그러셨군요. 산동의 유가라니,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높으신 분께서 오셨습니다.”
촌장이 기쁜 듯 파안대소하였다. 여식이라 한들 오대세가의 인물이다. 무림맹에서 자신의 마을을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니 어찌 기쁘지 아니할런가.
“그런데 혹시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진 않으셨습니까? 노정이 많이 길으셨던 듯한데…….”
“준비하는 시간이 길었다.”
“그러셨군요. 미처 생각지를 못했습니다.”
단세명이 딱 잘라 말하자 촌장이 머리를 조아렸다.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다. 산적을 만나 곤욕을 치렀다 말한다면 위엄이 서지 않을 것이다. 진철이 변명을 생각하느라 바로 답하지 못한 것에 비해 단세명의 반응은 확실히 노련했다.
“그보다 빨리 일처리로 들어가도록 하지. 사정을 설명해라.”
“알겠습니다.”
커흠, 하고 헛기침을 한 촌장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곤 말을 이었다.
“넉 달 전부터 일어난 일입니다.”
촌장의 설명은 이러하였다. 넉 달 전에 사람이 하나 사라졌다. 무림맹으로 가던 길에 들러 여독을 풀려 하던 무인이 간밤에 사라진 것이다. 처음에는 바쁜 일이 있어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로부터 보름 후 마을의 대장간에서 일하는 철 노인이 사라졌다.
그리고 또다시 보름 후에는 재단을 하던 육 노파가 사라졌다.
그렇게 보름 간격으로 외지인, 토착민 할 것 없이 사람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꽤나 이름을 날렸다는 무림 고수도 존재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점차 불안해졌고, 그 여파는 마을 사람들의 생활 수단인 농사의 생산량에도 미치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다.
“자체적으로 조사할 생각은 하지 않았소?”
“마을의 젊은이들이 자경단을 만들어 범인을 색출하려 하였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습니다. 무림인조차 해치우는 범인을 어찌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하긴.”
무림맹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마을이라서 무림인과 이리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지, 보통의 민초들은 무림인에게 막연한 경각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무림인은 같은 인간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선인, 혹은 유부에서 기어 올라온 나찰이나 마찬가지였다. 범접할 수 없는 괴물을 젊은이라 하여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무림 동도들께서 도와주신 관계로 주변은 샅샅이 수색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출된 결론이 우리 마을에 범인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 사실을 마을에 알렸습니까?”
“아니요. 그랬다간 마을이 풍비박산 났겠지요.”
다행히 머리는 잘 돌아가는 촌장이었다. 불안감으로 인해 제대로 된 생활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 범인이 같은 마을 사람이라는 소문이 돈다면 마을은 그걸로 끝이었다. 불신이 깊어지고 불안감이 높아져 마을을 떠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버린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심리였다.
“제 듣기론 무림인은 같은 고수를 알아본다고 하였습니다. 두 명 정도 마음에 담아 둔 사람이 있어 말씀드릴 터이니, 직접 보고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길게 하여 목이 타는지 촌장은 다 마신 차를 또 따라 마셨다.
“한 명은 아까 보았던 유변이라는 젊은입니다.”
“유 공자?”
“사실 그 젊은이는 일 년 전 실종되었던 사람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단세명과 진철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사람이 사라지는 사건이 처음으로 벌어진 후, 하루 뒤에 갑자기 나타나더군요. 온몸은 먼지투성이였고 산적에게 잡혀가다 지나던 고인께서 살려 주셨다 하였지만, 수상하다고 생각하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부친은 어떻게 행동하였소? 낙향한 관리라 하시던데, 연줄을 이용해 관병을 움직일 수도 있는 일 아니오?”
“그게 참으로 이상합니다. 아들이 사라지고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반년가량을 술만 마셔 댔고, 그 후부터는 매일 아침 어디론가 떠나서 밤마다 돌아오는 겁니다. 아들이 사라진 슬픔을 잊으려 일이나 하고자 관청에 들어갔던 것인지 어떤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수상하긴 했다. 우연의 일치라 할 수도 있겠지만, 불온한 때가 아닌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것은 모두 의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이상한 자가 있습니다. 이자는 반년 전에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도인(道人)입니다. 하지만 가끔씩 보면 눈이 충혈되어 있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祭)를 올려 달라 하였더니 토끼와 같은 산짐승을 여럿 죽여 그 피를 뿌리는 겁니다. 혹시나 그처럼 사람을 죽이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가는지라…….”
반년 전에 마을로 들어왔다고는 하나 그 정도 시간이 지났다면 이미 외지인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나눌 수 있는 바, 그 친분을 이용하여 도에 관련된 일이라 속이고 현혹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다.
“알겠소. 확인하고 사건이 해결되었을 시 말해 주겠소.”
“무언가 들어온 정보가 있거나 하면 얘기해 드리겠…….”
“그럴 필요 없소.”
진철은 유선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만일 어려운 사건이라 하더라도 숨겨 봐야 소용없으니까.”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무엇을 말이오?”
촌장의 자택에서 나와 대로를 걷는 중이었다. 햇볕은 쨍쨍하고 하늘은 푸르며 구름은 하얗다. 오랜 여정 때문인지 조금은 나른한 기분마저 드는 오후였다.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 건지에 대한 이야기지, 무슨 이야기일 것 같으냐?”
단세명이 인상을 찌푸리고 으르렁거렸다. 이 마을에 들어오고부터 짜증이 배는 늘어난 것 같다.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으면 성이 나는 성격인가 보다.
“선영이한테 맡기면 될 일이지.”
잠이 다 깨지 않아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걷는 유선영이었다. 왼쪽 사선으로 두 걸음 걷고, 오른쪽 사선으로 두 걸음 걷는다. 걸음마다 중심이 쏠려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눈은 뜬 건지 감은 건지 모를 정도이니, 어디 부딪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진철은 그녀를 보며 업어 줄까 말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리한다면 우리나 유가의 너구리나 똑같은 꼴이 되는 게 아닌…….”
“한 시진도 지나기 전에 선영이만 있으면 된다 하였던 사람이 그리 말씀해도 되오?”
“큭.”
말이 바뀐 계기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걱정은 진심이었다. 진철이 보이지 않게 한 번 웃곤 유선영을 업었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여기에 있을 것이 아니라면 선영이의 역할은 꼭 필요하오.”
“꼭 네놈 혼자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제대로 들었소. 귀는 바꾸지 않아도 되겠군.”
“뭐……?”
단세명이 발걸음을 멈추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이리 오만하고 장난스러울 수가 있을까. 실력이 있단 것은 알지만, 그래도 겸손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무얼 그리 놀라시오? 간단한 이야기 아니오.”
“간단하다고? 무엇이?”
“이 사건 말이오. 한 번 들으니 다 알겠더만 뭘.”
“저런 지리멸렬한 이야기를 듣고 뭘 알 수 있다고?”
“범인 말이오, 범인.”
“버엄이인?”
비꼬려는 양 단세명이 말꼬리를 늘였다.
“그리 놀라실 필요 없소. 무식하게 몸만 놀리는 그대와는 달리 본인은 머리를 놀리는 것이 특기니까 말이오. 제갈공명과 여봉선을 비교하는 격이오.”
“……내가 왜 그 허망하게 패배한 군주인 여포인 거냐?”
“강호라는 개념조차 확립되지 않은 당시의 무신(武神)에게 그리 말해도 되겠소? 오히려 그대가 무신의 명에 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윽!”
그럴지도 몰랐다. 단세명이 고개를 팩 돌리고 진철의 말을 곱씹었다. 신기제갈과 인중여포. 의외로 기분이 좋다. 무신과의 비교라니, 극찬을 한 것이 아닌가. 단세명의 얼굴이 환해졌다.
“거, 비위 맞추기도 쉽군…….”
“뭐라 했느냐?”
“선영이 자니까 조용히 하라고 했소.”
“…….”
표현이 확실하니 좋다.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떻게 저런 성격으로 천인살을 이룬 낭인왕 후보라 불리며 전장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을까? 같이 있으면 심심할 새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사건은 해결해 봐야 하나도 재미없을 텐데.”
원하는 건 얻지 못하고, 얻은 것은 원치 않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세상일이란 게 다 그러한 것이라지만, 그래도 원망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고래로 누구 하나 원하는 대로 다루지 못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닌가.
“그건 그렇고, 멀리 갈 필요 없이 바로 보이는군.”
“저 녀석?”
멀리서 멍하니 걸어가고 있는 유변이 보였다. 멍한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인의 것처럼 하얗고 고운 손에는 물기 하나 없으니, 말라 버린 것인지 처음부터 묻히지 않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 공자.”
“아, 진 대협.”
누군가가 조종하는 인형처럼 유변이 진철과 대면한 순간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림으로 그린 듯 은은하게 짓는 미소는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느낌이 있었다. 하나 단세명은 기분 나쁜 듯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마디도 하지 않는 그 대신 진철이 말을 걸었다.
“농사일을 하러 갔다더니, 그리 빨리 해결될 일이었소?”
“가서 보니 부친께서 일을 해 두셨습니다. 제 일이라 하였지만 부모가 자식을 돕는 것이 무에 불만이시냐며 화를 내더군요. 그래서 할 일도 없어진 바, 한적하게 산보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에 물기 하나 없었군. 나는 네놈이 상황을 벗어나려 거짓말을 한 줄 알았다.”
단세명이 단번에 중심을 찔러 들어갔다. 노련한 화술은 어디 갔는지, 참으로 직설적이었다. 어린놈에게는 그럴 필요조차 없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진정한 천재가 아닌 이상 어린 사람은 손윗사람의 추궁에 흔들리기 마련이니까.
“하하, 제가 자리를 피할 필요가 있습니까? 무림맹에서 일을 처리하는데 저 같은 촌놈이 같이 들어갔다 혹여 방해나 되지 않을까 싶었고, 정말로 일을 해야 되어서 그랬을 뿐입니다. 대협께서는 농이 지나치십니다.”
“그런가?”
단세명이 들리지 않게 혀를 끌끌 찼다. 능구렁이인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흔들림 하나 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니, 정말로 그래서 그런 것인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건 그렇고, 혹여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친이 어디 계신지 알려 주실 수 있소?”
“부친께 용무가 있으십니까?”
“낙향한 관리이시지 않소. 이런 사건이라면 관에서도 자체적으로 조사를 했을 것이 분명한 바, 조그마한 단서라도 듣기 위함이오.”
능구렁이 같기로는 진철도 만만치 않았다. 순간적인 대응은 조금 미진할지 몰라도 미리 생각하고 변명을 하는 것은 단세명보다 진철이 뛰어났다. 단세명조차 속아 넘어갈 지경이니 유변이 의심할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유씨 일가의 저택은 마을의 외곽에 존재했다. 확실히 신분이 다른 집안이라 그런지, 집이 다른 곳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크기는 비슷하지만 무언가 고풍스러운 면이 있다고 할까.
“그런데 도대체 왜 이곳까지 온 것이냐?”
단세명이 유변에게 들키지 않게 진철의 뒤통수를 잡고 소곤거렸다.
“의심스러운 사람을 조사할 뿐인데 뭐가 그리 불만인 것이오?”
“저 녀석의 마음을 읽으면 될 일 아니냐. 범인인지 아닌지만 알면 될 텐데, 이렇게 탐문조사 나올 필요가 있느냐?”
“선영이 자잖소.”
“그야 그렇지만…….”
“그리고 선영이가 깨어나 봤자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소.”
“어째서?”
“그건 나중에 설명할 터이니 지켜나 보시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일을 저지르는 걸까, 혹여 일이 틀어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기는 하지만, 원체 비밀스러운 녀석이니 뭐라 대꾸할 말도 없었다. 단세명은 진철의 바람대로 조용히 경과나 지켜보기로 했다.
“아버지, 소자 변입니다.”
“들어오너라.”
건물의 안으로 들어서자 한 노인이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책을 읽고 있었다. 피곤한 것인지 눈에 실핏줄이 서 있었다. 책을 덮고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던 노인은 아무런 말이 없자 눈을 뜨고 유변을 보다 놀라움을 표했다.
“이분들은?”
“무림맹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근래에 일어난 사건의 해결을 위해 오셨다는군요.”
무림맹이라 이야기한 찰나, 그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진철은 그에 무언가 확신한 것인지 슬쩍 눈을 감았다 떴다.
“무림의 대협들이셨구려. 어서 오시게, 유차정이라 하네.”
무림인에 대해 잘 아는 듯 유차정은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진철이라 하오. 이쪽은 산동유가의 유선영 아씨요.”
“단세명이라 한다.”
진철과 단세명은 짧게 이름을 말하며 똑같이 포권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쪽으로 앉으시게. 먼 길을 오셨을 테니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을 것 아닌가. 변아, 차를 끓여 오거라.”
“네.”
자연스럽게 유변을 바깥으로 내몰았다. 유변 또한 그것을 알았는지 조용히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갔다.
“자, 그럼 서로 괜히 시간 끌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게나.”
조용히 앉아 서로를 바라보는 관찰의 시간 후, 유차정이 운을 뗐다.
“나를 찾아온 것으로 보아 관청의 정보를 요구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또한 딱히 가진 정보는 없네. 무림과 관은 불가침의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가. 무림인의 짓일 것이라 판단한 후로는 손을 떼었네. 아마 원하는 정보 같은 것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하네.”
유차정이 서랍을 뒤져 몇 장의 종이를 꺼냈다. 사건을 기록한 종이였다. 그의 말대로 누가 사라졌는지, 어디서 흔적이 끊겼는지 등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범인을 누구라 특정할 수 있을 만큼의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확실히 그렇기는 한 것 같소이다.”
진철은 종이를 눈으로만 슬쩍 훑고 그것을 옆으로 치웠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었소. 이곳에 온 것은 그저 확신을 하기 위해 온 것뿐이오.”
“확신이라니, 무슨 소린가?”
“범인을 알고 있소.”
탁자에 둘러앉은 인물들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사실인가? 무림맹의 정보력이 그 정도라니, 확실히 무림의 일은 그들에게 맡길 법도 하군.”
“무림맹의 정보력은 아니요. 촌장이 해결해 달라 편지를 보내고 바로 온 것이 본인들인데 어찌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 수 있었을까. 그저 본인이 정황을 듣고 추측을 했을 뿐이오.”
“으응.”
때마침 잠을 푹 잔 것인지 유선영이 눈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진철이 그녀의 부스스한 머리를 쓰다듬자 유차정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허허 웃었다.
“그래서 추측은 어떠한가? 내 태도에 확신이 설 수 있었는가? 허허, 자네의 태도는 꼭 내가 범인인 것 같지 않은가.”
“그럴 수도 있겠지.”
수염을 쓸어내리던 유차정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아버님, 들어가겠습니다.”
때마침 차를 모두 끓인 것인지 유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차를 끓이는 법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듯 떫은맛이 강했다. 하지만 나른한 정신을 번쩍 깨우기에는 오히려 안성맞춤이었다. 후루룩, 차를 한입 마신 진철이 유차정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소.”
딸깍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러니 묻겠소이다.”
단세명이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인가?”
유차정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며 노한 기운을 표했다.
“당신의 진짜 아들은 어디에 있소?”
진철이 폭탄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