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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검인 1권(10화)
2장 ― 괴뢰(傀儡)의 혼(魂)(3)
“……그게 무슨 소리인가?”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거운 정적이 지나간 후, 유차정이 평정을 되찾은 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요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상대방의 저의가 무엇인지 짐작하려는 듯 시선만이 날카로웠다.
“말 그대로요. 이해하지 못하였다면 쉽게 얘기해 드릴 수 있긴 한데…… 아, 이런. 실례를 저지른 것 같소. 본인이 그만 연세를 생각하지 못했군.”
직설적으로 말해서 ‘당신, 나이도 많은데 내가 그만 배려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어른 대접을 받는 것이 좋은 사람이 있고, 젊은이같이 생각해 주는 것이 좋은 사람도 있다. 유차정은 후자인 듯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그리할 필요 없네. 그저 예상치 못했던 말을 하여서 되물었을 뿐이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인 것이 당연하오. 이리 들통 날 줄 누가 알았겠소? 본인이라 해도 놀라서 자지러졌을 것이오.”
사건의 중심을 찌르는 태도가 참으로 대담하고도 편안했다.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 중이라 착각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잠깐 기다려 주시지요, 진 대협. 저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가 아버님의 아들인데, 도대체 무슨 숨겨진 아이가 있다는 겁니까?”
유변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경악, 분노, 경멸의 어두운 감정. 진철이 코웃음을 쳤다.
“잘 알고 있을 텐데, 참으로 오해하기 쉬운 화제로 돌리는구려. 본인이 언제 숨겨진 아이가 있다 했소이까? 자식 된 자로서 부외자의 한마디에 아버지가 혼외자식을 낳았다 의심하는 것이오, 아니면 무언가 본 것이라도 있으시오?”
“그, 그런 소리가 아니라…….”
“그것이 아니라면 본인이 무슨 저의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제대로 파악하시오. 본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오.”
진철은 단숨에 유변을 논파시키고 말했다.
“죽었을 자식이 도대체 어떻게 살아나 생활하고 있는 것이오?”
“…….”
단세명은 화제를 따라가지 못한 듯 입을 헤 벌린 채 멍하니 있었고, 유차정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유선영이 점차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에 눈을 몇 번 비비고 기지개를 켠 후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도대체 왜 이번엔 그리 심하게 말하였을까?”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누가 말한 것일까? 목소리의 주인을 찾던 사람들의 시선이 유선영에게 멈추었다. 어린 유선영을 위해 일부러 가져온 작은 찻잔을 들고 한 번에 들이켰다. 마치 독한 화주를 들이키는 듯 화통하고도 애통한 손짓이었다.
“도대체 왜 이번엔 그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것이냐?”
떨리는 목소리.
“평소에 그리 힘들었다면 말할 수 있었지 않느냐?”
흐르는 눈물.
“내가 그리도 너에게 부담스러웠더냐? 내가 그리도 너에게 무서운 사람이었더냐?”
유선영의 초점이 멀어졌다. 먼지 쌓인 탁자, 주눅 든 표정, 오가는 고함, 사라진 온기.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어미가 없는 아이였기에 누구보다도 강하게 키우고 싶었다. 정계의 칼 없는 전쟁에서 패했다 한들 자식마저 무시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효를 모르고 예를 무시하며 법을 멀리하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칭찬을 지양하고, 배움만을 가까이하였다. 그것이 그리도 버틸 수 없는 일이었더냐?”
부서진 마음.
“내 사랑은 너에게 조금도 닿지 못하였던 것이냐?”
일그러진 추억.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다. 내가 너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다. 부모 된 사람이 자식이 바라던 것을 하나도 몰랐다. 아버지란 무릇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만, 네 생각은 아니었다.”
세상과의 단절을 원하듯 눈을 감고 팔짱을 끼었던 유차정의 손끝이 움찔하고 떨렸다.
“하지만, 하지만 그리한들 이리 벌을 줄 필요는 없지 않았느냐. 도대체 왜! 도대체 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냐! 떠났다면 편안히 지냈어야지! 아비를 보지 않겠다면 몸이라도 건강해야지!”
유차정의 두 손이 팔뚝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아비는 미워해도 과거는 미워하지 말았어야지! 세상을 몰랐다면 아는 척이라도 했어야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돈을 보여 산적에게 잡혀 죽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 길을 가면 보이는 것이 낭인이요, 무림인이요, 관군이건만, 왜 누구도 고용하지 않은 것이냐! 재산을 가지고 갔다면 탕진할지언정 몸은 보전해야지! 천금을 주더라도 네 목숨을 팔지 않을 것이건만, 도대체 왜!!”
그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도대체 왜 죽은 것이냐!!”
기억이 멀어져만 갔다.
“내가 무슨 잘못을 그리하였다고,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죽은 것이냐!! 하늘이 무슨 자격으로 내 자식을 빼앗아가는 것이냐!!”
원통함이 뼈에 사무쳤다.
“용서할 수 없다. 하늘이 나의 보물을 빼앗아 가겠다면, 나는 하늘의 법을 저버릴 것이다. 도리를 저버리고서라도 나는 내 자식을 살려내고 말 것이다!”
누구도 몰랐을 결심이 작은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 입 다물지 못할까──!!”
유차정의 집을 넘어 대로변에까지 울릴 정도의 고성이었다. 무림인이 내공을 사용하여 소리를 질러도 이 정도 크기의 고성을 지를 수 있을까?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온 비명과 절규가 유선영의 말을 막았다.
“모두, 모두 떠나라. 피곤하여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다.”
“아, 아버지?”
“모두 떠나라 하지 않았느냐! 변이, 너 또한 나가라!”
쨍그랑!
던진 찻잔이 유선영의 귓등을 스치고 벽에 부딪쳐 깨졌다. 주르륵 흐르는 찻물은 유차정의 마음을 대변하듯 음울하고 질척하게 벽을 물들였다.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으신 듯하니 이만 가겠소.”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의 유차정이지만 진철은 하등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태연하게 행동했다. 유선영을 일으켜 손을 잡고 나갔다. 단세명 역시 모든 상황을 파악한 듯 문 앞에서 유차정을 향해 잠시 시선을 보내곤 바깥으로 나갔다.
“아버지…….”
“나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노년에는 진심으로 화를 내기도 쉽지 않은 법이다. 다리에 힘이 빠진 유차정이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뉘이며 눈을 감았다.
대화를 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 축객의 표현이었다. 유변은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살펴보곤 바깥으로 나갔다.
“아, 죄송합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눈을 감고 걷고 있자니 누군가와 부딪쳤다. 진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변이 냉큼 사과하였다.
“쯧.”
그러나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지금껏 본 진철의 성격이라면 분명 겸양을 표하며 괜찮다 말할 것이었다. 하나 상대방은 혀를 차곤 유변을 거칠게 밀쳤다.
펄럭이는 도복, 구겨진 도관(道冠), 은은하게 풍기는 피 냄새가 음험했다.
“도사?”
유변이 무심코 중얼거리자 도사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만 돌렸다. 매부리코에 찢어진 눈동자가 좋게 보려 해도 볼 수가 없는 인상이었다. 사이한 뱀의 혓바닥처럼 그의 입이 몇 번 들썩였다.
“시체 주제에 나를 부르지 마라.”
유변은 그의 살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유변은 호랑이에게 노려진 토끼처럼 오금이 저려 움직일 수 없었다.
촌장의 배려로 얻어 낸 한 폐가. 유차정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리될 줄 알았다는 듯 깨끗하게 청소하여 새집 같아 보이는 건물이었다. 물론 짧은 시간 안에 청소를 하였기에 자세히 살펴보면 곳곳에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었지만, 척 보기에는 깨끗해 보이니 따질 이유는 되지 못하였다.
“사정은 알았다.”
침상에 털썩 누워 여유를 부리는 진철이 아니꼬웠는지 단세명은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던졌다.
“무엇을 말이오?”
“네놈의 과정을 건너뛴 말과 선영이의 타심통으로 대충 무슨 사정인진 파악했단 말이다.”
“설명이 없으면 무엇도 알지 못하니, 참으로 대단하신 선배요.”
진철의 비아냥거림도 이번엔 단세명에게 통하지 않았다.
“기분 안 좋으니 말장난 치지 마라. 그보다 네놈은 이 모든 사정을 어떻게 알아낸 것이냐? 촌장과의 대화만으론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었는데.”
“비밀이오. 남의 밑천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알아내려 하면 본인의 주먹이 흐느끼지 않겠소?”
“얼마면 되겠냐?”
장난스러운 진철에 비해 단세명은 진지했다. 단편적이고 쓸모없는 정보를 모아 조합하고 추측한다. 얼핏 듣기엔 그리 깊이 들어갈 필요가 있나 싶지만, 검의 날을 밟고 줄타기를 하는 것이 무림인이라 어떠한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다면 목숨이 하나 더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철의 재능 혹은 능력은 절정고수인 단세명이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얻고 싶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돈으로는 안 되오. 세상천지의 금을 모아봐야 쓸 수나 있을까.”
국가 규모의 예산조차 부족하다는 오만한 발언이었다. 단세명이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목숨.”
굵은 저음이 귓전을 메아리쳤다.
“당신의 목숨이면 충분하겠지.”
“…….”
알고자 한다면 생사결의 결의를,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라.
단세명이 슬그머니 박도를 빼 들고 운명을 저울질했다.
얻을 것이냐.
죽을 것이냐.
선택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칫, 싫으면 말아라.”
아교처럼 찰싹 달라붙었던 손이 박도의 손잡이에서 떼어졌다. 진철에게 덤비기엔 실력이 부족했다. 객관적인 판단도 그렇고, 주관적인 느낌도 그랬다. 덤벼 봐야 개죽음일 뿐이다. 분수를 넘은 물건은 탐하지를 말아야지.
진철이 씨익 웃었다.
“좋은 판단이오.”
어느새 나타난 단검 한 자루가 진철의 손가락 사이를 왔다 갔다 하였다. 베이지나 않을까 단검의 날이 아슬아슬하게 피부를 빗겨 갔다. 복잡하고 어려운 기예였다.
그렇다고 뚫어져라 쳐다봐도 쓸모는 없었지만.
“그렇다면 대신 하나 설명해 줘라.”
“말해 보시오.”
“왜 도발했지? 범인을 알았다면 그대로 끝을 내면 됐지 않느냐?”
유차정은 방에 들어갔을 당시 방심하고 있었다. 그 후 진철이 사건의 핵심을 냉큼 짚기 직전까지도 그러하였다. 그를 죽일 시간은 차고도 넘쳤다.
“선영이가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농담은 집어 치우라 말해 주마.”
“……진짜로 조금은 그런 이유긴 하다만. 뭐, 태반을 차지하는 이유는 다르지만 말이오.”
진철이 벌떡 몸을 일으키고 어깨를 풀었다. 뚜두둑, 뚜둑, 경쾌하게 뼈가 울렸다.
“그를 죽여 봐야 흉수(凶手)가 나타날 리 없기 때문이오.”
“흉수? 유차정이 아니란 말이냐?”
“정쟁에서 패한 일개 관리가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소. 조력자가 없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지. 그리고 그 조력자는 아마 촌장이 말한 도사일 것이오. 그가 어떠한 사술을 부려 천리(天理)를 거슬렀겠지. 의심스럽다 말한 둘 중 하나가 범인이 아니라, 둘 모두가 연관된 범인이오.”
이번엔 일어나서 쿵, 쿵, 위로 몇 번 뛰고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세명 또한 슬그머니 일어나 멍하니 있는 유선영의 옆에 섰다.
“그리고 그 정도 술법을 부릴 수 있는 자라면 필시 실력 또한 뛰어나겠지. 막무가내로 쳐들어가 봐야 꽁무니조차 찾지 못할 것이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고 했지만, 그건 머리를 쓸 줄 모르는 바보들의 하책이오. 상책은 자신이 있는 곳으로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것이지.”
진철이 오른발을 한 번 굴렀다.
“바로 이렇게.”
펑!
정면의 벽이 부서지며 돌 조각이 비산했다. 황권과의 싸움에서 보여 줬던 상승의 기공. 절정을 넘어 새로운 경지에 이른 황권조차 알아채지 못했던 공격을 적이 알아내기란 묘연했다. 솟아오르는 먼지 사이로 한 인영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역시 우리를 죽이러 왔군.”
유차정에게서 사정을 모두 들었다 해도 아직은 전말을 모두 모른다 판단, 방심할 때 진철 일행을 쓰러뜨리고자 한 것이었다. 진철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손 아래로 은사(銀絲)를 늘어뜨렸다.
쾅! 쾅! 쾅! 쾅!
문과 벽을 부수며 네 인영이 진철에게 칼을 휘둘렀다. 검술의 교본에나 나올 법한 깔끔한 자세였다. 틈 하나 없이 올올이 얽힌 검격의 그물이 진철을 옭아맸다.
“물론 그 판단은 옳지 못한 판단이었고.”
진철의 두 손이 명치 부근에서 교차하였다. 천망회회(天網恢恢), 방 안을 가득 메운 은사가 검격을 튕겨 내고 검을 조각내며 인영을 토막 냈다. 압도적인 무공의 차이에 진철의 정면으로 혈로가 그려졌다.
“꼬리가 밟혔소, 말코.”
흔적만이 쌓인 벽 너머로 창백한 인상의 도인이 입술을 깨물며 서 있었다. 얼굴 가득 초조함이 드러났다. 만약에 대비하긴 하였지만, 이렇게 수준의 차이가 날 줄은 몰랐던 탓이다.
“말도 안 되는…….”
쇠를 긁어내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 마르고 갈라져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하늘의 도를 깨우치고 우화등선을 목표로 한다는 도사가 이런 자라면 원시천존이란 불필요한 존재이리라.
“단철호도의 명성은 들어 봤지만 네놈의 이름은 들어 보지 못하였다. 네놈은 도대체 누구기에 그리 강한 것이냐?”
도인은 인형과 자신의 술법을 합친다면 낭인왕 후보인 단세명이라 하더라도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진철이 무위를 드러내며 일이 틀어져 버렸다. 검술의 고수인 부하 다섯이 삽시간에 목숨을 잃었다. 단번에 반이나 되는 전력이 사라진 것이었다.
“글쎄.”
진철은 물음에 답하지 않고 그를 비웃었다.
“그 목숨만 내놓는다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소.”
“헛소리를!”
노호성이 메아리친 순간, 다섯 무인이 도인의 앞에 신형을 드러냈다. 도(刀), 창(槍), 편(鞭), 봉(棒), 겸(鎌)의 다섯 병기를 든 무인이었다. 특이하게도 전신의 피가 빨려 나간 듯 피부가 하얗고,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강시(僵屍)?”
단세명이 무심코 말하며 놀라움을 표했다. 일개 도사가 열이나 부릴 정도로 강시의 술법은 만만치가 않았다. 무공이라고는 견식조차 못한 민초를 강시로 부리는 것조차 대단한 일인데, 무림 고수 열이라니. 그 어두운 도력(道力)의 끝이 어딜까 두려워지기까지 하는 순간이었다.
“강시라 하기에는 관절이 많이 부드럽지만.”
드러난 기운에 비해 움직임이 조금 딱딱하긴 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거의 티도 나지 않았다.
“내가 만들어 낸 비전의 도술이다. 일개 강시라 생각하지 마라.”
강시가 맞나 보다. 거기에 자존심이 강한 듯 그런 소리까지 했다.
“그래 봐야 어차피 강시.”
진철의 두 손이 춤을 췄다. 연주하듯 탄력 있게 공중을 널뛰는 손가락에 수십 가닥의 은사가 강시들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