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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검인 1권(15화)
3장 ― 호부견자(4)


풀벌레 소리가 희미해질 정도로 늦은 밤. 휘영청 뜬 보름달이 별빛을 흐리며 고고히 밤하늘을 수놓았다. 구름 하나가 스르륵 다가와 달빛을 가릴 무렵, 한 인영이 유가 저택의 담벼락을 넘었다.
“…….”
발소리 하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수준급의 은신 실력이었다. 얼굴을 가린 복면 또한 검은색이라 나무 그늘에 숨으니 사람이 있다고는 믿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주변을 살핀 인영은 누구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슬며시 걸음을 옮겼다.
나무에서 지붕으로, 지붕을 넘어 창문으로. 역동적인 신법에 유(柔)함이 묻어나니 공부가 절정에 이르렀다 할 수 있었다. 인영이 몇 갠가의 창문을 확인하곤 마지막 하나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
원하던 것을 찾은 것인가. 인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작아졌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한 번 내쉬는데, 안도로도, 한심하다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인영이 복면의 연결 부분을 다시 한 번 살펴 고정하고는 창문을 열었다. 소리 하나 나지 않고 들어서 누워 있는 사람에게 다가간다. 온몸에 묶여 있는 붕대, 풀린 붕대 사이로 흉터와 핏자국이 드러났다. 남궁수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인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상대로군.”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 인영이 경악하여 허리춤에 매어 두었던 검을 뽑아 휘둘렀다. 횡으로 휘두르는 일수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진기와 군더더기 없는 몸놀림. 바람을 가르는 장쾌한 일검에 벽장이 반으로 갈라졌다.
“삼공자! 일어나시오! 적이오!”
훌쩍 인영을 뛰어넘은 진철이 남궁수를 흔들어 깨웠다. 상처가 커서인지 깊이 잠들었던 남궁수지만, 혈도를 매만지며 기운을 자극하자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습, 격자?”
“그렇소. 습격자요! 그대를 노렸소!”
아직 잠에 취해 있던 남궁수의 정신이 번쩍 깼다. 열린 창문, 늦은 밤 창을 타고 들어온 복면의 괴인, 흘러간 구름 너머로 비치는 달빛에 빛을 발하는 장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었다. 이럴 예정이 아니었다. 복면인의 동공에 당혹감이 감돌았다.
“결국, 이제는 나를 죽이려고까지 하는구나. 남궁세가, 이번 사건을 빌미로 연을 끊자는 소리구나.”
남궁수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증오심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궁수가 원을 많이 맺었다고는 하지만 살수를 보낼 정도로, 그것도 무림맹 내부 산동유가의 별채에 사람을 보낼 정도의 거물은 건드린 적이 없었다. 의심 가는 것은 단 하나, 남궁세가. 그의 추측에 복면인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창문을 넘어 몸을 뺐다.
“어딜!”
그러나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가 있었다. 단철호도 단세명, 그의 박도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세 줄기 번개를 불렀다.
쩌저정!
“큭!”
복면인에게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방심한 사이 파고들어 온 일격이었다. 검을 타고 흘러든 막대한 진기에 그만 땅으로 떨어져 검을 세 번이나 휘돌리고서야 충격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 시간이면 남궁수와 진철이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까드득.
분노와 증오에 찬 시선이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연마저 끊어 버린 가족임에 그 누구에게 받은 상처보다도 가슴에 깊이 남은 흉터. 입술을 움직이는 듯 복면이 달싹이고, 진철의 손가락이 다섯 가닥 은사 위를 춤췄다.
촤악!
얼굴의 반을 정확히 가로지른 은사. 그러나 흘러내린 것은 복면뿐이었다. 이어 환한 달빛이 그를 비추었다.
“……형?”
남궁수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울리는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복면이 흘러내린 복면인의 얼굴은 남궁수에게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웠던, 익숙하던 얼굴이었다.
반룡 남궁천, 남궁세가의 일공자였다.
“…….”
이미 다 드러난 마당에 몸을 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모든 것을 예측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산동유가의 호위무사들을 얕본 탓일까? 남궁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입술마저 말라붙어 있었다.
“남궁세가 일공자, 남궁천. 처음 뵙겠소. 산동유가 유선영 아씨의 호위무사인 진철이라 하오.”
말 한마디 없이 눈빛만을 교환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것은 진철이었다. 거침없이 나아가 대담히 자신을 밝혔다. 남궁천의 눈빛에 살기가 어리더니, 그를 향해 해일과도 같은 압도적인 기운이 쏘아졌다.
“장난이 지나치시오. 인사를 건넸을 뿐이온데, 이것이 명가라 불리는 남궁세가의 방식이오?”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기자 빛조차 반사하지 않는 은사가 거미줄처럼 진철의 앞을 가로막고 기운을 흘려 냈다. 일수만으로 반룡이라 불리는 남궁천의 기세를 미풍처럼 흩어 놓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남궁천이 검병을 손아귀가 으스러져라 쥐며 긴장을 표출했다.
“천 형.”
남궁수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잠겨 있었다.
“형마저도, 나를 이렇게 버리려는 거요?”
뻗은 손에는 새살이 돋아난 흉터들뿐이었다. 누구와 싸운 것일까? 몇 년에 걸친 방황이 있어야 저런 흉터가 저 새하얗던 손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걸까? 남궁천의 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수야, 그런 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뭡니까? 저를 찾으신다면 당당히 마주하면 되지, 왜 복면을 쓰고 검을 빼 든 채 자고 있는 제 앞에 서 있던 겁니까?”
“그건, 오해다.”
“오해라고 하는 겁니까? 그것이 오해라고요? 만일 이들이 제 옆에 없었다면, 그것이 오해였을까요? 제 목숨이 떨어지고도 그것이 오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내가 도대체 왜 네 목숨을 노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상황이 그런 것을 제가 어찌합니까! 형님이라면 제 처지에서 그리 생각하는 것 말고 달리 어떤 방도가 있을 것 같습니까!!”
남궁수의 목소리에는 긴 세월 꾹꾹 눌러 담긴 슬픔과 울분이 뭉쳐 있었다. 아직 스물도 되지 못한 어린아이다. 방황한 지 수년, 가족의 사랑을 언제 받아 봤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 세월이었다. 자신을 바라봐 달라던 어리광, 사랑을 바라던 어리광, 결국 도가 지나쳐 미움만 받게 되었던 어리광.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가족은 자신을 버렸다.
“…….”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오해를 풀 수 있을까? 그러나 남궁수의 비통한 외침이 한 자루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히니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따끔한 통증만이 느껴졌다.
“됐습니다. 이만 끝냅시다. 그들이 저를 버리기로 결심했다면, 저 또한 모든 것을 놓으렵니다. 더 이상 저를 신경 쓰지 마시지요. 남궁이라는 천하제일세가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바보는 그만 생각하시고, 반룡의 창창히 빛나는 미래만을 생각하십시오. 그리도 바라던 제 목숨, 이제는 내놓으렵니다. 원하는 대로 내놓을 터이니, 죽어서는 제 영혼이라도 편안히 놓아주십시오.”
더 이상 바라는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린 남궁수였다. 무릎을 꿇고 남궁천의 앞에 목을 조아리니,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의 목을 베어 달라, 그 요청을 들은 남궁천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지금 뭐하고 있느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어서 일어나지 못할까! 남궁세가의 삼공자라는 자가 그리 쉽게 자신의 목을 내놓아도 되겠느냐!”
멱살을 잡고 남궁수를 일으켰다. 허망함이 깃든 공허한 눈빛이 남궁천과 마주쳤다.
“남궁세가 삼공자가 아닙니다.”
“너는 남궁세가의 삼공자다! 네가 삼공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삼공자란 말이냐!”
“삼공자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없었고, 지금도 없었어야 할 이름입니다.”
허탈한 웃음.
“주워 온 자식이, 어떻게 남궁세가의 자식이라 불리겠습니까.”
놀라운 소리에 남궁천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그걸 어떻게…….”
알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갓난아기 적에 데려와 같은 가족이라 하더라도 지나칠 정도의 많은 배려를 해 줬다. 부족함 없이 자라게 하고,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될 사실은 알려 주지 않고, 가족으로서의 필요한 모든 도리를 해 줬다 생각했다. 이 아이의 앞에서만큼은 누구든 말을 조심했다. 자신들을 진짜 가족이라 여기게 만들었다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아는가. 그리도 숨기던 진실을 이 아이가 어떻게 알고 있는가.
“나도 사실은 그 녀석이 싫다.”
흘리는, 그러나 똑똑히 들려오는 목소리. 떠올리기도 싫은 과거의 기억이었다. 깊이 묻어 그 꼬리조차 보이지 않도록 해 놓은, 무엇이 목적이었는지 잃어버릴 정도로 심한 방황의 원인이었다.
“아버지는 그 아이만 신경을 써 준다. 나도 그것만은 정말 싫어. 이미 반룡이라 불리며 무림에 후기지수로서 이름을 드높이고 있거늘, 나는 홀대하고 그 아이만 신경 쓰는 것이 나도 솔직히 싫다.”
금단의 상자 속을 손으로 헤치며, 상처만 뒤덮인 바닥을 긁어냈다. 남궁수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흐르고, 남궁천의 손이 덜덜덜 떨렸다.
“하지만 그 이유도 짐작이 가는 바다. 너희들은 아직 모를 수도 있겠구나. 너희도 지학은 넘었을 터이니 그 이유를 알아도 괜찮겠지. 좀 더 귀를 이쪽으로 가까이 대거라. 누군가 들을 수도 있다.”
“수야, 그건 어디서 들은…….”
“그 아이는 주워 온 아이다. 우리가 배려해서 생각해 주지 않으면 그 누가 그 아이를 생각해 주겠느냐. 싫더라도 배려해 주어라. 싫더라도 웃어 주어라. 그것이 우리가 그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족으로서의 도리다.”
남궁수가 눈물과 흙이 묻어 더러워진 얼굴로 웃었다.
“형님, 싫으면 싫다 하십시오. 다 이해해 드리리다.”
다 쓰러진 폐허 같은 표정. 감정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빠져나간 눈빛. 오해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상처는 흉터를 헤집었다.
“나는…….”
아니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저 말은 진실이었다. 명가의 첫 번째 자제로서 결코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변명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믿을 수 있을까? 마음을 닫고 목숨마저 놓아 버린 저 아이에게 자신의 마음이 닿을 수 있을까?
저벅저벅.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또 누가 나타날 것인가. 다 망가져 끊어져 버린 실로 장난치는 인형 놀이에 구경꾼이 와서 무얼 할 것인가.
“선영아.”
“왔군.”
엇갈린 관계에 종결을 맺을 순간이 왔다.
“우웅.”
큰 소리에 잠에서 깬 유선영이 눈을 비비며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아이?”
다 큰 남성 여럿이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는 가운데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가 다가오니 참으로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여쁜 생김새에 비해 발달된 감각에 걸리는 느낌이 참으로 묘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지만 생기가 느껴지질 않았다.
“이리로 와.”
진철이 손짓하자 유선영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곤 총총총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그의 앞에 서서 뒷머리를 그의 배에 대며 편하게 자리에 섰다.
“유선영…….”
남궁수가 침음을 흘렸다. 저 아이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직접 느껴본 바가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헤집고, 감정을 끌어내 과거와 대면시킨다. 자신의 모든 것이 그녀의 눈과 입 앞에서 낱낱이 파헤쳐졌다. 그것은 과거와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 가슴을 꼬챙이로 헤집는 듯한 고통이 되었다.
“…….”
유선영이 눈을 비비던 것을 멈추고 남궁수와 남궁천을 훑었다. 꿰뚫는 시선, 낱낱이 파헤쳐지는 과거, 자신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그 실체가 모두 드러났다.
“슬프기보다는 화가 나는구나.”
그녀가 바라보는 자는 남궁천이었다.
“연민보다도 가슴속에 울분이 남는구나. 잘못은 네가 먼저 했거늘.”
“……뭐?”
유선영의 말에 남궁천의 가슴속이 울렁였다.
“오랜만이구나, 수야. 무공 수련은 잘되고 있는 것 같으냐?”
굵고 진중하니 중심이 잡혀 정심(正心)이 드러난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들었던 목소리다. 아버지, 남궁가주 남궁상현의 목소리였다.
“아니요. 생각했던 만큼의 성취는 없는 것 같아요.”
풀이 죽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말의 내용이었다.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생각했던 대로 모두에게 성취가 있다면 고수는 존재치 않았겠지. 그저 지금처럼 꾸준히 노력을 하면 되는 일이다.”
“잠까……!”
“기다려라.”
저지하려는 남궁수의 입을 가로막고 남궁천이 앞으로 나섰다.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또 하나의 과거. 자물쇠를 열어 오랜 세월 숨겨 왔던 두려움과 마주친다. 그렇기에 남궁천의 발걸음은 떨려도 결코 멈추진 않았다.
“하지만 형님들이 이뤄 낸 성취를 보면 비교가 되는걸요.”
이어받은 것은 남궁천이었다. 자신이 한 말은 아니지만 잘 알고 있었다. 남궁가주전(南宮家主殿) 깊은 곳, 가주의 허락이 없으면 누구도 들지 못하는 남궁가의 비처였다. 천풍검법(天風劍法)을 소성(小成)하여 자랑하려 들른 장소에서 들었던 충격적인 문답이기 때문이다.
“어떻기에 그렇더냐?”
“둘째 형님은 착실하여 배우는 모든 것을 완벽히 이해합니다. 한 동작, 한 동작에 깊은 이해가 있으니 기초가 깊어 갈수록 성취의 속도가 빨라질 거라 하였습니다. 사촌 형님은 약삭빠르고 요령이 있어 무공을 빠르게 배웁니다. 어려운 것을 쉽게 만들고, 불가능하다 보이는 것은 자신의 몸에 맞게 변형시켜 할 수 있게 만듭니다. 무언가를 배우는 데 포기하는 법은 없으니, 장차 그 뛰어난 두뇌가 재치를 발휘할 거라 하더군요.”
“그 아이들이야 예전부터 그랬지. 그 아이들의 재능은 특별하다. 너는 너만의 재능을 찾으면 될 것이야.”
듣고 있던 남궁수가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쥐었다.
“모두 그러려니 할 수 있습니다. 노력으로 따라잡으면 되는 일이지요. 하지만 첫째 형님은 달랐습니다.”
심호흡 한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박동이 거세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결국 땅에 철퍽 주저앉은 남궁천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첫째 형님은 천재입니다.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초식 저편의 깨달음을 취하고, 한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초식을 몸과 머리, 둘 모두가 기억하여 기초가 탄탄하고, 요령을 피우지 않아도 배우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그야말로 천고의 무재입니다.”
“그래, 그렇지. 잘 아는구나. 그 아이는 우리 남궁가의 보배다. 우리 남궁가의 무학을 그 아이만큼 이해한 자가 있었을까 생각이 들 정도지. 천재라는 말은 그 아이만을 위해서 존재한다.”
“하지만 말입니다, 아버지. 저는 가끔 질투가 납니다. 저는 날밤을 새 가며 연습해도 할 수 있을지 모르는 동작을 첫째 형님은 보는 것만으로도 할 수 있게 되어 버립니다. 피땀 흘린 저의 노력은 형님 앞에만 서면 사상누각처럼 손짓 한 번에 흩어져 버립니다.”
“그리 생각할 필요 없다. 같은 형제이니 모르겠다면 배우면 되는 것이 아니겠…….”
“그래서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가끔 느낍니다.”
남궁천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깔끔한 건물, 열려 있던 문지방, 흘러나오는 목소리, 차가워지는 손바닥, 그리고 도주. 그 후에 남은 감정은 지금껏 상처로 남아 많은 연(緣)을 뒤틀어 놓았다.
“저는 인간 같지 않은 형님이 싫습니다.”
유선영의 입이 닫혔다. 남궁천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남궁수의 몸이 굽혀진 채 펴지질 않았다. 후덥지근한 여름밤, 하늘의 장난인 듯 싸늘한 바람이 모두의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잘못은 네가 먼저 하였다.”
한 손으로 얼굴 반쪽을 가린 남궁천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를 싫다 한 것은, 네가 먼저였다.”
지켜 주어야 할 막내, 그 뒷배경 또한 알기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던 여린 아이였다. 마음의 준비조차 하지 못하고 들었던 충격적인 한마디. 그럼에도 비밀을 지키고 마음을 써 주었던 것은 남궁수를 가족이라 인정한 그의 착한 심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제가 싫다 말한 것은 형님이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앙금은 가슴속에 남아 그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아이를 왜 이렇게 돌봐야 하는 걸까? 모두가 싫다 하는데 왜 나만이 좋아해야 하는 걸까? 의심은 계속되고, 남궁수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괴로움은 깊어졌다.
그리고 참지 못한 마음이 폭주했을 때, 남궁수가 그의 말을 들었다. 나쁜 말을 했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더 잘해 주었다. 동생들에게도 신경을 써 주라고 하였다. 그것만으로도 죄책감은 많이 덜해졌다.
하지만 죄책감은 사라져도 죄는 사라지지 않았다. 남궁수가 하였던 짓을, 자신 또한 반복하였던 것이다.
그 상처를 앎에도.
그 결과를 앎에도.
“네가 한 말을 생각해 보아라. 싫다면 내게 와서 말했으면 됐다. 내 배려가 불편하였다면 하지 말라고 하였으면 되었다. 그런데 왜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냐? 왜 아버지에게는 그리 말하고, 내 앞에서는 착한 동생의 모습만 보였던 것이냐!”
“절 배려해 주는 이는 형님뿐이었습니다! 저를 저로 봐주었던 건 형님뿐이었습니다! 형님을 버리고 제가 그 공간에서 어떻게 살아가라 하셨단 말입니까!”
“너는 나라는 사람은 싫었어도 너를 신경 써 주는 사람이 좋았던 것뿐이다! 결국 누구라도 너를 신경 써 주길 바랐던 것뿐이지 않느냐! 나는 네게 겨우 그 정도 존재밖에 되지 않았던 거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결국 손을 쓰게 만들었다. 휘두른 검에 담기는 푸른 진기. 반월의 궤적을 따라 날아간 검기가 남궁수의 바로 앞에서 터지며 모래 먼지를 일으켰다.
눈앞을 지나가는 살기 어린 날카로운 기운. 남궁수가 울컥하여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게 뭐 어떻다고 그럽니까!”
그에 대응하는 남궁수의 공격은 모양 빠지게도 돌팔매질이었다. 검기를 발출할 줄 모르는 이류 고수가 공간을 격하고 남을 공격하는 것은 결국 매개체에 의지하기 마련이었다. 거기에 아직 진철에게서 받은 상처를 완벽히 치유하지 못한 남궁수의 완력은 일반인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남궁천의 손짓 한 번에 돌멩이는 가루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