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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검인 1권(19화)
4장 ― 자매의 입장(3)


“무슨 소리냐?”
방금 전 진철이 하려다가 말았던 사정 설명이 이와 관계된 말일 것이다. 단세명이 물어보자 진철이 친절히 답해 주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느긋하게 한 자, 한 자 말하였다.
“별거 아닌 이야기요. 그저 특별했던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중 첫째가…….”
“그 입 다물어──!!”
차가운 마음을 가졌다고 말해지는 사람이라도 건드리면 안 될 영역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이 가슴속에 묻어 둔 고유의 상처. 눈앞에서 까발려지는 진실은 그 흉터를 헤집었다. 유선아가 참지 못하고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어 내쳤다.
“이럴 줄 알았소.”
진철은 예상했다는 듯 손을 들어 검을 막았다.
째애앵!
피육으로 된 손과 철로 된 칼이 부딪쳤음에도 울리는 소리는 마치 병장기가 부딪친 소리와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것이라는 정도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유선아라도 알고 있었다. 검의 날카로움이야 무인이 가장 잘 아는 것. 검을 휘두름에도 당황치 않고 손을 내밀었다면 무언가 믿는 수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합!”
반탄력으로 튕겨 난 검을 반원을 그리며 회수하고 발을 굴렀다. 물러나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무공. 유선아의 검이 나비처럼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산동유가의 검공, 호접검무(胡蝶劍舞)였다.
“호접검무 일초, 향화비(向花飛).”
“그걸 어떻게!”
말한 것은 유선아가 아닌 단세명이었다.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놀란 유선아를 비웃은 진철이 다리를 살짝 벌려 마보를 취하고, 오른손으로는 머리를 가릴 정도의 커다란 원을 그렸다.
파라락! 챙!
흩날리는 장포 자락. 얼굴 전체를 가릴 만큼 넓게 펼쳐진 장포가 검과 맞부딪쳐 쇳소리를 울렸다.
“그 무공, 설마 반선수?!”
놀랄 일이었다. 숭검단 안에는 구파의 일존, 소림의 인물 또한 있었다. 몇 번 겨루어 보았고, 같이 임무를 수행해 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소림의 무공은 불가의 것이기에 진기의 움직임이 독특하고 특유의 장중한 기세가 존재했다. 결코 착각할 수 없는 소림만의 독특함. 이 사람은 얼마나 자신을 놀라게 할 것인가. 유선아는 상대가 결코 만만히 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검첨을 중단에 놓는 기수식을 취했다.
“글쎄.”
진철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이 삐었나 보오.”
“농을 하자는 겁니까!”
검과 손이 얽혀 들었다. 아까와는 달리 진심으로 덤비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듯 유선아의 검공은 전과 달리 힘이 넘치고 정교했다. 여인을 위한 검공 특유의 유함과 정교함이 진철의 빈틈을 파고들고, 실전으로 단련된 백전 경험의 소산이 그녀로 하여금 어느 남자 무인 못지않게 장쾌한 검도를 펼쳐 낼 수 있게 했다.
쐐애액! 챙! 쩌어엉!
“제법.”
호접검무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삼초 산분행(散粉行)에서 이어진 것은 사초 화화경(花華景)이 아니라 백검문(白劍門)의 백검공(白劍功)이었다. 숭검단 안에서의 무공 교류야 당연한 일. 그것도 부단주급 정도 되는 사람임에야 얼마간 수련하면 웬만한 문파의 문도들보다 높은 수준의 무공을 펼쳐 낼 수 있었다. 그것을 언제 어떻게 펼쳐 낼 것인가는 자신의 결정. 그리고 유선아의 무재는 그 판단을 포함한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언제까지 버티는지 보겠어요.”
살벌하게 한마디 던지곤 몸을 탄력적으로 튕기며 단숨에 다가가 검을 위로 찔렀다. 탄신보(彈身步). 이번엔 정궁문(貞弓門)의 신법이었다.
핏!
진철이 재빨리 몸을 뒤로 젖히자 그 순간에 살짝 앞으로 꺾인 검신이 허공에 붕 뜬 앞머리 끝자락을 베고 지나갔다. 순간순간의 기지가 대단했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흡!”
쾅!
이어서 봉으로 찍어 내듯 검을 내려쳤다. 겉으로 그 빛이 드러날 정도로 모여든 가공할 진기. 푸른빛 기운이 땅과 부딪치자 폭탄이 터진 듯 파편이 비산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통하지 않았다.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모습으로 멀쩡히 서 있는 진철. 그가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번엔 폭뢰문(爆雷門)의 낙뢰검(落雷劍)인가? 확실히 아는 것은 많은 것 같소.”
“그걸 모두 알아보는 당신 또한 아는 건 많은가 보네요.”
“조금 사정이 있어서.”
사실 정작 대단한 것은 유선아가 아닌 진철이었다. 유선아야 숭검단 안에서 무공의 교류로 인해 많은 무공을 보고 배웠다지만, 평범한 무인이 그 많은 무공을 견식하기란 요원한 일이다. 그것도 진철처럼 각 무공의 특징을 잘 알고 어떻게 피하며 파훼시켜야 할지 알기 위해선 그 무공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가 필요했다. 범상치는 않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우리 선영이가 많이 불편해하는 것 같은데, 그만 끝내도 되겠소?”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선영. 단세명이 진기의 여파와 싸움의 파편이 그녀에게 위해가 되지 않도록 막아서고 있다고는 하지만, 무공 하나 배우지 못한 그녀가 버티기엔 위험한 곳이었다. 진철의 말에 유선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말은 저와의 싸움을 금방이라도 끝낼 수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제대로 들었소. 얼마나 컸는지 좀 보려고 했다만, 아직 미흡하오.”
“건방진…….”
숭검단 부단주가 된 이후로 이런 소리를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문겸익밖에 없었다. 이름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자가 어찌 이런 방자한 소리를 하는가.
“믿지 못하겠다면 보여 드리겠소.”
촤악!
무언가 펼쳐지는 소리가 들렸다. 장포 소리? 아니, 달랐다. 늘어뜨린 두 손에 쫙 펴진 열 손가락. 보이진 않지만 무언가가 있었다. 육감으로 느껴지는 위험이었다.
“발.”
“……!”
진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느껴지는 서늘함에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유선아가 있던 자리의 지면에 생겨나는 작은 구멍. 유선아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병장기가 부상했다 사라져 갔다. 그리고 남은 것은 하나.
“은사!”
“잘 맞췄소.”
집중하자 그제야 보일 정도로 투명한 물건이었다. 절정을 넘어 한 단계 위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은 황권조차 곧바로는 알아채지 못한 무기. 그것을 단 한 번에 맞춘 유선아의 머리에 감탄해 마지않을 수 없었다.
“은사라면…….”
몇 번 대결해 본 경험이 있긴 했다. 은사를 다루는 무인은 드물었다. 숭검단은 검을 숭상하는 단체다. 정면에서 대결하는, 정도를 지향하는 순수한 무력 단체. 거기에 암기와 다름없이 살수들이나 다루는 은사이기에 그것을 다루는 무인은 드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드물기는 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 명. 숭검단 오조에 속한 은수검귀(銀手劍鬼) 장량이라는 자가 있었다. 은수란 그의 은사가 손안에서 춤출 때를 표현한 별호. 별호에 들어갈 정도이므로 은사를 다루는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은사란 본디 실. 쉽게 끊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세밀한 조종을 통해 오히려 검과 같은 무기를 옭아맬 수도 있고, 그 길이가 길고 수가 상상치 못할 정도로 많으므로 동시다발적인 공격이 가능했다. 유선아는 장량과의 비무를 통해 은사를 다루는 방식에 따라 상대하는 방법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까다로운 무기였다.
“발.”
“손목.”
“어깨.”
말이 끝남과 동시에 느껴지는 위협. 오른발을 들며 검을 꺾어 은사를 잘라내고, 빙글 돌아 공격을 피해 냈다. 말한 방향을 향해 정직하게 들어오는 공격이었다.
“그리 정직하게 공격하여 뭐하자는 셈이죠?”
은사의 속도가 빠르지만 공격의 방향을 알려 준다면 피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어째서일까? 진철의 속셈을 알아내려는 유선아였다.
“글쎄, 발이나 조심하지 그러시오?”
“큭!”
진철의 말에 유선아가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그러나 공격은 들어오지 않았다.
‘속았다?’
네 번이나 이어진 정직한 공격. 유선아 자신의 감이 아니라 진철의 말을 믿게 만들기 위한 포석이었다. 공중은 피하거나 공격을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공간이다. 검을 중단에 세운 유선아가 공격을 막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취했지만, 진철은 그저 발을 한 걸음 옮길 뿐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폭발.
퍼엉!
“윽!”
은사가 아니었다. 거리를 격하여 발아래에서 터져 나오는 가공할 기공. 깨달음은 물론이요, 내공의 양에 자신이 없다면 시도조차 하지 못할 공격 방법. 생각지 못한 공격이 효과가 있었는지 유선아는 방어하지 못하고 그대로 파편을 얻어맞았다.
“아직도 더 할 생각이 있소?”
호신(護身)을 위한 기운을 끌어 올릴 생각도 못한, 기묘한 공격이었다. 제대로 얻어맞은 유선아의 입술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나와 턱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겨우 이 정도로 쓰러지진 않아요.”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이인자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는데 이 정도로 물러날까. 마두와의 싸움에서 팔을 잘릴 뻔한 적도 있었고, 누군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이 베어졌을 순간도 있었다. 눈을 감으면 그 너머엔 언제나 죽음이 있었다. 그리고 고통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삶의 증거를 참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소? 본인이 벌주를 마시겠다는데, 뭐라 할 이유는 없겠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진철.
“자신이 자처한 일에 책임은 질 수 있을 거라 믿소.”
“자신감이 넘치는군요.”
매서운 유선아의 눈빛에 맞서 진철은 손을 한 번 털었다. 은사가 사라지고 나타난 것은 단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진심으로 덤빌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다. 적당히 행동 불능이 될 정도까지만 상대해 주면 더 이상 덤비지 못할 테지. 무엇보다 그렇게 하면 조금은 이 불쾌한 감정이 편해질지도 몰랐다.
“가겠소.”
터엉!
무겁게 밟아 낸 한 걸음에 진철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 유선아의 앞에 다다라 두 단검을 정수리를 노리고 내려쳤다.
쩌엉!
“크으!”
움직임이 빨랐다. 거기에 무거웠다. 공격이 막혔지만, 짜인 것처럼 이어지는 연계였다. 빛살처럼 움직이는 단검. 역수로 잡아낸 오른손의 단검이 가슴을 노리고, 왼손의 단검은 검날을 타고 내려가며 손목을 노렸다.
단검은 보통 필살의 일격을 위해 사혈을 노리고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단검술은 사이하고, 상리를 벗어난 기이한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나 진철의 단검술은 달랐다. 단검을 쓴다기보다는 길이가 조금 짧은 검을 사용하는 것같이 움직였다.
타탁! 빠악!
다가오는 보법이 독특하다 싶더니, 역시나 빈틈이 생긴 순간 빠르게 각법으로 변화했다. 정강이를 얻어맞은 유선아가 재빨리 왼손으로 장력을 발출했지만, 진철의 몸은 이미 그녀의 뒤로 향하고 있었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공격의 가능성을 담고 있고, 방어와 회피에도 일정 정도 이상의 신경을 쓰고 있었다. 강호 초출이나 다름없는 자들은 결코 사용하지 못할 진결이었다. 수십 년 세월을 전장에서 보낸 사람들이나 행할 수 있는 경험의 소산이었다.
“음?”
잠자코 경력의 여파나 해소하며 대결을 구경하고 있던 단세명이 주변을 경계하던 중 다가오는 기운이 느껴졌다. 다가오는 자는 한 명. 그러나 한 명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이글거리는 기세가 무지막지했다.
누구일까, 뒤를 돌아본 단세명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문 선……!”
후웅!
그러나 상대방은 단세명에게 답하지 않고 바람처럼 그를 스쳐 지나갔다.
쩌어어엉!
“흑!”
왼발을 축으로 빙글 돌아 단검을 막아 냈지만, 부족했다. 공력을 불어넣은 일격에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파 왔다. 거기에다 발이 고정되지 않았던 탓에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꼬인 발로 뒤로 물러난 유선아. 진철이 끝났다는 듯 차가운 눈으로 유선아를 바라보며 단검을 휘둘렀다.
“거기까지!”
콰아아앙!
“크윽!”
“꺄!”
빛살처럼 다가온 인영에 진철이 단검의 방향을 급히 바꿨지만, 상대방의 공격이 만만치 않았다. 맞부딪친 단검이 부서지고, 부딪친 기운의 여파가 일진광풍을 일으켜 진철과 유선아를 날려 보냈다.
전보다 길어진 수염. 그러나 마치 시간이 지나지 않는 것처럼 똑같은 얼굴. 두 손에 들린 검은 옅은 청색과 홍색으로 대비되었다. 그 자체로서 모두의 존경을 받는 절세의 무인, 숭검단 단주 기문쌍검 문겸익이었다.
“그 이상의 소란은 용납지 않겠다. 선아, 너 또한 마찬가지다.”
좌검으로는 진철을, 우검으로는 유선아를 겨누며 중간에 선 문겸익. 무의식중에 피어오르는 기세가 그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만들었다.
“죽일 생각까진 없었소. 그저 조금 분수를 알게 하고 싶었을 뿐.”
진철이 단검을 품에 집어넣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저항의 의지가 없다는 표현이었다.
까득.
유선아는 진철의 도발에 이빨을 갈았지만, 재차 덤벼들진 않았다. 무인으로서 누구보다 존경하는 문겸익의 앞이었다. 지금까지의 행동 또한 숭검단 부단주로서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으니, 이제는 자중할 때였다.
“개선식이 끝나자마자 어디로 가나 했더니,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있었느냐?”
문겸익의 서슬 퍼런 모습에 유선아가 슬쩍 시선을 피하였다.
“저쪽에서 저에게 살기를 흘렸기에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왔습니다.”
“살기를?”
문겸익이 고개를 갸웃했다. 진철은 유선영의 호위무사다. 그가 누구보다 유선영을 위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진철의 태도와 행동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유선영의 언니인 유선아에게 살기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사실이오만, 선영이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생각은 없소. 그때야 자제하지 못하고 그만 겉으로 생각이 드러났을 뿐이니, 이젠 그럴 일 없을 것이오.”
“알았네. 넘어가 줄 터이니 사정은 나중에 둘이서 풀게나. 다만, 지금처럼 목숨을 노리고 서로 싸운다면 둘 모두 징계가 있을 줄 알도록.”
강호의 인연과 원한이란 당사자가 아닌 이상 깊이 관계되었다간 오히려 꼬이기 마련이었다. 자신들의 일은 자신들이 풀어야 하는 법. 으름장을 놓은 문겸익이 진정이 된 듯하자 본론을 꺼냈다.
“숭검단 부단주 유선아, 명령이 하달되었다. 속히 부대로 복귀하도록.”
“알겠습니다.”
“개선식이 끝나자마자 일이라니?”
사태를 관망하던 단세명이 물었다.
“개선식이 끝난 직후이니만큼 무림맹도 숭검단 무인들을 일주일 정도 쉬게 만들 예정이었다만,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예상 밖의 일이 벌어져 어쩔 수 없었네. 마침 잘됐군. 자네들도 어차피 부를 터였으니 같이 오게.”
“저희들도 말입니까?”
숭검단의 일이 아니란 말인가. 문겸익이 어두운 안색으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이 습격당했네.”
문겸익의 한마디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