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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이미 시작된 이상 멈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 증식이 이루어진다면 새로 생겨나는 세포들은 암세포나 다름없기에 제어할 필요성을 느꼈다.
황충길은 자신이 가지고 온 다음 단계의 생체활성물질을 미이라의 몸에 투여했다.
미국에 있을 때 제임스가 보내온 피부 조직을 통해 반응을 보인 여러 가지 생체활성물질 중 자신의 의도대로 조절이 용이한 것이었다.
생체활성물질이 담긴 은빛으로 빛나는 주먹 크기 정도의 용기에 꺼낸 황충길은 반원형의 작은 기계에 그것을 넣었다.
미이라의 생체 내부로 약물 등을 만들기 위해 특별하게 고안된 기계였다.
작동 버튼을 누르자 천정에 가느다란 스테인레스 막대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스테인레스 막대 끝에는 주사기 형태의 물체가 달려 있었는데 가느다란 바늘이 돋아나 있었다.
주사 형태로 생체활성물질을 동시에 투여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였다.
‘그동안 발견된 것들을 토대로 만들었으니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은 정확한 위치를 찾자.’
생체활성물질이 투입될 정확한 위치를 찾아야 하는 터라 다음 작업을 진행했다.
미세한 열을 감지해야 하는 터라 실험실의 온도를 낮출 필요가 있기에 황충길은 먼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에어콘을 최대한 가동해 실내의 온도로 빠르게 떨어트렸다.
영하로 떨어진 온도를 확인한 그는 자신이 개발한 열영상감지기를 작동시켰다.
감지기에 달린 모니터는 어둠뿐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안 있어 온통 검은색밖에 보이지 않는 화면에 깨알만 한 미세한 점이 나타났다.
살아 있다는 표시이자 생명 반응인 극미량의 열원이 감지된 것이다.
‘삼단전이라 일컬어지는 곳과 사지에 각기 열원이 나타나다니 특이하군.’
양미간, 명치와 하복부 그리고 양손바닥과 양발바닥에 나타난 열원을 바라보는 황충길의 눈동자에 의혹이 가득했다.
‘특이한 무예를 익힌 것인가? 아마도 그것이 아직까지 이자의 숨을 붙들어 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에서 이 정도까지 생명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을 보면 감지된 열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지만 세심히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발견된 열원이 꺼지기라도 한다면 영영 죽음의 강을 건널 터라 빠르게 기계를 조작했다.
기계 조작이 끝나자 좌표점이 설정됐고 스테인레스 막대들은 열원과 같은 수만 남았다.
그동안 무수한 실험을 거쳐 완성도를 높였지만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라 조금은 떨면서 버튼을 눌렀다.
꾹!
천천히 좌표를 향해 주사기들이 움직였다.
열원을 향해 다가간 주사기가 피부 속으로 파고들었고, 동시에 새로운 생체활성물집이 주입되기 시작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처음 수조에 넣었던 것과는 다른 형태로 수천 배로 농축된 생체활성물질이 투입되자 깨알만 한 열원들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일단은 성공이다. 이제부터는 제어가 되느냐가 문제다.’
점차 퍼져 나가는 열원이 전신을 가득 메워야 세포의 정상 증식 여부를 확인할 수 있기에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마침내 전신으로 열원이 가득차자 모니터 화면이 환하게 밝아졌다.
황충길은 재빠르게 피부 세포를 채취해 현미경이 있는 곳으로 가서 관찰을 시작했다.
‘다, 다행이다. 세포가 정상적으로 증식되고 있다.’
생체활성물질이 성공적으로 세포를 제어하고 있었기에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했다. 급격한 변화는 제어하기 어려웠기에 지금부터 투입량을 조절하며 지켜봐야 할 때였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한기가 들 정도로 실험실 안이 추웠지만 황충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내 할 일은 다 했다. 지금부터는 상태에 따라 투입량을 자동으로 조절하기만 하면 된다.’
황충길은 미세하지만 조금씩 변해 가고 있는 미이라는 한 번 바라본 뒤 조용히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한 상태였기에 이제부터는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박사님!”
통제실에서 언제 나왔는지 제임스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성공했네. 이제부터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네.”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생명의 신비가 어떻게 작용할지 예측이 되지 않아 뭐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2개월은 지켜봐야 할 것 같네.”
“그렇군요.”
“후후후, 금방 깨어날 것이라 생각했구먼.”
“아닙니다.”
실망감이 스치는 모습을 보며 한마디하자 제임스가 이내 정색을 했다.
“이 정도만 해도 굉장한 성공이네. 아마도 내 생각에는 정보만 얻지는 않을 듯하니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게.”
“고생하셨습니다. 박사님.”
“난 계속 지켜보도록 할 테니, 자네는 이만 가 보게.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그들이 의심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찾는다는 연락이 와서 가 봐야 했습니다.”
“그래, 아직은 자네의 정체가 밝혀져서는 안 되니 어서 가게.”
“그럼 가 보겠습니다.”
제임스가 곧장 작별 인사를 하고 기지를 떠났다.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하기에 의혹을 살 필요는 없었다.
제임스가 서울로 돌아가고 난 후 황충길은 혼자 남아 치료를 계속 진행했다.
생체활성물질의 투여는 상당히 오랜 시간 진행되었다. 급속히 진행할 경우 쇼크사할 수도 있기에 미이라의 상태를 봐 가며 속도를 가감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초조하고 답답한 일이었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대로 황충길은 끈기를 가지고 치료 작업을 했다.
그렇게 2개월이 지났을 무렵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던 미이라의 몸에서 놀라운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바이탈사인이 조금씩 상승하더니 점차 정상인의 범주로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심장이 힘차게 뛰는 것을 확인한 순간 황충길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런 환호성도 잠시, 황충길은 다시 인고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미이라의 상태가 전처럼 악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상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생명을 잃은 상태는 아니었기에 황충길은 그동안 해 왔던 일을 다시 반복해야 했다.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하며 상태를 회복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인고의 시간이 보내 준 보답으로 마침내 자신에게 기다리던 시간이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 * *
“박사님!”
어떻게 차를 몰고 왔는지도 모르게 서울서부터 부리나케 달려온 제임스는 실험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황충길을 불렀다.
세포 증식이 이루어지고 난 뒤 6개월이 지난 오늘!
모든 바이탈사인이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전화를 받은 제임스가 모든 일을 뒤로하고 곧장 달려온 것이다.
“어서 오게.”
“뇌파 반응이 있다는 것이 정말입니까?”
“그렇네. 바이탈사인이 이제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오늘 드디어 정상적인 뇌파가 관측됐네. 머지않아 정신을 차릴 것이 분명하네.”
한 번의 고비를 넘기도 다시 정상인과 가까운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한 달 전이었지만 바이탈사인이 워낙 불규칙하고 뇌파가 측정되지 않았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고심을 해 왔는데 모든 것이 정상이라니 제임스는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드디어 비밀의 문을 들여다보게 해 줄 열쇠가 깨어나는군요.”
“깨어나 봐야 알겠지만 기억이 없을 수도 있으니 너무 기대는 하지 말게, 제임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한 것인지 황충길은 제임스의 기대감을 꺾었다.
“후후후, 박사님! 전 저자의 생존 본능을 믿습니다. 저런 상태에서도 생명을 유지했다면 분명 기억도 유지하고 있을 겁니다. 미래의 기억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황충길도 제임스의 기대처럼 되기를 바라 마지않았다.
하지만 뭐든지 만약의 경우라는 것이 있는 것이었다.
완전히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다시 부활한 존재다. 어떤 상태인지는 깨어나 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박사님, 괜찮으시다면 저도 오늘부터 이곳에서 지켜보겠습니다.”
“바쁠 텐데 이곳에 있어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그동안 잘 감추어 왔지만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기에 염려가 가득했다.
“15년 만에 처음 휴가를 냈습니다. 앞으로 나흘간은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으음, 잘됐군. 뇌파의 상태로 봐서는 적어도 이틀 내에는 깨어날 테니까 말이야. 자네가 발견한 사람이니 깨어나는 것도 지켜봐야겠지.”
“그럼요. 지켜봐야지요.”
제임스는 이제는 정상인으로 돌아온 미이라를 보며 눈빛을 빛냈다.
* * *
시야가 희미했다. 깨어나기는 했지만 눈꺼풀 너머로 비치는 전등 불빛에 눈이 부신 듯 가늘게 눈을 뜬 차훈은 우선 주변부터 살폈다.
전쟁에 참여하면서 얻은 조심스러움으로 인한 행동이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서늘한 기운으로 봐서는 지하의 어느 한 공간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으음, 구조된 건가? 다행이 죽지는 않은 것 같구나.’
코를 자극하는 냄새 때문에 정신이 없었지만 양자가속기 안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를 했다.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현재의 의학기술이라면 충분히 회복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자 여유가 생겼다.
‘일단 몸 상태부터 살피자.’
어떤 상황에서든 몸의 이상 여부를 체크하는 것이 생활화된 탓에 부상 정도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시각은 물론 청각까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힘을 주어 봤지만 몸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죽다 살아났으니 이 정도면 양호한 거다. 어찌 되었든 살아 있는 건 확실하니까.’
조금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기뻤다.
‘그나마 후각은 조금 괜찮은 것 같으니 한 번 살펴보자.’
대부분의 능력을 감추고 군에서 나왔지만 감각만은 살려 두었다. 혹시나 그마저 들킬까 염려되어 죽음이 닥칠 정도의 위험한 순간에만 발동되도록 했다.
워낙 큰 충격이라 대부분의 감각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후각은 온전한 상태다.
사람은 대부분 시각 정보에 의지한다. 청각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시각이 우선이다. 후각은 대부분 무시된다. 냄새를 통해 정보를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훈은 달랐다.
후각을 단련하기 위해 특별한 수련을 했다. 땀 냄새로 상대방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물체들을 파악할 수 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각자 고유의 냄새를 가지기 때문이다.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가 느껴졌다. 개방하는 순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강력한 향기다.
‘크으, 지독하군, 구성된 성분으로 보면 에틸알코올 같은데, 도대체 여긴 어디지?’
후각으로 분석해 낸 화학식이 특이했다. 화학식의 특성상 해가 되는 독성 물질이라 오래전부터 사용하지 않고 있는 에틸알코올이었다.
간혹 야전에서 치료용 앰플이 없을 때 소독용으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몇 가지 가공을 거치면 특수한 독성 물질이 되는 터라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 대기 중에 퍼져 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군에서만, 그것도 특별할 때만 사용되는 물질의 냄새가 난다는 사실에 의구심이 들었다.
‘어디인지 모르지만 조심해야 한다. 놈들이 내가 무엇인가를 숨겼다는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르니까.’
군에서 사용하는 물질을 확인한 이상 군과 연관된 곳이거나 적어도 그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 틀림없는 이상 최대한 조심을 해야 했다.
‘아직은 의식이 회복됐다는 것을 알리지 않는 편이 좋다.’
눈꺼풀 위로 광원이 잡히기 시작했다. 시야가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그렇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몸을 회복하는 것이 먼저다. 우선 감각부터 회복하자.’
정보 없이 움직이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근육이나 장기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것보다는 감각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천천히 감각 회복에 집중했다.
‘으으으, 아프군. 하지만 괜찮다. 통증도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서서히 회복하는 과정에서 극통이 느껴졌다. 안구와 고막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이 정도의 고통쯤이나 적진에 침투해 얻은 부상에 비해서는 그저 겉에 난 상처에 지나지 않았다.
혹시나 누군가 알아볼까 봐 전신을 경직시킨 탓인지 감각을 회복하는 과정은 하루 종일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차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거의 1시간에 걸쳐 1밀리미터도 안 되게 떠진 실눈이라 관찰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자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했다.
‘으음…….’
광원이 들어오면 또다시 안구에 뻐근한 것이 통증이 있었지만 살아 있음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기뻤다.
빛에 점차 적응이 되고 있는지 시야가 명확해지며 실험실 안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 저런 고물들이…….’
눈에 보이는 각종 기계들은 100여 년 전에 이미 고물로 취급되던 것들이었다. 오래된 박물관에나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것들로 현재에는 전혀 쓰이지 않는 것들이 눈에 보인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으음, 양자가속기 통제실 안쪽에 나도 모르는 응급실이 마련되어 있었나? 상황이 급작해 어쩌면 메디컬센터에 보낼 시간이 없었는지도 모르겠군.’
양자가속기가 구식이라 응급실에 마련된 의료장비들도 오래 전에 비치된 것일 확률이 높았다. 갑자기 터진 사고라 아마도 응급처치를 하기 위해 사용된 것 같았다.
장비의 신뢰성을 확보할 수 없는 이상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스스로 정신을 차린 터라 죽을 염려는 없기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나저나 이번 시험은 이제 물 건너간 것 같구나. 이렇게 큰 사고까지 당했는데… 설마, 재시험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겠지.’
일어서기도 힘든 형편이니 이번에 있는 시험을 치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지시한 일을 하느라 사고를 당했으니 재시험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피곤하군. 어디인지 아직 확실치 않지만 아직은 치료를 더 받아야 하는 것 같으니 조금 더 쉬자. 어찌 된 일인지 그 다음에 알아봐도 늦지 않을 것이다.’
잠깐 살펴본 것뿐이었는데도 전신을 나른하게 하는 무기력감이 몰려들었다.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감각을 일깨운 탓이 컸다.
이런 상태에서는 잠을 자며 회복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에 잠을 청했다.
가늘게 열린 시야를 차단하자 스르르 잠이 밀려들었다.
감각을 일깨운 후 신경을 차단해서인지 통증은 없었다. 학교 생활과 병행해 학교에 비치된 기계들을 고치는 고단한 생활 덕분인지 한참을 달게 잘 수 있었다.
의식은 잠에 빠져들었지만 육체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오랜만에 취하는 주인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주변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동안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져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후 차훈이 깨어난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가는 시간이었다.
‘으음, 아직도 그대로인가?’
변한 것은 없었다. 세상이 고요로 잠겨 있는 시간이었지만 실험실 안은 천정에 달린 전등으로 불빛으로 인해 무척이나 밝았다.
‘아직도 냄새가 지독하군. 그래도 조금 나아진 것 같구나.’
코끝을 아리는 알코올 냄새가 껄끄러웠다. 대부분의 감각이 회복됐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이곳이 어디인지부터 알아보자. 군이 보유한 특수 시설이라면 정말 곤란하니까.’
정신을 집중했다.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나머지 감각이 주변을 훑었다.
차훈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미세하게 머물고 있는 누군가의 흔적들, 인위적으로 순환되고 있는 공기의 흐름들이 폐쇄된 공간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있는 곳과 조금 떨어진 별도의 공간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의 기운이 느껴졌다.
‘누구지? 그리고 도대체 이곳은…….’
어째서 대기의 기운이 차가운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관찰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을 인지할 수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되겠다. 다른 감각만으로는 확인하기 곤란하니…….’
천천히 실눈을 떴다. 30여 분이 넘는 시간 동안 느릿한 동작으로 눈을 뜨고 주변을 관찰했다.
응급실로 생각했던 곳과 연결된 공간이 보였다. 커다란 반투명 유리로 단절된 곳이지만 누군가 있었다.
군에서 배운 능력 중 하나로 기감을 사용할 줄 아는 차훈은 벽 너머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누군가 자신을 관찰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누가 날 감시하는 것이지? 혹시, 내가 저지른 일을 알아낸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군 관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군에 있을 당시 전투를 겪으며 알아낸 사실 중 몇 가지를 상부에 알리지 않았다. 누설될 경우 대부분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는 비밀들이다.
만약 그 비밀들을 노리고 있다면 이렇게 누워 있을 때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깨어나지 않은 척하고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직은 내 상태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아무것도 예측이 되지 않는 이상 확실한 것을 알게 되기 전까지 자신이 깨어났음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기에 일단은 자신의 상태를 숨기고 지켜보는 것이 나았다.
‘우선 계측기들이 내 상태를 파악하게 놔둬서는 안 된다. 장비들이 구형인 것을 보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깨어난 것을 알리지 않기 위해 체외로 흘러나가는 파장의 상태를 유지시키기로 했다. 최신 장비라면 단번에 들통 날 일이지만 주변에 있는 장비만이라면 자신에 대해 알아내는 것은 턱도 없는 일이었다.
차훈은 심신을 안정시키며 파장을 조절해 바이탈지수를 고정시키기 시작했다. 자율신경계를 안정시키는 것은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기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됐다. 이 정도면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다.’
신경계를 차단하고 바이탈 지수를 완전히 고정했다. 이 정도라면 가슴에 칼이 파고들더라도 변하지 않을 것이기에 자신의 상태를 알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하니까, 지금부터는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몸을 회복해야 한다.’
차훈은 본격적으로 몸을 회복해 나가기로 했다.
지금 자신의 치료에 사용되고 있는 물질이 상당한 효과가 있기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 치유력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라면 시간을 상당히 단축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명상을 통해 생체활성물질을 요소요소에 보냈다.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어느 한 쪽만 회복된다고 해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니 조화를 이루는 데 주력했다.
몸을 회복하는 동안 차훈은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기감을 뿌려 주변을 살피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라지면 가늘게 눈만 떠서 상황을 확인했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양자가속기가 있던 곳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탈출해야 할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정보 수집 과정이었다.
정보를 수집하는 동안 자신을 치료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한 번도 들키지 않았다.
일인 특전팀으로 임무에 투입되는 동안 몇 번 포로로 잡힌 적도 있었다.
임무 수행을 위해 대부분이 일부러 잡히는 경우라 상대에게 자신의 상태를 들키지 않게 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첨단 계측 장비까지 속이며 일체 다른 행동은 하지 않고 죽은 듯이 누워 있으니 황충길과 제임스는 차훈이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차훈은 군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군부와 관계된 자들은 보이지 않고 행동 양식이나 말투가 정보기관원으로 추측되는 자를 볼 수 있어서였다.
그렇지만 이상한 점이 없지 않았다. 정보기관이 사용하기에는 자신을 치료하는 곳에 의문이 들었다.
차훈의 의문을 자극하는 것은 자신을 치료하는 기계들이 옛날에 사용하던 구형이지만 금방 나온 신품처럼 새것이라는 사실이었다.